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20:08:02

등우

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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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禹
(A.D. 2년 ~ 58년)
1. 개요2. 생애3. 성품4. 여담

1. 개요

양한교체기[1]의 인물로의 인물. 자는 중화(仲華)로, 형주 남양(南陽)군 신야(新野)현 사람이며 후한의 명장이다.

후한의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명제 때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그려진 28장에서, 등우는 맨 처음[2]에 위치한다.[3] 이 때문에 ‘운대 주수(雲臺主帥)’라 불리기도 했다. 후한의 섭정태후 중 가장 장기간 집권하고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후대 수렴청정에도 모범이 된 화희황후 등씨의 조부다.

2. 생애

열세 살에 이미 시경을 외울 수 있었고 장안에 가서 공부를 했다. 당시 유수(광무제)도 장안에 와서 견문을 넓히고 있었고, 여기서 유수는 등우를 만났다. 등우는 유수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지만, 유수를 보고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서로 친한 사이가 됐다.

한(漢)나라의 군사가 일어나고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년)이 옹립되자, 호걸 대부분이 등우를 천거했다. 그런데 등우는 유현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수가 하북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황하를 건넌 뒤 도보로 업현(鄴縣)까지 갔다.

유수는 등우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벼슬을 임명하는 전권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가 먼 데서 찾아왔는데 무슨 벼슬을 하고 싶은가?

등우가 대답했다.
원치 않습니다.

유수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등우가 대답했다.
저는 다만 명공(明公, 유수를 가리킴)의 위엄과 덕망이 사해에 널리 퍼지도록, 저의 작은 힘을 바침으로써 죽백(竹帛)에 공명(功名)이 드리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4]

이 말을 들은 유수는 웃으면서 등우를 거두어들이기로 했고, 서로 격의 없이 대화를 했다. 그러면서 등우가 건의했다.
경시제(유현)가 비록 관서(關西)에 도읍을 했으나, 지금 산동 지역은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적미군(赤眉軍)과 청독군(靑犢軍)의 무리가 수만 명씩 움직이고 있고, 삼보(三輔)[5] 지역에서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자들에게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유현은 아직 그들을 꺾지 못했고, 또한 남의 좋은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장수들은 모두 용렬한 위인들입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재물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며, 서로 다투고 각자의 힘을 이용하면서 일시적인 쾌락만 도모할 뿐입니다. 충성스런 마음과 밝은 지혜를 가지고서 심원한 계획을 짠 뒤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온 나라가 갈라지고 백성이 흩어져 있는 형세는 이미 볼 수 있습니다. 명공께서는 비록 유현을 보위하는 공을 세우기는 했으나, 아마도 아직은 자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최선의 계책은 천하 영웅들을 맞아들이고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온 힘을 쏟으며, 고조(高祖)[6]와 같은 대업을 세워서 만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명공께서 천하를 도모한다면, 천하는 명공이 평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7]

이 말을 들은 유수는 크게 기뻐하면서, 곧바로 좌우 사람들에게 등우를 ‘등장군(鄧將軍)’으로 부르라고 명령했다. 그 뒤로, 등우는 항상 중군(中軍)에 머무르면서 계획과 의논에 참여했다.

왕랑(王郞)이 군사를 일으키자, 유수는 계현(薊縣)에서 신도(信都)로 갔다. 그리고 등우를 보내,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해서 수천 명을 얻었다. 유수는 친히 등우에게 이 용사들을 거느리고 가도록 했고, 등우는 악양(樂陽; 당시 상산군常山郡에 속한 현)을 탈취했다. 승리한 등우는 곧바로 유수를 따라 광아(廣阿)로 갔다.

유수는 성루 위에 머물고 있었는데, 등우가 오자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군국(郡國)[8]이 이처럼 많은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 중 한 곳을 얻었소. 그대가 전에 했던 말, 내가 천하를 도모한다면 천하는 내가 평정하기에 충분하지 아니하다 함은 무슨 말이오?

