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1 11:45:39

헌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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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8대 상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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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덕왕릉 전경.
출생
(음력)
770년대 추정[1]
신라 금성
사망
(음력)
826년 10월[2] (향년 50대)
신라 금성
능묘 헌덕왕릉(憲德王陵)
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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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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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혜충왕
모후 성목태후 김씨
형제자매 김준옹
동생 김수종, 김충공
왕후 귀승부인 김씨[3]
자녀 태자 김수종(?)[4], 김○명[5]
왕자 아들, 심지(心地)[6]
종교 불교
시호 헌덕대왕(憲德大王)[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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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시중(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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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룡성 사신(御龍省 私臣)
상대등(上大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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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치세2.3. 김헌창의 난을 막다
3. 헌덕왕릉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
5. 《 삼국사기》 기록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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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41대 군주. 제39대 소성왕의 동복 동생이고, 제40대 애장왕의 숙부로 아버지는 제38대 열조 원성왕의 장자 김인겸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79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791년 김제공의 난을 진압했으며, 할아버지 원성왕에 의해 794년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795년 이찬으로 재상이 되었고 796년 병부령을 제수받기도 하여 원성왕 말기에 이미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원성왕의 정치가 원성왕의 직계 왕족들 중심의 측근 정치이기도 했다.

원성왕의 아들 김인겸과 손자 소성왕이 모두 일찍 죽자 어린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섭정이 되었고, 상대등에 올랐다. 애장왕 대에 김언승의 세력은 상당했는데 김언승을 지원하는 아우 김수종이 시중에 올라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809년 아우 김수종(혹은 다른 아우 김제옹이 더 유력하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애장왕을 시해한 뒤 애장왕을 보필하던 동생 김체명의 목숨마저 빼앗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헌덕왕은 당나라의 황제 헌종에게는 애장왕이 병사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 물론 그대로 알렸다면 당나라 측에서 시비를 걸 수도 있었던 걸 감안한 조치겠지만 인륜적으로 보면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2.2. 치세

헌덕왕의 재위 연간에는 잦은 자연 재해와 기근이 있었지만 왕권은 크게 약화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정기 시절부터 반독립적이었던 절도사 이사도가 대대적으로 세력을 일으켜 대규모로 당나라 중앙 정부에 항거하자 당나라는 신라에 지원군을 요청해 헌덕왕은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30,000명의 군대를 맡겨서 파견하기도 했다. 다만 이사도의 반란은 819년 2월에 진압되었는데 신라는 5개월 뒤인 819년 7월에야 구원군 파병 의사를 밝혔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에 오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실제로 당나라에 출진은 하지 않았거나 시대적 한계상 정보의 혼선으로 실제 토벌에 참여는 못하고 허탕을 친 것으로 보인다.[8][9][10]

애장왕 대부터 이어져오던 왕권 강화 정책을 그대로 진행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녹진의 인사 원칙에 대한 제언이었다. 헌덕왕의 아우이고, 상대등에 있었던 김충공이 병에 들자 집사시랑이었던 녹진이 김충공에게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 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고, 김충공은 물론 헌덕왕과 김수종 모두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때 녹진이 제언한 인사 정책은 전제 왕권에 매우 유리했으므로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일어난 것이 바로 김헌창의 난(822년)이다. 헌덕왕의 인사 정책은 근친 혈족 위주의 정국 운영을 고착화시켰다는 한계가 있다.

태종 무열왕 방계로서 왕위에 가까웠지만 내물왕계인 열조 원성왕에게 왕위를 내줬던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은 김주원이 명주( 강원도 강릉시)로 물러난 이후에도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여 807년에는 시중으로 임명되어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언승 다음 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이는 그를 달래 반란을 막으려는 원성왕 때부터 내려온 정책이기도 했는데 애장왕은 김헌창을 전격 중용했다. 하지만 김언승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애장왕의 측근이었던 김헌창도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813년에는 무진주 도독, 816년에는 청주 도독, 821년에는 웅천주 도독으로 전보되었다. 이렇게 각 지방직을 전전하던 김헌창은 이에 불만을 품고, 822년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경운(慶雲)이라 했다.

