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8:55:48

선동열/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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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0029><colcolor=#002955,#fff> 선수 경력 아마추어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은퇴
은퇴 후 지도자 경력 ( 삼성 감독 시절 기아 감독 시절 선동열호)
평가 플레이 스타일
평가 (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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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드립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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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경력2. 프로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2.1.1. 1985 시즌2.1.2. 1986 시즌2.1.3. 1987 시즌2.1.4. 1988 시즌2.1.5. 1989 시즌2.1.6. 1990 시즌2.1.7. 1991 시즌2.1.8. 1992 시즌2.1.9. 1993 시즌
2.1.9.1. 일본프로야구의 선동열 스카웃 시도
2.1.10. 1994 시즌2.1.11. 1995 시즌
2.1.11.1. 한일 슈퍼게임, 그리고 일본진출
2.2. 주니치 드래곤즈
2.2.1. 1996 시즌
2.2.1.1. 1996 시즌 이후 스토브리그
2.2.2. 1997 시즌2.2.3. 1998 시즌2.2.4. 1999 시즌2.2.5. 은퇴
3. 연도별 성적
3.1. KBO3.2. NPB
4. 논쟁
4.1. KBO 최고의 선발 투수였는가?4.2. 시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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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경력

파일:Wct5rDa.jpg 파일:SunDongYol_1981.jpg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fkcw24qrh1sqk8veo9_r1_400.png
광주일고 시절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시절[1] 1982년 세계대회 미국전 당시

송정동초등학교 시절 먼저 야구부에 들어갔던 다섯살 위의 친형을 보고 부모님을 졸라 4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2] 여관을 운영하던 부친 선판규 씨는 둘째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들이 야구를 고집하자 "이왕 할 꺼면 최고가 되어라"며 공터에 조명시설까지 갖춘 야구장을 만들어줬다. 송정중 2학년 때 유격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무등중학교로 전학했다. 무등중 졸업 후 광주상고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아버지의 의향으로 광주일고에 입학하며 진로를 바꿨다.

1, 2학년(1978~79년)때는 투수보다는 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3학년(1980년)때는 투수로서 1년 후배인 차동철과 함께 원투펀치를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선수가 되었다. 첫 전국대회인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에이스 겸 5번 타자로 출전해 4강 충암고전에서 4피안타 완봉승을 따냈다. 결승전에서 이순철이 유격수로 뛴 동향의 광주상고를 만나 구원등판해 팀의 우승을 지켰다. 같은 해 봉황대기 경기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바 있다.[3][4]

선동열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에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었고, 연세대 한양대가 선동열을 입학시키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지만 고려대는 초고교급 선수인 선동열의 스카우트 비용이 없어서 오퍼를 넣지 못했던 상태였다. 당시 초고교급 야구선수들의 대학 진학을 할 때는 대학 측에서 계약금 지급은 물론이고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 다른 선수들도 같이 입학시켜주면서까지 모셔오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였다.[5] 그러나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씨가 직접 고려대 야구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려대에 진학시킬 의사를 내비쳤고, 일사천리로 입학 절차가 진행되어 선동열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81학번으로 입학한다.[6][7] 고려대학교 입학 동기로는 정삼흠[8], 한영준이 있으며 선후배로는 김경문[9] 양상문, 양승호, 박종훈, 박노준 등이 함께 호흡을 맞췄다.

선동열의 기량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물이 올라서 대학시절 만개했다는 평이며, 선동열 본인도 대학시절에 가장 공이 빨랐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위에서 언급한 2경기 완봉승이나 아래 서술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MVP 수상 등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팬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대학리그에서는 프로리그와 같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당시 대학리그는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10]

고려대 입학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여, 김건우, 조계현 등과 함께 초대 우승을 일궈냈다.[11]

81년 국제대회 당시, 대회를 참관하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카우터 브루스 달튼은 선동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평을 남겼다. #
You can steal all day on his windup, he pitches on top of the rubber instead of in front of it, and his ball has no real movement. But, boy, would I have liked that arm.

와인드업 하는 동안 하루종일 도루하겠군요. 그리고 투구판 앞쪽이 아닌 투구판 위를 밟고 투구합니다. 무브먼트도 별 것 없군요. 근데, 저 팔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요.
한마디로 완성도보다는 잠재력을 봤다는 얘기. 10대 후반밖에 안 됐던 시절이니 이상할 것은 없는 평이다.

정기 연고전에서는 두 차례 출장해 모두 완봉승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0-3으로 패배했다.[12] 1982년에는 3-0 완봉승을 거두었다. 1983년에는 양교 총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연고전이 무산되었다. 1984년에는 6-0 완봉승을 거두었다.

1982년에는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당시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에서의 거듭된 호투로 대한민국 우승의 주역이 된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찍은 평균 자책점은 0.31. 다만 이 대회 방어율 1위는 0을 찍은 임호균이었다. 이 시기부터 최동원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자리를 물려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항목 참조.

2005년에 스포츠조선을 통해 84년도 LA 다저스에서 5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금액의 오퍼를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다. # [13] 2019년에는 말을 바꿔 84년도에 LA다저스에서 계약금 35만 달러, 뉴욕 양키스에 계약금 50만 달러의 오퍼를 왔다고 증언하는 기사가 있지만 # 당시 메이저리그 1라운드 계약금이 10만달러 초중반대로 그 세네배가 넘는 액수를 제의받았다는 증언은 신뢰하기가 매우 힘들다.[14] 또 당시에 아마추어 중 최고라고 불리며 계약 직후 신인 때부터 4선발로 시작한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도 국제계약을 맺을때 계약금이 12만 달러였기 때문에, 50만 달러는 허황된 액수로 보인다.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는 말이 있는데, 분명 메이저리그가 특급 유망주 영입을 위해 보트 등을 준비해 선수를 망명시킬 정도로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일본야구에 진출한 백인천만 봐도 온갖 꼼수로 군문제를 해결한것만 봐도 실력의 문제지 병역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는 시각이 크다.

1984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차전과 6차전에서는 부진했지만, 1984년도에 LA 올림픽에서는 꽤 호투했다.(1승1패 방어율 0.56) 다만 토너먼트제에서 선동열이 1패를 한 것은 문제(자책점은 1점)였고, 쿠바가 빠졌는데도 한국팀이 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15]

초특급 투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해태는 구단의 사정이 좋지 않아 최대한 계약금을 깎아보려고 이런저런 수를 썼다. 하지만 선동열 측은 최소 2억을 요구했고, 해태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군면제에도 실패하고,[16] 안 되면 대학원이나 가버리겠다고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이것마저 떨어져 버린다. 해태는 이제 고개 숙이고 오겠구나했는데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해버린다.[17] 당연히 해태 팬들은 난리가 났고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깨질만한 물건들은 죄다 박살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1985년 새해로 넘어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와의 협상은 불발. 이 와중에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합숙 훈련에 불참하는 한편 상무 입단을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했는데, 당시 본인으로서도 매우 고민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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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장품 야구단 시절
결국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유니폼을 입었지만, 선동열은 아직 확답을 정하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끝에 프로로 가겠다고 선언, 1억 5천 만원을 받고[18], 1985년 3월 25일 해태 입단식을 가졌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화장품 측에서 반발. 그도 그럴 것이 엄연히 입단한 자기 선수가 계약 해지도 안했는데 이중계약을 맺은 꼴이었다. 게다가 직후 김용수와 민문식[19]도 비슷한 수법으로 프로행이 결정나는 바람에 아마야구계의 집단 반발로 번지고 만다. 선동열 개인에게는 프로입단 무효 가처분 소송이 걸렸고, 5월에는 해태가 선동열을 1군에 등록 강행하겠다고 하면서 싸움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5월 21일, KBO 차원에서 선동열을 당분간 출전시키지 않는 대신 선동열에게 걸린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KBO와 KBA가 극적 합의를 함에 따라 일약 선동열 사건은 큰 일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야구에 진출한 선수는 실업야구에서 최소 2년을 플레이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20]이 명문화되었고, 선동열은 전반기 등판 없이 1985 시즌 후반기부터 등판하게 된다.[21]

이렇게 복잡하게 프로에 입성한 후 그의 전설은 시작된다.

2. 프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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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해태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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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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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김시진과 함께
한국야구의 레전드 투수 최동원, 김시진과 함께. 자신들의 배번인 18+11=29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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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투구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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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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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1. 1985 시즌

데뷔 첫 해(1985년)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이중 계약 파문으로 후반기부터 출전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첫 프로 경기에서 김일융과 맞대결을 펼쳐 7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했는데, 김응용 감독이 계속 던지게 했고 결국 8회에 무너졌다. 7.2이닝 동안 5실점으로 데뷔경기를 마쳤다. 겸손해지라는 뜻에서 데뷔전을 실점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경기 후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데뷔전에서 승리투수가 됐더라면 자만심에 들떴을지도 모릅니다만 오히려 지금의 심정은 패전투수가 된 것이 저의 프로생활을 위해 잘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80% 정도의 힘으로 던졌습니다.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최강타자들로 구성된 삼성선수들과 대결하고 나니 프로에서도 내 볼이 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패기도 보여주었다. #

훗날 김일권 야사시TV에서 술회하기를, 선동열이 데뷔전(삼성 라이온즈, 대구야구장)과 두번째 경기(롯데 자이언츠, 무등야구장)에서 털리자 코칭스태프들이 고민에 빠졌고 패전처리로 등판시키자 열받은 선동열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피칭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당시 주장 김일권은 경기 후 집합을 소집했고 선동열을 가운데 불러내 따끔하게 혼을 냈으며, 그 뒤로 투구 모습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참고로 김일권은, 선동열이 헹가래 투수가 되었던 1986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5차전에서, 마지막 아웃카운트[23]를 잡아내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평균자책점 1위(1.70)와 7승 4패 8세이브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24] 분명히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나 시즌을 반만 뛴 것도 있고, 한 시즌 내내 3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입단동기 이순철의 활약으로 인해 아쉽게 신인왕은 놓쳤다.

2.1.2. 1986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86)

히스토리 25 선동열은 어떻게 '0점대 ERA' 신화 만들었나

1986시즌 최종 성적은 262.2이닝[25]무쇠팔 최동원의 267.0이닝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 214삼진, 19완투 8완봉, RA9-WAR 15.09[26][27][28] 소포모어 징크스의 완벽한 반례이자,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서 선동열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기록된 한해였다. 정규시즌 MVP와 투수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수상했다.

당시 한국프로야구는 전후기 리그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1986시즌 한정 제도상의 문제[29] 로 전기리그 2위-후기리그 2위를 마크한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어부지리로 직행하게 된다.(...) 그리고 삼성과 대결한 1986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동열은 선발등판해 9이닝 3실점을 기록했고, 팀도 연장 끝에 승리했다. 이후 4차전에도 선발등판해 6이닝 2실점을 기록했고,[30] 마지막 경기인 잠실 5차전에서는 6회부터 구원등판해 4이닝 세이브를 거둔다. 우승확정순간 헹가래 투수도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영상 2분 55초부터. 참고로 당시 파트너(포수)는 김무종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1986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2.1.3. 1987 시즌

1987년에는 162이닝 동안 14승 2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89, RA9-WAR 10.53를 기록하며 2년 연속 0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다만 허리부상으로 몇 경기를 결장하였고, 이로 인한 부상 관리 때문에 세부스탯은 전년도보다 좋지 못했다. 거기에 당해 김시진이 개인통산 100승이라는 대업을 쌓은 관계로 투수 골든글러브 또한 수상하지 못했다.

1987년 역사에 새겨진 경기로는, 등이 있다.

잘 언급되지 않는 사안이지만, 이 시즌 선동열은 (큰점수차 리드상황에서) 고려대 동문 타자들을 상대로는 치기 쉬운 한가운데 느린 직구를 일부러 던지는 기행(奇行)도 보였다.[33] 이는 선동열 본인이 1996년 3월에 발간한 자서전[34]에서 직접 언급한 내용들이다.[35][36]

밤새 음주 후 완봉승, 고려대 동문 봐주기 등 일화는, 아마시절 라이벌로 불렸던 대만의 곽태원이 동시기에 일본프로야구에서 한국보다 몇수 위의 타자들[37]을 상대로 끊임없는 자기발전을 하면서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의 황금기를 이끄는 행보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라, 한편으로는 씁쓸함마저 준다. 1987년 일본시리즈 3차전 part1, 1987년 일본시리즈 3차전 part2.

사실 동기부여 상실(매너리즘) 관련해서는 이치로도 일본시절 겪었던 부분이기는 하다. 다만, 일본시절 이치로와 한국시절 선동열은 선수로서 기본적인 직업윤리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1987년, 해태는 후기리그 2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직행했고, 여기서 승리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선동열은 부상으로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차전에만 등판했지만(세이브 기록), 영상 1분 40초부터. 다행히 해태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성공한다. 더 자세한 사항은 1987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2.1.4. 1988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88)

1988년에는 16승 5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21, RA9-WAR 11.72를 기록하면서, 에이스로서 팀의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1988년은 한국프로야구가 전후기 리그로 펼쳐진 마지막 시즌이다. 해태는 전기리그 우승-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시즌의 기세를 몰아 7.1이닝 동안 탈삼진 14개에 무실점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유명한 빙그레 타선을 압도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으나, 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시리즈에서 더 이상 등판하지 못했다. 영상 0분 40초부터.[38] 더 자세한 사항은 1988 한국시리즈 항목 참조.

특히 1988년은 1986년에 이어 선동열이 선발투수로써 두번째로 잘 던졌던 시즌이었는데, KBO 단일시즌 WAR로만 봐도 86선동열-83장명부-85김시진에 이은 4위를 기록했을 정도이다.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도 차지한다.

1988년 옥에 티라면,
  • 4월 17일 광주 빙그레전에서 빙그레 이동석이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당시, 선발 맞대결에서 희생양 투수가 된 것 거꾸로 읽는 프로야구사
  • 시즌 막판까지 펼친 다승왕 경쟁에서 롯데 윤학길에게 2승 차이로 다승왕 타이틀을 넘겨준 것[39]
정도이다.

