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22:45:24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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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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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알리의 이복 동생인 자파르의 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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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علي بن أبي طالب
출생 600년
헤자즈 메카
사망 661년 1월 28일 (향년 60세)
정통 칼리파 시대 나자프
재위 기간 정통 칼리파
656년 ~ 661년 (5년)
전임자 우스만
후임자 무아위야 1세
부모 아버지 : 아부 쿠하파
어머니 : 움 알 카이르
종교 이슬람
1. 개요2. 최초의 남자 무슬림3. 칼리파 직위를 향하여
3.1.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분쟁3.2. 아부 바크르 승복 및 우마르 지지3.3. 삐걱대는 우스만 이븐 아판의 시대
4. 이슬람의 분열
4.1. 칼리파 등극과 쿠라이시 가문의 반발4.2. 아이샤와의 충돌4.3. 무아위야의 반란
5. 후손 6. 이야기거리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그대는 현세와 다가올 내세에서 나의 형제라.
ㅡ 사도 무함마드

이슬람의 제4대 정통 칼리파. 이슬람이 수니파 시아파로 분열되는 계기가 된 인물이다.

2. 최초의 남자 무슬림

조실부모한 선지자 무함마드를 입양해 키운 무함마드의 삼촌 아부 탈리브의 아들로서 어린 시절부터 사촌 형인 무함마드와 형제처럼 어울리며 성장했고, 둘의 나이 차이는 30에 가까웠기에 당시 관습[1][2]에 의해 거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였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이후,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 카디자에 이어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첫 번째 남자 무슬림이 되었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610년 당시 알리의 나이는 고작 10살 무렵에 불과했지만 누구보다도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바치며 당당히 적들에 맞서 싸웠다.[3][4]

622년 무함마드가 위험을 피해 메디나의 중재 요청을 받아들여 메카를 떠나던 날( 헤지라) 지금이라도 무함마드를 살해하고자 하던 암살자들이 몰려왔을 때, 무함마드를 대신하여 그의 침대에 누워있던 것도 알리였으며,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 및 이슬람 세력을 박멸하고자 쿠라이시 부족을 주축으로 한 메카 세력이 군사적 압박을 가할 때 가장 맹렬히 저항한 이도 알리였다. 특히 당시 풍습으로 전투에 앞서 사기 진작을 위해 각 진영의 대표자를 뽑아 일기토를 벌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이슬람 세력에서는 언제나 알리가 대표로 뽑혀 나가 승리를 쟁취함으로 용맹을 과시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이 참패하고 무함마드마저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훗날 제3대 정통 칼리파로 즉위하는 우스만 이븐 아판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마저 도망치는 위기 속에서도 군대를 수습하고, 무함마드를 보호한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런 공적을 쌓아가며 알리는 움마내에서도 전설적인 명성과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도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분 중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알리를 극진히 아꼈다. 게다가 무함마드의 유일한 남자 후손은 알리에게 시집을 간 무함마드의 첫 번째 딸 파티마가 낳은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 둘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움마 내에서도 알리를 무함마드의 정식 후계자로 보는 시선이 강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알리 자신도 내심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3. 칼리파 직위를 향하여

3.1.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분쟁

그러나 이런 유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경쟁에서 아부 바크르에게 밀려나고 말았는데, 특히 이 선정은 알리가 이제 막 사망한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하느라 회의에 참가하지 않는 동안 기습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분열을 야기했다.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생전 무함마드의 언행과 알리의 공적,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유일한 외손자들의 아버지인 알리의 정통성은 다른 후보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고, 무함마드에게서 발산되던 권위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알리에게서도 느껴진다고 주장했으며, 최소한 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고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에야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것보다는 훨씬 존경받고 배려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반면 무함마드의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를 지지하는 세력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이슬람의 지도자는 혈연 따위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점이야 말로 무함마드가 그토록 비난하던 특권층의 세속 왕조의 혈연계승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게다가 무함마드는 ‘신의 마지막 사도’이므로 알리를 지지하는 세력이 주장하는 알리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느낌이란 그저 느낌일 뿐이며, 역으로 알리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무함마드와 알리와의 혈연관계나 개인적 카리스마 같은 요소는 알리가 세속 군주처럼 군림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다.

