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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Viln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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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 |||||
국가 | 리투아니아 | ||||
주 | 빌뉴스 주 | ||||
면적 | 401km² | ||||
인구 | 602,430명[1] | ||||
인구밀도 | 1,560명/km²[2] | ||||
시간대 | UTC+02:00( 서머타임 적용) | ||||
빌뉴스 행정 사이트 | |||||
||<-2><tablewidth=450><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0>
유네스코 세계유산 ||
유네스코 세계유산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리투아니아어| |
||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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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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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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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치 |
리투아니아 빌뉴스 북위 54° 41′ 12.012″ 동경 25° 17′ 35.0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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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4년[3] | ||
등재기준 |
(ⅱ)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
||
(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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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54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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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수도로 빌뉴스주 주도이기도 한 도시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북동쪽 380 km,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는 북서쪽 180 km 지점에 있다. 네무나 강의 지류 빌리야 강 양안에 위치하는데 '빌뉴스'란 도시명 역시 빌리야 강에서 유래했다. 이는 '잔물결' 이란 뜻의 리투아니아 방언이다. 발트 3국의 수도 중 유일하게 바다와 면하지 않았고 노면전차가 없는 수도.[4] 옛 이름은 빌나(Vilna)로 도시의 면적은 401 km², 인구수는 2024년을 기준으로 60만 2430명이다. 별명으로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던 시절 붙여진 북쪽의 예루살렘과 리투아니아의 아테네가 있다.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수도였음에도 전간기에는 폴란드인 비율이 55-65%(최대 12만 명) 가까이 되어, 폴란드에서 국제연맹의 중재를 쌩까고 반환을 거부했다. 그러나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 패망한 후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빌뉴스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전체가 소련에 강제병합되면서 리투아니아 SSR의 수도가 되었다.
주민의 30~40%를 차지하던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거의 사라졌고, 2001년 기준으로 리투아니아인이 약 60%, 폴란드계는 20%, 러시아계가 14%다. 교외지역에는 지금도 폴란드계 주민 비율이 꽤 높다. 소련 붕괴 직전에는 한때 폴란드인 자치지역을 선포하기도 했다. 빌뉴스 시가지를 포위한 형국이었기에 소련은 리투아니아 독립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했지만, 레흐 바웬사 정부에서 해당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을 지원하지 않고 리투아니아 정부의 주권을 인정했으며, 8월 쿠데타 이후로 소련의 통치력이 와해되면서 자치구역 선포 자체가 무위로 돌아갔다. 다만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폴란드계에 대한 권리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갈등이 많다.
2. 언어별 표기
리투아니아어 | Vilnius |
벨라루스어 | Вільня(빌냐) |
폴란드어 | Wilno(빌노) |
러시아어 | Вильнюс(빌뉴스)[5] |
독일어 | Wilna(빌나) |
에스페란토 | Vilno(빌노) |
3. 역사
3.1. 중세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가 빌뉴스 성채를 세웠으며, 교황 요한 22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처음 등장한다. 게디미나스 치세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는데, 실질적인 수도는 루테니아인들의 도시 나바흐루다크와 폴로츠크였지만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인 군사 귀족들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1387년 폴란드 국왕을 겸한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가 빌뉴스에 도시자치법에 따른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발트 다신교 성소들을 제거하고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본격적인 첫 걸음을 내딛었다.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은 초창기에는 가톨릭 개종에 반발하였으나, 폴란드 왕국에서 온 가톨릭 사제들이 성당을 근거지로 가톨릭뿐만 아니라 세련된 폴란드어와 폴란드 문화를 전파하여 빌뉴스 시민들은 결국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인에게 폴란드의 귀족 문화는 매우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역사적으로 리투아니아인 외에도 루테니아인[6], 폴란드인, 독일인, 아슈케나짐 유대인과 카라임 유대인들이 모여살던 국제도시로서 문화의 용광로 같던 곳이었다. 빌뉴스에는 정교회와 가톨릭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유대교와 물론 비타우타스 치세에 토크타미쉬의 타타르족이 유입된 영향으로 이슬람 모스크까지 들어섰다. 별로 크지도 않은 도시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시설물은 거의 다 모인. 말하자면 종교의 종합전시장이었던 셈.
