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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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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white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본명 |
앙리루이 베르그송[1] Henri-Louis Bergson |
출생 |
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제국 파리 |
사망 |
1941년
1월 4일 (향년 81세) 프랑스 군정청 파리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2] |
모교 |
리세 콩도르세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
직업 |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 |
사상 | 대륙철학 |
서명 |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직관으로 파악되는 생명의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창조로 보고, 이에 반하여 공간으로 시간을 고정하여 사유하는 과학적 사유를 비판했다.2. 생애
폴란드 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너무 그렇다보니 동료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성적은 발군이어서 항상 학력경시대회 같은데 나가기만 하면 항상 입상이고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고 한다.그래놓고 선생님을 배신하고 고등사범학교 입학은 수학이 아니라 철학과로 갔다. 이후 데보브는 '너는 수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철학자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했다. 점잖은 어조지만 이는 철학자 나부랭이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는 함의를 지닌 말이다. 이에 대해 그는 수학을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과목이라 언급했다. [3]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베르그송이 일반대학에서 정교수를 했던 적은 없지만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역사상 첫 유대인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베르그송은 당대에는 드물게도 이미 국제적인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던 철학자였다. 베르그송의 강의록을 모아놓은 <잡문집>에는 영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한 그의 강연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1913년에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대로 미국에서 반년 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 때 베르그송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역사상 첫 교통체증을 만들어냈다고 한다.[7]
베르그송의 영향력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끊임없이 증가하였다. 특히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는데, 그의 영향력에 우려를 느낀 바티칸 교황청은 1914년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우드로 윌슨을 만나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윌슨은 베르그송의 팬이었으며, 윌슨의 보좌관은 베르그송에게 "당신이 각하의 선택에 미친 영향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후 윌슨이 꿈꾸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의장직을 맡으며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행위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항상 신경쓰던 사람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으나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끝까지 유대교인으로 남기로 결심한 일화는 유명하다.[8] 말년에는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예외로 해주겠단 말도 무시하고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죽음이다.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Messieurs, il est cinq heures, le cours est terminé »)"
3. 아인슈타인과의 일화
1922년에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스 철학회에서 베르그송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청중으로 참가했다. 이 강의에서 상대성 이론의 시간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논쟁이 있었다. 서로 결론 없이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이었다. 물론 여기서 베르그송이 지적한 시간 개념은 적어도 베르그송 자신의 철학적 맥락에서는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개념을 과학적 연구를 통해 그 업적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강의에서 굳이 주장했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런 오해를 풀기위해 베르그송은 얼마 있지 않아 《지속과 동시성》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시간에 대한 비판적인 저서를 내놓는다. 물론 그 비판이라는 게 물리학적으로 아인슈타인을 논박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칸트의 이성비판에서 비판처럼 그 한계와 효과를 명확히 정한다는 얘기.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아주 마니악한 떡밥이다.이 책은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인, 시계의 시간과도 다르고 심리적 시간과 가깝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필연적인 시간인 "절대 지속"의 특유함을 비교적 쉽고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을 설득하려 열을 올리는 과정에서, 철학자가 아닌 사람을 이해시키려 함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개념과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몇몇 개념들의 물리학적 배경에 대해 오해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송의 철학적 시간 개념이 낯설어 이해하지를 못했다.
베르그송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을 가했다.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한데 이해도 안 하고 비판을 했으니 설득력 있는 비판이 될 수가 없다. 반대로 말해 아인슈타인도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을 진지하게 비판한 바 없다. 즉, 아인슈타인은 베르그송의 시간개념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베르그송은 아인슈타인의 시간개념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은 상대방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서 비판한 실책을 저지른 셈이다. 베르그송도 나중에 그걸 깨닫고 《지속과 동시성》은 사후 나올 자신의 전집에서 빼 달라는 말을 남겼다.
