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0:45:31

청년 튀르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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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ön-Türkler.png

오스만어: Jön Türkler / Genç Türkler
불어: Les Jeunes Turcs
영어: Young Turks

1. 설명2. 역사3. 분파
3.1. 연합진보위원회3.2. 자유와 합의당
4. 파생 용어

1. 설명

오스만 제국 급진주의,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이탈리아 통일운동 지도자 주세페 마치니가 창당한 ' 청년 이탈리아당'의 영향을 받아 ' 청년'이 들어간 당명을 채택했다.

2. 역사

1889년 압뒬하미트 2세(1876~1909)가 미트하트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키자, 이브라힘 테모를 중심으로 한 젊은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만들었다. 처음에는 비밀 결사로 시작했으나 20세기에 세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젊은 지식인, 육군 장교, 공무원 등 각 계층이 가담하였다. 1906년에 공식적으로 '연합진보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를 창설하였으며, 1908년에는 혁명을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에게 헌법&입헌군주제 부활과 퇴위 서명을 강요했다. 그렇게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시킨 후 정식 정당으로 승격하여 1918년까지 10년동안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잡은 초기에 청년 튀르크당은 2차 헌법을 제정하고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여 신민법과 신상법을 공포했으며,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여성의 지위 개선 및 취업을 위한 조치와 국민 교육을 위한 각종 단체의 설치를 진행하였다.

1911년에 청년 튀르크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났는데, 연합진보위원회에서 일부 당원들이 '자유와 합의당'을 창설하여 갈라졌다.

3. 분파

3.1. 연합진보위원회

급진적 튀르키예 내셔널리즘 정당으로 반소수민족, 반교권, 국민국가 확립을 내걸었다.1912년 총선에서 자유와 합의당이 연합진보위원회를 상대로 승리하자, 1913년에 엔베르 파샤가 이끄는 일부 연합진보위원회 당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오스만 제국의 정권을 잡았다.

당시 연합진보위원회의 상부에는 세 명의 파샤(탈라트 파샤, 제말 파샤, 엔베르 파샤)가 있었는데, 이 세 명의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독일 제국과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이 있는 동맹국에 가담했다.

1918년에 전쟁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난 뒤, 연합진보회의는 해체되었다. 세 파샤는 10월 13일에 사임했고, 재판을 받은 결과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요 명령자였기 때문에 아르메니아 비밀결사의 보복 표적이 됐다. 탈라트 파샤는 베를린으로 갔다가 1921년에 아르메니아인에게 암살당했고 제말 파샤 역시 1922년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엔베르 파샤는 튀르크 제국 재건국을 위해 유라시아 중부로 갔다가 내전 중 살해되었다.

3.2. 자유와 합의당

자유보수주의 정당으로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청년 튀르크당 온건파로 지방자치 소수민족 자치를 보장하는 정책으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1912년 총선을 승리하고 대재상으로 카밀 파샤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쿠데타가 발생하고 연합진보위원회가 정부를 장악한다. 대외정책에서 친영파였던 자유와 합의당과 다르게 연합진보위원회는 친독파였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를 공격하는 희대의 악수를 두고 만다. 세 파샤가 전쟁 시기 가히 끔찍한 수준의 지휘를 한 결과 전쟁은 참패로 끝났다.

자유와 합의당은 복귀하게 되었고 당수 다마트 페리트 파샤가 신임 대재상으로 임명되어 세브르 조약에 사인하며 전쟁을 종결하게 된다. 자유와 합의당은 전쟁 책임을 뒤집어 쓰고 만신창이가 된 연합진보위원회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1]

그러나 얼마 안가 조약반대파가 봉기하며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여당이었던 자유와 합의당은 튀르키예 대국민회의와 케말 파샤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와 합의당 인사들도 전쟁을 피해 상당수 국외로 망명하거나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정당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잃은 청년 튀르크당은 1922년 11월에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함께 해체되었다

4. 파생 용어

서구권에서 영턱스(Young turks)는 뭔가 저항적인, 급진적인 청년 진보 정치 운동을 상징하는 표어가 됐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오리지날 운동과는 별개로 개혁적, 급진적, 진보적, 반체제 운동에 영턱스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많다. 동명의 언론도 있고 한국의 가수인 영턱스클럽도 이 청년 튀르크당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역사적 용어를 잘 모르니 '젊은 개구쟁이들의 클럽'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 정당인 신한청년당 역시 이 정당의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당수의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

대만 군소정당 중국 청년당 또한 프랑스 파리에 있던 중국 유학생들이 청년 튀르크당의 영향을 받고 설립했다.


[1] 하지만 자유와 합의당이라고 지지도가 높아졌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에 사인한 것과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시인한 것 때문에 국내의 인기는 낮아지고 해외에서만 오스만의 양심으로 인기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