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7:22:41

법정(삼국지)


촉서(蜀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d0f4d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181818,#e5e5e5
1권 「유이목전(劉二牧傳)」 2권 「선주전(先主傳)」 3권 「후주전(後主傳)」
유언 · 유장 유비 유선
4권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5권 「제갈량전(諸葛亮傳)」 6권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감부인 · 목황후 · 경애황후 · 장황후 ·
유영 · 유리 · 유선(璿)
제갈량 , 제갈교 제갈첨 동궐 번건, 관우 , 관흥, · 장비 , 장포, · 마초 , 마대, · 황충 ·
조운 , 조통 조광,
7권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8권 「허미손간이진전(許糜孫簡伊秦傳)」 9권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방통 , 방굉 방림, · 법정 허정 · 미축 · 손건 · 간옹 · 이적 · 진밀 동화 · 유파 · 마량 , 마속, · 진진 ·
동윤 , 진지, · 여예
10권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11권 「곽왕상장양비전(霍王向張楊費傳)」 12권 「두주두허맹래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來尹李譙郤傳)」
유봉 , 맹달, · 팽양 · 요립 · 이엄 · 유염 · 위연 · 양의 곽준 , 곽익 나헌, · 왕련 · 상랑 , 상총, · 장예 ·
양홍 , 하지, · 비시
두미 · 주군 · 두경 · 허자 · 맹광 · 내민 ·
윤묵 · 이선 · 초주 , 초수, · 극정
13권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14권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15권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황권 · 이회 · 여개 · 마충 · 왕평 , 구부, · 장억 장완 , 장빈 장현 유민, · 비의 · 강유 등지 · 장익 · 종예 , 요화, · 양희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관련 틀: }}}
{{{#!wiki style="margin: -35px -0px -10px"
<tablebordercolor=#008000> }}} }}}}}}}}}
익후 | 翼侯
法正 | 법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aZheng.jpg
시호 (翼)[1]
작위 관내후(關內侯)[2]
최종직위 상서령(尙書令)
(嬀)
(法)
(正)
효직(孝直)
생몰 기간 176년 ~ 220년 (향년 44세)
고향 사례(司隸) 부풍군(扶風郡) 미현(郿縣)
조부 법진(法眞)
아버지 법연(法衍)
[clearfix]

1. 개요

익후(법정의 시호)는 훌륭한 책략을 쓰고 세상의 흥망성쇠를 예측했다. 주상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깨달았다.
《계한보신찬》
후한 말의 인물이자 유장, 유비 휘하의 책사. 사례 부풍군 미현 사람으로서 는 효직(孝直), 시호는 익후(翼侯)다. 조부는 법진(法眞), 아버지는 법연(法衍), 아들은 법막(法邈).

방통과 더불어 유비가 촉을 점령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천재 전략가이다. 방통이 기초적인 도안을 그리고 유비를 설득시켰다면, 법정은 이 도안을 기반삼아 자신의 책략을 더하여 한중에서 조조를 패배시킬 때까지 유비 세력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책사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제갈량, 방통과 달리 거칠고 굳센 성정 때문에 덕이 부족하다며 비판받았으나 오히려 그러한 성정 덕분에 주군인 유비에게 출사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방통의 죽음 이후로는 촉군 내에서 유일하게 유비를 제어할 수 있던 인물이었다.

2. 생애

후한서》〈법웅전〉에 따르면 증조부는 전국시대 제나라 양왕(襄王)의 후손인 법웅. 《삼복결록주》에 따르면 조부는 법진, 아버지는 법연.

2.1. 유장 휘하

196년, 천하에 기근이 들자 법정은 동향인 맹달과 함께 으로 들어가 유장에게 의탁했다. 오랜 뒤에 광한군 신도현의 현령이 되고 그 뒤 군의교위에 임명되었다. 중하게 임용되지 못한데다 또한 그의 주읍 사람으로 함께 타향에서 손님 노릇하는 자들에 의해 바른 품행이 없다고 비방받으니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익주별가 장송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2.2. 유비의 입촉

장송 형주에서 조조을 만나고 돌아온 뒤 유장에게 조조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결탁하도록 권했다. 유장이 말했다.
누가 사자로 갈 만하오?
이에 장송이 법정을 천거했는데 법정이 사양했으나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유봉전>에 따르면 당초 유장은 부풍 맹달을 법정의 부장으로 파견하고, 각기 병사 2천 명을 인솔하게 하고 강릉에 남아 주둔하도록 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재주있고 호탕한 인물로 오라 비들의 풍모가 있었다. 백 명의 시비는 모두 검을 쥐고 도열하여 유비는 수레에서 내릴 때 겁을 먹었다. 이에 법정은 유비에게 손부인을 오로 돌려보내도록 권하였다.