그해 어린이날 KBS에서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 2에서도, 선동열이 등장하자 도우너가 감탄하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는데, 영상 11분 20초부터 당시 선동열의 국민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2.1.5. 1989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89)

1989년에는 21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1.17, RA9-WAR 10.70을 기록해 정규시즌 MVP-투수 3관왕-투수 골든글러브를 석권했다.[40]

1989년 대만 전지훈련 당시 선동열 관련일화. 링크

1989년 또한 역사에 새겨진 경기가 몇몇 있는데,
  • 5월 9일 대전 빙그레전에서는 유승안에게, 프로 데뷔 이래 첫 만루홈런을 허용했으며[41]
  • 7월 6일 광주 삼성전에서는 본인의 프로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다.[42]

1989년은 전후기 리그가 폐지되고 단일 리그로 시즌이 치러진 첫해이다.[43] 해태는 단일시즌 첫해에 정규리그 2위를 마크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그리고 태평양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선동열은 1차전 구원승,[44] 3차전 구원승[45]으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다. 1989년 플레이오프 3차전.[46]

이후 빙그레와의 1989년 한국시리즈에서 선동열은 1차전에 선발등판하지만, 이강돈에게 선두타자 홈런을 허용하는 등 부진한 투구를 보이며 패전투수가 된다. 영상 1분 15초부터. 그렇지만 3차전에서 세이브, 5차전에서 구원승[47]을 거두며 명예회복에 성공하고, 아울러 팀의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를 이끌었다. 우승확정 순간 헹가래 투수 역시 그의 몫이었다. 영상 3분 7초부터.[48]

그해 시즌이 끝나고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의 김현미 씨를 만나 결혼한다.[49] 결혼식은 이듬해인 1990년 1월 14일에 올렸다.[50] 그리고 결혼 직후인 2월 15일에는 부부동반으로 KBS 예능 자니 윤쇼에 출연하기도 한다. 영상 19분 30초부터[51]

2.1.6. 199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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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0)

1990년에는 22승 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 RA9-WAR 11.21을 기록해 2년 연속으로 정규시즌 MVP-투수 3관왕-투수 골든글러브를 석권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52]

1990년에는 개막전 광주 빙그레전에서 난타를 당하며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19900408 관련기사 그리고 이해 선동열의 고려대 후배인 박동희가 선동열의 역대 최고액 계약금을 갱신하면서 데뷔했고,[53] 데뷔전에서 프로야구 최초로 151km을 뿌리면서 6타자 연속삼진을 잡는 등 1990:오늘 뭐했지? 선풍을 일으켰던 관계로, 선동열이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 시점이었다.[54]

그렇지만 선동열은 개막전의 부진을 떨쳐내면서 이내 폼을 회복했고, 이후 시즌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9월 2일에는 한국프로야구 세번째로 100승투수가 되었고, 19900902 KBS 스포츠뉴스. 여세를 몰아 한시즌 피홈런 제로에도 도전했지만, 시즌종료 직전인 9월 25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김동기에게 피홈런을 허용하면서 아쉽게 도전에 실패한다.

1990년, 해태는 전년도에 이어 정규리그 2위를 마크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다. 그렇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에의 꿈이 좌절되었다. 당시 선동열은 구원등판한 1차전에서 삼성 김용국에게 홈런을 맞아 패했고, 다음날 2차전에도 2점차로 앞선 9회초 2아웃에 구원등판했으나 김용철에게 동점홈런을 맞고, 연장전에 가서는 역전까지 허용하는 부진을 겪었다. 요약영상. 심하게 말해 그해 해태의 플레이오프 패배 원흉이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선동열은 포스트시즌에 약하다는 편견을 얻게 되었다.

2.1.7. 199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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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1)

1991년에는 선수생활 7년만에 연봉 1억원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로 기록되었다.

1991년에는 19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1.55, RA9-WAR 10.90을 기록하며, 또다시 투수 3관왕과 투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1991년 또한 역사에 새겨진 경기도 몇몇 있는데,
  • 5월 21일 대전 빙그레전에서는, 승리투수가 되며,[55] 당시 김응용 감독의 개인통산 500승에 기여했고, 경기영상.[56][57]
  • 6월 19일 광주 빙그레전에서는, 13이닝을 완투하며 KBO 한경기 최다 탈삼진 신기록인 탈삼진 18개를 잡아낸다.[58]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2010년 류현진이 9이닝 기준 최다탈삼진인 17개를 기록할 때 다시 한번 소환되기도 한다.
  • 7월 14일 대구 삼성전에서는, 김용철 박승호에게 각각 홈런을 허용하면서, 개인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1경기 2홈런을 허용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910714 관련기사[59][60] 하나 덧붙이자면, 당시 삼성 김성근 감독의 이중오더 논란이 나온 것도 바로 본 경기이다. 더 자세한 사항은 링크 참조.
  • 8월 8일 대전 빙그레전부터 8월 30일 인천 태평양전까지 5경기 연속 두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한다.[61]

그렇지만 시즌 막판 윤학길 한용덕이 17승을 올리며 선동열과 다승 동률이 되자 다음 경기에서 이강철이 5회 1사까지 던지고 그 뒤에 올라와서 승리를 따내는 추악한 짓을 벌인다.[62][63] 당연히 여론은 들끓었다. 그리고 시즌 한경기를 남기고 20승이 걸린 경기에 등판해 당시 전반기 방어율 2.22를 기록한 조규제가 후반기에 대각성 후 방어율을 1.64까지 낮추며 자신의 방어율 1.58의 턱밑까지 쫒아오자 3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방어율왕을 확정짓고,[64] 노디시전 상황에서 자진강판을 했다. 2009년도 3년연속 20승 아쉽네 기사에서 20승 때문에 구설을 올리기 싫어 등판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여 또다시 비판을 받았다.

시즌 막판 위와 같은 논란도 있었고, 마침 그해 빙그레 장종훈이 당시기준 단일시즌 홈런신기록인 35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신드롬을 일으킨 영향 등으로 그해 정규시즌 MVP는 장종훈에게 넘겨주게 된다.[65] 또한 1991년은 선동열이 한시즌 기준 가장 많은 피홈런(8개)[66]을 허용한 해이기도 했다.[67]

1991년, 해태는 정규리그 1위를 마크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 선동열은 1991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등판해 완투승을 기록했고, 마지막 경기인 4차전에서는 (8회에 구원등판해) 9회에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1989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이어 포수 장채근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영상 2분 57초부터.[68] 더 자세한 사항은 1991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2.1.7.1. 한일 슈퍼게임
시즌 후인 11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도 참가한다. 나가라가와 구장에서 펼쳐진 5차전에 선발등판해 5타자 연속 삼진 포함 3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19911109 KBS 스포츠뉴스.

1ㆍ2차전 이후, 일본은 경기가 펼쳐지는 구장의 연고지팀 위주로 지역선발팀을 구성했었고,[69] 실제 5차전이 펼쳐진 나가라가와 구장도 주니치의 제2홈구장이었던 만큼, 일본팀 선발타선에도 주니치 소속 선수들이 5명이나 배치되었다.[70] 그런 이유로 세월이 흐른 현 시점에서는 당시 선동열의 호투가 평가절하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5차전 일본타선, 그리고 정예멤버가 출전했다는 1ㆍ2차전 일본타선을 모두 비교하고 분석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71]

5차전에서 선동열이 상대했던 일본타선은 다음과 같다.
1번 : 다쓰나미 가즈요시(2루수) : 1회 볼넷, 3회 좌전안타.
2번 : 사사키 마코토(우익수)[72]
3번 : 노무라 겐지로(유격수) : 1회 내야안타.
4번 : 오치아이 히로미츠(지명타자)
5번 : 다이호 야스아키(좌익수)
6번 : 우노 마사루(3루수)
7번 : 아이코 다케시(1루수)[73]
8번 : 나카무라 다케시(포수)
9번 : 니시무라 노리후미(중견수)[74]

그리고 1ㆍ2차전 일본타선은 다음과 같다.

1차전 일본팀 선발라인업.[75]
19911102 한일슈퍼게임 1차전.
19911102 한일슈퍼게임 1차전(요약영상).
1번 : 노무라 겐지로(유격수)
2번 : 야마자키 겐이치(좌익수)[76]
3번 : 아키야마 코지(중견수)
4번 : 오치아이 히로미츠(지명타자)
5번 : 히로사와 가츠미(우익수)[77][78]
6번 : 코마다 노리히로(1루수)
7번 : 후루타 아쓰야(포수)
8번 : 오카자키 가오루(3루수)[79]
9번 : 와다 유타카(2루수)

2차전 일본팀 선발라인업.[80]
1번 : 야시키 카나메(중견수)[81]
2번 : 다쓰나미 가즈요시(유격수)
3번 : 코마다 노리히로(1루수)
4번 : 오치아이 히로미츠(지명타자)
5번 : 히로사와 가츠미(우익수)
6번 : 다이호 야스아키(좌익수)
7번 : 이케야마 타카히로(3루수)
8번 : 타카기 유타카(2루수)
9번 : 나카무라 다케시(포수)

우선 1ㆍ2차전 일본타선은,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 정예타선이라기보다는 센트럴리그 올스타 타선에 좀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82][83] 물론 그것 자체로도 강한 타선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실질적인 센트럴리그 올스타라는 2차전 선발타선에 주니치 소속 선수들이 무려 4명이나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84] 이는 주니치 지역선발팀이라고 폄하받는 5차전 라인업(주니치 선수들 5명)과 비교했을 때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숫자인데, 이는 일단 한일 슈퍼게임 자체가 주니치 신문을 스폰서로 해서 창설된 대회였기 때문인 걸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주니치 소속 선수들도 단순히 빽(?)으로 경기에 출전한 것이 아닌, 전부 능력있는 선수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2차전에서는 노무라 겐지로, 후루타 아쓰야 등 초특급선수들이 경기 초중반부터 경기에 투입되기는 했다.[85]

다시 5차전 얘기로 돌아와서 1ㆍ2차전에 선발(5명)[86] 또는 교체출전(2명)[87]했던 7명이 5차전 선발타선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남은 2명으로 범위를 좁혔을 때, 사사키 마코토(다이에)는 비록 1ㆍ2차전에는 결장했지만 당시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타자였고,[88] 우노 마사루(주니치)는 수비는 최악이지만 공격형 유격수(내야수)로는 일본야구사에 남을 만한 타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5차전 당시 선동열이 상대했던 일본타선은 비록 1ㆍ2차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타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진다면 1차전과 5차전의 가장 큰 차이는 포수 이름값 포지션 정도인데, 후루타가 워낙 걸출한 포수라서 그렇지, 1991시즌의 나카무라 타케시 역시 홈런 20개에 OPS도 0.8을 넘었던 포수이다.[89] 사실 2020년대 시점에서 후루타는커녕 나카무라에 비견될만한 공수겸장의 포수도 일본에서 찾기 힘들다.

사족으로, 일본팀 기준 1차전과 5차전의 가장 큰 차이는 투수력이었다.[90][91]

2.1.8. 1992 시즌

그리고 1992 시즌, 선동열은 선수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1992년 4월 11일 잠실 OB전[92]에 그가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날 일기예보에 다음날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경기 취소를 확신하고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어서 경기가 강행되었고, 선발로 등판해서 경기를 치르던 도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가운데 식어가는 어깨로 무리하게 투구를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완봉승-그리고 김시진의 통산 124승을 넘어 125승으로 KBO 통산 다승 1위에도 등극했지만,[93] 그 결과 어깨에 건초염이 생기면서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접다시피했다.

당시에는 예상도 못했지만 이 경기가 결국 선동열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 29번째 완봉승이 되었고, 결국 그의 야구 인생과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특히 해태 선발진의 축이 선동열에서 조계현, 이듬해 입단하게 되는 이대진으로 이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94]

흔히 4월 11일 경기 이후 후반기 시작때까지 개점휴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그로부터 2주 후인 4월 25일 사직 롯데전에도 불펜투수로 등판해 1이닝을 소화했었다.[95] 단, 이 경기 등판 때도 몸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2주만에 점검차 등판한 것이다. 그리고, 부상 와중인 6월 21일 잠실 올스타전에서도, 서군의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한타자[96]을 상대했었다.[97]

드디어 후반기가 시작된 7월, 선동열은 선발이 아닌 마무리투수로 복귀하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시즌아웃된다.

한편 해태는 선동열이 없는 가운데에도 정규리그 2위[98]를 차지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롯데에게[99] 패배하고 탈락한다.

당시 정규리그 1위였던 빙그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전력이 매우 강력한 탓도 있었지만, 선동열을 제외하고도 10승 투수가 5명[100] 나왔고, 이순철, 김성한, 한대화, 홍현우, 박철우, 장채근 등으로 이어지는 타선이 강력했던 1992년의 해태 타이거즈 전력을 고려하면 해태로서는 매우 아쉬웠던 시즌. 선동열이 시즌을 거의 공치다시피 한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의 기적의 행진의 제물이 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었다.[101]

선동열의 1992년도 최종기록은 2승 8세이브, 평균자책점 0.28로 남게 된다.[102]

다행히 건초염이 낫긴 했지만[103] 부작용으로 어깨의 근지구력이 약화되면서, 1993년부터 선동열은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되었다.

2.1.9. 1993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3)

1993년 선동열은 전년도 부상에서 완벽히 회복하며[104] 구속도 전성기때와 맞먹는 최고 143km를 던지며 [105] 49경기 126이닝, 10승 3패 31세이브, 평균자책점 0.78, RA9-WAR 10.29를 기록했다. 특히 규정이닝 평균자책점 0.78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106] 아쉽게도 시즌 막판 인위적인 기록만들기 논란으로 선동열은 기자단에게 외면을 당해 정규시즌 MVP는 김성래가 가져갔다. 대신 투수 골든글러브를 다시 차지했다.[107] 하지만 93년 이종범의 도루왕 타이틀 밀어주기 사건과 후술할 시즌 1위를 확정지은 상황에서 탈삼진왕과 규정이닝을 채우기 위해 1년 5개월만에 선발 등판을 한 것 때문에 비판이 있었다.

1993년 옥에 티라면,
  • 4월 29일 광주 태평양전, 4대0으로 앞선 9회초 2아웃 만루 상황에서 천적 김동기에게 동점 만루홈런을 허용한 것[108]
  • 8월 6일 대구 삼성전, 3대3으로 팽팽히 맞선 8회말 2아웃 주자없는 상황에서 (그해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게 되는) 김성래를 상대로 초구에 결승홈런[109]을 허용하면서 패전투수가 된 것 19930806 관련기사[110][111]
  • 9월 22일 해태는 시즌 1위를 확정짓고 세 경기를 남긴 상황이였다. 선동열은 규정이닝에 5이닝이 모자라 당시 기준 방어율 1위는 OB 김경원이였고, 이해 처음 신설된 탈삼진왕 순위도 삼성 김상엽과 하나 차이로 탈삼진 2위[112]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선동열은 타이틀 갱신을 위해 페넌트 레이스 1위가 확정된 상황에서 1년 5개월만에 통산 100번째 선발 등판하였으나 1회부터 연속 4안타를 맞는 등 2실점을 기록했다. 그래도 2회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며 5이닝 2실점 6탈삼진을 기록하고 딱 규정이닝을 채워 방어율왕 순위와 탈삼진왕 순위를 갱신한 뒤 노디시전 상황에서 강판했다. 그러나 다음날 김상엽이 한경기에서 11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최초의 탈삼진왕은 김상엽이 차지하게 되었다.[113] 결국 선동열의 100번째 선발 등판 경기는 시즌 마지막 경기 이종범 도루왕 밀어주기로 KBO 한경기 최다도루 신기록을 세우는 추태와 묶여 인위적인 기록 만들기라며 비판이 쇄도했다. 결국 이걸로 인해 기자단에게 외면을 받고 MVP 수상을 실패하게 된다.

1993년, 해태는 정규리그 1위를 마크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 그리고 삼성과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선동열은 팀의 7번째 우승이자 자신의 선수시절 마지막 한국프로야구 우승을 이끈다.

사실 그해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이종범에 가려서 그렇지, 선동열의 한국시리즈 커리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투구를 보인 무대가 바로 1993년 한국시리즈이다.

