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2:01:21

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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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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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0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51번}}}
몬나 테츠히로
(1993~1995)
조성민
(1996~1997)
에노키 야스히로
(1998~1999)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21번}}}
미야모토 카즈토모
(1991~1997)
조성민
(1998~2002)
기사누키 히로시
(2003~2006)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99번}}}
김영덕
(1993)
조성민
(2005)
류현진
(2006~2012)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1번}}}
고지행
(2005)
조성민
(2006~2007)
조규수
(2008~2009)
두산 베어스 등번호 86번
결번 조성민
(2011~2012)
송일수
(2013~2014)
}}} ||
파일:5600296D-EC66-4444-88C3-BBDE69A57468.jpg
조성민
趙成珉 | Cho Seong Min
출생 1973년 4월 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중곡동
(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사망 2013년 1월 6일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장지 경기도 광주시 신현동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한양 조씨[1]
학력 용마초등학교 (전학)
서울둔촌초등학교 (졸업)
신일중학교 (졸업)
신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 경영학 / 학사)
신체 194cm, 110kg, 295mm, A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6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요미우리)
2005년 신고선수 ( 한화)[2]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2002)
한화 이글스 (2005~2007)
지도자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1)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2)
해설위원 XTM 야구 해설위원
병역 제2국민역[3]
종교 천주교( 세례명: 마리오)[4]
가족 아버지 조주형 (1947년생)[5], 어머니 유영숙, 누나 조성미
배우자 최진실 (2000년 결혼, 2004년 이혼)
심모 씨(2005년 결혼, 2010년 이혼)[6]
자녀[7] 아들 최환희, 딸 최준희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1.1. 국가대표 경력
2.2. 프로 경력2.3. 연도별 주요 성적
3. 플레이 스타일4. 해설자 경력5. 지도자 경력6. 방송 출연7. 결혼
7.1. 첫 번째 결혼7.2. 두 번째 결혼
8. 말년9. 사망10. 여담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였다.

신일고 재학 시절부터 뛰어난 야구 실력과 탈동양급 신체 조건 및 준수한 외모로 주목 받았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후 자기관리 부족과 부상으로 인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2000년 당대의 인기 여배우 최진실과 결혼했으나 4년만인 2004년 이혼했고, 최진실을 상대로 언론플레이 가정폭력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 받았다.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나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지 못해 2007년 퇴단했고, 2008년 전처 최진실의 자살 후 자녀들에 대한 친권 주장으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후 두산 베어스 코치 등으로 활동했으나 끝내 재기에 성공하지 못한 채 2013년 1월 6일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때 가족이 연천군 화진초등학교에서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사하며 조성민도 둔촌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 때부터 야구부 생활을 시작. 훗날 194cm까지 자라는 체격[8]은 이미 이 때부터 운동부가 눈독을 들일 정도였고, 한창 때 운동선수로 활약한데다 한때 실업야구 최강을 자랑했던 한일은행 소속 은행 간부였던 아버지 조주형의 인맥 덕에 야구인들에게 일찌감치 눈에 띌 수 있었다. 게다가 누나 역시 사이클 선수로 활약하는 등 엘리트 운동선수 집안 출신.

다만 평소 학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에도 힘을 쏟느라 신일고 진학 이전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이후 고교 진학을 앞두고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타격왕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에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89년, 신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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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3010602390001300_P2.jpg
신일고 시절 조성민.

신체조건은 이미 완성단계였기에 타격에는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으나 투구에서는 신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잘 몰라 2학년때까지만 해도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프시즌 우연한 기회에 장명부, 신용균 등 우수한 인스트럭터의 도움을 받으며 갑자기 속구 구속이 150km에 이르고 변화구 각이 예리해지는 등 큰 폭으로 기량이 상승했다. 야구팬들에게 각인된 190cm 대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150km대의 일품 강속구 이미지는 이 때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량향상을 기반으로 3학년이던 1991년 전국 최고의 고교 투수 중 한 명으로 맹위를 떨쳤다.

이 때 조성민 본인은 휘문고 임선동을 유일한 라이벌로 여겼고, 실제로 1991년 봉황기 8강에서 둘은 선발 맞대결을 벌여 신일고가 4:1로 이긴 적도 있다. (1실점은 임선동에게 맞은 홈런.)