3.2. 르네상스 시대
빌뉴스 대학교를 대표하는 황금문과 도서관 |
빌뉴스는 대학 외에도 인쇄소로도 유명했다. 보헤미아 왕국에서 인쇄 사업을 하던 벨라루스인 출판업자 프란시스크 스카리나(Францыск Скарына)가 1525년 빌뉴스로 이주하여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다. 스카리나는 벨라루스어로 된 성경과 여러 가지 저작들을 인쇄하며 의학 등 다방면에 출중했던 사람으로, 오늘날 벨라루스에서 세종대왕 비슷한 존경을 받는다. 물론 스카리나의 인쇄소 사업은 벨라루스에게만 영향이 간 것은 아니었다. 스카리나가 운영했던 빌뉴스의 인쇄소를 시작으로 금속활자 기술이 빌뉴스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1529년 리투아니아의 첫 법령집이 편찬되었다.
16세기 개신교 교회의 부속기관으로 건설된 초등학교는 이후 예수회의 활동으로 가톨릭 미션스쿨이 된 이후에도 빌뉴스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잠시 빌뉴스 시에도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부흥하는 듯 했으나 이후 예수회가 경쟁적으로 부설학교들을 세우고 교육사업에 투자하면서 빌뉴스 시의 개신교 교세는 꺾이고 말았다. 다만 개신교와 가톨릭 예수회가 선교경쟁을 하느라 빌뉴스의 교육시설과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었음이 좋게 평가받는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원래 공용어는 루테니아어였지만,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고 도시 문화가 계속 폴란드화함에 따라서 리투아니아인 주민들이 폴란드어를 배우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면서 빌뉴스 시의 리투아니아계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으로 동화되었다. 17세기 말 리투아니아 내전에 참가했던 리투아니아 대귀족 다섯 가문[7]들이 전부 다 리투아니아어 성을 쓰지 않고 폴란드어 성씨를 사용했을 정도였다.
1655년 대홍수 당시 루스 차르국의 군대가 빌뉴스를 함락하여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고, 빌뉴스와 그 인근 지역의 인구가 급감하자 빌뉴스를 중심으로 한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르네상스도 끝을 맺었다. 대북방전쟁 도중인 1702년, 1706년 칼 12세의 스웨덴군이 또 빌뉴스를 약탈했고 그 여파로 18세기 내내 휘청였다.
3.3. 근현대
1795년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러시아가 설치한 구베르니야의 주도가 되면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해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속했던 도시들 중 3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빌뉴스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중심 도시이기도 했는데, 빌뉴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하레디 유대인과 반대되는 세속주의 성향의 유대 공동체를 대표했다. 빌뉴스를 대표하는 대학교이자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최대의 대학교였던 빌뉴스 대학교는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3개국 모두의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 아담 미츠키에비치가 활동한 것을 기점으로 세 민족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서로 화합하는 기능을 했으나 1831년 폴란드 독립 봉기가 진압된 이듬해 1832년 러시아 제국 정부에 의해 폐교를 당했다. 빌뉴스 대학교 강제 폐교에도 불구하고 이미 뿌리내린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빌뉴스 대학 폐교 조치에 쉽게 굴하지 않고, 프로이센 왕국 영토였던 "소 리투아니아"[8]에 거주하는 동포들로부터 리투아니아어 책을 밀수하여 가정 내에서 리투아니아어 교육을 이어갔다.1897년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빌뉴스 시 인구의 40%가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고, 폴란드인은 30.1%였으며 러시아인 20.9% 벨라루스인 4.3% 리투아니아인 인구 비중은 2.1%에 불과했다. 물론 빌뉴스에 살던 리투아니아인들이나 벨라루스-루테니아인들이 다 죽거나 도망가거나 한 건 아니고, 귀족들 중심으로 폴란드인들과 통혼하고 계속 폴란드어를 사용하면서 동화되었던 것. 같은 년도에 빌뉴스 근교의 농촌과 소도시를 포함해서 낸 통계에서는 벨라루스인 56.1%, 리투아니아인 17.6%, 유대인 12.7%, 폴란드인 8.2% 러시아인 4.9%로 나온다.