3차전은 상대투수 박충식의 15회 완투에 가려졌지만, 선동열과 송유석이 박충식을 상대로 호투를 했기에 해태 입장에서는 그나마 무승부라도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6차전 2대2 동점상황에서, 선동열이 6회부터 구원등판해 4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기 때문에,[114] 8회 김성한결승홈런이 가능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1993년 한국시리즈 6차전. 더 놀라운 건, 6차전 4이닝 투구 이후 휴식일 없이 펼쳐진 7차전에서도 (팀이 3대0으로 앞선) 6회부터 등판해 4이닝을 투구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1993 한국시리즈 우승확정 순간 헹가래 투수 역시 그의 몫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파트너(포수)가 장채근에서 정회열로 바뀐 차이는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1993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1993 시즌 후에는 전년도 연봉 1억에서 100% 오른 2억원의 연봉을 요구하면서 그게 안 되면 일본프로야구로 보내달라며 초강수를 띄운다. 이에 팀은 선동열에게 가수활동을 제의하며 선동열의 동의를 이끌어냈으며,[115] 연봉은 1억 3천만원에 합의를 본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해태 단장이었던 이상국 씨였다.[116]
2.1.9.1. 일본프로야구의 선동열 스카웃 시도
1993년 시즌 막바지인 9월,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 다이에 호크스,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선동열 영입을 시도했다가 해태의 항의를 받는 일이 있었다. 19930918 관련기사. 특히 주니치는 관계자를 파견해서 (선동열의 고교은사인 조창수 씨를 통해) 선동열과 비밀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19930917 관련기사1 19930917 관련기사2 무엇보다 당시 선동열 본인도 해외진출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19930925 관련기사.

그렇지만, 1993년 당시 한국프로야구는 FA-해외진출 관련 규정 자체가 없었던 시기였다. 결국 시즌 후인 11월 13일 주니치 가토 미이치로 회장이 해태에 공식사과했고, 19931114 관련기사 11월 19일 KBO는 일본 측에 선동열 스카웃 불가를 최종통보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일본팀들 입장에서는 (시즌 중인 아닌)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된 이후 해태 구단주의 기분이 좋을 때 선동열 스카웃을 시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117] 마침 그해 11월 주니치+롯데 연합팀이 방한 후 잠실구장에서 해태와 친선경기를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선동열 관련 화제를 꺼내기도 좋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영상 3분 10초부터.[118] 실제로 이마나카 신지(주니치)와 이라부 히데키(롯데) 등이 잠실 해태전에 등판하기도 했다. 19931114 한일 친선경기.

참고로, 당시 선동열 스카웃을 시도했던 팀들의 다음 행보도 흥미로웠다.

다이에는 1993 시즌 당시 팀의 전무 겸 감독 네모토 리쿠오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개혁작업이 한창이었는데,[119] 1993 시즌 직후 세이부로부터 아키야마 코지 등을 영입하는 초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켰고,[120][121]

오릭스는 1993 시즌 직후 긴테쓰의 명장 출신인 오기 아키라를 신임 감독으로 임명하는데, 이후 오기 감독의 지도 아래, 스즈키 이치로가 이듬해인 1994 시즌에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단일시즌 200안타를 돌파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면서 단숨에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슈퍼스타로 우뚝 서게 되고, 관련영상[122]

주니치는 이듬해인 1994시즌 요미우리와 10.8 결전 끝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놓치게 된다. 19941008 결전 여기서 빡친 주니치는 1년 후 더더욱 선동열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때도 경쟁팀은 요미우리. 관련영상

2.1.10. 1994 시즌

1994년, 선동열은 커리어 최악의 부진에 빠진다. 한화와의 시즌 첫 경기를 블론세이브로 시작했고, 특히 4월 삼성과의 대구 3연전에서 류중일에게 만루홈런 허용, 그 다음경기 블론세이브 기록, 이후 9월 잠실 LG전에서는 김정민에게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인 끝내기 홈런 허용 등으로 에이징 커브 소리까지 듣게 된다. 또한 그해 피홈런 숫자는 5개[123]로, 1991년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수치였고, 이닝당 피홈런수로 계산했을 때는 KBO시절 기준 가장 높은 수치였다.[124]

흔히 건초염 부상 이후 선동열이 완전히 마무리로 전업했다고들 하나, 실제로 선동열은 1994년에 선발 재전환 시도를 하면서 8차례 선발투수로 출장하기도 했다.[125] 사실 이 선발 재전환 시도는 시즌초반 구원투수로서 부진을 거듭했기 때문에 고육직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시즌 자체는 구원투수로 출발한 것이 맞다.

어쨌든 이 시즌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게 되는데, 그 커리어 로우가 6승 4패 12세이브, 평균자책점 2.73, RA9-WAR 4.16(...). 그리고 해태가 정규시즌 3위를 차지했던 관계로, 선동열은 한국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플레이오프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준플레이오프 1차전 팀이 앞선 상황에서 구원등판 후, 동점 및 역전까지 허용하는 부진을 보이며 패전투수가 된다. 팀 또한 2차전에서도 패배하며 탈락 확정. 요약영상.

1994년 본인의 최악의 부진(?)을 기록하고 선발투수로서의 한계를 느낀 선동열은 그 다음해이자 한국프로야구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5년에는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된다. 일단 연봉은 1억 3천만원에서 동결되었다.

2.1.11. 1995 시즌

1995년, 선동열은 48경기 109이닝,[126] 5승 3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0.49, RA9-WAR 9.20을 기록한다.

6월말에 투구폼을 기존의 스탠딩 투구폼에서 엉거주춤 투구폼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직구구속이 좀 더 상승하는 효과를 누렸다. 관련기사. 다만, 이 투구폼은 일본진출 후에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127]

7월 14일 사직구장에서 펼쳐진 올스타전에서는, 팬투표가 아닌 감독추천선수로 올스타전에 참가하게 된다. 선동열 입장에서는 전년도까지 9년 연속 서군의 투수부문 팬투표 1위를 차지했던 입장인지라 아쉬운 대목이기도 했다. 참고로 그해 서군의 투수 팬투표 1위는, 선동열의 고려대 후배이기도 한 이상훈이다. 19950714 관련기사. 그리고 본경기에서 선동열은 이상훈에 이어 서군의 2번째 투수로 등판했다.

앞서 언급된 투구폼 교정 이후 직구구속과 관련하여, 이시기 선동열의 정확한 직구구속-최고구속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전경기 야구중계가 이뤄지던 시점이 아니고, 야구중계시 스피드건 구속 표시가 일반화된 시기도 아니었기에, 현시점에서 당시의 구속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옛날기사ㆍ유튜브영상ㆍ 팬들 기억도르 정도인데, 구체적으로 1995년 선동열 투구영상에서 구속표시는 ( 한일 슈퍼게임을 제외하면)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결국 신문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신문에서도 구속 측정 위치가 달랐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작성되어 있다.[128] 굳이 신문기사들을 종합해서 1995년 후반기 선동열의 최고구속을 추측하자면 150km 초반 정도인데,[129] 이 또한 동시기 일본투수들 최고구속에 비교하자면 부족한 수치이다.

1994년 이라부 히데키 : 최고 159km. 영상 2분 25초부터.[130]
1995년 히라이 마사후미[131] : 최고 157km. 링크[132]

그 외 일본-대만 주요투수들 구속.
기다 마사오[133] : 최고 156km. 영상 1분 15초부터.
마키하라 히로미 : 최고 155km. 영상 2분 50초부터.
쿠와타 마스미 : 최고 153km. 영상 0분 18초부터.
곽태원 : 최고 153km. 링크.[134]
노모 히데오 : 최고 150km. 영상 2분 40초부터.

사실 유튜브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선동열 국내시절 직구구속은 1986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등 아주 한정적이다.[135] 자료 자체가 한정적인 만큼, 선동열의 국내시절 직구구속 관련해서 굳이 비하적 추측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대평가하는 것 또한 경계되어야 한다. 물론 일본 2년차였던 1997년에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직구구속을 기록하긴 했지만,[136] 그건 말 그대로 일본진출 후의 상황이기 때문에 논외 대상이다.

소속팀 해태는 그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137] 공교롭게도 선동열의 올스타 투수부문 팬투표 연속 1위 기록(1986~94년)과 해태의 포스트시즌 연속진출 기록(1986~94년)이 동시에 시작해 동시에 끝난 셈이었고, 그 둘의 동행 역시 그해(1995년)가 마지막이었다.
2.1.11.1. 한일 슈퍼게임, 그리고 일본진출
시즌 후인 11월, 제2회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1차전ㆍ2차전ㆍ5차전에 등판하는데...

1차전( 도쿄돔) 당시 선동열이 상대했던 일본타자들.
나카무라 노리히로 : 중견수 플라이.
타이호 야스아키 : 삼진.
마쓰이 히데키 : 좌전안타.
코마다 노리히로 : 대결 중 1루주자 견제사. 그리고 경기종료.[138]

2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당시 선동열이 상대했던 일본타자들.
19951104 한일슈퍼게임 2차전.
타구치 소[139] : 삼진.
타이호 야스아키 : 중견수 플라이.
호리 코이치[140][141] : 3루수 땅볼.
사에키 다카히로[142] : 볼넷.
이데 타츠야[143] : 2루수 땅볼.
타나베 노리오 : 삼진. 그리고 경기종료. 선동열은 세이브 기록.[144]

5차전( 나가라가와 구장) 당시 선동열이 상대했던 일본타자들.
타이호 야스아키 : 삼진.
니시야마 슈지[145] : 중견수 플라이.
호리 코이치 : 1루수 플라이. 그리고 9회초 종료.[146]

슈퍼게임 호투로 일본프로야구 몇몇팀들로부터 스카웃제의를 받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된다. 19951220 MBC 스포츠뉴스.

2.2. 주니치 드래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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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570>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KBO는 당시 FA제도가 없어서 아무리 팀에 공헌을 많이 해도 구단이 풀어주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수 없었다. 1995 시즌 후 11년간 6회 우승에 기여한 선동열은 해태 구단에 해외진출을 원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이에 해태 노주관 사장, 이상국 단장은 처음에는 그의 해외진출을 반대하다가 1년만 더 뛰고 1996년 우승한 뒤 떠나라고 했다.[147] 선동열은 은퇴불사의 전략을 펼치면서 강경하게 나갔고, 국민들도 대다수가 해외진출을 찬성해서 결국 해외 구단과 협상을 하였다.

해태는 처음에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목표로 보스턴과 시애틀에 영입의사를 타진했다. 이후 관심을 보인 보스턴과 협상을 벌였지만,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수준인 8,500만 원을 제시해 협상이 물건너갔다. 그러자 해태 강남형[148] 고문이 특수관계인 LG 구본무 회장을 통해 LG 트윈스의 자매구단인 주니치, 그리고 오릭스에게 선동열 영입의사를 타진했다. 이 과정에서 해태는 한국 최고의 투수니 연간 1억엔 이상의 계약 규모를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주니치가 2년 계약 이적료 1억 5천만엔, 연봉 1억엔, 오릭스는 2년 계약 이적료 1억엔, 연봉 1억엔이라는 금액을 제시했다. 결국 해태는 12월 14일 부산에서 주니치와 협상을 확정짓고 18일 최종계약을 하고 발표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다음날 노주관 해태타이거즈 사장과 이상국 단장은 해태 회장과 별개로 라이벌 구단인 요미우리에게 주니치와 계약 사실을 알리고 영입의사를 타진했다. 요미우리가 그 자리에서 총 계약규모에서 1억엔을 올려 2년 이적료 2억엔, 연봉 1억 5천만엔을 제시하자 바로 노 사장은 다시 주니치에 전화해 이 사실을 알리고 합의된 계약을 취소시켰다.[149] 그리고 다음날인 16일 요미우리 호시나 사장이 직접 마포 해태사무실에 와서 협상해 2년 계약에 이적료 2억 5천만엔 연봉 2억엔에 합의를 보고 사인하기 직전이었으나, 이때 열 받은 주니치는 구본무 회장과 해태 구단주 박건배에게 항의했고 박건배 회장은 실무진들의 의견을 아예 듣지도 않고 '주니치와 4억엔에 계약해라'라고 선포해버린다.[150] 이렇게 합의 직전에서 파토난 요미우리는 아예 주니치의 2배인 8억엔을 제시했다. 하지만 박건배 회장은 요미우리의 제안을 무시하고 최종적으로 주니치와 2년 계약에 이적료 3억엔 연봉 3억엔으로 계약했다.

당시 조건과 명분 등은 요미우리가 압도적이기에 주니치 입단 기자회견에서 한일 기자단의 왜 요미우리에서 주니치로 선회했냐는 질문이 쇄도했고 해태는 선동열 본인의 결정, 도시 분위기, 필요성 등에서 주니치가 앞섰다. 라는 상식밖의 답변을 해 한일 기자들이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요미우리와 협상을 주도한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 단장은 주니치 계약 직후 바로 해임됐다.[151]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달게 된 등번호는 20번. 주니치 드래곤즈의 투수 에이스[152]들이 차례로 달았던 등번호이다. 일본 센트럴리그에 속한 주니치는 지명타자 제도가 없어 선동열이 투수 등판하면 타석에 서야했다.

2.2.1. 1996 시즌

1월 8일 정식으로 주니치 입단식을 가졌다. 19960108 MBC 스포츠뉴스.

스프링캠프를 소화하던 도중인 2월 23일 모친상을 당해 한국으로 귀국했다.

3월 21일 시범경기 요코하마전에 첫 등판했다. 19960321 MBC 스포츠뉴스.

선동열의 일본프로야구 공식데뷔를 맞아, 당시 KBS에서 일요스페셜[153] '선동열'편까지 편성되고 일본에서 엔카 가수로 활발히 활동하던 김연자가 헌정곡까지 낼 정도로 그에 대한 팬들과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19960407 일요스페셜. 또한, 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당시 SBS가 1년계약으로 선동열 경기 중계권을 구매했었다. 19960405 관련기사.

그리고 선동열은 4월 5일 개막전 히로시마전 원정에서 9회 1점차 세이브 상황에 등판했지만, 블론세이브[154]를 기록하면서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영상 1분 32초부터. 19960406 관련기사.[155]

참고로 1990년대 히로시마 타선은 지금도 레전드로 평가받고 있다.
1번 : 노무라 겐지로(유격수)
2번 : 쇼다 코우조(2루수)
3번 : 마에다 토모노리(우익수)
4번 : 에토 아키라(3루수)
5번 : 카네모토 토모아키(좌익수)
6번 : 루이스 로페즈(1루수)[156]
7번 : 오가타 고이치(중견수)[157][158]
8번 : 니시무라 슈지(포수)
9번 : 투수타석

다행히 이틀 후인 4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는 1이닝 무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기록했고, 19960407 MBC 스포츠뉴스. 나고야 홈에서 등판한 한신전에서도 2이닝 무실점 세이브를 기록하며 적응에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4월 16일 도쿄돔 요미우리전 8회 3대0 리드 상황에서 등판해서 동점을 허용하는 등 고전을 하게 된다.[159][160] 19960416 선동열vs오치아이 19960416 선동열vs오치아이 요약본 그나마 타선의 도움 끝에 가까스로 승리투수가 되기는 했지만 19960416 선동열 전체 투구영상.[161][162] 이 경기에서 팔꿈치 부상이 발생해 한달이 넘게 2군에서 재활을 하게 되고 5월말에야 1군에 복귀한다.

