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요시노부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2000 | 2002 | 2009 | 2012 |
2004 아테네 올림픽 {{{#bd5c24 동메달}}} |
2004
|
1999, 200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베스트 나인 |
1998~2003, 200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
보유 기록(NPB) | |
연속타수 안타 | 11타수 |
한 시즌 최다 1회 선두타자 홈런 | 2007년 9홈런 |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4번}}} | |||||||||||||||||||||||||||||||||||||||
페드로 카스테야노 (1997) |
→ |
타카하시 요시노부 (1998~2018) |
→ |
라이언 쿡 (2019) |
|
|
타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 Yoshinobu Takahashi |
|
생년월일 | 1975년 4월 3일 ([age(1975-04-03)]세) |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토인 학원 고교 (가나가와) - 게이오기주쿠대학[1] |
신체 | 180cm, 87kg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1997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역지명]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8~2015)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5)[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16~2018) |
응원가 | 요미우리 시절[CD판][~2007][2008~] |
[clearfix]
1. 개요
|
일본의 야구인.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를 대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은퇴 후 요미우리 역사상 두번째로 어린 나이에(40세) 감독으로 부임했지만,[7] 프랜차이즈 스타로 대접받던 현역시절과는 달리 감독으로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 선수 생활
게이오기주쿠대학시절 도쿄 6대학 리그 역대 최다인 23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는 맹활약으로 주목받았으며 1997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입단 첫 해인 1998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출전하며 .300 19홈런 75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는데, 센트럴리그에서 프로 1년차 신인이 3할 타율을 기록한 것은 1958년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40년 만이었다. 특히 이 시즌 선동열에게도 홈런을 뽑아내 현지에서 대서특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다카하시라는 이름이 일반 야구팬들에게도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8] 다만 신인왕은 14승 6패 평균자책점 2.57을 기록한 주니치 드래곤즈의 카와카미 겐신에게 내줬다. 그래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인왕 레이스가 치열했던 이 해 요시노부도 특별 표창을 받았다.[9]
이듬해인 1999년에는 요미우리의 제 66대 4번타자가 되어 마쓰이 히데키,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MKT'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었고, 마쓰이와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홈런왕을 다투는 등 맹활약했지만 9월 중순에 펜스에 충돌하며 입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래도 .315 34홈런 98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며 시즌 후 연봉도 1억 엔으로 상승, 3년차 선수로는 최초로 연봉 1억 엔 고지를 밟게 된다.
3년차를 맞이한 2000년은 개막 후 4월 한달간 1할 5푼대의 타율이라는 극악의 부진에 허덕였다. 지난해 소포모어 징크스조차 겪지 않고 3할 30홈런과 100타점에 가까운 성적을 올린 다카하시였기에 이 때의 부진은 정말 이례적이었다. 그럼에도 나가시마 감독은 다카하시를 라인업에서 빼지 않고 계속해서 중심타선에 기용했고, 역시 클래스는 어디가지 않는지 5월부터 타격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시즌은 .289의 타율과 27홈런 89타점으로 마무리. 전년도에 비하면 살짝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4월 한달간 엄청나게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평가. 특히 이 시즌 커리어 최초로 135경기 전 경기 출전을 달성했으며, 요미우리가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잇달아 차지해 커리어 첫 우승을 맛본 시기도 이 때였다.
2001년에는 건강하게 두 시즌 연속 전경기 출장에 성공했고, 2002년에도 변함없는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2004년에는 5년만에 30홈런을 넘겼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동메달 획득에 성공했으나, 그 다음 해부터 2006년까지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하며 각각 88경기와 97경기에만 출장했다. 그바람에 요미우리 타선은 개판을 치면서 05년은 고쿠보와 아이들, 06년은 고쿠보마저 드르렁크리로 이승엽과 아이들로 전락했다.
2007년에는 높은 출루율을 살려 1번타자로 나섰는데, 개막전부터 홈런을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그 시즌에 9개의 선두타자 홈런을 때리는 등[10] 35개의 홈런을 때리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이 해 요미우리는 요시노부와 타니 요시토모의 테이블 세터진부터 장타를 뻥뻥 때려내고, 그 뒤의 중심타선에는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와 이승엽, 하위타선에 아베 신노스케와 니오카 토모히로가 기다리는 강력한 상위타선을 구축하며 5년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11]에 패하며 일본시리즈 진출은 실패했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작년과 다를 바 없이 1번타자로 주로 출장했다. 하지만 또다시 허리와 무릎 부상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타격 부진까지 겹쳐, 타율이 2할 3푼대로 추락하는 등 심각한 부진을 보였다. 결국 2009시즌을 개점휴업하며 보냈고[12], 2010시즌부터는 수비 부담을 줄이고자 1루수로 출장했다. 그로 인해 이승엽은 시즌 내내 벤치 신세..(...)