당시 임선동-조성민을 뒤쫓는 넘버3으로 경기고 손경수가 있었다. 당시 야구인들과 팬들은 임-조-손 세 명을 서울지역 고교생 '투수 트로이카'라고 불렀으며, 그 뒤를 박찬호,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최원호, 박재홍[9] 등이 쫓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조성민 본인은 92년 드래프트에서 최상위 지명을 받을 것을 예상했는데, 그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서울권 1차 지명[10]에서 선지명 권리가 있었던 LG는 임선동을 선택하고, 이어서 OB는 손경수를 선택해버린 것.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임선동과 손경수는 프로 직행을 고려하고 있었기에 지명권을 날릴 염려가 적었다는 것. 반면 조성민은 대학에 먼저 가겠다는 의지가 컸고[11] 구단측에 이에 대한 간도 보지 않는 바람에, 지명권도 날리고 임선동 손경수를 모두 LG에 빼앗기는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기 싫었던 OB는 손경수라도 미리 건지려는 지명을 했던 것이다. 한 팀이 빅 3중에 두 명이나 데려갈 수 있다는 부분은 현행 기준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KBO 신인 드래프트 항목에 의하면 1991년 당시에는 고졸 연고 자유계약 제도가 있었다.[12] 여기에 의하면, 1995년 신인드래프트까지는 연고지 출신 미지명 고졸 선수는 무제한 자유계약이 가능했다. 따라서 LG가 임선동을 지명하고 OB가 조성민을 지명했을 경우 손경수에 대해선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일어났을 것이고, 만약 여기서 OB가 지고 조성민마저 대학에 가버리면 손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구조가 이러했기 때문에 OB가 1순위였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으며, 이후에도 비슷한 파동이 여러 번 발생하자 KBO에선 고졸 연고 자유계약을 아예 폐지해버리고 1996년부터 고졸 우선지명 제도로 바꾸게 된다.

조성민 입장에선 일단 고졸 연고 자유계약이 하필 이 때부터 시작됐다는게 불운했고, 본인이 간을 보지 않고 정직하게 대학행을 노린 것도 좋지 않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래도 4년뒤에 다시 승부하면 그만인 일이었는데, 라이벌에게 뒤쳐진 것은 물론이고 본인보다 못하다고 평가받던 선수에게 밀려 1차 지명을 받지 못하자 굉장히 자존심 상해했다는 후문이다. 본 문서 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유난히 그는 인생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좋지 못한 선택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부터 이미 그런 조짐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임선동은 몰라도 손경수는 이미 임선동이 LG에 지명된 상황에서 충분히 OB가 먼저 지명할 만한 (기량 이외의) 이유가 있었는데도 명분에 더 집중했던 것. 대학에 가버려 지명권을 날릴 게 뻔한 선수를 구단이 그냥 지명해주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가 확실한 입단 의사를 표명했으면 결과는 달랐을 확률이 높았다.

어쨌든 정작 이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빅3은 전부 대학에 진학했다. 임선동은 연세대로, 조성민은 고려대로, 손경수는 홍익대로 각각 진학했다. 당시 선수들에게 대학 진학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고교시절 말미에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고교야구 선수권 대회에 그도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는 몸이 좋지 않은 임선동 대신 박찬호의 출장 기회가 늘어났고 조성민도 나름대로 활약했지만 스카우트들의 시선은 가장 빠른 볼을 던진 박찬호에게 가 있었다.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었던 셈이다.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13][14] 중 하나였다.[15]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최남수[16]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안타깝게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고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

졸업반 시절인 1995년 9월에는 라이벌 임선동 고연전에서 맞대결하지만 패전투수가 되기도 한다. 영상.

2.1.1. 국가대표 경력

1993년 3월 호주 퍼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 예선 북한전 구원등판. 기사.

1994년 8월 니카라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
  • 예선 캐나다전 구원등판 6이닝 무실점 11탈삼진 승리투수. 기사1. 기사2.
  • 예선 푸에르토리코전 선발등판 승리투수. 기사.
  • 예선 미국전 구원등판 패전투수. 기사.
  • 예선 이탈리아전 구원등판. 기사.
  • 결승 쿠바전 선발등판 패전투수. 기사.

1994년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 결승 일본전 구원등판 패전투수.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 예선 쿠바전 선발등판 7이닝 2실점 패전투수. 기사.
  • 결승 쿠바전 구원등판. 기사.

1995년 9월 일본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2.2. 프로 경력

학창시절의 국제대회 활약으로 슬슬 해외진출 분위기가 무르익게 된다. 고교 때 이미 국제대회 출전 기회를 가져 해외에 이름을 알린 것에 더해, 대학 재학중에도 미국 버팔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1993년) 대표팀에 선발되어 박찬호와 함께 인상깊은 활약을 펼쳤다. 압도적인 강속구를 가진 박찬호에 비해서는 평가가 낮았지만 조성민 역시 메이저리그 일부 팀들의 관심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고, 이중에는 몇 년 후 봉중근을 영입하게 되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과거 최동원에게 입단계약을 제시하고 훗날 류현진을 통해 결국 한국 선수를 품에 안은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있었다. 기사. 교차검증하기 전에는 확신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 거론된 계약금이 무려 100만 달러 수준으로 박찬호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때 링크가 났다는 토론토로 진출했으면 박찬호와 함께 사이좋게 메이저리그에서 롱런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웬일인지 그는 이 선택을 하지 않고 그냥 대학을 졸업해 버렸고 미국에도 가지 않았다. 나중에 밝힌 바로는 자신보다 평이 낮았던 선수가 먼저 미국에서 활약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만일을 위해 대학 졸업장을 확보하려는 의지도 있었고, 1호를 빼앗긴 미국무대보다는 일본 요미우리같은 명문팀에서 성공하면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 아니냐는 계산도 있었다. 그래서 요미우리로 진출했고, 요미우리에서는 계약금 1억 5천만엔이라는 거금이자 박찬호의 계약금(120만 달러)과 엇비슷한 액수를 맞춰주며 자존심은 세워주었지만 계약 기간이 무려 8년이었다. 당시의 조성민이 미리 알기는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 요미우리행도, 그리고 8년이나 되는 긴 계약기간도 결국 썩 좋지 않은 선택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고교 졸업당시 미지명된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 별다른 분쟁 없이 일본 무대에 진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 때가 대학 졸업반이었던 1995년 가을이다.

