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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 |
|
|
|
<colbgcolor=#1952dd> 출생 | 1909년 6월 6일 |
러시아 제국 리가 | |
사망 | 1997년 11월 5일 (향년 88세) |
영국 옥스퍼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런던 세인트 폴 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컬리지 |
분야 | 정치철학 |
사상 | 자유주의, 다원주의[1] |
직업 | 교수, 외교관, 철학자, 로비스트 |
[clearfix]
1. 개요
라트비아 출신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정치이론가. 근대 이후 나타난 자유의 개념들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하고, '소극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현대 정치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 담론을 부흥시켰으며 이를 통해 다원주의를 주장했다.또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경계하고, 미국의 매카시즘 역시 비판했던 냉전자유주의자(Cold War liberalist)였다.
2. 생애
2.1. 초년기와 학자의 길
이사야 벌린은 독일어를 쓰던 러시아계 유대인 출신으로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부유한 목재상 아버지 멘델 벌린과 어머니 무사 마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리가에 진군하자 일곱살이었던 벌린은 부모를 따라 당시 러시아 제국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로 이주, 그곳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경험한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부르주아라고 끊임없는 감시를 당하자 그의 가족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벌린이 12살 때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는 런던에 살면서 영어를 배웠고 19세에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해 고전학과 근대사를 전공했다.똑똑했던 벌린은 졸업 후 바로 옥스퍼드 뉴칼리지 철학과 교수가 된다. 불과 23살의 나이였다. 하지만 뉴칼리지 생활은 한없이 우울했기 때문에 몇 주만에 그만뒀고, 영국 학계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옥스퍼드 대학교 올소울즈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합격했다. 이를 통해 벌린은 상류사회로 진입하여, 유명한 은행장, 외무장관, 《더 타임즈》 편집장 등과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로스차일드가(家) 사람들과 주말을 함께 보내곤 경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미겔 데 우나무노, 거트루드 스타인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앨프리드 에이어, J.L. 오스틴, 스튜어트 햄프셔 등의 철학자들과도 수많은 토론을 펼쳤다.
이러는 중에, 벌린은 뉴 칼리지의 학장 H.A.L 피셔로부터 '가정대학 총서'에 들어갈 카를 마르크스 평전을 써보라는 제의를 받고는 1933년부터 5년 동안 집필에 매진했다. 유창한 러시아어 덕분에 영국의 대다수 학자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마르크스 사상[2]에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3] 이 작업이 끝난 1938년 가을, 나치로부터 탈출하여 영국에 도착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기도 했고 1940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초청해서 동료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2.2. 뛰어난 정보원이자 외교관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벌린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영국 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로비스트로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라'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고 그는 정치인, 노동조합대표, 국회의원, 저널리스트, 동료 로비스트들과 매일 접촉하면서, 거래가 어떻게 성사되고 환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용되며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를 배웠다. 이 시기 미국으로 건너온 하임 바이츠만과 교류하고 바이츠만의 라이벌이었던 벤 구리온과도 관계를 유지하였다.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하게 되자, 그가 할 일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벌린은 수많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미국동향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는 소수의 엄선된 사람들만 볼 수 있었는데,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내각사무처, 정보국과 외무부의 고위급 인사, 대사들, 각료들은 물론이고 왕실에도 전달되었다. 상관들은 벌린이 보유한 정보원의 범위와 정보의 질에 감탄했다. 그의 평판은 날로 높아져갔다. 이런 활약 덕택에 미국 워싱턴의 영국 대사관 제1서기가 된 벌린은 케인스와도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아놀드 토인비는 벌린에게 외무부 연구부서의 한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1945년에 벌린은 모스크바 주재 영국대사관의 일을 맡기로 결심하고 25년만에 러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러시아 예술계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이곳에서도 공산주의에 핍박받는 그들의 모습을 동향보고서로 작성했다. 특히 《닥터 지바고》를 지은 파스테르나크와 시인 아흐마토바 등을 만났고 이들이 수년간 겪은 박해를 기록했다.
2.3. 대학 교수로서의 삶과 말년
194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새 영국 상류사회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사교계의 파티 주최자들이 앞다투어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영국왕립국제관계연구소인 채텀하우스와 영국 노동당, 보수당, 자유당의 여름학교에서 그에게 강의를 요청했고, BBC 라디오는 그에게 방송을 부탁했다. 심지어 처칠은 자신의 회고록 《몰려드는 폭풍》에 대한 조언을 벌린에게 구하기도 했다. 처칠은 벌린의 비판을 받아들여 원고를 수정했다. 또한 미국 외교 정책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의 부탁으로 스탈린의 통치 기술에 대한 기고문을 올리면서, 미국에서 러시아 문제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1950년대부터는 정기적으로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 브린모어, 프린스턴 등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1956년에는 알린과 결혼했고, 1년 뒤엔 옥스퍼드 사회정치이론 치첼리 석좌교수로 임명됐다. 그는 비상한 말재주로 학생들을 홀려놓았으며, 옥스퍼드의 정치철학과 정치이론사의 부흥을 주도했다. 특히 1958년 10월 31일에 했던 '자유의 두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 강의는 그가 행한 가장 영향력 있는 강연으로 손꼽힌다.
