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21:06:16

스벤예란 에릭손

스벤예란 에릭손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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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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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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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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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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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대, 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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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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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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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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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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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상하이 상강 역대 감독
시즈캉
(2013-2014)
스벤 예란 에릭손
(2014~2016)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201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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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벤예란 에릭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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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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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前 축구인
파일:Sven-Göran Eriksson.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스벤예란 에릭손
Sven-Göran Eriksson
출생 1948년 2월 5일
스웨덴 베름란드주 순네
사망 2024년 8월 26일 (향년 76세)
스웨덴 베름란드주 순네
국적
[[스웨덴|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웨덴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 윙백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토스비 IF (1966~1971)
SK 시펠라 (1971~1972)
KB 칼스코가 (1972~1973)
베스트라 프롤룬다 IF (1973~1975)
감독 데게르포르스 IF (1977~1978)
IFK 예테보리 (1979~1982)
SL 벤피카 (1982~1984)
AS 로마 (1984~1987)
ACF 피오렌티나 (1987~1989)
SL 벤피카 (1989~1992)
UC 삼프도리아 (1992~1997)
SS 라치오 (1997~2001)
잉글랜드 대표팀 (2001~2006)
맨체스터 시티 FC (2007~2008)
멕시코 대표팀 (2008~2009)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2010)
레스터 시티 FC (2010~2011)
광저우 푸리 (2013~2014)
상하이 둥야-상강 (2014~2016)
선전 FC (2016~2017)
필리핀 대표팀 (2018~2019)
행정 노츠 카운티 FC (2009~2010 / 단장)
BEC 테로 사사나 (2012 / 기술 이사)
알 나스르 FC (2013 / 기술 이사)
IF 칼스타드 포트볼 (2022 / 고문)
IF 칼스타드 포트볼 (2022~2023 / 단장)[1]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사망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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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1970년대 말에 지도자를 시작해 예테보리에서 리그와 UEFA컵 우승을, 벤피카에서 리그 3회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일구었고, 이후 라치오에서 세리에 A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며 명성을 쌓았다. 비록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사퇴한 뒤로 잉글랜드가 에릭손 시절보다 못한 성적을 내며 재평가를 받았다.[2]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다음으로 부임한 맨체스터 시티에서 실패한 후에는 커리어에서 별다른 반등을 이뤄내지 못했다.

2. 선수 경력

어린 시절부터 축구 선수를 꿈꿨고 18세부터 우측 윙백으로서 스웨덴 하부 리그에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선수 시절은 별볼일 없었다. 그가 선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뛴 팀들 중 가장 높은 리그에서 활동한 팀은 2부 리그에 소속된 KB Karlskoga FF였다. 에릭손은 선수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체육 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

에릭손은 그의 팀메이트이자 감독이었던 토드 그립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토드 그립은 밥 휴튼과 로이 호지슨이 가져온 영국식 스타일, 일명 롱볼 축구를 매우 좋아했다. 에릭손은 그로부터 영국식 축구를 전수받았고 이는 그의 감독 경력 내내 영향을 미쳤다. 에릭손은 1975년 27세에 나이에 심각한 무릎부상을 입어 선수 생활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은퇴를 택했다.

