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7:56:50

유종(삼국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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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평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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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劉琮
후한 말기의 관료, 군벌. 생몰년도 미상.

후한 형주를 다스린 유표의 차남으로, 정사에서는 장남인 유기 친형제이나 연의에서는 이복형제로 설정이 변경되었다.

2. 정사 삼국지

본래 유표는 장자 유기를 총애했으나 결국 형을 제치고 유종이 후계자가 된다. 유표의 후처인 채부인의 조카와 결혼해 인척 간이기 때문이다.[1] 형주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일족의 전폭적인 지지로 형을 강하태수로 밀어내 유표의 후계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조비가 쓴《전론》에 따르면 유종과 채씨 일가는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유기를 끌어내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고 하며, 유기에 대해서 지극히 동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라 동생들과 치열한 암투 끝에 황제에 오른 조비 본인의 기록이기에 어느 정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형주의 고위관리들 특히 유종 계열 관리들은 절대다수가 조조에게 흡수되었기 때문에 조비가 유기와 유종의 다툼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었을 것이다. 교차되는 다른 기록들을 봤을 때 유종과 채모가 연합해 기존에 후계자로서 입지를 가지고 있던 유기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린 것은 사실로 보인다.

마침 조조가 공격하자 형주와의 경계 지역에 조조가 다다랐을 무렵에 유표가 병으로 죽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유표의 지위를 물려받아 군주가 되었으니 통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일단 자기 자신은 끝까지 지켜보고자 하는 생각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 무엇보다도 군권을 쥐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채씨 일족이 투항을 주장해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가 형주에 입성했을 때, 유종의 부하였던 왕위는 조조가 방심하고 있으니 이를 틈타 습격해 조조를 죽인다면 천하를 평정하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진언했지만, 유종은 이를 거절하고 순순히 조조에게 귀부한다.《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이때 유종이 왕위의 진언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조는 그대로 끝났을 것이라 평했다. 내심 항복에 반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만큼 큰 일을 벌이기에는 담이 작았던 모양이다.

이후 청주자사로 부임한다. 조조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2] 간의대부 찬동 군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조 본인은 나중에 유수구에서 손권의 군사가 엄정한 것을 보고 기량을 칭찬하면서 "자식을 낳으려면 손중모 정도는 되어야지. 유경승의 아들들은 돼지와 같다.(生子當如孫仲謀 劉景升兒子若豚犬耳)"고 말한다.[3] 공식적으로는 칭찬해줬지만, 항복한 형주 민심을 포섭하는 목적으로 행한 립서비스일 뿐 내심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력 호족들과 야합해 온갖 모략으로 형을 후계에서 밀어내고는 기껏 한다는 것이 호족들에게 휘둘리다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것이니 높게 평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담으로 이 고사 때문에 어리석은 아들을 이르는 돈견(豚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편 유기는 반(反) 조조파인 유비에게 추대되면서 조조에 대한 저항 의지를 확고히 하고, 유종과 완전히 갈라선다. 유기와 유종은 원래 사이가 나빴으나 이렇게 갈라선 이후부터는 아예 형제 관계도 정리하고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전론》에 따르면 유기의 성격과 평판이 좋았기에 당시 사람들은 유종을 도왔던 채씨 일가를 비웃고 경멸했다고 한다. 서술에 편향성이 있긴 하지만 앞뒤 정황을 봤을 때 아예 없는 말을 지어냈을 가능성은 적다. 당시의 도덕상을 본다면 유종과 채씨 일가의 행위는 유표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 없었다.[4]

조조가 후계자를 고민할 때 가후는 " 원본초 유경승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고 언급하며 '둘 다 를 내치고 원상과 유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언급한다.

3. 삼국지연의

채부인의 아들로 나오며[5] 나이도 매우 어리게 설정되어 유표의 사망해인 208년 당시 14살(195년생)의 나이로 나온다. 덧붙여 매우 총명하게 묘사되었다.

채부인은 유기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인 유종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남동생인 채모와 이런저런 모략을 꾸미고, 유표가 죽은 뒤 유서를 조작하여 유종을 형주의 차기 군주로 옹립한다. 이 때 위의 총명하다는 설정을 살려 " 형님이랑 삼촌이 있는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가?"라며 어머니와 채모 일당에게 팩트폭력을 시전해 잠깐 그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줬지만, 나이가 어린 데다 일종의 바지사장이나 트로피 같은 존재라 소용이 없었다. 이후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역사상의 모습과 거의 같다. 그나마 머나먼 청주보다는 "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형주를 지키고 싶다."고 부탁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쫓겨나듯이[6] 울며불며 청주로 가다가 추격해온 우금에게 살해당해 어머니와 함께 입막음을 당한다.