60년대에는 케네디가 소련에 대해 정치적 자문을 구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68년 학생운동의 파도에 회의감을 느껴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 오자마자 울프선 재단의 후원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교에 울프선 칼리지를 설립하고는 초대 학장을 지냈다. 이후 울프선 칼리지를 운영하면서 그 동안의 강의를 책으로 출판하는 작업에 매진하다가 1997년 11월 5일, 옥스퍼드에서 폐렴으로 삶을 마감했다. 지은 책으로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비코와 헤르더》 《자유의 두 가지 개념》 《러시아 사상가》 《개념과 범주》 등이 있다.
3. 사상
3.1. 자유의 두 가지 개념
자유에는 역사적으로 '소극적(Negative) 자유'와 '적극적(Positive) 자유'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어왔다고 벌린은 주장한다. 소극적 자유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한다. 즉 간섭의 부재를 말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자신(self)의 주인(master)이 되기를 원하는 각 개인의 바람에 근거한다. 즉 적극적 자유는 자기 지배(self-mastery)를 의미한다.예를 들어, 도박중독자는 아무도 도박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소극적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그가 도박하는 것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그러나 도박하지 않으려는 자기절제적 욕구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적극적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신의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내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중독 앞에서는 내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중독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려면,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임시적으로 제한을 걸거나 아니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그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어떤 '간섭'이 필요한 것, ㅡ 이는 자신의 소극적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다. ㅡ 그래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각종 중독 이외에도 신경쇠약, 우울증, 강제된 욕구 그리고 무지조차도 소극적 자유를 희생해야지만 적극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벌린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단순히 자유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개념이 아니라,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경쟁적 개념으로 본다. 앞서 강조했듯이, 적극적 자유는 소극적 자유를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극적 자유는 자기절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간섭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개인을 국가에 복속시키는 나치나 스탈린 같은 전체주의에 쉽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벌린은 적극적 자유를 비판하면서, 개인의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사적 영역으로서의 '소극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 ('소극적 자유'를 보장하면 개인 각자는 서로 다른 다양한 경험들을 마음놓고 현실세계에 펼쳐낼 수 있으므로, 벌린은 각자의 이해와 취향을 존중하는 그 사회를 일컬어 다원주의적 사회라고 칭한다.)
3.1.1. 벌린의 자유론에 대한 찰스 테일러의 비판
찰스 테일러는 적극적 자유의 '자기 지배'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적극적 자유에 대한 벌린의 해석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개인 각자에는 자유로운 지식 습득과 자기 이해를 통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해방적 잠재력'이 있으며, 이러한 자아실현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넓은 선택과 보다 높은 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므로, 우리는 적절한 계기와 간섭을 마냥 부정할 것만은 아니다.벌린은 중독, 신경쇠약, 우울증, 강제된 욕구, 무지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을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술 중독이든 마약 중독이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없다는 논리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공부를 못해서 더 가난해지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벌린에 따르면 간섭해선 안 된다. 하지만 중독이나 무지같은 경우에도 외부의 적절한 간섭이 개입한다면 개인은 보다 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잠재력의 확장을 통해서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즉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들 자체가 모두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과장된 대응방식이라는 게 테일러의 주장이다. 물론 적극적 자유를 인정한다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간섭'을 당연하게 여기자는 말은 아니다. 테일러가 보기에 문제는 적극적 자유를 '적절히' 잘 사용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소극적 자유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저 최대한 많이 보장하려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3.2. 냉전자유주의
벌린은 자신의 정신을 '우리'와 '그들'이라는 고정불변하는 카테고리 속에 가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게다가 더 나쁜 것은 '그들'이 하는 것을 '우리'도 해야된다고 믿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슬로건 아래 일사불란하게 완전한 일체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도 없다.좌익이든 우익이든 이데올로기상의 독단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이 세계를 적과 동지로 나눈다. 이와 관련해 레닌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누구를'로 구분하는 것이고, 망치와 모루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자들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나눈다. 바이마르 시대의 법철학자이자 나치의 전체주의를 옹호했던 칼 슈미트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와 원수를 분간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물론 이들도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고 필요하다면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설사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국내 정치는 상대편과 적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는 상대가 없이는 기능할 수 없으며, 상대편을 존중하는 정신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만약 민주주의에서 상대방을 서로 적으로 간주하면 정치는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전쟁으로 돌변하고, 맹목적 당파성에 사로잡혀 어제의 반대편이 내일은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정치영역에서 상대편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 제대로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제 무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편과 적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는 상대편은 적이 된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편만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은 이른바 정치 영역으로서, 협상과 흥정, 타협 속에서 모든 사안들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협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4. 저서
4.1. 고슴도치와 여우
그의 「고슴도치와 여우」란 에세이는 그의 저작 중에서 제일 유명하며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그 에세이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언급한다. 여우는 영리하고, 교활한 짐승이기에 고슴도치를 기습할 많은 전략들을 무수히 짜낸다. 그리고 고슴도치를 습격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고슴도치를 덮친다. 그에 비해 고슴도치는 단지 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울 뿐이다. 이렇게 고슴도치는 한가지 방법만으로 여우의 수많은 전략을 한순간에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여우와 고슴도치의 지혜를 따질 때, 우리는 당연히 여우의 지혜가 뛰어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번번이 싸움에서 이기는 건 고슴도치다.이처럼 이 이야기는 여우가 온갖 교활한 꾀를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호신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보통은 풀이되지만, 벌린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와 고슴도치를 가져와서 인간 유형을 크게 두 분류로 나누는데 활용한다.
