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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5대 칼리파 عبد الملك ابن مروان ابن الحكم |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이븐 알 하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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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아브드 알 말리크 이븐 마르완 이븐 알 하캄 |
아랍어 | عبد الملك ابن مروان ابن الحكم | |
영어 | Abd al-Malik ibn Marwan ibn al-Hakam | |
출생 | 644년 7/8월 또는 647년 6/7월 | |
사망 | 705년 10월 9일 (향년 58~61세) | |
존호 | 칼리파 | |
재위 기간 | 685년 4월 또는 5월 ~ 705년 10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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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5대 칼리파. 2차 피트나를 수습하고 이슬람 제국의 영역을 대폭 확장했으며, 농업과 무역을 증진해 우마이야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2. 생애
2.1. 즉위 이전
644년 7/8월 또는 647년 6/7월에 메디나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마르완 1세였고, 어머니는 무아위야 이븐 알 무히라의 딸 아이샤였다. 그의 부모는 메카의 지배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가문인 바누 우마이야 씨족에 속했다. 그는 이슬람교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메디나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이슬람 교리를 착실히 공부했다. 무슬림 사료들은 그를 경건하고 엄숙한 인물로 묘사한다. 아버지가 무아위야 1세의 칼리파 즉위에 기여한 뒤 메디나 총독을 맡았을 때 비서로 활동했다.683년 메디나에서 무아위야 1세의 아들 야지드 1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바누 우마이야 씨족과 함께 메디나에서 추방되어 시리아로 피신하다가 야지드 1세가 파견한 토벌군과 합세했다. 이후 알하라 전투에 아버지와 함께 참전하여 승리에 일조했고, 메디나를 공략한 뒤 주바이르가 은신한 메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683년 11월 야지드 1세가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리아로 후퇴했다. 684년 6월 아버지가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 및 시리아 원로들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칼리파로 선출된 뒤 지휘관을 맡았으며, 마르지 라히트 전투에 참여해 대승에 일조했다.
684년 후반 아버지가 이븐 주바이르에 귀순한 이집트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을 때 다마스쿠스에 남아 행정을 돌봤다. 685년 돌아온 마르완 1세는 시나브라에서 회의를 열어 그를 팔레스타인 총독으로 임명하는 한편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초 마르완은 칼리파로 선임되는 조건으로 후계자를 야지드 1세의 아들 칼리드로 삼기로 했지만, 칼리드가 그의 후계자 지명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 후 685년 4월 또는 5월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2.2. 2차 피트나 평정
684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아들 후세인 이븐 알리 일가가 카르발라 참극에서 피살당할 때 당국의 협박에 못이겨 방관하기만 했던 쿠파 주민들이 '참회자'를 자처하며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메카에서 후세인의 복수를 공언하며 반란을 일으킨 이븐 주바이르를 따르지 않고 알리의 아들들 중 한 명인 무함마드 이븐 알 하나피야[1]의 지시를 받들어 후세인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전한 알 무크타르 이븐 아비 우바이드의 지휘를 받았다.마르완 1세 생전인 685년 초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가 이끄는 군대가 이들을 제압하고 이라크를 탈환하고자 진군했다. 그는 즉위 후 아버지의 뜻을 잇기로 하고, 우바이둘라에게 자신이 추가 병력을 이끌고 갈 테니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686년 우바이둘라는 카지르 전투에서 무크타르에게 참패하여 사로잡힌 뒤 후세인 이븐 알리를 직접 살해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적병들에 의해 몸이 두 개로 찢겨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브드는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러 가던 중 카지르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 시리아로 귀환했다.
그 후 주바이르가 이라크로 쳐들어가서 수개월간 쿠파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략에 성공하고 무크타르를 죽였지만, 동부 아라비아와 이란에서 카와리즈파가 준동하고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주바이르의 동생 무사압이 토지를 착복하고 주민들을 학대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그는 적이 내우외환에 시달리느라 시리아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틈을 타 카지르 전투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시리아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적대적이던 카이스 부족을 토벌했다.
686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파견한 레온티오스 장군이 캅카스로 진군하여 알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고대 지명)에서 아랍군을 격파했다. 그는 내전을 치르는 와중에 동로마 제국과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688년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갱신했다. 일시불로 1,000 노미스마타를 지급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일정량의 노미스마타와 말, 노예를 바치기로 하였다. 또한, 키프로스와 이베리아(현재 조지아 중부), 아르메니아의 세금도 양국이 양분하기로 했다. 특히 키프로스는 양국의 양국의 공동통치구역(Condominium)으로 삼았다.
689년, 그는 이라크로 친정하면서 아므르 빈 사이드에게 다마스쿠스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사이드는 마르완 1세로부터 칼리드 계승을 약속받았지만 그가 칼리드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그가 이라크로 떠나자 브 부족장 후마이드 빈 후라이트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다마스쿠스를 확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군대를 돌려 다마스쿠스로 진군했다. 사이드가 후마이드와 주하이르 빈 알 아브라드 휘하의 기병을 출전시키자, 그는 후마이드의 사촌인 하산 빈 말리크와 주하이르의 동생 수피안에게 맞서게 하였다.
양측이 충돌하며 칼브 부족 간의 전쟁이 수일간 이어진 후, 부족의 여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타나 후마이드와 수피안에게 우마이야 가문을 위해 서로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에 두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전투를 중단했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지다가, 후마이드는 다마스쿠스로 회군했고 그의 군대는 도시를 포위했다. 16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사이드가 신변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면서 평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이드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약속을 어기고 처형했다. 다만 반란에 가담했던 후마이드와는 화해했다.
아브드가 피트나(내전) 종결 기념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에 지은 바위의 돔.
