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1:09:18

핍진성

진실성에서 넘어옴
1. 개요2. 정의3. 어형과 역사4. 유사 개념과 비교
4.1. 현실성과의 차이
4.1.1. 예시4.1.2. 현실 배경 이야기에서
4.2. 개연성과의 차이
5. 보완 방법
5.1. 가상의 개념 도입5.2. 차용
5.2.1. 현실 개념 차용5.2.2. 기존 작품 차용
5.3. 핍진성과 캐릭터5.4. 암묵적 합의
6. 창작물의 여러 사례
6.1. 워크래프트 시리즈 오크 해리 포터 시리즈 집요정의 예6.2. 핍진성이 어긋난 예6.3. 도량형과 각종 단위
7. 정치적 올바름과의 관계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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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핍진성(, verisimilitude)은 진실 거짓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객관적인 관측자가 진실에 가깝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를 이르는 형이상학적 성질로, 주로 철학과 문학에서 사용된다. 문학적 핍진성은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의미한다.

2. 정의

핍진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아래 핍진성의 정의는 대부분 문학에서의 핍진성을 가리킨다. 칼 포퍼를 필두로 한 철학자들이 구획 문제 논의 등에서 사용하는, 철학적 핍진성(truthlikeness)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문서(영어)를 참조.
verisimilitude literature
verisimilitude, the semblance of reality in dramatic or nondramatic fiction. The concept implies that either the action represented must be acceptable or convincing according to the audience's own experience or knowledge or, as in the presentation of science fiction or tales of the supernatural, the audience must be enticed into willingly suspending disbelief and accepting improbable actions as true within the framework of the narrative.
핍진성은 극적인, 또는 극적이지 않은 픽션 속 현실의 외형으로, 묘사되는 행동이 독자 스스로의 경험 또는 지식에 비추어 수용할 만 하거나 설득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는, 사이언스 픽션이나 초자연적 설화 등을 제공함에 있어, 독자가 기꺼이 의심을 멈추고 이야기의 틀 안에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 Cambridge Dictionary의 정의 #
verisimilitude noun [ U ] formal /ˌver.ɪ.sɪˈmɪl.ɪ.tʃuːd/
the quality of seeming true or of having the appearance of being real:
She has included photographs in the book to lend verisimilitude to the story.
진실되어 보이거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질.
그녀는 이야기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해 책 속에 사진들을 끼워넣었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한국어 사전에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핍진-하다2(逼眞하다) 형용사
1.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대저 진상(眞像)을 그림에 있어 핍진하게 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가령 대면해서 모사(模寫)한 칠분의 진본(眞本)이라 할지라도 털 하나 머리카락 하나가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것인데….
<<번역 정조실록>>
2.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그리고 심유(沈攸)의 소(疏)가 묘사한 것이 너무나 핍진하여, '심극전(沈極傳)'이라고 하였다.
<<번역 숙종실록>>[1]
핍진성(逼眞性) 명사
(형태: ±逼眞-性)
1. 문학 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다고 독자에게 납득 시키는 정도.
소설을 이해하거나 평가하는 데 있어 핍진성이나 리얼리티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핍진-하다2(逼眞--) 형용사
(활용형: <불규칙 활용> 핍진하여 핍진해 핍진하니 / 형태: ±逼眞-하_다)
1.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
{{{#8b8b8b 그 작가의 필치는 생동하고 표현은 핍진하다.
2. (무엇이)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3. 어형과 역사

원어 'verisimilitude'는 신고전주의에서 '현실성', '도덕성', '일반성'의 부속 개념으로, '정말인 것 같음', '진짜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용어로서의 'verisimilitude'는 17세기 영국에서 라틴어 verisimilitudo(truth-like)의 변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는 이 용어를 'truthlikeness(진실성)'나 'fidelity(충실도)'로 풀어 쓰기도 한다. 한국어에서는 영미권 해석인 'truthlikeness'를 번역하여 현실성(現實性), 진실성(眞實性)의 유의어로 설명한다.

국립국어원은 'verisimilitude'의 번역으로 '핍진성', '정말 같음'을 제시했는데, 용어의 한자 뜻을 풀이해 보면 (핍박할 핍), (참 진), (성품 성)으로 '진실에 가까운 정도'가 된다.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상기 정의처럼 '핍진-'은 '핍진하다'의 어근으로서만 제시하고 있고 '핍진성'을 단독 명사로 등재하지는 않았다.

한자어 어휘 '핍진성'은 예로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쓰여 왔던 '핍진하다'라는 말로부터 유래했다. '핍진하다'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고전소설인 《낙천등운(落泉登雲)》 등에서도 등장하는 어휘로, 상기 정의에서와 같이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 '사정이나 표현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如果倭警逼眞, 令將金、復、海、蓋、東昌五倉米豆, 共一十萬四千四百四十石九斗, 撥用堅厚船隻, 擇取慣熟海路水手, 運至平壤, 發朝鮮轉運。」
"그리고 과연 왜적의 경보(警報)가 핍진(逼眞)하다면 금(金)·복(復)·해(海)·개(蓋)·동창(東昌) 등 다섯 창고의 미두(米豆) 합계 10만 4천 4백 40석 9두(斗)를 튼튼한 배에 싣고 바닷길에 익숙한 수수(水手)를 가려 평양(平壤)까지 운반한 다음 조선 각지로 전운(轉運)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80권, 1596년(선조 29년) 9월 8일 신축 4번째 기사 중
大抵畫眞之逼眞, 爲最難。
"대저 진상(眞像)을 그림에 있어 핍진(逼眞)하게 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정조실록》 12권, 1781년(정조 5년) 7월 23일 계해 2번째 기사 중

철학 및 문예 이론에서의 'verisimilitude'를 번역한 어휘로서의 '핍진성'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용례 역시 일제강점기의 문학 비평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1920년대 이후에는 이미 널리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音樂(음악)이 나의 귀를 잠그고 이 繪畫(회화)가 나의 눈을 어리게 하였다 안이다 音樂(음악)에 비길수업다 繪畫(회화)에 견줄수업다 아모리 微妙(미묘)한 音樂(음악)인들 逼眞(핍진)한 繪畵(회화)인들 나로 하야금 이러케도 怳忽(황홀)케 할 슈 잇스랴
" 人生(인생)의孤舟(고주)" 조선일보 1921년 8월 27일 칼럼 중

오늘날 '핍진하다', '핍진성'이라는 말은 일상 회화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용어지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자주 쓰인다.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단어는 아니므로 비평문, 특히 대중문화 비평문에서 핍진성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 비평문에 익숙지 않은 대중들에게 자칫 현학적으로 보여 독자들과의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다만 아래의 설명에서 보듯 '진실성', '사실성', '현실성' 등의 일상 용어와는 구별되는 개념인지라 대체할 용어를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4. 유사 개념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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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현실성/핍진성을 설명하는 위의 이미지가 유명하다.
  • 현실성: 빔 쏘는 슈트는 현실에 없지만 아이언맨 세계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아이언맨은 등장할 때부터 강화 슈트를 입고 나오므로 작중 세계에서 강화 슈트의 등장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 핍진성: 은 현실에 매우 흔하지만 반지의 제왕 세계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총이 있다고 설정하면 핍진성 문제는 해결되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다. 총이라는 물건이 판타지에 보통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판타지에 칼이 나오는 것은 어색해하지 않지만 총이 나오면 어색해하기 때문에 총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설명의 부담이 크다. 워크래프트 시리즈처럼 총을 등장시키는 판타지 세계관도 있는데, 총이 등장할 정도의 기술력을 묘사하면서도 마법 위주의 판타지 세계관과 잘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과학 분야에 르네상스 스팀펑크 풍 등 약간 비현실적 감성을 부여하는 등) 작품 분위기는 사뭇 바뀌게 된다. 당장 전개에 총이 필요하다고 쓱 등장시키기는 어려운 선택지이다.
    더욱이 총의 등장과 함께 작중의 모든 전개들이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서 (지금까지 총이 있는데 왜 안 쐈냐 등등) 이야기 개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다만 짤만 보면 '총 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총의 존재'가 핍진성을 해치는 것이지 일단 총이 있다고 치면 간달프가 그걸 쓰는 것은 개연성을 해친다고 보기 어렵다. 간달프가 무슨 마법 근본주의거나 신기술 부정주의자라는 묘사가 있다면 모를까, 일단 적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면 쓰려고 시도는 해볼 가능성이 높다.
  • 개연성: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느금마사는 "슈퍼맨과 배트맨의 어머니 성함이 같다"라는 우연이 너무 지나쳐서 개연성을 해쳤다.