3. 지도자 경력

3.1. 스웨덴 리그 시절

선수 생활을 은퇴한 에릭손은 데게르포르스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드 그립의 부름을 받고 코치 계약을 체결했다. 몇 년 후 토드 그립은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에릭손이 그 대신 데게르포르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77년 1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데게르포르스의 감독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팀을 이글고 1977년과 1978년에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렀고 그 중 1978년에는 마침내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2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에릭손은 1979년 1월 1일 IFK 예테보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팀을 이끌고 첫 시즌 2위를 기록했고 스웨덴 컵(Svenska Cupen)에서 팀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 성공에도 불구하고, 팀의 스타일은 그를 유명하게 해주지 못했다. 그는 결과가 좋으면 경기력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의 스타일이었고 전술에 따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강조했으며 팀의 오래된 전술즉 영국식 뻥축을 따랐다. 그래서 선수들은 유기적인 플레이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했다. 관중들은 선수들이 공을 뻥뻥 차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에 신물이 났고 결국 평균 관중은 1만 3천 320명에서 3000명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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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팀은 1980년에 3위를 기록했고 1981년에는 2위를 거두었다. 그리고 1982년, 팀은 리그에서 우승, 스웨덴 축구협회 컵대회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또한 유로파 리그의 전신인 UEFA컵에서도 승승장구했고 해당 시즌 결승전에서 함부르크를 4:0으로 격파하고 마침내 UEFA컵을 거머쥐면서 시즌 3관왕을 달성했다. 이로서 에릭손은 스웨덴 클럽 축구 역사 최초로 대륙 대회를 우승했다. 에릭손의 성공은 다른 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2년 8월, 에릭손은 예테보리를 떠나 포르투갈의 명문 클럽 벤피카로 향했다.

3.2. SL 벤피카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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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손은 1982년 9월 1일, SL 벤피카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한 첫해인 1982-83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포르투갈 컵(Taça de Portugal)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에릭손은 또다시 리그 우승을 달성하여 리그 2연패를 기록했다. 이후 에릭손은 AS 로마의 부름을 받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3.3. AS 로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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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손은 1984년 7월 1일, AS 로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에서 그렇게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다만 1986년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기는 했다. 이후 에릭손은 1987년 5월 6일에 팀을 떠났다.

"축구! 위대한 감독들 2화"에서 나온 본인의 얘기에 따르면, 로마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도 자신에게 감독 제의를 했다고 한다. 로마 감독 생활이 힘들자, '바르셀로나로 갈 걸 그랬나'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3.4. ACF 피오렌티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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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손은 1987년 7월 1일에 피오렌티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는 별다른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고 64경기 21승 20무 23패로 32.81%의 저조한 승률을 거두는 데 그쳤다. 이후 그는 팀과 계약이 해지되고 벤피카로 돌아갔다.

3.5. SL 벤피카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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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에릭손은 벤피카에서의 두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1990년에 팀을 이끌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비록 AC 밀란에게 1:0으로 석패하긴 했지만, 벤피카 팬들은 에릭손을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또한 에릭손은 1990-91 시즌에 리그 우승을 거머쥐어 팬들을 기쁘게 했다. 그러다가 1992년 6월 에릭손은 벤피카를 떠나 또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3.6. UC 삼프도리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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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6월, 에릭손은 삼프도리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 클럽에서 5년 동안 감독 생활을 하면서 170경기 71승 52무 47패를 거두었다. 또한 에릭손은 삼프도리아를 이끌고 1994년 코파 이탈리아 컵대회를 우승했다. 이후 그는 1997년 6월에 팀을 떠나 라치오에 부임했다.

3.7. SS 라치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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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릭손은 삼프도리아를 떠난 뒤 라치오가 아닌 프리미어 리그 블랙번 로버스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이 이탈리아에서 사는 것에 만족해하고 다른 나라로 가는 걸 싫어하자 마음을 바꿔 라치오를 선택했다. 1997년 7월 1일 라치오에 부임한 에릭손은 1998년에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1999-00 시즌에는 세리에 A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2000년에는 이탈리아 슈퍼컵을 차지했다. 또한 1999년에는 UEFA 컵위너스컵을 우승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그의 이러한 활약에 주목한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그를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했다. 에릭손은 당초 2000-01 시즌이 끝난 뒤 라치오를 떠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01년 1월 10일, 에릭손은 팀 성적이 5위에 그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하고 에정보다 일찍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축구! 위대한 감독들 2화"에서 나온 본인의 얘기에 따르면, 이때가 본인의 최전성기였다고 한다.