법정이 돌아온 뒤 장송에게 유비가 웅대한 계략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여 말하고 은밀히 협력하며 유비를 추대하여 받들길 원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뒤 유장은 조조가 장수를 보내 장로를 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를 틈타 장송이 유장을 설득하길 유비를 맞아들여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하고, 다시 법정에게 명을 받들게 했다. 법정은 유장의 뜻을 전한 뒤 은밀히 유비에게 계책을 올렸다.
명장군(明將軍)의 영명한 재주로 유목(유장)의 유약함을 틈타십시오. 장송은 주(州)의 신임 받는 중신으로 내부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익주의 풍성함을 기반으로 하고 험조함에 기대면 쉬운 일입니다.
유비가 이를 옳게 여기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쪽으로 가서 광한군 부현에서 유장과 만났다. 북쪽으로 광한군 가맹현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 유장을 공격했다.

<팽양전>에 따르면 마침 유비가 촉나라로 진입하여 장강을 따라 거슬러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팽양은 유비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유세하기 위해 곧바로 방통에게 가서 만났다. 방통은 그를 높이 평가했고 법정은 이전부터 팽양의 재능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도가 유장을 설득했다.
파서와 재동의 백성들을 내수와 부수 서쪽으로 모두 내몰고 그곳의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두 불태운 뒤 보루를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판 채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저들이 당도하여 싸움을 청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오래도록 군량을 얻을 곳이 없으니 100일이 되기 전에 필시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날 때 공격하면 틀림없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를 듣고 증오하여 법정에게 물었는데,
끝내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유장이 그 수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적에 맞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으나 백성들을 움직여 적을 피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리고는 정도를 내치고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군(軍)이 낙성을 포위하게 되자 법정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저 법정이 본래 재주가 부족해 맹호(盟好)가 훼손되게 하였으나, 좌우(左右-주변)에서 본말(本末)을 분명히 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제 탓으로 돌려 모욕을 입혀 내 몸을 망치고 그 욕됨이 집사(執事-귀하)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우니, 이 때문에 바깥에서 몸을 상하면서도 감히 반명(反命-복명. 일을 보고함)하지 못했습니다. 성청(聖聽-귀한 사람이 귀로 듣는 것)이 제 말을 싫어할까 두려워 그 사이 전(牋)을 올리지 않았으나 예전의 대우를 돌이켜보면 첨망(瞻望-우러러봄)하며 슬플 뿐입니다. 그러나 앞뒤로 오로지 복심(腹心-진심)을 피력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속마음을 감추며 최선을 다하지 않은 바가 없으나 다만 제가 어리석고 꾀가 부족하며 정성(精誠)으로 감복시키지 못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국사(國事)가 이미 위태롭고 화해(禍害-화란, 재난)가 곧 닥칠 것이기에 비록 바깥에 버려진 신세로 제 말이 증오를 더할 수도 있으나 소회(所懷)를 극진히 토로해 남은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명장군(明將軍-유장을 지칭)의 본심은 저 법정이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구구하게 좌장군(左將軍-유비)의 뜻을 잃고 싶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좌우에서 영웅의 종사지도(從事之道)에 통달하지 못해 신의를 어기고 맹세를 욕되게 해도 된다고 말하며, 의기(意氣)로 서로 맞추어(意氣相致) 해와 달이 서로 바뀌듯 하고(日月相遷) 귀로 듣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즐거운 것(順耳悅目)을 추구(趨求)하여 아첨하는 말로 뜻에 맞출 뿐. 원려[3]로써 나라를 위한 심원한 계책을 도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이미 변한 뒤에도 또한 강약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니, 좌장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양곡의 비축이 없다 하며 다수로 소수를 공격해 광일(曠日-많은 날을 허송세월함)하며 서로 대치하려 합니다. 그러나 관(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곳은 번번이 격파되었고 이궁(離宮), 별둔(別屯)은 날마다 절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록 낙성(雒城) 아래에 만 명의 군사가 있지만 모두 군진이 무너진 병졸들(壞陳之卒)이며 격파된 군의 장수들(破軍之將)이니 만약 하루아침의 싸움을 치르려 한다면 그 군사와 장수의 세력으로는 실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멀리 기약하여 각각의 군량을 헤아려본다면, 지금 이쪽 둔영의 수비는 이미 견고하고 곡미(穀米-곡식)가 이미 쌓여 있으나, 명장군의 토지는 날로 깎이고 백성은 날로 곤궁해지니 적대하는 자들이 많아져 곡식을 공급해야 하는 곳은 멀리까지 확대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헤아려봐도 필시 (그쪽이) 먼저 곡식이 고갈하여 장차 다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헛되이 서로 지키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 장익덕(張益德- 장비)의 수만 군사가 이미 파동(巴東)을 평정하고, 건위(犍爲)의 경계로 들어와 군을 나누어 자중(資中-건위군 자중현), 덕양(德陽-광한군 덕양현)을 평정하며 세 갈래 먼 길로 침범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를 어찌 막으시렵니까?

