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02:04:39

허정무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9b2743> 파일:대전하나시티즌앰블럼.png 대전 하나 시티즌
2020 시즌 스쿼드
}}} ||
1 박주원 · 2 이종현 · 3 황재훈 · 4 이지솔 · 5 윤경보 · 6 채프먼 · 7 윤승원 · 8 구본상 · 9 바이오 · 10 안드레 루이스
11 김승섭 · 12 김진영 · 13 이슬찬 · 14 조재철 · 15 박진섭 · 16 이규로 · 17 박인혁 · 19 박용지 · 20 황도연 · 22 최재현
· 23 김동준 · 24 안동민 · 25 김태양 · 26 이인규 · 27 윤성한 ·28 김세윤 · 29 정희웅 · 30 박예찬 · 31 황재정 · 32 이호빈
· 33 이웅희 · 35 고준희 · 36 김지훈 · 37 김선호 · 41 공용훈 · 42 이정문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황선홍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강철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서동원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김일진 · 파일:브라질 국기.png 알렉스

허정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Korea Republic KFA.png

51대, 57대, 66대
파일:Korea Republic KFA.png

3대
클럽
파일:포항 스틸러스 앰블럼.png

4대
파일:전남 드래곤즈 앰블럼.png

2대, 5대
파일:Incheon-United-FC.png

4대

}}} ||
허정무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아시아축구연맹 로고.png 올해의 감독상
2008년 2009년 2010년
니시노 아키라
( 감바 오사카)
허정무
(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오카다 다케시
( 일본 국가대표팀)
김광민
( 북한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김태희
(대한민국 U-17 여자 국가대표팀)

}}} ||
Daejeon Hana Citizen FC
파일:허정무.jpg
이름 허정무
許丁茂 | Huh Jung-Moo
출생 1955년[1] 1월 13일 ([age(1955-01-13)]세) /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학력 연세대학교
신체 174cm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소속 선수 한국전력 축구단 (1978)
해병대 축구단 (1978~1980, 군 복무)
PSV 에인트호번 (1980~1983)
울산 현대 호랑이 (1984~1986)
감독 대한민국 대표팀 (1989~1990 / 트레이너)
포항제철 아톰즈 (1991~1992 / 코치)
포항제철 아톰즈 (1993~1995)
대한민국 대표팀 (1993~199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95)
전남 드래곤즈 (1996~1998)
대한민국 대표팀 (1998~2000)
대한민국 대표팀 (2004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5~2007)
대한민국 대표팀 (2008~2010)
인천 유나이티드 (2010~2012)
기타 대전 시티즌 (2014 / 기술자문위원)
대한축구협회 (2013~2014 / 부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2015~2019 / 부총재)
대전 하나 시티즌 (2020~ / 재단이사장)
국가대표 104경기 30골( 대한민국 / 1974~1986)
종교 개신교[2]


1. 소개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2.4. 기록
2.4.1. PSV 에인트호번2.4.2. 울산 현대 호랑이2.4.3. 통산 성적
2.4.3.1. 국가대표
2.4.4. 주요 개인 수상
2.4.4.1. 표로 보기
3. 지도자 경력4. 해설자 경력5. 행정가 경력
5.1. 대한축구협회5.2. K리그5.3. 대전 시티즌 이사장
6. 차범근과의 갈등7.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8. 여담9.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 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았고, 2015년부터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맡고 있다.

선수 시절 PSV 에인트호번 등에서 활약했으며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한국인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했으며, 2011년까지 계약되어 있었으나, 휴식 기간을 갖기 위해 2010년 7월 2일 연임을 포기하였다. 이후 한 달 반 정도의 휴식을 취한 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2012년 4월 인천 유나이티드의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였다. 2013년 3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브라질 월드컵 성적 부진으로 인해 2014년 7월 10일 대한축구협회에서 부회장 직을 사퇴했다. 본관은  양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프로 출범 이전

K리그가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축구 팬들 사이에서 ' 고려대학교 차범근, 연세대학교 허정무'라는 인식이 있을 만큼 일세를 풍미한 스타 선수였다. 저도의 축까 사이에선 조중연 축협 부회장과 학연으로 연결되었다고 운운하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져 있지만 정작 조중연 고려대학교 출신. 뭐든지 그렇지만 까는 것도 제대로 알고 까야 먹혀드는 법이다.

하지만 의외로 축구는 늦깎이었다. 7남매중 네째였던 허정무는 경제적 사정으로[3] 고등학교를 진학할 방법이 체육특기생 밖에 없었고, 먼 친척뻘인 허윤정[4]의 권유로 중동중학교의 유판순 감독을 만난다. 하지만 축구 비경험자에 당시 153cm의 왜소한 신체 조건을 보고 단칼에 거절당했으나, 사정사정해서 중졸이지만 2년을 꿇고 다시 중동중학교에 편입해서 축구를 배운다.

강훈련으로 유명한 유판순 감독이 나중에 질려서 만류할 정도로 독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축구를 시작한 지 4년만에 U-20 대표팀에 뽑혔고, 다시 2년 뒤 국가대표에 뽑힌다. 흠좀무

영등포공고 졸업시절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웃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허정무는 연세대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려대 역시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은사인 유판순 감독을 통해 허정무를 스카웃하려 했고 아예 연세대 팀이 얼씬도 못하게 고려대의 설립자인 김성수의 고향인 고창군 삼양사 쪽으로 데려놨다.[5] 그러다가 어찌저찌해서 허정무의 소재가 파악되어 연대의 김지성 감독과 이미 약속을 했던 허정무의 아버지가 직접 설득해 허정무를 데려갔고, 이번엔 연세대 쪽 사람들이 운동부 숙소인 무학사에 데려가 대학시험 보는 날까지 사람을 붙였다고..

2.1.2. PSV 에인트호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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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에 자극을 받아 해병대에서 제대한 후 해외 진출을 꾀하다가,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명문 클럽인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원래는 후에 이청용이 거쳐갔던 독일의 보훔과 먼저 계약을 하기로 했으나 탄광도시라서 우중충했던 보훔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비해 밝고 평화로워 보였던 에인트호벤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에인트호번에서 활동했던 3시즌 동안 77경기에 출장해서 11골을 넣었다. 이 때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것을 감안하면 꽤 준수한 기록이다.

팀 적응기인 반년 정도 교체 멤버로 뛰다가 그 뒤로는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고, 주로 미드필더로 뛰면서 1982-1983 시즌 팀의 준우승에 기여하였고, 1983년에 계약이 만료된 후 국내로 복귀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140609141232969.jpg

네덜란드의 전설인 요한 크루이프를 전담 마크해 인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기도 했으며[6], 세계적인 공격수 뤼트 판 니스텔로이도 그가 어렸을 적에 허정무의 활약을 인상깊게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영상 위트레흐트의 반 하네햄[7]은 허정무의 밀착마크에 짜증나서 동양인을 비하하는 눈 찢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영상 5:10초 참고. 허정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무렵에는 네덜란드 측에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정도로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네덜란드에서의 활약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3. 울산 현대 호랑이

1983년 시즌 중 PSV와 계약이 만료되자[8][9] 귀국한 그는 현대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K리그에서 활동했으며, 1986년에 월드컵 국가대표를 지낸 뒤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2.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4년 킹스컵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게 된다. 김재한이나 조동현과 같은 장신의 중앙공격수와 함께 작고 민첩한 중앙공격수 역할로 주로 뛰었으나 팀 사정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보았다. 그러다 78년 김진국이 은퇴하면서 왼쪽 윙포워드로 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국대 주전으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PSV 진출 이후로는 팀에서의 포지션에 맞춰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1985년 김정남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442에서 왼쪽 미드필더를 맡게 된다.

허정무는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려서는 흔히 그랬듯 공격수였고 주포지션은 왼쪽 윙어 내지는 공격형 미드필더. 한 때 좌정무 우범근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10] 대표팀에서 101경기에서 30득점이나 했는데 이게 과연 수비형 미드필더의 스탯인가... 자서전에 의하면 74 방콕 아시안게임 중국전 후반에 사이드백으로 내려가 뛴 것(그리고 결승골을 어시스트함.)이 첫 포지션 변경. 이후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며 뛰게 되었다고. 수비형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이 된 것은 PSV 이적 이후. 공격진에 너무나 뛰어난 선수가 많아 수비 포지션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비적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77경기에서 11골이나 넣었다.
2.2.1.1. 1986년 FIFA 멕시코 월드컵


1986년 박창선, 차범근, 최순호 등과 함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국가대표로 뛰었다. 왼쪽 풀백으로 출전하였는데, 아르헨티나전에서 마라도나 태권축구 걷어찬 일화 # [11]가 유명하다. 마지막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왼쪽 풀백으로 나왔다가 후반전에서는 왼쪽 미드필더로 뛰던 김주성 대신 정종수가 들어가 왼쪽 풀백을 보고 허정무가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12] 허정무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강한 승부욕과 체력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라, 전담 마크맨의 임무를 맡겨도 별 무리 없이 수행했다. 관련한 칼럼

2.3. 플레이 스타일

대한민국 역대 NO.1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힌다.[13] 강한 승부욕과 체력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었다.

선수시절 큰 장점으로 멀티플레이 능력이었다. 본업인 수비형 미드필더 외에 양쪽 풀백, 양쪽 윙어, 중앙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A매치 득점을 30골이나 기록한 것이다. 대표팀에서 유상철 감독이 맡던 롤의 선구자라고 보면 될 듯하다.