4. 사상
"부인, 저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 Madame, j’ai dit que le temps était réel, et qu’il n’était pas de l’espace.)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강연 중,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귀부인의 물음에)[9]
( Madame, j’ai dit que le temps était réel, et qu’il n’était pas de l’espace.)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강연 중,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귀부인의 물음에)[9]
베르그송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속(durée)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명이 가지고 있는 시간은 '순수지속'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속 그 자체는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된다고 주장한다. 수학적 시간이나 물리적인 시간은 추상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진정한 시간이 아니고, 진정한 시간이란 것은 살아 움직임으로인해 내적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창조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운동하는 유동체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이를 '공간'상으로 '고정'을 해서 보는 것은,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대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 예를 들면 가령 우리가 개구리를 공부할 때 구조를 알기 위해서 해부를 한다. 그러면 해부학적인 개구리는 공부되지만 개구리는 이미 죽은 시체가 되어 있다. 즉, 죽어 있는 개구리를 공부하는 것처럼 '순수지속'이 죽어있는 시간을 보는 것이 과학이며, 이와는 반대로 철학자는 '순수지속'이 살아있는 생명체를 염두에 두고 철학을 해야 된다고 베르그송은 주장한다.
5. 철학사에서 위치
보통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빌헬름 딜타이와 같은 생의 철학자로 구분된다. 이것은 주로 독일 철학의 관점에서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고, 프랑스 철학의 시각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로 지목된다. 멘-드 비랑에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 전통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해석에서부터 기본적인 입장들은 모두 이 전통에서 해석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초기 작인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에서는 칸트를 인용하는데, 거물인 칸트를 비판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학술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10] 실제로 이 책에서는 칸트는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의 주저 창조적 진화를 보건대 베르그송이 주적으로 삼은 것이 칸트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칸트의 학설과 베르그송의 학설은 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르다.[11]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이 필요한 바이지만, 베르그송이 프로이트의 최초 인용자로 프랑스에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프로이트를 인용한 것은 이미 베르그송이 <시론>과 <물질과 기억>, <웃음>을 출간하며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가 된 1902년으로, 이 당시 프로이트는 막 <꿈의 해석>을 출간한 상태였고,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베르그송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추어 볼 때, 프로이트의 인용이 베르그송의 논의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이다.그는 시간에 대한 탐구를 일생동안 지속했는데, 그것은 주로 공간에 대해서 탐구해 온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 전통에 대해 전복을 꾀하는 것이다. 2500년간의 서양철학사가 그에게는 '시간 망각의 역사'라고 생각되었고, 본질상 분절할 수 없는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따로 일부분만 떼어서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 온 철학사의 오류들을 시간을 정당하게 인식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논의 역설 중 하나인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에 관한 역설을 그는 비판하면서 시간과 운동은 분절시킬 수 없으며, 운동이 지나간 자리에 불과한 '궤적'을 공간적으로 임의로 분절시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한 제논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과거의 베르그송 해석은 주로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12]를 중심으로 한 생명과 진화에 대한 독특한 해명에 중심이 맞춰줬고 그래서 생의 철학자로 구분했으나 요즈음에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 나온 지속이라는 그의 독특한 시간이론과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현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평가하는 바이고 서양에서는 영국과 미국 학계가 주도한 심리철학과 현대 과학철학 사조에 눌려서 사실 많이 죽었다.[13][14] 1950년대 이후 비약적인 자연 과학의 발달로 베르그송의 과학 인식은 많이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사실, 그래도 적어도 출신국인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의 주류로 대접받는편, 그의 다양한 저술들이 프랑스 학자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현재 프랑스의 철학교육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시되는 인물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번역한 최화 교수는 "세계 어디서도 이러한 철학사 파악은 찾아볼 수 없으며, 플라톤과 베르크손이 짝지어져 이처럼 깊이 이해되고 이처럼 높이 평가된 적은 없다"라고 서문에 쓰고 있는데, 이걸 뒤집어서 얘기하면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유독 베르그송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책 홍보문구로 뽑기 딱 좋은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자생적인 철학사조라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때 불다마는 유행일 수도 있다. 새로운 조류일지, 반짝 유행일지는, 베르그송에 대한 수입이 이루어진 지 아직 2세대가 지났을 뿐이기에 조금더 지켜봐야 할 일. 덧붙여 말하자면, 여전히 한국의 철학계에서 프랑스철학 전공은 독일철학 전공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수이며, 프랑스철학 안에서 베르그송을 단지 번역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더 극히 소수라고 보아야 한다.
