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2:57:11

영사황후 하씨

하태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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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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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황후 시호 박탈 후 고후(高后)로 격하
한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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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fff> 후한 영제의 계후
영사황후
何皇后
시호 영사황후(靈思皇后)
성씨 하(何)
출생 155년
사망 189년 9월 30일 (향년 34세)
재위 후한의 황후
180년 ~ 189년
후한의 황태후
189년
부군 영제(靈帝)
가족 모친 무양군
이복형제 하진(何進), 이부형제 하묘(何苗)
출신 후한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평가5. 기타6. 기타 창작물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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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영제의 2번째이자 마지막 황후로, 소제의 어머니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인 무양군,[1] 이복형제 하진,[2] 이부형제 하묘가 있다.[3]

성은 하씨(何氏), 는 불명, 시호는 영사황후(靈思皇后), 통칭은 하태후(何太后). 공식 시호보다 통칭인 하태후로 더 알려져 있다.

2. 정사 삼국지

키는 일곱 자 한 치(약 168cm)로 당시 기준으로 남자와 비슷한 장신이었다.[4] 백정 집안이었지만 조정에서 가구 조사를 나왔을 때 집안 사람들이 뇌물을 써서 하진의 여동생 하씨를 영제 후궁으로 들이게 했다.[5] 하씨는 영제의 아들 유변을 낳고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기가 세고 질투가 심했기 때문에 후궁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178년, 영제가 황후 송씨를 폐했다.[6] 180년, 하씨는 후궁에서 황후로 신분이 상승했다. 하씨가 황후로 책봉될 당시 한고제, 광무제에게 제사를 치르지 못했기에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하씨가 황후가 되자 하황후의 가족들도 덩달아서 관직이 상승했다.
예전에 하황후가 새로 책봉되었을 때, 마땅히 이조(二祖)의 묘당에 아뢰려고 재계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변고가 생겼다. 이와 같이 하기를 몇 번이나 했으나 끝내 이를 치르지 못했다.
당시에 뜻있는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이를 괴이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끝내 하씨로 인하여 한나라 황실이 기울어 몰락하고 말았다.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하황후는 영제의 후궁 왕미인이 임신을 하자 약을 먹여 낙태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1년, 왕영은 유협[7]를 낳았고, 하황후는 결국 왕영을 독살했다. 영제는 화를 내며 하씨를 황후의 자리에서 폐하려고 했지만 환관들이 말려서 가까스로 넘어갔다. 어머니를 잃은 유협은 할머니인 동태후가 길렀다. 동태후가 아들 영제에게 유협을 태자로 삼으라고 자꾸 권하자 하황후는 이를 한스러워했다.[8]

영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하자 하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소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인 하태후가 섭정했다. 동태후의 조카 동중과 하태후의 오빠 하진은 권력을 다투었다. 하태후는 시어머니 동태후를 정적으로 간주하여 낙양에서 추방하고 유살했다.
동태후가 정사에 참여하고자 할 때마다 번번이 하태후가 이를 금지했다. 이에 동태후가 화를 내면서 꾸짖어 말했다.
"네가 지금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것은 네 오라비를 믿고 그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표기장군(동중)에게 칙서를 내려 하진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할 수 있노라."
하태후가 듣고서 그 일을 하진에게 알렸다. 하진이 삼공 및 동생 거기장군 하묘 등과 함께 상주하여 말했다.
"(중략) 청컨대 영락후를 궁에서 옮겨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하태후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에 하진이 군대를 일으켜 표기장군부(驃騎將軍府)를 둘러싸고 동중을 사로잡아 관직을 박탈하니 동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태후가 근심과 두려움 끝에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했다. (중략) 백성들은 모든 허물을 하씨에게 돌렸다.
《후한서》 <효인동황후전>

십상시가 내세웠던 동태후가 죽자 하진은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환관들을 죽이려고 했다. 한편 하태후의 여동생은 십상시 장양의 며느리였다. 환관들이 무양군 하묘에게 뇌물을 바치자 하태후는 하진이 환관들을 죽이려하는 것을 반대했다.[9] 하진 우유부단과 마찬가지로 하태후도 이후 참변의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

