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4.19 혁명
1. 개요
4.19 혁명의 진행 과정을 정리한 문서.2. 혁명의 고조
2.1.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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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시신이 발견된 장소 당시 시신의 모습
3.15 의거 이후 마산 시내의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서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마산시청(現 마산세무서 부지)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現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 카카오맵 로드뷰)에서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 시위에 참여했고 시청 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 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1924~2008)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마산병원(現 경상남도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으며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곤 했다.[1]
시신은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고 소문은 빠르게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병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사진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마고는 이미 1차 마산의거에서 김용실 군(1-C반 급장)과 김영준 군 등 다수의 희생자를 냈고 이는 상고도 마찬가지였던 데다 시신의 주인공 김주열 군은 상고 신입생이었기 때문. 3.15 의거 기념사업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교문 밖에서 독려시위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신발을 전부 감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전을 이유로 마산여고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이 사진은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마산 시내를 가득 메운 학생 시위대[2] | 고문경찰 처벌과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마산여고 학생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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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마산의거 사망자 명단 ||
김영길
4월 11일의 시위는 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시위에는 중년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 특이한 점은 해인대학교(現 경남대학교)학생 5,000~6,000명[4],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오후 6시경 성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에 나섰다. 이날 마산시청와 마산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또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자유당 소속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가 경영하던 공장들도 시민들에 의해 부서졌고 시민들은 마산경찰서 습격 당시 탈취한 수류탄 13개를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경찰서 앞 서장 지프차가 전소되기도 했다. 당시 파괴된 남성동파출소
그날 밤 9시 30분경 경찰은 또 발포했고 한 명[5]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6]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상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파괴하며 기세를 올리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12일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재차 일어나 학생 수백여 명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온통 휩쓸었고 노인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해인대생[7] 수천여 명이 시위를 했다. 매번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수천여 명이 모여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 때도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으며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8]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해 "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2.2.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자세한 내용은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문서 참고하십시오.3. 4.19 혁명
4.19 혁명 당시의 상황 요약 | |||
날짜 | 시위 장소 | 시위 규모 | 비고 |
4월 19일 | 서울, 부산,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전주, 청주 | 10~20만여 명[9] | 서울, 부산, 광주에서 경찰이 발포 |
4월 20일 | 대구, 전주, 이리, 인천 | 5000~6000여 명 | 이승만 대통령 담화 발표, 자유당 견해 피력 |
4월 21일 | 인천 | 미상 | 장면 부통령 10개안 발표, 국무위원 전원 사표 제출 |
4월 22일 | 인천, 군산, 익산, 포항 | 미상 | |
4월 23일 | 인천, 군산 | 3000여 명 | 이기붕 '사퇴를 고려' 발언 |
4월 24일 | 전주, 마산, 인천 | 4500여 명 | 마산에서 노인 데모 발생, 이기붕 모든 공직 사퇴 |
4월 25일 | 서울, 마산, 춘천, 영주, 김해, 진주 | 8~10만여 명[10] | 서울에서 대학교수단 시위 발생, 마산에서 할머니 데모 발생 |
4월 26일 | 전국 각지의 대도시 및 중소도시 | 수십만여 명 | 이승만 하야 성명 발표 |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그동안 미적거리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 부산과 광주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4월 19일 시위 동안 100여명이 넘는 사망자[11]가 발생했다. 정부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시위에 당황하여 이 날 오후 4시 30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사태의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난동', '폭력사건' 운운하며 허둥댔다.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이기붕도 사퇴를 고려한다는 애매한 말로 더욱 공분을 샀다. 이런 한심한 작태에 군대도, 미국도 마침내 등을 돌렸다. 그런 상황에도 시위는 연일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더 자세한 시위 내용과 전개 과정은 아래의 문단을 참고하라.