근래 학계 동향을 보면, 프레데릭 보름스(Frédéric Worms)를 필두로 해 다시 베르그송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6. 대한민국 연구 현황
한국의 베르그송 연구에 있어서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박홍규 서울대 교수이다. 그는 한국의 서양 철학 연구의 토대를 닦아 놓은 인물로서 평가 받고 있으며, 주로 플라톤과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런 형이상학을 계승해 나간 인물이 바로 베르그송이라고 평가하며, 서양철학의 두 축을 플라톤과 베르그송으로 보았다. 물론 당시에 베르그송의 고대 철학 연구 자료들이 활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개념과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상충되며 이는 『 창조적 진화』 제4장의 앞부분에서 명백히 주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리한 짝짓기는 아니다.위의 연구와는 반대로, 베르그송 이후의 철학, 요즘에는 특히 질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중심으로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파악하고 활용하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철학함 혹은 탐구 대상의 발견의 질서와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들뢰즈의 통찰이 베르그송의 주요 저작들을 읽는 데에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상학, 특히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비교한 연구도 이뤄지곤 한다. 사실 베르그송 철학의 주요 반대자 중 하나가 메를로퐁티인 점, 그러면서 동시에 베르그송의 '지각' 개념과 '신체' 개념에 있어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비교 연구는 쉽게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의 철학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상충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비교 연구의 큰 의의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7. 주요 저술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의식에서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15] |
<colbgcolor=#fff,#1f2023> 1889년 |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 |
1896년 |
웃음 Le Rire |
1900년 |
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 |
1907년 |
정신적 에너지 L'Énergie spirituelle |
1919년 |
지속과 동시성[16] Durée et Simultanéité |
1922년 |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
1932년 |
사유와 운동[17][18] La Pensée et le Mouvant |
1934년 |
베르그송의 4대 주저는 《의식에서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한국에는 베르그송의 주요 저술이 거의 다 번역되어 있다. 다만 베르그송이 철학에 미친 영향과 베르그송에 대한 비판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해설서나 베르그송 전기 등이 번역되어 있지 않은 점이 아쉽긴 하다.
8. 어록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라. [19]
시간은 고안된 것 내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20]
성적 매력은 우리 문명의 핵심입니다. [21]
9. 여담
[1]
이름 표기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는 '베르그송, 앙리 (루이)'이므로 '베르그송'이라는 표기가 가장 널리 쓰이나, '베르그손', '베륵손', '베르크손', '벩손'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역주자인 최화는 bergson에서 '-gs-'가 어떻게 발음되냐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정확한 발음은 '베르그존' 또는 '베르크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베르그손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더불어 우스운 얘기일지도 모르나〈나의 목소리 베르그송, 베르크손, 베르그손〉(최훈) 이라는 논문도 있다.