김헌창이 계속 지방으로 내려가 있으면 반란의 원인이 될 것임을 직감한 헌덕왕은 무진주 도독으로 가 있었던 김헌창을 813년 8월 잠시 시중으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김헌창과 헌덕왕은 정치적으로 상극이었던 터라 시중으로 있던 기간은 3개월도 못됐고, 다시 무진주 도독으로 좌천시켰다.

2.3. 김헌창의 난을 막다

파일:신라_김헌창의_난_지도_payo20.jpg

태종 무열왕 방계인 김헌창의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웅천주( 충청도)를 중심으로 무진주(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완산주( 전주시 전라북도), 청주[11], 사벌주( 상주시 경상북도 서북 대부분)를 장악하고, 국원경(중원경/ 충주시), 서원경( 청주시), 금관경( 김해시)의 사신(장관) 및 여러 군, 현의 수령을 복속시켰다. 가히 호남+충청+영남의 낙동강 서쪽을 더한 전성기 백제에 맞먹는 영토를 복속한 셈이었다. 하지만 한산주(한주), 삽량주(양주), 패강진[12], 북원경( 원주시)과 같은 북부 지방의 군세가 결집하면서 반란은 더이상 확대되지 못했다. 원래 본거지인 명주까지 닿지도 못했던 것은 물론이다.

헌덕왕은 장군 8명으로 서라벌을 지키게 하고 장웅(張雄)·위공(衛恭)·제릉(悌凌)으로 김헌창을 치게 했다. 장웅은 도동현(道東峴/ 영천시)까지 몰아닥친 김헌창의 장안군을 격파했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 보은군)을 공격한 다음 인근의 속리산에서 김헌창의 장안군을 격멸했다. 훗날 신무왕 김우징의 아버지가 되는 김균정(金均貞)은 성산(星山/ 성주군)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렇게 각지에서 승리를 거둔 토벌 연합군이 집결한 이후 웅천주의 중심인 웅진( 공주시)으로 쳐들어가니 김헌창은 농성했지만 결국 함락되고 김헌창은 자살했다. 이후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한주의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과 합세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규모도 훨씬 약소했고, 이 역시 실패했다. 이 대란 이후 태종 무열왕계의 후손들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러한 김헌창의 대란으로 인해 헌덕왕의 정통성 없는 왕위 계승이 확실히 큰 반란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그래서 그는 열조 원성왕계의 또 다른 한 축인 김예영의 자손들을 중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장에 김예영의 장남인 김헌정은 애장왕 대에 받았던 시중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812년에 그 시중의 자리를 헌정의 동생인 김균정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820년에 김헌정이 절대 70세가 될 수 없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하사했으며, 김헌정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김제륭이 왕위를 손에 쥐고 있었던 김인겸계의 양자로 들어가, 이후 왕위 계승도 가능한 위치에 올랐을 것으로 예상된다.