이후에는 나이와 부상 등으로 인해 1루나 좌익수 위주로 출장하고 있고 주전경쟁에서는 꽤 밀려난 상태. 하지만 2012시즌에는 2007년 이후 최다인 130경기에 출전하며 통산 300홈런을 기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고, 2013시즌에는 개막 직후 부상으로 몇 달간 결장했지만 시즌 중반 복귀 후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비록 규정타석은 미달이지만 .303의 타율과 10홈런 35타점 OPS .950이라는 꽤나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다.
2014년에는 주로 대타 겸 백업 야수로 나서며 .286의 타율과 6홈런 29타점의 괜찮은 활약을 보였고,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시즌 후, 플레잉 코치로 임명되면서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에는 팀의 1군 타격 코치를 겸업하며 전년과 마찬가지로 대타 겸 백업 야수로 활약, .278의 타율과 5홈런 21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동년 10월 23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후 사퇴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사실 기량이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전 후루타 아츠야나 다니시게 모토노부처럼 선수 겸 감독으로 뛸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결국 선수로서는 완전히 은퇴하고 감독직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은퇴 후 바로 감독직을 맡은 것은 배구의 이 분하고 비슷하다. 결국 2015년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야쿠르트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1승 3패로 몰린 4차전 9회초 2아웃에 대타로 들어와서 삼진을 당하면서 팀의 탈락을 확정지은 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통산 성적은 1819경기 출장 .291 1753안타 321홈런 986타점 OPS .872.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에 요미우리에만 뛰어 그야말로 요미우리를 대표할만한 스타로 손색이 없었으며, 2003년에는 선수회장을 맡았고 차기 감독감으로도 인정받았다. 한때는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음에도 뒤에서 타팀 선수와 농담이나 주고받는 모습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등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후배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베테랑으로서의 역할도 나름대로 수행해나갔다.
3. 플레이 스타일
|
측면에서 본 타격 장면 |
수비는 주로 우익수를 맡았는데 멀리던지기 120미터의 강한 어깨와 펜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수비를 보여주었다. 특히 송구능력이 좋았는데 단순히 어깨만 강했던것이 아니라 공을 글러브에서 빼는 동작이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이러한 허슬본능 때문에 커리어 내내 잔부상을 달고 살았고 급기야 2006년엔 하라 감독이 다이빙 캐치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허슬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잦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며 팀 성적 침체에 일조하기도 했다.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에는 중견수도 소화하였으며 허리 통증으로 시즌을 통째로 날린 2009년 이후에는 1루수로 출전하는 빈도가 늘었다. 2012년 이후로는 사실상 좌익수로 굳어졌다.
주루의 경우 50미터를 6초에 끊는 스피드를 가졌었으나 도루시도 자체가 많지는 않았고 성공률도 저조한 편이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성적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
1998 |
요미 우리 |
126 | 515 | 140 | 32 | 1 | 19 | 65 | 75 | 3 | 36 | 85 | .300 | .356 | .496 | .852 | 3.5 | |
1999 | 118 | 505 | 143 | 18 | 2 | 34 | 71 | 98 | 3 | 39 | 96 | .315 | .378 | .588 | .966 | 4.3 | ||
2000 | 135 | 577 | 150 | 29 | 1 | 27 | 89 | 74 | 5 | 46 | 87 | .289 | .352 | .505 | .857 | 3.5 | ||
2001 | 140 | 605 | 164 | 26 | 0 | 27 | 88 | 85 | 3 | 49 | 85 | .302 | .364 | .499 | .863 | 3.9 | ||
2002 | 105 | 454 | 125 | 18 | 0 | 17 | 63 | 53 | 1 | 27 | 70 | .306 | .365 | .474 | .839 | 2.9 | ||
2003 | 118 | 486 | 143 | 31 | 1 | 26 | 85 | 68 | 3 | 38 | 59 | .323 | .379 | .573 | .952 | 4.3 | ||