3.8. 잉글랜드 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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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손이 부임할 당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황은 실로 최악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고 유로 1996에서 4강에 진출했던 잉글랜드는[3] 1998 월드컵에선 16강에 그쳤고, 이후 2002 월드컵 지역예선 첫 경기부터 독일에게 1:0으로 패한다.[4]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140년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 강수를 두었다.[5]

하지만 영국 축구팬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국 출신 감독들의 전유물이었던 대표팀 감독이 외국인에게 넘어간 것에 불쾌감을 품은 것과, 라치오에서 막판에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사람이 대표팀을 잘 이끌 것 같지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6] 하지만 에릭손은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비판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는 2001년 3월 1일 버밍엄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 닉 밤비, 에밀 헤스키, 우고 에이오구의 연속골을 앞세워 3:0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에릭손의 지휘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5연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01년 9월 2일, 에릭손은 뮌헨에서 열린 독일과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마이클 오언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독일을 5:1로 대파했다. 적지에서 거둔 완승에, 영국 전역이 들썩였다. ‘텔레그래프’지는 ‘정말 잉글랜드가 독일을 꺾었는가’ ‘마이클 오언이 정말 해트트릭을 기록했는가’라는 의문문으로 제목을 뽑아 승리에 도취된 분위기를 전했다. 또 ‘인디펜던트’지는 ‘영국 스포츠의 국제대회 역사상 가장 믿어지지 않는 승리’라며 축구대표팀을 칭송했다. 일각에서는 잉글랜드가 상승세를 살려 2002 월드컵 진출권을 확보할 경우 에릭손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스벤 경’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듯 에릭손의 지휘하에 몰라보게 달라진 잉글랜드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스웨덴, 아르헨티나, 그리고 나이지리아와 함께 F조에 소속되었다. 이 조는 세간에서 ' 죽음의 조'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고, 영국 축구 팬들은 잉글랜드가 16강에 올라갈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봤다. 게다가 에릭손의 선수 선발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 에릭손은 선수의 도덕성을 국가대표 발탁 기준에 넣었다.

이 규정으로 인해 영국 최고의 센터백으로 각광받고 있던 조나단 우드게이트는 아시아계 학생을 폭행한 혐의가 인정돼 100시간의 사회봉사 활동을 이행했으나, 대표팀 이미지를 지켜야 한다는 에릭손 감독의 반대에 부딪혀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이에 대해 고든 테일러 프로축구선수협의회 사무총장은 "축구팀을 경기 외적인 이유로 구성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며 "선수의 과거 행위가 대표선발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특히 우드게이트는 이미 법에 의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또다른 징계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게 얼마나 개소리냐 하면 애초에 100시간 사회봉사 활동가지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피해자 광대뼈, 다리, 코뼈가 부러졌는데 모두 백인으로 이뤄진 배심원단이 5일만에 평결해서 고작 100시간 사회봉사 활동으로 끝난거다. 그걸 이미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건 어이없는 발상. 링크.

심지어 그의 더러운 사생활이 폭로되기도 했다. 에릭손은 이 시기 낸시 델올리오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출신의 여 변호사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 시기 올리카 존슨이라는 미모의 방송진행자와 새로 사귀었다는 것이었다. 이 염문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자 델 올리오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불쾌감을 나타냈고, 에릭손과 델 올리오와의 관계를 접한 존슨도 “에릭손은 거짓말쟁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염문이 확산되자 에릭손은 “내 사생활이 잉글랜드 대표팀의 월드컵 준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에릭손은 나름대로 월드컵에서 선전했다. 그는 스웨덴과의 1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했고,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제압했으며, 나이지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는 1승 2무를 기록하며 스웨덴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고, 16강전 상대인 덴마크를 3:0으로 제압하며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8강전에선 브라질과 만나 호나우지뉴가 퇴장당하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2:1로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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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이 끝난 뒤, 에릭손은 유로 2004 예선전에 착수했다. 그는 첫번째 상대인 슬로바키아를 격파했지만, 마케도니아와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호주와의 친선경기에서 패한 뒤에 팬들에게 야유 세례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이후 5경기 연속 승리를 거두었고 조 1위를 기록하며 유로 본선에 진출했다.