본래 명장군을 위해 계책을 꾸민 자는 필시 이쪽 군이 멀리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없고 궤운(饋運-운량)도 미치지 못하며 군사는 적고 뒤잇는 군사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 형주로 통하는 도로가 뚫려 군사 수가 열 배인 데다 손거기(孫車騎-거기장군 손권)도 동생과 이이(李異), 감녕(甘寧) 등을 보내 뒤를 잇고 있습니다.

만약 주객의 형세(客主之勢)를 다툼에 있어 토지로써 승리를 결정한다면 지금 이쪽은 파동(巴東)을 전부 차지하고 광한(廣漢), 건위(犍爲)는 절반 이상을 평정하였고 파서(巴西) 한 군(郡) 또한 명장군의 소유가 아닙니다. 헤아려보건대 익주에서 의지하는 바는 오로지 촉군인데 촉군 또한 파괴되었습니다. 3분의 2를 잃은 데다 관원과 백성들은 피폐해져 난을 일으키려 생각하는 자가 열 호(戶) 중에 여덟 호나 됩니다. 적이 멀리 있어도 백성들이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니 적이 가까워지면 하루아침에 주인을 바꿀 것이고, 광한군의 여러 현들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또한 어복(魚復-파군 어복현)과 관두(關頭)는 실로 익주의 복화지문(福禍之門)이나 지금 두 문이 모두 열리고 견고한 성이 모두 떨어졌으며 제군(諸軍)들이 아울러 격파되어 군사와 장수들이 함께 소진되었습니다. 적이 여러 길로 아울러 진격하여 이미 심복(心腹-가슴과 배, 중심부)에까지 들어왔는데, 앉아서 도읍과 낙성을 지키고 있으니 존망지세(存亡之勢)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대략적으로 그 겉만 견주었을 뿐, 그 나머지 굴곡(屈曲-상세한 전말)은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저 법정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이 일이 다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데, 하물며 명장군 좌우의 밝고 지혜로운 모사들이 어찌 이 이치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총행을 탐하며 용납되기 위해 아첨부리고, 원대한 계획을 꾀하지 않으며 마음을 다해 좋은 계책을 바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사세가 궁박해지면 각자 살 길을 찾아 그들의 문호(門戶)를 구제할 뿐 언행을 뒤집어 지금 (그들이 말하는) 계책과 다를 것이니, 명장군을 위해 사난[4]을 다하지 않고 존문[5]이 오히려 그 우환을 뒤집어 쓸 것입니다.

저 법정이 비록 불충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내심 스스로는 성덕(聖德)을 저버렸다 생각지 않으며 분의(分義-분수에 맞는 정당한 도리)를 돌이켜 생각하며 실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좌장군께서는 처음 촉에 들어올 때처럼 옛 마음이 여전하며 실로 박대하려는 뜻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생각건대 변화를 꾀한다면 존문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214년, 진격하여 성도를 포위했는데, 유장의 촉군 태수 허정이 성을 넘어 항복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성사되지 못했다. 유장은 위태로움이 극에 달하여 망할 위기가 눈앞에 닥쳤으므로 허정을 죽이지 않았다. 유장이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했을 때 유비는 허정을 박대하며 임용하지 않았다. 이에 법정이 설득했다.
천하에 헛된 명예를 얻고도 내실이 없는 자가 있으니 허정이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 주공께서는 천하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으나, 허정의 헛된 명성은 이미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만약 그를 예우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주공께서 어진 이를 천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에 유비가 허정을 후대했다.