3. 헌덕왕릉

헌덕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북천 강변에 위치해 있는데 북천이라는 강이 자주 범람하던 강이다 보니 석물이 남아난 게 별로 없다. 윤경렬이 쓴 《신라 이야기》에 보면 북천 강물의 흐름을 두고, 분황사 부처님과 신통력으로 싸움을 벌이는 통에 원래 있던 석물들이 죄다 씻겨 내려갔다고 한다. 또한 신라 왕릉의 묘제를 연구한 이근직에 따르면 신라 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으로서 그 위치 비정이 전승과 실제가 동일한 8기[13]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사실 《 삼국사기》와 《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지가 천림사(泉林寺) 북쪽으로 정확히 일치하고 조선 시대에 편찬된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능묘조-에도 헌덕왕릉이 부의 동쪽인 천림리(泉林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교차검증이 된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긍정적 업적이라고 그나마 평해줄만한 것은 물론 전국적 규모였던 김헌창의 난을 빠르게 수습한 것이다. 마침 그의 시대에 큰 반란이 일어난 것을 비판할 수도 있지만 김헌창의 반란은 이미 원성왕 시절부터 잉태된 문제점이 이 때 결국 터진 것이므로 전부 헌덕왕의 책임이라고 하기는 힘들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국제 정세상으로도 발해 중흥의 명군 선왕 대인수 치세에서 ' 해동성국'이란 말을 들으며 융성하던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북방에 장성[14]을 축조하면서도 발해와 협상을 위해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삼국통일전쟁으로 피폐해진 뒤 다소 저개발 상태에 놓여있던 옛 고구려 영토인 북방 영토를 헌덕왕 때에 적극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한 것 정도가 있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이 무렵에 신라의 북방 개척이 진행되어 오늘날의 황해도 북부와 평안남도 남부 일대에 군현이 설치되었고 대동강 남안까지 신라의 직할 통치가 시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나마 헌덕왕이 북방에 나름대로 신경을 썼기에, 김헌창의 난 때도 대체로 신라 서부의 옛 백제 지역이 김헌창군에 참가한 반면 옛 고구려 지역에 해당하는 북방 주들은 반란에 가담하진 않고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할 수 있었다.[15] 뒤이은 김범문의 난은 김헌창의 난에 비하면 소꿉장난 정도라 한산주 도독의 빠른 행동으로 비교적 쉽게 진압되었던 건 딱히 헌덕왕의 업적으론 보기 힘들다.

다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김헌창의 난이 가져올 위험을 냉철하게 분석한 뒤 서둘러 서라벌 종심 방어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한 데 있다. 5소경에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는 한편 서라벌로 통하는 각 길목에도 별도의 군 주둔지를 편성하여 만에 하나, 신라가 옛 백제 영역과 옛 고구려 영역을 잃게 될 경우까지 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덕왕의 이와 같은 과업은 무려 50년 정도 진행되어 후삼국시대 개막 직전인 제49대 헌강왕 때 완성을 보게 된다.[16]

4.2. 부정적 평가

조카이자 개혁을 실시하려던 애장왕 시해하는 방식의 쿠데타를 통한 정통성없는 집권을 한 건 큰 문제였다. 앞서 설명했듯 군사적 개혁을 통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건 크게 칭찬해줄만하지만, 애장왕이 추진하던 개혁이 성공했다면 아예 그럴 경우조차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은 역사 애호가 입장에서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조카처럼 뚜렷한 정치적 목표나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위해 매진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연이은 자연 재해와 기근에 별 책임감 없는 모습이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물론 헌덕왕이 구휼을 벌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있지만 오히려 그 와중에도 잔치나 벌여대며 왕이 손수 거문고를 타고 놀면서 70대의 고위 관료가 거기에 맞춰 을 추었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기록도 찾아볼 수가 있다.[17] 임금이 이 모양 이 꼴이니 구휼을 벌인다 해도 민생에는 도움이 1도 안 된 것이야 당연지사. 특히 후계자이자 동생인 흥덕왕직접 지방을 순시하며 구휼 활동을 열심히 벌인 것과도 크게 대조된다. 그 와중에 김헌창, 김범문 부자의 난까지 연달아 터지는 가운데 연이은 천재지변마저 발생하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도적들이 크게 창궐하는 등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신라 하대의 혼란은 더더욱 심해져만 간다. 신라 해적( 신라구)이 나타나 일본 서부까지 노략질하고 신라인들이 신라와 중국 해적들에게 붙잡혀 당나라나 일본에 노예로 인신매매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로 당시의 민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의 기록이 잘 말해준다.
(헌덕왕) 13년(821년) 봄에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 《 삼국사기》 <헌덕왕 본기>

다만 나라 말아먹은 암군으로 보기엔 종심 방어 체제 구축의 공로가 워낙 크기에[18] 그건 어렵다고 보는 측도 있다. 그러나 여러모로 신기할 정도로 말기에 흔히 암군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신라 후기 임금들은 다들 괜찮은 편이며, 그중에서는 여러모로 모자라 보이는 게 맞는 것 또한 사실. 게다가 잘 했다는 그 종심 방어 체계도 장보고 달벌대전 한 방에 깨져버리고, 60년 후 견훤 서라벌 유린으로 끝나버려서 헌덕왕의 군사 개혁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끝나버렸다.