4.1. 현실성과의 차이

핍진성은 ' 작품 안에서 설정된 세계'를 근거로 현실적인 정도를 판단하기 때문에 현실성과 구별된다. 현실성은 작품 속 세계가 현실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하면 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지만 핍진성은 작가가 설정을 그렇게 짰다면 현실의 세계는 어떻든 관계가 없다. 오직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작품 속 세계에 맞게 살아가는지만이 중요하다.

만약 이종족과 마법과 주술이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이라면 판타지는 원래 허구이기 때문에 현실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허구성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설정이 정교하게 짜여있고 작중 사회와 등장인물들이 서로 적절히 어우러져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면 핍진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인기 만화인 헌터×헌터에서 작중 등장하는 국가나 집단, 넨 등의 능력은 완전한 허구지만 그 안에 국가체제, 인터넷 등 통신 인프라, 국가간 대립구조, 협회 규정 등이 나름의 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허구성을 쉽게 느끼지 못한다. 특히 중세 판타지 왕좌의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은 정교한 설정으로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은 어느 정도 개연성 있는 세상을 현실성 있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사실 현실은 개연성 없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지지만, 사람은 이를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 자신의 문명권을 구한 전쟁영웅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죽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현실에서는 매우 자주 벌어지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으레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리 없다"라고 (실제로는 개연성이 없을 뿐 현실성은 충분한데도)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2] 그런데 창작물은 현실이 그렇게 개연성이 없다 해도 창작물로서 최소한의 개연성은 확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개연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확률적 요소, 즉 이라는 것은 창작물에서는 확률적 요소가 아니라 작가가 구성하는 확정적인 것이라는 중대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3] 개연성 없이 확률적으로 전개한단 건 작가 맘대로 전개해놓고 운이 좋아서 그랬다고 우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핍진성 역시 창작물에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개연성은 있어야지만 그것을 현실감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즉, 핍진성이란 현실성과 동시에 개연성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지만 느낄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4] 그래서 실화 배경 작품들도 우연한 사건들을 두고 앞으로 일어날 일의 징조였다느니 하는 (현실적이진 않고 오로지 창작물 상의 개연성만을 위한) 복선을 넣어 개연성을 보강할 때가 많다.[5] 이러한 까닭으로 사건의 시작은 우연이어도 좋지만[6] 엔딩이나 끝은 필연적이여야한다. 부조리극이라면 우연한 불행으로 끝나도 되는 예외가 있지만, 이도 부조리극이라는 극 중의 개연성이 선행되어야하는 것이다.

4.1.1. 예시


위 항목 표에서도 보듯 만화 원피스에서 쿠이나가 계단에서 실족사한 것도 무너진 핍진성의 좋은 사례다. 원피스에서는 위험한 흉기나 폭탄 등 수많은 살상무기들이 터져도 등장인물들이 잘 죽지 않는 설정이라고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에 굴러떨어져 죽은 쿠이나를 보면서 많은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낀 것. 이는 오히려 현실이었으면 꽤나 위험한 사고이기 때문에 '현실성'은 높은 사망 원인이지만, 작품 내적으로 설립된 배경지식이 이를 뒤바꾼 것이다.[12] 만약 원피스가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면, 독자들은 쿠이나를 정상으로 여겼을테고, 반대로 다른 등장인물들의 말도 안되는 내구력에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13]
So there’s sound in space. I can’t suddenly have spaceships flying around without any sound anymore because I’ve already done it. I’ve established that as one of the rules of the — of the — of my galaxy and I have to live with that.

그래서, (나의) 우주에는 소리가 있다. 이제 와서 아무 소리도 없이 날아다니는 우주선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내가 그런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이미 내 은하의 규칙 중 하나로 굳어졌고, 나는 그 규칙과 함께 살아야 한다.
조지 루카스, '왜 스타워즈 시리즈의 우주에서는 소리가 있냐?'는 질문에 대해
앞서 인용했듯이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서도 현실성과 핍진성이 차이를 보이는 예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우주선을 들 수 있다. 우주 공간은 진공이라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문제는 관람자들 중에서 그런 우주 공간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14] 오히려 대다수 관람자들은 큰 트럭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소리, 비행기가 공기를 찢는 소리 등 일상의 경험을 통해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면 굉음이 잇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따라서 위의 인터뷰에서처럼 "나의 우주는 그런 우주다"라고 해버려도 관람자들로서는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

여기에 더해 이 부분에서는 설정이란 그 자체의 현실감도 중요하지만 창작물로서의 재미도 고려 요소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조지 루카스가 저렇게 설정한 것은 근본적으로 우주선 같은 물체가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가 안 나면 재미가 없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재미의 기준은 관람자마다 다른 면은 있으나,[15] 오늘날 대다수의 관람자, 특히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인상 깊은 거대한 시청각 효과를 기대하는 면이 있다.[16]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면 현실에서 겪는 커다란 소리가 나야 웅장함을 느끼고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독자들이 많다. 즉, 이는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 현실성을 어쩔 수 없이 희생한 일종의 만화적 허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4.1.2. 현실 배경 이야기에서

어떤 작품이 명백한 현실에 기반한 작품, 예컨대 역사 소설이나 사극 혹은 현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핍진성과 현실성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작품에서 설정해둔 세계가 곧 현실의 사람들이 만든 세계이므로, 핍진성을 따지는 것이 곧 현실성을 따지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배경의 작품이라 해도 현실성이 바로 핍진성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핍진성은 어디까지나 작품 향유자가 느끼는 현실감이며, 이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인식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그 사건이 물리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인지(사실성)의 여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17] 가령 추신구라를 보면 중세 일본에서는 칼싸움이 벌어지면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까지 할복하는 게 일반 통념이었다.[18]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건에 맞춰 창작물에서도 그런 전개를 넣으면 그 사건을 모르는 현대인으로서는 '기본적인 인과응보도 지켜지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세계'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설령 현실의 일이라 해도 독자가 핍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 충실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 다른 관념을 지닌 세계를 그리는 작품에서는 독자들이 그런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초반부에 그런 규칙을 활용한 상황들을 제시해주곤 한다.

또한 현실 배경 작품이어도 장르의 방향성에 따라 요구되는 현실성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가령 사극 중에서도 정통 사극은 실제 일어난 현실을 좀 더 면밀히 반영하므로 핍진성과 현실성이 거의 일치하지만, 퓨전 사극, 판타지 사극은 핍진성과 현실성이 공유하는 부분이 많이 줄어든다. 그런 장르에서 현실 사건과의 접점은 '현실의 사건(혹은 배경)을 소재로 썼다' 정도로 비중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4.2. 개연성과의 차이