1993년~95년 당시 조성민 스카우트 열풍을 다룬 기사들 요약.
비슷한 시기 라이벌 임선동은 과거 자신을 지명한 LG의 동의없이 다이에와 입단계약을 맺는 바람에 소위 '임선동 파동'을 일으키며 끝내 해외 진출에 실패했다.

2.2.1.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조성민은 1995년 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상술했듯이 8년이라는 장기 계약이었는데, 이에 대한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 8년짜리 계약은 2020년 기준 아직도 NPB 역대 최장 계약기간 2위 기록[17]으로 남아 있는데, 일본인 FA 장기계약자 중에서도 7년을 넘어가는 선수가 한 명도 없다는 걸 고려하면 꽤나 이례적인 계약. 2019년 야나기타 유키나 2020년 야마다 테츠토같은 유명 선수들이 원 소속팀과 7년 계약을 맺자 새삼스럽게 조성민의 장기계약 사례가 다시 소환되었을 정도였다.

다만 1억 5천만엔이라는 거액의 계약금과는 별개로 연봉 자체는 드래프트 상위 선수들이 받는 상한금액 수준인 1200만엔으로 꽤나 저렴했는데, 일본프로야구에선 알레한드로 메히아(6년이었으나 부진한 성적 때문에 5년차에 계약해지), 재비어 바티스타(6년이었으나 금지약물로 3년차에 계약해지), 리반 모이넬로(5년), 카터 스튜어트 (7년)와 같은 육성형 외국인 선수들을 5년 이상의 장기계약으로 잡아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조성민의 8년 계약도 한국에서의 유망주 시절의 활약을 토대로 주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장기간 육성 계획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등번호는 1996~97년엔 51번을 사용했으며, 이후 퇴단할 때까지 21번을 유지했다.[18] 유니폼 등록명으로는 각각 CHOS.M.CHO를 사용하였다.
파일:external/static.news.zum.com/2013010600193_1.jpg
1997년의 조성민과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오른쪽)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요미우리는 선수 관리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구단이 아니었던 데다[19][20]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 했고, 결국 입단 첫 해인 1996년에는 2군에서만 머물렀다.

1997년 7월에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고, 7월 5일 한신 타이거스 전에서 8회 말에 등판하여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중간계투와 중무리를 오가면서 1구원승 11세이브[21], ERA 2.89를 기록했고, 센트럴리그 소속인 덕에 타석에도 나와서 안타, 타점까지 기록하는 나쁘지 않은 데뷔 시즌을 보냈다.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완봉과 완투를 곁들여가며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는 등 물오른 기량을 과시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올스타 멤버로도 선발되었다. 타석에서도 투수치곤 상당히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며 3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가 그의 커리어 정점. 이 해는 마침 선동열이 주니치에서 철벽 마무리로 완벽하게 자리잡고, 박찬호도 다저스에서 3점대 ERA와 15승을 찍는 전성기 시절이었기에 한국 스포츠 언론에서 해외파 3인방으로 매일 대서특필했다. 선동열, 조성민, 박찬호가 동시에 세이브와 승리를 올린 날도 있었는데, 이런 날은 야구팬들의 화제가 하루종일 고정될 정도였다. 야구선수로서 본인이 구상했던 위치와 가장 근접한 것도 이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1998년 드디어 기량이 만개하는가 싶었지만, 선수로서 정점에 섰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인생 최대의 불운이자 커리어를 망쳐버린 팔꿈치 부상이 찾아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상 시점은 올스타전이지만, 사실 전반기 마지막 두 경기에서 대량 실점하며 이미 부진에 빠진 상태였고 그 원인이 바로 팔꿈치 부상이었다. 이런 경우 나가시마 감독이 출전을 만류했어야 했는데 웬일인지 그냥 놔둬 버렸다. 대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올스타전 센트럴리그 팀 투수코치인 곤도 히로시(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감독)에게 알리라고 조성민에게 조언은 했다는데, 뚜렷한 이상징후가 있었다면 올스타전에 아예 내보내지 않는 것이 당연히 맞는 선택이다. 당시 팬투표로 뽑힌 것도 아니고 감독 추천 선수였으니 더욱 아쉬운 일이다.

조성민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등판 당시 팔도 못 들 정도로 팔꿈치가 아프니 교체시켜 달라고 직접 일본어로 곤도 히로시에게 호소했으나 "이 녀석 갑자기 무슨 얘길 하는 거야"면서 무시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극심한 팔꿈치 통증에도 불구하고 8회부터 경기 종료 때까지 2이닝을 소화한 결과 몸에 제대로 탈이 나고 만다.