1914년부터 1921년까지 빌뉴스는 최소 8번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쟁탈전의 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1915년에서 1918년까지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이후 잠시 리투아니아에게 넘어갔다가 독일이 패망하여 폴란드와 볼셰비키가 쟁탈전을 벌인다. 러시아인 인구가 소개된 이후에 이루어진 1916년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는 인구의 50.2%가 폴란드인, 43.5%가 유대인이고 리투아니아인은 2.6%에 불과했다. 1920년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는 잠시 빌뉴스를 점령했다 폴란드에 패하고 새로 독립한 리투아니아에 이 도시를 넘겨주었지만, 10월 9일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의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사단이 연출된 쿠데타를 통해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 시와 주변 지역은 '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독립된 국가로 선포했다가 1922년 2월 20일 합병해버렸다. 이후 리투아니아인들은 폴란드라 하면 이를 갈며 싫어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정식수도이자 수복해야 할 땅으로 선포하면서 임시수도를 카우나스에 두었다.
빌뉴스, 아니 빌노(Wilno)는 폴란드 제5의 도시로 Elektrit 같은 라디오 공장[9]도 보유하는 등 산업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당시 독일과 소련이 서로 체결한 비밀조약에 따라 1939년 9월 19일 빌뉴스는 소련이 장악하고 합병하였다. 1939년 10월 10일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얻는 대신 소련이 리투아니아 각지에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수도를 카우나스에서 빌뉴스로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미처 끝내기도 전인 1940년 6월 소련이 리투아니아 전국을 점령하면서 빌뉴스는 새로 설립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1941년 6월에는 빌뉴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어 구시가에는 유대인 주민들을 위한 게토가 두 군데 세워졌고 빌뉴스의 유대인 인구의 95% 정도가 독일군과 그들에게 협력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1944년에는 폴란드 향토군과 소련군이 차례로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소련에 합병되었고, 종전 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농촌의 리투아니아인들과 소련의 타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이주하면서 전후 빌뉴스는 주민 구성, 문화,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다. 1931년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 인구의 0.8%에 불과했지만 1959년에는 34%로 증가하였고, 같은 기간 폴란드인은 65.5%에서 20%로 감소, 러시아인은 3.8%에서 29%로 증가, 유대인은 27.8%에서 7%로 감소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회복시켰다. 이에 소비에트 연방은 1991년 1월 9일 군 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대응, 1월 13일에 국립 라디오·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텔레비전 철탑을 공격, 그 과정에서 민간인 14명이 죽고 700명 이상이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에 소비에트 연방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탈퇴를 인정하였고, 이후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09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됐다.
1980년대에 윗동네에 리가 지하철이 노래 혁명으로 취소된 후 발트 3국에서 처음으로 지하철 계획이 입안되어 추진중에 있다. 2001년 처음 제안되어 2007년 논쟁을 빚고 좌초되는줄 알았으나 2018년 지하철 관련법 제정으로 민자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4. 행정 구역
하위 행정구역은 21개 구(seniūnija)로 이루어졌는데, '구시가지'란 뜻인 세나미에스티스 구가 빌뉴스 시내의 중심부이다.
