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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영어 | The Journals of the Royal Secretariat | |
프랑스어 | Les Journaux du Secrétariat Royal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서울 | |
소장·관리 | 서울대학교 규장각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01년 | |
제작시기 | 1623년 ~ 1910년 |
대한민국 국보 제303호 | |
<colbgcolor=#315288>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 |
|
<colcolor=#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림동,서울대학교)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일기류 |
수량/면적 | 3,243책 |
지정연도 | 1999년 4월 9일 |
제작시기 | 인조 1년∼ 순종 4년(1623∼1910) |
[clearfix]
1. 개요
조선에는 승정원이라는 기구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곳으로, 왕과 부서들 간의 소통을 맡아 각종 서류들을 정리해 왕에게 올려서 보고를 하고 왕이 내린 명령을 부서들에 전달하는 비서실의 소임을 맡았다.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비교하면, 청와대와 대한민국 국회에서 기록하는 공식업무일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승정원에서 왕이나 부서들에서 올라온 일들을 시시콜콜 기록한 기록물이 승정원일기이며, 조선왕조가 시작된 이후부터 작성되어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도중에 이름이 몇 번 바뀌었지만, 역사가들도 편의를 위해 그냥 승정원일기라고 통일하여 부른다.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를 대표하는 세계기록유산이자, 한국사(특히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 하는 기록물이며, 대한민국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방대함
안타깝게도 승정원일기는 완전하게 후대에 전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기록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재로 모조리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시 시작한 기록분도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또 타버렸고 영조 시대에 또 다시 불타 일부 기록이 또 소실되었으며 세손이 요청하여 사도세자 사건이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파기되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기록은 인조 1년(1623)에서 조선이 경술국치로 멸망한 순종 4년(1910)까지 287년 정도 분량이다. 이전 일기들과 중간중간 있었던 기록들이 소실됨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토록 많은 분량이 소실된 결정적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서너 곳의 사고에 보관한 반면, 승정원일기는 필사본 1부만 제작 보관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렇게 많은 양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정원일기는 그 분량이 심히 엄청나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4964만 6667자인데, 현재 남은 승정원일기는 대략 2억 4250만 자이다.[1]
게다가 승정원일기는 1차 사료인 데다가[2] 기록도 매우 세세하고 공문서의 성향이 강해서 사관의 성향에 따라 기록이 첨삭될 우려가 있는 실록보다도 실제 역사에 더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모든 국정을 기록한 자료이니만큼 조선사뿐만 아니라 조선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세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만약 승정원일기가 온전히 현대까지 전해졌다면 조선 전체 역사를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었을테니 소실된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유네스코에서도 승정원일기를 2001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3. 구성과 내용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고 사서를 만들기 위한 1차 공문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세분화되고 쓰는 방법이 체계적이었다.일단 가장 서두엔 일기답게 당연히 날짜가 들어간다. 여기엔 연호[3] 육십갑자년, 월일시, 날씨까지 기록하였다. 매시간 대마다 새로 하였으며 날씨의 변화 정도와 측우기를 통한 강수량의 정도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기본적으로는 왕이 거한 궁을 중심으로 기록하지만, 행궁으로 행차 시에는 행궁과 본궁 양쪽을 기록하여 조선의 날씨 연구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해무리가 끼었다 안개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시거리 어느 정도로 끼었다, 몇 시에 개었다 등 날씨의 수준도 대단히 세밀하게 작성했다.
또 임금의 경연 장면에서는 왕이 언제, 어디서, 어떤 신하들과(모든 참석자 이름을 다 나열함) 경연을 하였고, 저번에 읽다 만 어떤 책의 어디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읽었으며, 임금이 평한 내용과 신하가 평한 내용,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계속해서 책 내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는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러한 기사에 나온 것을 읊으면 그냥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과 같다. 의원이 임금의 건강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어제 왕의 건강상태가 어떠어떠하였으며 요즘 날씨가 환절기라 일찍 기침을 하면 몸에 안 좋을 수가 있다는 내용과 그날 임금의 맥박이 어떠어떠했다는 등 내용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다음 칸에는 이 시간대의 근무한 승지와 일기를 작성한 주서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이를 좌목(座目)이라고 한다.