[2]
프랑스 제2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프랑스 군정청
[3]
이 일화는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제도를 모르면 조금 이해하기 어렵다. 수학자나 철학자나 프랑스는 대혁명 이래로 고급공무원을 그랑제콜, 특히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독점적으로 채용해 왔다. 그런데 이 에콜 폴리테크닉이란 그랑제콜이 수학을 엄청나게 강조하는 학교여서 입학시험부터 졸업성적까지 수학 실력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그래서 저 시대에는 수학을 잘 하면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고 재학 중에 높은 성적을 거두어 그랑 코르라고 불리는 고급공무원단으로 직행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고급공무원단을 뽑을 때 별도의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에콜 폴리테크닉 졸업생에게만 자격이 주어졌고, 무조건 에콜 폴리테크닉 졸업 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했다.) 선생님이나 부모들은 수학 천재 베르그송에게 그런 진로를 기대했을 텐데, 베르그송은 사범학교인 에콜 노르말로 가버린 것이다. 에콜 노르말도 에콜 폴리테크닉과 쌍벽을 이루는 명문이지만, 교육과 학문에 특화된 곳이어서 유명한 학자나 교수들은 즐비하게 배출했어도 출세와는 좀 거리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에콜 노르말은 에콜 폴리테크닉처럼 수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 아니고 각각의 학문 분야를 잘 하면 인정받는 곳이다. 수학이면 수학, 철학이면 철학. 그래서 베르그송 스승의 발언은 수학 vs 철학이라기 보다는 ‘넌 수학 잘 하니 에콜 폴리테크닉 가서 고급공무원으로 출세할 수 있는데, 그 출세길을 마다하고 잘 풀려야 교수인 에콜 노르말 가서 철학이나 하겠구나.’라는 의미이다. 절대로 학문으로서 수학이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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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레쥬 드 프랑스는 그런 곳이 아니고, 프랑스 정부에서 국민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기존 대학 체계에서 벗어나(등록금을 내거나, 시험을 치르거나, 학점을 따거나, 학위 과정을 밟거나, 논문을 쓰거나 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자유롭게 고급 강의를 청강할 수 있도록 설립한 학술기관이다. 그건 학원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꼴레쥬 드 프랑스의 특징은 교수진을 구성할 때 일반 대학 교수를 능가하는 높은 봉급과 처우를 주고, 설립 목적인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하는 강의만 조금 하면 그 이외에는 아무런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강의조차도 아주 적고 부담이 없는 수준이며 (일반 대학의 교수는 강의와 교육 부담이 상당하다), 강의 내용도 교양 수준 대중 강연이 아니라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최첨단 연구 결과를 강의한다. TED 강연 따위와는 수준이 다르다. 거기에 더해서 연구보조인력과 연구비도 빠방하게 지원해 준다. 한 마디로 학자에게는 꿈의 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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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임용도 젊은 학자를 교수로 채용하는 대학과 다르게 기존 대학교수나 연구원들 가운데 정말 학문의 일가를 이룬 거물급들만 채용한다. 당연히 대학 교수들조차 업적을 쌓아서 꼴레쥬 드 프랑스 교수로 가고 싶어 하며, 나무위키에 실린 프랑스 유명 학자들의 커리어를 살펴 보면 대학교수하다가 콜레쥬 드 프랑스 교수가 된 경우가 많다. 프랑스 이외에는 이런 기관이 거의 없고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가 그나마 비슷하다) 학위도 수여하지 않기 때문에 해외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꼴레쥬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제일급 교육연구기관이며, 여기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일반대학교수를 뛰어넘어 당대 프랑스에서 해당 분야의 최고 석학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절대 학원 따위에 비교될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6]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는 전국민에게 열려 있는데 그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그리고 시험도 없고 수료증 따위도 없으니) 이곳 강의를 들었다는 것을 일종의 허세나 스노비즘으로 악용하는 수강생도 많다. 물론 그 반대로 해당 분야 지식이 깊은 아마추어나 대학원생, 연구자들도 수강하러 온다. 아래에 있는 베르그송과 귀부인과의 대화도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완전개방된 강의라고 해도 일부러 시간 내서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를 들으러 오려면 해당분야 연구자거나, 아니면 밥벌이에 목매달 필요가 없는 유한 계급일 가능성이 높다 보니 ‘귀부인’들 숫자가 많았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19세기 말까지 서구에서도 여자는 대학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애 이런 귀부인들 가운데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를 들을 만큼 머리 좋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7]
스탠포드 철학사전에 이 에피소드가 보고되어 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ergson/
[8]
자신의 임종에는 가톨릭 신부를 불렀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료로 확인할 수는 없다.
[9]
약간의 조소가 섞인 대답이었다고 한다.