문제는 이때부터인데, (5월 28일 큰점수차 등판에서 무실점을 기록한 1군 복귀경기 직후인) 6월 1일 도쿄돔 요미우리전 3대2 리드 상황 7회에 등판해 1.1이닝 4실점을 기록하며 패전투수가 된다.[163] 그리고 잠시 선발투수로 전환한 6월 6일 한신전에서도 2이닝 4실점 조기강판,[164] 다시 불펜투수로 전환한 6월 16일 히로시마전 0.1이닝 7실점 등 믿을 수 없는 부진을 거듭한다. 19960617관련기사.[165]

이후 7월 중순경 잠시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면서 2경기연속 구원승을 기록했고, 전반기 마지막경기인 7월 18일 도쿄돔 요미우리전에서 2.2이닝 무실점 승리투수가 되면서(3경기 연속 구원승) 19960719 관련기사 나름 후반기 반전에 대한 기대도 높였다. 그러나 후반기 첫 등판경기였던 7월 27일 진구구장 야쿠르트전에서 후루타 아쓰야에게 피홈런을 허용하는 등 불안한 후반기 출발을 보였고, 이후에도 부진을 거듭하면서 끝내 시즌 끝까지 반전에 실패했다. 당시 주니치가 시즌 끝까지 요미우리ㆍ히로시마와 센트럴리그 우승경쟁을 펼쳤던 점을 감안했을 때[166] 선동열의 부진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167]

참고로 1996년 선동열의 피홈런은 4개이다.[168]

1996년 9월 중순, 선동열은 호시노 감독의 지시에 따라 2군으로 내려갔다.[169] 그리고 페넌트레이스가 끝나기 3주 전, 호시노 감독에게서 완전히 시즌 포기 통보-하이사이리그(교육리그) 강등 지시를 받았다.[170]

결국 일본 진출 첫 해인 1996년, 선동열은 프로 데뷔 이래 최악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국내보다 더 높은 레벨의 일본 타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감 등 일본 리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 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 타자들은 뛰어난 선구안으로 볼넷을 얻어내거나 뛰어난 컨택트 능력을 바탕으로 기어코 안타를 만들어내니 당시 선동열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171][172] 시즌 도중 2군을 전전하기까지 하며 38경기 54이닝 평균자책점 5.50, 5승 1패 3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고, 바로 전시즌 한국에서의 평균자책점보다 무려 5점이나 상승했을 정도로 부진을 겪게 된다.

K/9는 11.17개고, HR/9는 나고야 구장을 홈으로 사용했음에도 0.6에 불과해 구위는 일본에서도 먹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선동열이 부진했던 이유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1996년이 주니치 커리어에서 K/9이 가장 높았던 시즌이라는 점, 그리고 피홈런이 54이닝동안 고작 4개 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173], 전술했듯이 구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즉, 노쇠화로 인해 구위가 떨어져서 성적이 좋지 못했다는 말은 틀렸다. 정작 문제는 KBO 리그에서는 신경쓰지 않았던 주자 견제 능력과 제구력이 일본에서는 택도 아니었던 것. 실제로 1996년 BB/9은 주니치 시절 중 가장 좋지 않은데 3.6을 조금 넘어간다. 국내 마지막 커리어인 1995년 BB/9이 1.15개였으니 1년만에 BB/9이 3배나 폭등한 것이다. 거기에 한국에서는 지적받지 않던 견제 능력이[174] 일본에서는 수준 이하였던지라 타자가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린라이트였고, 이는 앞서 각주에 제시되어 있듯 호타를 앞세운 기동력 야구로 유명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선에게 유독 약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구위는 좋아서 삼진은 잘 잡아내는데, 제구가 좋지 못해서 볼넷으로 타자가 출루하게 되고, 게다가 견제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내보낸 주자는 손쉽게 도루에 성공했으며, 이런 식으로 주자를 쌓다가 안타를 맞으면서 대량실점을 하는 패턴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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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기사. 선동열이 상대타자를 경계한다는건 KBO 리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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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6일, 쿠라시키 머스캣 스타디움에서의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원정경기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해 오가타 코이치를 상대하는 선동열. 결국 이 경기에서 역전을 허용하며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175] 보다시피 구위는 문제가 없던 시절로, 오히려 해태 시절보다 구속이 더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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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빠른 공의 구위가 아닌 다른 원인을 지적하는 하일성.
2.2.1.1. 1996 시즌 이후 스토브리그
굴욕을 맛본 1996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마음을 다잡고 투수코치에게 직접 개인훈련을 부탁해서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간다. 이때 어찌나 독하게 훈련했던지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거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특히나 국내에서 완벽하다던 투구폼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국내에선 하체를 최대한 끌고나가 던지는 것이 어깨에 무리가 덜가고 구위가 더 좋아진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보니 이렇게 극단적으로 몸을 과하게 이동해서 던지니 릴리스 포인트가 낮아지고, 투구폼이 커져 주자 견제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상체가 빨리 나가거나 늦게 나가는 등 밸런스를 찾기 힘들어서 제구가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투구폼을 수정하여 3,000개 투구를 하며 과한 몸의 이동을 줄이고, 셋 포지션시 글러브 위치를 수정하여 주자 견제 능력을 보완하는 등 본인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주니치 시절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훗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만큼 훈련해보자.'라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으며 '자신의 전성기는 한국 시절이 아닌 일본에서 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선동열이 정말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KBO에서 선동열은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일본에서 1996년의 선동열은 구위만 괜찮을 뿐 제구도 경기운영도 부족했다. 이러한 성적에 뒤따르는 냉정한 시선이나 대우를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2군에 내려가서 자기 빨래도 직접 해야 하고 적응이 어려웠던지 1996년 시즌이 끝나자 짐싸서 바로 귀국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과 적응의 어려움은 2004년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던 이승엽도 겪었다. 하지만 선동열은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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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자기성찰과 피나는 훈련 덕분에 선동열은 1997 시즌에 드디어 자신의 명성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2.2.2. 1997 시즌



흑역사였던 1996년을 뒤로 하고 절치부심한 1997년, 선동열은 43경기 64.1이닝, 1승 1패 38세이브(리그 1위),[176] 평균자책점 1.28, WHIP 0.76, WAR 3.9, 피안타율 .166, K/9 9.81, 피홈런 0개를 기록하며 완벽히 부활함과 동시에 자신이 왜 한국에서 정상급 투수였는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인상적인 장면들을 요약하면,
등이 있다.

그리고 그해 KBS에서는 제헌절 광복절 2번에 걸쳐 박찬호와 선동열 특집방송을 편성했고, MBC에서는 7월에 허구연 해설위원이 직접 일본을 방문해 선동열의 다큐프로를 제작하기도 했다. 선동열 스타다큐. 또한 일본 NHK에서도 시즌 중에 이례적으로 선동열 특집프로를 방송했고, NHK 선동열 특집.[191] 6월 16일에는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야구전문지 <주간 베이스볼>에서 3부 12쪽 분량의 선동열에 대한 특집호를 발간했다.[192][193]

특히 1997년에는 마무리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센트럴리그 투수 전체 WAR 1위를 기록 검색참조, 소속 팀이나 리그를 대표할만한 투수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했다. 투구 스타일은 전형적인 투피치 중심의 파워피처였다. 선동열은 당시 NPB리그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패스트볼이 주무기였는데 이를 투구 비율의 70%에 달할 정도로 구사했으며, 여기에 주로 두 가지 종류의 슬라이더를 가미하였다.[194] 그렇지 않아도 위력적이었던 패스트볼과 함께 제구가 안정되자, 더불어 구사하던 슬라이더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일본의 상하로 넓은 스트라이크 존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 압도적인 위력을 뽐낸 것. 사실상 KBO가 탑클래스 선수들의 일본진출 및 해외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한 시발점은 선동열의 1997년 활약이 컸다.

시즌 후인 11월에는 잠실에서 열린 한일 프로야구 친선경기인 골든시리즈에 참가해서 이종범, 이승엽 등과 대결도 펼쳤다. 19971102 한일 친선경기 그리고 이 대회 직후에 해태는 주니치와 총액 1억엔이나 인상된 4억엔에 임대계약을 2년 연장하면서 선동열은 이듬해에도 계속 주니치에서 뛰는 게 확정되었다. 본인도 연봉 2억엔, 인센티브 5천만엔 등 총액이 2억엔이나 오른 2년 계약을 맺었다. 또한 12월에는 해태 후배인 이종범의 주니치 이적이 확정되기도 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였다.

2.2.3. 1998 시즌

개막 2번째 경기인 4월 4일 히로시마전에 등판해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4월 5일 히로시마전에도 등판해 2세이브를 기록하는데, 특히 이종범의 결승타와 함께 이룬 세이브라 더 의미가 있었다. 19980405 MBC 스포츠뉴스

4월 14일 도쿄돔 요미우리전에서는 당시 신인이었던 다카하시 요시노부에게 피홈런을 허용하는데,[195] 지난시즌 무피홈런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래도 그 경기에서 세이브를 기록했다. 19980414 관련기사

한편 이종범에 이어 5월에는 이상훈까지 주니치에 합류하게 되면서 일명 주니치 한국인 3총사가 탄생한다.

6월 7일 나고야돔 요미우리전 시즌 10세이브 영상. 링크
6월 18일 도쿄 돔 요미우리전 시즌 13세이브 영상. 링크1, 링크2

6월말 이종범은 부상- 이상훈은 부진으로 1군에서 빠진 관계로 8월 중순까지 선동열은 주니치의 한국선수 중 혼자서 1군에서 고군분투하였다.[196][197] 그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머신건 타선으로 유명했던 요코하마와 시즌 막판까지 우승경쟁을 펼친 주니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8월 22일 요코하마구장 요코하마전 1점차 리드 9회에 등판해 중심타선[198]을 맞이한 상황에서 3타자 연속삼진으로 세이브를 기록하는 장면은 백미. 19980822 요코하마전 영상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3일 요코하마전에도 등판해 이틀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주니치가 선두 요코하마를 바짝 추격하는데 기여한다. 19980824 관련기사1 19980824 관련기사2[199]

아쉽게도 주니치는 리그 우승경쟁에서 요코하마에 이어 시즌 2위에 머물렀지만, 1998년에 기록한 선동열의 성적 역시 전년도에 못지않게 훌륭했다. 42경기 48.2이닝, 3승 무패 29세이브, 평균자책점 1.48, WHIP 0.86 WAR 1.8 피안타율 .178, K/9 10.73를 기록하며 사사키 카즈히로와 더불어 센트럴리그 최강급 마무리 투수로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전년도에 비해 직구구속이 조금씩 감소했고, 전년도에는 1년내내 허용하지 않았던 피홈런도 4개를 허용하는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200][201]

2.2.4. 1999 시즌

지난 해 부상과 노쇠화로 인한 직구위력 감소에 대비해서 스프링캠프 내내 싱커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4월 2일 개막전 히로시마전에서 9회 등판해 1이닝 무실점으로 첫 세이브를 기록하며 순조롭게 시즌을 출발하는 듯 보였다. 19990402 관련기사. 그러나 다음날에도 9회 세이브상황에서 등판하지만 첫타자 에토 아키라 상대 후 부상으로 강판당하면서 불안감을 야기한다. 19990403 히로시마전. 그나마 큰 부상은 아니었기에 긴 공백없이 4월 11일 한신전에 복귀해 세이브를 기록한다. 19990412 관련기사.

4월 18일 도쿄돔 요미우리전 시즌 3세이브 영상. 링크1 링크2
5월 5일 요코하마구장 요코하마전 시즌 9세이브 영상. 영상 1분 37초부터

그렇지만 4~5월 등판 당시의 구위는 직전 2년간보다는 못하였다. 결국 이는 6월에 3경기 연속 구원실패-2군행으로 이어진다. 19990614 MBC 스포츠뉴스.[202]

6월 6일 하마마츠 구장 히로시마전 시즌 첫 패전 영상. 영상 2시간 15분 41초부터

다행히 7월에 1군에 복귀해 몇차례 불펜등판 끝에 19990701 한신전 불펜등판 7월 13일 나고야돔 히로시마전에서 9회 2아웃 주자없는 상태에서 올라와 공 한개로 아웃카운트를 잡으며 47일만에 세이브를 기록한다. 영상 6분 50초부터 19990714 관련기사

그리고 이후부터는 주니치의 불펜진의 도움으로 9회 1사 혹은 2사 상황에 올라와 한두타자를 상대하며 세이브를 올렸다. 이색적인 장면도 있었는데, 타자 선동열로 등장해서 결정적 적시타를 완성한 장면이다. 19990722 요미우리전 19990723 KBS 스포츠뉴스

그 해 소속팀인 주니치는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특히 선동열은 주니치의 우승 확정경기인 9월 30일 메이지진구 야구장 야쿠르트전에 팀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해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헹가래 투수가 된다. 영상 8분 50초부터 19991001 MBC 스포츠뉴스.[203] 그리고 10월 5일 고시엔 구장 한신전에 등판해, (본인의 선수생활 마지막 세이브인) 시즌 28세이브를 기록한다. 19991005 KBS 스포츠뉴스

선동열의 마지막 시즌이던 1999년 성적은 39경기 31이닝, 1승 2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2.61, 34삼진, WAR 1.4, 피홈런 1개를 기록하여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1997, 98년의 성적과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39경기라는 적지않은 경기에 등판하였음에도 소화이닝이 31이닝으로 평균 1이닝도 안될 정도로 떨어졌다. 아웃카운트 1, 2개 남겨놓고 투입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204] WHIP으로 봐도 1997, 1998년에 0.76, 0.86을 기록한 반면 1999년은 1.32로 치솟으며 불안해졌다는걸 알 수 있다.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역시 전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사사키 카즈히로와 함께 선동열과 사사키 모두 올해는 구위가 아닌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있다고 발언을 했을 정도. 전성기를 지난 피칭을 하지만 그 투수의 이름값으로 타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피칭을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2.2.5. 은퇴

1997년~1998년의 대활약에 비해 1999년에는 3경기 연속 블론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구위가 점점 떨어졌고 덩달아 이닝 소화율도 낮아지며 시즌 중 2군에 다녀올 정도로 노쇠화가 뚜렷해져서 주니치와의 재계약 협상에 잡음이 많았다. 거기에 선동열의 보유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해태는 주니치와의 임대 기간 연장 후 임대료 재협상을 원했고, 주니치는 해태 구단으로부터 선동열의 보유권을 가져와 완전 이적하는 방안을 내놓는 바람에 협상이 틀어졌고, 이에 친정팀 해태와 관계도 서먹해졌다고 한다. 훗날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선동열은 자신을 두고 이적료 협상을 벌이던 해태 구단에게 실망했다는 늬앙스로 말하며 한동안 고향팀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주니치는 1999년 시즌 중간에 내년 시즌 새로운 마무리 투수 에디 게일러드[205]를 영입했고, 선동열의 다음 시즌 계약 때는 야마다 히사시 수석 투수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내년 시즌에는 마무리로 기용할 수 없다. 미들맨으로의 보직 변경은 물론 때론 2군행도 감수해야 한다"라고 통보했다. 게다가 이 시절 주니치의 불펜 투수진은 선동열을 굳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좋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는 오치아이 에이지, 추후 부동의 마무리 투수로 떠오른 이와세 히토키, 쇼쓰 에이지, 마에다 유키나카, 나카야마 히로아키 등 일본인 불펜 투수진이 매우 충실했다. 또한 이종범과 용병 슬롯에 대한 경쟁도 위태로워졌다.

