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21:21:45

이강석(1937)

<colbgcolor=#000><colcolor=#fff> 이강석
李康石 | Lee Kang-seok
파일:이강석.jpg
출생 1937년[1] 2월 5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2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부모 친부 이기붕, 친모 박마리아
양부 이승만, 양모 프란체스카 도너
형제자매 누나 이강희[2], 남동생 이강욱[3]
학력 경기중학교 (중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중퇴)
육군보병학교 (졸업)
임관 갑종간부후보생
최종 계급 소위 (대한민국 육군)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인물.

이승만 정부의 국회의장 이기붕 박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말년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사람이다.[4]

2. 생애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중혼하기 전, 본처 박승선[5]과 이봉수란 아들이 있었으나 7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6],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이기붕과 이승만은 같은 전주 이씨[7] 같은 정당의 정치가로서 친분이 있었으므로,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에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실 이 입양은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무효였다.[8] 거기다 항렬로도 이강석은 이승만의 손자뻘이기에 차라리 이승만의 죽은 아들이였던 이봉수의 양자로 입양되던가 아니면 아들뻘인 이기붕이 직접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기붕은 나이로든 항렬로든 이승만의 아들뻘[9]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세간에서는 이기붕이 자식 팔아 출세하려 한다고 말이 많았다. 차남을 양자로 보내는게 당연한 것인데[10]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을 보냈으니 권력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민의원의장 이기붕의 아들이었으니 이강석의 권력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편입하였으나,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 #하여 결국 중퇴하였고, 육군사관학교에 재입학 하였으나 관절염 때문에 중퇴 후 갑종간부후보생 제도로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의 권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어느 청년이 이강석을 사칭한 가짜 이강석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이강석이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난동을 부린 적이 많았는데도 보도 한 번 안 되었다고 한다.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법정 공판이 열렸을 때는 이승만 정권에 진저리를 내던 대중들이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법정 안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차서 의자가 부서졌고, 심지어 판사 전용 출입문에까지 방청객들이 들어차서 판사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다 법복이 찢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을 조롱한 피의자 강성병의 진술에 방청석이 환호했다는 후문도 있다.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까지 하야하고 4.19 혁명이 끝나갈 무렵인 4월 28일, 친아버지 이기붕,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 온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신도 자살했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쏘았다는 뜻인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어 타살론이 나왔다. 타살론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를 살해하여 국민여론을 달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막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 일가가 죽기 전에 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했던 상태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곽영주는 이 일이 있고 얼마 안 가 사형당해서 사실 확인도 불가능하다.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이전부터 사는 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던 적이 있으므로 수면제 치사량을 복용하고 먼저 자살했고, 나중에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 왜 자기 동생까지 죽이고 굳이 자살한 사람들한테 총을 쏘면서 패륜적인 행동을 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4.19 혁명이 일어난 지 9일 째 되는 날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기붕 일가가 미국으로 도주 준비 중에 자신의 처지에 화가난 이강석이 충동적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몰살한 게 아니나는 추측도 있다.

3. 대중매체에서

  •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 '귀하신 몸' > - 신용규
이승만 정권 12년의 종말, 그리고 그 2인자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그것은 인생무상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는 자유당 2인자로서 권세와 영화를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이 일족의 비참한 죽음을 과연 누가 생각인들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이 비참한 죽음에는 또 다른 일설도 없지는 않다. 이기붕 일가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사살됐다는 풍문이 그것이다. 즉 당시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가 하야한 대통령을 위해 국민여론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인하는 일은 현대 사가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리라 여겨질 뿐 확인할 길은 없다.