핍진성은 개연성과도 다르다. 개연성은 '작중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의 논리적 정합성'를 의미하지만, 핍진성은 '작품 세계, 배경, 설정에서 나올 수 있는 관계인가'를 의미한다.
  • 개연성의 예시
    • 그 사람이 나의 친구를 죽였다. → 오랜 세월 끝에 복수에 성공했다.
    • 마왕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당이다. → 용사는 미련없이 그를 죽였다.
    • 친구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백했다. → 세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물론 핍진성과 개연성이 완전히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 핍진성은 개연성에 기여한다. 즉, '이 세계의 법칙대로 작품이 굴러간다'라는 현실감은 작품 내의 개연성에도 어느 정도 기여한다.[19] 즉, 설정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은 (설정이 잘 받아들여졌다는 가정 하에) '개연성이 있다'라고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개연성의 구성 요소는 핍진성뿐 아니라 독자들의 현실 세계에 기반한 현실성, 논리 구조의 탄탄함 등 여러 요인이 더 개입하게 된다.
    • 핍진성은 없는데 개연성은 있는 경우
      • 개체와 행동만으로 이루어진 극단적으로 추상적인 상황에서도 개연성은 존재할 수 있다. 가령 게임 이론에서 팃포탯 전략 같은 것은 특정 조건이 갖추어진 게임 내에서 이득을 목표로 하는 개체가 개연성 있게 추구할 만한 전략이다.[20] 이득을 목표로 하는 개체가 오히려 손해가 되는 전략을 택하면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이고, 이를 설명할 추가적인 요인(정보의 부족, 목표 설정의 오류, 감정의 형성[21] 등)을 분석해야 하며 그런 게 없다면 "이득을 목표로 한다"라는 논리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창작물로서의 세계관도 존재하지 않고 현실 세계의 일도 아니니 핍진성이나 현실성 같은 개념은 애초에 상정이 불가능하다.
      • 설정이 있기는 하나 창작자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현실의 관념대로, 즉 현실성에 기반하여 개연성을 구축하면 보통 그렇게 된다. 가령 중세라고 해놓고 매우 현대적인 평등 사회에서 개연성을 지니는 사건들이 진행되는 식이다. 독자들도 별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면 창작물로서 큰 문제는 없지만 설정이 현실감 있게 녹아들지 못하고 그저 선언만 되었을 뿐이라 코스프레 같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22] 개연성은 현대 창작물에서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스토리의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놓칠 수 없지만[23] 핍진성은 암묵적 합의 문단에서도 보듯 작가-독자가 정도성을 합의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보이는 것이다.[24]
  • 반대로 개연성도 핍진성에 기여한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세계관은 독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진성 역시 개연성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핍진성의 형성에는 '논리'(개연성)보다는 '이런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 위에서 보듯 현실조차도 그다지 개연성이 있는 세상은 아니기 때문에[25] 개연성이 약간 떨어지는 세계라 해도 창작물 향유자들 사이에서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질 여지는 충분하다.
    이 '믿음'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매우 관념적이고 당위적인 것이어서, 종교 혹은 이념적 색채가 강한 문헌에서는 종교와 이념에 기대어 핍진성을 보완하는 예가 나타난다. 아래가 그런 예이다.
    • 개연성은 없는데 핍진성은 있는 경우
      • 그리스·로마 시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전개의 연극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연극에서 이야기 마무리에 모든 사건과 갈등이 신의 등장으로 한방에 다 해결되는 스토리 전개를 일컫는데, 이는 분명 개연성을 심각하게 해친 부분이다. 하지만 당대 연극은 대부분 신화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신탁, 계시, 예언 등의 방법으로 작품 초반부터 신에게 물음을 구하고 애초에 이야기 자체가 신이 내린 과업이나 신들 자체가 등장인물이 되는 일이 많았다. 신들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인간의 갈등 구조 따위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존재들이며 관객들 또한 이에 충분히 공감했다. 따라서 핍진성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셈이다.
      • 종교 문헌
        이러한 양상은 현대에도 성경과 같은 종교 문헌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유사하게 발견할 수 있다. 신자로서 성경을 읽는 이들은 기적과 같이 개연성을 어기는 현상이 일어나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며, 신이라는 인물이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 신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역시 성경 독서의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 수 있다. 먹을 게 없다는 난관을 그냥 음식을 복사해서 해결한다는, 다소 개연성 떨어지는 전개로 끝내는데 의문을 표하는 독자는 없다. 오히려 그게 신의 권능이고 기적이라고 받아들인다.
      • 삼국지연의
        중국의 대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연의 역시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핍진성이 좋은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작부터 유비, 관우, 장비가 만나 도원결의를 맺고 의기투합하는 모습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뜬금없게 보일 정도로 개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황건적이 날뛰고 한나라는 쇠퇴해 지방관들이 각자도생으로 군웅할거하는 혼란스러운 배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충의(忠義) 정신으로 무장한 영웅이 등장해 혼란을 해결해주리라는 (그리고 그러길 바라는) 공감대가 퍼져있었기에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26]
      • 각종 프로파간다적 예술 역시 창작자와 독자가 특정 이념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었으므로 개연성이 떨어지더라도 그 이념에 충실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다'라고 믿었다. 오늘날 가장 가까운 사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일 것이다.

      위의 경우를 보면 독자가 생각하는 당위에 의해서 개연성과는 별개로 핍진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당위에 의해 핍진성을 확보하는 경우, 스토리 역시 당위에 맞춰 전개되기에 스테레오타입적이며 예측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캐릭터의 개성이 적으면 지루할 위험이 크다.[27]

5. 보완 방법

5.1. 가상의 개념 도입

현실에서 잘 쓰이지 않는 이족보행병기가 등장하는 장르에서는 핍진성을 살리기 위해 '인공 근육의 가성비' 등 온갖 설정들을 붙여서 세계를 보완하곤 한다. 건담 시리즈에서도 이족보행병기가 버젓이 돌아다니지만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 세계, 즉 그 작품에서의 '현실세계'에서는 미노프스키 입자를 비롯 핍진성을 채우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등장한다. 더 자세한 것은 픽션에서의 보행병기 변명 참고.

작품을 관통하는 '가상의 아이템'들에도 핍진성을 채우기 위한 여러 설정들이 곁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드래곤볼 시리즈의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악마의 열매, 데스노트 데스노트 같은 아이템들은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개와 묘사를 납득할 수 있게, 다시 말해 '핍진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설정을 부여한다. 예시 중에서 데스노트 같은 경우 거의 법전에 가까운 규칙을 묘사하고 있다.

바키 시리즈와 같이 비현실성이 매우 짙은 작품들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핍진성이 있다. 제 3자의 말을 빌려 서술하는 장면이나 그럴듯한 저명인사(당연히 그조차도 허구지만)의 말을 인용하는 장면이 핍진성을 강화하는 장치에 해당한다. 이와 비슷한 장치 중 특히 유명한 게 민명서방.

핍진성을 지키기 위해 뒤늦게 설정을 추가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드래곤볼이 그런데 초사이어인이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범람한다는 말이 나오자 뒤늦게 '사이어인이 평안한 마음을 가지면 S세포가 늘어나고 전투력이 일정 이상이면서 S세포가 일정 수치 이상이 되면 초사이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투민족인) 사이어인과 달리 지구인 혼혈은 (평안한 마음이 더 많아서) S세포가 선천적으로 많다'는 땜방 설정을 내놓은 바 있다. 이대로면 어렸을 때부터 전장에서 구른 오공, 베지터, 오반에 비해 10살이 넘도록 가족들이랑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산 오천과 트랭크스가 초사이어인이 더 쉽게 되는 것에 대해 비록 완전하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마법을 쓰기 위한 자원으로 자주 등장하는 마나라는 설정 역시 핍진성을 보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는 작가 설정하기 나름이니 마법에 필요한 자원 따위 없이 누구나 다 무한히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행위에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때문에 가상의 현상인 마법에 대해서도 무언가 자원이 있어서 그것을 소모하여 일어난다고 설정을 짜는 것이 보다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28]

톨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구태여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 경우는 "이런 세계가 실재할지도 모른다"와 같은 현실감까지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톨킨은 이를 더 보강하고자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어딘가에서 들은 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설정해두고 있다. 이에 따라 톨킨 작품의 영어 외 타 언어 번역도 설정상 중역이며, 톨킨 번역지침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핍진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운 개념이기에 독자들이 이해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작품의 허들이 높아진다. 핍진성을 밑바닥부터 끌어올린 것도 모자라 퀘냐 같은 인공언어까지 창조했음에도 그 정교함과 현실감에 많은 독자들이 감탄하고 이입하는데 성공한 톨킨의 창작이 그만큼 대단한 창작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5.2. 차용

핍진성 보충을 위해 실제 현실이나 다른 유명한 작품을 끌어오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영화, 게임, 소설, 만화 등 많은 창작품들이 나오지만 보다 보면 어디선가 봤을 법한 설정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마따나 쓰다 보니 우연히 겹쳐진 것도 있지만 이미 존재하는 작품의 설정을 차용함으로써 핍진성을 세우는 데 소모되는 자원을 줄이려는 것이다.

한편 각 분야에서 소위 ' 대작'을 넘어 '바이블'로 취급받는 작품들은 이러한 핍진성을 밑바닥부터 세운 경우가 많으며, 더 나아가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주곤 한다.