2004 | 109 | 477 | 135 | 20 | 1 | 30 | 83 | 79 | 1 | 38 | 70 | .317 | .387 | .580 | .966 | 3.7 | ||
2005 | 88 | 360 | 97 | 15 | 0 | 17 | 50 | 41 | 1 | 30 | 54 | .298 | .367 | .502 | .868 | 1.3 | ||
2006 | 97 | 390 | 91 | 14 | 1 | 15 | 91 | 51 | 1 | 25 | 64 | .260 | .320 | .434 | .754 | 1.7 | ||
2007 | 133 | 590 | 155 | 29 | 1 | 35 | 76 | 88 | 1 | 66 | 107 | .308 | .404 | .579 | .982 | 6.2 | ||
2008 | 91 | 311 | 65 | 11 | 0 | 17 | 38 | 41 | 1 | 30 | 76 | .236 | .322 | .462 | .783 | 0.7 | ||
2009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000 | .000 | 0.0 | ||
2010 | 116 | 332 | 75 | 9 | 0 | 13 | 30 | 56 | 2 | 44 | 75 | .268 | .364 | .439 | .804 | 1.1 | ||
2011 | 95 | 301 | 63 | 13 | 0 | 15 | 35 | 37 | 0 | 40 | 64 | .246 | .357 | .473 | .829 | 2.4 | ||
2012 | 130 | 442 | 88 | 17 | 0 | 8 | 30 | 56 | 2 | 61 | 77 | .239 | .356 | .351 | .707 | 1.1 | ||
2013 | 68 | 197 | 50 | 6 | 1 | 10 | 23 | 34 | 0 | 31 | 34 | .303 | .416 | .533 | .950 | 2.0 | ||
2014 | 72 | 130 | 32 | 4 | 0 | 6 | 8 | 29 | 0 | 14 | 30 | .286 | .369 | .482 | .851 | 0.4 | ||
2015 | 77 | 158 | 37 | 5 | 0 | 5 | 11 | 21 | 2 | 20 | 39 | .278 | .386 | .429 | .815 | 0.9 | ||
NPB 통산 (18시즌) |
1819 | 6831 | 1753 | 297 | 9 | 321 | 890 | 986 | 29 | 634 | 1173 | .291 | .366 | .503 | .869 | 44.7 |
5. 감독 생활
5.1. 2016시즌
선수생활을 마친 다음해 곧바로 감독으로 승격한 2016년.
외야수에 코치 경력도 일천한 그가 감독 자리를 물려받으면 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섞인 시선도 남아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거인 팬들은 차라리 하라 타츠노리가 백발될 때까지 감독하고 우츠미 테츠야나 아베 신노스케를 차기 감독후보로 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외야수 출신이 감독을 맡아서 제대로 된 사례가 없다는 소리도 곁들이면서 물론 기본적으로 요미우리는 2차대전 기간 중에 선수 겸 감독을 맡은 나카지마 하루야스 외에는 외야수 출신이 감독을 맡은 적이 없기는 하다. 굳이 따지자면 다카하시의 선수시절 대부분 동안 감독이었던 하라가 선수생활 중반에 잠깐 좌익수를 맡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본 포지션은 3루. 그러니 외야수 출신이 감독해서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자시고도 없다.
시즌 종료 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선수단에서 벌어진 도박 관련 논란 때문인지, 선수단에게 지시를 내려서 밤 10시(휴식일은 밤 12시) 이후로는 외출금지, 주말에 골프를 치러 나가는 행위, 납회 등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팀의 주장이란 사람이 이국 땅에서 화끈하게 저질러 버렸다..
거기다가 2016년 시즌 전부터 OB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마약을 피워 체포되질 않나, 게다가 기요하라가 선수시절부터 동료 노무라 타카히토에게 중개로 마약을 피웠다는 사실이 발각된 데다가 또 교진군 선수 타카기 쿄스케가 도박사건을 일으켜 이로 인해 일본프로야구를 좌지우지하던 와타나베 츠네오 등의 고위 구단관계자들이 잇달아 사임하며 명문구단이라 손꼽히던 요미우리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이 가는 영 좋지 않은 일이 계속 터지며 첫 해 감독생활을 잘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단 3월 25일 도쿄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개막 3연전을 스윕한 것을 시작으로 4월은 0.5경기 차 선두로 시작해 과거 초짜감독 시절의 O N과는 다르단 것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골든 위크 기간 동안에 야쿠르트, 주니치와의 3연전을 각각 스윕당한 것을 시작으로 DTD를 시전, 5월 27일 자로 5위까지 추락했다. 다행히 교류전을 5할 승률로 마치고, 다 른 팀 들이 교류전을 망치면서 어부지리로 2위를 탈환했으나, 문제는 1위 히로시마 카프와의 승차가 5게임 안팎으로 좁혀질 기미를 보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 때문에 팬들의 반응은 아직까진 싸늘한듯하다 . 벌써부터 경기 후 인터뷰 등의 발언을 두고 "도대체 생각은 하고 사는 거냐", " 지금 이 난국을 타개할 복안은 있는 거냐" 등등의 비판이 나오는 중.