3.1. 4월 19일, 피의 화요일
3.1.1. 서울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
4월 19일, 신문에 실린 어젯밤의 소식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깡패들이 평화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은 크나큰 분노를 가져왔다.[12] 대학생들은 21일 예정했던 시위를 앞당겨 19일을 거사일로 바꾸고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19일 오전 11시에 시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역정보를 동대문경찰서에 흘린 뒤 실제로는 19일 오전 9시 경에 출발하였다. 우선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13]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14]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대학 곳곳에 격문이 나붙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한 대학생들은 비장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고등학생들은 원래 19일이 거사일인지라 아침부터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일찍 수업이 끝난터라[15] 하굣길에 시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교와 대학교마다 수백,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모교에서부터 쏟아져나왔다. 학생 시위대는 점차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의 방향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를 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가 넘자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어 여러 방면에서 경무대로 접근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민관)[16]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17]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해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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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원 강창조 고병래 고순자 고완기 곽영현 구순자 김관식 김부연 김영기 김왈영 김용안 김응수 김재준 김찬우 김창무 김창섭 김창필 김철호 김지호 김태년 김현기 남기성 남정만 노희두 문화웅 민병록 박건정 박도일 박동훈 박상범 박찬원 박호진 백남웅 서현무 손경호 손중근 송영근 신경식 신보웅 심은준 심자룡 안경식 안병채 안승준 안응헌 안종길[19] 염춘식 유재식 윤경웅 윤광현 윤지섭 이규복 이근형 이기석 이상관 이상헌 이성엽 이시광 이익관 이정옥 이종양 이창원 이채섭 이청수 이향길 이흥수 임동성 임성희 임용학 임원협 장동원 장동환 장인서 전무영 전한승 조광집 조선관 조조남 조주광 지영헌 진삼두 진영숙 차명진 차성원 천인복수 최기두 최기태 최동섭 최신자 최정규 최태식 한명남 한정기 홍순선 홍종필 황규직 김병진 한진수 김광석 김영곤 장기성 최현석 장인모 정석조 최학서 최현철 구자숙 김길현 이기태 차대공 채광석 곽종한 원일순 유종환 이효희 안부자 정임석 전재근 김성수 정규철 이영 고해길 김정기 이항구 하정수 한인관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20] 이 당시의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또 경무대 앞 발포를 시작으로 경찰의 발포는 하루종일 이어져 시위에 참여하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 경찰측 사망자도 3명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총으로 시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가하면 시위대에게 물이나 음식을 제공하거나 부족한 피를 위해 헌혈에 나서는 등 조력도 아끼지 않았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아슬아슬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3.1.2.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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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섭 고정석 김준호 박순희 이귀봉 장기수 김재복 최금동
3.1.3.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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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진 김세창 김영계 백윤선 신정융 옥치용 정환규 지복수 최경자 최봉옥 최정수 강수영 전청언 박형철
3.1.4. 영남권
3.1.5. 경기권
3.1.6. 호남권
3.1.7. 강원/제주권
3.2. 학생의 주도적 역할
계엄군에게 쫓기는 시위대 |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21]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21]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3.2.1. 고등학생
3.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시위에 먼저 나섰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서울의 4.19 당일 시위 주도층이 대학생이었고 이후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면서 대표면담 등 협상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분위기가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들의 활약은 언론에서 묻혀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뿐이다.특히 당시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이 있었을 뿐이며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 따라서 지방의 시위는 대부분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주도하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예를 들어 충북에서는 충주고를 시작으로 시위를 시작했고 참여한 학교는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공고, 청주농고 등이었다. 실제 4.19 혁명 며칠 전 각 고등학교에서 그 학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지금의 청주시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경찰들의 곤봉에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자료는 그 당시 충청일보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 지역에서도 4.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동성고등학교 학생들, 경기고등학교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 이 대열에 9시 이후 점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학생 시위대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동성고 학생 약 500명은 경무대 시위 때 서울대, 동국대 학생과 함께 주력을 형성하여 선두에 섰다고 알려져 있다.
3.2.2. 대학생
4월 19일 당시 오전부터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거기에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종로로 진출했다. 이어 9시경에는 법대와 약대, 수의대, 치의대 등 동숭, 연건 캠퍼스의 거의 모든 단과대학이 합류했고 사범대 및 비교적 멀리 있던 상과대학생들은 9시 30분경에 합류했다.[22]특히 다소 늦게 합류한 의대생들은 흰 의사 가운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는데 실로 의대생다운 자기들만의 독특한 구호를 썼다. 예를 들자면 "학우들이여, 메스를 들어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 같은 구호들. 이들은 경무대 앞에서 총격 사건 발생 후 서울대학교병원과 연락해 의료장비와 앰뷸런스를 지원받아 환자 치료에 힘쓰기도 하였다.
10시 경에는 전날 시위를 벌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다시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어 건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각각 수천 명 단위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연세대학교와 중앙대학교 학생들까지 가세하여 학생시위대는 순식간에 10만 명까지 불어나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다음은 시위에 참여한 대학들의 이름과 참여 숫자를 시위에 참여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정확한 명수는 회고마다 차이가 있다.
- 서울대 3,000여명, 고려대 4,000여명, 건국대 2,000여명, 동국대 2,000여명, 성균관대 3,000여명, 연세대 3,000여명, 중앙대 4,000여명, 홍익대, 경기대, 한국외대, 단국대, 국학대학[23], 국민대, 서라벌예술대[24], 숙명여대, 이화여대 등.
3.2.2.1. 서울대학교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 서울대학교는 피해가 가장 컸다. 당시 문리대 캠퍼스는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맞은편인 마로니에공원 자리에 있었다.[25]3.15 부정선거 및 3.15 의거(1차 마산의거) 다음 날인 3월 16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서 시작된 논의는 이후 문리대 여러 과의 학생 40명[26]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이 서울대의 4.19 집행부가 되었다.