이에 선동열은 보스턴 레드삭스 진출을 계획했다. 1999년 말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 기념으로 선수단 전원이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 시절 보스턴 스카우트와 만나 입단 협상을 벌이며 계약을 제시받았다고 한다. 선동열이 미국행을 포기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턴과 계약조건에 대해 심한 의견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동열은 지난 18일 도쿄에서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티브 김과 레이 포인테빈트 보스턴 국제담당이사를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자신이 주장해온 2년 계약 완전보장을 보스턴에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보스턴측은 이미 40명의 메이저리그 명단이 확정됐으며 스프링캠프에서 선동열의 훈련모습을 면밀히 관찰한 다음에야 2년계약 보장을 고려하겠다고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 보스턴은 첫 해에 최고 230만 달러를 주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나 2년째는 선동열이 첫해에 40경기에 출장할 때 보장한다는 인센티브 조건을 내걸고 있다.

이유는 또 있다. 나고야에서 머물고 있던 선동열은 20일 오후 지난해 은퇴후 처음으로 체육관에서 몸을 풀어봤으나 현저히 저하된 자신의 체력을 발견하고 심한 불안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불확실한 계약조건과 체력저하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미국행을 감행했다가 불명예은퇴를 할지도 모른다는 선동열의 생각이 결국 은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부친의 종용으로 1999년 11월 22일에 은퇴를 선언한다.

2000년 3월 9일 나고야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에서 선동열의 은퇴식이 개최되었다. 당초 은퇴경기로 선발 등판해 한 타자를 상대할 예정했지만 계획이 변경되어 경기 전 이벤트 피칭으로 대체되었다. 상대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선 간판 타자였던 마쓰이 히데키를 내보냈으며, 타석에 들어선 마쓰이가 선동열의 2구를 받아쳐 우전 안타를 때려낸 뒤 베이스커버를 위해 1루로 달려갔던 선동열과 서로 웃으면서 포옹했다. 참고로 마츠이는 선동열 상대로 모두 단타만을 기록하긴 했으나 통산 15타수 5안타 타율 .333로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 [206] 경기가 끝난 후 마쓰이에게 선동열의 은퇴경기에서 어째서 안타를 쳤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자. "현역에서 은퇴하는 선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이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207]



주니치 시절 별명으로 국내 여러 스포츠 신문에서는 나고야의 태양이라고 지칭했다. 주니치 유니폼 마킹이 'SUN'이었기 때문. 그러나 당시 감독 호시노 센이치가 '나고야의 태양'이란 별명을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실제 일본 언론에서는 국보급 투수라는 별명을 그대로 차용해 한국의 보물(韓国の至宝), 팬들 사이에서는 얼굴이 호빵맨과 닮아 앙팡만(アンパンマン)이 자주 사용되었다.


3.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3.1. KBO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sWAR
1985 해태 25 111 7 4 8
(3위)
- 0.636 1.70
(1위)
74 2 23 103
(5위)
30 21 0.85
(1위)
3.95
1986 39 262⅔
(2위)
24
(1위)
6 6
(4위)
- 0.800
(2위)
0.99
(1위)
153 2 59 214
(1위)
38 29 0.78
(1위)
12.05
(1위)
1987 31 162 14
(3위)
2 6
(3위)
- 0.875
(1위)
0.89
(1위)
89 2 50 144
(2위)
21 16 0.84
(1위)
7.18
(2위)
1988 31 178⅓
(3위)
16
(2위)
5 10
(4위)
- 0.762
(3위)
1.21
(1위)
116 3 42 200
(1위)
29 24 0.85
(1위)
9.33
(1위)
1989 36 169 21
(1위)
3 8
(4위)
- 0.875
(1위)
1.17
(1위)
82 2 55 198
(1위)
27 22 0.77
(1위)
7.95
(3위)
1990 35 190⅓
(5위)
22
(1위)
6 4 - 0.786
(1위)
1.13
(1위)
121 1 58 189
(1위)
35 24 0.90
(1위)
10.08
(1위)
1991 35 203
(4위)
19
(1위)
4 6 - 0.826
(1위)
1.55
(1위)
135 8 33 210
(1위)
42 35 0.79
(1위)
8.52
(2위)
1992 11 32⅔ 2 0 8 - 1.000 0.28 20 0 12 42 1 1 0.92 2.44
1993 49
(2위)
126⅓ 10 3 31
(1위)
- 0.769
(2위)
0.78
(1위)
48 2 26 164
(2위)
11 11 0.54
(1위)
6.42
(1위)
1994 27 102⅓ 6 4 12
(5위)
- 0.600 2.73 81 5 29 94 31 31 1.00 3.75
1995 48
(2위)
109⅓ 5 3 33
(1위)
- 0.625 0.49 49 1 17 140 9 6 0.58 5.53
(5위)
KBO 리그 통산
(11시즌)
367 1647 146
(5위)
40 132 - 0.785
(1위)[208]
1.20
(1위)
968 28 404 1698
(5위)
274 220 0.80
(1위)
77.22
(1위)[209]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5 1완투 0완봉
1986 19완투
(1위)
8완봉
(1위)
1987 7완투 4완봉
(1위)
1988 9완투
(3위)
1완봉
1989 8완투 6완봉
(1위)
1990 8완투
(4위)
6완봉
(1위)
1991 12완투
(2위)
3완봉
(2위)
1992 1완투 1완봉
1994 3완투 0완봉
KBO 리그 통산
(11시즌)
68완투
(4위)
29완봉
(1위)

3.2.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WAR[210]
1996 주니치 38 54 5 1 3 - 0.833 5.50 62 4 28 67 35 33 1.61 1.7
1997 43 63⅓ 1 1 38
(1위)[211]
- 0.500 1.28 36 0 13 69 9 9 0.79 3.9
(1위)
1998 42 48⅔ 3 0 29 - 1.000 1.48 31 4 11 58 8 8 0.86 1.8
1999 39 31 1 2 28 - 0.333 2.61 31 1 11 34 9 9 1.36 1.4
NPB 통산
(4시즌)
162 197 10 4 98 - 0.714 2.70 160 9 63 228 61 59 1.11 8.7

4. 논쟁

4.1. KBO 최고의 선발 투수였는가?

압도적인 클래식 스탯에, 세이버 스탯 기록을 봐도 압도적인 선동열이지만 '과연 최고 선발 투수라 불릴 만큼 최고인가?' 라는 의견은 몇몇 이들에 의해 이전부터 있어왔다.

첫 번째 지적점으로는 당대 최고 선발 투수들과 비교시 전체적인 소화이닝이 낮다. 이닝 소화력은 1980~90년대 에이스의 필수요소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런데 선동열은 당시 이닝이터의 지표로 분류되었던 200이닝+, 넓게 잡아 185이닝+를 기록한 시즌이 1986년과 1990, 91년 두 시즌밖에 없다. 그나마도 262.2이닝을[212] 기록한 1986년 이래 1989년까지 162-178.1-169이닝을 기록했고, 1990년에 그나마 200이닝에 근접하긴 했다.(190.1이닝)이도 적은 이닝은 아니지만, 당대 경쟁 에이스들( 최동원[213], 김시진[214])에 비해서는 확연히 적은 것이 드러난다.

두 번째 지적점으로는 선발 등판횟수가 너무 적다는 것.선동열은 통산 출전 367회 완투 68회[215] 완봉 29회[216] 임에도 선발출전은 109회. 즉 선발 출장의 경우 전체 커리어의 30% 정도이다.[217]현대 기준으로 선발요원이라면 20회 정도의 출전을 하고있으니 풀타임 5년 이상의 선발 투수들은 상당수가 100회 이상 선발투수로 출전을 한다. 당대 선발 에이스들이 전천후로 뛰었다 해도 대부분 2/3의 비율로 선발등판수가 더 많은 것에 비해, 선동열은 1987년~1990년까지 불펜으로서의 등판횟수가 김응용 감독의 특유의 기용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많았다. 1987년~1991년까지 한 시즌당 30여차례의 경기에서 선동열의 선발 등판 횟수는 10회를 약간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4시즌 도합 경기 대 선발 횟수는 133경기 57선발, 평균으로는 33.3경기 12.8선발이다. 게다가 이 4시즌 전부 선발등판율 50%를 넘기지 못한다. 이 때문인지 1987~90 시즌은 선발이 아닌 마무리로 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감안해야할 점은, 선동열이 활약했던 시대인 1980~1990년대 KBO는 선발의 불펜투입을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대였고, 최동원의 최전성기 4년 역시 164경기 80선발로 50%가 채 되지 않는다. 김시진만이 4시즌 149경기 108선발로 50%를 넘는다. 또한 내용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선동열의 경우 일단 선발로 나오면 60%가 넘는 완투율에 25%가 넘는 완봉율을 기록했다.[218]

즉,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선동열이 선발투수로서 성적이나 실력이 부족했다는건 아니지만, 커리어 전체적으로 이닝 소화율이라든지 선발투수로서의 등판횟수를 볼 때 선수생활 중 선발보다 불펜투수로서 더 활약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4.2. 시대 논란

간단하게 말해 선동열이 활약한 시대는 야구 수준이 매우 뒤떨어졌기에 그의 기록에는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동열 역시 다른 선수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하고 경쟁했기에 그의 기록을 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그의 성적을 폄하하는 여론은 리그 수준을 들고 와서 그 정도의 순수 기량으로는 현대에서는 그 정도의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주로 들고 오나, 애초에 성장 환경과 시대가 달라서 절대적 기량 자체를 비교한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

예를 들어 월터 존슨의 시기에는 130km/h만 구사해도 세계최고였다. 그럼에도 누가 윌터 존슨을 폄하하는가? 당시엔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플레이를 했고, 월터 존슨은 그 환경에서 최고였다. 그리고 그들이 개척한 그 시대가 없었다면 현재의 MLB도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동열의 경우도 매한가지이다. 그런데도 이런 좀 억지스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전형적인 빠가 까를 낳은 케이스이다. 선동열의 악성 팬들이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최동원, 김시진 등과 비교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시대를 뛰는 KBO 선수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현재 MLB 최상위 급 투수들과 피칭능력의 절대비교를 하면서 이러한 논란이 생겼다.