유로 2004 본선 첫 상대는 프랑스였다. 잉글랜드는 90분때까지 프랑스를 1:0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추가 시간에 지단이 2골을 몰아넣는 바람에 2:1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잉글랜드는 이 충격에서 빨리 회복되어 스위스를 3:0으로 제압했으며 크로아티아를 4:2로 제압할 수 있었다. 8강전 상대는 포르투갈. 마이클 오언이 선제골을 넣어 앞서갔지만 엘데르 포스티가의 동점골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솔 캠벨이 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인해 무효가 되었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지면서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유로 대회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둔 뒤, 에릭손은 잉글랜드 언론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특히 포르투갈전에서 120분 내내 부진한 베컴을 교체하지 않고 계속 끌고 가서 경기를 망친 것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급기야 에릭손은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한 여비서와 외도를 한 사실까지 드러나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영국축구협회는 “에릭손이 협회측의 패리아 앨럼(38)이라는 방글라데시계 영국인 여비서와 오랜기간 연인관계였다”고 폭로했다. 협회측은 “지난주 초 우리는 에릭손과 성관계를 가진 것이 없다는 앨럼의 말만 믿고 이 사실을 부정했지만 앨럼이 친구에게 에릭손과의 관계를 털어놓는 내용이 담긴 e-메일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스캔들로 인해 하차 위기에 직면하자, 에릭손은 "축구협회가 오도된 정보로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다"며 "아직 잉글랜드 축구협회에 이 일과 관련해 어떠한 시인도 부인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밝혔다. 영국 축구 협회 전무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에릭손을 지지할 뜻을 천명했다. 결국 FA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에릭손이 2006 월드컵까지 대표팀 감독을 맡기로 결정했다.

2005년 9월 7일, 에릭손이 이끄는 잉글랜드 북아일랜드에게 1:0으로 패했다. 이 패배는 1972년 이후 33년만의 일이었다. 이 패배로 인해 팬들로부터 지탄을 받았고, BBC 축구 평론가들은 그가 카리스마가 떨어지고 전술적으로 별 달리 특색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에릭손은 이후 오스트리아를 1:0으로 격파하고 폴란드를 2:1로 격파하며 2006 월드컵 진출을 이끌어냈다.

2006년 초, 에릭손은 초대형 사고를 친다. 영국의 대표적 타블로이드 잡지 중 하나인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위장취재에 고스란히 낚인 것. 이 잡지사와 소속된 아랍계 기자가 아랍인 왕족 재벌로 위장해서 프리미어 리그 팀 인수에 흥미가 있는 것처럼 위장[7]하고, 에릭손을 두바이로 부른 것이다. 에릭손은 즉시 두바이로 날아갔고, 초청 받은 곳이 초호화 요트다 보니 에릭손은 할 말 못 할 말 다하게 된다.
  • 일단 자기가 국대감독이었지만 돈만 많이 주면 월드컵 이후 그만두고, 클럽팀 감독을 하겠다고 한 것이 하나. 국대 감독을 하면서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 클럽을 사려고 한다면 아스톤 빌라를 사라고 하면서, 회장도 노령이고 지병도 있으니까 싸게 살 수 있다고 컨설팅까지 한 것이 둘. 가끔 아랍계 부호로 위장한 기자가 아스톤 빌라를 살 생각이라고 하고 불렀다는 식의 이야기도 가끔 도는데, 에릭손이 팀을 특정했다. 팀 전력도 적당하고 싸게 살 수 있다고. 당연히 이 사실이 알려진 뒤에 아스톤 빌라 구단주가 발끈했다.
  • 만일 자기가 감독이 되면 데이비드 베컴은 전화 한 통이면 불러올 수 있고, 뉴캐슬에서 뛰고 있던 마이클 오웬은 평소에 자기에게 돈에 팔려간 것이라서 팀에 머무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고 기존 팀과 선수들 뒤흔들어 놓은 것이 셋. 이 때문에 이 기사 나오자마자 뉴캐슬이 반박성명을 냈다.
  • 마지막으로 자기가 국가대표 감독이면서, 데이비드 베컴은 소속팀에서 좌절한 선수이고, 리오 퍼디난드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수비수이고, 웨인 루니는 가난한 집 출신에 성격도 더러우니 자기 아버지 따라서 복싱이나 배우는게 나았을 선수이고, 숀 라이트필립스는 실력에 비해서 고평가 되어서 첼시가 헛돈 쓴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 것이 넷이다. 마지막 부분은 한국 언론에서는 선수 이름을 검열해서 내보낸 곳도 많았을 정도였다.