이들은 총괄조(1조), 동원조(2조), 선언문 작성조(3조), 결의문/격문 작성조, 플래카드 및 유인물 인쇄조, 조직조, 연락조 등 5인 8개조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각 조는 주어진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1조가 먼저 전체 책임을 지고 체포되면 2조가 총괄을 맡고 2조가 체포되면 3조가 총괄을 맡는 식의 '파상적 데모 공세'를 하기로 하였다. 4월 15일, 집행부는 다른 학교와의 연락 끝에 서울 시내 전체 대학의 의거일을 4월 21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최완준과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장영백을 고려대학교와의 연락책으로 삼았으나 최완준은 기밀 누설을 우려해 의거일을 고대 측에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4월 18일에 학생시위를 벌였다가 깡패들에게 피습당했다. 집행부는 당혹해 했으나, 18일 오후 3~4시 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동산인 함춘원에서 20여명이 긴급 회의를 열고 25~26일로 연기, 무기한 연기, 19일로 변경 3개 안을 논의한 끝에 19일로의 변경을 확정하였다.
4월 19일 당일에는 1조가 총괄을 맡고, 2~8조가 동숭동 캠퍼스 (당시 주캠퍼스) 및 그 주변에 위치했던 단과대학들을 각각 맡아 (문리대 동쪽, 문리대 서쪽, 미대, 법대, 음대, 의대 등) 동원에 나섰다. 이들은 오전 9시 경[27]에 동숭동 캠퍼스를 출발하여 수의대 앞에서 경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으며 법대, 미대, 수의대생들이 추가로 대거 참가하고 투석전과 육탄전을 벌인 끝에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은 동대문경찰서 앞, 파고다공원 앞 (여기에서 경찰이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 등에 있던 경찰 저지선을 마찬가지로 투석전과 육탄전으로 뚫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였다. 국회의사당에서는 여러 대학 학생이 모인 가운데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후 경무대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상대 (당시 성북구 종암동에 위치), 사범대 (당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위치), 약대 등의 학생들까지 합류하여 경무대 앞에서는 서울대 학생 약 3,000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경찰의 발포로 7명의 서울대 학생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서울대생 6명과 서울사대부중 재학생 원일순(당시 14세)을 포함한 수치이다. 당시에 서울사대부중과 서울사대부고는 현재보다 서울대학교에 대한 소속감이 훨씬 강했다.
사망자 명단 : 고순자(당22세) - 미술대 3학년, 김치호(당21세) - 문리대 3학년, 박동훈(당19세) - 법대 1학년, 손중근(당22세) - 사범대 4학년, 안승준(당22세) - 상대 3학년, 유재식(당24세) - 사범대 2학년
4.19 혁명을 기리기 위해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 학생혁명 기념탑이 존재한다. 이 기념탑은 관악캠퍼스 이전 후 공대 폭포 옆쪽에 있다가, 2002년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67동) 앞으로 이전하였다.
2020년,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 당시 1조장(즉, 총괄조장)이었던 김광 전 명지대 교수[28]가 대학신문에 회고록을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4.19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역할에 대한 회고 중 가장 자세한 것에 속하며 4.19 당일의 진행 및 4.25 교수시위 등에 대한 내용도 상세히 적혀 있다. 링크
출처 뉴시스. |
이하는 4월 혁명 선언문. 본래 이장춘[29]이 처음 선언문을 집필했으나 정치학과 학생회장 윤식[30]이 내용이 약하다며 각하하였다. 결국 3조장 유세희[31]가 초안을 잡고 18일 오후 4시경 도착한 이수정[32]이 본인의 하숙집에서 집필한 것이 최종 선언문이 되었다. 이를 황선필[33]이 커다란 전지에 붓으로 글씨를 쓰고 등사하였다.[34] 4월 19일 당일에는 1조장 김광이 국회의사당으로 가져가 여러 학교의 대학생 앞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유일한 여성 재학생이었던 손 모씨[35]가 읽었다.
象牙(상아)의 眞理塔(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질풍)과 같은 歷史(역사)의 潮流(조류)에 自身(자신)을 參與(참여)시킴으로써 理性(이성)과 眞理(진리), 그리고 自由(자유)의 大學精神(대학정신)을 現實(현실)의 참담한 薄土(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자신)들의 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의 엄숙한 命令(명령)으로하여 邪惡(사악)과 殘虐(잔학)의 現狀(현상)을 糾彈(규탄), 匡正(광정)하려는 主體的 判斷(주체적 판단)과 使命感(사명감)의 發露(발로)임을 떳떳이 宣明(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知性(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現狀(현상)이 民主(민주)와 自由(자유)를 僞裝(위장)한 專制主義(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斷定(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政治史(정치사)는 自由(자유)의 鬪爭史(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如何(여하)한 形態(형태)의 專制(전제)로 民衆(민중)앞에 君臨(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韓國(한국)의 日淺(일천)한 大學史(대학사)가 赤專制(적색전제)에의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의 巨劃(거획)을 掌(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論理(논리)의 演繹(연역)에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僞裝(위장)한 白專制(백색전제)에의 抗議(항의)를 가장 높은 榮光(영광)으로 우리는 自負(자부)한다.