5.2.1. 현실 개념 차용

허구적 텍스트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를 무대로 설정하지 않는다. 동화든 공상과학소설이든 마찬가지이다. 허구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숲이 배경으로 등장하면 그 숲은 현실 세계의 숲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나무가 광물이 아닌 식물로 표현되는 것처럼). 만약 예상 밖에 숲이 광물 나무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광물'과 '나무'라는 개념은 현실 세계에서의 개념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 박혜원 (레드박스, 2011), 114.
어떤 창작물이건 현실의 작가가 현실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는 이상,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필연적으로 현실의 개념을 차용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의 예시를 들면 ' 미스릴'이라는 가상의 단어를 두고 '구리처럼 구부릴 수도 있고 유리처럼 매끄러우며, 담금질한 철보다 단단하면서 한없이 가볍고 은과 비슷하게 아름다운 금속'이라고 설명하는데, 현실의 '금속'이란 개념은 물론이고 현실의 '구리', '유리', '철', '은'을 차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실의 제도나 체제를 차용하는 예시로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 제국', '황제' 같은 단어를 쓰거나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에 등장하는 프로토스 종족의 직책에 ' 집정관', ' 법무관' 같이 로마 제국 시대의 단어를 주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배경이 우주인 SF 장르이고 외계 종족의 직책의 명칭은 창작자가 어떻게 설정하든 자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의 명칭을 씀으로써 독자들은 현실의 그 개념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게 된다. 프로토스는 초능력과 오버 테크놀러지가 난무하는 외계 종족임에도 플레이어는 고결함,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 등 고대 로마의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스타워즈 또한 마찬가지로 은하계를 배경으로 하는 서사물에 전근대시기에나 존재했던 황제와 제국이라는 단어를 넣었음에도 관객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제국이란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지배욕, 무력 등을 자연스레 연상하게 된다.

반대로 스타워즈 시리즈의 ' 은하 제국'이 다른건 모두 같지만 이름만 '은하 깐따삐야'였다고 해보자. 그렇게 짓는 것도 분명 창작자의 마음이겠지만, 그러면 '제국'에서 오는 이미지와 심상은 얻을 수 없다. 이를 구축하기 위해선 '은하 깐따삐야'라는 국가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고 왜 현실의 '제국'과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지를 따로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순수 100% 밑바닥부터 가상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의 핍진성을 끌어올리려 하다 보면 많은 분량과 역량이 필요하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묘사할 결과물이 결국 공화국, 제국과 같은 현실의 개념과 흡사하다면 굳이 차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때 가져올 수 있는 현실의 개념은 창작물의 분위기와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제국', '공화국' 같은 일반적인 사회학 개념어는 여러 종류의 사회에 두루두루 쓸 수 있기에 범용성이 높지만 조선시대 직책, ' 판서', ' 사또' 등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선시대를 가리키는 데에만 쓴다는 인식이 강해서 창작물 용어로 쓰기가 쉽지는 않다.[29] 이 역시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 충분히 녹여낼 수 있지만 기본적인 난이도가 좀 더 상승하는 편이다.

이러한 실제의 개념이 차용된 세계는 엄밀히 말하자면 실재할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세계와 전혀 연관이 없는 세계가 만약 실재한다면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쓸 리도 없고,[30] 국가 체계도 실제 세계와 비슷할 순 있어도 완전히 같을 리야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물에서 가상 세계를 만드는 것은 완벽히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데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이입을 시키는 데에 주안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5.2.2. 기존 작품 차용

기존 작품의 개념을 차용할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판타지 장르에 숱하게 등장하는 ' 엘프'라는 설정을 들 수 있다. 엘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판타지 장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길고 뾰족한 귀와 여리여리하고 창백한 외모, 인간보다 긴 수명, 자연을 벗삼고 궁술과 마법에 능한 종족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반지의 제왕을 통해 정립된 내용이다. 따라서 이후 작품에서 이러한 유형의 엘프가 등장하거나 비슷한 판타지 종족을 디자인한 다음 이름을 '엘프'로 짓는다면 톨킨이 정립한 핍진성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반지의 제왕 설정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엘프? 그거 먹는 건가요?"하는 사람에게는 핍진성이 확보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이런 모티프가 될 정도의 작품이면 가져다 쓰는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을 안 본 사람들도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엘프의 개념을 접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정말 아무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소하게 여겨질 위험이 있다.

이 방법을 쓸 때에는, 특히 상업 작품을 만들 때에는 저작권 문제를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엘프의 경우 엘프라는 단어 자체를 톨킨이 만든 것이 아닌 일반 명사이기에 단어를 그대로 써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발로그 미스릴, 호빗 등 톨킨이 창작한 단어들을 쓸 경우 법원의 판단에 따라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저작권 침해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다만 특정 개념의 인상을 가져온 경우는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에 따라 저작권 침해로 간주되기 어려우며, 철자를 좀 바꾼 것들은 대충 묵인해주는 편이다.[31]

때문에 취미로 쓴 작품을 나중에 상업 작품으로 출간할 때 이 부분이 뒤늦게 문제가 되곤 한다. 취미로 쓴 작품은 영리 활동이 아니고 규모도 작으니 저작권상으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낮고[32] 독자에게 관심을 끌려면 익숙한 작품을 설정을 가져다 쓰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다가 인기를 얻어 상업 작품이 되면 표절로 문제가 되어 수정이 되기도 한다.

5.3. 핍진성과 캐릭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캐릭터는 갑작스러운 전개를 설명하기 좋기 때문에 '이 캐릭터는 개연성이자 핍진성'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일리단 스톰레이지나 유희왕 시리즈의 카이바 세토가 그 예이다. 캐릭터 성격 자체가 돌발적이므로 그 캐릭터의 행적이라고 하면 돌발적인 전개를 설명할 수 있는 개연성이 생기게 된다. 현실에도 별 이유 없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은 존재하므로, 묘사만 충분하다면 이런 캐릭터가 작품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다지 핍진성을 해치는 일이 아니게 된다. 자잘한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옴니버스물에서도 트러블 메이커류 캐릭터들이 사고를 쳐서 에피소드의 도입부를 만들어내곤 한다.[33]

다만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활용하려면 캐릭터 묘사에 상당히 공을 들여야 한다. 일리단 카이바도 처음 뜬금없는 짓을 했을 때는 그냥 욕을 먹을 뿐이었다. 이러고 끝나면 캐릭터 하나를 그냥 욕받이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이런 캐릭터가 작품 향유자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돌발성과는 별개로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지녀야 한다. 일리단은 처음에 별 이유도 없이 배신을 하는 캐릭터로 여겨졌지만,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스스로의 의지에 충실하다"라는 점에서 플레이어들의 인정을 샀다. 카이바 또한 처음 등장했을 땐 그저 유희에게 시비를 걸다 처발리고 사라진 삼류 악당이었다가 그때를 계기로 각성해 한 기업을 이끄는 회장이자 동시에 온갖 그럴싸한 기행을 선보여 나름대로의 매력을 산 것이다.

5.4. 암묵적 합의

대놓고 현실성을 무시하는 설정이나 아예 작정하고 설정의 생략을 해버리면 핍진성 논란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핍진성을 좀 덜 신경 쓰기로 하자'고 작품 향유자와 작품 창작자가 암묵적인 합의를 하는 것이다.

가령 좀비 같은 소재가 그렇다. 작품 향유자들도 대부분 좀비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좀비물을 즐기는 이들은 대체로 좀비의 현실성을 따지기보단 일단 좀비가 실존할 때 생겨나는 공포, 좀비 사태로 인한 사회의 붕괴, 좀비를 쏴죽이는 액션감 등의 요소를 좋아하기 때문에 좀비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작자들도 향유자의 그러한 경향을 반영해서 작품을 만든다. 즉, 향유자와 창작자가 좀비로 얻을 수 있는 재미를 위해 좀비의 핍진성에 대해서는 무시하자고 합의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좀비의 핍진성을 일부 측면에서만 다루기 시작하게 되면 이 합의가 깨지고 기존 장르에서 다들 짚지 않고 넘어갔던 부분까지도 이상하게 느껴지게 된다. 별도의 설명이 없다면 좀비물에서 '좀비는 뭘 안 먹어도 계속 버틴다'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28일 후 시리즈에서 '감염자도 살아있는 인간이라 영양분이 필요하다'라는 현실적인 설정을 넣으니 '그럼 사람하고 비슷한 정도로만 버텨야지 훨씬 더 오래 버티는 건 이상하지 않나'와 같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게 된다.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인간인데 신체 결손이 극심한 좀비 상태에서 움직이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혼란이 가중된다.