2.4. 기록

2.4.1. PSV 에인트호번

  • 에레디비시 준우승 1회 : 1982-83

2.4.2. 울산 현대 호랑이

  • 프로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회 : 1986

2.4.3. 통산 성적

2.4.3.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 - 17 0 0
U - 20 0 0
U - 23 0 0
A 대표 103 30
종합기록 103 30

2.4.4. 주요 개인 수상

  • 체육훈장 백마장 : 1979
  • K리그 베스트 11 선정 : 1984
  • 체육훈장 거상장 : 1986
  • 제8회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 : 1978
  • 제10회 서울 아시안 게임 축구 금메달 : 1986
2.4.4.1. 표로 보기
198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순호
FW
이태호
FW
백종철
MF
박창선
MF
허정무
MF
조영증
DF
정용환
DF
박경훈
DF
박성화
DF
정종수
GK
오연교

3. 지도자 경력

' 무승부의 승부사 허정무승부', ' 무재배의 달인' 등의 별명이 있는데 사실이다. 허정무는 감독 생활 전반기를 통틀어 이례적으로 무승부가 많은 감독이며, 전남 드래곤즈 감독 시절의 9연무 등 화려한 무승부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 이를 비칭으로 여긴다면 그건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기 때문이다.[14] 인천팬들에게는 최악의 감독으로 불린다.

3.1. 코치 경력

3.1.1. 포항제철 아톰즈 코치

1986년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1990년 월드컵 대표팀 트레이너, 1991년 포항 제철 아톰즈 코치 등을 역임하다가 포항의 이회택 감독이 1992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물러나자 1993년 코치직에서 감독으로 영전하게 된다.

3.1.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1994년 월드컵 대표팀 코치를 역임했다.

3.1.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이후 대한축구협회 기술고문을 맡았다가, 2004년 기술위원회 부위원장에 오른다. 그러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잇달은 졸전 끝에 해임되고 조 본프레레 감독이 선출되면서 임시로 수석코치 자리를 맡았다. 약 5개월 뒤 본프레레 체제가 안정되자 수석코치를 사임하고 다시 K리그 감독으로 복귀했다.[15]

3.1.4. 대전 시티즌 기술자문위원

파일:2013121551572813.jpg

2014년 김세환 사장에 의해 대전 시티즌의 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 되었으며 연륜을 바탕으로 조진호 감독을 지원했다고 한다. #

3.2. 감독 경력

3.2.1. 포항제철 아톰즈 감독

1993년 감독 첫 해는 리그 6팀 가운데 4위를 차지했지만, 아디다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1994년 전북 버팔로가 새로 창단하여 7개 팀으로 리그를 운영했는데 당연히 전북은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며 상위를 노리는 팀들은 치열한 레이스를 벌여야 했다. 결국 포항은 승점 50점 3위로 리그를 마친다. 2위는 유공(51점) 우승은 일화(54점). 한편 아디다스컵은 작년과 정반대로 신생 팀 전북에게도 밀려 꼴찌를 기록했다.
1995년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후반기 우승을 차지하여 전반기 우승을 차지한 일화와 대결하나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한다. 이 독특한 제도 때문에 오늘날 기록지를 뒤져보면 뭥미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우승을 차지한 일화는 승점 48점이고 준우승 포항은 승점 55점이다(...) 한편 아디다스컵 성적은 8개팀 가운데 7위로 역시나 좋지 못했다.[16]

이 시기 일화의 호화 멤버를 언급하며 포항의 호화 멤버 못지 않았다고 허정무를 커버해주는 의견이 있지만, 그래봐야 일화의 멤버와 포항의 멤버를 비교해 볼 때 누가 더 국대에 많이 뽑혔느냐로 가려 보면 우열은 명확하다. 그리고 허정무가 그 일화의 뒤를 이어 준우승이나마 차지한 것도[17] 이회택이 리빌딩까지 다 끝내고 물려준 우승멤버들을 3년이나 굴리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다 코치에서 영전해 올라온 거라 팀적응이고 뭐고 없던 시기였다. 그냥 이 시기 허정무는 지지리 못했을 뿐.

다만 이 시기를 언급하기 애매한 것이, 포항을 과연 온전히 허정무의 팀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 부호가 달린다. 최상단 허정무의 커리어 연표를 보면 한가지 어이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994~95년 포항 감독직과 대표팀 코치/감독직이 겹친다. 즉 멀쩡한 프로팀 감독을 시즌 도중 월드컵 대표팀으로 데려갔다(...)[18] 사실 전임 이회택 감독도 199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납치당한 경력이 있다(...) 이런 사실만 봐도 정몽준 취임 이전 축구협회가 얼마나 주먹구구 행정으로 돌아가는 집단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정몽준 시대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 1994년 월드컵 김호 감독 이후에 꽤 여러번 감독 돌려막기를 했었다. 그것도 대표팀 경기때마다 파트타임으로.

3.2.2. 전남 드래곤즈 감독 1기

이후 잠깐 국대 감독을 맡았지만 전임 감독제[19]도 없던 시절이니만큼 반쯤은 봉사직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1996년 전남은 성적 부진을 구실로 창단 감독인 정병탁 감독을 시즌 도중 경질하고[20] 허정무 감독을 영입한다.
그리고 1997년 전남은 역사를 쓴다. 바로 21경기 무패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황신의 가호가 깃들면서 전남은 리그에서 승점 1점차 2위 분루를 삼켜야 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아디다스컵 2위 프로스펙스컵 2위를 기록했다(...) 전남팬이던 아니던 보는 이로 하여금 참 웃프게 다가오는 기록인데, 더 골때리는 부분은 저 3개 부분에서 전남을 꺾고 1위를 차지한 팀이 똑같다. 바로 부산 대우 로얄즈 K리그에서 단 둘 뿐인 왕조 칭호를 들은[21] 바로 그 팀 바로 그 해였다.
결국 리그가 끝나고 열린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남에게 창단 3년만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다. 다만 해당 문서에 나와있지만 이 시기 FA컵은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느끼는 것과 위상이 약간 달랐다는 점은 참고하자.

1998년에는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나[22] PO 첫 경기에서 무재배 승부차기로 탈락한다. 그리고 1998년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본선 2차전 네덜란드 대패로 인해 월드컵 도중 중도 경질되고 말고, 그 후임으로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감독에 임명된다.

3.2.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기

차범근호 허정무호 (1기) 히딩크호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쇼베츠호 허정무호(U-23) 박항서호
차범근호 이후 대한축구협회에서는 경쟁 청문회를 통해 감독을 선발하였다. 당시 함께 후보에 오른 지도자는 대우 감독인 이차만과 연대 감독인 김호곤이었으며 이 경쟁에서 승리한 허정무는 올림픽 팀을 겸하는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전임감독으로서 맡는 국대는 처음인 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으나 8강전에서 태국에 1:2로 패하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리고 1999년 일본과의 평가전 원정경기에서 4:1로 능욕당하면서 25년만에 3점차 일본전 대패를 당해 비난을 당했다. 이에 복수로 벌인-미리 1,2차전을 평가전을 가지기도 했지만- 2차 평가전 안방경기에서도 1:0으로 지면서 일본전 2연패와 같이 비난을 속사포처럼 당했다.

2000년 골드컵에 초청국으로 참가했다. 3개국씩 4개조로 나뉘는 조별리그에서 한국은 코스타리카, 캐나다와 한 조가 됐다. 그런데 3개국이 서로 무승부만 해서 2무가 됐다. 골을 많이 넣은 코스타리카는 1위로 8강에 진출하고 캐나다와 한국은 완전히 동률이라 동전 던지기로 순위를 정했는데 캐나다가 당첨되어 한국은 무패 탈락했다. 동전 던지기로 올라간 캐나다는 토너먼트에서 멕시코, 트리니다드 토바고, 콜롬비아(초청국)를 차례로 깨부수고 우승(!!!)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며 본선에 진출했다. 그런데 2승 1패 탈락이라는 황당한 성적표를 받는다. 1차전인 스페인전에서 3:0 대패를 당하는 바람에 이어진 모로코 칠레전을 모두 1:0 승리로 거뒀지만, 2승 1패 성적에도 불구하고 칠레에 골득실이 밀려서 탈락했다(...) 참고로 칠레가 동메달, 스페인은 은메달을 받았다. 금메달은 카메룬으로, 2연속으로 아프리카 국가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성인 대표팀은 덜 주목을 받은 부분이 있다. 브라질을 1:0으로 꺾고,[23] 2000 아시안컵에서 3위에 오르는 등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그러나 98 아시안 게임 축구까지 성인 대표팀이 출전하는 무대였는데, 이 때 8강에서 태국에 패배한 것은 큰 실책이었으니 첫 단추부터 크게 잘못 꿰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올림픽 본선 탈락에 이은 아시안컵 우승 실패도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허정무는 이후에도 그랬지만 이 때 역시 지면 선수탓을 하고, 특히 정신력과 국가관을 수없이 강조하는 구식 감독이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122400329131010&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8-12-24&officeId=00032&pageNo=31&printNo=16626&publishType=00010 이 어이 없는 기사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허정무는 1월달 전지훈련까지 하고 나서 해병대나 유격부대에 입소시켜 극기훈련을 시켰다.[24] 비시즌이면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선수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것도 모자라 쓸데없는 정신훈련으로 앉아 있게 시키고, 군부대 입소훈련이나 시켰다. 결국 이런 비과학적이고 무식한 행태 끝에 대표적으로 이동국의 무릎이 큰 부상을 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은 감독이었다.