近代的 民主主義(근대적 민주주의)의 基幹(근간)은 自由(자유)이다. 우리에게서 自由(자유)는 喪失(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剝奪(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이성)의 慧眼(혜안)으로 直視(직시)한다. 이제 막 自由(자유)의 戰場(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正當(정당)히 가져야 할 權利(권리)를 奪還(탈환)하기 위한 自由(자유)의 鬪爭(투쟁)은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自由(자유)의 戰域(전역)은 바야흐로 豊盛(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民衆(민중)의 公僕(공복)이며 中立的 權力體(중립적 권력체)인 官僚(관료)와 警察(경찰)은 民主(민주)를 僞裝(위장)한 家父長的 專制權力(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민주주의 이념)의 最低(최저)의 公理(공리)인 選擧權(선거권)마저 權力(권력)의 魔手(마수)앞에 壟斷(농단)되었다.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 및 思想(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專制權力(전제권력)의 악랄한 發惡(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漆黑(칠흑)같은 밤의 繼續(계속)이다.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假飾(가식)없는 專制主義 專橫(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비굴)하게도 威(위하)와 暴力(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良心(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默(침묵)에 自由(자유)의 鐘(종)을 亂打(난타)하는 打手(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日帝(일제)의 鐵槌(철퇴)아래 미칠듯 自由(자유)를 歡呼(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兄(형)들과 같이...
良心(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영원)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死守派(사수파)는 榮光(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현실)의 뒷 골목에서 勇氣(용기)없는 自虐(자학)을 되씹는 者(자)까지 우리의 隊列(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자유)의 秘密(비밀)은 勇氣(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대열)은 理性(이성)과 良心(양심)과 平和(평화), 그리고 自由(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隊列(대열)이다. 모든 法(법)은 우리를 保障(보장)한다.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大學校(대학교) 文理科大學(문리과대학) 學生 一同(학생일동)
우리의 知性(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現狀(현상)이 民主(민주)와 自由(자유)를 僞裝(위장)한 專制主義(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斷定(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政治史(정치사)는 自由(자유)의 鬪爭史(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如何(여하)한 形態(형태)의 專制(전제)로 民衆(민중)앞에 君臨(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韓國(한국)의 日淺(일천)한 大學史(대학사)가 赤專制(적색전제)에의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의 巨劃(거획)을 掌(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論理(논리)의 演繹(연역)에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僞裝(위장)한 白專制(백색전제)에의 抗議(항의)를 가장 높은 榮光(영광)으로 우리는 自負(자부)한다.
近代的 民主主義(근대적 민주주의)의 基幹(근간)은 自由(자유)이다. 우리에게서 自由(자유)는 喪失(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剝奪(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이성)의 慧眼(혜안)으로 直視(직시)한다. 이제 막 自由(자유)의 戰場(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正當(정당)히 가져야 할 權利(권리)를 奪還(탈환)하기 위한 自由(자유)의 鬪爭(투쟁)은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自由(자유)의 戰域(전역)은 바야흐로 豊盛(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民衆(민중)의 公僕(공복)이며 中立的 權力體(중립적 권력체)인 官僚(관료)와 警察(경찰)은 民主(민주)를 僞裝(위장)한 家父長的 專制權力(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민주주의 이념)의 最低(최저)의 公理(공리)인 選擧權(선거권)마저 權力(권력)의 魔手(마수)앞에 壟斷(농단)되었다.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 및 思想(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專制權力(전제권력)의 악랄한 發惡(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漆黑(칠흑)같은 밤의 繼續(계속)이다.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假飾(가식)없는 專制主義 專橫(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비굴)하게도 威(위하)와 暴力(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良心(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默(침묵)에 自由(자유)의 鐘(종)을 亂打(난타)하는 打手(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日帝(일제)의 鐵槌(철퇴)아래 미칠듯 自由(자유)를 歡呼(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兄(형)들과 같이...