잡지사는 숨겨둔 장비로 사진과 영상까지 찍어서 1면으로 특종이라고 보도했고 투자한 댓가를 확 뽑았다. 이 일을 보도한 잡지는 매진될 정도로 화제가 되어 엄청나게 팔렸고 모든 진상을 이제서야 알게된 에릭손은 노발대발했다. 이 일에 대하여 위장취재라는 방법상의 문제와, 월드컵 전 국가대표 감독을 왜 일부러 건드리느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이게 반반으로 나뉜 것은 염불보다 잿밥에 더 눈에 먼 저 감독을 그대로 봐야 하느냐라는 것이 타블로이드 잡지 라는 최악의 메신저를 통해서 나왔음에도 어느정도는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에릭손이 낚였다는 것만 알려졌지, 자세한 발언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좀 덜했지만. 언급된 곳마다 모조리 강하게 부정하는 등 난리가 났었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이야기는 더 타임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일 것이다.
정말 에릭손이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100% 성심성의껏 임하고 있다면 이런 함정에 걸리지도 않았을 거다. 처음부터 두바이 같은 덴 가지도 않았을 거고. 월드컵을 대비하느라 그런 데 쓸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답했겠지. ‘지금은 말고, 월드컵 끝난 이후에 불러주세요. 전 할 일이 있답니다’라고

하지만 현실은 달라서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은 정확하게 똑같은 형태로 한번 낚이는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샘 알라다이스 문서 참고.

당장 1월 23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에릭손이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대표팀 감독직을 떠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에릭손의 뒤를 이을 인물을 물색했고, 2006년 5월 4일에 스티브 맥클라렌을 월드컵이 끝난 뒤 새 감독으로 선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잉글랜드는 2006 월드컵 B조에 속하여 파라과이, 트리니다드 토바고, 스웨덴과 한 조가 되었다. 잉글랜드는 파라과이,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격파하고 바이킹 징크스라는 악연으로 얽힌 스웨덴과 2:2 무승부를 거둬 2승 1무에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잉글랜드가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 것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로 16년 만이었다. 잉글랜드는 16강전에서 경기장이 매우 높은 고도에 위치했기 때문에 고전했지만, 에콰도르를 1:0으로 제압하고 8강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8강전 상대는 유로 2004 8강전에서 자신들을 탈락시킨 포르투갈이었다. 이 경기에서 데이비드 베컴은 부상으로 경기 도중 이탈했고, 웨인 루니는 쓸데없는 반칙을 범해 퇴장을 당하면서 역시 이탈했다. 이후 승부는 승부차기로 넘어갔고 결국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3:1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에릭손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을 사임했다.

에릭손은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막 부임할 무렵 잉글랜드는 FIFA 랭킹이 17위에 그쳤다. 하지만 에릭손이 물러난 2006년 7월, 잉글랜드는 5위를 기록했다. 2006 월드컵 때는 4위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1966년 대회에서 잉글랜드가 월드컵 우승했던 시기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순위였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감독으로서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는 단지 세번 패했고 3번의 국제 토너먼트에서 모두 조별 예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부 영국 축구 팬들은 에릭손에 대해 여러 비판을 가했다. 그 중 하나는 베컴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에릭손은 가능한 모든 경기에 베컴을 투입했고 그에게 공격 전개를 이끌어갈 임무를 맡겼다. 팬들은 영국이 베컴에게 계속 의존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베컴 의존증에서 벗어나 제라드 램파드를 제대로 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제라드 - 램파드 라인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에릭손 시기를 비로소 재평가했다.