결국 9월 10일, 히로시마에게 6-4로 패하여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일단 간신히 5할 승률로 2위를 차지했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구단 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 심판빨 오지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승 2패로 밀리며 탈락하고 만다(...)[15] 결국 3년 연속 일본시리즈 진출 실패(...)
감독 첫해를 보자면 겉으로 보이는 순위 성적은 2위로 좋았지만 경기 성적이 71승 69패 3무 승률 .507 로 도무지 2위 같지 않은 실망스러운 성적인데다(...)[16] CS에서 그 꼴코하마한테 전 경기가 홈경기라는 이점을 다 내던져버리고 박살난지라(...)[17]. 아직 초짜이니 성급한 판단은 이르지만,아시아 최강의 뎁스를 자랑하는 교진군의 감독이란 걸 생각하자면 감독으로써의 역량은 부족해 보이고, 아차하다가 O N 1기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2. 2017시즌
감독 부임 2번째 해인 2017시즌을 앞두고 구단 최초로 F A 3명에다가 전직 메이저리거들을 영입하며 구단이 대놓고 성적내라고 압박하는거 같아 스트레스 이빠이 받을듯. 설상가상으로 FA로 데려온 선수중 요 다이칸과 야마구치 슌은 부상으로 개막전 출장이 불발되었고 모리후쿠 마사히코만 개막엔트리에 포함되었으나 부진한 모습이다. 다른 선수도 아닌 FA로 합류한 선수가 개막전부터 못 뛰면 감독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18]3월 31일 도쿄돔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개막 3연전 스윕과 DeNA와의 첫경기까지 승리해 개막 4연승을 달리며 올해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리그선두 히로시마를 만나자 작년에 이어 고양이 앞에 깨갱하는 쥐신세
그러나 다음날인 6월 9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니혼햄과의 원정경기에서 이시카와 신고의 적시타와 아베의 후임 주장의 결승 1타점 2루타에 힘입어 2-1로 승리. 드디어 지긋지긋한 연패 탈출에 성공했다. 2017시즌 첫 교류전 승리지만 야쿠르트,지바 롯데와 교류전 꼴찌를 놓고 다투다가 간신히 꼴찌에서 3번째인 교류전 10위를 차지(...)
여하튼 그렇게 돈질을 했는데도 2016년엔 5할 겨우 넘는 2위, 2017년엔 이런 상황을 연출 중이라 무능하다는 말이 나와도 할 말이 없는 지경이니 이쯤 되면 휴양을 빙자한 해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런데 희한하게도 언론이나 팬들 사이에서 경질하라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사실상 강제 은퇴를 당한 것도 있고, 거의 떠밀리듯 감독이 된 영향인 듯.
마치 "감독은 경기 중이나 시즌 중에 감정 변화를 쉽사리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라도 있는 듯 너무 포커페이스 유지에 신경을 써서 경기 중에도 항상 무표정으로 있는데 이게 마치 팀이 이기건 지건 남의 일인 양 무기력한 표정으로 비춰지는데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최대한 말을 골라가면서 담담하게 응하는 태도 등 역효과를 빚어
교류전 마지막 주에 소프트뱅크와 롯데를 상대로 5승1패를 거두면서 조금 자신감을 회복했는지 리그전 재개를 앞두고 현재의 승패마진(-7)은 하나씩 차근차근 줄여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승패마진을 줄이기는 커녕 리그전 재개 후 첫 상대인 주니치를 상대로 루징 시리즈(...), 야쿠르트에게 1승 1패, 그리고 요코하마에게 폭풍 3연패(...)를[21] 당하면서 승패마진은 외려 더 늘어났다
후반기 들어서도 반전없이 대부분 루징시리즈가 이어지며 올 시즌은 4위로 시즌을 마칠 줄 알았으나 야마구치가 먹튀짓을 하고 나서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8월부터 야금야금 승리를 챙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승률도 본인이 말한대로 5할에 복귀했다