즉 지금까지 알리의 강점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무함마드의 사후에는 알리가 무함마드의 후계자 지위에 올라서는 안 되는 이유들이 되었으며, 알리의 입장을 축소시키는 사항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거기에 아라비아 반도의 부족 지도자를 뜻하는 ‘셰이크’ 라는 단어는 ‘나이 든 남자’ 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당시 60세에 가까운 아부 바크르와 달리 알리는 이제 막 30세를 넘은 시점이었고, 이런 나이 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보다는 아부 바크르 지지파의 주장에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고 논쟁이 시작되면서 분열은 점점 깊어졌고, 이 와중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유산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양 진영의 분위기는 최악으로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분열의 양상을 통해 아부 바크르의 지지자와 알리의 지지자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품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시초가 되었다.[5]

3.2. 아부 바크르 승복 및 우마르 지지

그러나 이런 분열은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취임 반년 후 끝을 보게 되었다. 이는 무함마드의 사망을 계기로 아라비아 반도 각지에서 무함마드 이후의 사도는 자신들이라 주장하는 세력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릿다 전쟁). 그리고 이런 정세에 위기감을 느낀 양측은 상호 타협해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직위를 인정하게 되며, 이후 곧장 아라비아 반도 내의 반란 움직임을 타도하는 군사 활동에 돌입했다.

얼마 후, 애초부터 나이가 많았던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 취임 2년 만에 사경을 해매게 되었다. 그러자 자신의 죽음으로 생겨날 혼란을 우려한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후계자로 우마르를 추천했다. 그러나 당시 오만함과 거만함, 사나움으로 악명이 높았던 우마르가 인자함과 자상함으로 유명한 아부 바크르의 후계자가 된다는 사실에 떨떠름해 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때문에 아부 바크르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의 제2대 칼리파 즉위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다른 유력 후보였던 알리가 우마르의 칼리파 직위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면서 결정적으로 의견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우마르는 무사히 칼리파 직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던 알리의 존재감을 생각했을 때, 의견을 조금만 틀거나 논란이 길어진다면 그를 후계자로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알리의 경쟁상대인 우마르는 자상함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던 아부 바크르와 달리 그간 보여준 오만함과 폭력성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버티기만 하면 차기 칼리파의 직위는 알리의 것이 될 가능성이 컸으나, 놀랍게도 알리는 우마르를 지지하며 스스로 차기 칼리파의 직위를 포기한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당시 알리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6]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는 강직하고 이슬람에 대해 진심으로 열정을 바쳤던 알리가 자신이 칼리파 직위에 오를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충돌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사실 정황을 둘러보자면 이런 의견은 높은 설득력을 가진다. 당장 반년 전까지도 이슬람 세력은 아부 바크르와 알리 간의 분열의 여파로 발생한 권력 공백을 틈탄 사이비 반란을 진압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칼리파 선정으로 다시 분열이 발생할 경우, 이번에야말로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몰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할 법했다. 게다가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아리비아 반도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확장하고자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리는 자신의 세력을 억누르고 다른 유력 후보자를 지지함으로써 이슬람의 화합을 꾀할 수 있었고, 우마르는 알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데 충분한 공적을 보여주었다.[7]

3.3. 삐걱대는 우스만 이븐 아판의 시대

제2대 정통 칼리파인 우마르가 페르시아인에게 암살당하고, 그가 창설한 슈라 위원들에 의해 차기 계승자가 뽑혀지게 되는데,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우스만 이븐 아판과 알리였다. 그리고 둘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슈라가 둘에게 각자 칼리파에 즉위한 이후의 정책에 대해 묻자 알리는
“초기 이슬람 세계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범으로 삼으며, 이전 칼리파들의 행적을 존중하겠으나 나에게는 나만의 생각이 있으므로 변혁을 추구하겠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알리의 칼리파 즉위를 결정적으로 그르치게 만들었다.솔직 전임 칼리파였던 우마르가 크게 우려했던 이슬람의 세속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되어 이슬람 세력의 상류층은 변혁보다는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당초 자신들과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우스만에게 호감을 느끼던 슈라들은
“나는 전임자들의 행적을 따르겠다.”
는 우스만의 대답에 호응하여 그의 제3대 칼리파 즉위를 선언했다. 알리는 이에 내심 불만을 품었던 것 같지만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이렇듯 알리가 숭상하는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은 점차 그를 강하게 옥죄고 있었다.

칼리파 자리에 오른 우스만은 지금까지 대단히 어설펐던 이슬람 세력의 재정 문제를 대대적으로 계혁함으로서 재정 체계를 합리화시키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이슬람 세력의 축재를 막아왔던 여러 조항들을 폐지시켰다. 이런 개혁은 분명 신생 제국의 부를 증대시켰으나 동시에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막대한 세금 부담을 지게 만들었다. 동시에 우스만은 과도한 친족 편애로 우마이야 친족에게 엄청난 액수의 보수와 권력을 하사했고, 특히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은 본래의 영토에 메소포타미아 지방 및 이집트의 경계까지 영토로 하사받으며 개인 세력을 증대시키고 있었다.