곤도 히로시에게 조성민이 한 호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곤도 자신이 혹사로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당사자이기에 투수 혹사를 가급적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 하지만 당시 조성민이 부상을 당하고 요미우리가 즉시 항의한 점, 요미우리와 요코하마가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중이던 점, 당시는 9회였고 엔트리에 전문 마무리 사사키 가즈히로가 멀쩡히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사키가 당시 요코하마 소속이었다는 점 등을 보면 사실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해당 시즌 센트럴리그는 요코하마가 우승했고 일본 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했다! 요미우리는 조성민 이탈 이후 DTD를 펼치며 3위를 기록했다. 이후 곤도는 우승에 눈이 멀어 상대팀 에이스를 망가뜨렸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도 당시에도 이미 토미 존 수술은 대중화되어 있었기에[22] 제 때 수술을 받고 재활만 착실히 잘 했으면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성민은 이렇게 하지 않았고 잘못된 선택을 잇따라 하게 된다.

일단 올스타전 사건 이후 바로 수술대에 오르지 않고 이듬해 3월까지 기다렸다가 뒤늦게 수술을 결정했다. 이제 막 처음으로 잘 나가보려는 참에 부상을 당했으니 재활을 통해 일단 시즌 마무리는 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생각보다 팔꿈치 상태가 심각하여 수술 없는 재활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더 미루지 않고 1999년 초에 수술을 받은 것까진 좋았는데, 이번엔 복귀를 너무 서두르다가 탈이 났고 재활도 그만큼 늦어졌다. 그래도 팔팔한 20대 시절이었으니 이듬해에 복귀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2000년에는 배우 최진실과의 열애설이 터지며 컨디션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발목부상, 어깨 부상까지 추가로 당하며 14이닝 투구에 그친다. 코칭스태프의 신임을 잃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즈음. 이 당시 조성민 외에 정민철 정민태가 차례대로 요미우리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투수 3명끼리 1군 외국인 선수 T/O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됐다. 정민철은 정민태의 입단에 긍정적이었던 반면 조성민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

조성민은 이렇게 컨디션이 별로이니 주어진 보직도 왔다갔다했는데, 부진한 선수를 무작정 고정 보직에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2001년 시즌에는 절치부심하고 강도높은 훈련을 소화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이번에는 다시 팔꿈치 통증이 재발했고, 이 번에는 시즌 후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수술을 받긴 했다. 그러나 또 다시 무리하게 빠른 재활을 시도하면서 완전히 구위를 잃게 된다. 이후 2002년 시즌 초 극적으로 1군에 콜업돼 선발승도 거두는 등 몇 경기에 더 나서긴 했지만 이미 속구 최고 구속이 140대 초반에 머무는 등 본인의 경쟁력을 거의 다 상실한 상태였다. 결국 2002년 10월 구단과의 합의하에 퇴단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자유의 몸으로 귀국하며 인생 3라운드를 노리게 된다.

2.2.2. 공백기

조성민은 한국 복귀 후에도 야구선수로 계속 활약하기를 원했다. 본인의 회고로는 이 당시 미국 무대에 가고 싶었다고 하며, 퇴단 이후 미국에서 재활에 전념하고 싶다는 인터뷰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미 틀어지기 시작한 사생활 문제탓인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일단 규정상으론 조성민은 1999년 이전에 해외로 건너간 케이스라서 '한국 리그를 거치지 않고 해외 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국내로 돌아올 경우 2년간의 유예기간이 적용되어 국내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은데다가, 고교 및 대학시절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은 적도 없어서 표면적으로는 리턴 후 곧바로 한국에서 뛰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팀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고교졸업 당시 연고팀이던 LG와 두산의 1차 지명도 가능한 상황.[23] 그래서 본인은 내심 상위권 지명을 통해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화려하게 국내무대로 복귀하려던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는 이미 20대 초반의 팔팔하던 신인 선수가 아닌, 팔꿈치 수술만 두 번을 받고 경쟁력을 상실해버린 30대 초반의 전직 야구선수였다는 것이다. 이 상태의 조성민을 영입하기 위해 상위 지명권을 사용할 팀은 없었다. 또한 퇴단 합의시기가 늦어 복귀 이듬해 바로 뛸 수 없었다는 부분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2003년 드래프트는 2002년 6-7월에 완료되었다.) 게다가 이 시점은 이미 후술할 사생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뒤의 시점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좋았어도 공백기와 나이 때문에 상위 지명이 부담스러울 판에 기량 자체가 물음표인데다 사생활 문제까지 있는 선수를 지명권까지 써가며 영입할 팀은 없었다. 이 시기 1차지명이 연고지 문제로 없어진 현대 유니콘스가 조성민을 데려와 임선동과 같이 부활 시키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본인이 거절하기도 했다.

아무튼 2003년 4월에 조성민은 2004년 신인지명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1차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LG와 두산은 그를 외면하였고[24], 2차 지명에서도 참가했으나 1라운드에서 자신이 호명되지 않자 자리를 뜨고 만다. 자존심을 버리고 하위 지명이나 신고선수로 입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예 자리를 뜨는 방식으로 이를 거절해버린 것이다.

