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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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王湛(249 ~ 295)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처충(處沖)으로 관직이 여남태수(汝南太守)까지 올라가서 왕여남이라고도 부른다. [1] 왕창의 아들, 왕승의 부친. 병주 태원군 진양현 사람. 생김새로는 키가 7척 8촌에 달했고, 용처럼 높이 솟은 이마와 큰 콧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들 왕승은 서진에서 동해태수를 지내다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 갔고, 이후 손자 왕술 대부터 동진에서 여러 현직을 두루 역임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번창했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과묵하여 말수가 적었으나, 견식과 도량이 있어 몰래 은혜를 베풀면서 이를 남에게 알리지 않으니, 왕담의 형제들은 모두 그가 어리석다 생각했다. 젊었을 때 중매가 들어오지 않자 아버지 왕창에게 스스로 학보(郝普)의 딸과 결혼시켜달라고 했다. 학보는 가문이 매우 비천해서 명문가인 왕담이 혼인할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아버지 왕창은 아들이 어리석어 좋은 혼처를 못 구할 것이라 생각해 허락했다.[2] 결혼한 뒤에 보니 그녀는 훌륭한 자태와 현숙한 품덕을 지녔고, 훗날 왕승을 낳아 왕씨 일족 중에서 어머니의 모범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왕담에게 어떻게 그녀가 훌륭한 것을 알아보았냐고 물으니, 왕담은 일찍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을 보았는데, 행동거지가 법도를 잃지 않았고 함부로 두리번거린 적이 없었기에 그녀를 알아보았다고 했다.감로 4년(259년), 아버지 왕창이 죽자 3년간 시묘살이를 끝내고나서도 계속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기거했는데, 당시 유명 인사들과는 친분이 없거나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일이 없어서 친척들 사이에서는 바보로 통했다. 사마염의 사위이자 왕담의 조카인 왕제는 조부의 묘소를 참배할 때에 왕담에게 들리는 일이 거의 없었고, 왕담도 왕제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왕제가 왕담에게 들렸다가 침상에 놓인 주역을 보고,
"숙부는 이것을 어디에 쓰십니까? 좀 읽어보셨습니까?"
라 물었고, 왕담은 담담히,
"몸 상태가 좋을 때 어쩌다 읽는데, 오늘 너랑 한 번 얘기해보자."
라 답했다. 왕제는 이야기를 나눈 뒤에 왕담의 깊은 학식과 언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어서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대화가 끝나고 왕담이 왕제를 전송할 때, 일행 중에 너무 사나워서 탈 수 있는 사람이 드문 말이 있어서, 왕제는 왕담에게 혹시 말타기도 좋아하냐고 불쑥 물었다. 왕담은 그것도 좋아한다면서 그 말에 올라타서 현란한 기마술을 보여주자, 왕제는 삼촌의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라고 더욱 감탄했다. 왕제는 본래 삼촌 왕담을 무시해 예의를 갖추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왕제가 집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 왕혼이 왜 며칠이나 걸렸냐고 묻자, 오늘에야 숙부 한 명을 새로 알게 되어 늦었으며, 숙부는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왕제가 장인인 사마염을 알현할 때, 사마염은 왕담을 비웃으면서 그 바보 삼촌이 아직도 살아있냐고 묻고 왕제는 늘 대답을 못했는데, 왕담의 재능을 안 뒤로는 사마염이 또다시 그런 농담을 걸자 왕제가 삼촌은 바보가 아니라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으며, 산도보다는 못하지만 위서보다는 더 뛰어나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왕담은 나를 계손씨와 맹손씨 사이에 두려는 거냐고 농담했다.[3]
이후 28세부터 벼슬길에 올라, 진왕문학(秦王文學), 태자세마(太子洗馬), 상서랑(尙書郞),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여남내사(汝南內史)를 거쳐 여남태수까지 올랐다. 태강 원년(280년), 형 왕혼이 오나라 정벌에 공을 세우자, 왕담도 관내후[4]에 봉해졌다.
원강 5년(295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아들 왕승이 후사를 이었다.
[1]
왕희지가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내서 왕우군이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
[2]
세설신어 주석에 따르면 학보는 낙양태수까지 지냈지만, 가문이 비천했다는 언급도 동시에 나온다.
[3]
논어 미자(微子) 편에 나오는 구절로
제경공이
공자를 계손씨처럼 대우할 수는 없지만 계손씨와 맹손씨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고 말한 일화.
[4]
이십등작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