결국 세금 부담을 견디다 못한 이집트[8] 시민들은 그들의 대표를 선출하여 칼리파에게 보냄으로써 부당함을 호소했고, 이에 당황한 우스만은 알리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스만이 벌인 일을 좋게 보지 않은 알리는 우스만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우스만이 이집트 주둔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의 추대에 의해 알리는 내심 바라면서도 연을 맺지 못하던 칼리파의 직위에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4. 이슬람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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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칼리파 등극과 쿠라이시 가문의 반발

누군가가 알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째서 사람들은 아부 바크르 우마르가 칼리파로 선출되었을 때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는 당신의 선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알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 이유는 아부 바크르나 우마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자네 같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네!"

알리는 칼리파 등극 직후부터 터져나오는 반대 세력들의 반란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던 것이 우스만 시대 각종 우대를 받던 쿠라이시 부족의 세력이었다. 그들은 알리가 우스만의 중재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애초부터 우스만을 암살하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주장하며, 알리의 칼리파 즉위를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알리의 성향상 우스만 시대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중지될 것이 뻔했고, 그럼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세력은 우스만 시대 온갖 특혜를 누리던 쿠라이시 부족이었다.

이런 사태를 경험하며 알리는 무함마드 사망 이후 이렇게 짧은 기간내에 움마의 기강이 흐트러진 것을 탄식하며, 자신은 기강을 회복시키려 노력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쿠라이시 부족은 계속해서 알리 반대 운동을 진행하며 그의 칼리파 지위를 위협하고 특히 우스만을 살해한 이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는데, 알리는 폭도들이 메디나를 장악하고 있는 그 상황에서는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쿠라이시 부족은 알리의 권위를 손상하고자 더욱 적극적으로 처벌을 주장했다.

이런 난국을 타파하고자 단호하게 국면을 전환시키기로 마음먹은 알리는 이제까지의 수도 메디나에서 메소포타미아 중류의 쿠파로 천도하여 개혁을 진행했으나 이미 우스만 시대에 권력과 독점의 단맛을 본 상류층은 알리가 주장하는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 알리는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를 위협하는 위험분자일 뿐이었으며, 반면 쿠라이시 부족은 알리에 맞서서 자신들을 보호해줄 정당한 수호자였다.

4.2. 아이샤와의 충돌

알리는 우스만이 임명한 부패한 총독들을 모조리 해임했으나 놀랍게도 모든 총독들은 반발하며 알리의 명령에 거부하면서 이슬람의 내전, 즉 제1차 피트나가 시작되었다. 유일하게 예멘 총독만이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그는 모든 재산과 국고를 빼돌림으로써 이슬람 세력의 타락을 여실히 보여주게 된다. 게다가 이 예멘 총독은 알리를 극도로 혐오하던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에게 접근하여 반란을 선동했고, 이전부터 쿠라이시 부족과 협력하던 아이샤는 예멘 총독의 자금 지원을 받아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알리는 지하드를 선언하고 아이샤를 처단하고자 군대를 일으켰는데, 아이샤 측도 지하드를 선언한 상태였으므로 이슬람 세계는 서로를 처단하기 위해 지하드를 선언하는 웃지 못할 비극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군대를 마주친 두 사람은 사적인 불화를 젖혀두고 공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협상을 통해 상호간의 의견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알리와 아이샤는 지금 자신들의 행동이 이슬람 세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며, 우스만을 암살하고 이슬람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진짜 악인들이 도피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라는 합의를 도출해 상호간의 협력을 통하여 지금의 혼란을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이 일은 알리나 아이샤 같은 초창기 이슬람 인물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호불호나 감정보다도 대의를 우선시하는 초기의 순수성이 건재함을 과시함과 동시에 향후 벌어질 사건의 방향을 극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리와 아이샤가 화해해 버린다면 압도적인 권위와 정통성을 지닌 지도부의 탄생을 통해 알리를 폄하하던 쿠라이시 부족,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 고위층들은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았고, 이미 그들과 접촉하고 있었던 알리와 아이샤 세력내의 내통자들 또한 색출되어 처형될 위험이 생기게 되니 이미 여러 세력의 이해집산이 뒤섞인 아이샤와 알리의 격돌은 두 사람의 타협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양측 군대에 속해 있던 여러 이해집산의 세력들이 사령관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적군을 향해 돌격함으로 예정에 없던 낙타 전투[9]가 시작되었다. 알리는 아이샤가, 아이샤는 알리가 배신했다고 여겼기에 협상은 결렬되었고, 분노한 양측이 격렬하게 충돌했는데, 알리는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고 아이샤는 포로가 되어 메디나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그러나 알리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이슬람을 구할지도 모를 희망찬 타협 대신 무슬림이 서로를 죽였다는 가슴 아픈 승리였다.