9월 16일부터 벌어진 요코하마와의 2연전을 1승 1패로 나눠가지며 3위자리 사수에 일단 성공했다. 이제 요코하마와의 맞대결은 없기 때문에 남은 경기에서 요코하마와 같은 행보만 보여도 극적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다. 그러나 B클래스가 확정된 주니치와의 2연전에서 불의의 2연패를 당하고, 같은 시기 요코하마가 야쿠르트와의 최종전에서 승리하며 다시 4위로 추락. 끝까지 3위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끈질기게 요코하마를 따라붙으면서 안간힘을 썼으나 9월 30일, 10월 1일 숙적 한신과의 2연전에서 2연패를 하면서 포스트시즌에서 탈락. 10년연속 A클래스 및 클라이맥스 시리즈 시작 이래의 개근기록을 자신의 손으로 끊고 말았다. B클래스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 복귀 첫 해인 2006년 이후 11년만으로 비록 다음 해까지 임기는 보장받았지만 다음해 우승을 탈환하지 못하면 그대로 호리우치 츠네오에 이은 순혈감독 흑역사로 확정될 듯.[23]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감독직에 앉혔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비단 NPB뿐만이 아니다. 야구를 넘어 스포츠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5.3. 2018시즌
전년도 12월 4일 세이부에서 유이한 두자릿수 승수를 거둔 노가미 료마[24][25], 그리고 12월 15일엔 홈런왕 알렉스 게레로를 영입하여 4년만에 리그우승탈환 및 6년만에 통합우승을 노리겠지만 쉽지 않을것이고, 요시노부 본인도 시즌 내내 좌불안석일 시즌일듯. 설령 올해도 우승못하고 그나마 A클래스로 끝낸다면 재계약의 여지라도 남기겠지만 B클래스를 찍었다가는........그런데 시즌 시작하자 마자 행보가 영 좋지 못하다. 개막전부터 에이스 스가노가 한신타선에 털리더니 전년도 시즌 투수 로테이션 3인방의 한 축이던 다구치 가즈토가 패배는 없지만 2경기에서 11점대의 방어율을 보이면서 불안한 모습을 노출하고 있고 몇년간 로테이션의 일각을 책임져준 마일스 마이콜라스는 팀에 없다[26]. FA로 데려온 노가미도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작년에 부상과 사고를 치고 시즌아웃됐던 야마구치 슌이 정신을 차리고 로테이션 투수다운 활약을 보이는 게 그나마 위안.
한신과의 개막 3연전은 패승승으로 넘기고 이어진 주니치와의 3연전도 위닝시리즈를 거뒀지만 그후 전년도 최하위팀인 야쿠르트에게 3연전 총합 28실점으로 털리면서 싹쓸이 3연패를 당하더니 이어진 요코하마와의 3연전도 싹쓸이 패. 시즌 초반부터 6연패를 당하면서 일찌감치 최하위로 쳐졌다. 본인도 점점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을 듯.
그러나 4월 20일 부터 시작된 한신과의 고시엔 원정 3연전 싹쓸이를 시작으로 주니치와의 간토지방시리즈 2연전까지 쓸어담았다. 특히 4월 25일 경기에서는 무려 20득점이라는 맹공을 퍼부어
그러다 또 연승한번하면 단숨에 2위로 연패한번하면 꼴찌로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롤러코스터같은 이번 시즌 센트럴리그의 양상 때문에 최종성적은 시즌 끝날때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7월 15일 리그 2위로 전반기를 마쳐 후반기엔 대반격을 노릴수있는 상황이 올꺼라는 팬들의 희망은.... 시작하자마자 히로시마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히로시마만 만나면 경기가 안되는건 여전할 뿐더러, 계속되는 들쭉날쭉한 경기력으로 9월 25일 현재 리그 3위로 추락.
9월 13일 연임 확정 기사가 떴다. 3년 연속 우승실패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개근 실패라는 성적표를 찍고도 연임을 결정한데는 젊은 선수를 발굴해냈다는 이유.
그러나 10월 3일 본인 스스로 시즌이 끝나면 감독직을 내려놓겠다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 성적 부진 그리고 감독이 원하는 선수 대신 다른 선수들을 영입하는 등 프런트의 지원이 다카하시의 구상과 엇나간 것이 감독 사임을 결정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후임 감독으로는 하라 다쓰노리가 물망에 오르고 있으며, 지휘봉을 잡게 되면 한 팀에서만 3번째 감독 취임이다.
어찌 되었든 팀이 2년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게 되어 퇴임은 며칠 연장되었고 2위 야쿠르트와의 클라이막스시리즈 퍼스트스테이지에서 하극상을 일으켜 파이널스테이지에 진출했으나, 역시나 천적 히로시마에 그대로 셧아웃당해 바로 광탈했다. 그리고 그대로 물러났다.
10월 23일 하라 다쓰노리가 3번째 감독에 취임했고 요시노부는 특별고문에 임명되어 둘이 역할을 맞바꿨다.