[10]
베르그송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학계는 신칸트학파가 득세하던 상황으로, 칸트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철학적 가치가 평가절하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후에 베르그송은 자신이 칸트로부터 거의 영감을 받은 바가 없다고 고백한다
[11]
오히려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베르그송의 학설이 반칸트주의로 소비되곤 했다
[12]
이책에서 쓰인 용어중에 딴곳에서 오용하기로 유명한 용어로 élan vital(생의 약동,
엘랑 비탈)이 있다. 이 표현들은 심지어 1930년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고, 1920년대 베르그송 철학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이전에도 널리 유행하여 신문 기사 등에 쓰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어로 베르그송을 접한 사람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어로라도 당시에 베르그송을 정통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큰 고민 없이 유행에 휩쓸려서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3]
신유물론의 출현으로 다시금 주목받는
질 들뢰즈나 해체주의로 20세기 중후반 미국을 강타하며 스타덤에 오른
자크 데리다 같은 학자들과 비교하면 훨씬 정통적인 철학사 계보에 속한다. 소위 프랑스적인 철학의 계보, 데카르트, 말브랑슈, 멘 드 비랑으로 대변되는 흐름을 종합한 인물이기 때문.
[14]
여담으로 질 들뢰즈 역시 베르그송의 철학적 유산을 계승한 철학자이다. 철학사가로서
바뤼흐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함께 베르그송 철학을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 치켜세웠다.
[15]
영어판 제목은 Time and Free Will이다. 이는 영어로 원서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했을 때 드러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베르그송이 직접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사실 한국어로도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에 관한 시론, 의식의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등. 이때 <무매개적>=<직접적>, <소여>=<주어진 것>임으로 번역상 큰 문제가 없다고 하겠으나, <de la conscience>를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문제가 된다. 즉, de를 여격으로 볼 것인가, 소유격으로 볼 것인가. 주재형은 그의 역서 『현대 프랑스 철학』(길)에서 '의식에'라는 번역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의식에'라고 번역할 경우 의식의 자기 구성적 측면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런 관점은 현상학적 측면에서 중요한듯 하다.
[16]
아인슈타인의 시간 개념을 비판하는 저서이지만, 베르그송은 나중에 이 책을 자신의 전집에서 빼달라고 말했다.
[17]
제목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운동은 mouvement이고, le mouvant은 운동체, 운동자이다. 따라서 『사유와 운동체』라고 번역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레데릭 보름스의 지적에 따르면 le mouvant이라는 단어가 현대에서 운동체, 운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이긴 하지만, 당대에는 문법적으로 다소 이상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에 가깝다고 한다. 사실 le mouvant을 운동체라고 번역할 경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 가운데 하나인 "운동은 운동하는 물체를 전제하지 않는다"와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운동체'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동(動)처럼 외따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문법적 어색함의 의도적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할 듯 싶지만, 책의 제목으로 달기에는 부적절한 면모가 있기에 『사유와 운동』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는 것이 굳이 오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18]
'le mouvant'의 한국 번역어는 다음으로 축약된다. '운동자', '동자', '운동', '동', '운동체', '원동자', '움직이는 것'. 현재까지 한국 연구 중 시도된 번역어는 '운동자', '운동', '원동자', '움직이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베르그송 연구의 주축인 보름스(Wroms)와 그의 사단의 지적이 어찌됐든 간에, 또 이에 대한 한국 번역어의 적절성 논쟁이 어찌 됐든 간에, 'le mouvant'은 '떨리는 것', '휘몰아치는 것', '요동치는 것'에 가깝다. 베르그송이 le mouvant(영어로 치면 동사 'move'의 동명사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든 어쨌든 간에,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le mouvant을 '운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만, 기존 번역 단행본 어디에도 제목 번역에 대한 해명이 없다는 점을 비추어 봤을 때, '운동'이 그리 사려 깊은 번역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역자는 이 지점에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의 주석에서 지적한 '체'(마찬가지로 '-것' 등)의 문제도 베르그송의 '실체' 개념이 해명되고나서야 가능한 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
Il faut agir en homme de pensée et penser en homme d'action.
[20]
Le temps est une invention, ou il n'est rien du tout.
[21]
Le sex-appeal est la clef de voûte de notre civilisation.
[22]
출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연보.
[23]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하)』, 김춘미 옮김, 문학사상사, 2003.
[24]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Votre perception, si instantanée soit-elle, consiste donc en une incalculable multitude d'éléments remémorés, et, à vrai dire, toute perception est déjà mémoire. Nous ne percevons, pratiquement, que le passé, le présent pur étant l'insaisissable progrès du passé rongeant l'avenir. P.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