그리고 최용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방콕아시안게임때 뭔가 있었는지 이후로 최용수는 허정무가 감독으로 있는한 대표팀에 들어오지 못하게 돼었다.

또한 황선홍과도 뭔가 있는지 2000년 골드컵 이후로는 엔트리에 부르지 않고 김도훈을 중용했다. 그러나 시드니 올림픽 이후로는 김도훈또한 아시안컵에 부르지 않으면서 베테랑 포워드와 상당히 뭔가가 있음을 보여왔다.

이후 2000~2004년은 해설위원 생활을 했고, 2004년에 국대 수석코치를 잠깐하다가 전남으로 돌아갔다.

3.2.4. 전남 드래곤즈 감독 2기

대한축구협회 대표팀 수석코치 자리를 그만두고 2005년 전남으로 부임한다. 이즈음 전남은 2003년 이회택 감독이 리그 4위 FA컵 준우승의 호성적을 일구고 사임했고, 2004년 우승을 노리고 야심차게 영입한 이장수 감독은 리그 3를 차지했으나 프런트와 갈등을 빚고[25] 1년만에 사임한 상황이었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 2005년 13개팀 가운데 11위를 차지했다.[26] 여기서 지적할 부분은 바로 2000년을 전후한 전남의 성적이다. 앞서 대표팀으로 떠난 허정무 감독의 뒤를 이어 이회택 이장수 두 감독이 맡았던 1999~2004년까지 리그 성적을 보면 4/10(99)-7/10(00)-8/10(01)-5/10(02)-4/10(03)-4/10(04)로 잠깐 주춤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노쇠한 스쿼드를 갈아엎고 리빌딩에 착수하면서 생긴 현상인데, 이회택 감독이 끝까지 매조지를 하지 못했고 설상가상 이장수 감독이 사퇴한 것도 전력 보강을 위해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두고서 프런트와 이견이 생긴 탓이었다. 결국 전임 두 사람이 한참 다져나가다가 도중에 손을 뗀 기반을 또 다지는 삽질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상 헛소리고, 신임 감독이 부임하는 상황은 그 전임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라거나 은퇴, 더 좋은 팀으로 옮겨가거나 하는 식이 아니면 어느 정도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부임하기 마련이다. 허정무만은 모든 최상의 상황이 세팅된 다음에 부임해야 한다는 헛소리가 아니라면, 결국 6년간 1평균 5등 정도 하면서 꾸준히 플옵에 나가던 팀을 맡고 나서 13개 팀 가운데에서 11위를 맡았다는 최악의 성적을 남겼던 것에 불과하다.

2006년 리그 6위를 차지하며 반등의 기미를 보였으나 결국 전임 감독들의 평균 성적보다 조금 못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FA컵에서는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켰다.[27]

그리고 2007년 리그는 10위에 그쳤지만 또 다시 FA컵을 들어올리며 2년 연속 FA컵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이 해는 일명 '파리아스 매직'으로 포항이 리그 5위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를 뚫고서 최종 우승컵을 들어올린 때였다. 또한 포항은 FA컵 결승전에도 올라왔기 때문에 더블을 노릴 수 있었는데 전남이 이를 저지한 셈이다. 그러나 이 시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동남아 팀 그것도 방콕 대학을 상대로 0-0 졸전을 벌이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가와사키에 총 6골을 먹히며 2패를 기록해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하며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다.역시 무재배의 달인이다. 경기전 전력분석을 하지도 못해놓고 말만 대학팀이고 실력이 있는 팀이라고 앞뒤가 안맞는말을 하기도 했다.[28]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7&aid=0000081080 참고로 이 시기 아챔에서 k리그나 j리그 팀들이 동남아 팀과 만나면 그야말로 폭격을 퍼붓던 시절이며,[29] 전남은 홈경기에서 방콕 대학을 맞아 3:2로 간신히 피똥을 싸며 이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3.2.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기

자세한 내용은 허정무호 문서를 참조 바랍니다.
2007년 12월 핌 베어백 감독의 후임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2009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 스틸러스가 우승한 이후 포항의 공격적인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부 팬들이 맨날 무승부만 하는 허정무 말고 포항 스틸러스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을 국대 감독에 앉히자!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정작 허정무 감독은 2007년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K리그에서 우승한 포항 스틸러스를 FA컵 결승전에서 1, 2차전 통틀어 3:2, 3:1로 발라버리고 포항의 더블을 저지한 전력도 있다. 적어도 둘의 맞대결에선 허정무가 파리아스보다 위에 있는 셈.[30]

강도 높은 훈련과 피지컬, 투쟁심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 호랑이'라는 별명도 있다.[31] 지장형이 아닌 카리스마형 감독으로 팀 장악력은 일품. 그리고 선수 특성을 생각해서 전술을 맞추는 경향도 있다. 과거 코엘류, 핌 베어벡 두 감독이 급작스레 사임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그때마다 선수들 사이에서 잡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내부 결속을 잘 이끌어 냈다. 그러나 전략 전술 능력은 평이해서 전술가형 수석코치가 옆에서 보좌할 필요가 있다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선수 시절 센터백까지 뛰어본 풍부한 경험 덕분에 전술 이해도는 대한민국 지도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다.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쳤고, 체육 장학생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전형적인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학연 지연으로 선수를 뽑는다는 루머에 자주 시달린다. 하지만 하단의 허카우터 항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정말 저 3분류로 선수를 선발했다면 뽑지 않았어야 될 선수를 뽑아서 성공시킨 사례가 상당히 많다. 그 때문에 당연히 근거 없는 루머라고 부정되었다.

사실 2010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 되면서 까인 이유는 전적으로 축구협회의 언론 플레이 때문인데 핌 베어벡 前 감독의 사임 이후 믹 맥카시(당시 울버햄튼 감독)[32]/제라르 울리에(당시 프랑스 축구협회 기술고문)에게 오퍼를 넣었다고 했지만 둘은 거절했다.(오퍼를 넣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축협은 계속 외국인 감독을 알아보겠다고 언론 플레이를 했지만 오퍼가 거절당했다고 발표한 몇 시간뒤 갑자기 '이제 한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 때가 됐다'며 허정무 감독을 선임했다. 이러니 욕을 안 먹을래야 안 먹을 수가...

일부에선 허정무의 박지성 활용 문제를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전술상의 실책으로 보긴 어렵다. 전통적으로 대표팀은 우수한 윙어가 많아 늘 경쟁이 치열했다. 또한 박지성은 수원공고 시절 스트라이커로 시작해서 명지대학교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이었고 히딩크 감독이 윙어로 조련했으며 아드보카트 감독은 공격형 미드필더 능력에 주목한 글자 그대로 멀티 플레이어다. 넘치는 윙어에 비해 부족한 중앙 미드필더 자원을 고려했을 때, 당분간 박지성의 포지션 고정은 요원할 듯 하다.

허정무호 A매치 성적은 2009년 11월 15일 기준으로 14승 13무 1패. 2008년 데뷔전에서 칠레에 패한 것을 제외하면 압도적인 28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만전이 비공식 경기가 된 탓에 공식으로는 27경기 무패. 어쨌든 최종예선 전까지는 상대팀이 모두 아시아권인 것을 감안해도 뛰어난 성적이라며 옹호하는 사람과 무재배의 달인이라며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이 상황은 최종예선 무패 통과 이후에도, 월드컵 16강 진출 직후 에도 변하지 않았다.

11월 15일에는 덴마크와도 비겼다. 진짜 월드컵에서 7무 우승[33]하는 건 아니겠지만 싶어도(...) 하지만, 11월 19일에 세르비아에 지면서 무패행진이 끝났다.[34]

허정무의 무재배 기술(?) 때문에 디시인사이드의 국내축구 갤러리에서는 '허정무컵'이라는 가상의 대회 짤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정무컵 참고.

2009년 12월 4일 허정무호는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맡은 마라도나와 악연이 있기 때문에 어찌 될 지 주목되었다. 게다가 마라도나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 때문인지 남아공 월드컵 B조 예선에서 대한민국-아르헨티나 전을 앞두고 있을 때,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장외 신경전이 있었다.

2010년 2월 10일, 동아시안컵에서 만만하던 중국 3:0으로 대파당하면서 미친듯이 까였다. 게다가 스코어로도 그렇지만 경기력으로도 시망 수준이라 상당히 욕먹었다.[35] 그 와중에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 오늘 왔을 뿐"이라고 해버려 더더욱 욕 먹는 중. 틀린 말은 아닌데, 문제는 하필 중국 무패 기록을 날린 날 할 말은 아니었다는 것.

2010년 2월 14일 단두대 매치 동아시아컵 마지막 경기였던 한일전에서 일본3:1로 승리하였다. 일본 도쿄 원정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지만 중국 쇼크로 인해 뒤돌아선 여론의 반응을 돌리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 넷상에서 '이제 우리감독 짤리는구나'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미묘한 상황(…)이다.[36]

그래도 다행히 드록국 코트디부아르를 상대로 한 3월 3일 평가전에선 수비라인을 끌어내린 전술을 사용하여 문제되던 자동문을 고장(...)내고 [37] 2:0으로 승리하였다.