등우가 대답했다.
바야흐로 지금은 온 천하가 혼란스러워, 백성이 현명한 황제를 바라는 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부터 흥하는 사람은 덕의 얇고 두터움에 달려 있지, 세력의 크고 작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수는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유수는 장수를 임명하고 임무를 부여할 때, 대부분 등우에게 의견을 구해서 결정했다. 그때마다 등우가 천거한 사람들이 모두 임무에 적합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유수는 등우가 인재를 알아본다고 여겼다.

유수는 등우에게 별도로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갑연" 등과 함께 청양현(淸陽縣)에서 동마군(銅馬軍)을 공격하게 했다. 갑연 등이 먼저 도착했는데, 전세가 불리했다. 이에 군사를 뒤로 물려 청양성을 지켰는데, 동마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등우의 군사가 뒤쫓아와서 싸움에 가세했고, 동마군을 쳐부순 뒤 대장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유수를 따라 적군을 추격했는데, 포양(蒲陽)에 이르러 거듭 대승을 거두고 수많은 포로를 얻었다. 이로써 북주(北州)는 대략 평정이 됐다.

적미군이 서쪽을 향해 관중(關中,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왔다. 이에 경시제 유현은 정국상공(定國上公) 왕광(王匡), 양읍왕(襄邑王) 성단(成丹), 항위(抗威)장군 유균(劉均)과 수많은 장수를 보냈다. 그리고 하동군(河東郡)과 홍농군(弘農郡)을 나누어 지켜서 적미군을 막게 했다. 하지만, 적미군의 大부대가 밀려오자 왕광 등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유수는 적미군이 틀림없이 장안을 격파하리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 기회를 틈타 관중을 빼앗은 후, 다시 산동 지역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유수는 자신을 대신해 관중을 빼앗는 큰일을 누구에게 위임해야 할지 모르다가, 등우가 계략이 깊고 도량이 크기 때문에 그에게 서쪽을 정벌할 권한을 줬다. 유수는 곧바로 등우를 전(前)장군으로 삼아 부절을 건네고, 휘하에 있는 장병 2만 명을 나누어 주며 서쪽으로 보내 관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또한, 등우 본인이 직접 서쪽 정벌에 함께 참가할 편장(偏將)과 비장(裨將) 이하의 장령을 뽑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등우는 한흠(韓歆)을 군사(軍師)로 삼고, 이문(李文)·이춘(李春)·정려(程慮)를 좨주(祭酒)로, 풍음(馮愔)을 적노(積弩)장군으로, 번숭(樊崇)을 효기(驍騎)장군으로, 종흠(宗歆)을 거기(車騎)장군으로, 등심(鄧尋)을 건위(建威)장군으로, 경흔(耿訢)을 적미(赤眉)장군으로, 좌우(左于)를 군사(軍師)장군으로 각각 삼은 뒤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서기 25년(건무建武 원년) 정월, 등우는 기관(箕關; 왕옥현王屋縣 동쪽)에서 하동(河東)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하동의 도위(都尉)가 관문을 굳게 닫고 열어 주지 않았다. 등우는 열흘 동안 공격을 거듭한 끝에, 기관을 함락시키고 군용물자를 싣는 치중(輜重) 1천여 량을 빼앗았다. 그리고 곧바로 진격해서 안읍(安邑)을 포위했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경시제 유현의 대장군 번참(樊參)은 수만 명을 이끌고, 대양(大陽; 하동군에 있는 현)의 경계를 넘어 등우를 공격했다. 등우는 여러 장수를 해현(解縣; 하동군에 속함)의 남쪽으로 보내 그들을 치게 했다. 여기서 번참의 군대를 대파하고, 번참의 수급을 베었다. 그러자 왕광, 성단, 유균 등은 군사 10여만 명을 모아서 함께 등우를 다시 공격했다. 이에 등우의 군사는 불리하게 됐고, 결국 효기장군 번숭은 싸우다 죽었다. 얼마 후 날이 저물어 싸움이 그쳤는데, 군사 한흠과 여러 장수는 군사들의 기세가 이미 꺾인 것을 알았다. 이들은 야밤을 틈타 퇴각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등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튿날은 계해일이었다. 왕광 등은 이 날이 육갑 중의 궁일(窮日)이기 때문에, '말일'이라는 이유로 출전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등우는 병장기를 가다듬고 군사를 정비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등우를 공격하기 위해 왕광이 군사를 총동원해서 나왔다. 등우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군중에 내렸는데, 왕광의 군사가 군영 부근에 이르자 비로소 장수들에게 명해 일제히 북을 치고 진격하게 해서 왕광의 군사를 대파했다. 왕광 등은 병사들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등우는 경기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추격해서 유균과 하동태수 양보(楊寶), 지절중랑장(持節中郞將) 미강(弭彊) 등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그리고 부절 6개, 인수 5백 개와 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병기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마침내 하동이 평정됐다. 또 유수의 명을 받들어, 이문(李文)을 하동태수로 임명하고 부속 현의 모든 현령을 바꾸는 등 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이달 광무제가 호鄗에서 즉위해, 사자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등우를 대사도大司徒로 삼게 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책(策)을 내렸다.
조칙을 내리노라. 전장군 등우는 충효하는 마음이 깊고, 짐과 함께 군영에서 훌륭한 계책을 많이 내었으며, 천 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승리를 이끌어 냈도다. 공자(孔子)는 내게, "안연(顔淵)[9]이 있은 후로, 문인들이 나와 나날이 친밀해졌다"고 말한 적이 있도다. 그대는 전장에 나가서 적장을 베고 적군을 무찔렀으며, 산서를 평정한 공이 특히 두드러졌도다. 백성을 친하게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오품(五品)[10]을 가르치지 않았으니, 그대가 사도가 되어 신중하게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펴도록 하라. 이 다섯 가지 가르침의 실행은 관대함에 달려 있도다. 이제 봉거도위(奉車都尉)를 보내 인수를 내려, 그대를 찬후(酇侯)[11]로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내리노라. 경건하게 받들라!
등우가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등우는 드디어 분음하(汾陰河)를 건너, 하양현(夏陽縣) 땅으로 들어갔다. 경시제의 중랑장 좌보도위(左輔都尉)[12] 공승흡(公乘歙)이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좌빙익(左馮翊)[13]의 군사와 함께 아현(衙縣; 당시 좌빙익左馮翊에 속함)에서 등우를 막았으나, 등우는 그들을 무찌르고 나아갔다.