4.3. 무아위야의 반란

어떻게든 아이샤의 세력을 제압한 알리는 숨돌릴 여유조차 없이 또 다른 반란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시리아의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의 도전이었다.

무아위야는 우스만이 암살당한 그 시점부터 자신의 영지내에서 우스만이 암살당할 때 입은 피 묻은 옷(이라고 무아위야가 주장하는 물건)과 이야기꾼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우스만이 당한 억울함을 끊임없이 주장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군사력과 자금력을 강화하고, 우스만의 우대 정책을 통해 각지의 총독 및 재력가로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우마이야 친족 세력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알리에 대한 반대 운동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가 아이샤를 낙타 전투에서 격파할 무렵, 무아위야는 공식적으로 알리의 권위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새로운 칼리파로 선언했고, 분노한 알리는 이를 진압하려고 무아위야와 격돌(시핀 전투)하나 양측 모두 승기를 잡는데 실패하여 지지부진한 전황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서로의 지휘관들과 자신들의 피해에 염증을 느낀 양측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대표자들의 1:1 결투를 통해 승패를 가리라는 의견이 거세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항상 이슬람의 결투 대표자로 임명되었던 알리는 그러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최소한의 피해로 혼란을 끝낼 수 있음을 기뻐했으나, 알리와 비슷한 나이지만 사치스런 생활에 절어있던 무아위야는 결투에서의 승패를 장담하지 못했기에 병사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사기가 떨어진 무아위야의 군대는 알리가 진두지휘하는 맹공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전황은 곧 알리의 승리로 결판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패배 직전의 위기에 처한 무아위야는 병사들에게 무슬림들간의 평화를 위해 협상을 하라고 요구하는 낭송 전문가 뒤에서 창끝에 《 쿠란》의 낱장을 붙이고 《쿠란》의 시구를 연호하며 알리의 군대를 향해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적의 피로 《쿠란》이 더럽혀질 것을 우려한 알리의 군대는 더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렇게 승리를 눈 앞에 두었던 알리는 무아위야의 요구대로 협상을 하는 데 동의했다.

이 시점에서 전황은 알리가 확실히 우세했기에 알리는 자신이 무아위야의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 쿠라이시 부족 및 우마이야 가문, 무아위야가 누리던 특권을 축소하고 그들이 알리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수준에서 협상이 채결되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알리의 그런 순진한 생각과 달리 무아위야는 놀라운 협상능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은 시리아와 이집트, 알리는 그 외의 영토를 보유한다는 대등한 결과물을 이끌어 냈다.

이 결과물은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예상한 결과물이 아니었으나, 그들이 협상을 통해 합의된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자 알리에게 충성을 다하던 가장 젊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반발했고, 알리에게 실망을 금치 못하며[10] 알리에게서 이탈해 나가 카와리지파가 되었으며, 알리 스스로가 신이 내린 사명을 저버렸으니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 또한 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알리는 하야를 거부했고, 결국 그런 알리의 행동에 분노한 급진적인 카와리지파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일단의 세력들은 알리의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해서 자신들을 이끌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수완이 뛰어난 무아위야 1세는 거액의 보수를 제시하며 제5대 정통 칼리파가 되어 있었던 하산의 하야를 권유했고, 계속되는 분쟁에 지쳐있었던 하산은 무아위야 1세의 권유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랍 제국의 권력 쟁탈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세속화되어 있었던 이슬람 제국은 최후의 가면조차 벗어버린 채 세속적인 세습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알리의 추종자들은 시아파가 되었고 기존 권위를 따르는 자들은 수니파라 불림으로써 무슬림 세계는 결정적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5. 후손