에콰도르와의 경기도 2대0으로 이기고, 일본 사이타마에 가서 원정 한일전까지도 2대0으로 이겼다. 하필 이 경기가 일본 국대의 월드컵 출정식이기도 했기 때문에, 경기 직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출정식 행사가 진행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흘렙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져버렸기에 또 욕 먹고 있다. 결정적으로 상대가 꽤나 거칠게 태클을 하던판에 그나마 조용형과 제일 잘 하던 센터백인 곽태휘를 잃고 말았다. 왜 월드컵 비출전국이랑 해서 선수들만 날리냐는 원성도 나오는중...

그리고…… 대망의 2010년 월드컵에서 그리스를 쌈싸먹는데 성공하면서 국내파 감독 최초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승리를 기록한 첫 자국 출신 감독이란 타이틀길다을 획득했다. 오오오오...허감독...그 승리로 당분간 까방권을 획득할 듯 싶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차두리 대신 오범석을 기용하거나 실책을 거듭하는 염기훈을 냅두고 잘 뛰던 기성용을 빼는 등 용인술에 실패, 결국 4:1로 패하면서 대차게 까였다. 물론 아르헨티나야 항상 전세계 탑5 안에 드는 나라이니 패한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전술적인 면이나 선수기용에서 비난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 [38] 카를로스 테베즈도 경기 후 "한국 선수들이 그리스전처럼 공격을 하지 않아 놀랐다" 라며 인터뷰하였다.

아르헨티나전 패배 이후, 패배의 원인인 오범석을 아르헨티나전에 기용한 이유가 인맥 때문이었다는 악성 루머가 퍼졌다. 오범석의 아버지가 허정무와 같은 연세대학교 동문이자 축협의 기술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한국 내셔널리그 이사이기 때문. 다만 오범석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주전 오른쪽 풀백이었고, 사실 이전 스페인과의 친선경기에서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전에 오범석이 선발됐을 때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차두리와 오범석의 장단점의 차이를 들며 찬성했지만 결과는... 그 후 나이지리아전에서 오른쪽 풀백을 되찾은 차두리 역시 실점의 빌미가 된 실수를 하는 등 기동성있는 선수들에게 자주 돌파를 허용하는 약점을 노출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전에서는 다시 그리스전 때의 포메이션으로 돌아갔고, 무승부를 거두며 국내파 감독 최초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한 첫 자국 출신 감독이 되었다. 비록 소극적이고 수비적인 전술운용 및 선수기용으로 인해 많이 까였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어 냈으니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자랑스럽게 이름 한 줄을 명예롭게 남기게 되었다.

16강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 우루과이에 2:1로 석패했다.[39]

3.2.6.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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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추후 행선지로 포항행 떡밥을 투척했다. 1990년대 초반 코치, 감독으로 재직한 연이 있기 때문인데, 막상 포항 팬들의 여론은 나빴다. 파리아스 이후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축구'와 허정무가 추구하는 '견고한 축구' 스타일이 완전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월드컵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남기고,부임하기도 전에 팀내 주전 공격수이자 전년도 시즌 득점왕 유병수를 디스하면서 2010년 9월 4일부로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으며 K리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데뷔전에서 모두의 예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며 인천 사령탑 생활을 시작했다. 두번째 경기인 상무와의 경기에서마저 후반 45분에 동점골을 먹히면서 또 한 번 무를 캐냈다. 인천 망했어요

다행히 3번째 경기인 대구 FC와의 22라운드 경기에서 4-1로 완승하며 인천에서의 첫 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2007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FA컵 결승 2차전 승리 이후 무려 1022일 만의 K리그 승전보. 23라운드 서울전에서는 0-2로 무너지며 인천 부임 후 첫 패배를 당했다.

10월 9일 대전 시티즌전에선 유병수의 해트트릭으로 3골 차로 앞서가다 후반 중반부터 내리 3골을 허용하며 그 보기 드물다는 3-3 무승부를 연출했다. 정규리그가 종료된 시점에서 그의 성적은 10경기 2승 6무 2패. 과연 명불허전이다. 다만 이는 축구팬들이 농담조로 하는 말인 만큼 진지하게 새겨 들으면 곤란하다. 인천 유나이티드 문서에 상세히 나와있지만, 당시 인천 유나이티드는 팀 캐미스트리가 완전히 붕괴되어 승점 자판기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나마 허정무 부임 후 어렵사리 팀을 추스려서 성적을 낸 것.

2011년 3월 5일 시즌 첫 경기에서 상주 상무에게 2:0으로 패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주(0:0)/대구(1:1)전을 연달아 무재배하는 권능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8무 2패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8월 20일 리그 22라운드 경기에서 꼴찌 강원 FC와의 안방 경기도 0:0으로 비기면서 10경기 무승의 무재배 저력을 보여주자 열불난 서포터들이 선수단 입구 쪽에서 '허정무 나와라!'며 야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몰래 피해 다른 입구로 빠져나왔다.

8월 27일 리그 23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홈 경기에서 드디어 11경기만에 2:0으로 이기면서 무재배를 잠시나마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2011시즌을 14무라는 무승부 1위 기록과 역시 무재배 지존이라는 명성을 확인시키고 만다. 최종 리그 성적은 6승 14무 10패로 13위. 여담인데 10무를 넘게 무승부를 기록한 다른 팀은 전남(...)과 제주 뿐으로 딱 10무씩 거뒀다.

그리고 12월 6일 스포츠서울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끄는 인천 구단의 부진에 대하여 구단 사장이 잘못이라는 말을 하다가 대폭 까였다. 알다시피 인천은 시민구단으로서 재정이 탄탄하지 못하다. 게다가 전임 시장의 엄청난 개발 논리로 인하여 10조원이 넘는 막대한 빚에 시달리는 인천광역시로서 인천 구단에 원하는 대로 돈을 대해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인터뷰에 조건도 현 인천 사장은 원하는 대로 4명 영입해 주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줘도 성적이 이 모양인 걸 남 탓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인천 팬들은 조건도 사장이 그런 말할 자격이 없다는 입장이다. 2011년에 영입한 선수가 권정혁, 김한섭, 엘리오, 알미르 4명인데 이 중에서 이적료는 단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전부 트레이드 혹은 자유 계약. 자기가 데려온 것도 아니고 감독이 스스로 구해온 것을 두고 할 수 있는대로 해줬다 라고 말하기엔 너무 뻔뻔하다. 결국 2011시즌이 끝난후 조건도 사장이 사임하였다. 사실 인천 구단의 수뇌부는 구단주-사장-단장간 관계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구단 운영의 여러 부분에서 사사건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2012 시즌이 시작되기 전 "파란색-검은색이 왜 전통인지 모르겠다." 라는 개소리발언을 통해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과의 관계를 절단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유나이티드/2012년 문서 참조.

일단은 인천 감독으로 있지만 다음 시즌 리그 8위에 들어가지 못하면 감독 그만두겠다고 공언했다. 무재배 축구로 가능할까 결국 1승 1무 4패 14위의 성적을 마크하며 여론의 압박을 받자 2012년 4월 10일자로 자진사퇴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인 광주전에서 무재배를 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후 인천은 김봉길 감독의 지휘 아래 무기력한 모습을 깨뜨리고 시즌을 9위로 마쳤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 몹시 엄한 스타일이었던 허정무가 조용한 리더 스타일의 박지성과 함께하고, 또 그와 함게 일생의 숙원이던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업적을 일궈낸 이후 사람이 많이 변했고 그렇게 안 하던 일을 하게 된 것, 독기가 빠진 것이 폭망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근데 김봉길 문서에 보면 허정무 때는 새벽 훈련이 문제였다고 나온다. 빠져서 그 정도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전남 시절 제자 정인환, 김명운 등과 김남일 설기현 등 본인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시민구단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기존 선수를 내주면서까지 데려오며 대대적으로 스쿼드를 갈아엎으려 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감독 자신의 축구철학과 전술과 걸맞는 선수를 모아서 스쿼드를 꾸리는 것은 감독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돈은 구단주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선수를 데려오는 업무는 프런트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감독은 전술 못지 않게 정치와 경제 감각이 있어야 한다.

물론 허정무가 있는 스쿼드대로 성적을 낸다는 것이 장점으로 언급되지만, 뭐 그마저도 포항 시절 호화멤버들로 피똥을 싼다거나 전남 시절 00년대 중반 동남아 팀에게 어려움을 겪는다던지 항상 그랬던 것도 아니다. 어쨌든 대충으로나마 있는 스쿼드를 쓸 줄은 안다고 칠 때, 없는 스쿼드를 재주껏 메꾸는 능력은 검증받은 바가 없었다.[40] 각급 대표팀에서야 매의 눈으로 찍어둔 선수들을 콜업하면 구단들이 군소리 한마디 없이 갖다바쳤고, 포항과 전남은 액수가 좀 차이는 나겠지만 엄연히 대기업 구단이다.

오히려 거꾸로 허정무 영입은 구단 고위층이 파워 게임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저명인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몇년 뒤 똑같은 일 어느 시민구단에 또 한번 생기는데...

어쨌든 그의 파란만장한 감독인생이 월드컵이라는 최정점을 찍고는 일단락된 느낌이다.
허정무가 감독으로서 K리그에서 남긴 기록은 121승 128무 113패. 응? 무 128개?