다만 어디에나 핍진성을 보다 더 중시하는 작품 향유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르에서도 좀 더 핍진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장르가 갈라져 나가기도 한다. 거대로봇물에서 리얼로봇물이 갈라져 나온 것이 이런 맥락이다. 리얼로봇물 역시 '사람 형상의 로봇이 멋있으니까' 하는 로망으로 넘길 거대로봇물에 현실의 전쟁 요소를 가미함에 따라 ' 왜 그 기술력을 기존 병기에 안 쓰고 이족보행병기를 만드느냐', '저렇게 기술이 발전했는데 왜 AI 파일럿은 없느냐' 등의 논란이 생겼다. 이는 핍진성을 거의 추구하지 않는 장르에서 핍진성을 조금씩 추구하게 되면서 생기는 과도기적인 것이다. 이후 장르가 정착함에 따라 '일단 거대로봇으로 싸우고, 왜 그렇게 싸우게 됐는지 설명을 해보긴 하겠다' 정도의 선에서 합의를 하고 나머지 부분에서 핍진성을 따지는 등 향유자와 창작자 쌍방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는 선이 생겨나게 된다. 어쨌거나 리얼로봇물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 역시 완전히 현실적인 밀리터리물이 아니라 거대로봇이 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창작물의 여러 사례

6.1. 워크래프트 시리즈 오크 해리 포터 시리즈 집요정의 예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세계에 등장하는 오크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계에 등장하는 집요정, 두 종족을 비교해보자. 오크는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말마따나 힘과 명예를 중시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의 지배를 거부하는 반면 집요정은 남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종족이다. 이러한 뒷설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난다면 워크래프트의 오크가 다른 종족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인간들의 권유를 오히려 거부하는 집요정들의 행보가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똑같이 허구의 존재들이고 서로 상반된 전개임에도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핍진성이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워크래프트의 스랄처럼 오크 하나가 탄압받는 동족들을 구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간다고 해보자. 워크래프트의 지식이 없더라도 반란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범죄이며 매우 큰 소동이 될 것이라는 걸 독자들은 예상이 가능하다. 이처럼 작품 내 명시된 설정이 없을 때 독자는 현실의 핍진성을 작품 내 세계에 대입시키게 된다. 즉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냥 안 넘어가겠구나'하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가 붙잡혀 처형된다거나 스랄처럼 반란에 성공한다거나 하는 전개가 찾아오면 독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중죄인이 처형되거나 반란에 성공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개연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무런 사전 설명이 없었는데 집요정 캐릭터 하나가 등장하여 탄압받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는 전개가 등장한다면 독자는 위화감을 받게 된다. 이는 개연성을 해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새로운 전개'의 등장은 명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A라는 원인이 있으니 B라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부분의 'A'에 해당되는 부분이 처음 언급됐을 뿐이다. 그럼에도 독자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분명 설정상 집요정 종족은 남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을 즐기는 종족인데, 반란을 일으키는 전개는 어색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핍진성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를 자연스럽게 바꾸기 위해서는 작가가 핍진성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즉 집요정의 예를 다시 들자면, 집요정 도비가 그렇게 자기 종족의 본성과는 다른 행동을 한 데에는 루시우스 말포이라는 요인이 필요하며, 도비가 특이한 건지 종족 전체가 생각이 바뀐 건지 등 보충 설정으로 핍진성을 보충해야 한다.

6.2. 핍진성이 어긋난 예

  •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신미 세종대왕에게 호통치는 장면 또한 핍진성을 무시한 대표적인 사례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세종대왕이 살았던 시기에 살진 않았으나 이 장면을 보면서 상식적으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즉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임금의 위엄과 조선시대의 사대부 문화 그리고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 등을 학습을 통해 알고 있기에 보는 관객들은 무너진 핍진성에 위화감을 받게 되는 것.
  • 드라마 수리남(드라마)에서도 핍진성 파괴가 등장한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에필로그에서 “전목사가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는 대사가 그것. 드라마 자체는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와 각색했고 그 실제 사건에서 주범이 실제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극중에서 그려낸 해당 인물은 마약유통 뿐 아니라 살인, 살인교사, 마약제조 등 법정 형량이 무기징역 또는 사형으로 정해져 있는 죄를 여러번 짓는 것으로 묘사했으면서 정작 마지막에는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설명하여 작품 내 세계가 현실과 같다고 생각하며 마지막회까지 드라마를 감상한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짓을 저질렀다.
  • 파워 인플레가 문제되는 이유 중 하나로는 핍진성 하락이 있다. 능력이 점점 세지면서 뒤의 전개에 익숙해진 핍진감으로는 앞의 전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로는 원피스의 샹크스가 아주 유명하다. 무려 사황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샹크스가 1부 시점 루피의 한주먹거리 밖에 안되는 근해의 주인에게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는 말도 안되는 전개가 되어 버렸다. 현실은 언제나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사건이 벌어지지만 창작물은 대개 단선적 스토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 좀비물도 어느 정도 핍진성 확보가 필요하다. 좀비라는 개념 자체는 작품 내에 위기를 부여하는 요소로서 작품 향유자들이 그것의 현실성에 대해서 지적을 하지 않지만 좀비가 나타나는 상황은 주로 21세기 현실의 재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에 관해서는 현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 즉 좀비가 나타났다는 데에 대해서는 작품에 따라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지만 그런 좀비가 일단 나타났는데 군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같은 설명은 필요하다. 영화 반도가 이에 실패한 예인데 세계에서부터 한국만 좀비사태로 멸망했다는 다소 무리한 설정을 도입했다. 어차피 상상의 사태이니 그렇다고 하면 그럴 수야 있긴 하지만 좀비가 있으면 전세계에 다 나타나는 것이 자연스럽지 한국에 무슨 좀비의 원천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한국에만 좀비가 잔뜩 나타나서 한국만 멸망하는 것은 이상하다. 게다가 국가 하나가 소멸되었는데 국제 사회에서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월드워 Z처럼 국제적인 스케일로 그리거나 지금 우리 학교는처럼 특정 지역에 한정된 국지적인 스케일로 그렸다면 최소 납득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미진한 설정은 해당 작품의 혹평 요인이 되었다.
  • 2021년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 일어난 핍진성 미비는 이 되기도 했다. 해당 작품에서 공작 캐릭터가 기사 2만 명을 동원할 수 있다고 언급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떡밥으로, 설정과 몰입을 중요시하는 디시 장르소설 마이너 갤러리에서 '중세 시대 공작한테서 일반 병사도 아니고 기사 2만 명이 현실에 맞냐'며 열띤 토론의 장이 벌어졌고, 결국 기사 2만 명이라는 밈이 되었다. 비슷하게 까이는 것으로 《시한부 악녀의 해피엔딩》에 나오는 6kg 단검이 있는데, 여기에 판타지는 애매하게 설정하면 반영을 엉망으로 한 듯이 보이니 뻔뻔해야 한다며 370kg짜리 단검이 글에 나오면 오히려 무슨 내용인지 보고 싶어진다는 도 올라왔다.
  • 위 사례들 중 '현실의 핍진성(=현실성)'을 위반한 사례들의 특징은 단순히 그 장면만 나열해도 문제점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개연성과 핍진성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인터넷에서 '태양의 후예'나 '나랏말싸미'를 검색하면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짤방으로 편집해서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보는 사람들은 앞뒤 내용을 몰라도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문제가 없다. '개연성'은 사건의 인과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앞뒤를 다 자른 내용만 봤을 때는 뭐가 문제인지 이해하기 힘든 때가 많다. 다시 말해 전후 사정을 다 들어봐야 잘 짜인 것인지 개연성이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전후사정'이 필요하고 '핍진성'을 판단하는 데에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매체는 이러한 배경지식이 독자들에게 이미 학습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그 장면만 봐도 문제 유무를 판단할 수 있는 것.
  • 설정 오류가 작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핍진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러이러하다고 했던 것이 나중 가서 말이 바뀌면 작품 세계가 잘 짜여져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고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현실은 거의 늘 일정한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종류의 설정 오류가 동일하게 핍진성 하락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언급된 지 너무 오래됐거나 별로 중시되지 않았던 설정은 작품 향유자들도 까먹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한다.[34]
  • 미디어에서는 스포츠물에서 특히 핍진성에 대한 부재가 심한 편이다. 대부분은 주인공이 언더독으로 올라가면서 탑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하나 상대를 쓰러트려나가는 에스컬레이터식의 전개가 되는데, 문제는 그 종목(축구,야구,격투기,복싱 등)에서 이름값이 있는 XXX를 이겼다.라거나 주인공이 이런 기록을 세웠다.라는 식으로 띄워줘도, 이야기의 연재상 계속 주인공은 이겨도 이겨도 가난을 못 벗어나고, 주변에선 듣보잡취급을 받는다거나, 한 번이라도 패배를 했을경우 밑도끝도없이 나락으로 가는 피폐물 식으로 몰락한 캐릭터등을 보이는 연출 때문이다. 더 파이팅등의 장기연재 스포츠물에서 흔히 나오는 작품 속 스포츠에 대한 현실성, 개연성, 핍진성을 모두 어긋나는 경우등이 이런식으로 나온다.