3.9. 맨체스터 시티 FC 시절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후 1년간 휴식을 취한 에릭손은 2007년 7월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맨체스터 시티 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팀은 스트라이커 롤란도 비안키를 88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미드필더 젤손 페르난지스, 지오반니, 마르틴 페트로프, 그리고 일라누를 영입했으며 수비수 베드란 촐루카와 하비에르 가리도를 영입했다.

2007-08 시즌 시작 후, 맨시티는 잘 나갔고 9월 19일엔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러한 활약으로, 에릭손은 9월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맨시티는 2007년 말까지 6위를 기록했고 10월과 11월에는 3위까지 올랐다. 그러나 맨시티는 이후 추락하기 시작해 5경기에서 1번만 이기는 부진에 빠졌고 결국 2008년 1월 12일엔 7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파일:external/i.dailymail.co.uk/Save4City_468x314.jpg

2008년 봄, 탁신 친나왓 맨시티 구단주는 시즌이 끝난 뒤 에릭손과 계약을 해지할 의사를 드러냈다. 그는 팀의 성적이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에 매우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자 맨시티 팬들은 SOS(Save Our Sven) 운동을 개시하며 에릭손이 맨시티에 계속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팬들은 맨시티의 홈구장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 운집하여 에릭손을 응원하는 구호를 외치고 에릭손의 얼굴이 담긴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 신문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구단주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에릭손은 맨시티에서 힘없는 감독으로 전락했고 팀은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급기야 맨시티는 최종전에서 미들스브로에게 8:1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패배는 에릭손 감독 인생에서 가장 큰 패배였다.

맨시티는 2007-08 시즌에 9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맨시티는 페어플레이 팀으로 선정되어 1차 예선부터 치르는 유로파 컵 진출권을 따냈다. 1만 4천 여명의 맨시티 팬들은 에릭손이 계속 팀을 맡아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지만, 2008년 6월 2일 맨시티 보드진은 에릭손을 경질했다.

3.10. 멕시코 대표팀 시절

파일:external/static.guim.co.uk/Sven-Goran-Eriksson-001.jpg

2008년 6월 3일, 에릭손은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북미 월드컵 예선 첫 상대인 온두라스를 2:1로 제압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좋지 못했다. 멕시코는 캐나다와 비겼고 자메이카와 온두라스에 연달아 패하고 말았다. 2009년 2월 11일, 에릭손은 미국에 2:0으로 패배한 후 경질 위기에 직면했다. 그가 경질된다면 잉글랜드 축구 클럽인 포츠머스가 그를 새 감독으로 선임할 거라는 루머도 돌았다. 3월 초, 에릭손은 멕시코 감독 직을 사임하고 포츠머스 감독이 된다는 루머에 대해 부정했다. 그는 반드시 멕시코를 월드컵에 진출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멕시코는 3월 말 온두라스에 3:1로 패배하고 말았고 결국 그는 경질되고 말았다. 이로써 에릭손은 멕시코 감독으로서 단 1승만 거두는 수모를 당했다.

3.11. 노츠 카운티 FC 시절

2009년 7월 22일, 에릭손은 잉글랜드 4부 리그에 위치한 노츠 카운티에 축구 디렉터로서 부임했다. 그는 팀의 성공적인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팀 운영 전 분야에 실력행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가 나중에 밝히길,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키는 계획에 매력을 느꼈고 팀의 재정을 건전화시켜서 장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거대 규모의 투자가 약속되었고 솔 캠밸과 카스퍼 슈마이켈이 팀에 합류하여 노츠 카운티의 플랜에 동참했다. 그러나 캠밸은 고작 한 경기만 뛰고 팀을 나가버렸고 슈마이켈 또한 한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에릭손이 포함된 컨소시엄은 2009년 10월엔 북한의 축구 팀과 친선경기를 가지기 위해 평양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일은 이뤄지지 못했다. 에릭손은 훗날 북한에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의 노력은 헛수고였다고 밝혔다.