3.3. 기록

3.3.1. 포항제철 아톰즈

  • 리그컵 우승 1회 : 1993

3.3.2. 전남 드래곤즈

  • K리그 준우승 1회 : 1997
  • FA컵 우승 3회 : 1997, 2006, 2007
  • 리그컵 준우승 1회 : 1997

3.3.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1회 : 2000
  • 동아시아컵 우승 1회 : 2008년, 준우승 1회 : 2010
  • FIFA 월드컵 16강 : 2010

3.3.4. 주요 개인 수상

  • 프로축구 빅스포상 수상 : 1997
  • FA컵 지도자상 수상 : 1997
  • AFC 선정 5월의 감독 : 1999
  • FA컵 최우수 지도자상 수상 : 2006
  • 제21회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감독상 수상 : 2007
  • 아시아 축구연맹 올해의 감독 : 2009
  • 아시아 축구연맹 황금공로상 : 2010
  • 제5회 에이 어워즈 최고의 리더십상 : 2010
  • 제6회 환경재단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 2010
  • 대한축구협회 시상식 특별 공헌상 : 2010

3.4. 허카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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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부임 직전의 국가대표팀 명단.
거스 히딩크가 발굴했다고 알려져 있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히딩크호 선수 대부분이 이미 국가대표 엔트리에 포함되어있다.

선수의 기량과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스카우트를 덧붙인 허카우터. 한국의 아르센 벵거[41] 혹은 루이 판 할

그가 발굴해 낸 대표적인 선수가 다름아닌 박지성이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2군 입단 테스트에 떨어지고 불러 주는 대학이 없어서 명지대학교에 겨우 들어갔던 미드필더 박지성의 재능을 눈여겨본 그는 박지성을 바로 올림픽 대표로 뽑았고[42][43] 본인이 감독을 겸직중이던 국가대표팀에도 데뷔시켰다. 이 때 박지성의 나이는 19세. 그냥 고만고만한 백업 정도로 기용한 것도 아니고, 국가대표팀에 있어 월드컵 다음으로 중요도가 높은 대회인 AFC 아시안컵에서 주전으로 중용했다. 이후 박지성은 거스 히딩크를 만나 승승장구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까지 가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무명이었던 미드필더 구자철을 발굴해 낸 장본인 역시 허정무였다.[44] 기성용의 경우에도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처음 올린 것은 핌 베어벡 감독 때였지만 일회성 선발에 그쳤고, A매치 데뷔시키고 붙박이 주전으로 팍팍 밀어준 건 허정무였다. 당시 기성용은 무려 4살을 월반해서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할 정도로 가능성을 널리 인정받긴 했지만 올림픽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경기력을 보이며 '포텐은 있는데 성인레벨에선 아직...'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선수를 바로 A대표팀에 선발하고, 심지어 월드컵 가냐마냐가 달린 최종예선 무대에서 주전으로 중용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청용 역시 대표팀 주전으로 자리잡으며 허정무는 양박쌍용 진용을 구축한다.[45]

대표팀 발탁 뿐 아니라 클럽팀이나 유소년 육성기관인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선수를 키워낸 사례도 한둘이 아니다. K리그에서 손꼽히는 수비수로 활약하고 현재는 중국리그의 상하이 상강으로 건너간 김주영도 허정무가 발굴한 대표적 사례. 과거 허정무가 유스시절 공격수로 테스트보러 온 김주영을 보고 "공격수로 계속 뛰면 대학도 못 간다, 하지만 수비수라면 국가대표까지도 가능하다." 라고 평가하며 포지션 변경을 종용했는데, 그 이후 실제로 김주영이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수로 성장하고, 국가대표에도 승선했던 것을 보면 그의 안목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김보경 #, 국가대표급 수비수로 성장한 정인환 역시 허정무가 키워낸 인재. 정인환은 용인유소년축구센터(백암고) 시절 허정무가 조련한 인연으로, 후에 허정무가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직 중에 핵심 선수로 영입하기도 했다. 전남 감독으로 있었을 때 센터백 곽태휘도 그의 손을 거치며 뒤늦게나마 성장했다. 조선이공대학이라는 다소 듣보적 명성의 대학교에서 선수생활하다 들어온 한교원도 허정무의 눈에 들어 데뷔시즌부터 주전으로 활동하고 기량이 발전되어 뒤늦게 국가대표에도 들게된다.

그 외에도 2007년 당시 청대였던 윤빛가람을 보고 '재능이 있긴 한데 그리 특출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발언을 했는데, 2012년 윤빛가람이 폭망하자 이게 재조명되기도 했다. 김신욱 김보경을 맨 처음 대표팀으로 콜업했던 사람도 허정무였다. 당연히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디서 듣보잡을 데려오냐?'였다.

1999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는 무명이었던 이을용을 대표팀에 발탁하기도 하였다.[46] 또한 올림픽 대표팀 감독 시절에 이영표를 알아보고 올림픽 대표팀에 뽑아 올림픽 대표팀에 뽑힌 후 3개월만에 국가대표까지 가게해준 장본인.

그 외에도 2002 한/일 월드컵 출전 선수 중 상당 수는 1999~2000년 대표팀 감독 부임 시절에 선발했던 선수들이다.[47]

그의 이런 능력 때문에 축빠들 사이에선 감독하지 말고 유소년 키우는 일에 전념해줬으면 한다는 말마저 나올 지경.어째 대립했던 차범근 문서에도 이거랑 비슷한 소리가 있는거 같은데

실제로 허정무가 까일 때 별걸 다 까도 그의 선수보는 눈 만큼은 오히려 국내 톱으로 추앙받는다. 오오오. 매의 눈. 오오오! 그리고 이는 허정무가 까일 때 첫 월드컵 원정 16강과 함께 발동되는 가장 강력한 실드이다. FC 코리아는 이걸 모르고 선수빨이라고 비하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발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많이 한다. 정작 허정무 본인은 그 별명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 브라질 월드컵 전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허카우터'라는 별명은 아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

여담으로 클럽 팀을 맡으면 유망주는 샘솟고 전술적으론 안정되지만 왠지 모르게 비기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과도한 훈련으로 성적이 조금씩 내려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허정무가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 유망주 파워로 부임 전보다 성적이 올라가는 괴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루이 판 할. 성적 부진으로 바르사 바이에른 뮌헨에서 경질 당했는데, 경질 당하기 전 반 할이 발굴하거나 포텐을 터뜨린 선수들이 차비 에르난데스, 카를레스 푸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48] , 토마스 뮐러 등이고(...) 이 선수들은 반 할 경질 후 팀의 황금기를 여는 주역으로 성장했다.그러므로 반 할이 잘리면 맨유의 전성기가 돌아온다 카더라 있는 유망주나 기존에 잘 날아다니던 선수도 혹사시켜 싹을 말려놓고 떠나는 김성근 감독과는 정반대다.

박지성, 이영표, 기성용 등 허정무가 눈여겨 본 선수들이 못해도 국가대표 승선은 해내고, 상당수가 주전 자리를 꿰찬 것을 볼 때 한정된 자원과 환경 속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 클럽팁보다 어느 정도 원하는대로 팀을 꾸릴 수 있는 국가대표 감독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4. 해설자 경력

슈웃

1998년 월드컵 당시 전남 감독으로 재직 중인 상태에서 SBS에서 해설을 맡았으며,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KBS에서 해설을 맡았었는데[49]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vs멕시코전에서 황선홍이 골을 넣자

역시 방귀가 잦으면 이 나온다고요라는 망언을 남겼다. 그리고 깨알같은 서기철그렇습니다
2012년 인천 감독직에서 사퇴한 후 다시 MBC에서 해설자가 되었다.주로 공중파 국가대표 경기 해설을 하였으며, 2012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경기 해설도 맡았다.

해설자로서의 평가는 한마디로 동네 아저씨. 국뽕 한사발 들이키고 해설한다. 그냥 축구 감독판 김흥국이라고 보면 된다. 공격시엔 시도때도 없이 슛을 지르라고 외치고, #[50] 실점을 하면 거침없이 앙탈 혹은 짜증을 낸다. 반면 선방이나 득점상황에는 그 누구보다 좋아한다. 런던올림픽 영국전에서 남긴 명언이 '이게 하늘의 뜻입니다'

6월 4일 월드컵 지역예선 레바논전에서는 경기 내내 이동국을 극딜하는 모습을 보였다.[51] 전술적 분석보다는 결과론적인 선수 비난이 잦다. 게다가 A매치 경기 해설에 있어서 사전 정보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A매치 데뷔하는 선수인데 오랜만에 국대에서 본다는 헛소리를 하는 등[52]을 보이기도 했고 페루와의 경기에서 조찬호가 과감하게 돌진하다가 공을 빼앗기자 바보 같은 플레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축구팬들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물론 허정무의 구력이 엄청나고 지도자 경력도 길었던 만큼 완전히 무가치한 해설은 아니다. 가끔 듣다 보면 괜찮은 얘기를 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철저히 데이터를 조사해서 양 팀의 전술이나 경기의 흐름을 잘 짚어주는 이영표나 한준희와는 달리 허정무는 정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따라 방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본인이 명감독이라도 자료가 부족하면 경기 흐름을 잘 짚어줄 수 없는데 마치 허정무의 해설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쓸데없는 소리나 감탄사는 많이 터트리지만 경기의 흐름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설을 하지 못한다. 그래도 한 경기에 몇 번씩은 순간적인 상황해설이 좋을 때가 있는데 그뿐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호 단장을 맡으면서 MBC 해설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로 취임한 이후에는 JTBC에서 국가대항전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5년 6월 16일 JTBC에서 생중계한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미얀마전의 해설을 맡았으며, 동년에 JTBC/ JTBC3 FOX Sports가 단독 중계하는 2015 동아시안컵 대회 해설진에도 합류했다. 이후 동년 10월 8일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쿠웨이트전 해설도 박찬하 위원과 함께 맡았다.