6.3. 도량형과 각종 단위

도량형이나 시간 같은 기년법, 가공의 통화체계 등에도 핍진성을 살리기 위한 여러 기법들이 쓰인다.

우선 도량형의 경우 미터, 킬로그램 같은 국제단위계는 19세기 유럽(구체적으로는 1799년 프랑스)에서 만든 개념이지만 대다수 가상 세계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이 도량형 단위를 사용할 수 있으면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어쨌거나 도량형이란 개체의 물리적 특성을 나타내주는 데에 주 목적이 있는 것이고, 단위는 이를 전달해줄 뿐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량형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텍스트만으로 감을 잡기 까다롭다는 이유도 한몫한다. 어떤 면에서는 ' 제국', ' 공화국'과 같은 일반 사회 용어와 비슷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작품 내 서술 또는 번역에 한해서만 용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등장인물이 이를 직접 입에 올리면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 동아시아 전근대 배경을 다룬 창작물에 뜬금없이 미터법 등의 근대 단위가 나오면 대다수 독자들은 거슬려 한다. 영화 뮬란에서 ' 사량발천근'이라는 고사성어를 번역하면서 미터법으로 적어놔 논란이 되었던게 대표적이다.[35]

이세계 전생물이나 대체역사물, 회귀물 같은 장르나 판타지 장르 작가들에게 있어선 은근 골머리를 썩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나 헤르츠, 뉴턴, 암페어 등 서양권 인명에서 유래한 단위[36]는 가상 세계 혹은 세계화가 이루어지기 전 서양권이 아닌 다른 문화권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것이 너무 확 두드러지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질감을 쉽게 사고 만다. 그나마 현대인이 넘어갔다는 설정이면 생소해하는 현지인에게 설명해주는 전개로라도 가능하지, 아예 등장인물 전체가 판타지 세계관의 인물들이라면 어떻게하면 핍진성을 살리면서도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지 골머리를 썩히게 한다. 이런 문제를 겪고 싶지 않아서 아예 단위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일단 현대 단위를 사용한 다음 부록 같은 데서 "독자의 편의상 이렇게 썼지만 실제론 이런 단위를 쓴다" 식으로 커버를 치는 경우도 있다.

단, 작중 인물의 진지한 대사 또는 작품 내 등장하는 기록물이 아닌 정도라면 그냥 가져다 쓰기도 한다. 이 경우는 십중팔구 독자들을 기준으로 이해가 직관적이고 멋있는 대사이기 때문에 그냥 넣는 것. 특히 소년 만화의 기술명 같은 것은 읽는 독자들이 바로 연관점을 떠올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쓰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전압의 단위인 볼트가 있다. 볼트 단위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 이름을 따서 지은 단위다. 허나 포켓몬스터에는 인기기술로 10만볼트, 100만 볼트가 그냥 나온다. 만화 원피스 역시 에넬은 볼트 단위를 변화시켜가며 기술명을 외친다. 두 세계관 모두 알레산드로 볼타는 커녕 '이탈리아'조차 없는 세계관이지만, 주 독자층인 소년들을 위해 직관적인 기술명을 쓴 것이다. 만약 각 작품에서 핍진성을 엄격히 따진답시고 굳이 가공의 단위를 창작한 다음 이 단위는 현실의 볼트와 비슷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면 그 느낌이 잘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핍진성을 엄격히 따져야 하는 작품이라면, 최대한 다른 인물로 치환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자가 쉽게 가늠할 수 있도록 신체 길이를 활용한 단위를 제시한 다음, 그 단위 명칭만 다르게 부르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작품 내 새로운 길이 단위를 무언가 제시하고 이 단위는 성인 남성 발바닥 길이에서 따와 그 정도 길이라고 정의내리는 것. 받아들이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피트 단위를 생각하게 된다. 이 경우 자연물을 기준으로 삼는 미터법보다는 신체 부위를 활용한 야드파운드법이 더 치환하기 쉬운 편.[37] 물론 미터법에 익숙한 독자여도 대략 그 단위가 26~27cm 정도임은 가늠할 수 있으니 크게 어려운 장벽은 아니다.

기년법의 경우 서력기원은 당연히 예수가 기준이므로 예수가 언급될만한 세계관이 아니라면 서기 X년을 언급하는게 아주 이상한 모양새가 된다. 때문에 가공의 기년법 문서를 보면 다양한 작품들이 온갖 기년법을 창조해서 쓰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어차피 가상의 기년법을 쓰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만 알려주기 위함이고, 1년의 길이만 똑같이 유지해 준다면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 단, 마찬가지의 이유로 기년법을 다양하게 쓰더라도 1년=365일의 공식 만큼은 어지간 해선 부수지 않는다. 1년의 길이를 다르게 조절하면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큰 혼란을 주기 때문.

화폐 단위의 경우 애초에 현실의 화폐들도 종류가 다양하여 환전을 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으니 아무리 생소한 단위를 쓴다 할지라도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다. 단, 간혹 현실의 화폐 단위와 환전비율을 작가가 언급하면 설정이 어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38] 금화 등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한다는 식의 묘사도 흔한데, 그냥 화폐 단위로만 생각할 뿐인지라 현실 동전처럼 묘사해서 현실의 금보다 왠지 가치가 많이 떨어져보이는 현상이 흔히 나타난다( 금/창작물 참고).[39]

7. 정치적 올바름과의 관계

정치적 올바름(PC)에 입각한 요소들은 종종 핍진성을 해치곤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오늘날에 와서 "올바른 사상을 추구하자"라는 것인데, 잘 알려져있다시피 역사가 늘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왔던 것은 아니다.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을 현대가 아닌 다른 세계에까지 적용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역사적 면면들에서 비롯한 세계를 현실감 있게 구현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인권을 침해하는 노예제 같은 것은 현대적 정치적 올바름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했다. 전근대에 만연했던 열악한 여성 인권 등도 그렇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 세계에 주입해 여성도 남성과 다름없이 사회 주역으로 활약하면 현실감이 낮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에는 (특히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서) 인종 평등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자 창작물에서도 (특히 실사 매체에서) 흑인화 등을 통해 인종적 균형을 맞추려 하기도 하는데, 흑인이 있기 어려운 문화와 지역에서 흑인이 등장하여 이질감을 사곤 한다.[40]

그런 이유로 핍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마찰을 빚곤 한다. PC 요소가 핍진성을 해친다고 반발하면 "핍진성보다 정치적 올바름이 더 중요하다. 괜히 그런 이유로 백래시하지 마라" 식으로 쏘아붙이는 PC 측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핍진성이라는 말 자체도 생소하다면서 괜히 잘 쓰지도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와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과 핍진성이 언제나 충돌을 빚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세계를 그리면서도 PC를 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같은 조선시대의 여성을 묘사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억압은 불공정하다"라고 호소한다면 여성인권을 주장하면서도 핍진성에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당시 현실과 유사하게 억압받는 여성의 존재는 묘사하면서도 이를 탈피해야 한다는 현대적 사상은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41] 또한 핍진성을 보강해줄 수 있는 추가 설정이 있다면 문제 없다. 박씨전처럼 신묘한 초능력을 가졌다거나, 든든한 조력자가 있으면 조선시대 같은 배경에서도 충분히 여성이 활약할 수 있다.

아울러 핍진성을 해치는 요인들은 게이머의 흥미 등 다른 것들도 많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핍진성을 추구한다면 정치적 올바름과 핍진성을 둘 다 추구할 수 있다. 예컨대 비키니 아머 같은 것은 게이머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요소로 그런 것이 현실감을 지니는 작품 세계는 그리 흔치 않다.[42] 이런 것들을 성적 대상화를 줄이자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하여 수정하면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핍진성도 잘 맞게 된다. 아니면 실제로도 있었던 일인데 하류층( 서발턴)이었다는 이유로 오늘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이를 재조명하여 PC와 핍진성을 둘 다 잡을 수 있다.[43]