5. 언어
202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빌뉴스 시민들의 모어는 리투아니아어 67.01%, 러시아어 14.53%, 폴란드어 11.28%로 조사되었다.6. 여담
-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프리피야트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은 대부분 빌뉴스에서 촬영하였다. #. 실제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드라마 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프리피야트에 거주해 본 사람과 관광해본 사람 말에 따르면, 빌뉴스의 옛날 아파트 풍경이 구 소련의 신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프리피야트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한다.
- 만우절에는 이 도시이자 수도 내에 또 하나의 국가인 우주피스 공화국이 만들어진다.
- 문명 5에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7. 둘러보기
이그노벨평화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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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제정 | 1991년 | 1992년 | 1993년 | 1994년 |
에드워드 텔러 | 데릴 게이츠 | 필리핀 펩시 | 존 헤이글린 | ||
1995년 | 1996년 | 1997년 | 1998년 | 1999년 | |
중화민국 입법원 | 자크 시라크 | 해럴드 힐먼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나와즈 샤리 |
샤를 푸리에 미쉘 원 |
|
2000년 | 2001년 | 2002년 | 2003년 | 2004년 | |
영국 해군 | 빌리우마스 말리나우스카스 |
타카라 스즈키 마츠미 코구레 노리오 |
랄 비하리 | 이노우에 다이스케 | |
2005년 | 2006년 | 2007년 | 2008년 | 2009년 | |
클레어 린드 피터 시몬스 |
수상자 없음 | 미국 공군 라이트연구소 | 스위스 비인류 생명공학 윤리위원회 | 스테판 볼리거 | |
2010년 | 2011년 | 2012년 | 2013년 | 2014년 | |
리처드 스티븐스 |
빌뉴스 시 아르투라스 주오카스 |
SKN |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경찰 |
- | |
2015년 |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 |
수상자 없음 | 고든 페니쿡 | 스위스,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 공동 연구 팀 |
프란시스코 알론소 크리스티나 에스테반 안드레아 세르게 마리아루이사 바예스타르 하이메 산마르틴 콘스탄사 카라타유드 베아트리스 알라마르 |
Ghada A. bin Saif Alexandru Papoiu Liliana Banari 프랜시스 맥글론 숀 콰트라 Yiong-Huak Chan 길 요시포비치 |
|
2020년 | 2021년 | 2022년 | 2023년 | 2024년 | |
인도 정부 파키스탄 정부 |
미국 유타 대학교 연구진 | 중국, 헝가리, 캐나다,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호주, 스위스, 미국 공동 연구 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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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
1994년 빌뉴스 역사 지구 Vilniaus istorinis centras |
2000년 쿠로니아 모래톱 Kuršių nerija |
2004년 케르나베 고고 유적 Kernavės archeologinė vietovė |
2005년 스트루베 측지 아크 Struvės geodezinis lankas |
2023년 모더니즘 도시 카우나스 : 낙관주의적 건축, 1919-1939 Modernusis Kaunas : optimizmo architektūra, 1919–1939 |
[1]
통계인구, 2024년 기준.
[2]
통계인구, 2024년 기준.
[3]
2012년 부분수정
[4]
지하철은 발트 3국 어디에도 없다. 빌뉴스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어떤 도시에도 전차가 다니지 않는다.
21세기 들어 빌뉴스 지하철 건설 제안이 간간이 나오지만 착공은 언제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소련 시절에 계획되었다가 무산된
라트비아
리가와 달리 여긴 트램이 없어졌으니 지하철의 필요성을 중요하게 느끼겠지
[5]
예전에는 독일어에서 음차한 Вильна(빌나)로 불렀다.
[6]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의 전신
[7]
사피에하(Sapiega) 가문, 파츠(Pacai) 가문, 라지비우(Radvila) 가문, 오긴스키(Oginskiai) 가문, 비시니오비에츠키 가문(Вишневецькі).
[8]
현재
클라이페다 인근 지역
[9]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합병하면서 이 공장 시설도
민스크로 뜯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