이 무렵 적미군은 마침내 장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삼보 지역은 거듭 패배를 당하고 있었고, 적미군이 지나는 곳마다 인명을 살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누구에게 붙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백성들은, 승기를 잡은 등우가 싸움마다 승리를 거두면서도 군사들의 행동에 기강이 서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백성들 모두 멀리서 등우의 군사가 보이기만 하면, 서로 손을 이끌고 등에 아이를 업고서 수레를 맞이했다. 투항하는 자는 매일 천 단위를 헤아렸으며, 등우의 군대는 1백만 명이라고 알려졌다. 등우는 가는 곳마다 수레를 멈추고, 군사를 주둔시켜 백성들을 위로했다.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등우가 탄 수레 아래로 몰려들었으며, 모두 감동하고 기뻐했다. 등우의 명성은 관서 지역에 널리 퍼졌다. 광무제는 등우를 기특히 여겨,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그 훌륭함을 표창했다.

장수와 호걸들 모두, 등우에게 곧장 장안을 공격할 것을 권했다. 이에 등우가 말했다.
그럴 수 없소. 지금 우리 군사의 수가 많긴 하지만, 싸움에 능한 사람은 적고, 앞으로는 의지할 만큼 쌓아놓은 군량이 없으며, 뒤로는 물자공급이 없소. 적미군은 이제 막 장안을 함락시켜서 재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봉을 감당할 수가 없소. 무릇 도적이 함께 모여 있으면 하루 동안의 계획조차 없기 때문에, 재물과 곡식이 비록 많더라도 변고가 많은 법이니, 어찌 그들이 오랫동안 굳건히 지킬 수 있겠소? 상군(上郡)·북지(北地)·안정(安定) 등 세 군은 땅이 넓은데도 사람이 적어 곡식이 풍부하고 가축이 아주 많으니, 나는 잠시 북방에서 병사와 군마를 쉬게 하고 정비할 것이며, 그곳의 양식으로 병사를 기르면서 그들의 허점을 살핀 후에 공략할 것이오. 이렇게 해야 장안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순읍(栒邑; 우부풍右扶風에 속한 현)으로 갔다. 등우는 가는 곳마다 적미군의 별장(別將)들이 세운 수많은 군영을 모두 격파했는데, 이에 군읍(郡邑)들은 모두 문을 열고 귀순했다. 한편, 서하(西河)태수 종육(宗育)이 제 자식을 보내 항복 문서를 받들어 올리자, 등우는 그를 경성으로 보냈다.