189년, 십상시의 난에서 십상시는 하태후의 조서라고 속여 하진궁궐로 불러들여서 죽여버린다. 분노한 원소, 원술, 조조, 오광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들을 학살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하진의 의붓동생인 하묘도 하진의 부하였던 오광에게[10] 형인 하진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으며 장양은 소제와 하태후 그리고 진류왕 등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노식도 싸울 준비를 갖춘 채 원소측에 합류해 있었는데, 십상시의 일원인 단규가 하태후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을 쥔 채 단규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그 기세에 눌린 단규가 태후를 놔두고 달아났다고 한다. 그러나 태후와 별도로 소제와 진류왕은 장양에게 이끌려 궁궐을 탈출했다.
장양 등이 들어가 태후에게 아뢰기를 대장군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을 불태우고 상서(尙書)의 문을 공격하고 있다하고, 하태후와 천자와 진류왕을 대동하고, 또 궁궐 안의 관속들을 겁박하여 복도(複道)를 따라 북궁(北宮)으로 달아났다. 상서 노식이 각도(閣道)의 창문 아래에서 과(戈)를 잡고서는 단규(段珪)를 올려다보며 (그들의 죄를) 늘어놓았다. 단규(段珪) 등이 두려워 태후를 놓아주었다. 태후는 각(閣) 아래로 뛰어내려 (난을) 면하였다.
《후한서》 <하진열전>

황제 소제와 진류왕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낙양에 입성하고 정권을 잡자 소제를 폐위해 홍농왕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 유협을 황제로 옹립했다.
병주목 동탁이 부름을 받아서 병사들을 거느리고 낙양에 들어와 조정을 능멸하고 억압했다. 동탁이 끝내 소제를 폐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헌제(獻帝)다. 홍농왕이 부축을 받은 채 전각 아래에서 북면하여 신하를 칭했다. 황태후가 흐느껴 울고, 뭇 신하들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으나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또한 동탁은 하태후가 시어머니 동태후를 죽인 것을 문책하며 유폐시키고 독살했다.[11]
동탁은 황태후가 영락태후(永樂太后)를 핍박해서 근심해 죽도록 만들었으므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예를 거슬렀다는 의문을 올렸다. 이에 황태후를 영안궁으로 옮기고 짐독을 보내 시해했다. 황후에 오른 지 10년 만이었다. 동탁이 황제로 하여금 봉상정(奉常亭)에 나가서 애도하게 하고, 공경들에게는 모두 흰 옷을 입고 조회하게 했지만, 끝내 상을 치러 주지 않았다.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하태후는 영제의 무덤인 문소릉에 합장되었지만 동탁이 하태후의 장례 도중 문소릉을 파헤쳐서 부장품들을 도굴했다.[12] 이듬해 아들인 소제도 독살당했다. 하태후는 영사황후(靈思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3. 삼국지연의

하태후가 동태후와 후계자 문제로 사이가 나빠지자 유폐시키고 독살했다. 정사에서 하태후가 동태후를 유폐시켜서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맞지만 동태후가 죽은 원인은 불명이다.

최후 장면이 정사와 약간 다른데 동탁 이유로 하여금 감금 중인 소제, 하태후, 그리고 소제의 아내 당희를 독살하라고 시킨다. 그들이 독주를 거부하며 이유를 꾸짖자 이유는 화가 나서 하태후를 누각 아래로 떨어트려 죽이고, 당희는 무사에게 목을 조르게 하고, 소제에게 억지로 독주를 먹여 죽인다. 이유가 동탁에게 그들이 죽기 전에 저항했다고 고하자 동탁이 세 사람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묻어버리게 했다.

정사랑 비교해보면 하태후와 소제는 동시에 죽지 않았고 하태후가 독살되어 죽은 이듬해에서야 이유가 소제를 독살한다. 그리고 소제의 아내 당희는 아예 살해당하지 않았다. 또한 하태후는 아무렇게나 묻힌 게 아니라 영제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4. 평가

미천한 신분에서 크게 출세했지만 오빠인 하진이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지만, 하태후는 과연 능력이 있는지 크게 의심된다. 하태후는 기가 세고 질투가 심하여 후궁들이 두려워했다는 대목, 영제의 다른 자식인 헌제를 낳은 왕씨를 독살했다고 되어 있는데 단순히 질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출신을 보면 운발이 좋아 출세한 인물이었기에 지지기반이 너무 약하고 그런 상황에서 믿을건 황제의 총애와 자신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는 것뿐이었기에 본인도 본인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질투하고 독살하고 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지독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사에서 독살을 시도한 황후/후궁은 이 사람 말고도 더 있긴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황자는 한 명의 사람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어쨌든) 황제의 아들이자[13] 다음 계승권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왕 일을 처리할 거였으면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맞고 문제가 드러나면 안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영제가 그 행태에 대해서 분노하여 폐하려고 했을까? 이때 환관들이 아니었다면 꼼짝도 못하고 폐위당했을 것이고 왕씨를 제거하려다 자기도 제거당한 멍청한 짓으로 끝났을 것이다.