5. 행정가 경력

5.1. 대한축구협회

2012년 인천에서 사퇴한 뒤, 2013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복귀했다.

2013년 3월 7일 정몽규 축협회장이 선임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행정가의 길로 들어섰다.

2014년 7월 3일 브라질 월드컵 졸전을 펼친 홍명보 감독의 유임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유임을 발표하였다.

1주일 후, 홍명보 감독이 자진 사퇴하자 본인도 결국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1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초기에는 경기위원장을 겸임하였으나, 2016년 조긍연 경기위원장이 선임된 이후에는 부총재 역할만 하는 듯.

2017년 6월 14일 슈틸리케호가 최종예선 8차전인 카타르전에서 2:3 참패를 겪으면서 월드컵 본선 직행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15일 슈틸리케가 경질되었다. 그러면서 슈틸리케호 이후를 이끌 감독 후보군에 오르고 있다. 기사 1 기사 2 대표팀 감독을 두 번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첫 원정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지지의 근거. 다만 5년동안 현장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약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언론에서는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임과 동시에 네티즌 여론은 상당히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극과극의 대비를 이루는 후보. 하지만 신태용이나 최용수 등 젊고 유망한 감독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했다가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면 해당 감독은 책임을 뒤집어쓰고 커리어를 망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허정무나 김호곤 등 이미 감독으로서 커리어가 비교적 최근에 끝났으면서 현역 시절 지도력이 검증된 원로가 임시 감독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축구팬들은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실책 그리고 축구협회의 파벌 그리고 5년동안이나 현장을 떠나있었다는 점에서 반대하고 있다. 대신 국가대표 수석코치 출신이자 소방수로써 올림픽 8강, 청소년 월드컵 16강 등 괜찮은 성적을 내고 최근까지 대표팀을 이끌고 다양한 전술을 쓸 수 있는 신태용 감독을 원하고있는 추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신태용이 감독으로 뽑혔다. 관련 사항은 신태용호 항목에 적혀있다.

5.2. K리그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 부총재 직을 역임했다.
허정무 부총재 시절 K리그1, 2 중계 확대와 유소년 시스템 구축 등에 힘써서 리그가 안정화 되는데 기여하였다.

5.3. 대전 시티즌 이사장

2020시즌을 앞두고 대전 시티즌 하나금융그룹에 매각되면서 재단 이사장에 부임하였으며, 프로축구연맹에 사의를 전했다고 한다.

허태정 시장을 만나 대전월드컵경기장과 덕암 축구센터 사용 권한을 하나금융이 갖고, 시설 유지 보수만 대전시설공단이 2년간 지원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

6. 차범근과의 갈등

현역 시절부터 차범근과는 자의반 타의반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대학 때는 연세대- 고려대 선수로, 해외에선 네덜란드- 독일 리그로, 감독 생활도 포항- 울산으로 계속해서 라이벌 비스무리한 관계를 형성해 왔다. 한편 둘의 관계가 악연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이 기사로 나온 적이 있으나, 직접 읽어보고 판단바람.

그리고 직접적인 충돌은 19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감독 차범근 vs 해설자 허정무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대개 많은 사람들은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한 이후 허정무와 차범근이 언쟁했던 것만 알고 있으나 이전부터 둘의 충돌은 잦은 편이었다. 특히 월드컵 전부터 허정무는 차범근의 수비 중심의 전술은 안 된다고 계속해서 비판해왔으며 무조건 공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상황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조별 리그 1차전 멕시코전을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이었는데 여기서 차범근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최용수도 정상 컨디션이 아닌지라, 김도훈을 원톱으로 하는 3-6-1 전술로 멕시코전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기자도 아닌 해설자 허정무가 불쑥 끼어들어 이런 뜬금없는 돌직구를 날리게 된다.
"차 감독, 만약 황선홍이 뛰고 싶다고 하면 뛰게 해 줄 겁니까?"

이게 사석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될 발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외신 기자들까지 다 불러놓고 진행하는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이미 감독이 황선홍의 출장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하고 그에 따르는 전술까지 발표한 상태에서 기자도 아닌 사람이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대놓고 감독을 디스하는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차범근도 이 때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이 허정무에게 이번은 당신이 잘못한 거라며 차범근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해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억지로 차범근에게 사과를 했으나 차범근은 이 사과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후 전개는 아시다시피...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 때 당시 타 방송국의 해설자였던 MBC의 신문선과 KBS의 이용수는 해설을 했는데, SBS의 허정무는 작정하고 경기 내내 다른 나라 전문가들처럼 차범근을 비난했다. 이미 0-5 대패로 마음이 무거웠던 시청자들이 해설은 음소거를 하거나 타 채널로 돌렸다는 경험담이 있을 정도. 이후 차범근이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나서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Round 2를 벌인 걸로 알려져 있으며, 허정무가 후임으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고 나서 밝힌 모토가 "용맹한 공격축구" 로 사실상 차범근 간접 디스. 이후 차범근의 K리그 승부조작 발언에 대해서도 허정무가 앞장서서 차범근을 비난하였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둘의 관계는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였으며 차범근이 공개적으로 허정무를 콕 찍어 지목하며 너무했다는 식으로 언급해 남보다 못한 사이로 결론되는 분위기였으나...

세월은 흘러 서로 갈등한 것도 인간적으로 싫어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축구관이 다르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허정무 본인도 처음 국대 감독 맡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차범근과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질들이 죽고 감상적이 돼서 그런지 둘은 2005년에 전격적으로 공개 화해를 했다. 당시 수원 감독이었던 차범근과 전남 감독을 새로 맡게된 허정무가 오랜만에 감독으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서로 아는 체도 안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허정무가 어찌되었건 축구계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지켜야 한다면서 수원 벤치로 찾아가 차범근에게 폴더 인사를 하고 차범근도 당시 감기 몸살로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허정무의 인사를 받고 반갑게 화답하면서 지난 앙금을 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 땐 입장이 바뀌어 허정무가 감독-차범근이 해설자였는데 당시 허정무가 아르헨티나전 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차범근은 전쟁 중에는 장수를 흔들어선 안된다며 허정무를 적극적으로 감쌌다. 아직까지도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공개적으로 언급하길 꺼리는 프랑스 월드컵 사태에서 차범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긴 인물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싸는 걸 보면 과거의 악연은 묻어둔 걸로 볼 수 있을 듯. 또한 허정무가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를 대표팀 감독 시절 다시 불러들여 주전 풀백으로 자리잡게 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최근 2013 U-20 월드컵 때도 훈련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 기사로 올라오기도 했다. #

7.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편파적인 인식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좋지 않다. 거스 히딩크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임해서 한창 삽질할 적에는 조광래 등 국내 지도자들과 더불어서 깠고, 움베르투 코엘류 핌 베어백 등에게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다.

비판에 대한 이유는 이들이 코앞의 성적에 급급하고 세대교체나 유망주 발굴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코앞의 성적에 급급해서 히딩크를 영입한 건 축협이다. 코엘류 감독은 김호곤의 올림픽 대표팀에 지원이 쏠리는 바람에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했고, 이후 취임한 본 프레레는 몰디브 쇼크를 만회하기 위해 영입된 인사였다. 그 봉프레레가 부진하다고 쫓아내고 월드컵 1년 앞두고 부임된 사람이 딕 아드보카트였고, 그 후임을 찾지못해 허둥지둥하다 지휘봉을 맡게 된 사람이 베어백이다. 결국 외국인 지도자들이 성적에 급급하게 된 것은 축협의 근시안적인 행보 탓이다. 이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외국인 지도자들을 탓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허정무는 외국인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는데, 박지성을 윙어로 안착시켜 키운 게 히딩크였다. 뿐만 아니라 오른쪽 윙백으로 송종국을 발탁했고, 부임 초기에는 울산 수비수 서덕규를 전격 기용하기도 했으며, 월드컵 대표팀에 청소년 대표인 정조국, 여효진, 최성국, 염동균을 훈련 파트너로 합류시켜 키우기도 했다. 거기다 부지런히 뛰는 것 밖에 못한다던 조재진을 원톱으로 발탁한 건 코엘류였고, 약관을 겨우 넘긴 김진규그리고 밥줘 월드컵에 데려간 게 아드보카트였으며, 홍명보 김태영 은퇴후 난황을 겪던 수비진에 유경렬이나 김영철 등 중견 선수들을 영입해서 안정을 꽤하기도 했다. 2007 AFC 아시안컵 졸전으로 욕먹은 베어백도 예선에서는 올대선수들을 발탁해 출전시켰다. 그리고 현재 한국 대표팀의 포백은 히딩크 감독 시절을 거쳐 베어백 시절에 완성되었다[53]

8. 여담

컬투쇼에 소개된 사연에 의하면 1980년대 초, 허정무가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가장 전성기에 있었던 시기에 자기 고향 면민체육대회에 출전해 다른 리(里) 주민대표팀을 능욕한 전설이 해당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경기 전 프로선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상대 쪽이 항의해서, 허정무는 하프라인을 넘으면 안된다는 조건을 걸고 시합에 참여했지만 하프라인에서 쏴도 죄다 골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체육대회가 졸지에 싸움대회가 되고 말았다고....[54]

실제로 뛰어 보면 국제 리그 선수들의 경우는 축구 좀 한다고 하는 일반인과 리듬과 템포, 몸싸움, 발재간이 차원이 다르며 중앙선에서 골을 넣을 정도의 킥력을 보유하고 있다. 빅리그 선수 정도 되면 만약 EPL 선수가 먼저 공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1:11로 뛰어도 EPL 선수에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내셔널리그 선수랑 시합 하다가 그냥 대놓고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는데 그냥 튕겨나갔다고 할 정도라고……. 어떤 군대축구 대회에서는 한 팀이 영혼의 9백 수비를 하고, K리그 수비수 출신이 혼자 공격을 했는데, 나름대로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을 전부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팀이 그 혼자서 공격하는 걸 못 막아서 패했다고 한다.그리고 그 수비는 포상휴가갔다 카더라

이 건 비단 축구선수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프로선수가 다 이렇다. 보스턴에서 쫓겨난 채태인이 사회인 야구에서 타자로 잠깐 뛰었는데 그야말로 무쌍 찍었다(...) 그만큼 프로에서 아무리 못 한다고 해도 아마추어와의 갭은 상당히 크다.