어쨌든, 제1공화국 정부와 자유당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122화.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직후 나온 나레이션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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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심영 김두한 상하이 조 의사양반 이정재(형사양반) 심영의 어머니
조병옥 이승만 염동진 김좌진 정진영 장택상
시라소니 나레이션 임화수 박용직 김종원 미군양반
조연 등장인물1
박헌영 김형사 신불출 문영철 김무옥 이석재
문예봉 미와 와사부로 워태커 줄서양반 이기붕 김영태
신영균 개코 애기보살 김해숙 곽영주 눈물의 곡절
최동열 백관옥 신익희 유진산 고깃집 아저씨 유지광
박마리아 중앙극장 관객 이화룡 임동호 신성모 금강
마이클 상사 김관철 정팔 김이수 학생들
연구 대상2
황철 구마적 신마적 쌍칼 이강석 김천호
아구 황병관 삼수 박정희 휘발유 돼지
김후옥 임선규 홍만길 김두한의
친할머니
개고기 김 마루오까
하야시 나미꼬 오상사 와싱턴 김기홍 번개
타 작품 등장인물3
궁예
( 태조 왕건)
세기중기 수리공
( 영웅시대)
왕창한
( 미지왕)
나레이션 양반
( 태조 왕건)
홍재근
( 야수)
흑곰4
( 바리바리 짱)
레이
북두의 권(실사한국판)
장면
폭☆8 백병원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
1. 주요 등장인물만큼 많이 합성되지는 않지만 합성물에는 사용되거나 원작 내 이름이 없는 인물 또는 사물.
2. 아직까지 이들이 비중있게 나오는 합성물은 많이 나오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쓰이고 있거나 거의 쓰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러 야인시대 합성물 제작자들의 연구 대상에 포함되는 인물 또는 사물.

3. 야인시대가 아닌 다른 작품에서 출연했지만 야인시대 출연 배우와 같은 인물이 맡은 배역이라서 합성물에 쓰이고 있는 인물 또는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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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0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의 이기붕 일가 자살 기사에 이강석의 당시 나이를 24세로 표기했다. # 세는나이였다면 1937년생이 된다. [2] 1935년 ~ 1949년 (향년 14세) [3] 1940년 ~ 1960년 (향년 20세) [4] 입적 이후 영식 강석 소위로 호칭되었다. 당대 대한뉴스에서 확인 가능하다. [5]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 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 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6] 출처 - 연합뉴스 (2015.10.08.) : <역사속 오늘> 25살 연상의 이승만을 사랑한 '호주댁' [7] 두 사람은 모두 조선 태종의 후손으로 35촌 간이다.(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 이기붕 효령대군의 17대손) [8] 의용민법 제111조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 조항은 이후 민법이 제정되면서 제875조(직계장남자의 입양금지)에 규정되었다가 1990년에 민법 개정으로 삭제되었다. [9] 이기붕의 아버지이자 이강석의 할아버지인 이낙의와 이승만은 동갑내기였다. [10] 물론 이것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11] 1944년생 배우. 본명은 김길남. [12] 길용우는 이강석이 을 타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처음 승마를 배웠는데 이후 여러 사극에 출연하면서 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13] 일가족 집단 자살 장면은 총쏘는 장면만 스틸컷으로 대체되었다. [14] 학생 시절 동생인 이강욱과 함께 귀가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새해가 되어 이승만에게 이기붕 일가가 새해 인사들 하는 장면에서 이승만의 마음에 들어 이강석을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 이기붕은 갑자기 이야기를 들어 혼란한 와중에도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일 것을 권유하나 이승만은 "이강석을 말한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없는 얘기로 하자"며 화를 냈고 이기붕은 마지못해 이를 승낙한다. 작중 서울대학교 입학 관련은 나레이션에서만 언급됐고 가짜 이강석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15] 양자로 들어간 이후 한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이승만이 최인규를 질책하던 장면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 때는 육군 소위가 되어 있었다. 4.19 혁명 직후 독기를 품고 권총에 탄환을 하나 하나 집어넣으며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라고 결심한 후 결국 권총으로 가족들 모두를 사살하고 자신도 그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강석에 대한 에피소드가 생략되다 보니, 권력을 등에 업고 날뛴 망나니보다는 이래저래 휘둘리다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 온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인물로 묘사된다. 이강석이 가족을 사살하는 씬은 드라마에서는 비극적인 장면으로 묘사되지만 심영물에서는 이승만의 방귀 앞에 가족 전체가 집단 질식사하는 식으로 합성된다. 총을 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인지 누군가를 고자로 만들기도 하며, 아예 집행인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아버지 총으로 쏴 폭8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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