동태후와의 대립도 그렇다. 물론 태후가 태후끼리 대결하는 상황도 역사상 많았다. 하지만 이런 류의 문제가 진짜 문제가 되는 예들이 늘 그렇듯이 뒷처리가 깔끔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하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그래도 명색이 시어머니인 동태후를 즉각 추방하는 횡포를 부리고 이에 동태후는 자결한다. 이에 대해서 백성이 하태후 탓을 했다는 대목을 보면 하태후의 행각에 대해 백성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십상시 문제도 그렇다. 사실 이때 하태후가 취해야 할 최선은 이왕 일이 하진이 십상시를 숙청하는 쪽으로 돌이킬 수 없게 된 이상 십상시를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하진은 탁류, 청류 가릴 것 없이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런 하진 밑에는 십상시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14] 그렇기에 하태후가 십상시를 버리고자 한다면 하진+청류파의 지지로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고 반대로 십상시를 옹호한다면 청류파의 지지를 얻을 수 없고 어차피 또 십상시는 끈 떨어진 신세에 자기들이 위험하다고 하진을 죽여버리는 등 하태후에게 충성해서 붙었기보다는 단순히 자신들이 살기 위해 붙은 것이다. 이 십상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하진도 하태후가 반대하니까 못했을 뿐 원소 등과 생각은 같았다.

이 당시 하태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진과 한 마음이 되는 것인데 하태후는 이유가 무엇이건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아들이 황제가 되고 자신이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는데 녹상서사인 하진 역시 하씨 정권의 최중요 축이다. 하태후를 주체로 보는 시각에서 자기자신인 하태후를 당연히 제외하고 본다면 소제가 크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녹상서사인 하진이다. 설령 하태후가 훗날의 측천무후처럼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해도 어쨌든 그 시점에서는 하진과 협력해야만 한다. 십상시 역시 성공한 2차 하진 제거 시도를 제외하고 봐도 1차적으로 건석의 하진 제거 시도는 하태후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 시점에서 하씨 정권은 권위의 근원인 황제의 어머니 하태후와 그 권위를 잘 휘두르고 인심을 모으는 능력을 가진 하진 이 두 축에 의해 굴러가는 것인데 하진을 제거하는 시도는 당연히 하태후에게 있어서도 큰 위협이 되는 것이다.

물론 하태후는 어쨌든 자기가 권위의 근원인 황제의 어머니고 그 시점에서 십상시고 하진이고 다 최중요인물인 나의 간택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5] 그리고 어느 정도 정치의 모양새가 만들어지고 돌아가는 것보다 자기가 더 사치할 수 있고 권세를 부릴 수 있고 아첨을 많이 받는다던가 하는 게 하태후의 가장 중요한 목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목표에는 하진보다 십상시가 더 좋은 파트너일 수도 있다. 아니면 최소한 하진과의 연립정권에서 자기가 쫄려서 십상시라는 장치를 하나 더 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20여 년 전의 두태후와도 비슷한데 하태후나 두태후나 환관들을 제거하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이들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의 권위를 휘두르는, 상당히 황제와 일체화한 인물들이고 특히 태후들이기 때문에 더욱 궁 안의 인물이자 황제에게 무조건 기대는 환관들이 유용한 카드였을 수 있다.

이렇게 하태후 중심으로 생각해본들 하태후는 실패한 인생인 것이 제아무리 황후가 됐고 태후가 되어서 최고 권력자 반열까지 올랐다고 해도 상당히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으며 그것도 다 자기 탓이다. 결과적으로는 하태후는 하진 세력과 십상시 사이의 긴장을 원활히 조율하지 못했고, 둘 사이의 갈등이 막장과 파국으로 치닫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 하태후다.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나 파국을 조절할 수 없다면 자기가 지지를 보내는 곳이나 운명공동체를 한 세력으로 결정해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다.[16]

그리고 상술되었듯이 하태후의 암수나 급수는 죄다 무리수에 운발에 기대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하태후가 거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도 미모를 타고 났다는 것. 또 오빠인 하진이 재산도 있고 야심도 있고 능력도 좋았다는 거 친오빠 잘 타고난 게 하나였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 궁궐 안에서 여러 가지 노력도 했겠지만[17] 객관적으로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데 있어서 모든 원인이 운발인 인간이 하태후였다. 그나마 태후가 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운도 따르고, 하태후와 이익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찌저찌 극복할 수 있었으나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는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 중간치기도 못하고 금세 몰락해 버렸다.