허정무의 psv 시절에 대해 한 매체가 정리한 기사가 있다. 허정무는 결혼 5일 만에 네덜란드로 날아가 단 한 번의 연습경기 후 파격적인 대우로 팀에 입단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해병대 357기라고 한다. 인천 구단은 현빈이 인천 백령도로 발령나자 이를 이용해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배우자 최미나 씨는 1970년대 후반 동양방송에서 MC로 활동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스타였다. 오히려 결혼 당시에는 최미나 씨가 결혼하기에 아깝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었다고. 그리고 허정무 슬하에 두 딸이 있는데, 방송에 출연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최근 허싱와라고 불리기도 한다.

1996년 전남 감독 시절 경기 전 악수를 하면 진다는 징크스가 있던 고재욱 감독이 이끌던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고재욱 감독이 징크스 때문에 악수를 거부하고 뒷짐을 지자 몰래 뒤에서 따라와서 고재욱 감독의 손을 잡아 억지로 악수를 했다고 한다. 결과는 전남의 3-2 승리, 그러니깐 울산의 패배. 1 2 토요미스테리에 가끔씩 재미난 이야기가 나올 때도 나온 이야기다.

2016년 3월 13일 새누리당 비례대표 신청서를 제출하며 뉴스에 올랐다. 이로써 이에리사, 이만기, 조훈현에 이어 20대 총선에 참가하는 네 번째 새누리당측 스포츠 유명 인사가 되었다.정무적 판단에 능할 듯 2016년 3월 22일, 새누리당 비례대표 32번으로 공천을 받음으로써 20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뱃지를 달 확률이 사실상 희박해졌고[55], 23일 비례대표에서 사퇴했다. 특별히 정치적 언행을 한 적은 별로 없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가 박지원과 비슷하게 들린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고향은 같고 허정무가 박지원의 명예 박사학위 수여식 때 참석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다. 한편 박지원이 2016년에 입당한 국민의당을 창당한 천정배 허정무 영입을 고려한 적도 있다. 다만 본인이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러온 K리그 경기는 항상 무승부로 끝난다는 속설이 있다.

대표팀 감독 시절 부친상을 당했는데 한일전에서 패했다. 그당시 일부 무개념 악플러의 '그러니까 니 애비가 뒈지지' 라는 악플들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현재까지도 인터넷 댓글을 못 본다고.

공한증을 깨버린 감독.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과 한국 축구는 한국이 전부 승리해서 중국에 공한증(恐韓症), 즉 한국과 경기가 공포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쓰였으나, 2010년 동아시안컵에서 0-3으로 경기결과, 내용, 전술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공한증이 깨졌다. 당시 허정무는 중국전 패배는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었고, 중국선수들은 기량이 좋았고, 우리 선수는 저조했다고 인터뷰해 책임회피라고 공분을 샀다.
중국에 첫 패배를 당한 감독이자, 슈틸리케와 함께 중국에 패배를 당한 유이한 감독이다.