사실 단순한 선동열의 광신도급 팬들의 억지 주장보다도 더 심각했던 것은 허구연 등 KBO 인사들의 지나친 선동열 올려치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 및 선수출신 야구인들은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과 위상을 억지로 드높이기 위해 선동열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많았다. 선동열이 메이저리그에 갔다면 조시 베켓급의 투수가 됐을 거라는 허구연의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선동열이 데뷔하고 활약한 1980년대~1990년대는 선수 관리부터 경기환경, 훈련법에 이르기까지 2020년대인 현재와는 매우 많은 차이가 있고, 실제 보여주었던 결과물도 현재와 차이가 크다. 우선적으로 예를 들어 선동열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던 패스트볼을 이야기해보자. NPB에서 기량적 전성기를 누리던 97년 당시 선동열은 최고구속 153km/h에 달하는 패스트볼을 구사했는데, #실제 2002년의 MLB 평균 패스트볼 구속이 88.5마일(143km/h)정도였음을 생각하면 1990년대 기준으로는 리그 내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패스트볼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 # 그러나 현재 2020년대에 이르면서 MLB에서는 클로저라면 대부분 160km/h안팎에 달하는 98~105마일 패스트볼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과학적인 훈련법과 체계적인 관리 및 육성, 영양상태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소위 '구속 혁명'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선수들의 패스트볼의 위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례해 타자들의 패스트볼 대처능력이 급상승하였고, 또 그런 타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더더욱 강력하고 빠른 패스트볼과 다양한 변종패스트볼들도 등장하였다. 단순히 패스트볼이라는 구종만 해도 이 정도이며, 그 외에도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과학적 접근을 통한 관리와 육성은 투수들의 피칭능력을 놀랍도록 발전시켰다. 이는 선동열 본인이 칼럼을 쓴 '선동열 야구학'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작정 '1980~90년대 당시의 선동열이 지금도 KBO에서 통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선동열이란 투수가 당시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인 85년부터 99년까지의 시기에서 KBO와 NPB에 매우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떠난 명투수인건 변함없다. 그러나 그를 평가하려면 굳이 다른 시대, 다른 리그 선수들을 들고 올 것이 아니라, 그 시대와 그 리그의 선수들, 그리고 그 시대에 남긴 족적과 기록만 가지고 평가하고 존중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1]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취재한 사진이다. [2] 형의 이름은 선형주. 선동열이 초등학교 6학년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마저도 스튜어디스 일을 해서 해외를 오가던 누나가 약을 구해와 1년여를 연명했던 거라고 한다. [3] 선동열은 대학시절과 프로시절에도 각각 노히트노런을 한 번씩 기록했다. [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선동열의 광주일고 2년 선배였던 방수원이 술회하기를 슬로 커브를 던지고 있던 선동열에게 슬라이더를 가르쳐줬고 선동열은 그 슬라이더를 갈고 닦아 선수생활 내내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5] 당시는 명문대를 나오면 취업에 문제가 없던 시절이었으며, 고교야구 교사, 감독도 좋은 대학교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는 것이 실적이었다. 때문에 야구부 감독이나 다른 선수들의 부모들이 에이스에게 압박을 줘서 친구들을 최대한 많이 입학시켜주는 대학교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대학야구의 계약금은 돈만 보고 결정할 정도로 그렇게 거액은 아니기도 했다. [6] 출처 - 고려대학교 스포츠매거진 SPORTS KU 2010년 3월호 [7] 선판규씨가 최남수 전 고려대 야구 감독을 불러 무리 절대금지, 어느 때건 휴식할 수 있는 자유를 조건으로 고려대에 입학시키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출처 [8] 고교시절에 유급 [9] 3년 선배였던 김경문이 선동열과 1년간 기숙사 방장-방졸 사이였다고 한다. # [10] 한국대학야구는 2000년부터, 한국고교야구는 2004년부터 나무 배트를 사용하고 있다. [11] 본인을 제외하고는 전원 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선수단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1963년 1월생으로 학교를 1년 일찍 입학한 빠른 년생 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건우의 동기생이었던 박노준은 고3이었으나 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한 1962년생이어서 나이제한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다. [12] 당시 연세대 선발은 2학년 윤학길이었다. 고려대 최남수 감독은 연세대와의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성적이 나빴던 선동열을 등판시키지 않았다. [13] 허구연도 그의 저서에 자신이 LA 다저스 중역들에게서 선동열 영입 의사를 듣고 구체적인 금액까지 조언했다는 말과, 이후 선동열에게서 자신이 조언한 금액으로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했다. [14] 국제대회를 휩쓴 쿠바선수들의 메이저리그 계약금도 당시 1라운드 계약금과 비슷한 정도였지 두세배씩 높진 않았다. [15] 반면, 선동열의 라이벌격인 대만의 곽태원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주가를 올렸는데, 이는 지금도 선동열vs 곽태원 논쟁에서 종종 언급되는 대목이다. [16] 징병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입영 연기 중인 사람들은 징병검사 자체가 연기됐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제 나이에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즉 국제대회 입상 경력으로 오늘날의 예술체육요원 격인 병역특례 대상자가 된 게 징병검사를 받은 시기보다 먼저였다. 당시의 병역특례는 국내에서 5년간 활동해야 해외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해태에서 이 기간을 채우고 현역으로 가진 않았다. 당시 치질이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 안 받고 술을 마셔가며 악화를 시켜서 내심 면제 판정도 기대했다고 한다. 선동열 본인은 해태 구단 관계자와 병무청이 짰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병역특례를 받아서 실제 현역입대할 일은 없지만, 현역 판정을 내려야 현역으로 안 가기 위해서 해태에 갈 것이라는 판단으로. 보통 검사 즉시 판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신검을 받을 때는 즉시 판정 결과를 통보하지 않고 기다리라 하고는 귀가 후에 현역 판정으로 연락을 받았다고. 농구의 이충희가 그것 때문에 스페인 진출에 실패하고, 축구의 김주성은 서른이 넘어서야 독일에 진출할 수 있었다. [17] 여기서 병역 특례 기간인 5년을 채우고 미국에 진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다만 1985년 당시 인터뷰에서 선동열은 실업팀과 계약한 것을 팔꿈치 부상 치료를 위해서였다고 밝혔고, 팬들에게 2년만 기다려달라고 당부했었다는 것을 볼 때 실업팀에서 5년이나 뛸 생각은 없었던걸로 보인다. [18] 대외적으로는 1억원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 금액은 계약금 1억 3,800만원 + 연봉 1,200만원이다. 당시 해태 관계자가 했던 말은 '1억원을 주려면 껌을 몇통을 팔아야 하는데...'였다고 한다. [19] 세광고 출신의 투수로 송진우-장종훈의 선배다. 훗날 세광고 감독을 역임하면서 송창식을 키워냈다. [20] 이외에도 대학 진학 후 중퇴한 선수는 합의된 중퇴일 경우 1년, 무단 중퇴일 경우 2년이 지나야 프로 진출이 가능하다는 규정도 있었다. 이 규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김경원 손경수, 그리고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 문동환 외) 등이 있다. 정작 실업야구 2년 플레이 후 프로 진출 규정은 송진우 조계현 등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종목 참가 선수들이 실업야구에서 1년만 뛰고 프로로 입단해버렸던 사례가 있는 걸로 보았을 때 지켜지지 않았다. 참고로 아직도 실업야구가 남은 일본에서는 실업야구에서 2년 플레이를 해야만 프로에 갈 수 있다는 규정이 여전히 살아 있다. [21] 그러나 사실은 전기로 배정된 경기를 하나 뛰었다. 1985년 9월 22일 MBC전으로 원래는 전기에 치러져야 했을 경기인데 우천 등의 이유로 후기에 치러졌으나 분류상으로는 '전기' 경기가 되었다. [22] 위 사진은 선동열이 완전히 은퇴한 후인 2001년 8월 12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 전에 개최된 이벤트에 한대화 동국대 감독과 같이 참여해서 찍힌 사진이다. 선동열은 이날 해태 후기 시절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고, 시타자였던 한대화는 LG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섰다. # 해태가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유니폼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사진 속에 원정 유니폼을 도입했고, 선동열은 해태의 유니폼 디자인이 바뀌기 직전이던 1996년 초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기 때문에 저 유니폼을 입고 선수생활을 한 적은 전혀 없었다. [23] 중견수 플라이. [24] 늦은 합류로 후반기만 뛰었는데도 규정이닝인 110이닝을 넘겼다. [25] 선동열의 모든 시즌 중 가장 소화 이닝이 많지만, [26] 투타 통틀어 역대 KBO리그 단일시즌 1위 기록이다. [27] 이 해에 다승,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2관왕을 기록했다. 탈삼진도 1위였으나 이 당시 탈삼진 부분은 따로 시상을 하지 않았다. 승률 부문은 19승 4패의 최일언(OB)이 차지했다. [28] 사실 승률 타이틀에 관련된 비화가 있는데, 당시 선동열과 최일언(OB)이 승률 타이틀을 놓고 시즌 마지막까지 경쟁 중이었다. 그리고 최일언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롯데전)에 등판해 최동원과 맞대결을 펼쳤지만 9회까지 패전투수 위기에 몰렸다. 만약 그대로 경기가 끝나 패전투수가 된다면, 1986 시즌 승률 타이틀은 선동열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선동열의 투수부문 트리플 크라운도 확정이었다(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참고로 당시 탈삼진 부문은 타이틀 수상에서 제외였다). 참고로 OB는 이 경기에 최일언의 승률 타이틀과 함께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걸려 있었고( MBC 청룡과 경쟁), 반면 최동원은 본인의 3년연속 20승이 걸려있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9회말 시작때까지는 롯데의 3대1 리드상황. 그렇지만 9회말 OB가 최동원을 상대로 3점을 뽑으며 역전승을 거두면서 최일언의 패전기록은 지워짐과 동시에 승률 타이틀 역시 최일언에게 돌아갔다. 만약 9회 OB의 대역전이 없었다면, 승률 타이틀은 앞선 언급대로 선동열의 차지가 됨과 동시에 선동열은 투수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OB는 마지막경기 승리로 최동원3년 연속 20승을 저지함과 동시에 MBC 청룡을 제치고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확정지었기에, OB의 1986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승리는 한국야구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 경기와 관련해서는 김형석 항목 중 선수 경력 편에도 서술되어 있으니 참조 요망. [29]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KS 직행이었다. 1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30] 팀은 선동열 강판 이후에 역전승. [31] 그 전에도 최동원과 몇차례 맞대결은 있었다. 본 경기가 두 사람의 생애 마지막 맞대결이다. [32] 경기전날 선동열과 정삼흠 두 사람이 술을 대작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33] 당시 같은팀 포수 장채근이 이를 눈치채고 선동열에게 비아냥+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34] 제목 : 정면으로 승부한다. [35] 1986년 연말에 선동열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기념으로 고려대 야구부 동문들 단체술자리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동문 봐주기 모의가 있었다. [36] 1987 시즌이 담합의 절정이었고, 1988 시즌부터는 이런 모습들이 흐지부지 사라졌다고 한다. [37] 심지어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한국과는 달리 각 팀별로 1~2명의 용병타자들도 존재했다. 반면 한국은 선동열이 일본으로 진출한 이후인 1998년이 되어서야 용병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실제 1999년 당시 두산( 우즈, 캐세레스), 한화( 데이비스, 로마이어), 해태( 샌더스, 브릭스), 삼성( 스미스, ), LG( 펠릭스, 대톨라), 현대( 피어슨, 바워스), 롯데( 호세) 등 각 팀들에 용병타자들이 본격적으로 배치된 이후 KBO 역사에 남을 타고투저가 시전된 사례에서도 증명되듯이, 용병타자들이 가지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다. [38] 이 때 투수진에서 선동열 대신 활약한 선수가 한국시리즈 MVP 문희수. [39] 윤학길 18승, 선동열 16승 [40]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부문. 탈삼진 1위도 기록하였으나 당시 탈삼진 부문은 상이 없었고, 1993년에 가서야 탈삼진 타이틀이 신설된다. 지금 기준으로는 4관왕. [41] 이후 1993년 김동기, 1994년 류중일에게도 만루홈런을 허용한다. 그렇게 프로선수 시절을 통틀어서 총 3번의 만루홈런 허용. [42] 고교시절 노히트노런 경험이 있다. [43] 준플레이오프도 이때 처음 도입. [44] 5회부터 구원등판해 무실점으로 경기 마무리. [45] 4회부터 구원등판해 무실점으로 경기 마무리. [46] 특히 3차전에서는 8타자 연속삼진을 기록했다. [47] 4회 무사 1-2루에서 구원등판해 6이닝 무실점. [48] 포수 장채근과 우승결정 순간을 함께 한다. [49] 첫만남은 11월 7일에 이루어졌다(선동열 자서전 중). [50] 주례는 당시 KBO 총재였던 이웅희 씨가 맡았다. [51] 녹화방송이다. 방송 당시 선동열 본인은 이미 해외 전지훈련으로 출국했던 상태였다. [52] 89년과 마찬가지로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부문. 이 해에도 탈삼진 1위를 기록하여, 지금 기준으로는 4관왕. [53] 박동희 : 계약금 1억 4천만원, 선동열 : 계약금 1억 3천 8백만원. [54] 결과적으로 박동희는 그해 10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제구불안으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55] 3실점 완투승. [56] 지금 기준에서는 감독 500승이 별거 아닌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1991년 당시는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10년째밖에 안 되는 시기였다. 당연히 그시점에서의 누적기록을 지금 기준에서 보는 건 불합리하다. 참고로 감독 500승을 최초로 달성한 인물은 1991년 4월 빙그레 김영덕 감독이다. 당시는 그 500승 달성으로 김영덕, 김응용 두 감독은 모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57] 선동열이 일본으로 떠난 이후, 김응용 감독은 개인통산 1,000승을 달성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2014년, 한화 감독이 된 김응용 감독은 개인통산 1,500승까지 달성하게 된다. [58] 본 경기가 1대1 무승부가 된 관계로 승리투수는 되지 못한다. 당시 상대투수는 한희민으로 역시 13이닝을 완투했다. [59] 1991년 선동열의 첫 패전투수 기록이기도 했다. 이 경기 이후 선동열은 8월말까지 나름 슬럼프에 빠지면서 그해 총 4패를 기록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선발투수로 1실점 패배도 몇번 기록하는 등, 운이 따르지 않은 측면도 있었다. [60] 일본에 진출한 1996년 4월 16일 도쿄돔 요미우리전에서는 셰인 맥과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1이닝 2홈런을 허용한 적이 있다. [61] KBO 연속경기 두자릿수 탈삼진 신기록이다. 