1년 뒤인 2004년, 즉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도 모든 구단에게서 외면받는 비슷한 모습을 반복했는데, 이때는 이미 후술할 명예훼손 시도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뒤였는데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라는 쓸데없는 발언을 해서 더더욱 까였다.[25]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 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국내 복귀를 결심했으면 착실히 몸을 만들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면 KBO 리그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리그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해볼 마지막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이후에는 개인 사업에 전념했다. 사실 선수 복귀가 불발됐다고 부랴부랴 급조한 사업은 아니고, 요미우리 소속이던 2002년에 부부의 성을 딴[26] "C&C 컴퍼니"를 세우며 이미 사업가 변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첫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던 시절 좋아했던 슈크림 브랜드 '비어드 파파'[27]를 국내에 보급하려 했고 실제로 한국 내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따낸 뒤 2002년 8월 목동에 1호점을 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신통치 않았고 법적 분쟁까지 겹치며 대차게 말아먹었다. 일단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 게 문제였고, 하술될 조성민의 막장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28] 참고로 해당 브랜드의 운영권은 2004년에 코오롱그룹 계열사 스위트밀이 넘겨받아 이후에도 곳곳에서 매장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5년에는 당시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영입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현역 복귀도 완전히 물건너가나 싶었지만, 당시 한화 경기를 중계하러 갔다가 만난 김인식(당시 한화 감독)의 권유로 한화 이글스 입단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잡는다.

2.2.3. 한화 이글스

전성기가 지나고 몸 상태도 말이 아니어서 별 기대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는 사생활 문제를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운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미약하나마 명예회복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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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5일, 한화 이글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당시 연봉은 5천만원. 7월 1일 1군 합류를 목표로 훈련하였고, 마침내 2005년 8월 15일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KBO리그 데뷔 무대를 가져 1.1이닝 무실점으로 첫 승(구원승)까지 챙겼지만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하며 2승 2패 4홀드 ERA 6.52로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현장의 평가가 괜찮았는지 2006년에는 연봉이 1억 110만원 #까지 올라갔지만, 이 시즌에는 어깨수술까지 받으며 고작 7경기에밖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 연봉은 다시 7,600만원으로 삭감했다. 현역 마지막인 2007년 시즌에는 송진우의 부상으로 생긴 기회를 잡으며 선발로도 8번 나섰고, 시즌 ERA로 4점대 초반을 찍는 등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겉보기엔 분명 괜찮은 성적이었고 나이도 만 34세로 좀 더 활약할 여지가 없지 않아 보였으나, 사실 7월에 2군으로 내려간 뒤 어깨 통증 재발 등으로 재활군에만 머물었기에 한화에서도 더이상 미련을 두기 힘들었다. 결국 10월 한화로부터 보류 선수 제외( 방출) 통보를 받고 그대로 은퇴했다.

2.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요미우리 1군 기록 없음
1997 22 28 1 2 11 - 0.333 2.89 16 1 13 1 30 10 9 1.036
1998 15 104⅔ 7 6 0 - 0.538 2.75 96 4 34 4 83 36 32 1.242
1999 1군 기록 없음
2000 10 14 1 2 0 - 0.333 3.86 20 2 5 0 9 9 6 1.786
2001 1군 기록 없음
2002 6 11⅔ 2 0 0 - 1.000 2.31 12 1 2 0 5 3 3 1.2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한화 16 19⅓ 2 2 0 4 0.500 6.52 30 1 9 6 8 15 14 2.017
2006 7 6⅔ 0 0 0 0 0.000 6.75 12 1 6 0 4 6 5 2.700
2007 12 43 1 2 0 0 0.333 4.19 41 3 19 5 18 23 20 1.395
NPB 통산(4시즌) 53 158⅓ 11 10 11 - 0.524 2.84 144 8 54 5 127 58 50 1.251
KBO 리그 통산(3시즌) 35 69 3 4 0 4 0.429 5.09 83 5 34 11 30 44 39 1.696
개인 통산(7시즌) 88 227⅓ 14 14 11 4 0.500 3.52 227 13 88 16 157 102 89 1.386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8년 6완투 1완봉
NPB 통산 6완투 1완봉
전체 통산 6완투 1완봉

3. 플레이 스타일

194cm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강력한 포심 패스트볼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던 투수였다. 요미우리 시절 평균 140km/h대 초중반[29], 최고 153km/h의 빠르고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과 함께 130km/h대 중후반의 포크볼 역시 결정구로 사용했다. 이밖에도 120km/h대 후반의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간간히 구사하기도 했지만, 빠른공과 포크볼의 구사비율이 80%가 넘을 만큼 투피치 유형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주었다.

당시 그의 빠른공 구위는 압도적인 강속구를 뿌린 92학번 동기 박찬호에 가려진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당대의 다른 투수들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빠르고 위력적인 편이었다. 구속이 빠를뿐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볼끝이 지저분한 유형에 속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1998시즌에 팔꿈치를 다치고 나서부터는 구속이 점점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2년 반의 공백기를 거치고 나서 입단한 한화 시절에는 최고 구속이 140대 초반에 머무는 등 선수 말년에는 구속과 구위가 많이 하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투구폼 자체도 상체를 많이 사용했을 뿐더러 투수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자주 일으키는 포크볼을 자주 구사했기 때문에 부상을 자주 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요미우리 입단 이후 팔을 심하게 비틀어 투구하던 아마추어 시절의 투구폼을 교정 받았으나, 교정한 투구폼 역시 팔에 과부하를 유발했기에 팔꿈치 부상의 주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4. 해설자 경력

XTM에서 마해영과 함께 김태균이 출전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무난한 해설톤에 분석적인 해설을 했다는 평가. 특히 케이블 TV에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전 녹화 해설을 담당하였는데 투수와 포수의 움직임, 그리고 타자의 스탠스 등을 토대로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모습을 보였다.[30]

5.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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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시절 조성민.