9.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1953년생이라고 주장한다. [2] 남산감리교회에 출석한다고 한다. [3] 개인의 가정사가 아니라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사정이 그랬다. 장남, 그것도 신동 소리는 들어야 공부하라고 대학을 보냈고 보통은 상고를 나와 고졸로 은행원이 되는 것이 출세였던 시대였다. 하물며 차남부터는 중졸도 감지덕지, 곧장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여자는.... [4] 1960년대 국가대표를 지냈고 홍콩 세미프로에 진출했던 축구 선수다. [5] 참고로 이때 함께 있었던 선수가 축구선수는 황재만, 야구선수 김용희였다. [6] 이때 크루이프는 팔꿈치로 허정무의 코를 박살낸적도 있다(...) 당연히 팬들, 언론들한테도 비난을 받았고 왜 그랬냐는 질문이 나왔을때 "훌륭한 선수니까."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너무 잘해서 짜증나잖아. [7] 70년대 네덜란드를 빛낸 레전드 였으며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하였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는등 화려한 실력을 뽐낸 선수 였다. 특유의 드리블과 제공권이 압권이었고 일반적인 패스를 뛰어넘는 중장거리 패스가 정확성을 가미할 만큼 일품이어서 아직도 네덜란드 역대 레전드에 뽑히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대충 전문용어로 설명하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여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뜻은 검색으로... [8] PSV에서 3년만 활약하고 돌아온 이유는 아내의 향수병이 심했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더 뛰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타향살이에 지친 아내의 뜻을 존중했다. 마침 83년부터 K리그가 출범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9] 만약 1년만 더 있었다면...전설의 거스 히딩크와 함께 했을 수도...선수와 코치진으로 말이다. 히딩크 감독은 1984년에 PSV 에인트호번의 지도자로 들어왔다. [10] 원조는 좌진국 우범근이고 이게 더 유명했다. [11] 실제로는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냅다 걷어찬건 아니고, 정당하게 볼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의도적인 반칙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의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수비수 세명을 제끼던 마라도나를 깐 거라 관중들에게 야유를 들었다. 그래서, 반칙 장면을 자세히 보면 지금 기준으론 퇴장을 줘도 할 말이 없던 장면인데 경고도 안 받았다. 사실, 당시에 허정무만 이런 게 아니라 마라도나와 매치업된 수비수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다 이랬다. [12] 이탈리아전에서 대한민국은 2-3으로 졌다. 1:3 에서 터진 만회골... 첫 번째 골(1:1 을 만든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최순호다. 각각 대한민국의 월드컵 경기 3번째와 4번째 득점이다. [13] 기성용은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보다는 후방 플레이메이커 or 중앙 미드필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다른 전형적 수비형 미드필더 선수로는 김남일, 김정우 등이 있다. [14] 특히 컵 대회만큼은 강한 면모를 보인다. 비록 무승부와 연장 끝에 승부차기로 이긴 전적이 많아서 여기서도 무재배라는 비아냥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15] 본프레레는 결국 수석코치를 다시 뽑지 않았고, 월드컵 최종 예선이 끝난 뒤 해임당했다. 국내외 양쪽 모두 본프레레 개인의 인맥과 영향력이 약했다는 증거다. [16] 전후반기로 나뉜 리그에서 전반기 우승팀이 힘 빼던 일은 매양 있는 일이고 축구뿐 아니라 야구도 비일비재했다. [17] 치열한 명승부긴 했지만 [18] 배운 짓이 도둑질이라고 20년 뒤 허정무도 똑같은 짓에 가담한다(...) [19] 당시 축구 협회는 대회가 끝나면 감독도 끝!! 뭔 개소리야 이라는 이상한 모습을 뽐내어서 전임 감독제 자체가 모호하였고 이러한 문제는 결국.. 커다란 대 참사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란 쇼크다. [20]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1995년 전남은 신생팀이면서 8개팀 가운데 6위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킨다. 때문에 프런트에서 투자를 보강하며 다음 시즌 호성적을 기대했으나 예상 밖으로 컵대회 최하위를 기록하자 초강수를 둔 것이다. [21] 다만 축구팬에 따라서는 리그 3연패를 2회 달성한 시기 일화를 유일한 왕조로 치기도 한다. [22] 8위팀까지 승점 3점차가 나는 혼전양상. 물론 1위도 독주는 아니었다. [23] 1999.3.28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우측을 파고든 최성용의 크로스를 김도훈이 발리 슛으로 마무리하며 대어를 잡았다. [24] 아시안게임 태국 전에서의 패배는 감독 본인이 선수 선발을 안일하게 했고, 대회대비도 안일하게 한 탓이었다. 당시 태국에서 우승을 노린다면 17일이라는 기간 동안 8전, 거의 이틀 간격으로 8번씩이나 동남아에서 싸워야 했다. 이런 가혹한 대회에 데려다 놓은 선수들은 정작 프로의 경기 체력도 갖추지 못한 프로 초년생이나 대학생들이 절반을 훌쩍 넘는 비율이었다. 이들이 동남아에서 12일 동안 6전을 치른 끝에 뛰지 않는다고 선수들의 정신력 탓, 국가관 탓, 애국심 탓을 했던, 낙제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25] 외국인 선수 영입을 둘러싼 비리 문제가 불거졌다. [26] 선수단 내분이 일어나며 조윤환 감독이 사임한 전북과 상무를 밑에 깔아놨다. 그리고 조윤환 뒤를 이어 전북에 부임한 감독이 바로 최강희. [27] 여담으로 2006 FA컵 우승 당시 MBC 라디오 '이은하의 아이 러브 스포츠'라는 프로그램에서 허정무가 취중 인터뷰를 해 잠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는데, 당시 전남이 FA컵 우승축하연을 하는 중에 허정무가 인터뷰에 응했기 때문. [28] 허정무의 무재배 덕택에 극단적인 국뽕들은 전남 같은 팀이 아챔에 나가는 자체가 나라망신이라며 서울 수원 성남 등 호화 스쿼드를 갖춘 강팀만 참가자격을 줘야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까지 펼 정도였다. 전남도 창단시점부터 꾸준히 설비 투자를 해왔고 프런트에서 선수영입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만 앞선 팀들이 K리그의 대표적인 큰 손이라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비출 뿐이지, 결코 전남이 거지 구단이었던 건 아니다. [29] 성남이 2004년 인도네시아의 페르딕을 만나 15-0 폭격을 퍼부은 바 있으며, 요코하마가 베트남의 빈딘을 상대로 6-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05년 수원과 주빌로 이와타가 베트남의 호앙아인을 상대로 6-0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부산이 빈딘을 상대로 홈에서 8-0 원정에서 4-0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6년에도 감바 오사카가 베트남의 다 낭을 상대로 15-0 폭격을 퍼붓고 2008년에 가시마가 태국의 끄룽타이 은행에게 9-1과 8-1, 베트남의 남딘에게 6-0을 안겨주는 등 보기 드문 졸전이었다.허정무 전술 활용이 유연하다 이런 판타지는 좀 삼갑시다. 즉 해마다 k리그와 j리그 팀이 이 시기의 동남아 팀 상대로는 5득점 이상 경기를 내곤 했었다. [30] 물론 이는 같은 계열사라 포항과 전남이 선수와 스태프를 자주 스와핑(?) 하는데다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는 전남이나 포항이나 전력이 엇비슷했다. 리그 우승한 팀이랑 10등팀이 어떻게 엇비슷하냐고? 파리아스 매직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진 이유 자체가 득실차가 -4였던 5등팀 포항을 6강PO에서 우승시켰기 때문이다. 정규리그만 따지고보면 파리아스 시절에서 가장 나쁜 성적이었다. 진짜 전성기는 아챔 우승이란 결실을 맺은 2009년. 다만 이후 국가대표 감독이 되면서 전남 드래곤즈 박항서 감독을 앉히게 되었고 나란히 2008 AFC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한 포스코 동맹 두 팀은 조별 예산 탈락으로 K리그 망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다. 포항의 경우 2009년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전화위복에 성공했지만. [31] 하지만 2008년 감독 이후 이러한 면은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2002 월드컵때 깨달은게 많았다고 그래서 박지성을 주장으로 내세우고 16강 진출을 '유쾌한 도전'이라는 걸 내새우며 남아공월드컵 때 원정 16강 진출을 이루게 되었다. [32] 축구 팬들에겐 선수들과 같은 반바지 입고 어깨동무하며 독려한 2002년 월드컵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익숙할 것이다. [33] 전혀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게 문제다. 3무승부로 조별예선을 통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위팀 2승1무, 2위팀 3무, 3위팀 2무1패, 4위팀 2무1패 밖에 없다. 보통의 경우는 조별예선 3무승부(승점3점) 조3위 로 탈락할 확률이 더 높다. [34] 웃긴 건 이 경기의 경기력 자체는 제법 괜찮았다는 평이 많았단 거다. [35] 다만 이 경기 국대 선발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이전 경기들과 달리 미드필더 라인에 중미 4명을 기용했다. 다이아몬드도 아니었고 그냥 442였는데 양쪽 윙 자리에 중미를 박아넣는 희한한 실험을 했다. 하지만 중국전 패배로 된통 욕 먹은 이후부터는 포지션 파괴를 자제했다. [36] 물론 오카다 타케시 당시 일본 감독 역시 짤리지 않고 허정무와 마찬가지로 월드컵에서 원정 16강 성과를 거두게 된다. 팬들 여론이 부질없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듯. [37] 조용형과의 센터백 파트너 조합 변경 후 수비라인을 끌어내리니 자동문 조용형도 조율형으로 변신하여 드록바를 3, 4명이서 포위하여 쌈싸먹었다. [38] 이 당시에 히딩크가 아르헨티나 전을 시청한 후 '한국은 축구가 아니라 야구를 했다'라며 허정무에 혹평을 했다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하지만 정작 원 출처라던 풋볼 인터내셔널에서 그 인터뷰의 원문은 커녕 히딩크와의 인터뷰 자체도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소설로 판명되었다. [39] 교체 투입한 이동국의 경우 좋은 슛기회를 잡았고 적당한 퀄리티의 슈팅까지 이어졌으나 못 넣은 것이니 교체도 맞아떨어졌다면 맞아떨어졌다. 슈팅의 성공여부야 뭐... [40] 포항 3년간 리빌딩 끝난 우승멤버를 물려받고도 fa컵 우승 1회를 제외하면 별로 한 게 없고, 전남 1기 시절 fa컵 1회 우승 1회 준우승은 분명 업적이고 리그 준우승도 차지하는 등 잘나갔다. 그러나 전남 2기 시절 fa컵 2회 우승도 분명히 업적이지만, 리그 성적으로 보면 전임자나 후임자들과 성적을 비교했을 때 상당한 핫바리에 불과했다. 대표팀 1기도 좀 애매하고, 2기는 있는 스쿼드로 성적 잘 냈다. 즉, 허정무가 항상 혹은 대체로 있는 스쿼드를 있는 스쿼드 나름대로 쓸 줄 안다는 것은 오류가 상당히 많다. [41] 물론 벵거와 허정무의 감독 스타일은 정반대에 가깝다. [42] 무명 선수의 깜짝 발탁이라 언론에선 명지대학교 김희태 감독과 허정무 감독의 친분 관계를 놓고 바둑내기해서 허정무가 지는 바람에 박지성을 뽑았다는 루머가 돌았고, 추후에 직접 해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43] 박지성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 축구팀과 친선 경기를 했는데, 70여m를 혼자 드리블을 하며 5명을 제친 뒤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모습을 허정무가 보는 앞에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는데 상대가 알아서 비켜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44] 당시에도 이런 무명 선수를 뽑았다는 이유로 욕이란 욕은 다 먹고 해명에 가까운 인터뷰도 했었다... [45] 그러니 허정무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선수빨로 폄하하는 게 자기 스스로 축알못이란거를 인정하는거다. 굳이 말하면 그 선수빨은 어디서 굴러떨어진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만든 선수빨이다. [46] 1999년 3월 처음으로 국대에 발탁될 당시 이을용은 비록 실업축구와 상무를 거쳐 딱 한시즌 소화한 선수이긴 했으나 그 1년이 니폼니시 지도 아래 윤정환, 윤정춘, 김기동과 이룬 전설의 부천SK 미들진의 마지막 방점이었다. 이 환상의 중원이 딱 2시즌 유지되었고, 니폼니시가 직접 이끈 해는 98년 딱 한해밖에 없었다. 아직 미숙점이 있긴 했지만 K리그 보는 사람들은 다 알만한 선수였고 충분히 뽑아볼만한 선수였다. [47] 송종국,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이을용, 안정환, 이천수 등... 차두리, 윤정환 정도를 제외하고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 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허정무가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소집했었다고 보면 된다. 흠좀무... [48] 사실 슈바인슈타이거 2006 독일 월드컵 전후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포지션이었던 윙어로서의 모습은 기대 이하의 평가를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반 할은 그런 슈바인슈타이거를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 변경을 시켰고 이후 바이에른 뮌헨 전차군단 중원의 핵심으로까지 성장을 하였다. 어찌보면 반 할이 슈바인슈타이거를 재발굴한것으로도 볼 수 있다. [49] 2002년 당시 해설자로서는 부진했다. 경쟁사인 MBC는 차범근, SBS는 신문선이었다. KBS는 허정무 단독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이상철도 불렀고, 공동해설자로 최수종을 옆에 앉혀놓았다. [50] 대표팀 선수들이 슈팅을 너무 아끼고 있으니 더 잦은 슈팅을 해달라고 조언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의 철학에 맞게 해설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게 지나쳤는데, 공이 골라인에 걸쳐있는데 슛을 외치는건 기본이고 아예 하프라인 조금 넘은 시점에서 무작정 슛을 외치기도 했다. [51] 이동국은 허정무가 2002년을 대비한다고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겸임할 때,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서 동시에 소집하면서 뼛골까지 빨아먹은 선수였다. 특히 허정무가 아시안컵 3위를 할 때 이동국이 대회 득점왕을 먹으며 수훈갑 역할을 했는데 이 때 이동국은 허정무가 혹사시킬 정도로 출전 시간을 늘리는 바람에 대회 내내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를 뛰었다. [52] 자기 기준에서 A대표팀 해설하면서 오랜만에 본다는 뜻 [53] 히딩크 감독은 3백과 4백을 번갈아 썼고, 코엘류나 아드보카트도 4백 체제 안착을 시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경기에서는 3백과 3-4-3전술을 사용했다. 4-5-1과 4-2-3-1 같은 전술이 한국대표팀에 안착한 건 베어백 시절 부터다. [54] 생각해 보면 학교 운동장일 텐데 정식 축구장과 비교하면 규격이 상당히 작은 경우가 많아 아마도 정식 축구장에서 말하는 중앙선은 아니었을 것이다. [55] 지난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당선자는 25명이었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의 의석수가 줄면서 17~18, 많게는 20번를 안정권으로 보고있다. 실제로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를 당해 비례대표는 17번까지 당선되었다. 18번 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