에릭손의 야심찬 계획은 시간이 흐르면서 실패작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 노츠 카운티는 지나친 투자로 인해 막대한 빚을 져야 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세금을 체납한 것이었다. 2010년 2월 11일, 에릭손은 축구 디렉터 직에서 해고당했다. 그래도 노츠 카운티는 4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보면 그의 노력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였다.

3.12.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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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8일, 에릭손은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코트디부아르는 2010 남아공 월드컵 G조에 소속되어 포르투갈, 북한, 그리고 브라질과 한 조가 되었다. 6월 15일, 코트디부아르는 포르투갈과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후 2차전에선 브라질에 3:1로 패하고 만다. 코트디부아르는 북한을 상대로 3:0으로 승리했지만 브라질, 포르투갈에 밀려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북한전을 앞두고 포르투갈이 북한을 상대로 7:0이라는 관광 스코어를 냈기 때문에 북한을 10:0 정도로 대파를 해야만 했었다. 당시 브라질 감독이었던 둥가는 "에릭손이 이끄는 코트디부아르는 훌륭한 밸런스를 보여줬다. 우리는 그들의 플레이를 보았고 그들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조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라며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조별 탈락의 책임을 지고 6월 25일 대표팀 감독 직에서 물러났다.

3.13. 레스터 시티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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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3일, 에릭손은 당시 챔피언십 리그 소속인 레스터 시티 감독에 부임했다. 그의 첫번째 경기인 헐시티와의 경기에서, 레스터는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후 레스터는 다음 경기인 리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2:1 승리를 거두었다. 카일 노튼과 야쿠부를 임대영입한 후, 레스터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팀 순위 또한 올라갔다. 2011년, 레스터는 8경기에서 7승을 거두었다. 2011년 2월 18일, 레스터는 7위에 올랐고 승격 플레이오프가 주어지는 6위와는 고작 승점 1점 차였다. 그러나 레스터는 이후 11경기에서 단 2승을 거두며 추락했고 결국 레스터는 2010-11 시즌을 10위로 마감했다.

2011년 여름, 에릭손은 많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는 맷 밀스와 저메인 백포드를 영입하여 팀의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보강했다. 그러나 13경기를 치른 2011년 10월 25일, 레스터는 기대 이하의 순위인 13위를 기록했다. 결국 에릭손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고되고 말았다. 하지만 해고되기 직전 그가 자유계약으로 영입한 카스페르 슈마이켈, 데이비드 뉴젠트, 그리고 폴 콘체스키는 레스터에서 대활약했고 결국 2013-14 시즌에 레스터는 이들의 활약 덕분에 마침내 승격에 성공했고 뒤이어 2014-15 시즌에 잔류에 성공했다. 이중 카스퍼 슈마이켈은 2015-16시즌 레스터의 돌풍의 한 축을 맡기도 했다.

3.14. 기술 디렉터

2012년 2월, 리즈 유나이티드의 구단주 켄 베이츠가 에릭손을 새 감독으로 선임하려 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베이츠는 실제로 에릭손을 선임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2012년 9월 3일, 에릭손은 태국의 축구 클럽인 BEC 테로 사사나의 기술이사가 되었다. 이후 여러 팀들이 그를 감독으로 선임하려 한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그는 어느 곳에도 가지 않았다. 2013년 1월 21일, 에릭손은 이번엔 아랍 에미레이트의 축구 클럽인 알 나스르의 기술이사가 되어 거기서 6개월 간 일했다.

3.15. 중국 슈퍼 리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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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4일, 에릭손은 광저우 푸리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장현수를 영입하고 그를 중용하며 한국인에게 새삼 주목받았다. 광저우 푸리는 에릭손의 지휘 아래 2014 시즌 중국 1부 리그 3위로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 리그 예선 3라운드 진출권을 획득했다.

2014년 11월, 에릭손은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 둥야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좋은 지도력을 보여주며 팀을 잘 이끌었다.