결국, 하태후가 십상시를 택한 결과 하진은 십상시를 처단할 기회를 놓치고 대신 군웅들을 부른다는 선택지를 골랐고 그 군웅이 오는 사이 십상시는 하진을 암살했으며 그나마 십상시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마지막 브레이크이던 하진마저 없으니 그들은 대놓고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을 죽여댔다. 직후에 도착한 동탁은 십상시도 없고 하진도 없는 상황 속에서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사와 밑에 있던 여포에 하진의 군사까지 흡수한 후 그 힘으로 소제와 하태후를 폐위시켰다. 하태후로서는 그리도 미운 왕씨의 아들이자 동태후가 지켜주던 유협을 황제로 옹립했으며 끝내는 하태후와 그 아들인 소제를 죽였다. 그 지위에 비해 능력이 지나치게 모자랐고 인품도 안 좋았다.[18]

5. 기타

소제가 즉위하면서 임조칭제(臨朝稱制)[19]하였는데, 후한시대에 임조칭제하였던 6번의 경우 중에 유일하게 황제와 황태후가 친생모자 관계에 있었다.[20]

하태후가 매우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설이 한국 인터넷상에 퍼져있는데, 이는 민희식 교수의 저서 '삼국지의 여인들'이라는 책에서 나온 내용으로 보인다. 출처 민희식 교수가 무엇을 근거로 하태후가 뽀얀 피부라고 서술했는지는 불명이다. 이는 하안의 미모와 흰 피부가 고모할머니인 하태후를 닮은거라는 추측일 뿐이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애초에 해당 저서의 내용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라기보다 그냥 창작야설소설이다.[21]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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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 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 사마포, ,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 이섭, ,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 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 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 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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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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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태후가 황후가 되고 책봉된 작위이다. [2] 환관에게 피살되어 군웅할거 삼국시대의 단초를 연다. [3] 하태후의 모친 무양군은 처음에 주씨 성 가진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주묘를 낳았고, 이후 하진의 부친에게 개가해서 딸을 낳았다. 주묘는 무양군이 개가하면서 데리고 들어갔으므로 의붓아버지에게 하씨 성을 받았다. [4] 현대 기준으로도 여자 치고는 꽤나 장신이다. 현대 중국과 홍콩 여성 평균 키가 158cm이고 대만이 159cm이다. 참고로 남성 평균 키 역시 중국이 169cm, 홍콩이랑 대만이 171cm이다. 현대 한족들 키랑 비교해 봐도 여성 평균 키보다 10cm 가량 크고 남성 평균 키보다 조금 작은 것이다. 고대 여성이 말이다. [5] 출처: 《후한서》 <영사하황후전> 주석《풍속통》 [6] 출처: 《후한서》 <영제송황후전> [7] 후일의 헌제 [8] 출처: 《후한서》 <효인동황후전> [9] 출처: 《후한서》 <하진열전> [10] 오광은 평소에 환관들과 가깝게 지내며 하진에게 환관들과 화해하라고 권하는 하묘를 의심했다. [11] 연의에서는 동탁의 전횡을 욕하는 시를 지어서 비판을 했지만, 동탁이 그걸 보고서 "뭐래? ㅋㅋㅋ 니년이야말로 환관들에게 뇌물을 받고 걔네들을 총애하면서 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주제에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냐?" 라고 비웃은 다음에 독주를 보내서 소제와 하태후를 독살시킨다. [12] 출처: 《후한서》 <동탁열전> [13] 덤으로 (어쨌든) 혈연은 아니지만 본인에게도 아들 격이 된다. [14]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원소다. [15] 정작 앞서 말했듯 하태후는 십상시나 하진보다 능력이 떨어져 사실상 하태후가 그들에게 간택을 청해야 할 수준이다. 애초에 그 간택할 기회란 것도 자신의 실력이 따라줘야 하고. 안 그렇다면 그녀에게 간택받아서 얻는 이득이 없다. [16] 이런 것은 두태후나 하태후나 마찬가지긴 하다. [17] 사실 노력 없이 사는 인간이 어딨는가? 다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하고 아무 노력도 없이 사는 인간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부류다. [18] 그나마 하진이 죽지 않았다면 다행인 게 동탁이라고 해도 하진에게 덤빌 순 없을 것이니 십상시들만 숙청당하고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십상시들의 편을 들어주던 하태후는 어떠한 형태로든 발언권은 약해졌을 것이다. [19] 황태후가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를 장악하는 것. 조선 수렴청정과 비슷하게 볼 수 있겠다. [20] 이전에 다섯 경우( 장덕황후, 화희황후, 안사황후 염씨, 순열황후 양씨, 환사황후 두씨)는 황태후와 황제가 친생모자 관계가 없었다. [21] 다만 하태후가 미모가 출중했는데 당시 미인의 기준 중 하나가 하얀 피부였기 때문에 근거는 없긴 하지만 그리 무리한 추측까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