혜공왕조차 친정 이후 직접 정치를 펼치기 위해 국학에 나가 강의를 듣거나 조상인 문무왕의 사당에 참배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다. 그러나 헌덕왕은 조카를 시해하고는 충분히 정사를 돌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놀고 먹는 데만 할애하셨으니 자연스레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다.

헌덕왕이 애장왕을 시해하는 바람에 개혁도 취소되고 신라 부흥도 물거품이 되었으며 헌덕왕의 집권을 시작으로 해서 신라가 본격적으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을 보면 헌덕왕이야말로 진정한 신라 멸망의 원흉일지 모른다. 다만 상술했듯 '서라벌이 혹시.....?'라는 경각심을 품고 방어 체제 구축을 시작하였으니, 난세는 만들었으되 그 난세를 버틸 장치 또한 마련해줬다고 볼 여지는 있다. 하지만 집권 과정에서 예영계를 끌어안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후대에 펼쳐진 친족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왕위 쟁탈전을 벌이게 한 건 옹호의 여지가 없는 순수 본인 책임이다. 또한 방어체계라는 것도 헌덕왕 사후 30년도 안 돼 장보고한테 깨졌으니 헌덕왕은 그냥 신라를 말아먹은 암군이라 볼 수밖에 없다. 왕족으로써 아예 다른 나라를 탄생시킨 궁예는 이것에 비하면 꽤 명군일 지경이었다. 물론 궁예 역시 럭키 헌덕왕이었다.

또한 신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그걸 넘어 김춘추인 무열왕과 장보고가 나당연합을 하니 당나라에 이사도의 난을 진압한 민족반역자니 하는 프레임의 간접적 빌미를 제공한 희대의 암군 중 하나도 헌덕왕이었다. 김헌창의 난을 야기하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열왕 계열을 배척하며 특히 이사도의 난 진압은 당나라는 물론 신라의 헌덕왕의 실정으로 야기된 프레임이었다. 이것은 의종과 충혜왕이 고려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만들고 연산군이 조선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만드는데 일조한것과 비슷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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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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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헌덕왕 본기>