좌목의 다음에는 국왕의 위치와 현재 업무 상황[4]이 적히고 중요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왕비, 대비, 세자 등의 안부가 나온다. 날짜와 좌목에 이어서 여기까지도 정형화된 불변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기의 본문인 그날의 국정이 대화와 처결 여부를 포함하여 기록했다. 여기에 포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각 관서에서 국왕에게 올린 문서와 거기에 대한 국왕의 결재여부와 후속처치
- 의정부의 인사행정, 여러 상소와 장계
- 당일에 근무하는 승정원 소속 관리 명단
- 당일 국왕의 행적
- 국왕 & 신하 간 모든 토론 대화내용
- 그 날 임금의 진료여부와 처방받은 약의 약방문
공문서 성격을 띠는 터라 유생 1만여 명이 연대하여 사도세자 신원을 상소하자( 만인소) 관련자 1만 57명의 이름을 적어놓은 사례도 있으니 할 말 다한 셈. 영조대 청계천 공사에 대해서도 실록이 홍봉한 등과 대화한 것을 몇 줄로 간략히 처리했다면 승정원일기에서는 대화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기록 분량만 비교해도 몇 자 vs 몇 장의 차이.
임금이 말씀하시길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이 말하길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강가의 집들은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임금이 말씀하길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한다 해도 모래와 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이 말하길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한성 안으로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이 말하길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합니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 보라."
ㅡ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 5월 2일.
"저번에 광충교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이 말하길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강가의 집들은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임금이 말씀하길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은 듯 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한다 해도 모래와 흙을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이 말하길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번 시험해 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며 말씀하시길
"한성 안으로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이 말하길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합니다."
임금이 말씀하시길
"사관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 보라."
ㅡ 《승정원일기》 영조 34년(1758) 5월 2일.
임금이 준천의 가부를 물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1758) 5월 2일.
ㅡ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1758) 5월 2일.
정조 1년(1777) 7월 28일, 새벽에 궁궐 옥상에서 기와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지어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조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수색을 명령했더니, 사람이 기와를 차서 깬 듯한 자국이나 모래를 밟은 자국이 발각되었다. #[5] 이 일이 발각된 후 기사를 비교해보자.
(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말씀하시길
"조금 전에 별감들에게 먼저 차비문 안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경(홍국영)의 말이 매우 옳다. 경은 금위대장도 맡고 있으니 금군 20명을 인솔하여 승헌문에서부터 무덕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하고, 또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 20명에게 궁궐의 담장 안을 순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홍국영이 말하길
"그러면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는 표신을 풀어 보냅니까?"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이 급박하니 지체할 수 없다. 경이 영전으로 인솔하면 되겠다."
ㅡ 《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7월 28일
임금이 말씀하시길
"조금 전에 별감들에게 먼저 차비문 안밖을 수색하게 하였는데 경(홍국영)의 말이 매우 옳다. 경은 금위대장도 맡고 있으니 금군 20명을 인솔하여 승헌문에서부터 무덕문에 이르기까지 두루 수색하고, 또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 20명에게 궁궐의 담장 안을 순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홍국영이 말하길
"그러면 연화문에 숙직하는 군사는 표신을 풀어 보냅니까?"
임금이 말씀하시길,
"일이 급박하니 지체할 수 없다. 경이 영전으로 인솔하면 되겠다."
ㅡ 《승정원일기》 정조 1년(1777) 7월 28일
(홍국영이 "자객이 새나 짐승이 아니면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을 터이니,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길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1777) 7월 28일.
임금이 그것을 옳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1777) 7월 28일.
승정원일기의 마지막 내용은 한일합방조약에 따라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이양함을 선포한 경술국치이다.
