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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로3길 84 (동소문동4가)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인물기념시설 | |
면적 | 155.17㎡[1] | |
지정 연도 | 2004년 9월 4일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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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4170> 돈암장[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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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장 대문[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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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에 지은 근대 한옥.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약 2년간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다.2. 역사
원래 이곳은 조선 시대에 빈민들을 치료하던 동활인서가 있었던 자리였으며, 일제강점기 초중반에는 젖소를 키우는 평산 목장이 위치했던 곳이다. 이곳에 저택을 지은 시기는 1939년으로, 조선 시대의 내시였던 송성진이 자신이 거주할 목적으로 건립했다. 건축 공사는 훗날 무형문화재 74호로 지정받은 목수 배희한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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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LIFE 잡지에 실린 돈암장 근처에서 찍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
이승만이 머물던 당시, 돈암장은 중요한 정치적 무대가 되었다. 이승만이 우익 진영의 최고 지도자로 해방 공간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정치가였던 만큼, 그가 거처한 돈암장 역시 핫플레이스가 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하루에도 적게는 300여 명, 많게는 600여 명까지도 방문했으며, 이 중에는 우익 인사들은 물론, 일부 좌익 인사들도 있었다. 특히 1945년 말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우익 진영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고, 이승만이 그 중심에 서면서 돈암장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승만과 미군정은 충돌하기 시작했고, 점점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집주인 장진영은 이승만에게 슬슬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심지어는 물건 둘 곳이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이승만의 거처 공간에 자신의 짐을 갖다놓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눈치 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압박을 준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1947년 8월 25일에 돈암장 생활을 정리하고 원효로4가에 있는 마포장(麻浦莊)으로 이사했다. #[6] 새 거처 마포장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다케오가 썼던 여름 별장으로, 하지 중장이 주선해준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포장은 햇빛도 잘 안들었으며 비만 오면 습해져서 살기 불편했고 결국 얼마 못가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으로 한 번 더 거처를 옮겼다.
3. 구조
현재 남아있는 한옥 본채를 대상으로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건물 구조가 궁궐의 침전 양식과 비슷하다.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 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온돌방의 3면을 퇴간이 두르는 형태로, 이는 조선 왕궁의 침전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전봉희 교수는 이를 두고 " 조선 멸망 이후 궁실 건축을 담당하던 목수가 민간으로 나간 근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했다. 애당초 돈암장을 지은 사람이 내시였고, 건축을 맡았던 배희한은 창덕궁 대조전 복구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 최원식의 제자였다.
- 장대석 3단 위에 단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며 목재는 백향목으로 사용했다. 건물의 가구는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조립해서 지었다. 각 기둥마다 주련이 붙어있으며 정면 기준 왼쪽에서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일곱 번째 칸에 현판이 달려있다. 주춧돌 사이의 고막이벽은 타일로 마감했다.
- 본채 앞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다.
4. 대중매체
<colbgcolor=#254170> 〈야인시대〉의 돈암장[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