5.4. 총평
워낙에 3년동안 요미우리답지 않은 성적을 올린데다 포스트시즌에 시원찮은 모습을 보인 부분 때문에 임기 중에는 구단 역대 최악의 감독 중 하나가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물론 구단으로부터 선수 영입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에 비하면 시원찮은 성적이지만, 그래도 역대 교진 감독 중 유일하게 임기 통산 승률 5할도 못넘은 호리우치 츠네오와 동급으로 까이는 건 좀 가혹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궁창 같은 본인의 성격 문제로 선수단 장악에 실패해서 선수들에게 조차 무시당하던 호리우치와는 달리 다카하시는 선수들과의 관계, 특히 팀을 이끌어가는 주축들과의 관계는 원만하게 이끌어나간 편이다. 게다가 호리우치는 그만 둔다고 했을 때 다들 반응이 "잘 그만뒀다"라는 반응인 반면 다카하시는 이런 저런 전후 사정이 참작되어 동정론도 꽤 있는 편이다. 당장 본인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인 2018년 10월 9일 한신과의 경기가 적지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종료 후 좌익수쪽 스탠드를 메운 요미우리 팬들로부터 아쉬움이 담긴 "요시노부" 연호 세례를 받고 본인의 현역시절 응원가까지 불러주는 등의 대우를 받았다. 이상으로 볼 때 요미우리 역대 최악의 감독은 호리우치와 비교하는 것은 다카하시에게 너무 미안한 얘기인듯 하다. 여기에 하라 다쓰노리 항목에도 써져 있지만, 다카하시 본인이 감독하던 시절엔 프런트나 코칭스탭들도 자기에게 호의적이라고 보기 힘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직 나이도 1975년생으로 젊은 편이기 때문에 역대 선배감독들이 그랬듯이 언제든지 감독으로 복귀할 확률이 높다.[27]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순혈주의로 인해 감독 후보를 구하기가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기 때문.[28]
본인도 이후 타 팀 코치로 가지 않고 해설을 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현장을 떠나서 야구를 넓은 시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성공하는 지도자의 케이스도 많은 만큼 아직은 기대를 받고 있는 편이다.
5.5.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정규시즌 | 포스트시즌 |
2016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43 | 71 | 69 | 3 | .507 | 리그 2위 | CS1 탈락 |
2017 | 143 | 72 | 68 | 3 | .514 | 리그 4위 | - | |
2018 | 143 | 67 | 71 | 5 | .486 | 리그 3위 | CS2 탈락 | |
총계 | 429 | 210 | 208 | 11 | .502 | 1CS1 1CS2 |
지금까지 감독 행적만 보면 되게 못한 거 같은데 어쨌든 승률 5할은 넘었고(...) A클래스도 두번 기록했다. 심지어 3년간 승률은 2016~17시즌 명장으로 칭송받았던 알렉스 라미레스보다도 높다. 물론 자이언츠에서 저 승률 올리는거랑 베이스타즈에서 저 승률올리는게 같은 선상에서 평가될 수 있는게 아니기도 하고, 끽해봐야 고작 2승차이다.(...)
6. 기타
- 현역 시절에는 나름 준수했던 외모 덕분에 여성 팬들이 많았던 선수이기도 했다. 커리어 초창기 때만 해도 잡지 표지모델로 나왔을 정도로 정말 잘 생긴 얼굴을 뽐냈고, 30대 중반부터 얼굴에 살이 붙으면서 후덕해지긴 했으나 현재도 호감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현역 초창기 때의 사진 |
* 현역 은퇴를 하자마자 곧바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감독직에 올라서 그런지, 동년배 나이대에 현역 선수들이 아직도 몇 있는 편이다. 당장 같은 센트럴리그 주니치 드래곤즈의 1974년생 이와세 히토키보다 1살 어리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구로다 히로키와 1975년생 동갑이다.[29] 또한 이웃 퍼시픽리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마쓰이 가즈오 플레잉코치와도 1975년생 동갑. 옆 나라 KBO 리그의 1974년생인 이병규, 최영필보다도 한 살이 어리고, 조인성, 손민한과는 1975년생으로 동갑내기이며,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1976년생 이승엽보다 1살 많으며 앞의 이들이 대부분 은퇴한 2018년 현재 KBO 리그 최고령
- 타카하시가 지휘봉을 놓은 2018년까지 거인군이 도쿄 돔 입주 이 후 세 차례[30] 원정팀 감독의 헹가래를 허용했는데, 세 차례 모두 현장에서 굴욕적인 장면을 목격한 흑역사가 있다.