2011년 1월 27일자로 두산 베어스의 2군 재활 코치가 되었다. 해당 기사

2012 시즌 이후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코치로서 능력은 있었지만 지각 결근이 잦았다. 두산 측에서는 해외 연수 등을 권유했지만 본인이 거부하고 떠났다. 두 번째 부인과 이혼 후 과음으로 여러 번 결근과 지각을 했고, 이 문제로 구단 측에서 지적해서 조성민 스스로도 그다지 재계약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6. 방송 출연

7. 결혼

7.1. 첫 번째 결혼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 최진실의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최진실의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과 여러 사진들을 갖고 다니며, 나중에 꼭 최진실과 결혼할 거라고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당시 그 결혼이 훗날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1998년 12월에 방송을 통하여 서로를 처음 만난 후, 조성민이 구애하여 둘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와 최진실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는데, 나이 차이[31]와 서로의 직업적 특성 등을 들어, 조성민의 아버지[32]와 최진실의 어머니( 정옥숙) 모두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혼 전 기사 이혼 직전 기사 이때 조성민은 자살 기도까지 하였고, 결국 양가의 허락을 받아내어, 2000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으며, 최진실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게 된다. 결과론적이지만, 이것이 조성민과 최진실, 두 사람의 가족 모두에게는 본격적인 비극의 시작이었으므로, 양가의 우려는 현실이 된 셈이다.

2001년 8월 1일 첫째 환희를 낳았다. 후에 장모였던 정옥숙은, 이 시기에는 두 사람의 사이가 원만해서 조성민은 육아에 엄청난 공을 쏟았고, 환희는 3살 무렵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을 듬뿍 다 받았던 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12월 18일 조성민은 자신의 사무실에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뒤, 최진실을 유책배우자라고 비난하였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출산을 앞둔 최진실을 폭행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진실이 이혼을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소송은 못 하였고, 대신 별거를 택했다. 이에 조성민은 2004년 9월까지 자주 최진실에 관한 명예훼손을 일삼았다. 결국 2003년 3월에는 앞선 '유책배우자' 발언 때문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시기의 행동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며, 최진실의 가족들과 본인의 자식들에게도 큰 불행을 떠안겨 주게 된다.

결국 2004년 8월 조성민은 자택에서 최진실을 폭행하였고, 최진실은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혼 를 제기했다. 9월 이혼에 합의했고, 조성민이 슈크림빵 사업을 하며 최진실 가족을 상대로 빌렸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친권은 모두 최진실에게 넘겨주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최진실을 향해 명예훼손을 일삼은 건, 사후인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게 조성민이 용서받지 못한 큰 과오 중 하나. 기자회견의 내용이 전부 최진실을 비난하거나 본인의 불륜 행위에 대한 자기합리화, 혹은 최진실의 혼전 사생활 등을 논하는 명예훼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성민이 최준희를 임신하고 있었던 시기부터 최진실을 여러 차례 폭행한 사실 또한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시인하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느 정도 평판이 나아졌다.

2008년에 전처 최진실이 사망한 이후에 아이들의 친권[33]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을 야기했다.[34] 조성민이 친권을 갖게 될 경우, 아이들이 물려받은 최진실의 재산을 조성민이 관리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네티즌들이 다음 아고라에서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정옥숙 또한 그가 자녀들의 생일에 조차 한 번도 오지 않았다면서 반발하였다. 이에 조성민은 돈 문제에 관해서 최진실의 개인재산을 신탁재산으로 바꾸어 아이들을 위해 관리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해명했다.

7.2. 두 번째 결혼

그리고 최진실과 이혼한 지 3년 뒤인 2007년 말에 재혼 사실이 알려졌다. 2년 전인 2005년에 이미 재혼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진 것인데, 상대가 이혼 과정 당시 연인관계를 부인했던 '심 마담'으로 알려져 '아니라고 우기더니만 사실이었군'이란 눈초리를 받았다. 2008년 10월호 여성잡지에서 자신의 아내는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이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지인도 많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결국 이 여자와도 헤어지게 된다. 그가 사망했을 때 사망 장소가 여자친구 집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그럼 두 번째 아내는 어떻게 된 건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의 사후에 누나 조성미가 두 번째 부인과 조성민이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8. 말년

2008년 10월 전 아내 최진실이 사망하자 시신이 발견되었던 아파트에 찾아와서 시신확인을 했다. 그 후 삼성서울병원에서 3일 내내 빈소를 지켰고, 발인 후 안치 과정까지 동행했다.[35]

이후에는 해설위원과 두산 베어스 2군 코치 등을 역임하며 자녀들과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녀들은 여전히 아빠에게 어색한 감정을 가지기는 했지만, 야구장에도 같이 오고 최진실의 추모식에도 참석하는 등 아빠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족으로, 사망하기 3개월 전에는 아이들의 운동회에 나가서 아이들과 한 때를 보내며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겠다" 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시기 대중들의 반응은 "아이들의 아빠로서 도리를 다하고 아이들을 마음껏 사랑해줘라. 그것이 당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였으며 대중들도 조성민에게 어느 정도 악의적인 감정을 풀려는 무드가 조성되었으나...