8. 여담

  • 핍진성 논란은 흔히 고증이라고 부르곤 하나, 문서에서 보듯 이는 사전적 의미에서 다소 벗어난 용법으로 본 위키에서는 ' 창작물의 반영 오류'라는 표현을 지어서 쓰고 있다. ' 시대착오적'도 비슷한 의미이다. 고증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극이 진행될 때에 한해서만 핍진성과 거의 의미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 SNS에서는 드라마 조선구마사에 대한 논란이 한창 이어질 당시 이 핍진성의 극단적인 예를 표현한 드립이 있는데 이른바 '아머드 태종'이다. 조선의 임금인 태종을 빔샤벨을 휘두르는 슈퍼로봇으로 표현해도 핍진성이 보장된다면 창작물로서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 실제 흥행 여부를 재쳐두고 창작물에서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정을 근거로 조선 시대를 미래풍으로 설정한다면 이런 아머드 태종 또한 현실성이 없다고 할 수 있어도 핍진성 자체는 보장될 수 있다.
  • 위 예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물질적 요소보다 정신적 요소의 핍진성을 맞추는 것이 더 어렵다. 기술이나 도구는 실제 역사에서도 즉각즉각 도입할 수 있지만[44] 문화는 적어도 세대에 걸친 변화가 필요하다. 괜히 문화 지체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종이 빔샤벨을 드는 거야 '그런 세계라 하면 가능'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지만 세종이 태종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변화 자체는 더 사소할지라도[45] 그런 조선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핍진성이 깨졌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민간인들이 매트릭스가 만든 세상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46]은 작중 세계의 인물이 자신들의 '현실'에서 핍진성이 어긋나는 감각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9. 관련 문서