良心(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영원)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死守派(사수파)는 榮光(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현실)의 뒷 골목에서 勇氣(용기)없는 自虐(자학)을 되씹는 者(자)까지 우리의 隊列(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자유)의 秘密(비밀)은 勇氣(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대열)은 理性(이성)과 良心(양심)과 平和(평화), 그리고 自由(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隊列(대열)이다. 모든 法(법)은 우리를 保障(보장)한다.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大學校(대학교) 文理科大學(문리과대학) 學生 一同(학생일동)
3.2.2.2. 동국대학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했을 때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효자동 쪽으로 진출했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칠봉(당시 법대 '58)은 "이승만과 면담하러 가자!" 고 외쳤고 이 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경무대(현 청와대 위치보다는 약간 뒤쪽)로 향하기 시작했다. 중앙청 앞에서 경찰과 부딪친 시위대는 이에 맞서서 큰 수도관을 굴리며 행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을 도로 주워 경찰들에게 던지며 전진했다.당시 동국대는 서울대보다 경무대에 가까웠고 서울대생이 동국대로 올 때쯤엔 이미 바리케이드를 뚫기 시작했다. 이러한 바리케이드를 뚫을 때 동국대생은 당시 효자동 근처에서 공사 중이었던 대형 수도관 2개를 앞에 굴리며 전진했다.[36] 이에 경찰은 해산을 위해 최루탄을 쐈고 이 최루탄에 항거하기 위해 학생들은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전진했다. 이것이 유혈사태의 시작이 될 것임은 모른 채로 말이다.[37]
대치 상황에서 선봉을 맡은 법대와 농대 학생들 중 일부가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 둔 소방차(혹은 전차(電車)) 위에 기어올라갔고[38]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 중 일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위대의 선두로부터 경무대까지는 100여미터를 목전에 둔 상황. 나머지 대열은 중앙청 옆길에서 경찰과 여전히 엉켜 있었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40분이라는 얘기도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총에 맞아 노희두 열사(법대 '59)와 박흥규, 이종학(농학 '59) 등 여러 명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러한 조준사격은 경고사격에서 최루탄으로 눈을 가린 몇몇 학생들이 전방을 보지 못해 당하게 된 것이다. 시위대가 앞으로 와도 경고사격의 조준점을 낮춰야 했던 경찰들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몇 명의 학생들이 즉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당시 조준사격은 일반 소총이 아닌 기관총을 쏜 것이다. 조준 사격에 분노할 대로 분노한 법대 학생들은 서소문을 지나 서대문 로터리로 몰려가서 적십자병원 옆 이기붕 국회의장 자택을 점거해 버린 후 한달음에 서쪽 끝인 서대문에서 동쪽 끝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까지 시위를 벌이다가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참 지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해산했다.
"희두가 4.19 혁명 당일의 최초 희생자였다"고 김칠봉 열사는 증언하였고 노희두 열사는 불행히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법정대학의 후신인 동국대학교 법과대학은 이를 기리는 의미에서 현재에도 '선봉법대' 의 칭호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에는 단과대 로비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하고 있다. 또한 동국대 전체적으로는 만해광장 한 켠에 '동우탑' 을 건립하여 기리고 있으며 매년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서 북한산을 오르는 '4.19 등반대회' 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4.19 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수여한 4.19 혁명 공로훈장 건국포장 239개 중 35개가 동국대학교에 추서 혹은 서훈되었다.
4.19 혁명 당시 동국대학교 학생들이 행진에 들고 나갔던 플래카드. 2006년 당시 신축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입구 로비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옮겨졌다.
3.2.2.3. 중앙대학교
중대신문 4.19 특집기사 - 의에 죽고 참에 살았다.4.19 혁명에 참여한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4.19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것.
중앙대학교는 하루 만에 6명이 사망하여 서울대학교(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런 연유로 중앙대의 별명이 '의혈' 이다.
다음은 중앙대에서 발표한 선언문.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사망자 명단 - 고병래(상학과3), 김태연(약학과3), 서현무(법학과3), 송규석(정외과3), 지영헌(신문학과3), 전무영(신문학과1)
6인의 열사들의 영정과 이름은 중앙도서관 앞의 탑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탑의 비문의 내용.
우리들은 남으로부터 싸워 올라가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다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39] 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다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39] 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
희생자 6명 중 유일한 여성인 서현무는 4월 19일 발포로 사망한 다른 5명과 달리 시위 도중 경찰에 구타당하고 연행된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혁명이 성공하면서 금방 풀려났지만 집안 형편이 가난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40] 7월 2일 병원에서 숨졌다.[41] 사후 다른 중앙대 4.19 희생자인 김태년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4.19 민주묘지에도 합장되어 있다.[42]
3.3.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 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43][44]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우째 총부리를 들이댈수 있는교? 만약 위에서 시위대를 쏘라고 지시하면 우리는 아스팔트 바닥을 쏘고 말깁니더"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는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이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45]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46]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당시 서울 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 사단장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해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해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해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해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47]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해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4. 자유당 몰락의 전주곡
4.1. 등을 돌리는 우방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다."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알렉산더 허터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48]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 각서는 사실상 미국이 이승만에게 등을 돌렸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즉각 서구 언론들도 일제히 부정적인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더 타임즈는 4.19를 보도하며 "혼미한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항거"라고 평가했고 가디언지는 "이번 사태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이 져야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런던뉴스 크로니클은 이승만을 향해 "고독한 독재자"라고 비판고 런던 헤럴드는 "이승만에게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썼으며 심지어 버마의 버마 네이션지조차 "독재자에 항거하는 치명적인 학생 운동"이라고 평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4.19의 근본 원인은 이승만의 무능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과 서구 자유진영 국가들이 등을 돌린 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49] 그 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50]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51]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4.2. 4월 25일, 다시 불붙은 시위
4.2.1. 교수들의 시위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시간이 지날수록 소강되던 시위를 되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었냐 하면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52] 이 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는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자기들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 몰라 놀랐다는 후일담이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 대학가 사이에는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당시는 유교 문화가 훨씬 진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던 까닭이다.[53]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이며,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4.19 혁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교수들이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는 교수들의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에다 애국가까지 제창했으며 기습시위였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54]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55][56]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57] 정치깡패 보스들의 집을 공격해 부수었다. 이제 점점 상황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옭아매고 있었다.