9. 사망

2013년 1월 6일에 그는 전 여자친구의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사건 당시 그가 남긴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으로부터 1주일이 지난 1월 13일에 유서가 발견되어 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정되었다. 전날 그는 여자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집에 머물던 중 그는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전 여자친구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같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죽음에 앞서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어머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고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유산은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겼다.

조성민까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조성민의 자녀들은 어머니 최진실, 외삼촌 최진영, 아버지 조성민과 모두 자살로 사별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셋 다 향 만 39세, 연 나이 40세, 세는 나이로 41세였다.[36]

출관예식은 2013년 1월 8일, 모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렀다. 자살했기 때문에 장례미사를 받는 대신에 출관예식만 치렀다.[37]

10. 여담

  • 야구를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하였다.
  • 선수 시절,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미남이었을 정도로,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는 큰 키와 잘생긴 외모로도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 생전 절친한 야구인으로는 고려대학교 92학번 동기인 손혁, 김종국, 홍원기 등이 있었다.
  • 한국에 복귀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종종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임창용의 이적설이 터져나왔을 때 임창용에게 요미우리로는 이적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38]
  • 조성민 사후 조성민의 양친과 최진실의 모친인 정옥숙 씨 간에 재산 분쟁이 일어났다. 조성민이 소유하고 있었던 22억 시가의 빌딩에 부모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조성민이 사망하면서 법적 상속인인 환희·준희 남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명의 이전 이후, 두 남매의 후견인이 된 외할머니의 소송으로, 강제 퇴거 위기에 직면하면서 문제가 불거져 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조씨는 법적 권리자인 정옥숙 씨에게 부동산을 돌려주고 퇴거하라'고 결정했다. 다만 조씨 부부는 건물이 팔릴 때까지 거주하고, 부동산 매매(감정가 22억) 직후엔 그동안의 점유권을 인정해 이중 2억 5천만 원을 보상해주라고 판결했다.
  • 2023년 1월 6일에 10주기를 맞이했으나,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되지는 않았다. 그 대신 2022년에 9주기를 맞이한 것과 관련된 기사문은 있다. #

