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4:39:53

김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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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활약3. 부모에게 쫓겨난 이유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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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자 金元述

신라의 군인이자 김유신의 차남.[1] 마지막으로 지낸 벼슬은 소판으로 석문 전투 패전 후 살아돌아온 일로 김유신 내외에게 쫓겨난 일화로 유명하다.

2. 활약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2년 김원술은 석문 전투에 참전한다. 이 전투에서 초반에 승리한 신라군이 자만한 나머지 당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빈틈을 보이고 참패하는데, 김원술은 적진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으나 담릉을 비롯한 부관들이 말리는 바람에 걸국 생환한다. 김원술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부관들이 말로 설득하다가 김원술이 듣지 않으니 말고삐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퇴각하는 중에도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70세가 넘은 장수인 아진함이 아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 김원술은 살아남는다. 아버지인 김유신은 패전하고도 살아돌아온 김원술에게 분노하여 왕명과 가훈을 저버린 죄로 참수해달라고 문무왕에게 주청하나 문무왕은 김원술의 전공과 상황을 알아서 중형을 내릴 수 없다며 거부하고 그를 용서한다. 하지만 화가 풀리지 않은 김유신은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이제 넌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의절을 선언하며 집에서 내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시골에 은둔한 김원술은 김유신이 사망하고 어머니 지소부인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조차 "살아 생전의 아비에게 아들 노릇을 못했으니 나 역시 너의 어미가 아니다. 내겐 아들이 없다, 나가거라!"라고 냉대하여 결국 만나지 못한다. 결국 부모에게 버림받은 김원술은 통곡하다가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무술을 닦는다. 675년에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이 매소성을 침공하자 김원술은 신라군의 지휘관은 아니지만 참전하여 신라군의 승리에 기여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승리한 김원술을 용서하지 않았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김원술은 벼슬도 거절하고 은둔하여 여생을 보낸다. 김원술의 일화를 들은 일부 백성들은 아무리 신라의 대영웅이라지만 자식이 고의로 도망친 것도 아닌데 자식에게 너무 비정한 것 아니냐며 김유신과 지소부인을 원망하였다.

3. 부모에게 쫓겨난 이유

일화만 놓고 보면 김유신과 지소부인은 매우 비정한 부모가 맞다. 김원술은 김유신의 전공을 잇고자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으나 김원술을 살리려는 부관들에게 이끌려서 도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부관들의 입장도 없지 않은 게, 자신들이 모시는 대장군 김유신이 아들에게 죽어서 돌아오라고 말하더라도 김원술은 반드시 생존한 상태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하는 도련님이다. 그래서 김원술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고 문무왕도 이를 잘 알기에 매소성 전투에 참전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 내외의 비정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석문 전투의 영향과 신라 사회의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석문 전투 이전까지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협력하고 당군을 격파하며 웅진도독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석문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 부흥군은 전멸하고 임진강 이북이 당에 넘어갔으며 신라군도 많은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전사하여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신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버팀목인 김유신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들과 김유신을 적대하는 세력들이 김원술이 아버지 덕분에 살았다고 비난하며 흉볼 가능성이 높다. 석문 전투는 신라군이 대패한 전투이며 고구려 부흥군은 사실상 전멸한 전투이다. 김원술은 최고 지휘관은 아니더라도 화랑[2]이라 고위 장교이며 석문 전투에서는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이 전멸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은 전사하여 사후에도 명예를 지킬 수 있었고 도주하려는 외조카를 붙잡고 "네가 어찌 살려고 그러느냐!"라고 일갈한 설화가 실록에 전해지는 인물이다. 전투에서 패배한 군인의 명예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데 김원술만 살아돌아온 지휘관임에도 처벌받지 않았다. 당장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과 맞서서 백제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한 계백아내와 자식들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며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투에 참전하였고 결국 전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6세기 신라는 주변국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신라가 건국될 당시부터 백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괴롭힌 는 물론이고 진흥왕 나제동맹이 파탄나고 관산성 전투로 원수가 된 백제가 코앞이다. 내물 마립간 시절에 백제, 가야, 의 침공을 막아준 대가로 오늘날의 주한미군처럼 신라의 국정에 간섭하던 고구려와 북방에서 고구려와 같이 신라를 협공한 말갈은 덤(그 이전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가야도 포함된다). 외침이 많은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이들의 침략에 시달리며 위기를 겪은 신라는 목숨을 내놓고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전략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말 그대로 어차피 죽을 거 발악이나 해보고 죽자는 식의 돌격도 없지는 않았지만 전황의 반전을 노리고 계획된 작전이 더 많았다. 김유신도 낭비성 전투에서 그러한 전략을 내세워 판세를 뒤집은 인물이고 황산벌 전투에서 별동대를 이끌고 돌격대장으로 전장에 나선 김반굴과 김관창도 신라군이 많이 사용하던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별동대와 돌격대장은 전사할 위험이 상당히 높고 김유신의 친척들도 전장에서 많이 전사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계백에게 돌격하다가 전사한 김반굴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두 화랑의 전사가 특별하지만 당시 신라에서는 흔한 일이다.[3]

