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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초대 황제
무제 | 武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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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 어진 (역대제왕도권) | |||
출생 | 236년 | ||
조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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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266년 2월 4일[1] | ||
조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사망 | 290년 5월 16일 (향년 54세) | ||
서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 준양릉(峻陽陵) | ||
재위기간 | 조위의 진왕세자 | ||
264년 11월 25일 ~ 265년 9월 11일 | |||
조위의 진왕 | |||
265년 9월 11일 ~ 266년 2월 8일 | |||
서진 초대 황제 | |||
266년 2월 8일 ~ 290년 5월 16일[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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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 하내 사마씨 | |
휘 | 염(炎) | ||
부모 |
부황
태조 문황제 모후 문명황후 |
||
형제자매 | 9남 2녀 중 장남 | ||
배우자 |
정실
무원황후,
무도황후, 효회태후[3] 후궁 좌분, 호방, 제갈완 등 |
||
자녀 | 26남 12녀 | ||
자 | 안세(安世) | ||
작호 |
북평정후(北平亭侯) → 신창향후(新昌鄕侯) → 진왕세자(晉王世子) → 진왕(晉王) → 황제(皇帝) |
||
묘호 | 세조(世祖) | ||
시호 | 무황제(武皇帝) | ||
연호 |
태시(泰始,
265년 ~
274년) 함령(咸寧, 275년 ~ 280년) 태강(太康, 280년 ~ 289년) 태희(太熙, 290년 ~ 290년) |
[clearfix]
1. 개요
진 무제는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
진서 무제본기
진서 무제본기
서진(西晉)의 초대 황제. 휘는 염(炎). 자는 안세(安世). 위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었다. 어머니는 왕원희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이며, 삼국을 통일하고 10년간 태강지치(太康之治)라는 태평성세를 이룩했지만 말년에는 사치와 향략이 심했다는 등 평가가 엇갈리는 면이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2. 외모
진서에 묘사되기론 머리카락이 땅까지 닿을 만큼 길고 두 팔이 무릎까지 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계속 장발 일러스트로 등장한다. 당시에는 팔이 길어야 제왕에 걸맞다 생각했는지 후연의 창업자 모용수도 이런 묘사가 있다.3. 생애
3.1. 초기
위나라 가평 연간에 북평정후에 봉해졌다가 급사중과 봉군도위를 역임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가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여러 차례 승진해 중호군이 되어 가절을 받았다가 동무양에서 조환이 즉위하기 전 영접한 공으로 중무군으로 승진하면서 신창향후로 진봉되었다.3.2. 진 나라의 초대 황제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세자가 되어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사마소가 사망한 뒤, 사마염은 황제 조환에게 선양받아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진( 晉)으로 바꾸어 서진을 건국한다. 여기서 사마소 사망 후 3년상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때 사마염이 '짐이 이래 봬도 (백성들을) 예( 禮)로 교화해 온 집안 사람인데 3년상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행했다.[4] 선양 문제 등으로 상복을 벗었다가, 이듬해 여름 숭양릉 방문건으로 상복 문제가 불거지자 사마염은 자신만 입겠다고 하고 상복을 다시 입는다.[5]특히 사마염의 발상 해프닝은 당시는 물론이고 북송대의 사마광조차도 '한 문제가 폐한 것을 진 무제가 다시 살렸는데, 이건 꽤 잘했음' 이라고 크게 칭찬했을 정도니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나 본데, 어쩌면 이게 쓸만한 공적들은 선대들이 다 먹튀하고 마지막 카드인 손오 정벌은 한참 후에나 이룰 수 있었던 사마염의 체면을 세워준 '껀수'는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거나 이것이 진나라의 건국으로 왕년에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받은 것을 그대로 똑같이 따라했다.[6]
그래도 손오 정벌 전 사마염에게 빛나는 군사적 승리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것은 독발수기능의 난이었다. 호열과 견홍이 서량 통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건의 간언을 씹어서 1차적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나 견홍의 전사한 책임으로 억울하게 경질되었던 사마준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독발수기능을 약화시켰고,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여 그 후에도 신하들의 온갖 모함을 무시하며 끝까지 마륭을 지지한 끝에 독발수기능의 난을 손오 정벌 이전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3.3. 삼국 통일
관련 문서: 오멸망전15년 뒤인 280년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진압되자, 오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시대를 마감한다. 이것이 《삼국지》의 끝. 그 이후 10년간 태강지치라 불리는 성세를 이루지만, 지적장애인을 내치지 못하고 후계자로 냅둬서 끝내 그가 죽은 뒤 진나라는 팔왕의 난으로 종친끼리 골육상쟁을 벌였다. 사마치가 즉위하며 팔왕의 난은 끝났지만 영가의 난으로 이민족들에게 쫓겨나서 관중과 중원을 이민족에게 뺏기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으로 존속한 오호십육국시대를 맞이하였다.