一年秋七月 헌덕왕의 가계와 즉위 과정
一年秋七月 김숭빈을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秋八月 대사면을 하다
一年秋八月 김창남을 당에 보내 책봉을 받다
二年春一月 양종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치다
二年春二月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二月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다
二年秋七月 유성이 자미원에 들어가다
二年秋七月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다
二年冬十月 김헌창을 당에 보내 공물을 바치고 순종의 복을 기원하다
二年冬十月 유성이 왕량에 들어가다
三年春一月 원흥을 시중으로 삼다
三年春二月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삼다
三年夏四月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돌보다
四年 균정을 시중으로 삼다
四年 충영에게 궤장을 하사하다
四年秋九月 숭정을 발해에 사신으로 보내다
五年春一月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다
五年春二月 시조묘를 배알하다
五年春二月 현덕문이 불타다
六年春三月 숭례전에서 연회를 베풀다
六年夏五月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 인민을 위로하고 조세 면제하다
六年秋八月 바람과 안개로 인해 밤과 같았다
六年秋八月 헌창을 시중으로 삼다
六年冬十月 검모의 처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다
七年春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七年夏五月 눈이 내리다
七年秋八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七年秋八月 서쪽 변경에서 기근으로 인한 도적 봉기가 있어 군대를 보내 토벌하다
七年秋八月 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와 경성을 향하다
八年春一月 헌창이 청주 도독이 되고 장여가 시중이 되다
八年 기근이 들어 절강 동쪽에서 식량을 구하는 백성이 170명이나 되다
八年 한산주 당은현에서 돌이 100여 보를 움직이다
八年夏六月 망덕사의 두 탑이 부딪치다
九年春一月 김충공을 시중으로 삼다
九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아 산천에 비를 빌자 7월에 비가 오다
九年冬十月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 구휼하다
九年冬十月 왕자 김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十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春一月 진원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병이 든 헌정에게 70세가 되지 않았으나 지팡이를 하사하다
十一年春二月 상대등 김숭빈이 죽어 김수종 상대등으로 삼다
十一年春三月 초적이 일어나 도독과 태수에게 잡도록 명하다
十一年秋七月 의 이사도가 반역을 일으켜, 신라가 3만의 토벌군을 파병하다
十二年 봄 여름에 가물어 겨울이 기근이 들다
十二年冬十一月 당에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 기근으로 자손을 팔다
十三年夏四月 시중 김충공이 죽어 영공이 시중이 되다
十三年夏四月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다
十三年秋七月 패강 남천의 두 돌이 부딪히다
十三年冬十二月二十九日 큰 천둥이 치다
十四年春一月 동모제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입궁시키다
十四年春二月 눈이 5척이나 내리고 나무들이 말라죽다
十四年春三月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다
十四年春三月十八日 김헌창 난의 진압 과정과 진압 후의 논공행상
十四年 김헌창 난에 앞서, 청주에 헌창이 패망할 징조로 기이한 새가 나타나다
十四年春三月 충공의 딸을 태자비로 삼다
十四年春三月 쓰러진 나무에서 움이 나다
十四年夏四月十三日 달빛이 핏빛이 되다
十四年秋七月十二日 검은 해무리가 생기다
十四年冬十二月 주필을 당에 보내 조공하다
十五年春一月五日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지고 눈을 맞으면서 다니다 햇볕을 보고 죽다
十五年春一月 원순과 평원 두 각간에게 궤장을 하사하다
十五年春二月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하다
十五年夏四月十二日 유성이 나타나다
十五年秋七月 눈이 오다
十七年春一月 헌창의 아들 범문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 주살되다
十七年春三月 무진주에서 머리 2, 몸 2, 어깨 4의 아이가 태어나다
十七年夏五月 김흔을 당에 보내 조공하고, 12명을 숙위하게 하다
十七年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치다
十七年 황지의 처가 한 번에 아들 둘 딸 둘을 낳다
十八年秋七月 백영에게 패강장성을 축성케 하다
十八年冬十月 왕이 붕어하다