신라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진흥왕 치세에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은 수두룩하다.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청해받은 귀산과 추항도 아막성에서 백제군에게 항전하다 전사한다. 611년에 가잠성의 성주인 찬덕은 백제군의 침공을 버티다 식량이 떨어지자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도 악착같이 버틴다. 하지만 결국 가잠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승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찬덕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가잠성을 되찾고 말겠다며 자결한다. 찬덕의 아들인 해론은 아버지가 항전한 가잠성을 수복하는 작전에 선봉장으로 나서서 싸우다가 전사한다. 대야성의 성주인 김품석의 부하인 죽죽과 용석은 군량고가 불타고 김품석이 자결한 상황에서도 항전하다 전사한다. 백제군이 무산성, 감물성, 동잠성을 침공하자 방어에 나선 김유신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관인 비령자를 돌격대장으로 임명한다. 돌격대장에 임명된 비령자는 전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 거진은 자신을 지켜달라고 부탁받은 노비인 합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한다. 직후 합절도 병사 신분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자 김유신은 신라군의 승리에 기여한 3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공적을 기린다.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은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당의 본격적인 병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신라가 백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다지게 전까지 시간을 벌고자 당에 사죄사로 떠난다. 목숨을 내놓은 길을 떠난 것이고 김흠순은 석방되지만 동행한 김양도는 옥사한다. 어렵게 귀국한 김흠순도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한 후 역사에서 기록이 사라진다. 김흠순의 손자이자 김반굴의 아들인 김영윤은 보덕국 반란 진압에 참전하여 불리한 전세에도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하는 등 신라의 고위층임에도 주저없이 목숨을 내놓아 신라를 지켰다.

나당전쟁 시기에 이르면 진골 출신 지휘관들이 대부분 전사하여 철옹성 같던 골품제도 흔들리고 설오유와 시득처럼 6두품 출신인 장수들에게까지 지휘권이 쥐어진다. 또한 나당전쟁기 신라본기에는 패전기록이 나올 때마다 그곳에서 전사한 현령 등 지방관의 이름이 매번 등장하는데 매소성 전투를 지휘한 승장도 그 이름이 기록에 남지 않은 마당에, 중앙의 경위도 없었을 현령들의 죽음은 일일이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상류층은 물론 하류층과 사회적으로 천시받은 노비들도 전장에 뛰어들어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가 주변국들에게 전쟁을 강요받으며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을 지닌 국가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토대로 국가의 위기를 이겨내고 승리자가 된 신라에서 일개 졸병도 아닌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아들이 패배하고도 생환한 것이다. 김유신 내외가 원술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김유신 내외는 그들이 모시는 조상들과 가족들은 물론 신라를 위해서 고군분투한 장병들과 그 가족들, 역대 선대왕들, 그들의 조상들을 모실 면목이 없어진다. 나아가 신라 백성들에게 비난받는 일이 기다린다. 김원술의 생환은 김유신 가문의 명예를 넘어 신라 사회의 불신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사안이라 볼 수 있다. 신라의 백성들이 김유신과 신라군 지휘관들의 명령에 주저없이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신라인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신라와 사회를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한다는 규율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하는 건 죄가 아닐 수 있지만 패배하고 생환한 것은 이유가 뭐든 간에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다. 신라군 총사령관인 김유신의 아들이 패배하고 생환한 상황은 사회적 규율에 균열을 일으키는 심각한 사안이며, 김유신이 원술을 받아주지 않고 쫓아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김유신은 단순한 신라의 고위층이 아니라 신라군을 상징하는 영웅이다. 아직도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물론이고 육군참모총장이나 병무청장의 아들이 병역을 기피하거나 군대에서 성폭력 등 사고를 치거나 전시에 탈영한다면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듣는 게 당연하다.[4] 김원술의 생환이 이래서 엄중한 사안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가야계라는 출신의 한계를 능력으로 극복하고 출세한 인물이라 골품제로 사회가 돌아가는 조정에서 김유신을 질투하고 공격하려는 세력도 많았다.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고 백성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서 김원술에게 엄격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김유신도 함부로 퇴각하거나 탈영하는 부관들과 병사들을 처벌한 사례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처지를 인정하고 무마한다면 설령 그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김유신이 지 아들이라 감싸준다고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5] 그리고 신라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 부관들과 병사들은 가족이라도 전장에서 도주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라는 김유신의 경고와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신라만의 모습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도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환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다.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군을 궤멸시킨 칸나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에게 사로잡힌 로마군 포로들이 원로원을 방문하자 의원들은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의 말은 듣지 않겠다고 응수하였다. 로마에게 정규군 8,000명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할 수 없어서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원로원이 총대를 메고 분위기를 만들어서 거절하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간신히 돌아온 패잔병들도 사형을 시킨 건 아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본토를 떠나 복무하도록 했을 정도다. 나중에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자 비로소 로마는 노예로 팔린 포로들을 수소문하여 1,200여명의 몸값을 다 지불하고 귀국시켰다.