隆熙 四年 八月 二十九日 月曜 晴 / 陰 庚戌 七月 二十五日 丙寅
卿 趙同熙 進。
記注官 金天洙 進 李龍九 進。
典製官 金裕成 圖書課進 尹喜求 進。
主事 趙秉億 進 趙性翕 進 鄭樂鵬 進 張錫駿 進。
上在昌德宮。
勅諭, 皇帝若曰, 朕이 否德으로 艱大ᄒᆞᆫ 業을 承ᄒᆞ야 臨御以後로 今日에 至토록 維新政令에 關ᄒᆞ야 亟圖ᄒᆞ고 備試ᄒᆞ야 用力이 未嘗不至로ᄃᆡ 由來로 積弱이 成痼ᄒᆞ고 疲弊가 極處에 到ᄒᆞ야 時日間에 挽回ᄒᆞᆯ 施措無望ᄒᆞ니 中夜憂慮에 善後ᄒᆞᆯ 策이 茫然ᄒᆞᆫ지라 此를 任ᄒᆞ야 支離益甚ᄒᆞ면 終局에 收拾을 不得ᄒᆞ기에 自底ᄒᆞᆯ진 則無寧히 大任을 人에게 托ᄒᆞ야 完全ᄒᆞᆯ 方法과 革新ᄒᆞᆯ 功效ᄅᆞᆯ 奏케ᄒᆞᆷ만 不如ᄒᆞᆫ 故로 朕이 於是에 瞿然히 內省ᄒᆞ고 廓然히 自斷ᄒᆞ야 玆에 韓國의 統治權을 從前으로 親信依仰ᄒᆞ든 隣國大日本皇帝陛下긔 讓與ᄒᆞ야 外으로 東洋의 平和를 鞏固케ᄒᆞ고 內으로 八域民生을 保全케ᄒᆞ노니 惟爾大小臣民은 國勢와 時宜를 深察ᄒᆞ야 勿爲煩擾ᄒᆞ고 各安其業ᄒᆞ야 日本帝國文明新政을 服從ᄒᆞ야 幸福을 共受ᄒᆞ라。 朕의 今日此擧ᄂᆞᆫ 爾有衆을 忘ᄒᆞᆷ이아니라 爾有衆을 救活ᄒᆞᄌᆞᄒᆞᄂᆞᆫ 至意에 亶出ᄒᆞᆷ이니 爾臣民等은 朕의 此意를 克體ᄒᆞ라。
內閣書記官長勳一等韓昌洙特賜太極章, 掌禮院樂師長勳六等白禹鏞特陞敍勳五等, 賜八卦章。 財務官勳五等趙在榮特陞敍勳四等, 賜八封章。
卿 趙同熙 進。
記注官 金天洙 進 李龍九 進。
典製官 金裕成 圖書課進 尹喜求 進。
主事 趙秉億 進 趙性翕 進 鄭樂鵬 進 張錫駿 進。
上在昌德宮。
勅諭, 皇帝若曰, 朕이 否德으로 艱大ᄒᆞᆫ 業을 承ᄒᆞ야 臨御以後로 今日에 至토록 維新政令에 關ᄒᆞ야 亟圖ᄒᆞ고 備試ᄒᆞ야 用力이 未嘗不至로ᄃᆡ 由來로 積弱이 成痼ᄒᆞ고 疲弊가 極處에 到ᄒᆞ야 時日間에 挽回ᄒᆞᆯ 施措無望ᄒᆞ니 中夜憂慮에 善後ᄒᆞᆯ 策이 茫然ᄒᆞᆫ지라 此를 任ᄒᆞ야 支離益甚ᄒᆞ면 終局에 收拾을 不得ᄒᆞ기에 自底ᄒᆞᆯ진 則無寧히 大任을 人에게 托ᄒᆞ야 完全ᄒᆞᆯ 方法과 革新ᄒᆞᆯ 功效ᄅᆞᆯ 奏케ᄒᆞᆷ만 不如ᄒᆞᆫ 故로 朕이 於是에 瞿然히 內省ᄒᆞ고 廓然히 自斷ᄒᆞ야 玆에 韓國의 統治權을 從前으로 親信依仰ᄒᆞ든 隣國大日本皇帝陛下긔 讓與ᄒᆞ야 外으로 東洋의 平和를 鞏固케ᄒᆞ고 內으로 八域民生을 保全케ᄒᆞ노니 惟爾大小臣民은 國勢와 時宜를 深察ᄒᆞ야 勿爲煩擾ᄒᆞ고 各安其業ᄒᆞ야 日本帝國文明新政을 服從ᄒᆞ야 幸福을 共受ᄒᆞ라。 朕의 今日此擧ᄂᆞᆫ 爾有衆을 忘ᄒᆞᆷ이아니라 爾有衆을 救活ᄒᆞᄌᆞᄒᆞᄂᆞᆫ 至意에 亶出ᄒᆞᆷ이니 爾臣民等은 朕의 此意를 克體ᄒᆞ라。
內閣書記官長勳一等韓昌洙特賜太極章, 掌禮院樂師長勳六等白禹鏞特陞敍勳五等, 賜八卦章。 財務官勳五等趙在榮特陞敍勳四等, 賜八封章。
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경 조동희(趙同熙) 올리다.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올리다. 이용구(李龍九) 올리다.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올리다. 윤희구(尹喜求) 올리다.
