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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수의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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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서 (1982~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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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수 (199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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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수 孫京洙 | Son Kyung s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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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3년 |
사망 | 2016년 (향년 42~43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방배초 - 경원중 - 경기고 - 홍익대 (중퇴) |
신체 | 185cm, 85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92년 1차 지명 ( OB) |
소속팀 | OB 베어스 (199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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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OB 베어스 소속 투수이다.2. 선수 경력
임선동, 조성민과 함께 73년생, 또는 92학번 투수 트로이카로 불리던 선수이다. 1973년, 혹은 일부 1974년 빠른 생일 포함에는 한국야구 역사를 빛낸 스타들이 여럿 탄생했는데, 이들의 이름만 적어봐도 박찬호[1], 조성민, 임선동, 박재홍, 차명주, 설종진, 최원호,다만 조성민, 임선동을 강타한 1991년 스카우트 파동을 그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KBO리그에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제도가 존재했는데,[3] 연고지 출신 고졸 선수는 별도 지명 절차 없이 자유계약으로 입단시킬 수 있었다.[4] 이 해 서울권 대졸 선수 중에는 확실한 1차지명 후보가 없었던 터라[5] 당해 1차지명 1순위 픽을 가졌던 LG 입장에서는 일단 최대어인 임선동 또는 조성민을 지명하고, 2순위였던 OB가 나머지 한 명을 지명하면, 손경수까지도 경쟁을 통해 데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고 실제로 LG가 임선동을 지명하자 2순위였던 OB입장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손경수와 임선동은 고졸 입단 가능성이 남아있었고 조성민은 애초에 고려대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조성민을 지명했다가 대학에 가버리면 LG는 1차급 두 명, OB는 빈 손이 되는 최악의 상황도 가능했던 것. 그래서 리스크를 감수하느니 그냥 손경수를 지명하기로 한 것.
그렇게 OB베어스로부터 1차 지명을 받은 것은 좋았는데, 정작 그 역시 OB에 입단하지 않고 홍익대학교로 가 버렸다.
손경수는 기량은 쓸만했지만, 술을 좋아하고 숙소 무단이탈을 자주하여 팀 분위기를 망치는 등 인성과 자기관리 면에서 문제가 많았고,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에는 그래도 국제대회에도 나서는 등 괜찮은 활약을 펼쳤지만, 2학년이 되고부터는 잦은 개인 문제를 일으키며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애초에 숙소 이탈을 2~3일마다 한번씩 할만큼 거의 남용 수준으로 하여, 야구 경기 자체를 못 나갈 상황을 만들어댔기 때문이다. 이후 부친의 교통사고와 맞물려 집안 사정이 더욱 심각해지자[6] 어쩔 수 없이 홍대를 중퇴하고 OB에 입단했다. 이 때가 1993년 12월. 계약금 7800만원, 연봉 1200만원의 조건으로 그의 고교시절 명성을 감안하면 평범한 계약이었지만 손경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도 프로행에는 성공했으니 OB에서 마음을 다잡고 기량을 갈고 닦았으면 기회가 남아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원래 평이 좋지 않았던 인성이나 자기 관리가 다시 한 번 그의 발목을 잡고 만다. 과도한 음주를 반복하여 고작 20대 초반 나이에 간염이 찾아온 것. 그리고 교통사고로 몸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끝내 추가적인 수술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홍대시절에 범했던 팀 이탈 및 과도한 음주 등의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고 만다. 결국 1군 데뷔조차 하지 못하고 1995년 말 임의탈퇴로 팀을 떠난 뒤 다시는 프로야구 무대에 돌아오지 못했다.
3. 은퇴 이후
임의탈퇴 3년 후인 1998년 두산 사무실에 나타나 "다시 야구를 하겠다" 라고 말하며 입단 테스트를 요청했지만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일단 두산(구 OB) 입장에서는 딱히 수요가 없는 공급이었으니[7] 과거에 없던 특별한 능력치를 새로 만들어낸게 아닌 이상 합격시켰을 리가 없다.이후 자영업 등을 하면서 지역 리틀야구팀에서 인스트럭터, 즉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일을 간혹 하기도 했으나 2016년 결국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배를 탔다거나 운수업에 종사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박동희가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성한 글에서 나온 얘기로 보인다. 하지만 김현희의 기사에도 막노동판에서 그가 과거 야구선수 시절 사진을 보여주고 다니면서 막노동을 했다는 취재 내용이 나오고 리틀야구팀에서 있을 때 팀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도 육체노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말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기에,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볼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3.1. 사망
2016년, 간경변으로 사망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185cm/85kg이라는 2020년대 기준으로 봐도 좋은 하드웨어와 140km대 후반까지 나오던 구속 등 야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는 소질을 타고났지만 가정사 불운과 자기관리 실패로 소리없이 사라진 비운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5. 여담
6. 관련 문서
[1]
대학시절에는 손경수를 누르고 기존의 임선동, 조성민과 함께 빅3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2]
정민철은 이들과 고등학교 졸업 시기만 같은 뿐 공통점이 없어 이 그룹에 넣기 어렵다.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아 92학번도 아닐 뿐더러, 충남중 시절 1년 유급해서 이들보다 한 살 많기 때문이다.
[3]
이후 도입되는 고졸 우선지명과는 다른 것이다.
[4]
대신 입단 교섭 기간을 11월 1일 ~ 15일로 제한했다.
[5]
동봉철,
차명석,
임수혁, 박철홍 등이 있었지만 1차지명감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6]
하지만 이것 역시 순수히 손경수가 불운한 상황의 피해자라고 보기 어려운게 부친의 부상 이전 태도도 불량했고, 부상당한 부친의 건강상태를 악화시킨게 본인이기 때문이다. 취재기사 중에는 당시 홍익대 감독이었던 야구인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부친이 교통사고 나기 전에도 숙소 무단이탈이 많아서 감독이 부친에게 전화로 문의한적이 많았으며, 교통사고 나서 부친이 입원한 이후에도 숙소이탈이 계속 반복되어 어쩔수 없이 부친에게 전화하면서 부친도 스트레스를 받아 부상회복은 커녕 악화가 되었다는 증언이었다. 이정도면 부친의 사고로 불행이 찾아왔다고 불행을 탓할만한 자격이 안 된다. 부친이 다치시기 전에도 본인이 술마시러 간다고 이탈해놓고 무슨 사고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해?
[7]
고교시절에 다 협상해놓고도 뒷통수치고 대학 간 것부터 이미지가 안 좋은데, 대학시절부터 음주나 이탈로 단체생활에 문제를 비일비재하게 일으킨 것도 뻔히 알고 있었고, 프로에 와서도 대학때 들은 정보와 똑같이 무단 이탈과 과도한 음주를 반복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에서 경기를 나간 적도 없고, 쌓은 업적도 전혀 없기에 기대할 기대치도 없었다. 고교시절을 가지고 자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고. 괜히 뽑았다가 다른 선수들에게 술의 유혹이나 일으킬 수 있다는 걱정밖에 안드는 인물이 되었다. 뭘로 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