[1] 숙종실록에서의 원문은 '以攸疏模寫眞切, 謂之沈極傳。'이며, '핍진하여'라는 어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현대어역에서 의역된 것이다. [2] 개연성 문서에서도 예로 든 사건으로, 에어푸르트 변소 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사회적 분쟁이 첨예하게 불거진 상황에서 갑자기 회의장 바닥이 꺼져서 관련 논의를 하던 사람이 대다수 사망한 사건이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낡은 집에 사람이 갑자기 모였으니 바닥이 꺼지는 것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지만,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논의하던 배경이기에 독자들은 대개 '그래서 논의가 어떻게 해결됐을까'를 다루는 게 개연성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중에 다들 갑자기 죽었다는 전개가 이어지니 황당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3] 게임 장르에서는 TRPG와 같이 참여자들끼리 주사위를 던져 그때그때 확률을 무작위로 정해가며 전개를 결정할 수 있으나 소설에서는 그런 방식을 쓰기 어렵다. [4]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은 어느 정도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연성이 없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실화를 그대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벙찌는 경우도 많다. 스포츠물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데, 스포츠는 개인의 역량과 운에 따라 승패가 쉽게 바뀔 수 있도록 조정된 체계이기에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일이 실제로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까운 2020년대에는 일본의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엄청난 실적을 거두면서 "소설이었으면 개연성 없다고 비난당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5] 위 전쟁영웅의 예를 들자면 "과거에 그 영웅이 어릴 적에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죽을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다" 등의 일화를 넣어서 "그때 천운으로 살았으니 지금 운 나쁘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짐작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옛날에 운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랑 지금 운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독립시행이기에) 아무 상관 없지만 독자들이 그걸로 납득을 하기 때문에 개연성을 보강할 수 있는 것이다. [6] 현실 세상과 달리 이야기에는 시작점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시작 부분의 우연성에 대해서는 독자들도 약간은 이해를 해준다. 어쨌거나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야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7] 계단 낙상사고는 현실에서 굉장히 위험한 사고지만, 원피스 작품은 워낙 사람이 잘 안 다치기 때문에 핍진성이 무너진 것이다. '현실성'과 '핍진성'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시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8] 현실의 전차는 두터운 장갑을 갖추고 있어 샷건이 통하지 않지만, 블루 아카이브는 '중장갑' 속성인 전차를 '관통' 속성인 샷건으로 제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계이기에 핍진성이 무너진 것이다. [9] 현실성을 중시한다면 샷건을 들고 전차에 접근해야할 이유가 없었으며, 핍진성을 중시한다면 전차에 접근해서 샷건을 쐈을 때 전차가 터졌어야 했다. 결국 이 행동을 왜 했는지 의문만 남으면서 개연성마저 무너져버렸다. [10] 스타워즈의 하이퍼스페이스 이동은 물리적인 간섭 자체는 가능하나, 체급이 더 큰 함선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로그 원에서 다스 베이더의 기함이 하이퍼스페이스에 진입하는 소형 반란군 함선을 충각하며 파괴하는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8편에서는 체급이 작은 함선이 하이퍼스페이스 이동으로 경로 내의 초거대 함선을 파괴한다는 핍진성이 파괴된 장면을 내보냈다. 이 장면은 시리즈 전체 서사에서 숱하게 벌어져 온 여러 함대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최악의 장면으로 꼽힌다. [11] 창작물에서 이런 예는 위의 예들보다 매우 찾기가 어렵다. 일단 설정을 짰으면 지키고, 안 짰으면 현실의 감각에 맞추려고 하지, 미리 짜둔 설정을 무시하면서 현실성도 없는 전개를 내놓기란 작품 자체를 공들여서 망가뜨리지 않고서야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망작이야 세상에 널렸지만 그런 작품들은 보통 설정 자체가 엉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문의 예는 스타워즈 시리즈라는 유명 시리즈에서 '공들여 쌓아놓은 과거 설정을 일부러 무시하는 식으로' 대놓고 핍진성을 어그러뜨리는 장면이 나와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예이다. [12] 그런데 계단 실족사는 위에서 다루듯 "현실성은 높지만 개연성은 없는 사건"이다. 당장 주변 사람이 우연히 돌연사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자기 앞에 그런 일이 펼쳐진다면 아득히 황당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죽음은 어떤 종류든간에 대체로 현실 사건 중에서도 유독 개연성이 없는 축에 드는 편이다. 때문에 창작물에 이런 사건을 넣으려면 어느 정도의 복선이 필요하다. [13] 잘 궁리해보면 핍진성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 아무리 초인이 넘치는 원피스 세계라 해도 쿠이나처럼 어린 아이일 땐 약하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러한 보충이 없다면 다들 잘 안 죽는데 혼자 잘 죽는 것처럼 (비록 현실적인 이유일 지라도) 보일 수밖에 없다. [14] 2020년대 기준으로 우주 비행사는 온 역사를 통틀어 6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밖에 시범적 우주여행을 다녀온 극소수 일반인이 존재한다. 즉, "우주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이들 외에는 촬영 영상으로 간접적으로 접하거나 책으로 접한 지식일 뿐이다. [15] 어떤 이들은 커다란 물체가 별 효과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데에서 의외라면서 재미를 느낄 순 있다. 가령 인터스텔라 같은 작품에서는 실제로 연구된 블랙홀의 형상을 최대한 그대로 묘사하려 했다는 데에서 높은 점수를 주는 관람자들이 많다. [16] 그래서 TV 애니메이션에 비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유난히 현란한 시청각 효과를 사용할 때가 많다. 영화관은 관객의 감각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시설이므로 거기서 상영을 하기로 한 이상 그 장점을 최대한 살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들도 그런 영화를 보면 "이건 꼭 영화관에서 봐야 돼"라면서 영화관 관람을 부추기곤 한다. 스토리도 이에 맞춰 TV판에선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작품들(가령 짱구는 못말려, 도라에몽 등)도 극장판에선 좀 더 드라마틱한 소재를 쓰는 편이다. [17]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와 실화 기반 드라마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작품 향유자가 느끼는 현실감과 사실성의 차이를 보이는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묘사(사실성)을 택하고, 실화 기반 드라마는 독자들이 기대하는 현실감(어떤 면에서는 핍진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묘사하는 매체로 가상의 요소가 일절 들어가지 않아야 할 것을 요구받지만, 실화 기반 드라마는 각색의 여지가 있기에 창작물로서의 속성을 다소 보이는 것이다. 그나마 사실성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가 가능해진 것은 현실의 음성과 영상을 거의 그대로 담을 수 있는 데이터 기술의 발전 덕분이고, 그런 기술이 존재하지 않고 문서를 통한 간접적 이해만이 가능한 전근대 시대를 묘사할 때에는 사실성을 주축으로 한 다큐멘터리의 제작이 매우 어렵다. 간접적 이해라는 것 자체가 사실에서의 변조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당시 에도 막부는 피해자인 키라를 처벌하지 않았다. 추신구라 문서에서 보듯, 현대에는 이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의 사무라이 관념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부조리였기에 가해자 아사노의 가신들이 직접 린치에 나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 위의 예도 어느 정도는 핍진성이 개연성에 개입한 예이다. "사람은 누구 한 명만 좋아해야 하고, 사귀는 사람이 있는 이에게 고백하는 것은 불화를 살 일이다"라는 인식에 기반한 개연성이다. 속된 말로 골키퍼 없다고 골 안 들어가냐는 마인드로 애인이 있든 말든 대시하는 게 별 문제가 없는 세상이라면 애인 있는 사람에게 고백해 불화로 번지는 것이 오히려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된다. [20] 그리고 게임 이론에서 이러한 류의 개연성은 실험으로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계획대로 게임을 만들어 논리를 구현했는데 예측이 빗나가면 가설이 부정된 것으로 오류 원인을 찾아야지, 창작물의 개연성처럼 '내가 보기엔 개연성이 있다'라고 정성적으로 논박할 일이 아니다. 만약 인간 행동의 요인들을 모두 구현할 수 있는 가상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현실과 창작물의 여러 사건들도 사회 실험으로 개연성을 검증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가상세계 모형은 인간 세계를 온전히 구현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21] "합리적인 이득만을 추구하는 로봇이 비합리적인 행동을 한다" 식의 스토리는 로봇 스토리에서 매우 애용되는 스토리텔링이다. [22] 실제로 코스프레 리인액트먼트가 실제 목적으로 입는 의상과 어쩐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기능을 하는 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코스프레는 팬 활동, 리인액트먼트는 재현)에 기반한 의상이기 때문에 현실감이 없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23] 개연성의 필요성은 장르마다 다르고 의도적 파괴 문단에서 보듯 어느 정도는 손상될 수 있지만 작가는 이를 섬세하게 고려하여 조절해야 한다.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독자가 생각하는 만큼'은 개연성을 맞춰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뒤가 안 맞는 작품"이 될 뿐이다. [24] 서양 판타지 문서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작가나 독자나 "현대가 아닌 멋진 옛날 시대를 보고 싶다" 정도의 마인드이고, 정말 실제 중세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실제 중세를 보고 싶은 독자는 이런 실태가 매우 못마땅할 것이고, 이들은 핍진성을 좀 더 중시하는 측이라고 할 수 있다. [25] 위에서 보듯 '이 현실은 개연적이다'라는 것은 개연성과 현실성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의 믿음에 가깝다. 개연성 있는 세상을 현실성 있다고 받아들이는(핍진성이 있다고 여기는) 셈이다. 아래 소개할 종교나 이념과 마찬가지로 이 현상 역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합리주의에 기반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보다 현대에 창작물의 개연성을 중시하는 것도 이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다른 관념이 개입한다면 "개연성 있는 것이 현실성 있는 것이다"라는 믿음을 부정할 수 있게 된다. [26] 국가비상사태에는 이런 "구국의 영웅"으로 대표되는 영웅주의가 만연하는 편이다. 다수의 행동은 관성을 따르기 쉽고 일치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사태를 일거에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한 명의 훌륭한 구원자를 원하는 것이다. 다수의 의한 혁명도 가능은 하지만 이 경우에도 우수한 지도자가 필요할 것이라는 인식이 아직까지는 지배적이다. [27] 삼국지연의는 이를 캐릭터의 개성으로 상쇄하였고 오늘날까지 인기를 끌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사람이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라는 영웅주의적 이념은 모두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붕괴 후 혼란기에서 어떤 식으로 나라를 구할 것인가는 오늘날에도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다. 삼국지의 각 인물들이 이에 대해 어떠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각자의 입장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역사가 풀려나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삼국지의 재미 중 하나이다. [28] 그런 제한을 통해 아무개가 대현자를 마법으로 쓰러뜨리는 터무니 없는 전개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도 부차적인 이득이다. 사실 그런 전개가 터무니 없이 느껴지는 것 역시 현실에서는 여러 제한 사항이 많아서(강력한 힘을 얻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등등)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9] 물론 창작물의 배경이 조선시대의 요소를 많이 가져온 작품이라면 이를 가져오는 것도 위화감이 크지 않을 것이다. [30] 특히나 언어의 자의성은 매우 강력해서, 설령 인간 사회의 모든 변수를 파악해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한 가상 세계 모듈을 만든다 해도 이를 지칭하는 언어 표현은 전혀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국'이라는 단어에 ''이라는 음이 들어가는 것은 '제국'이라는 개념의 실체와 거의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31] 그래서 레젠다리움의 미스릴은 mithril로 적지만 다른 작품의 미스릴은 mithryl이나 mythril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32] 저작권법은 주로 친고죄이기 때문에 직접 신고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권익을 침탈할 위험이 거의 없어보이는 소규모 창작물까지 신고하면 이득은 별로 없는 반면 "팔려고 내놓은 것도 아닌 거 같은 데에까지 죽자살자 신고한다"라는 식으로 이미지 악화로 인한 손실이 더 클 수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내버려두는 건 어디까지나 저작권자의 마음이므로 저작권자에 따라서는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품들도 얼마든지 있다. 디즈니가 이런 데에 민감해서 미키마우스 닮은 모양만 봐도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이 있다. [33] 이 경우 옴니버스 특성상 사건의 스케일이 그리 크지 않으므로 핍진성을 해치는 정도도 매우 미약하다. 다만 아래에서 보듯 트러블 메이커류 캐릭터들도 이 두 인물처럼 독자들의 욕을 꽤 먹는 편이다. [34] 그리고 이 부분은 위키 같은 사이트에서 설정 오류가 유독 부각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설정을 파고드는 독자들이 위키를 주로 편집하는 이유도 분명 있겠지만, 위키에 일단 적어두면 그 설정은 누가 지우기 전까지 페이지에 남기 때문이다. 독자의 자연스러운 망각이라는 타개책을 쓸 수 없는 것이다. [35] 사실 이는 척관법에 익숙하지 않은 영미권 관객들을 위해 '사량발천근'이라는 고사성어를 풀어서 '온스'와 '파운드'를 써서 번역한건데 한국어 자막은 원문을 보지 않고 이걸 중역했고, 야드파운드법을 고친답시고 미터법으로 적어놔서 생긴 문제였다. [36] 이런 것들은 개념 자체가 유럽 자연과학 연구를 통해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관련 인물들도 대체로 다 유럽인이다. 반면 무게, 길이 같은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 인명 유래 단위들이 많지 않다. [37] 미터법의 현대 정의 자체는 물리학적인 상수로 다 치환했지만 어쨌거나 출발 자체는 자연물에서 유래했다. 헌데 판타지 세계나 외계 행성의 외계인들이 지구 자오선 길이를 길이 단위의 기준으로 삼는 모습은 이상하다. [38] 예를 들어 원피스의 화폐 단위 베리는 묘사마다 가치가 오락가락이다. 사실 경제 개념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작품에서는 작가가 은연 중에 현실 화폐에 따라 적당히 설정할 때가 많다. [39] 예를 들어 한국 10원 주화 무게(5g)만큼의 금화를 만들려면 21세기 초반 기준으로 40만 원 어치(1kg 8000만원/200)의 금이 필요하다. 작중 세계의 금 생산량, 화폐 경제의 발달 수준, 금화의 순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대 대한민국에서 오만원권을 아무 데나 내버리지 않듯이 금화 역시 귀중하게 다뤄질 것이 분명하다. 화폐 문서에서 다루듯 화폐의 실물상의 가치와 액면가가 반드시 동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차이가 나면 사람들이 화폐를 교역 목적으로 쓰지 않고 화폐 자체를 녹여서 팔아치우게 되므로 어느 정도는 맞추려고 하는 편이다. [40] 2020년대에 이로 인해 마찰을 빚었던 예로는 2023년 인어공주 실사화, 2024년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 주인공 논란 등이 있다. [41] 사실 이 역시 당대 사람들은 별로 지니지 않았던 사상일 수 있지만, '이런 불합리한 세상은 뜯어고쳐야 한다'까진 아니고 '같은 사람인데 대우가 다른 것은 좀 안쓰럽다.' 정도라면 시대를 초월한 인간 감성으로서 이해받을 수 있다. [42] 종종 마법 등 가상의 힘으로 이를 설명하곤 하지만, 그러면 여성의 갑옷만이 노출이 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43] 예를 들어 초기 프로그래머들은 여성이 많았는데, 그 당시 인간 컴퓨터 직종이 여초였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오늘날에는 프로그래머들은 대체로 다 남성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려져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을 구상하면서 여성의 활약을 부각하면 핍진성을 잘 살리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다. [44] 근대 동아시아에서는 당장 몇 달 전까지 가마 타고 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철도가 부설되어 기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벌어졌다. [45] 가능성만으로만 치자면 태종이 빔샤벨을 들 가능성은 0%이지만 세종이 태종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건이다. [46] 애니매트릭스에서 달리기 선수가 한계를 뛰어넘고는 세상에 위화감을 느끼는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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