주사 조병억(趙秉億) 올리다. 조성흡(趙性翕) 올리다. 정낙붕(鄭樂鵬) 올리다. 장석준(張錫駿) 올리다.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경 조동희(趙同熙) 올리다.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올리다. 이용구(李龍九) 올리다.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올리다. 윤희구(尹喜求) 올리다.
주사 조병억(趙秉億) 올리다. 조성흡(趙性翕) 올리다. 정낙붕(鄭樂鵬) 올리다. 장석준(張錫駿) 올리다.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이 기사를 작성한 이후 승정원(정확히 말하면 1910년 당시 궁내청 내명부 시종원)은 한국통감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6]
4. 작성 방법
이름은 승정원일기라서 승정원의 핵심인 승지가 작성할 것 같지만, 승정원일기는 주서 2명[7]이 주로 작성했다.두 사람이 2부제로 하루 업무의 반씩을 담당해 국왕의 모든 행정처리와 회의에 참여하여 속기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속기록이 초책(草冊). 당연히 혼자서 하다보니 모자라는 부분이 있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른 승정원 직원들이나 사관들에게 물어서 채워넣었다고 한다. 속기 외에 올라온 상소문과 같은 자료는 주서가 아닌 서리가 베껴서 첨부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에 두개씩 나오는 초책들을 모아서 한 달 혹은 반달마다 모아서 책[8]으로 만들어 일월년을 기록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5. 번역과 전산화
이렇게 엄청난 기록유산임에도, 번역을 끝마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일반인이 접하기 어렵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에서 말한 엄청난 분량. 조선왕조실록만 번역하는 데 몇 년은 넘게 걸렸는데 적게 잡아도 실록의 5배는 될 엄청난 분량을 번역하려면 엄청 오래걸린다.
- 초서의 압박.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처럼 임금이 바뀔 때마다 최종 정리를 위해 역사서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날그날의 각종 공무에 대해 기록한 자료의 누적본에 가깝다. 그래서 승정원일기에는 초서가 많이 쓰이는데 초서를 이해하는 데는 별도의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해독이 쉽지 않았었다. 일단 승정원일기 전산화 작업을 통해 초서를 정자로 풀어쓰는 작업은 끝냈다.[9] 그러나 이걸 번역하는 게 문제인데 지금도 수많은 학자들이 승정원일기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 중이지만 완전히 번역하려면 앞으로도 최소한 수십 년에서 길게는 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10]
당연하지만, 승정원일기의 번역이 완전히 끝난다면 조선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외국 사절 방문과 그 내용 그리고 당시 조선에 떠돌던 외국의 뜬소문까지 포함된다면 일본, 중국, 오키나와 역사도 어느 정도 다시 써야 할 정도로... 더불어 모든 작업을 완료한다면 조선말 실록 중 순조실록,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분량 자체가 적은 데다가 기록이 워낙 부실하고, 고종 순종실록은 일제가 만들어서 역사왜곡이 상당히 심하기에 일기가 주요 사료가 되고 실록이 보충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세도정치기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부분만 보면 아주 먼 일도 아닌 게 고종 시기의 번역이 완료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순서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실록의 내용이 부실해서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중요한 시대의 것을 우선하여 번역하는 듯하다.
인조시대(1623~1649) 승정원일기 번역본. 중간에 두 차례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사초와 사료를 많이 날려먹어 다른 시대에 비해 양이 적다. 적은 게 저 만큼이다.