광무제는 관중이 여전히 평정되지 않았는데, 등우가 오랫동안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자 조서를 내렸다.
사도(등우를 말함)는 요임금과 같은 사람이고, 적미군은 걸과 같은 무리로다. 장안의 관리와 백성은 두렵고 불안하지만, 의지할 데가 없도다. 마땅히 때를 놓치지 말고 진격해서, 토벌하고, 서경(西京)을 진정시키고 위로해서,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야 할 것이로다.

그럼에도 등우는 원래의 생각을 고수해서, 장수들을 여러 갈래로 나눠 상군의 여러 현을 공격하게 했다. 동시에, 병사를 징발하고 식량을 조달받으면서 대요(大要; 북지군에 속한 현)에 이르렀다. 이때 등우는 적노장군 풍음(馮愔)과 거기장군 종흠(宗歆)에게 순읍을 지키게 했는데, 두 사람은 직무를 망각하고 권력을 다투느라 서로 싸웠다. 결국에는 풍음이 종흠을 죽였고, 풍음은 창머리를 돌려 등우를 공격했다. 등우는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가 사자에게 물었다.
풍음이 친애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사자가 대답했다.
호군(護軍) 황방(黃防)입니다.

광무제는 풍음과 황방이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틀림없이 사이가 어그러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등우에게 이렇게 알렸다.
풍음을 결박할 사람은 틀림없이 황방일 것이다.

그러고는 상서 종광(宗廣)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황방을 투항시키게 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황방이 과연 풍음을 사로잡고 무리를 데리고 와서 죄를 인정했다. 그리고 경시제의 장수인 왕광, 성단 등은 모두 종광에게 와서 항복을 했다. 종광은 항복한 장수들과 함께 낙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읍에 당도했을 때 왕광과 호단 두 사람이 달아나려고 하자, 종광이 이들 모두를 참해버렸다. 낙양에 도착한 풍음은 처벌되지 않고 사면됐다.

26년(건무 2년) 봄, 광무제가 사자를 보내 등우를 양후(梁侯)로 봉하고 네 현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이때 적미군은 서쪽에 있는 부풍(扶風)으로 달아났고, 등우는 남쪽에 있는 장안에 이르러 곤명지(昆明池)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사졸에게 큰 잔치를 열어줬다. 그런 다음에 길일을 택해서 장수들을 거느리고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준비해서, 한고조 유방의 사당인 고묘(高廟)에 가서 제사 지냈다. 그리고 한(漢)나라 황제 열한 명의 신주를 수습해서 사자를 통해 경건하게 낙양으로 보냈다. 또한, 황제들의 능을 돌아보고 관리와 사졸을 두어 그곳을 지키게 했다.
등우는 군사를 이끌고 연잠(延岑)과 남전(藍田)에서 싸웠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식량이 저장되어 있는 운양(雲陽)으로 갔다.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가 등우에게 와서 투항했다. 그런데 유가의 재상으로 있는 이보(李寶)가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자, 등우가 그를 베어버렸다. 비보를 접한 이보의 아우는 이보의 부하와 군사를 모아서 등우를 습격했고, 장군 경흔(耿訢)을 죽였다. 풍음이 반란을 일으킨 뒤로 등우의 위세가 다소 손상을 입은 데다 식량마저 떨어져서, 투항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우를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적미군이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등우의 군사는 적미군과 싸웠으나 패해서, 고릉(高陵)으로 달아났다. 등우의 굶주린 병사들은 대추와 푸성귀를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광무제는 등우를 소환하는 조서를 내렸다.
적미군은 양식이 없으니, 자연히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니라. 내가 말을 채찍질하는 지팡이를 꺾어 그들을 매질할 것이니, 장수들이 근심할 바가 아니로다. 다신, 함부로 군사를 출동시키지 말지어다.