4.2.2. 어린이들까지 나선 시위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58]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지난 19일 피의 화요일에 수송국민학교[59]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60]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4.2.3.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 되다
계엄군 전차 위에 올라간 시위대의 모습. |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전차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61]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 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5. 4월 26일 이후
자세한 내용은 4.19 혁명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안타까운 것은 후일 5공화국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에서도
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왔고 이 사건이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일지도.
[2]
바로 위 문단의
상고-
마고 연합 스크럼이다. 사진을 확대해 보면 모자의 교표에서 앞줄은 마고, 그 뒷줄은 상고. 그 다음줄은 마고..인 것을 알 수 있다. 촬영지는 현재의 오동동으로 추정된다.
[3]
당시 마산여고는 현 경기여고 교복과 비슷한 흰 양장 칼라에 검은색 바지 교복이 특징이었다. 성지여고의 경우 세일러 칼라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살던 마산 시민들에게는 한눈에 구분이 가능한 부분이다.
[4]
이때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었다. 앞 주석 참고.
[5]
당시 신문자료는 물론이고 역사책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정작 의거 당시 사망자 12명의 신원과
사망 경위를 보면 2차 항쟁 당시 사망자는 1명으로 나타났다. 또
상황일지에도 4월 11일 경찰 발포로 1명이 죽었다고 나와 있다. 참고로 당시 사망자 12명 중 9명은 제1차 마산의거로, 1명은 제2차 마산의거로, 2명은 4월 26일의 시위 당시 각각 사망하였다.
[6]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 시절에는 강한 야당 성향을 보였지만
조선총독부에 인수되어
매일신보가 된 이후 철저하게 집권여당 성향의 어용신문이 되었다.
21세기 들어서도 서울신문은 정권이 바뀌자마자 논조가 바뀐다.
[7]
현
경남대학교
[8]
그러나 이때는 부산일보와 동아일보가 이미 11일 당시에 취재하고 전국에 특종을 터뜨린 상태였다. 이때 기자가 훗날 할 말은 하는 정치인으로 국회의장까지 오른
이만섭.
[9]
서울에서만 10만여 명, 광주 5000여 명, 전주 3000여 명, 청주 300여 명 등
[10]
서울에서 4~5만여 명, 마산에서 3만여 명, 춘천 2천여 명, 영주 수백여 명, 김해 200여 명
[11]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 등
[12]
오보였지만 학생 1명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신문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적 풍조가 깊게 남아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은 어려운 경제 형편과 가까스로 문맹을 벗어난 사회상, 국민학교만 졸업한 다음 바로 부모의 일을 돕거나 따로 취직해 먹고사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 대학생은 현재
대학원생의 위치도 가볍게 넘어서는 대한민국의 초 엘리트이자, 나라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여겨졌고, 반대로 정치깡패들은 인간 쓰레기로 여겨져서 군사 정권 땐 닥치는 대로 사형을 집행해도 반발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비록 잘못된 소문이긴 했지만, "깡패 새끼들이 대학생을 때려죽였다더라!" 같은 소문은 사회에 공분을 일으키고도 남았다.
[13]
원래 문리대 학생회 등 대학생들이 계획했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고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일이 4월 19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안 고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며 4월 18일 먼저 시위했고 고려대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며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였다.
[14]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구호들은 여러 번 나왔다.
5.18 민주화운동 때에도 "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 정신 이상 없다" 같은 구호가 있었다.
[15]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 데모를 할 것을 우려해 오후 1시에 하교하도록 했으나 이는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16]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
[17]
광화문은 이때 복원되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세종로 앞은 뻥 뚫린 공터였다.
[18]
경찰 사망자는 하늘색으로 구분하였다.
[19]
경복고 학생으로 작가
황석영이 사망 당시 옆에 있었으며
문희상 전 국회의장과 같은 집에서 하숙했던 사이라고 한다.