승정원일기 본문 전산화는 2015년에 마무리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1년부터 시작한 승정원일기 DB 구축을 완료했으며 2015년 12월까지 홈페이지 업데이트를 끝마쳤다. 방점이 없이 적힌 한문에 표점을 찍어서 문장 구별을 하는 작업을 위해 한학자, 역사학자 등 전문 인력이 연 130∼140명씩 투입됐다. 국편은 DB 작업을 마친 책부터 업데이트를 해왔고, 철종과 고종대 일부가 포함된 남은 책도 2015년 내에 모두 업데이트했다. 승정원일기가 워낙 방대한 역사물이어서 국내에서 이 정도 규모의 사료를 DB화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 승정원일기 물론, 세계 기준으로 보면 이미 중국과 대만에서는 더 큰 규모의 DB화가 90년대 말에 이뤄진 전례가 있으며, 타 언어권에선 60년대부터 고문헌의 전산화가 활발해서 딱히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건 원문이 다 데이터베이스화 되었다는 소리지 국문화까진 아직 먼 얘기라서, 승정원일기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진행 중이며 위에서도 나왔듯이 수십 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한다. 1994년부터 시작된 승정원일기 번역은 고종[11], 인조[12], 순종[13] 시기 승정원일기 번역을 끝냈으며 지금은 영조 시기 승정원일기를 번역 중이다.[14] 해석본은 한국고전종합DB라는 곳에서 볼 수 있다. 2017년 한국고전번역원의 ‘인공지능 기반 고전 문헌 자동 번역 시스템 구축 사업’이 이루어져 예상되는 번역 기간이 기존의 45년에서 18년으로 단축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2017년 7월 시스트란이 이 사업을 수주하였다. # #
바로 위에 언급된 시스트란에서 만든 AI의 성능이 꽤 좋은 듯하다. 성능 자체는 아직 전문번역가의 70% 수준이라 초벌번역을 하면 전문번역사가 검토해서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는 하는데, 초벌번역이라도 해주는 게 인력 절감에 엄청난 도움이 되는지 이 AI와 병행하면서 번역하면 2062년으로[15] 예상하는 완역 시점을 30년은 앞당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한다. 2021년 기준 진행률은 32.3%로 총 2,395권 중 774권이 완료.
2018년도 국정감사에서는 전문인력 부족으로 인해 남북 공동번역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 바 있다. 이후 별개로 2021년 중앙대학교 김영빈 교수 연구팀이 조선왕조실록 데이터 기반 AI를 이용해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만에 초벌번역에 성공하여 완역까지 소요될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저런 번역 프로그램들의 발전 덕분에 승정원일기의 완역은 늦어도 2030년대에는 볼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많다.
5.1. 자동 번역 베타 서비스 오픈
아직 공식적으로 완역이 된 것은 아니지만, 2021년 1월 14일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이 2017~19년간 약 3년동안 개발한 인공신경망 기반 번역 모델을 일반인을 대상으로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 자동번역 서비스 위에서 언급된 AI기술 기반 번역서비스를 일반에 베타버전으로 공개함으로써, 승정원일기 원문을 긁어와 초벌번역 수준으로는 한글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구글이나 네이버 번역서비스와 같은 방식으로 원문을 붙여넣으면 번역을 제공해준다. 현재는 한번에 300자까지 번역이 가능하며, 세로쓰기 마침표(고리점)를 넣어줘야 번역이 더 깔끔하게 진행됨을 공지하고 있다. 앞으로 연구분야나 일반인들에게 승정원일기 전체 내용이 좀 더 개방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2060년 이후에나 완역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는데,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으로 일반인들도 원하는 부분을 찾아서 자동번역 시스템을 통해 (비록 완전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이해가능한 수준의 번역문을 얻을 수 있다. 놀라운 발전이다.
예시로 번역을 돌려본 기사이다. 저 기사는 승정원일기 1206책(탈초본 67책) 영조 38년 윤5월 13일[16] 중 한가지 기사를 임의로 뽑아 번역한 것이다. 생각보다 번역의 질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다만 건강을 뜻하는 '기'를 천문학의 '기'로 해석하도록 달린 어휘풀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부제조[17] 조영진을 조영세로 번역했는데, 사람 이름은 고유명사라 한글-한자 변환만 하면 되는데 틀렸다(...) 이를 보면 어느정도 한문 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유용할 것으로 보이나, 아직까지는 한문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무작정 이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문장이 길어지면 번역 시간도 수 초~십여초 정도로 길어지는 듯 하다.
이 기술이 좀 더 일반적으로 발전해서, 아직까지 중국에서도 시험적으로만 존재하는 고전 한문에 대한 기계번역 서비스가 제공되면, 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훨씬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6. 기록의 철저함
조선왕조실록이 사관들의 깐깐하고 철저한 기록으로 유명하지만, 승정원일기도 그에 못지 않다. 한 예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결정짓고 이후 사태 수습과 처리 방안등을 논의하기 위해 삼전도의 굴욕 전날 김류와 이홍주, 최명길을 호출했다. 이때 인조는 승지였던 이경직[18]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 쓰지 마라." 명했는데 이경직은 "밀담이라 기록하지는 못했다."라며 엿들은 이야기를 전부 써두었다.이른 아침에
김류, 이홍주,
최명길이 청대하였다.