등우는 서쪽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음에도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에 여러 차례나 굶주린 병사들을 데리고 싸움을 했으나, 그때마다 불리했다. 27년(건무 3년) 봄에 등우가 거기장군 등홍(鄧弘)과 함께 적미군을 공격했다. 그런데 여기서 패하는 바람에, 병사 대부분이 죽거나 달아났다.[14] 등우는 홀로 스물네 기(騎)만을 데리고 의양(宜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죄하며 대사도와 양후의 인수를 반납했다. 광무제는 조서로, 양후의 인수를 등우에게 되돌려줬다. 몇 달 뒤에, 등우는 다시 우장군에 임명됐다.

연잠은 동양(東陽)에서 패한 뒤, 곧바로 진풍(秦豐)과 연합을 했다. 28년(건무 4년) 봄, 연잠이 다시 순양(順陽)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광무제는 등우를 보냈다. 등우는 복한(復漢)장군 등엽(鄧曄)과 보한(輔漢)장군 우광(于匡) 등을 거느리고, 등현(鄧縣)에서 연잠을 공격했다. 여기서 등우는 연잠의 군대를 무너트렸는데, 무당(武當)까지 추격해서 다시 한 번 쳐부수었다. 이에 연잠은 한중(漢中)으로 달아났고, 잔당은 모두 항복했다.
37년(건무 13년), 천하가 평정되자 공신들의 식읍이 모두 늘어났다. 등우는 고밀후(高密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고밀, 창안(昌安), 이안(夷安), 순우(淳于) 등 네 현[15]을 식읍으로 받았다. 광무제는 등우의 공이 높다는 이유로, 그의 아우 등관(鄧寬)을 명친후(明親侯)로 봉했다. 전쟁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등우의 후·좌·우장군의 직책을 없애고,[16] 등우는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17]

56년(건무중원建武中元 원년), 등우는 다시 사도의 일을 맡았다. 광무제가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는 곳에 따라갔고, 태산에서 천제를 지내는 것에 참여했다.
광무제와 음(陰)황후의 넷째 아들인 유장(劉莊)은, 광무제의 뒤를 이어 후한의 제2대 황제인 명제가 된다. 즉위한 명제(明帝)는 등우가 선제의 원훈(元勳)이라는 이유로, 태부(太傅)에 임명했다. 그리고 등우가 알현할 때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도록 하는 등, 등우를 대단히 존중하고 총애했다.[18]

등우는 1년여 후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명제는 여러 차례 친히 병문안을 갔고, 등우의 두 아들을 낭(郎)[19]으로 삼았다. 등우는 58년(영평永平 원년)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원후(元侯)다. 명제는 등우의 봉지를 세 나라로 나누고, 맏아들 등진(鄧震)은 고밀후에, 둘째 아들 등습(鄧襲)은 안창후에, 셋째 아들 등진(鄧珍)은 이안후에 각각 봉했다.

3. 성품

등우는 재능이 뛰어난 데다, 행동이 독실하고, 성격이 순수하여 결점이 없었다. 그리고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천하가 안정되고 난 뒤, 등우는 늘 명성과 권세를 멀리하려고 했다. 자식은 13명을 두었는데, 각기 하나의 학예를 갖게 했다. 집안을 단속하고 자손을 가르치는 등우의 방식은, 모두 모범이 될만했다. 쓸 돈은 식읍에서 마련했고, 재산을 모으기 위해 힘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광무제는 등우를 더욱 중히 여겼다.

4. 여담

  • 광무제 유수는 평소에 등우를 서한삼걸(西漢三杰)[20]에 비유하며 그 공을 치하했는데, 그만큼 등우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 782년 안진경이 당 덕종에게 건의해서 고대 명장 64명을 추봉하고 사당에서 제사를 모셨는데, 등우는 ‘후한태부고밀후등우(後漢太傅高密侯鄧禹)’로 모셨다.
  • 북송 때인 1123년에는 당나라 때의 관례에 따라, 72명의 명장을 위해 사당을 세웠다. 등우는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 1388년 명나라 태조가 역대 공신 37명을 역대 제왕의 사당에 배향했는데, 후한의 대신으로는 등우와 "풍이" 두 사람뿐이었다.
  • 등우의 무덤은 허난성 지위안시에 남아있다. 무덤 높이는 8미터고, 무덤 앞에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해서체로 “한선현중화등우지묘(漢先賢仲華鄧禹之墓)”라 새겨져 있다. 문화대혁명 때, 무덤의 일부가 훼손됐다.