[20]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만해광장 옆 언덕배기에 있는 동우탑은 노희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념물이다.
[21]
진영숙은 당시 희생자 중 유일하게 유서를 남긴 학생이다. 데모대의 버스를 타고 구호를 외치다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그 자리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불과 14세였다.
[22]
당시 서울대학교는 단과대별로 캠퍼스 소재지가 달랐다. 상과대학의 경우는 현재의 종암동 서울사대부고 위치에, 사범대학은 신설동 건너서, 서울사대부고는 현 청량리 미주아파트 부지에 있었다.
[23]
해방 후
정인보가 학장으로 취임한 종합대학이었다. 현저동에 있었다고 하며 60년대 후반
우석대학교(현 우석대와 무관)에 흡수되었으나 이 우석대마저 통째로 1971년 고려대에 흡수합병됨에 따라 현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 중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
[24]
현
중앙대 예술대학.
[25]
일설에 따르면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이유가 서울 시내로의 진입이 용이한 서울대생들을 산골짜기에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문의 로터리 구조나 전투경찰부대 입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 사실 현재 서울대의 관악캠퍼스는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그 일대는 등산객들이 자주 온다.
[26]
김광의 회고에 따르면, 정치과와 외교과 3학년으로는 윤식(당시 정치학과 학생회장), 유세희, 노건일, 이수정, 황선필, 정종문, 오동휘, 김구, 이장춘, 김홍준, 이영일, 박실, 양성철, 박운서 등, 2학년으로는 최인환, 이청수, 김영작, 이동화, 공선섭 등. 이외에 중문과의 권혁조, 사학과의 노흥권, 철학과의 서정복(격문 작성자), 독문과의 송재곤, 언어과의 김인수(2학년), 국문과의 김석산, 사회학과의 이충호, 이강준이 참여했다.
[27]
정확한 시간은 회고마다 차이가 있다.
[28]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현재로 치면 단과대학 학생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학생회 수석부위원장
[29]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외교부 주오스트리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사, 본부대사.
[30]
이후 베일러대 경제학 박사,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국민대 교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31]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컬럼비아대 박사, 한양대 교수, 한양대 부총장
[32]
당시 대학신문 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한국일보 기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부 장관
[33]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동아일보 기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방송 사장
[34]
등사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한영옥이 했다는 회고도 있다.
[35]
이 인물의 이름은 현재까지 불명이다.
[36]
지금도 좁지만 그 당시에도 좁던 그 길을 대형 수도관 2개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37]
당시 이런 두건은 최루탄을 막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시야 방해로 기관총에 학생들이 죽는 것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상대로 총을 쏜 경찰의 진압은 이러한 이유로도 용서될 수 없다.
[38]
이 부분은 기록에 따라 전후 사정이 뒤바뀌어 있다. 동국대학교 측과 3.15의거기념사업회측의 기록은 발포 전이 아니라 발포 후 탈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소방차 쪽으로 오히려 진출하여 이탈에 성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상황과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동국대생들이 바리케이드를 뚫은 것은 버려진 전차(電車)였고 소방차는 조준 사격을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듯하다.
[39]
단기로,
서기 1960년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61년까지 단기가 국가 공식
연호였다.
[40]
시계를 팔아서 몰래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41]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4.19 당시 겪은 상황에 대해 증언하는 유고 일기를 남겼고 사후 중대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에 연재되었다.
[42]
김태년 열사가 친구 이성호 씨와 주고받은 편지도 친구들의 추모시, 수필과 엮여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사료로 평가된다.
[43]
20년 후
5.18 민주화운동에서 경찰이 온건하게 인권을 존중하여 진압하고 반대로
반란군인 계엄군이 폭동적 시위진압한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물론 저 계엄군들은
충정훈련을 통해
가스라이팅을 당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44]
다만 일부 세력이 지금까지의 불만과 혼란스러운 틈을 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박정희는 육사생도들을 모아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밝혀진 바로는 이게 박정희의 첫 쿠데타 모의이며, 이후 4.19 혁명 1주년 행사때 다시 쿠데타 모의를 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5.16 군사정변 때 성공했다. 계엄군으로 위장한 일부 군인들이 경무대에 잠입해 이승만을 끌어내리고 쿠데타를 하겠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이 있었기에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박정희는 명망 높은 군인이었던 이종찬 총장을 설득해 후에 일어날 구설들을 막기 위한 바람잡이로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이종찬 총장은 군이 시위진압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쿠데타에 이용되는 것도 반대했기에 박정희의 쿠데타는 무위로 돌아갈 수 있었다.