보면 알겠지만 재위 기간 내내 기근 등의 천재지변과 불길한 흉조가 이어지고 있다. 중간중간 일어나는 김헌창 계열 귀족들의 반란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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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생 흥덕왕이 777년 생인데 형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이 788년 생이었다. 아들이 있을 나이를 최소로 잡아도 소성왕이 770년대 초반생이라면 자신도 770년대 중반생이라 친다면 최소 50세 전후로 죽은 것이 된다. [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옛 기록(古記)에는 826년 4월, 《 신당서》에는 82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 자치통감》과 《 구당서》에는 모두 831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 기록들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되어 있다. [3] 열조 원성왕의 아들인 김예영의 딸. 헌덕왕과 사촌간. 당나라에서 책봉받을 때는 정씨(貞氏)로 책봉받았는데 이는 김예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는 김효정에서 따온 것이다. 김효정은 성덕왕 시기 시중이지만 김효정의 활동연대는 715년경에서 745년경까지이므로(《삼국유사》에서는 754년까지 행적이 남아 있다. 경덕왕의 전처 삼모부인과 함께 황룡사에 대표로 시주했다고 전한다.) 김예영과 동일인물이 아닐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김충공의 딸이라고 하지만 이는 왕태자비인 정교부인의 인적사항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4]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부왕, 《 삼국사기》 < 녹진 열전>에서는 '저'(儲)로 나온다. 한편 이 부왕 직책의 표기상 문제 때문에 헌덕왕의 태자는 따로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출처 [5] 정교부인과 혼인했다고 하는데, 정황상 흥덕왕과는 다른 인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 헌덕왕의 아들로 심지가 있고, 금석문에서 3남이라고 밝혀졌으므로 아들이 없다고 한 《삼국사기》의 서술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이름은 같은 항렬의 김청명, 김체명, 김명, 김조명처럼 ○명 돌림자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무왕비 김정계의 아버지인 김○명 파진찬과 동일인인지는 불명이다. [6] 15세에 출가했다. 법명으로 속명은 알 수 없다. <심지왕사행적>(心地王師行蹟)이라는 금석문에서는 3남이며 13세에 출가했다고 나와서 다소 차이가 있다. 출처 [7] 흥덕왕릉비 기록 [8] 고대에는 통신이 발달해 있지 않으므로 허탕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보덕국이 신라에 멸망하고 1년 뒤에 일본에서 이미 없어진 보덕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소성왕 즉위 축하 사절단을 당나라에서 신라에 보냈는데 소성왕은 사절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등. [9] 다만 젊은 시절의 장보고 등 당나라군 소속 신라인들은 이사도 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헌덕왕이 왜 30,000명이나 되는 신라군을 뜬금없이 당나라 내전에 보내야 했는지에 대해서 몇몇 설이 제기되었는데 중국 학자인 백건흥(拜根興)은 몇 년 뒤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이유에서도 나오듯이 당시 황해에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던 신라인 노예 매매 문제 때문에 적극 개입하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고 추정했다. [10] 이로 인해 장보고가 이사도의 난을 진압해서 김춘추급 민족반역자라는 터무니 없는 흑색선전이 돌아서 신라 폄하론이 또 한번 돌기도 했고 정강의 변을 일으켜 고려처럼 이이제이를 통한 어부지리를 날렸다는 흑색선전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는 오히려 정강의 변 이후 개혁하고 올라갈 좋은 기회를 무리한 국론통합과 의종같은 왕과 신료들이 정사를 멀리하고 붕괴된 기강으로 크게 날려먹은걸 보면 그런 이이제이는 헌덕왕 역시 의종 못지 않은 암군이라 신라에게도 개뿔이었고 정강의 변 같은 대형 사건이 저 당시 터지면 거란같은 국가는 이미 그때부터 커지며 한반도를 위협했을 것이다. [11] 혹은 강주(康州).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서부 [12] 북부 경기도, 황해도, 대동강 인근으로 추정되는 신라 북쪽의 군진인데 한산주 다음 가는 신라의 군사 요충지로 추정된다. [13] 나머지 7기는 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문무대왕릉(대왕암),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흥덕왕릉, 경순왕릉. [14] 북한에 있는 현 정방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15] 다만 이들이 그렇게 현상 유지하느라 신라 왕실을 도울 수 없었다는 것도 나름 신라 왕실에게 큰 인상을 준 좋지 못한 전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고려 왕조는 비슷한 경우 아예 바로 근처에서 근왕군이 일어나 반란군을 자체 진압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는 같은 경우에 움직여볼만한 군대가 정예 근위대 뿐이었다. 김헌창에게 견훤 같은 군재가 있었다면 훨씬 위험해질 수 있었다. [16] 생각지도 않게 신라 정규군 부대가 신라 정규군 장수의 인솔 아래 백제부흥군이 되어버리고, 추풍령이 이 기괴한 백제부흥군에게 가담하는 바람에 3중으로 구축한 방어선 중 가장 외곽 방어선에 큰 구멍이 뚫려버렸지만, 그럼에도 견훤이 이 종심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무려 20년이나 걸렸음을 감안하면, 헌덕왕이 시작한 이 과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17] 6년(814년) 봄 3월에 숭례전(崇禮殿)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즐거움에 극에 달하자 왕이 거문고를 타고 이찬 충영(忠榮)이 춤을 추었다. - 《 삼국사기》 <헌덕왕 본기> [18] 헌덕왕 혼자 한 게 아니고 헌강왕 때까지 역대 신라 임금들이 틈만 나면 구축하려는 했으나 이를 제대로 확립시킨건 헌덕왕의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