691년, 시리아를 안정시킨 그는 재차 이라크로 진군하여 쿠라와 바소라, 파르스 일대를 공략했다. 뒤이어 692년 호라산을 평정했고, 같은 해 핫자즈 빈 유수프에게 2,000명의 병력을 맡겨 히자즈 평정을 맡겼다. 그는 협상을 통해 주바이르를 항복시켜보고, 항복을 거부한다면 포위하게 했다. 핫자즈가 전초전에서 주바이르를 격파한 뒤, 그는 타리크 빈 아므르에게 5천 병력을 줘서 핫자즈와 합세하게 했다. 타리크는 메디나를 어렵지 않게 공략한 뒤 주바이르와 핫자즈의 협상이 결렬되자 핫자즈와 합류하여 3월 25일부터 메카를 포위해 8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카바는 공성 무기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수비대가 대거 투항하자, 주바이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적을 향해 돌진했다가 전사했고 수급은 효수되었다. 이리하여 2차 피트나는 종결되었다.
2.3.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2차 피트나 종결 후, 아브드는 핫자즈를 이라크 총독으로 임명하여 동방 영토에서 여전히 준동하고 있는 카와리즈파를 토벌하게 한 뒤 자신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착수했다. 전쟁은 동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는 688년에 맺은 조약에 따라 노미스마타를 바쳐야 했다. 그런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92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노미스마타를 주조했다. 이슬람 교리에는 인간의 모습을 새기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그는 황금의 무게는 같게 하되 예수의 모습이 없는 동전을 주조하여 바쳤는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선전포고했다. 이에 그는 동생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에게 아나톨리아 공격을 명령했다.양군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세바스토폴리스에서 맞붙었다. 첫번째 교전에서 동로마군이 더 많은 적을 살해했다. 이에 무함마드는 동로마군 내의 슬라브 군인들을 매수했고, 2만에 달하는 슬라브인이 진영을 이탈했다. 동로마군은 이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무함마드는 이 틈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여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레온티오스 장군은 수도로 소환된 뒤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혔고, 우마이야 왕조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아르메니아를 공략했다.
695년, 이프리키야 총독 하산 빈 알 누만은 그의 지시를 받고 카르타고를 공략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던 레온티오스는 요안니스와 아프시마로스에게 해군을 맡겨 카르타고를 탈환하게 했다. 두 장군은 697년 기습 공격을 감행해 카르타고를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아랍군을 카이로로 축출했다. 그러나 698년 하산 빈 알 누만이 재차 반격을 가해 카르타고를 도로 공략했고, 로마 함대는 크레타 섬으로 철수했다. 그들은 곧 레온티오스에게 반기를 들기로 작정했고, 아프시마로스는 티베리오스로 개명하고 요안니스를 처단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체포하여 코와 혀를 잘라버리고 달마티아의 수도원으로 보낸 뒤 새 황제로 즉위했다.
얼마 후, 하산은 베르베르인의 여왕 카히나 주위에 모인 제네트족의 역습에 직면했다.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르카로 철수했지만, 아브드가 지원을 보내주자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타바르카 인근에서 승리했다. 카히나는 참수되었고, 그녀의 머리는 702년 아브드에게 전해졌다. 이후 하산은 튀니지까지 공략했다. 705년 누만이 사망한 뒤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새 총독으로 부임하여 북아프리카의 잔여 동로마 세력을 분쇄했다. 다만 지금의 지브롤터 해협에 해당하는 세우타 공략에는 실패했다.( 무슬림의 마그레브 정복 전쟁)
2.4. 내치
그는 내전을 수습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한편 내치를 다지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선 그때까지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체계를 그대로 따랐던 행정부를 제국의 실정에 맞춰 현지화했고, 연락 체계를 개편했으며, 농업과 무역 진흥 정책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화폐 개혁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은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동전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왕의 초상이 그대로 실린 동전을 사용하는 건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겼다.693년, 이슬람 금화폐인 디나르를 도입했다. 이 주화에는 이슬람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이자 최고 군사 사령관인 칼리파를 묘사한 그림이 새겨졌다. 그러다 696년 또는 697년에 쿠란의 인용문이 새겨진 이미지 없는 주화로 대체되었다. 699년에 사산 왕조의 옛 영역인 이란에서 발행된 은화 디르함에도 유사한 변경이 이뤄졌다.
그는 군대 개혁에도 힘을 기울였다. 부족의 지위와 칼리파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군 고위직을 차지했던 아랍 귀족들은 점차 군공을 세우면서 승진한 군인들로 대체되었다. 또한 내전을 치르는 동안 우마이야 왕조에 끝까지 충성한 시리아 군대를 제국 전역에 배치했으며, 참전 용사들의 후손들에게도 봉급을 지급하던 관행을 폐지하고 오직 현역 군인에게만 봉급을 지급하게 했다. 이 조치를 통해 재정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된 이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여기에 시리아군을 각지로 분산시킨 조치는 750년 압바스 왕조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들을 각개격파하면서 왕조의 지지 세력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사망
아브드 알 말리크 사후 대략적인 국경 (710년)
성공적인 통치를 이어가던 아브드는 말년에 당초 후계자로 지정되었던 동생 아브드 알지라즈 대신 장남 왈리드 1세를 칼리파로 지명하려 했다. 아브드 알지라즈는 이에 불복하여 이집트에서 반기를 들 준비를 했지만, 705년 5월 병사하면서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또다른 아들 아브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선임해 분란의 여지를 차단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705년 10월 9일에 바스라에서 발발한 역병에 걸려 사망했고, 아들 왈리드 1세가 뒤이어 칼리파로 즉위했다.
[1]
당시 이븐 주바이르에 의해 메카에 억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