이후 2024년에 SSG의 드류 앤더슨4경기 연속 두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하며 선동열의 기록에 도전했지만, 5번째 등판(2024년 8월 7일)에서 탈삼진 4개에 그치며, 도전에 실패하게 된다. [62] 이듬해인 1992 시즌, 이강철은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펼치게 되는데, 이 때 두 선수는 시즌 마지막까지 18승으로 공동 다승 1위 상태였다. 그렇지만 송진우가 (당초 예정되었던) 이강철과의 선발 맞대결 약속을 깨고 그 직전경기 5회 팀의 리드상황에서 등판해(심지어 상대팀은 해태였다), 승리투수와 함께 시즌 19승으로 단독다승왕까지 가져가는 일도 있었다. 무려 다승왕+구원왕 동시석권이었지만, 이 사건으로 송진우는 연말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외면을 받게 된다. 이는 송진우(야구)/선수 경력 항목 중 1992년 편에도 언급되어 있으니 참조 요망. [63] 이와 같은 논란을 겪은 현재는 언급된 송진우vs이강철 사례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경우, 즉 개인타이틀이 동률인 선수가 소속된 2팀이 시즌 잔여경기에서 직접 맞대결할 시, 양팀 간 신사협정에 의해 두 선수에게 공동 타이틀을 안겨주는 불문율이 생겼다. 이 불문율은 투수 타이틀ㆍ타자 타이틀 모두 해당된다. 반대로, 이 불문율에 아슬아슬하게 해당되지 않은 대표적 사례가 2009년 박용택vs 홍성흔 타격왕 경쟁논란이다. 이는, 시즌 마지막경기 기준 박용택의 타율이 아주 근소하게나마 홍성흔보다 앞서 있었기에 불문율에 해당되지 않은 경우이다. 어찌보면 1991년 선동열 사례도 비난여부하고는 별개로, 현시점 기준에서도 불문율 내지 신사협정 여부에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비난 또한 충분히 가능한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64] 당시 시즌 한경기밖에 안 남은 상황이였고 조규제가 6.1이닝 무실점을 한다면 방어율왕은 뒤바뀔수 있는 상황이였다. 그래서 딱 3이닝을 채워 완전히 방어율왕을 확정지었다. [65] 1991년 당시는 정규시즌 종료 직후 MVP 투표와 시상식을 동시에 하였다. 현재는 MVP 투표는 정규시즌 종료 직후, MVP 시상식은 한국시리즈 종료 직후 형식으로 분리해서 시행하고 있다. [66] 전대영, 박노준, 김용철, 박승호, 김상훈, 김기태, 류중일, 김경기 [67] 심지어 한국시리즈 2경기 등판에서도 피홈런 2개( 강정길, 강석천)를 허용했다. [68] 다만 1991 한국시리즈에서 2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ERA 4.91을 기록하면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69] 홈구장 연고지팀의 선수들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하되, 와일드카드 형식으로 타팀 선수들도 일부 포함시켜 전체 라인업 완성. [70] 다쓰나미 가즈요시, 오치아이 히로미츠, 다이호 야스아키, 우노 마사루, 나카무라 다케시. [71] 다만, 경기외적으로 슈퍼게임 직전 선동열이 겪었던 부상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부상자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부상도 엄연히 자기관리의 일부인 만큼, 대표팀 선수로써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했던 부분은 충분히 비판받을 만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4차전까지는 선동열을 제외한 다른 투수들이 고생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선동열 부상관련 부분에 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72] 당시 다이에 호크스의 주력타자였다. 1991년 기준으로는 퍼시픽리그 최다안타왕이며, 그해 골든글러브- 베스트나인도 동시에 수상했다. [73] 당시 롯데 소속으로, 1차전에서는 야마자키 겐이치(다이요)의 부상으로 교체출전해 4타석을 소화했었다. 그리고 훗날 아이코는 주니치로 이적하고, 거기서 선동열과 팀동료가 되기도 한다. [74] 위의 스포츠뉴스 30초부터 등장해, 유격수 땅볼을 치고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타자가 바로 니시무라이다. [75] 한국팀 선발투수는 박동희. [76] 당시 다이요 훼일스(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소속이었고, 1989~90년 골든글러브 수상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1991시즌 기준 타격성적은 평범했다. 아쉽게도 야마자키는 1회 히트 바이 핏치로 부상당하면서, 아이코 다케시(롯데)로 교체된다. [77] 당시 야쿠르트 소속이었고, 1991 시즌 센트럴리그 타점왕이자 베스트나인 수상자이기도 했다. 훗날 요미우리로 이적해 주니치 선동열과도 자주 대결한다. [78] 1차전 당시 KBS 객원해설을 맡았던 장훈 씨가, 히로사와를 재일동포 선수로 소개하기도 했다. [79] 당시 요미우리 소속+요미우리의 선수회장(주장). 1991 시즌 기준 타격성적은 평범했지만, 대신 그해 올스타전 팬투표에서 센트럴리그 3루수 올스타로 선정됐었다. [80] 한국팀 선발투수는 윤학길. [81] 당시 다이요 훼일스(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소속이었고, 1986~88년 3년연속 센트럴리그 도루왕을 차지했던 선수이다. [82] 1차전 아키야마 코지(세이부)를 제외하면 1ㆍ2차전 모두 선발라인업이 센트럴리그 선수들로만 구성되었다. 물론 기요하라 가즈히로(세이부), 쓰지 하쓰히코(세이부) 등이 1차전 경기 중후반에 대타로 투입되기는 했지만,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차전 당시 일본팀 감독은 퍼시픽리그 소속 모리 마사아키(세이부) 감독이었다는 사실. [83] 훗날인 1995ㆍ1999년 한일 슈퍼게임, 그리고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 등에서는 세리그+파리그 선수들이 골고루 배치된 타선으로 경기에 임하였다. [84] 다쓰나미 가즈요시, 오치아이 히로미츠, 다이호 야스아키, 나카무라 다케시. [85] 정확하게 말하면, 3회 나카무라 다케시(포수)의 첫타석 직전 대타로 노무라 겐지로(유격수)가 들어섰다. 이후 일본의 포수 마스크는 후루타 아쓰야가 대신 썼으며, 3타석을 소화했다. 한편, 노무라 겐지로도 이후 유격수 포지션에서 4타석을 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유격수였던 다쓰나미 가즈요시는 2루수로 이동하였고, 기존 2루수였던 타카기 유타카는 경기에서 빠졌다. [86] 노무라 겐지로(1차전), 오치아이 히로미츠(1차전ㆍ2차전), 타츠나미 카즈요시(2차전), 타이호 야스아키(2차전), 나카무라 다케시(2차전). [87] 아이코 다케시(롯데)는 1차전 경기초반 야마자키 겐이치(다이요)의 부상으로 대체투입되었고, 니시무라 노리후미(롯데)는 1차전 경기후반에 대주자로 출전했었다. 참고로 니시무라는 1986~89년 4년연속 퍼시픽리그 도루왕을 차지했던 선수이다. [88] 사사키는 6차전에도 선발출전한다. [89] 심지어 나카무라는 도루저지율 및 수비도 수준급이다. [90] 당시 요미우리 에이스인 쿠와타 마스미가 1차전에 선발등판했다. 그 외 니시무라 타쓰지(야쿠르트), 시바타 야스미츠(니혼햄), 이라부 히데키(롯데), 사이토 마사키(요미우리) 등도 후속투수로 등판했다. [91] 아쉽게도 노모 히데오는 대회 내내 등판하지 않았다. 사실 4차전이 펼쳐진 후지이데라 구장이 당시 노모의 소속팀인 긴테쓰 버팔로즈의 홈구장이었지만, 긴테쓰 감독이자 4차전 일본대표팀 감독이었던 오기 아키라는 끝까지 노모를 등판시키지 않았다. 대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6차전에 가서는 1991년 사와무라상 수상자인 사사오카 신지(히로시마), 대만특급 곽원치(주니치) 등이 모습을 보였다( 곽원치는 당시 일본국적 선수 신분으로써 본 대회에 출전했다. 더 자세한 건 곽원치 항목 참조). [92] 토요일 주말을 맞아 MBC 지상파 중계가 이루어졌다. 참고로 1992년 당시는 케이블 TV 개국 전이었다. 대신 주말이 되면 지상파 야구중계가 많이 편성되던 시기였다. [93] 선동열의 KBO 최종 다승기록은 146승이다. 그리고 2002년 송진우가 147승을 기록하면서 선동열의 다승기록을 뛰어넘는다.(송진우의 최종 다승기록은 210승) 이후에도 몇몇 후배들이 선동열의 다승기록을 뛰어넘는다. [94] 이 와중에도 전년도에 해태가 훗날 감독으로서 팀을 우승시키는 왼손 거포를 외면하면서까지 입단시킨 어느 반항아 투수가 선발 로테이션에 자리잡지 못했다. [95] 이 경기도 MBC 지상파 중계였다. [96] 롯데 자이언츠 김응국 [97] 물론 전력투구는 하지 않고 배팅볼 수준으로 약하게 던졌다. 그리고 김응국에게 좌전안타 허용 후 바로 강판된다. 후속투수는 선동열의 팀후배인 신동수였다. [98] 말이 2위지 정규시즌 1위 빙그레와 10.5게임차, 3위 롯데와는 반게임차였다. [99] 현재까지 타이거즈와 자이언츠 프랜차이즈가 포스트시즌에서 만난 것은 이해가 유일하다. [100] 1992년 당시 이강철(18승), 김정수(14승), 신동수(13승), 조계현(10승), 문희수(10승). [101] 선동열처럼 압도적 수준의 마무리가 부재하면서, 특히 플레이오프 마지막경기였던 5차전에서는 롯데에게 9회 집중타를 맞았다. [102] 물론 부상으로 32이닝에 그쳤기 때문에 당시 규정이닝인 126이닝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 [103] 선동열은 말고기를 붙이는 등 치료에 갖은 방법을 써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고, 아마 병이 나은 건 휴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뉴스에서 밝힌 바 있다. [104] 김응용 감독은 시즌 개막 전 선동열의 몸 상태에 대해 "선동열은 선수가 아니고 코치야"라면서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105] 기사 [106] 하지만 아래 후술된 인위적 기록 만들기 논란이 있다. [107] 선동열 야구인생에서 마지막 골든글러브 수상이기도 하다. [108] 경기 자체는 결국 해태의 승리로 끝났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이 경기를 술회했다. 땜빵 선발로 등판하여 6회까지 잘 막고 승리투수 요건을 갖춘 상황에서 1이닝을 더 던지면 서울 원정에 동행하지 않고 광주에 남아야 했다. 그러나 송유석의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 개업식이 서울에서 있을 예정이어서 개업식 참석을 위해 송유석은 더 던질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가 안 좋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어서 등판한 김정수와 이대진이 장작을 쌓더니 결국 선동열이 등판했고 선동열의 천적 김동기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송유석은 '아 내가 벌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09] 끝내기 홈런이 아니라 결승홈런이다. [110] 해태 입장에서는 본 경기에서 당시 다승 1위를 달리고 있던 조계현을 강판시키면서까지 승리에 대한 집념을 드러냈지만 결국 패배한 셈이었다. 참고로 상대팀 삼성의 투수였던 박충식은 3실점 완투승을 기록한다. 이후 한국시리즈 3차전에 대한 하나의 복선으로 볼 수도 있다. [111] 선동열은 1993 시즌에 이 경기 외에도 LG를 상대로 2패를 기록했다. 1993 시즌에 총 3패 기록. [112] 김상엽 159개, 선동열 158개. [113] 1993시즌 최종 탈삼진 순위는 1위 김상엽(삼성) : 170개, 2위 선동열 : 164개, 3위 김상진(OB) : 142개로 결정된다. [114] 6회에 등판하자마자 연속안타를 허용하며 무사 1-2루 위기를 맞았지만 후속타자들을 범타로 처리하고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에는 큰 위기없이 투구. [115] 가수로서의 수익을 보너스 형식으로 지급한다는 합의. [116] 후술하겠지만, 선동열의 일본 이적 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 단장직에서 퇴진하게 된다. [117] 1993년 당시는 KBO에 해외진출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쉽게 예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당해년도에 소속팀의 우승을 이끈 선수는 우승 직후 구단 고위층한테서 해외진출 허락을 받기가 수월한 것으로 추측은 가능하다. 1999년 KBO의 해외진출 제도가 신설된 이후 1999년말 정민철, 2000년말 정민태 둘 다 소속팀의 우승을 이끈 후 바로 해외진출을 승낙받았고, 이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팀 우승시 선수의 해외진출 프리미엄이 붙는 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이다(요미우리, 소프트뱅크 제외). [118] 영상 속에서 선동열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당시 니혼TV 해설위원 자격으로 방한했던 재일동포 김일융이다. 두 사람은 1985~86 시즌에 KBO에서 함께 활약했던 관계로 서로 안면이 있었고(선동열의 프로데뷔전 당시 상대팀 선발투수도 김일융이었다), 훗날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한 이후에는 김일융이 일본프로야구 선배 자격에서 순간순간 조언을 해 줬다고 한다. [119] 언급된 선동열 영입시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120] 본 트레이드와 관련해서는 아키야마 코지 항목 중 세기의 트레이드 편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후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 다이에 호크스는 선동열이 소속된 주니치 드래곤즈와 맞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때 다이에의 아키야마는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다. [121] 다이에는 선동열 영입시도 이후인 1995년 가을, 연세대 임선동과 입단합의까지 갔지만 KBO LG 트윈스 등의 반발로 결국 임선동 영입에 실패한다. 그 후 다이에가 소프트뱅크에 매각된 2005년이 한참 지나서야 이범호(2010년), 이대호(2014년) 등이 호크스에 입단하게 된다. [122] 주니치의 한국선수 다수영입 역사에 묻혔지만 사실 오릭스도 예전부터 한국선수 영입에 적극적인 팀이었다. 우선 1995년말 선동열 일본진출 선언 당시에도 영입경쟁에 나섰었다. 그리고 1999년 10월, 정민태, 정민철, 구대성 이 3명에 대한 신분조회를 KBO에 요청하면서 다시 한번 스카웃 빌드업 작업에 들어가고, 이듬해인 2000년말 기어코 구대성 영입에 성공하게 된다. 이는 10년 후인 2010년말 박찬호 이승엽, 그리고 2011년말 이대호 영입으로 이어진다. [123] 류중일, 한영준, 강기웅, 임형석, 김정민 [124] 102.1이닝 5피홈런. 참고로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태평양 정명원은 105.2이닝 2피홈런을 기록했다. [125] 이 경기들 중 LG의 신인투수 인현배와 선발 맞대결에서 해태가 0-1로 패한 경기도 있었다. [126] 전업마무리 시즌이었음에도 규정이닝인 126이닝에 고작 17이닝 정도만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127] 일본 첫해인 1996시즌, 주자견제 허술+도루 허용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시즌 중에만 몇차례나 투구폼을 수정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나서 1996시즌 종료 후 다시 한번 투구폼 교정작업에 들어가게 되고, 이듬해인 1997시즌부터 비로소 안정된 투구를 보이게 된다. 더 자세한 사항은 '1996시즌', '1996시즌 이후 스토브리그' 항목 참조. [128] A팀 스피드건과 B팀 스피드건의 측정위치가 다르고 측정되는 구속도 다르다는 식. [129] 비공식적으로는 155km이다. 하지만 이때도 해태 스피드건에는 151km로 측정되었기 때문에 신뢰하기가 힘들다. 일단 2000년대 엄정욱 최대성의 등장 이전까지는 1995년 선동열의 비공식 최고구속이 한국프로야구 최고구속으로 종종 소개되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각팀의 스피드건 측정위치가 제각각이었던 관계로, 스피드건의 신뢰도 면에서 의문이 있다는 점이다. 2022년 안우진이 159km-160km를 연발했지만,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24년 기준 (용병 제외) 한국프로야구 공식 최고구속 기록 보유자는 안우진이 아닌 문동주이다. [130] 159km 기록 순간 상대타자는 마쓰이 히데키(요미우리)이다. [131] 1975년생 투수. 1994년 오릭스에 입단했는데, 이듬해인 1995년에 불펜투수로 활약하면서 15승 27세이브를 기록했고, 그에 힘입어 퍼시픽리그 신인왕, 승률왕, 구원왕을 차지했다. 다만, 이후에는 하락세를 겪었고, 결국 남은 선수생활 동안 1995년과 같은 포스는 보여주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이었다. 이로 인해, 1995년 당시 오릭스의 감독이었던 오기 아키라가 히라이의 혹사 관련해서 비판받기도 했다. 참고로, 훗날 히라이의 오릭스 후배이자 이름도 비슷한 히라노 요시히사가 불펜투수로 각광받으면서 메이저리그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132] 영상 속에서 히라이가 상대하는 첫번째 타자는, 1980~90년대 퍼시픽리그를 폭격했던 랄프 브라이언트(긴테쓰)이다. [133] 1968년생 투수. 1989년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원래는 선발투수였고 1990년에는 센트럴리그 탈삼진왕(182개)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1991년부터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활약하게 된다. 특히 1993년에는 수차례나 최고구속 156km를 기록했으며, 1996년에는 선동열과 불펜 맞대결을 한 적도 있다(4월 16일 선동열이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을 허용했던 도쿄돔 경기). 