〈장비전〉에 따르면 익주가 평정된 후 제갈량·법정· 장비·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은 천 근·5천만 전·비단 천 필을 하사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기 차이를 두어 포상했다.

2.3. 유비 휘하

〈목황후전〉에 따르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손부인은 오나라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은 유비에게 목황후를 맞이하도록 권유했다. 유비는 유모( 유언의 삼남, 유장의 형)의 미망인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으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법정이 진언하여 말했다.
만일 관계의 친함과 소원함을 논한다면, 어찌 춘추시대 진문공 자어에 비교하겠습니까?
과거 진문공은 진회공 자어와 가까운 종실 관계(진문공의 동생의 아들이 자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어가 죽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어의 아내(즉 조카며느리)인 회영과 결혼했다. 그러니까 목황후의 전 남편인 유모가 유비와 동족이라고 해도 진문공의 사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법정을 촉군 태수 겸 양무장군으로 삼으니, 밖으로 도읍과 그 주변을 통솔하고 안으로 주요한 모사가 되었다. 밥 한 그릇 얻어먹은 은혜나 눈 흘긴 사소한 원한이나 되갚지 않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헐어 상하게 한 자 몇 사람을 함부로 죽였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법정이 촉군에서 지나치게 거침없이 마구 오가니 장군께서 의당 주공께 여쭈어 그의 위엄과 은혜를 내리는 권한을 억누르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주공께서 공안에 계실 때 북쪽으로는 조조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핍박함을 꺼렸으며, 가까이는 손부인이 곁에서 변고를 일으킬까 겁내시었소. 그러다 법효직이 주공을 다시 남의 제약을 받지 않게 했으니, 어찌 법정을 금지해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소!
요약하면
아무개: "법정의 행동이 선을 넘을 정도로 지나쳐서 어떻게 좀 하셔야겠습니다."
제갈량: "주공께서 여럿 작자들에게 시달리셨는데 법정이 시달릴 일을 없게 해준 공이 있으니 그 정도는 눈감아 줍시다."
〈제갈량전〉 주석 《촉기》, 《 자치통감》에 따르면 제갈량이 유비를 도와 촉을 다스릴 때 또한 자뭇 엄하고 준열하니 많은 이들이 원탄하였다. 이에 법정이 말했다.
지금 그대는 위력(威力)을 빌려 한 주(州)를 걸터앉아 점거하고 처음 그 나라를 소유했으나 은혜를 베풀어 위무하지 않았소. 한고조의 예를 따르고 주인과 손님의 예의로 서로 낮추어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금령을 늦추어 그들의 원망을 달래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진나라는 무도하고 정치가 가혹해 백성들이 원망하니 필부의 함성에 천하가 무너져내릴 지경이었고, 고조께서 이로 인하여 널리 구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장은 어리석고 나약한 데다가 유언 이래 누대에 걸쳐 은혜를 베풀어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서로 아첨하니, 어질고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위엄과 형벌도 엄숙하지 못했소. 촉 땅 인사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게 되자 군신의 도가 점차 쇠퇴했소. 지위로써 총애하니 지위가 극에 다다르면 얕보게 되고, 은혜로써 순종시키니 은혜가 고갈되면 교만해졌습니다. 폐단이 실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울 것이니 법이 행해지면 은혜로움을 알 것이고, 작위에 한도를 둘 것이니 작위가 더해지면 영예로움(榮)을 알 것입니다. 이것이 아울러 다스려지면 위 아래에 절도가 있게 되니, 다스림의 요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 유비가 촉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법정의 공이 컸으므로, 그는 법정의 죄를 묵인했는데 손성의 경우 제갈량이 법정의 전횡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은 법에 어긋난 것으로, 공정하고 깨끗한 명성에 흠이 되는 것이라 평했다.

그런 유비 집단은 처음으로 익주에 자리를 잡아 복잡한 상황에서 온갖 일을 처리해야 하니 많은 방면에서 법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을 어지럽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제갈량과 유비는 이를 매우 신중하고 냉정히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청나라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권도로서 일을 행하여야 한다 평하였는데, 즉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는 부득불 융통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를 살피고 세력을 감안해 권도를 행하는 것, 이것은 제갈량이 처한 당시의 실제 상황과도 잘 부합된다.

