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야 왕조 제3대 칼리파
무아위야 2세 معاوية بن يزي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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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C0C0><colcolor=#FFF,#FFF> 이름 |
무아위야 이븐 야지드 معاوية بن يزيد |
출생 | 664년 |
빌라드 알 샴 | |
사망 | 684년 (향년 20세) |
우마이야 왕조 다마스쿠스 | |
재위 기간 | 우마이야 칼리파 |
683년 11월 ~ 684년 2월 (3개월) | |
전임자 | 야지드 1세 |
후임자 | 마르완 1세 |
부모 | 아버지 : 야지드 1세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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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3대 칼리파. 2차 피트나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재위 3개월 만에 사망했다.2. 생애
661년 3월 28일 다마스쿠스 궁정에서 우마이야 왕조 2대 칼리파 야지드 1세와 바누 칼브의 부족장 하산 빈 말리크의 누이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출생일은 친조부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로 선포된 날이었다. 무아위야 1세는 이를 비범하게 여기고 자신의 이름을 손자에게 붙여줬다. 683년 11월 11일 아버지 야지드 1세가 사망하자, 하산 빈 말리크의 지지를 받고 칼리파에 올랐다. 그는 그때까지 궁정에서 살았을 뿐 외부 세계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은 그가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산에게 의존하기만 할 거라며 우려를 표했다.하지만 그는 예상과는 달리 통치를 원만하게 수행했다. 먼저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븐 주바이르와의 전쟁을 중단하기로 했다. 그는 메디나와 메카에서의 전쟁은 광기와 신성모독이며, 특히 카바를 불태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메카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 알사쿠니[1]에게 철군령을 내렸다. 내전이 한시바삐 끝나기를 바랐던 무슬림들은 이에 기뻐했다.
이후 이븐 주바이르에게 사절을 보내 "내겐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그대가 뒤를 이어 칼리파가 되어라."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바이르는 그가 아직 어려서 나중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거부하고 내전을 재개해 이집트 남부와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사절을 보내 두 사람이 동시에 퇴위하고 슈라에 새 칼리프 선출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 역시 거절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알다하크 이븐 카이스 알 피흐리에게 국정을 맡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가지 개혁 법안을 내었다. 첫째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사형제 폐지, 셋째는 모든 무슬림의 자카트(자선금) 납부 의무화였다. 기득권 계층은 이에 큰 위협을 느끼고, 그가 684년 2월에 사망한 직후에 모두 폐지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불확실한데, 황달이나 전염병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죽기 전에 퇴위했다는 설도 제기되나 불확실하다. 하산 빈 말리크는 무아위야 2세 사후 야지드 1세의 차남 칼리드를 지지했지만, 겨우 10대에 불과한 아이가 이븐 주바이르를 당해낼 리 없다고 여긴 원로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던 중 이라크에서 이븐 주바이르에게 축출되어 다마스쿠스로 피신한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는 원로원 마르완 빈 알 하캄을 지지하기로 했다.
마르완은 주바이르에게 귀순하려 했지만, 지야드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고 자비야에서 우마이야 지지자들을 결집하여 회동을 열었다. 하산은 이 자리에서도 칼리드를 지지했지만, 시리아 원로들은 이븐 주바이르와 내통한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이를 따를 수는 없다며 반대하였다. 40일 간의 회의 끝에 결국 경험이 많은 마르완이 마르완 1세로서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다만 하산의 입장도 반영하여 마르완의 후계자는 칼리드, 다시 그 후계자는 아므르 빈 사이드로 정해졌고 바누 칼브는 여러 경제/정치적 특권을 보장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