주상이 침전(寢殿) 안으로 들어올 것을 명하여 밀담을 나누었는데, 승지와 사관은 문밖에 있었으므로 밀담을 기록하지 못하였다.[19]
상이 이경직에게 명하기를
"오늘 한 말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사책에는 쓰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눈앞의 위급한 일은 인보(印寶)와 가도(椵島)에 관한 일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인보를 잠시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엄한 위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조종(祖宗)에서 전해 온 구물(舊物)을 차마 하루아침에 마멸할 수가 없으니, 조묘(祖廟)에 보관해 두고 새로 새 인보를 받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저들도 혹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여울물을 건널 수 없으니, 오늘 가는 것은 반드시 배가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말했지만 오늘도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은 지금 이영달(李英達)을 시켜 보내되 저들과 수작하는 일이 반드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밀담이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
인조 15년(1637) 1월 29일. 청대한 김류 등이 입시하여 인보와 가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규장각 원본 이미지, 한문, 국역
상이 이경직에게 명하기를
"오늘 한 말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사책에는 쓰지 말라."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눈앞의 위급한 일은 인보(印寶)와 가도(椵島)에 관한 일이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인보를 잠시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 '엄한 위엄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가져오긴 했지만 조종(祖宗)에서 전해 온 구물(舊物)을 차마 하루아침에 마멸할 수가 없으니, 조묘(祖廟)에 보관해 두고 새로 새 인보를 받기를 원한다.'라고 한다면 저들도 혹 옳게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백관들이 여울물을 건널 수 없으니, 오늘 가는 것은 반드시 배가 있어야 가능할 듯하다." 하니,
최명길이 아뢰기를
"어제 이미 말했지만 오늘도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척화한 사람은 지금 이영달(李英達)을 시켜 보내되 저들과 수작하는 일이 반드시 처리되기를 기다렸다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밀담이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
인조 15년(1637) 1월 29일. 청대한 김류 등이 입시하여 인보와 가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규장각 원본 이미지, 한문, 국역
기록하지 말라 했는데도 기록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 멘트까지 서술해둔 이경직의 태도가 압권이다. 이경직에게 인조가 직접 쓰지 말라고 했었으니,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무튼 밀담임 아무튼 정도라고 보면된다. 물론 사책, 다시 말해 실록에 적지 말라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경직이 왕의 말을 거역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아니었다.[20] 실제로 이 내용은 실록에는 빠졌다.
7. 의의
승정원일기는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기록유산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꼭 봐야 하는 기록물이다. 대략 2억 4250만 자라는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의 모든 국정을 기록한 자료이니만큼 조선사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주변국들의 정세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8.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승정원일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승정원일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승정원일기
- 기록학용어사전 : 승정원일기
- 네이버캐스트 - 위대한 문화유산 : 승정원 일기
-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 승정원일기
- 두산백과 : 승정원일기
9. 국보 제303호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왕명의 출납, 각종 행정 사무와 의례(儀禮) 등에 관해 기록한 일기이다. 『승정원일기』는 편년체로 기록하였으며, 1개월분의 일기를 1책으로 만들었는데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2책으로 나누어 장정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기 세종대부터 작성되었으나 조선전기의 일기는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을 거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는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 288년간의 일기만 전해지고 있다. 조선후기에도 궁궐 화재로 인해 『승정원일기』가 소실된 경우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조보(朝報)』·『춘방일기(春坊日記)』·『일성록』 등을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승정원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인 주서(注書)가 담당하였다. 주서는 원래 2명이었다가 기록할 국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가주서(假注書) 1명이 추가되었고, 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 관련 기록을 전담하는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이 더 추가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는 2명의 주서와 2명의 가주서가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했다.