그렇지만 1997시즌 종료 후 오릭스로 트레이드되었으며, 이후에는 저니맨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불펜투수로 활약하기도 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1995년 한일 슈퍼게임 1차전 당시 일본팀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한 적이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 참조. [134] 곽태원의 경우, 아마시절보다는 프로입단 후에 직구구속이 하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당대 일본프로야구에서 최고수준의 직구로 평가받았다. [135] 유튜브에 1993년 한국시리즈 관련영상은 제법 많지만, 선동열 투구의 구속표시가 나오는 장면은 6차전 ( 동봉철 상대) 마지막 공 144km 뿐이다. [136] 1997시즌은 이라부 히데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시점이었고, 앞서 언급된 기다 마사오는 팔꿈치 수술로 시즌아웃, 그리고 히라이 마사후미, 마키하라 히로미, 쿠와타 마스미 등은 하락세를 겪고 있었던지라, 상대적으로 일본 내에서 선동열의 직구 구위(구속)가 돋보였던 측면도 있었다. 선동열 1997시즌 직구구속 관련해 더 자세한 사항은 <1997시즌> 항목 참조. 한편, 1997시즌 일본인 투수 중에서는 이시이 가즈히사가 강속구 계보를 이어받아 (구속 면에서) 선전했고, 이 계보는 1999년 마쓰자카 다이스케로 이어지게 된다. [137] 해태의 순위는 4위였으나, 이 시즌에는 3위와 4위의 승차가 3.5게임 이상일 때 준플레이오프를 생략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마침 3위 롯데와의 승차가 4.5게임이었기 때문에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38] 경기는 최종 0대0 무승부 기록. [139] 다구치는 1997년 올스타전( 진구 구장)에서도 선동열과 대결하지만,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난다. [140] 1995년 당시 퍼시픽리그 타격 2위 타자였다(1위는 스즈키 이치로). 호리는 훗날 이승엽과도 동료가 되어 지바 롯데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141] 위의 2차전 하이라이트 영상에는 호리의 타석이 생략되어 있다. [142] 당시 요코하마 소속의 1루수 겸 외야수. 요코하마 머신건 타선의 일원이기도 하다. 사실 그 중에서는 제일 약한 타격의 소유자이다. 선동열 일본진출 후에는 주니치 선동열과도 종종 대결했으며, 선수말년에는 야쿠르트 임창용과도 종종 대결한 적이 있다. [143] 당시 니혼햄 소속의 외야수. 훗날인 1999년 4월 7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프로데뷔전(도쿄돔) 당시 니혼햄의 1번타자로 등장해, 마쓰자카의 데뷔전 첫 상대타자가 되기도 한다(결과는 루킹삼진). 그리고 그해 9월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해 일본의 2000 시드니 올림픽/야구 본선티켓 획득에도 공헌했다. [144] 경기는 5대2 한국 승리. [145] 당시 히로시마 소속의 포수. 히로시마 아카헬 타선의 일원이기도 하다. 사실 무늬만 아카헬이고 타격자체는 좋은 선수가 아니다. 대신 포수로써 수비는 수준급. [146] 경기는 최종 1대1 무승부 기록. [147] 선동열은 결국 해태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고, 이에 선동열이라는 큰 전력을 잃은 해태는 당해 하위권으로 평가받았지만, 보란듯이 정규리그-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이뤘다. [148] 해태 타이거즈 전 사장이다. [149] 이 과정에서 주니치는 2년 이적료 2억엔, 연봉 2억엔으로 수정해주겠다고 했지만 노 사장은 무시했다. [150] 당시 이를 보도했던 일간스포츠의 헤드라인이 "주니치 보내!"였다. [151] 그래도 선동열은 연봉협상 때 항상 트러블이 있어 사장, 단장과 앙금이 있었지만 일본진출 때 이들이 요미우리를 끌어들여 연봉을 3배나 올려줬기에 사장과 단장에게 평생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 [152] 스기시타 시게루 - 곤도 히로시 - 호시노 센이치 - 코마츠 타츠오 [153] 당시 KBS 1TV의 일요일 밤8시 정규프로그램이었다. [154] 2이닝 1실점 [155] 여담으로, 선동열의 일본데뷔전 첫 상대타자였던 마에다 토모노리는, 2017년 해설위원 자격으로 WBC 한국대표팀 코치 선동열과 인터뷰를 가지기도 한다. 20170215 관련기사. WBC 선동열 코치 인터뷰.. [156] 선동열 일본데뷔전 당시는 선동열에게 블론세이브를 안기는 동점적시타 기록, 이듬해인 1997년 8월 6일에는 선동열의 그해 유일한 1패를 안기는 2타점 역전적시타 기록. [157] 타격도 뛰어났지만, 선동열 상대로 출루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도루능력을 자랑했다. 일례로, 1997년 8월 6일 경기에서 선동열 상대로 안타출루한 다음, 2루-3루 연속도루에 성공했고, 이는 결국 루이스 로페즈의 역전적시타로 이어진다. 이 경기는 선동열의 1997시즌 유일한 패전투수 기록 경기이기도 하다. [158] 1999년 6월 6일, 선동열의 3경기 연속 구원실패 당시 그 시작도 오가타 고이치의 3루타에서 비롯되었다. [159] 2번타자 셰인 맥에게 솔로홈런 허용, 3번타자 마쓰이 히데키에게 중전안타 허용, 4번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동점 투런홈런 허용. [160] 그나마 동점 허용 후 볼넷-삼진-고의사구-삼진으로 추가실점은 막아낸다. 후술되는 19960416 선동열 전체 투구영상 참조. [161] 영상에서는 8회말 요미우리의 2번타자 고무라 요시카즈(삼진), 3번타자 셰인 맥(홈런)의 타석은 생략되었고, 4번타자 마쓰이 히데키의 타석부터 소개되어 있다. 영상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등판 직후 첫타자 고무라를 상대로도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를 펼쳤기에 뭔가 불안한 감은 있었다. 그리고 9회초에 등판한 요미우리의 투수가, 앞선 1995 시즌 항목 중 일본 투수 직구구속 부분에서 언급된 기다 마사오이다. [162] 이 경기에서 선동열의 최종기록은 2이닝 3피안타 2볼넷 4탈삼진 3실점 승리투수. [163] 8회 2사 만루에서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3타점 3루타를 허용한다. 이후 후속타자에게도 추가적시타 허용. [164] 선동열의 일본시절 유일한 선발등판 경기이다. [165] 이 경기 직후 (당시 일본연수 중이던) 선배 김성한과 술집에서 술 마시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목격되면서 기사화되었고, 더 큰 비판을 받게 된다(2019년 발간된 선동열의 자서전 <야구는 선동열> 중). [166] 결국 그해 센트럴리그 우승은 요미우리가 차지했다. 그것도 원래 1위였던 히로시마와의 시즌승차 11.5게임 차이를 뒤집은 결과이다. 이는 일명 메이크 드라마로 일컬어진다. [167] 주니치 입장에서는 2년 전인 1994년 일명 10.8 결전에 이어 다시 한번 리그우승을 놓쳐서 아쉬움을 더했다. 선동열 입장에서는 만약 본인만 잘했으면 리그우승은 물론이요 일본시리즈에서 이치로와 맞대결할 수도 있었건만 그 기회들을 모두 날려버린 셈이다. [168] 셰인 맥, 오치아이 히로미츠, 이나바 아츠노리, 후루타 아쓰야 4명에게 피홈런을 허용했다. [169] 몇경기 후 2군리그도 종료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선동열은 투구 밸런스를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170] 2019년 발간된 선동열의 자서전 <야구는 선동열> 중. [171] 특히 아카헬(붉은 헬멧) 군단, 붉은 악마 군단, 일본판 빅 레드 머신 등으로 불리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선에 유난히 약해서 6월 16일 히로시마 전에서는 후속투수가 싹쓸이 안타를 얻어맞긴 했지만, 0.1이닝 7실점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72] 당시 요미우리의 용병타자였던 셰인 맥[219]이 4월 16일 도쿄돔에서 선동열과의 대결 중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함께 홈런을 쳤는데 경기 후 '슬라이더밖에 없으니 슬라이더만 쳐라'는 멘트를 남겼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고 있다. 그러나 선동열 자서전에는 오히려 그 경기 이후, 당시 요미우리의 타자들이 직구만 노렸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출처. 또한 그 슬라이더로 해당경기에서 두 번째 상대한 셰인 맥을 삼진으로 처리하고, 결국 일본 데뷔 후 첫 승리를 기록하며 경기를 마무리한 것이 재미있는 부분. 출처 다만 기사에도 나오듯이 팀이 8회에 재차 역전해서 어찌저찌 넘어간 거지, 3대0이었던 경기를 홈런 2방을 연달아 얻어맞고 동점을 만들면서 선발 투수 오치아이 에이지의 승리를 날려먹는 블론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경기 내용 자체는 최악의 피칭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경기 결과 [173] 주니치 시절 탈삼진을 두번째로 많이 잡은 시즌이 1996년이다. [174] 1995년 WHIP이 0.58인 선동열을 상대로 힘들게 출루한 주자가 만약 횡사한다면, 해당 주자는 그 수모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루를 할 엄두도 못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큰 투구폼 때문에 주자견제 능력이 좋지 못했다고 한들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175] 경기 자체는 이후 주니치가 9회에 재역전하며 5:4로 승리했고, 선동열은 팀의 역전으로 패전투수를 면하고 노디시전에 그쳤다. 경기 결과 [176] 사사키 카즈히로와 공동 1위. 다만 이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수상 기준이 세이브 포인트였기 때문에 구원승이 2승 더 많았던 사사키에게 밀려 타이틀 수상엔 실패했다. [177] 이 경기는 주니치의 대만출신 레전드투수 곽원치의 NPB 은퇴경기이기도 했다. 이후 곽원치는 대만( CPBL)으로 건너가서 계속 선수생활을 하다가 2001년에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178] 훗날 선동열 본인도 이 세이브는 심판의 오심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 첫경기 세이브가 선동열의 자신감을 심어준 경기임은 분명하다. [179] 요미우리와의 원정 3연전 중 마지막 경기이다. 이미 3연전 첫경기에 선동열은 세이브를 기록했었다(시즌 2세이브). [180] 2019년 발간된 선동열의 자서전 <야구는 선동열> 중에 자세한 상황묘사가 되어있다. 선동열 본인은 이 경기를 통해 자신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으며, 확실한 변곡점으로 회상하고 있다. 즉, 개막전에서 얻은 자신감이 이 경기를 통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1999년 신인 마쓰자카 다이스케 스즈키 이치로와의 프로 첫 맞대결에서 3삼진을 잡아내면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181] 1년전 시즌초에 선동열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세웠던 요미우리를 상대로 한 복수의 의미도 있었기에 그 감격은 더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182] 이후 이승엽이 2006년 6월 센트럴리그 이달의 MVP / 이대호가 2012년 5월과 7월, 2014년 6월, 2015년 5월 총 4차례 퍼시픽리그 이달의 MVP를 수상한다. [183] 팀의 4대2 리드상황에서 8회말부터 등판해 2이닝을 1실점으로 막았다. [184] 본인의 1997시즌 첫 승리이자 마지막 승리이기도 하다. [185] 조성민은 1996년 일본 데뷔후 1년간 2군에만 있다가, 1997년 7월에야 1군에 데뷔한 상태였다. [186] 메이지진구 야구장. [187] 당시 선동열이 상대했던 퍼시픽리그 타자들은 스즈키 이치로(오릭스)-다나카 유키오(일본햄)-요시나가 고이치로(다이에)- 타구치 소(오릭스) 4명이다. [188] 이듬해인 1998년에 요코하마의 사사키 가즈히로가 연속경기 구원성공 기록을 갱신한다. [189] 앞서 언급한 주니치의 1997년 개막전 선발투수이자 승리투수도 야마모토 마사이다(8.2이닝 2실점). [190] 시즌 중 야마모토는 인터뷰에서 (립서비스가 섞이긴 했어도) 만약 자기가 선동열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통산 500승도 가능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실제 야마모토의 통산 승수는 201승). [191] 당시 NHK 야구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하라 타츠노리의 (스튜디오 속) 모습도 볼 수 있다. [192] 2019년 발간된 선동열의 자서전 <야구는 선동열> 중. [193] 일본의 대스타인 오치아이 히로미츠 스즈키 이치로도 <주간 베이스볼> 특집호 분량이 3부 12쪽 분량까지는 확보되지 않는다고 한다. [194] 하나는 선동열의 피칭스타일 문서에서도 언급되는 바와 같이 슬러브로 보는 관점도 있다. [195] 슬라이더를 던지다가 홈런을 허용했는데, 이후 선동열은 다카하시를 상대할 때는 고집스러울만큼 직구승부를 펼치게 된다. [196] 이상훈은 8월 중순 1군으로 승격해서 약 한달간 1군에 머물다가 9월말 2군으로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선동열은 2군행에 반발하는 이상훈을 호되게 야단치면서 한편으로는 다독거리는 역할도 맡았다(이상훈 본인이 스톡킹 등에서 직접 언급한 일화이다). [197] 이종범은 9월 중순에 부상에서 복귀해 (많지는 않았지만) 1군 잔여경기에 출전했다. [198] 4번 : 로버트 로즈, 5번 : 코마다 노리히로, 6번 : 나카네 히토시 [199] 8월 23일 기준, 1위 요코하마와 2위 주니치는 단 2경기차. [200] 피홈런 허용타자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이마오카 마코토, 에토 아키라, 가네모토 도모아키 4명이다. 특히 가네모토에게는 선동열 본인의 나고야돔 첫 피홈런을 허용한다(8월 20일). [201] 이러한 구위저하는 1998년부터 생겨난 무릎부상으로 인한 것이었다. 선동열은 1998년 시즌 중부터 2주에 한번씩은 커다란 주사기로 물을 뺐어야 했는데, 선동열과 같이 하체를 이용해서 피칭을 하던 투수에게는 그야말로 무시할 수 없는 부상이었던 것. 출처 [202] 후에 선동열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투수코치였던 야마다 히사시에게 은퇴의사까지 밝혔다고 한다. 이를 들은 야마다 코치가 호시노 감독에게 선동열의 조정기를 건의했고, 약 한달간 선동열의 2군행이 결정된다. [203] 야쿠르트의 마지막 타자가 (훗날 KBO에서도 뛴) 페타지니이다. [204] 99년 당시 주니치 불펜은 오치아이 에이지, 이상훈, 이와세 히토키, 쇼쓰 에이지, 마에다 유키나카, 나카야마 히로아키 등 수준급 불펜들이 넘쳐나 이런 기용이 가능했다. [205] 입단 후 일본에서 5년간 뛰면서 통산 120세이브와 두 번의 세이브 1위를 차지한 클로저 외인선수였다. 그러나 주니치 재적 4년차인 2003년부터 5점대로 부진하였으며, 수뇌부랑도 대립하면서 7월에 퇴출되었으나, 웨이버 클레임으로 요코하마가 그를 영입해서 하반기에는 2점대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 2004년에는 8점대로 최악의 부진을 보였고 결국 그 해를 끝으로 퇴단했다. [206] 마쓰이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에 마츠이의 천적으로 군림했던 선수가 바로 박찬호다. 상대전적은 9타수 1안타(홈런) 1볼넷 2타점. 대신 박찬호는 스즈키 이치로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207] 지금은 은퇴경기에서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게 상호간의 예의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장유유서를 기반으로 한 유교적 인식이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어서 야구팬들로부터 선배의 은퇴경기에 일부러 삼진을 당해주지 않은 마쓰이에 대해 '위아래도 없는 놈'이라는 식의 노골적인 비난이 굉장히 많았었다. 투수 박찬호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이미 은퇴를 선언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유격수 칼 립켄 주니어을 올스타전에서 상대했는데 대놓고 복판의 패스트볼을 던지며 홈런을 허용했다. [208] 100승 이상 기록 투수 중 압도적 1위다. 2위가 0.667. [209] 투수 전체 1위, 타자 포함 전체 3위 [210] http://npbstats.com/players/db/%ED%88%AC%EC%88%98/?wdt_search=104405 참고 [211] 단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구원승을 더한 세이브포인트로 최고구원투수를 뽑았기 때문에 사사키와 세이브는 공동 1위였지만 구원승 3개를 기록한 사사키에 2개 차이로 밀려서 최고구원투수는 수상 실패. [212] 시즌 262.2 이닝임에도 2위기록이다. 1위는 최동원 [213] 1987년까지 연속으로 200이닝+를 찍었다. [214] 1985년 이래 200이닝+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1987년까지 196.2-193.1이닝을 기록했다. [215] 역대 4위 [216] 역대 1위 [217] 하지만 이 점은 당연히 경기 수로 따지면 불펜이 선발보단 더 많은 것을 감안해야한다. [218]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분업화 시스템도 자리 잡기 전이고 선발투수가 점수를 주지 않는한은 그냥 끝까지 갔다. 완투 50회 이상의 투수들은 대부분 80~90년대 투수들이고 2000년대까지 던진 투수들의 경우도 송진우를 제외하고 완투의 90% 이상을 2000년 이전에 기록했다. 2000년 이후로 시즌 5회 이상 완투를 한 선수는 최상덕(2회), 이승호, 송진우, 류현진(3회), 김진우, 이리키, 리오스 뿐이며 2010년 류현진 이후로 10년 넘게 아무도 없다.

[219] 꽤 메이저 커리어가 훌륭한 타자로 메이저리그 파업 때문에 2년 계약으로 일본에 왔다. 일본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지만 연봉이 워낙 비싸서 돈값을 했다기엔 미묘한 성적이었고 2년만 뛰고 메이저에 복귀했다. 다만 메이저에 돌아간 후에는 백업과 대타 위주로 뛰다가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