[45]
이러한 준군사조직화가 얼마나 심했냐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군 내부 반란 사건과 프래깅으로 인해 경찰에 무장이 집중되면서 당시 최신화기인 M1개런드 소총, M2카빈 소총 등 개인화기는 육군보다 더 많았다고 알려지며 후에 이러한 무장의 분산이 오히려 6.25 때 무기부족으로 최전선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심지어는 기관총인 M1919를 보유하였다는 기록도 있었다. 오죽하면 미군과 빨치산 토벌을 갔다가 무장이 너무 좋아 미군이 위장한 빨치산인 줄 알고 서로 교전한 기록도 있다. 심지어 한국전쟁때는 국군이 북한군에 밀려 패주하는데 경찰들이 방어선을 틀어막는 어이없는 일까지 일어났다.
[46]
아이러니한 것은 1957년경 사망한 경찰 초대 총경
차일혁은 무정부주의 성향에 가까웠다.
[47]
김정남, '4.19 혁명', 2003, 84페이지.
[48]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적, 배타적 외교 행태를 탐탁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미국은 자본진영 우방국인
일본과 남한이 관계를 돈독히 할 것을 원했으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라인(
평화선)을 선포하는 등 대일외교 부분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5ch
혐한들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자기 세력에 끌어들여서 친일파 득세의 원흉(게다가
뉴라이트 가운데 상당수도 친일을 용서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찬양하는 경우까지 있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담이긴 하지만 이승만이 한 일 중 호평받는 것 중 하나가 독도 해역 들어오는 일본 배는 꼬박꼬박 나포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이른바 '이승만 라인(
평화선')) 이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49]
이에 대해 "이승만이 하야하면 대통령직을 받을 사람이 사임하면 어찌하겠느냐" 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하야를 촉구하는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배수진이기도 한 셈
[50]
시간상으로는 이기붕이 4월 23일 오전 10시 50분에 발표를 했고, 뒤이어 장면은 4월 23일 오전 11시 5분에 발표했다. 이기붕은 장면이 부통령 사퇴를 발표하기 전에 먼저 발표를 해서 김을 빼려는 목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퇴 고려라는 어정쩡한 발표는 국민들의 분노만 돋궜을 뿐이었다.
[51]
전날인 23일에 이승만이 허정에게 찾아가 사태수습 방안을 물으며 입각을 권유할 때 거의 애걸조였고 목소리가 떨렸으며 흥분되어 있었다. 출처는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 허정 편》, 희망출판사, 1966, p.207.
[52]
은행이 전산화되기 이전에는 월급이 계좌이체되는 것이 아니라 수령자가 직접 봉투에 담긴 두툼한 현금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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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도 사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다. 조선시대 식자층은 대부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무로서 당연하게 여겼다. 물론 벼슬하는 일은 거절하는 것이 청빈의 상징으로서 좋게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관직을 해먹는 것과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가령 남명
조식은 벼슬은 전혀 하지 않았으나 상소는 여럿 올렸다. 다만 병자호란 이후로 청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에 실망해 관직에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는 유림들이 많았고, 나가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격화된 당쟁과 뒤이은 세도정치로 인해 수도인 한양 근교의 명문 사족들만이 출세길에 오를 수 있었기에 조선 후기에는 이런 정치현실에 염증을 느껴 정치 관여를 피해 학문 공부와 후학 양성에나 집중한 유림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문화는 조선 후기의 정치현실에서 유림들이 느꼈던 감정을 이어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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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는 21세기에도 대단한 직업이긴 하지만 당대에는 정말로 엄청난 직업이었다. 무학과 문맹이 흔했고 의무교육이 겨우 도입되던 그 시대에 국내외 대학에서 각 분야를 전공해 학위를 딴 사람들로서 한마디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당시 1~3대 대선을 보면 "박사"라서 불린 이승만을 제외한 후보들의 호칭이 전부 "선생"이었는데 이승만만이 유일하게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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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는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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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렬 국방장관은 1개중대를 더 보내서 이기붕의 집을 경비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실상은 이기붕의 집을 경비하고 있던 기존 병력마저도 철수해 버렸다고 한다. 사유는 정확히 알수없으나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현장지휘관이 철수해 버린 게 아닌가라는 추측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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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 자리에는
김구 동상이 서 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 개신교계와 보수세력, 뉴라이트들이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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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당시 국민학교 3~6학년이면 1948~1951년 생으로 2020년대 기준으로 70대다. 이 연령대의 사람들은 1970년대 유신철폐 운동은 물론이고
6월 항쟁 당시 넥타이 부대로 나섰던 분들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하이라이트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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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여서 당시 총격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는 1977년에 폐교되었으나 2001년 강북구 번1동으로 자리를 옮겨 재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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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설에 의해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국민학생들의 자발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교사들이 먼저 협의하고 교사의 인솔하에 거리로 나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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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일화로
6월 항쟁 당시 진압 경찰들에게 꽃(장미)을 주며 "전경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 꽃 받으세요"라고 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