비중은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연의상으로는 은근히 큰 수혜를 입은 편에 속한다. 역사상의 서술은 정략결혼으로 유력 호족들과 야합하며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기껏 한다는 짓이 휘하 호족들에게 휘둘리다가 항복하는 찌질한 모습이다. 또한 일단 순순히 항복했기에 공식적으로는 우대받았지만 조조는 사석에서 유종을 개돼지로 평했으며, 조비는 "감히 형을 몰아내고 후계자가 됐다."는 점이 괘씸해 보였는지 글까지 남겨가며 유종을 신랄하게 까는 등 매우 평가가 나쁘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유종이 후계 지위를 위해 욕심을 부렸던 것을 친아들을 후사로 밀어넣기 위한 채부인의 욕심으로 묘사했으며, 나중엔 형제 관계도 정리하고 서로 원수로 여겼을 정도로 불화했던 유기와의 관계도 우애가 있던 것으로 묘사된다.

전체적으로 매우 사려깊고 총명하지만 아직 한참 어린 나이로 어른들의 권력 다툼에 희생된 비운의 군주로 묘사된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어머니와 유력 가신들의 야합으로 장자를 제치고 추대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기록에서 나타나는 원상과 비슷한 포지션인데, 정작 연의에서 원상은 이미 장성한 나이로 나오는데다, 인물상 역시 나름 용맹성은 있지만 비정하고 탐욕스러워 권력 다툼을 일삼는 소인배로 묘사되기 때문에, 채부인 소생의 자식이 되어 나이도 어려지고 음험한 역할은 채씨 일족이 독박 쓰는 걸로 묘사되는 유종은 확실히 버프를 받은 편이다.

몇몇 연의의 판본에서는 조조가 유수구에서 유종을 까는 발언을 " 유경승이나 원본초은 개돼지와 같다."라고 고쳐서 원소의 아들들도 한 묶음이 되어 까이기도 한다.

4. 평가

명분 상으로는 채모 유표의 후계자로 유종을 옹립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아니다. 채모는 유종을 핑계삼아 유기와 그를 옹호하는 유비를 내쫓기 위해서 유종을 옹립하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유종은 채모에게 이용당했다.

애초에 채모 조조의 친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채모 유표가 죽은 이후 유표의 세력에서 유종을 옹립해서 대를 이은 게 아니라 유표의 세력을 통째로 자기 친구인 조조에게 바친 것이다. 채모는 원래 간신이었고 유종은 그런 간신배에게 놀아난 것이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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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부인의 조카라는 여성은 제갈량의 아내인 황부인과 친자매 또는 종자매가 된다.[7] 황부인은 채부인의 언니의 딸이다. 물론 인척 관계와 별개로 두 집안의 사이는 아주 유명하다. [2] 위무고사의 조조 명령서에는 유종을 "지혜가 깊으며 사려가 넓고 신의와 덕성을 존중한다."며 그를 아주 칭찬하고 있다.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종을 살해할 때, 이거를 열심히 들먹이며 조조를 변호해줬지만 밑의 개돼지 발언이나《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에게 참살당한 것을 생각하면 변명거리도 못된다. [3] 다만 나름 평판도 좋았고 조조에게 투항하지않고 유비를 지원하고 유비와 연합해서 끝까지 조조와 맞서 싸우고 결국에는 (직후 죽기는 했지만) 형주자사까지 오른 유기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유종과 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지만 유기 본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조조에게 있어서는 유기는 자신을 적대하는 괘씸한 놈이니 좋게 볼 이유가 없기는 하다. [4] 유종의 몰년은 불명이나 이토록 조비에게 단단히 밉보였기에 조조 사후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매우 피곤하게 살았을 수 있다. 다만 조비 역시 음험하거나 찌질한 면모도 강하지만 의외로 아니다 싶으면 자기 감정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그냥 냅두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굳이 항복한 자들을 뒤엎는 것까지는 안하고 입과 글로만 조금 씹고 말았을 수도 있다. 그 동기가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의 감정이입에 불과하다는 것, 실리로 따지면 유종은 조위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준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좀 그렇고... [5] 이는 연의의 설정이다. 정사에선 "채모의 조카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채씨 일가와 가까워졌다."는 서술을 보면 채부인의 친자식이 아니다. 만약 조카라는 서술이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채부인의 친자식일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으나, 그렇다면 굳이 채모의 조카와의 혼인으로 채씨 집안과 가까워졌다는 서술을 할 필요가 없다. [6] 이 때 "형주에 있을 무렵엔 수행원들이 많았지만 청주로 발령이 나자 따라가는 사람이 열댓명 정도로 팍 줄어들었다."는 언급과 함께 " 권력이 없으면 사람이 떠나가는 게 사람의 본성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그나마 조조에게 항복할 즈음에 채모에게 직접적으로 반발하던 왕위가 따라오긴 했지만 후술하듯이 그 역시 우금에게 처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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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친자매나 이복 자매가 아니란 말도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