- 고슴도치형 인간 -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세상을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파악하려는 사람. ( 단테, 플라톤, 루크레티우스, 파스칼, 헤겔, 도스토옙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
- 여우형 인간 - 생각이 산만하고 분산적이어서 때로는 모순되기도 하는 서로 다른 다양한 목표들을 추구하는 사람. 그들은 현실의 다채로운 경험을 포착하고 받아들일 뿐,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비전에 그들 자신을 맞춰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 세익스피어,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에라스뮈스, 몰리에르, 괴테, 푸시킨, 발자크, 조이스)
물론 이런 식의 지나친 단순화에 따른 이분법은 압축적이고 인위적이고 불합리하기도 하지만, 무가치한 것이라 일축해버릴 필요까지는 없다. 어떤 구분이라도 약간의 진실은 담고 있듯이, 이런 구분도 세상을 관찰하고 비교하는 하나의 관점, 즉 진지한 연구를 위한 출발점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벌린은 이러한 구분을 『 전쟁과 평화』에서 보여준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비평하는데 적용시켜 본다. 비평은 분석적이고 다소 반복되지만, 벌린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톨스토이가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작업에서는 상호모순적인 서로 다른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묘사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는 벌린이 추구하는 바와도 비슷하다. 우리는 단지 여우처럼 사람들 사이에 모순되는 목표들이 일으키는 갈등들을 그저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고슴도치처럼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갈등을 강제로 궁극적인 하나의 목표에 맞추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고슴도치 같은 여우'처럼 현실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목표'들을 가졌음을 인정하고, 논의를 통해 갈등을 '타협'하여, 우리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ㅡ 최종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ㅡ '우선순위들(Priorities)'을 정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이라고 벌린은 강조한다.
여기서 '고슴도치 같은 여우'를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문제의 해결이나 목표의 추구에 있어서 다양한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러한 인정은 제각기 다양한 방식이 저마다 옳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갈등은 결코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여우'이고,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든 마음속의 한가지 목표를 향해 그때마다의 '타협'으로 한걸음식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마음 속에 한가지 비전을 가진 '고슴도치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타협안'은 결코 최종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는 그때그때마다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고슴도치 같을 뿐이지 완전히 고슴도치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고슴도치 같은 여우'라는 말은 (고슴도치를 흉내내려고 노력할 뿐) 일단 여우긴 여우라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이사야 벌린이 추구하는 인간 유형은, 마음속으로는 한가지 비전을 꿈꾸지만, 현실 갈등의 다원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때마다의 우선순위를 목표로 타협안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를 말한다.
5. 관련 영상
6. 여담
- 그의 퍼스트네임인 ‘Isaiah’는 성경에도 나오는 ' 이사야'다. 영국 발음 기준으로는 ‘아이자이어’, 미국 발음으로는 ‘아이제이어’다. 이름 '벌린(Berlin)'은, 영어 철자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Berlin)과 같다. 참고로 Berlin은 '물기가 많은 땅'이나 '새끼 곰'을 가르킨다고 한다.
-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지은 《이사야 벌린》에서 그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지만, 오역이 심하다. 심지어 특정문구를 의도적으로 오역해 놓은 것으로 의심되는 문장도 있어서 이해하는 데에 주의를 요한다.
- 이사야 벌린은 하이데거의 역사관에 대해 "막연히 비극적이긴 하지만, 바로 직전 과거의 범죄와 참사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있고, 대체로 그 본질에 대한 모호한 논고를 통해 특정 죄책감을 덜려고 한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1950년대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미국인들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온 국가를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은 사건과 관련해 그는 "적의 위협에 압도당해 그 위협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해 스스로 최면상태에 빠진 결과 나온 것"이라면서, 결국 자유로운 국가가 자신들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자유와 다원주의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5]
[1]
이사야 벌린은 하나의 가치관을 강조하게 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에 여러 가치관이 인정받을 수 있는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
[2]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전집인 《메가 MEGA》가 먼저 독일어로 출간되었지만 히틀러 집권후에 출간되지 못했고, 이후 소련에서 러시아어로 재출간되었기 때문이다.
[3]
다만 지금은 그의 마르크스 평전이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어서 학술적으로 정밀하지 못한 면이 많고, 그 때까지의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
[4]
벌린은 심지어 민주주의 조차도 적극적 자유에 해당하며, 민주주의가 소극적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체주의보다는 민주주의가 소극적 자유의 가능성이 더 넓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5]
《이사야 벌린》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지음.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