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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裒
(?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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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서진 시기의 인물. 자는 위원(偉元). 왕의의 아들, 정사 삼국지 배송지 주석 왕은의 진서에서는 '王襃'라고 하는데 뜻은 똑같이 '모을 부'다. 청주 성양군 영릉현 사람.2. 생애
아버지 왕의가 252년의 동관 전투에서 책임을 묻는 일로 사마소에게 살해당하자 왕의가 비명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숨어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살았으며, 조정에서 3번, 군국에서 7번을 불렀지만 사양했다. 아버지 묘 옆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아 밤낮으로 항상 묘소에 절하면서 꿇어 앉아 잣나무를 붙잡고 울었는데, 눈물이 나무에 닿으면 나무가 말라죽었다.시경을 읽다가 육아 편의 "애닯고 애달프다, 우리 부모님이여! 나를 낳으심에 수고로우셨네."라는 글귀에 이르면 세 번을 반복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제자들은 육아 편을 빼고 읽지 않았다.
집이 가난해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식구 수를 계산해 밭을 갈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몰래 도와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왕부는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진나라가 건국되자 왕부는 평생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앉지 않는 것으로 진나라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311년에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었고 친척들은 모두 강남으로 피난했는데, 왕부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다가 난리에 휘말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