11. 관련 문서


[1] 한풍군파 26세손. 본인은 26세손 성(成)자 항렬, 부친 조주형은 25세손 형(衡)자 항렬이다. [2] 입단 후 대우는 신고선수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고선수 입단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한 적이 없어 국내팀에 뛰기 위해서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으나 지명받지 못했다. [3] 고등학교 3학년 때 허리 수술을 받아 병역이 면제되었다. 1970년생 씨름 선수 강호동이 체중 초과로 병역 면제를 받았는데, 조성민도 허리수술을 안 받았더라도 동일한 사유로 면제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기준은 103kg였다. [4] 3세 때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요미우리 입단 후에는 성당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무종교에 가까웠다. 또한 前 부인 최진실이 사망한 직후 한동안 최진실이 생전 다니던 강남침례교회에 출석하였고, 교회 신도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야구 캠프를 열기도 하였다. 그래도 장례식은 천주교식으로 치러졌다. [5] 한일은행 영동, 서초동 지점장. 은행원 전직을 하기 전엔 한일은행의 연식정구 실업 선수였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6] 사망 직후 인터뷰에서 친누나가 2010년 이미 호적 정리를 끝냈다고 밝혔다. # [7] 모두 전처 최진실 소생. 이혼 이후 최진실이 친권과 양육권을 가져가면서 본인의 성인 조씨가 아닌 최진실의 성을 따랐다. [8] 신일고 재학 당시 고교야구 최장신 투수였다. 그만큼 피지컬만큼은 축복받았던 것. [9] 박재홍은 투수로도 뛰어났지만 타격 재능을 더 높이 평가받았고 실제로 연세대 진학 후 완전히 타자로 정착했다. [10] 당시 서울권 대졸 선수 중에는 동봉철, 차명석, 임수혁, 박철홍 등이 있었으나 확실한 1차 지명 후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LG와 OB가 고졸 선수들로 눈을 돌렸던 것. [11] 이후 중퇴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학을 마치려는 의지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1996년부터 시행된 고졸 우선지명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고졸우선지명과는 다른 것이다. [13] 이외에 타자로는 박재홍(연세대), 김종국(고려대), 송지만(인하대), 이영우(건국대)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모두 프로에서 유의미한 발자취를 남겼다. [14] 간혹 정민철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정민철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으므로 '92학번'이라는 분류는 사실관계상 부정확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같은 연도에 졸업한 선수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15]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손혁, 홍원기(이상 공주고), 김종국, 김선섭(이상 광주제일고), 김지훈(신일고), 유진호(중앙고)가 있다. 이들 중 유진호만 프로에 입단하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한 7명이 동기회 '칠갑산회'를 만들었다. 김선섭과 유진호는 광주제일고와 중앙고에서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16] 고려대학교에서만 17년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같은 학교 농구부의 박한과 같은 포지션으로 보면 될듯. 김경문, 양상문, 선동열, 박노준, 김응국, 박동희, 이상훈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고려대 출신의 스타 선수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고 이들만 모아놔도 국가대표급이다. 그리고 무섭기로 소문난 감독이었다. 이상훈이 괜히 도망다닌게 아니다. [17] 1위는 대만 출신 쉬밍제가 세이부와 맺은 9년 계약(2000~2008)이다. [18] 가장 좋은 폼을 보이던 1998년 상반기의 배번이 21번이라 이 번호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 관리 따위는 장식인 팀 운영뿐만 아니라, 교진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언제나 화끈하게 지를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구단이라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인급 선수들이 성장하기에는 영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20] 그러나 요미우리도 문제지만 본인도 그다지 성실과는 먼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도쿄에서는 파다했다. 가끔 고종수와 비교되는 것 보면 재능이나 신체조건만 믿고 자기관리에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21] 당해 팀 세이브 1위로, 요미우리는 마무리 투수의 부재와 에이스 사이토 마사키, FA 이적한 키요하라 카즈히로 등 주축 선수들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9월 초까지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성민이 중무리에 안착하던 시기부터 팀 성적이 서서히 상승세를 되찾았고, 때마침 한신과 주니치의 추락이 겹치면서 디펜딩 챔피언에서 최하위로 떨어지는 굴욕을 면하고 4위로 시즌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22] 심지어 KBO리그에서도 1992년 정민태를 시작으로 90년대 후반에 이미 많은 피시술자가 있었으며 정상 복귀에 성공한 선수도 많았다. [23] 1997년 신일고 중퇴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07년 LG의 1차 지명을 받고 돌아온 봉중근이 이 케이스였다. 게다가 2000년에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LG에서 1차 지명을 받은 최경환이라는 선례도 있었고. [24] 이때 LG 트윈스는 사이드암 투수 장진용을, 두산 베어스는 내야수 김재호를 지명했다. [25] 참고로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최정, 박병호, 윤석민, 오승환, 정근우 등이 지명받았다. 이 선수들의 활약상이야 여기에 적어봤자 손가락만 아프니 넘어가기로 한다. 이외에도 오재일, 이원석, 조정훈, 진해수, 이보근, 전유수, 박정배 등등 야구 좀 보는 팬들이면 다 아는 선수들이 해당 년도 드래프트에서 배출되었다. 가히 황금기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26] 조(Cho)& 최(Choi). [27] Beard papa. "수염난 아빠"란 뜻이다. 동네 빵집에서 파는 베이비 슈보다 크기가 크고, 크림 종류도 다양하다. [28] 그래도 사업도 말아먹고 사기까지 당하고는 빚만 100억대를 지다가 흉악범으로 전락해 자살하는 등 훨씬 더 비참하게 몰락한 이호성보다는 양반이다. [29] 구원 등판 시 평균 146km/h [30] 당시 그의 해설은 엠스플에서 틀어주는 베이징올림픽 야구 하이라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31] 1968년생인 최진실이 조성민보다 5살이나 많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 연상의 커플은 드물었다. [32] 1947년생으로 실업야구 선수를 거쳐 한일은행 간부였었다. [33] 부모가 이혼한 뒤 친권이 한쪽에게만 주어졌을 때, 친권을 가졌던 쪽이 사망한 뒤 다른 쪽이 친권을 회복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이 친권을 상실한 것과 같이 봐서 후견이 개시되는지는 그때까지 명문의 규정이 없었다. 결국 2011년 법이 개정되어 친권자동부활 금지 법안이 명문화되었고, 2013년부터 발효되었다. 일명 '최진실법'. [34] 이게 더 씁쓸한 게, 최진실의 자살 이후 찾아온 조성민을 보고 여론은 욕하던 마음을 거두는 분위기였으며 '그래, 그래도 한때 불같이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비극이 일어났으니 마음이 안 좋겠지~' 라는 동정론까지 일었다. 어떤 신문은 따로 칼럼을 써 그를 응원할 정도로 분위기가 숙연했다. 그런데 그 직후 갑자기 재산을 노린 듯이 느닷없이 친권 주장이라니. 여론은 전보다 더 악화됐고, '조문도 재산을 노리고 온 거였어?' 등등 경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35] 이 시기 최진실의 장례식에 참석함으로써 대중들은 조성민에게 어느 정도 동정을 가졌다. 물론 얼마 후 친권 관련 논란으로 또 다시 부정적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만약 오지 않았다면 그는 더욱 더 큰 비난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이미 대중들은 세상을 떠난 최진실과 그의 가족이었던 최진영, 환희 준희, 그녀의 어머니에게 큰 걱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우울증이 조성민과의 이혼으로 더 심각해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조성민의 대한 대중들의 시선은 매우 싸늘해져 있었다. [36] 그 해 생일이 지나기 전에 사망해 39세인것. [37] 공교롭게도 서울권 트로이카의 하나였던 손경수도 3년 뒤 조성민의 뒤를 따르게 된다. 다만 사망 원인은 조성민과 달리 자살이 아닌 지병 악화였다. [38] 애초에 조성민 본인은 물론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에서 활동하던 정민철이나 정민태 모두 구단 측의 관리 등으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