-
한국에서는
이순철의 아들
이성곤이 요시노부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자신의
등번호로 요시노부의 현역 시절[31]과 동일한 24번을 택했다는 사연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1997년 시즌에 피홈런 0개를 기록했던 선동열을 상대로, 그 이듬해인 1998년에 시즌 첫 피홈런을 뽑아낸 타자가 당시 신인이었던 타카하시 요시노부이다.[32]
- 임창용이 일본프로야구 데뷔 후 첫 세이브[33]를 기록했던 경기에서,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상대로 삼진잡는 순간의 구속이 157km가 찍혀 당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참고로 임창용은 그 전에도 타카하시와 대결한 적이 있다. 바로 2003년 11월 삿포로 돔에서 열린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 때로, 당시에도 임창용은 타카하시를 상대로 150km를 뿌려, 중계해설을 맡았던 하일성 해설위원이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34]
- 프로입단 후에도 종종 국가대표로 발탁되었지만, 항상 4강에서 탈락하는 징크스가 있다. 2001년 대만 야구 월드컵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모두 4강에 머물렀다. 특히 금메달이 유력했던 아테네 올림픽 당시, 4강에서 호주의 크리스 옥스프링과 제프 윌리엄스[35]의 계투에 말려 0대1 패배를 한 건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36]
* WBC 국가대표로 발탁된 적이 한번도 없다.
시구식 영상
- 일본 인터넷상에서 도는 정보에 의하면 요미우리 입단 전에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팬이었다고 하며, 아버지의 빚 때문에 요미우리에 입단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 때문에 이를 믿는 요미우리 안티들로부터도 타카하시의 야구인생은 '불운전설'이라고 불리며 동정받는다. 어디까지나 루머라 진담반 농담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 요미우리 입단 전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한 기사가 있기 때문에 , 그저 진담반 농담반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7. 관련 문서
[1]
법학부 정치학과.
[역지명]
[3]
선수 겸임.
[CD판]
ドームの芝に映える顔 男背番号24 弾丸アーチをスタンドへ ぶち込め由伸 (돔의 잔디에 빛나는 얼굴 남자의 등번호 24 총알같은 아치를 스탠드에 그래 날려라 요시노부)
[~2007]
戦う男のフィールドに 燃える男の24 弾丸アーチをスタンドへ それぶち込め由伸 (싸우는 사나이의 필드에 불타는 사내의 24 총알같은 아치를 스탠드에 그래 날려라 요시노부)
[2008~]
フィールドセンスを見せつける 男背番号24 弾丸アーチをスタンドへ それぶち込め由伸 (필드 센스를 보여줘 사나이 등번호 24 총알같은 아치를 스탠드에 그래 날려라 요시노부)
[7]
전에는 최연소라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인 최연소는
나가시마 시게오이다. 36년생인 그는 1974년 은퇴 뒤 1975년에 바로 감독에 부임하였다.그리고 6위행
[8]
하지만 진짜 유명해진 계기는
이승엽과 클린업을 이루면서다.
[9]
요시노부와 함께
한신 타이거즈의
츠보이 토모치카(.327 2홈런 21타점),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코바야시 칸에이(9승 6패 18세이브 2.87)도 특별 표창을 받았다.
[10]
첫회 선두타자 홈런 일본 기록이다.
[11]
주니치는 전년도에 이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일본시리즈 리턴매치를 성사시켰고, 최종전에서의 야마이 다이스케-
이와세 히토키 합작
퍼펙트 게임이란 논란에도 불구하고 팀 역사상 두 번째,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성공한다.
[12]
그 와중에 1경기에 대타로 출전해 삼진을 당했고 다시는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2009년 다카하시의 연간 성적은 1경기 출전 1타수 무안타 1삼진 타율 .000이다.
[13]
다만 1번으로 주로 기용되었던 2007년에는 출루와 장타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4할 출루율을 달성하기도 했다. 타카하시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서 규정타석 출루율 4할을 달성한건 2007년 한 해가 유일하다.
[14]
나머지
외야수 출신이 아닌 감독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주니치 드래곤즈의
포수 출신 감독
다니시게 모토노부.근데 성적부진으로 도중사퇴
[15]
대표적인 장면이 1차전 8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요코하마 수비진이 완벽한 2루 견제를 했는데도 심판이 세잎, 아웃은 커녕 아예 판정을 안해버린 사건. 잘 보면 2루심이 못본게 아니라 보고 나서 은근 슬쩍 고개를 돌려서 못본 척 한다(...)
[16]
히로시마가 너무 씹어먹어서 그렇다고 변명하고 싶어도, 올해
파리그
DTD 역전우승팀과
DTD 역전준우승팀 승률이 둘다 6할이었다(...) 게다가
3위도 5할을 찍은지라(...)
[17]
특히나 퍼스트 스테이지 패배가 결정된 3차전.
12회 초까지만 버티면 승리이거늘 연장 11회 초에 결승점 1점을 내주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18]
보상선수는 DeNA에 타이라 켄타로 단 한명만 내줬다. 모리후쿠는 C급으로 보상이 없다.