파일:summit.jpg
하심 가문 알라위 왕조
요르단 국왕 모로코 국왕
압둘라 2세 모하메드 6세

알리의 후손들은 알리 씨족(العلويين, Alids)이라고 불린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 사이에서 나온 자손들은 무함마드의 후손이기도 했다. 알리와 파티마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었고, 역사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었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샤리프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장남 하산 이븐 알리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알리와 파티마의 차남인 후세인 이븐 알리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라고 불린다.
파일:Alid_Interrelationships.png
대략적인 각 세력들의 계보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파티마)
·
( 수니파의 제4대 칼리파)
·
( 시아파의 초대 이맘)
하산 이븐 알리
·
( 수니파의 제5대 칼리파)
·
( 시아파의 제2대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
·
( 시아파의 제3대 이맘)
파일:Hashemite_Tree_2.png
하심 가문의 계보
파일:Alouids.png
알라위 왕조의 계보
파일:Idrisid_Tree.png
이드리시 왕조의 계보

이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 중 과로사(인터넷 방송인)와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의 파키스탄식 이름에 ' 세예드'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씨인 '세예드'('셰이예드')는 우리나라로 치면 '저 양반', 영어로 치면 'Mister' 정도에 해당하는 뜻이다. 이걸 무함마드 후손의 성씨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셰이예드'는 성씨가 아니라 칭호이다. 무함마드는 하심 가문이고, 그 혈통이 요르단 왕가이다. '헤더'('하이다르')는 '사자'라는 뜻으로 알리에 대한 존칭이다. 대개 파키스탄의 시아파들이 사용하는 이름이다. 즉, 무함마드와는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다.

6. 이야기거리

아부 바크르가 시인이고, 우스만도 시인이라면, 알리는 그 셋 중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다.

알리는 《쿠란》과 《하디스》에 정통하고, 무예에 능한 것 외에도 언변이 유창했으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고 한다.

알리가 사용했다는 전설의 무기 줄피카르라는 칼이 있었다고 한다. 해당 항목 참조.

사후 시아파에 의해 신격화되어 알리와 무함마드의 이름을 절묘하게 대칭시킨 글씨라든가, 알리의 초상화도 등장하게 된다.

파일:external/nih.at.ua/HzAliveAnnesi.jpg

에멈 알리와 에멈 호세인(아기)을 그린 시아파 그림[11]

단테 알리기에리의 《 신곡》 < 지옥편>에서는 무함마드와 함께 사기 지옥에서 생전에 분열을 조장했던 자들이 받는 형벌인 악마들에게 썰리고 재생하기를 반복하는데. 특이하게도 단순히 이교도라서가 아니라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온 것으로 추측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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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아랍의 관습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과 동생은 형제이라기 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여겨졌으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일부 아랍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큰형이 동생들의 학업문제나 결혼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정도이다. [2] 사실 이런 문화는 전세계 어디에서건 흔하다. 우리나라도 나이 차가 많은 큰 형은 동생에게 부모에 준하는 공경을 받았다. 당장 학부형이란 단어 자체가 아버지와 형을 학생의 보호자로 의미하는 단어이다. 요새는 학부모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학부형이란 단어가 더 널리 쓰였다. [3] 이 때문에 사자(حيدر‎)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4] 이를 이용하여 훗날 15세의 나이에 처음 거병하여 시아파 사파비 왕조를 창설하는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을 '알리의 화신'으로 여기며, 전 중동의 시아파를 결집하려는 대대적인 정치공작을 벌였다. 찰디란 전투에서 수니파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셀림 1세에게 처절하게 박살이 나기 전까지 말이다. [5] 다만 수니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선출이 누구의 반대도 없는 만장일치였음을 주장하며, 애당초 분열의 씨앗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6] 주로 시아파에 의해 주장되는 의견이다. 이 경우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뒷공작에 의해 알리는 어쩔 수 없이 우마르를 지지했고, 따라서 두 명은 시아파 입장에선 반역도당이다. [7] 그리고 우마르는 당시 이슬람 내에서 진행되던 세속화를 끝까지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사상적으로도 사실 알리와 많이 비슷했던 셈. [8] 칼리파 우스만은 그의 재정정책에 반대한 명장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파직시키고, 그의 친족인 압둘라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압둘라는 세 수입을 두 배로 늘리며 응답했다. 그러나 이런 세입 증가가 이집트 백성들의 세 부담을 가중시켰음은 당연한 일이다. [9] '낙타 전투'라는 명칭은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군대를 지휘했기에 붙어진 명칭이다. [10] 애초부터 이들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신이 내린 재능인이자 칼리파인 알리가 간악하기 그지없는 반역자 무아위야 따위와 협상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등한 수준으로 알리가 타협을 한다는 것은 이들의 충성심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다. [11] 시아파는 우상숭배 면에서 수니파보다 관대하기에 주요 종교 성인들의 초상화, 조각상 등이 허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