[1] 전한 말 ~ 후한 초다. [2] 운대 28장에서, 등우는 서열 1위다. [3] 등우는 이십팔수 중에서, 동방 창룡의 첫 번째 별자리인 각수(角宿)를 관장한다. [4] '죽백'은 대나무와 비단이란 말로, 죽간과 백서를 뜻한다. 이것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된 서사(書寫) 도구다. 보통 죽백이라고 하면, 서책이나 역사를 일컫는 말로 대신 쓰인다. 여기서 등우가 죽백에 공명(공훈을 세운 이름)을 드리우겠다고 한 것은, 작은 벼슬에 만족하지 않고 나라를 세우는 큰 일에 참가해서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는 큰 포부를 밝힌 것이다. 『후한서』「등우전」에 나오는 이 말로 인해,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이라는 성어가 널리 유행하게 됐다. [5] 당시 장안 부근의 땅을 세 구역으로 나눴는데, 그곳의 책임을 맡은 지방 장관을 '삼보'라고 말했다. 즉, 장안에서 이동의 경조윤(京兆尹), 장릉(長陵)이북의 좌빙익(左馮翊), 위성(渭城) 이서의 우부풍(右扶風)을 가리킨다. 삼보는 한무제 때 처음으로 설치됐다. [6] 고조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 기원전 256~195)을 말한다. [7] 유수의 그릇이 워낙 크기 때문에 천하로는 부족하다는 뜻. 즉, 유수의 대단함을 칭송하는 것이다. [8] 군국이란, 군과 국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한나라 초기에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동시에 채택하고, 전국을 군과 국으로 나눴다. 군은 중앙 정부에 속하고, 국은 왕과 후(侯)에게 분봉됐다. 그래서 '왕'에게 봉해진 나라를 왕국(王國)이라 하고, '후'에게 봉해진 나라를 후국(侯國)이라 불렀다. 남북조 때에도 군과 국을 함께 두는 제도는 그대로 존속됐다. 수나라 때에 와서야, 비로소 국이 폐지되고 군만 남게 됐다. 그 뒤로는 지방 행정 구역을 일반적으로 군국이라 일컫게 됐다. [9] 안연(기원전 521~490)은 이름이 회(回)며, 공자의 수제자로서 안빈낙도(安貧樂道)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10] 오품은 오상(五常)을 말한다. 아버지는 의롭고(父義), 어머니는 자애롭고(母慈), 형은 우애가 있고(兄友), 아우는 공경하며(弟恭), 아들은 효도하는(子孝) 것이다. [11] 찬(酇)은 당시 남양군에 속한 현이다. [12] 좌보는 바로 좌빙익을 말하며, 삼보(三輔)에는 모두 도위가 있었다. [13] 장안에서, 장릉 이북 구역을 말한다. 인물의 이름이 아니다. [14] 이 일은 「풍이」 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15] 고밀은 당시 나라였고, 창안과 이안은 모두 고밀국에 속해 있었다. 순우는 북해군(北海郡)에 속한 현이었다. [16] 전장군·후장군·좌장군·우장군은 정벌을 주로 하고, 모두 일이 끝나면 직책이 없어진다. [17] 봄에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가을에 알현하는 것을 ‘청(請)’이라 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조회에 참가하는 것을 '봉조청'이라 한다. 한나라 때는 퇴직 대신, 장군·황실·외척들이 대부분 봉조청이라는 명의로 조회에 참가했다. 진(晉)대에는 봉거도위(奉車都尉)·부마도위(駙馬都尉)·기삼도위(騎三都尉)가 봉조청이 됐다. [18] 원래 군주는 남면(南面)을 하고, 신하는 북면(北面)을 하는 것이 법도다. 그런데 명제는 등우를 손님처럼 존중해서, 등우가 동향을 하도록 한 것이다. [19] 낭은 황제의 시종관이다. [20] 장량·소하·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