〈이적전〉에 따르면 이적 제갈량·법정· 유파· 이엄과 같이 《촉과(蜀科)》를 만드니, 《촉과》의 제도는 이 다섯 사람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2.4. 한중 공방전

촉나라의 리즈 시절이라 할 수 있던 이 시기의 주역이었다.

본격적으로 위장들과의 두뇌 싸움에 돌입한다. 당시 한중을 지키던 위장들은 전혀 지략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인원들이었다. 당장 라인업만 하더라도 조홍이라는 확고부동한 주전과 전국구 명장으로 발돋움 중이던 장합, 조씨 집안의 차세대 기대주 조진, 서부의 특급 유망주 곽회라는 엄청난 라인업이다.

217년, 법정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고도 이 기세를 틈타 파촉을 도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을 남겨 자신은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모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시 내부에 우환이 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의 재략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장수들보다 낫지 못하니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비가 그 계책을 좋게 여기고 이에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고 법정 또한 수행했다.

〈양홍전〉에 따르면 그 당시 촉군 태수 법정은 유비를 수행하여 북쪽으로 갔었다. 제갈량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양홍에게 촉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219년, 유비가 양평으로부터 남쪽으로 면수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 흥세에 영채를 세우니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유비가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당했다. 조조가 서쪽을 정벌하며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말했다.
나는 예전부터 현덕(유비)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화양국지》 <유선주지>에 따르면 또한 말했다.
나는 간웅이라고 할 만한 자들은 거의 다 수하에 두었으나, 법정만은 손에 넣지 못했구나.
유비가 조조와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유비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유비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유비가 말했다.
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 피하겠습니까?
이에 유비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6]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으로 삼았다.

2.5. 죽음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고 1년 후인 220년, 법정은 44세로 요절했다. 법정이 죽었을 때 유비가 슬퍼하며 그를 위해 며칠 동안 눈물을 흘렸고, 시호를 내려 익후(翼侯)라 했다. 아들 법막이 후사를 이었다.

<조운전>에 따르면 당초 선주(유비) 때에는 오직 법정만이 시호를 받았다. 공신들인 관우, 장비, 조운 등이 죽고 수십 년에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대접이 남달랐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후(법정)는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유비)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

유비가 황제에 오른 뒤 장차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해 관우의 치욕을 되갚으려 하니 뭇 신하들이 여럿 간언했으나 하나같이 따르지 않았고, 이릉대전에서 크게 패하고 백제(白帝)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이때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유비)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형세가 위태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3. 평가

법정은 일의 성패(成敗=성공과 실패)를 보는데 뛰어났고 기이한 꾀와 계책을 지녔으나, 평소 덕이 있다 칭송되지는 못했다. 위의 신하에 견주자면 방통 순욱과 막상막하이고 법정 정욱, 곽가와 동격이다.
진수
제갈량과 법정은 비록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았으나, 공적인 대의를 위해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책략을 높게 여겼다.
촉서 법정전
삼국지연의》를 통해 삼국시대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제갈량의 신들린 전략과 천재적인 재능에 감탄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제갈량은 노련한 재상이자 행정가, 충렬지사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편이다. 반면 법정은 그야말로 진짜 천재 전략가이자 소설에 주로 등장하는 군을 지휘해 승리로 이끄는 책사 이미지에 가까웠다. 후에 정사 삼국지의 편찬자인 진수가 방통과 법정에 대하여 평하기를, 방통은 순욱과 막상막하며 법정은 정욱· 곽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법정의 최고 공적은 한중 공방전에서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력 vs 세력'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만들어 촉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점이다. 전투 전 인사만 보아도 유비는 오히려 제갈량을 성도에 배치하여 후방 지원을 맡게 했고, 법정은 전선의 핵심참모로 기용했다. 실제 제갈량이 연의에서 보여주는 비범한 군사적 전공들은 사실 법정의 모습에 더 가까운 수준이다. 그래서 그 짧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조조 순유 정욱 같은 명신들에 비교되었을 만큼 뛰어났으나 방통처럼 요절한 것이 안타까웠던 인재. 이 점에서 유독 촉빠들에게 '요절하지 않았다면'이라는 IF 떡밥이 활발한 인물이기도 한데, 이미 그 떡밥을 법정이 살아 있었으면 이릉대전을 막았을 것이라고 말한 제갈량이 던졌을 뿐더러, 내정과 군사를 홀로 도맡아 식소사번이라는 말로 행적이 대표되는 제갈량에 집중된 사무를 현실적으로 분담하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크게 어필하기 때문.