신라는 물론이고 어느 국가라도 전쟁을 많이 겪어 상무적인 기풍이 강한 국가는 용맹한 최후를 맞는 것을 현명하게 후퇴하는 것보다 높게 평가한다. 칸나이 전투 이전에 일어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의 아리스토데모스는 도주한 것인 아니라 총사령관인 레오니다스 1세의 지시를 받아 스파르타에 전령으로 가서 살아남은 것인데도 왜 전우들처럼 테르모필레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 않고 비겁하게 살아남았냐는 압박과 냉담함을 겪는다. 이후에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한다. 그럼에도 스파르타 정부는 명예만 회복시키고 전투에서의 성과는 본인이 부대에 소속되어 참전한 것이 아니라 무모하게 돌격하여 이룬 성과이기 때문에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4. 기타

  • 현대의 서적에서는 김원술을 언급하면서 이름만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비극적인 인생을 산 김원술이라 창작할 여지가 많아서 비극적인 서사를 만드는 작가들이 많이 참고한다. 김원술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은 대표적인 연극이 원술랑. 작가는 유치진이다.
  •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유신의 또다른 아들 군승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지는 역할을 담당했다.[6] 이복형제인 군승과는 의외로 형님아우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
  • 신암행어사에서는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이름, 뛰어난 무예, 부자지간의 불화라는 설정을 본뜬 원술(슈퍼스트링)이 스토리 핵심에서 활약하는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역사상의 기본 얼개를 따르긴 하지만, 김유신이 문무왕(김법민)이 왕위를 노리는 동생인 김인문과의 관계를 두고 갈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를 단호히 내치게끔 하기 위해 자신도 혈육인 아들을 내침으로써 모범이 되어야 했다는 식으로 보다 당위성을 부여하여 각색되었다.
  • 어린이 드라마 화랑전사 마루에서 21세기에 부활하여 도장을 운영하며 화랑들을 훈련시키는 인물로 나왔다. 배우 이도영[7]이 연기했다.
  • 형으로는 김삼광, 김유신의 서자 김군승이 있다. 그러나 나이를 추측하면 삼광과 군승은 지소부인 소생으로 보기 어렵고, 원술은 672년 석문 전투 당시 나이를 알수 없지만, 지소공주의 소생이 맞다면 지소공주에게는 원술이 장남일 가능성이 크다.

[1] 후술하겠지만 나이를 추정하면 지소부인에게는 장남일 가능성이 크다. [2] 세속오계 중 하나가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다"(임전무퇴)였다. [3] 흔히 반굴과 관창이 단기로 돌격했다가 죽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오해다. [4] 유승준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직후부터 그는 20여 년이 지난 2024년 현재까지도 빙부상 때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에 발을 0.001mm도 들이지 못하고 있다. 과장 보태서 윤석열 정부가 유승준의 대한민국 입국을 허가하면 그 순간부로 군필 남성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이 윤석열 탄핵운동을 일으키고도 남을지 모른다. [5] 인터넷과 통신 수단이 없었던 고대 사회였던 그 당시도 신라군의 총사령관 김유신이 아들이 패전 후 생환하면 엄청난 이슈거리가 될 판인데, 인터넷과 모바일, SNS가 발달한 현재 김유신 - 김원술 부자 같은 꼴이 발생한다면 사회적 파장이 장난 아니다. [6] 김유신은 이에 분노했고 원술을 용서치 않았다. 사실상 원술 때문에 아들을 잃게 된 군승의 어머니 천관녀까지 나서서 원술을 용서해달라 부탁했지만 김유신은 끝내 원술을 용서하지 않기를 택했다. [7] 당시 활동명 백종민.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진평왕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