일기 작성 과정은, 먼저 주서들은 국왕을 수행하면서 국정 운영 내용을 속기한 ‘초책(草冊)'을 작성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매일의 일기를 정리하였다. 정리된 일기는 승정원의 서리가 정서하였으며 1개월분의 일기가 모이면 책으로 묶어 승지(承旨)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승지가 이를 다시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음으로써 일기가 최종 완성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총 3,243책 중 서명이 ‘승정원일기’인 것이 3,045책이고 나머지 198책은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전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후비서감일기’, ‘규장각일기’ 등으로 서명이 다르게 되어 있다. 이는 갑오개혁 이후 승정원의 명칭이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등으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자료인 만큼 국왕의 동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다. 특히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등이 축약 없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조선후기사 연구에 있어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승정원일기』의 작성은 승정원의 정7품 관원인 주서(注書)가 담당하였다. 주서는 원래 2명이었다가 기록할 국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가주서(假注書) 1명이 추가되었고, 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 관련 기록을 전담하는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이 더 추가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는 2명의 주서와 2명의 가주서가 『승정원일기』의 작성을 담당했다.
일기 작성 과정은, 먼저 주서들은 국왕을 수행하면서 국정 운영 내용을 속기한 ‘초책(草冊)'을 작성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매일의 일기를 정리하였다. 정리된 일기는 승정원의 서리가 정서하였으며 1개월분의 일기가 모이면 책으로 묶어 승지(承旨)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승지가 이를 다시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음으로써 일기가 최종 완성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총 3,243책 중 서명이 ‘승정원일기’인 것이 3,045책이고 나머지 198책은 ‘승선원일기’, ‘궁내부일기’, ‘전비서감일기’, ‘비서원일기’, ‘후비서감일기’, ‘규장각일기’ 등으로 서명이 다르게 되어 있다. 이는 갑오개혁 이후 승정원의 명칭이 ‘승선원’, ‘궁내부’, ‘비서감’, ‘비서원’ 등으로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한 자료인 만큼 국왕의 동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매우 자세하다. 특히 국왕과 신하들의 국정 논의 내용,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등이 축약 없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조선후기사 연구에 있어 1차 사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1년 9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0. 관련 영상
11. 관련 문서
[1]
순수하게 글자 수로만 462.5메가바이트. 650 MB짜리 CD 한 장을 2/3 이상 차지한다. 한글 한 글자가 고작 3바이트(
UTF-8 기준)임을 감안하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우는 수십 권에 달하는 대하소설도 고작 몇 메가바이트에 지나지 않는다.
[2]
승정원일기와 비교할 만한 1차 사료 중 사관들이 매일매일 기록한
사초는 실록이 편찬된 후 파기되었고(세초)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은 승정원일기에 비해 분량이 적다.
[3]
1644년 이전에는 명의 연호,
1644년에서
1895년까지는 청의 연호,
1895년 이후로는 조선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4]
현재 있는 궁이나 부서의 위치, 상참(常參 회의), 경연(經筵) 참석상황 등을 기록했다.
[5]
이 사건은 2014년 개봉한 영화
역린의 모티브가 되었다.
[6]
조선왕조실록은 경술국치 이후로도
순종실록 부록으로 순종이 죽을 때까지 좀 더 이어졌다.
[7]
승지는 정3품 주서는 정7품
[8]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1책=1권이 된다.
[9]
이렇게 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작업을 '탈초(脫草)'라고 한다.
[10]
약 290년 정도의 기록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번역 분량이 장난 아닌데 1994년부터 계속 번역 중이지만 완료 예정 연도는 2064년이다. 다시 말하지만, 소실된 200년 정도의 분량은 제외한 거다.
[11]
210권
[12]
76권
[13]
6권
[14]
482권
[15]
핼리 혜성이 지구에 가까이 오는 바로 다음 해다.
[16]
서기 1762년 6월 5일
[17]
조선시대 잡무와 기술계통의 중앙관서에서 겸직으로 각 관아를 통솔하던 정3품 당상관직.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부제조(副提調))
[18]
문서에도 나오지만,
종친으로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의 후손이다. 그리고 그의 막내동생은 병자호란 이후
삼전도비를 지은
이경석이며, 후손들 중에는 '육진팔광'이라 하여
강화학파를 가학(家學)으로 연구하였다.
[19]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자이고, 승지는
승정원 소속 정3품 관리를 이르는데, 현대식으로 보면 청와대 수석비서관 정도라고 보면 된다. 기록자
이경직은 주서로, 승정원의 정7품이었으며 현대식으로 보면 청와대 행정관 정도다.
[20]
승정원일기는 내용의 방대함 때문에 현대에는 역사 연구를 위한 주요 사료로 활용되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당시에는 그저 '공문서'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다. '국가가 편찬한 사서'는 아니기 때문에 '사책(史冊)'에는 포함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