그리고 법정은 방통과 더불어 유비를 제지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일례로 유비는 한중 전투에서 화살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조조를 두려워해 도망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어 후퇴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법정은 화살비 속으로 앞장서서 걸으며 말하는 게 "주군께서도 친히 적군의 공세를 당해내시는데, 어찌 저 같은 것이 물러나겠습니까?" 즉, "내가 (방통이 그랬던 것처럼) 화살에 맞아 죽으면 또 나중에 후회하려고?" 라고 법정 본인의 방식으로 피력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유비는 이내 후퇴했으며, 한중 쟁탈전은 유비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릉대전 때 괜히 제갈량이 '법정이 살아있었으면 주군께선 애초에 동쪽으로 가지 않았거나 설령 동쪽으로 가셨어도 이렇게까지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고 탄식한 게 아니었다.[7][8] 보통 유비 휘하의 충성심 높은 이들을 논할 때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등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중전에서의 사례를 보면 법정 또한 결코 저들에 뒤쳐지지 않는 충직하면서도 강단 있는 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희 역시 《계한보신찬》에서 〈법효직을 찬함(贊法孝直)〉이란 글을 쓰고 '훌륭한 책략을 사용하고, 세상의 흥함과 쇠함을 예측했다. 주상[9]에게 몸을 던져 의탁하고, 의견을 서술하고 자문했다. 잠깐 생각하고도 바른 평가를 내리며, 사태를 보고 변화의 징조를 알았다.'라고 법정의 지모를 높게 평가했다.

다만, 성미가 괄괄하고 불 같았고, 특히나 뒤끝이 세서 한 번 자기한테 해를 끼친 것은 꼬박꼬박 갚은 희대의 보복 머신으로 유명하다. 은혜를 받은 게 있으면 끝까지 찾아가 갚았고 원수진 게 있으면 역시 끝까지 찾아가 갚았다. 이 때문에 정사 삼국지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10] 오히려 그런 화끈한 성정을 갖고 있었기에 주군 유비의 억제기 역할을 잘 수행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해 유비군 최고의 전성기를 열어젖혔으니 이 또한 법정의 재능이라고 볼 수 있겠다.

4. 미디어 믹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법정(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글자 그대로 (임금의) 날개가 되어주었다는 뜻이다. [2]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그의 아들 법막이 계승하는 형태로 받았다. [3] 遠慮-앞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이다. [4] 死難-국가의 위난에 처해 목숨을 바친다. [5] 尊門-상대방의 가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6] 제 한 쪽 날개가 되어줄 방통이 허무하게 화살에 죽어 끊임없이 후회하던 유비 입장에서, 법정까지 대뜸 화살비 앞으로 달려 나가면 당연히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을 터. 쉽게 말해 법정은 위험을 감수하고 유비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퇴각을 관철해낸 것이다. [7] 유비가 사망할 때 제갈량과 이엄에게 탁고를 맡겼는데 법정이 살아있었다면 이엄 대신 탁고를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엄이 탁고를 맡았음에도 사리사욕을 채우려던 모습을 보였던 것을 보면(…). [8] 이엄은 나중에 제갈량에게 칭왕을 하라고 꼬드기면서 충신 제갈량의 속을 긁어버린다. 제갈량이 북벌을 하려는 와중에도 권리를 주장했으며 선방하는 4차 북벌에서는 군량을 안보내는 태업을 저질러 퇴각해야 했고 참다못한 제갈량이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서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고발하여 이엄을 서인으로 축출시켜버린다. 제갈량도 이엄의 아들 이풍에게 이엄이 반성하면 복권시켜준다고 했으나…복권시키기 전에 오장원에서 사망, 이엄은 제갈량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이 복권될 가능성은 영영 물 건너 갔다는 걸 알고 슬퍼하다 병을 얻어 사망한다. 이엄은 촉 내부에 반란이 있었을 때 고작 5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반란군을 제압했던 걸 감안하면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탁고를 맡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9] 유비 [10] 기본적으로 진수는 인물을 평할 때 능력만 아니라 행실이나 성격까지 평가 기준점으로 잡아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공을 세웠어도 인격에 흠이 있으면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