한 달 뒤인 12월 클라렌스 세도르프 감독의 후임으로 중국 갑급 리그 선전 FC의 감독에 선임되었다. 리그 초반에 5연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5무 3패로 8경기 연속 무승으로 부진하자 6월 14일 구단으로부터 경질 당했다. 에릭손 감독의 후임으로 2006년부터 2년간 선전 FC를 지도한 왕바오샨이 감독에 선임되었다.

3.16. 필리핀 대표팀 시절

2018년 10월 27일 필리핀축구협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에릭손의 선임을 발표했다. 에릭손은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2019 AFC 아시안컵 AFF 스즈키컵에 참가한다.

스즈키컵 4강에서 박항서의 베트남에 2연패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본선에서는 첫 경기인 한국전에서 1:0으로 패배하는 선전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이어서 중국을 상대할 때는 1차전 때와는 다르게 공격적으로 나갔다가 우레이 위다바오한테 3골을 먹혀서 3:0으로 졌다. 마지막 키르기스스탄전도 3:1로 지면서 결국 아시안컵에서 3전 전패를 기록했고 대회 후 사임했다.

3.17. 이후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IF 칼스타드 포트볼의 고문 및 단장을 맡았다가 2023년 건강 문제로 사임했다. 2024년 들어서 쓰러져 진단받은 결과 췌장암 말기 판정으로 드러나 앞으로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기사.

2월 13일, 리버풀 레전드 팀과 아약스 레전드 팀의 자선 경기에서 리버풀 레전드 팀의 감독을 맡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 에릭손 감독은 리버풀 지휘봉을 잡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 말한 바 있는데 이를 알게 된 리버풀 측에서 자선 경기의 감독으로 에릭손을 초청한 것.

3월 23일에 열린 리버풀 레전드 팀과 아약스 레전드 팀의 경기에 감독직을 맡으며 평생의 소원을 이뤘다. 4-2로 승리하면서 자신의 축구 인생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했다.

이후 8월 가디언과의 인터뷰로 근황을 전했다. 여전히 투병 생활 중이며 남은 삶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한다. 유로 2024와 파리 올림픽 경기를 꾸준히 챙겨 봤다고.

4. 사망

결국 현지 시각 2024년 8월 26일, 에릭손 감독의 측근으로부터 향년 76세의 나이로 췌장암 투병 도중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를 비롯한 잉글랜드 대표팀 시절 선수들을 비롯해 많은 유명인사들이 추모의 메세지를 전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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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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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참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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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는데 이후 말기암에 걸린게 드러났다. # [2] 에릭손 시절=2002 월드컵 8강, 유로 2004 8강, 2006 월드컵 8강 → 에릭손 사퇴 후=유로 2008 예선 탈락, 2010 월드컵 16강, 유로 2012 8강, 2014 월드컵 조별리그, 유로 2016 16강. 유로 2016 이후 가레스 사우스게이트가 부임한 뒤에야 잉글랜드 대표팀의 성적은 비로소 반등하게 된다. [3] 다만, 이 기간 중에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는 것이 흠이었다. [4] 참고로 이 경기는 홈 경기였다. 게다가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마지막 경기였다. [5] 1956~58년 스웨덴은 잉글랜드인 조지 레이너 감독을 선임했는데 그와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6] 뜬금포지만, 우리나라도 1990년대 초, 고문 및 올림픽 축구 감독으로 임명된 데트마어 크라머를 받아 들이면서 외국인 감독에 대한 냉대를 보여주었고 이에 탄력받은 언론들도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어서 최초의 외국인 감독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잡음이 들렸다. 또한 후에 거론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도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을 겪게 되며 한국 축구에 약간은 영 좋지 않은 흑역사를 남겼다. 물론 팬과 국내 축구 전문가들 그리고 언론들이라는 점이 차이점이긴 하지만,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지 않았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는 점을 보면은 어느정도 비슷한 예로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7] 기자 홀로 준비한 게 아니라 잡지사와 같이 하다보니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고급 보트까지 빌려 준비하고 최고급 술이라든지 초청을 위한 여러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