[19]
오 사다하루는 한술 더떠서 1984년 시즌때
야마우치 가즈히로의 주니치에게 14연패나 당하면서 주니치전용 호구로 전락시켜 버렸다. 심지어 주니치는 실책1위였는데 그런팀 상대로 14연패를 당했으니 흠좀무.
[20]
물론 그렇긴해도 감독이란 위치에서 경기내용이 좋지 않으면 불쾌한 모습을 보여서 선수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일인데 그런것도 없다면 문제가 없다고 하기 어렵다.
[21]
그 중 한번은 9회 2사때 카미네로가 구와하라한테 역전 만루홈런을 맞고 무너졌고, 다른한번은 FA로 DeNA에서 교진에 온
야마구치 슌을 선발로 내세웠으나 친정팀 팬들의 거센 야유를 받음과 동시에 친정팀 타선에게 초반부터 개털리며 4이닝 6실점으로 폭망했다.
[22]
벌금, 감봉까지 포함. 최악의 경우 방출도 고려중이라고 전해졌다. 지난 2015시즌에 몇몇 선수들의 도박 가담혐의가 잇따라 발각된 후 재발방지를 위해 구단이 온갖 노력을 다하는중이라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23]
다만 승수도 72승이고, 승률도 0.514여서 승/무/패로 보면 떨어진 건 아니다. 거기다가 히로시마를 제외하면 센트럴리그 나머지 구단을 상대로는 모두 흑자를 냈다. 다만 히로시마, 한신, 요코하마 DeNA가 하위 팀들을 뼛속까지 털어먹었고, 교류전에서도 선전했으나, 거인은 교류전에서의 13연패와 히로시마에게 7승 18패로 영혼까지 탈탈 털린 것이 발목을 잡았다.
교류전 폐지가
시급합니다
[24]
다른 한명은 당연히 에이스인 키쿠치 유세이
[25]
그러나 보상선수로 타카기 하야토를 내줘서 팬들사이에 논란이 되고있다. 물론 데뷔 첫해 반짝이지만 나름 요미우리 선발진의 기대주였었고 과거처럼 팀전력이 두텁지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노가미가 세이부시절의 초중량타선빨을 받은만큼의 성적을 낼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우려했던대로 결국...
[26]
게다가 마이콜라스는 카디널스로 이적 후 현재까지 무패행진으로 에이스급 활약중이다(...)
[27]
당장에 그 순수혈통주의 때문에
아베 신노스케 정도를 빼면 경쟁자도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아베는 2군 감독 부임 이후 지나친 올드스쿨 야구관과 구시대적인 근성론 등으로 2군 선수단을 가혹하게 굴리는 탓에 순혈주의 이전에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적합한지부터 따져야 할 판. 카메이 요시유키는 일단 순혈이긴 하지만 커리어가 역대 감독들에 비하면 빈약한 편이라 스타플레이어 위주로 부임한 역대 감독들을 감안했을땐 우선순위가 확실히 뒤로 밀리고
사카모토 하야토와
스가노 토모유키는 노쇠화를 걱정할 나이가 되긴 했지만 은퇴할 수준까지 기량이 떨어지려면 최소 몇 년은 남아있다.
오카모토 카즈마 같은 신진급 선수들이 후보로 거론되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문제는 사카모토가 심한 불륜 스캔들과 가학적 성행위 요구까지 터져서 똥꼬모토로 멸칭을 당할 정도가 되어 버려서...
[28]
다만 엄청나게 어려운 건 아니고 놀랍게도 경쟁이 붙긴 붙는다. 평범한 주전 정도의 선수까지만 눈을 낮춰도 순수혈통 선수가 생각보다 많은 판인데 정말로 감독후보가 없으면 왜 이런 평범한 주전급 선수들은 쳐다보지도 않겠는가?
[29]
다만 구로다는 75년 1월생이라 빠른 생일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구로다가 다카하시보다 한살 더 많다. 실제로 같은 대졸이지만 프로 데뷔도 구로다가 1년 먼저 했다.
[30]
1회: 2006년 10월 10일 주니치의 센트럴 리그 우승/2회: 2008년 11월 9일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우승/3회: 2016년 9월 10일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
[31]
여담으로 이성곤과 요시노부 2명 다
우투좌타의
외야수이다.
[32]
1998년 4월 14일
도쿄돔.
[33]
2008년 3월 30일
진구구장.
[34]
150km 직구로 투스트라이크를 잡고, 그 다음에는 변화구를 결정구로 쓰면서 삼진을 완성했다.
[35]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좌완 필승조이기도 했다.
[36]
이후 동메달결정전에서 캐나다에 승리하며
동메달 획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