통일을 거저먹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통일을 앞두고 나라를 말아먹은 전진의 부견을 생각하면 그가 단순히 천하를 거저 먹었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아니, 부견보다도 어쩌면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한 조비조차도 그 쉬운 거저먹기를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 해도 전쟁이란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멸망전도 양호라는 명장이 10년 가까이 철저히 준비한 전략을 통해 성공한 것이었다.
3.4. 통일 이후의 치세
천하 통일을 하기 전이었던 즉위 초반에는 태의령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 옷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하고 유능한 이미지였다.황제에 이른 초반에는 아직 적국이 존재하므로 나름 자제하면서 살았으나 280년에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긴장감이 완전히 풀어졌는지 자제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통일 이후 사마염은 잔치를 자주 열고 사치를 부렸다는 서술이 존재한다.
3.5. 각종 일화
사마염의 사치와 관련된 일화가 몇 있는데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후보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에 사마염은 '재물욕은 채울 수 있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중국사 최악의 사치 낭비로 악명높은 석숭과 왕개의 돈지랄도 이 시대였지만 때려잡기는 커녕 허허 하면서 구경만 했다.
예를 들어 왕개와 석숭의 산호수 일화를 보더라도 값의 높고 낮음을 떠나 무려 '황제의 하사품'을 고작 돈지랄 한번 하겠다고 고의로 때려부수고도 별 탈 없이 그냥 지나갔을 정도였다. 다른 왕조 같으면 황제의 하사품을 실수나 부주의로 잃어버리거나 파손해도 큰 죄고, 하물며 일부러 때려부술 정도면 황제에 대한 불경, 불충이라고 당사자는 목이 날아가고 온 집안이 패가망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이 일화는 후세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 기록이 좀 애매한 게, 일단 정사에 실려있는 글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원강 초, 그러니까 사마충 시대에 산호수 사건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더군다나 석숭 열전에 따르면 석숭이 형주에서 탐관오리 짓으로 치부하여 부자가 된 시기는 사마염의 시대가 아니라 원강 초 사마충의 시대이다.
즉 어리석은 백치 황제가 즉위하면서 벌어진 통치력 등의 부재로 지방관들의 기강이 약화되어 이를 통해 부를 쌓은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는 일화로는 볼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게 통일제국을 이룩한 황제 사마염의 권위 약화를 증명하는 일화라기엔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 차라리 이 일화 자체가 원래 사마충의 일화라, 사마충이 뭘 모르거나 해서 석숭의 행위를 용납했거나, 아예 일화 자체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황제의 하사물을 부숴버리는 일은 전근대 사회에서 어떤 핑계로도 저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보니 일화 자체가 신빙성을 의심받게 되는 것...[7] 진서라는 사서가 각종 기담이나 증권가 찌라시 수준의 카더라들도 많이 인용하다 보니 저런류의 신빙성없을 이야기들도 많다.
당장 진서에는 사마염이 1만의 궁녀를 들이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그 후궁과 동침한 일화가 사마염을 비판한답시고 적혀 있고 일부 후궁은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는데 대놓고 선정적이고 어디서 확인이 쉽지도 않은 과장된 가십 위주, 몇몇 후궁들이 그랬을수도 있다 정도의 일화를 들고 사마염을 비하하려는 서술로 보인다. 사실 그 와중에서도 사마염의 진정한 총애를 받아 그가 주로 가까이 했다는 후궁 몇몇의 기록만이 확실한 부분도 있기도 하고 말이다.[8] 사실 1만의 궁녀를 들었다는 기록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1만의 궁녀가 모두 사마염의 후궁인 것도 아니다. 주례에 따르면 천자의 후궁은 아무리 많아 봐야 백여명 정도고 평생 유학 군주를 자처한 진무제가 저런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을리도 없다. 애당초 저 인원의 절반인 5천명은 오나라 손호의 궁인들을 다시 기용한 거라 억지로 민간의 처녀를 마구잡이로 뽑아 간것도 역시 아니다.[9]
물론 사마염 역시 일국의 초대 황제답게 자식이 많아 후궁도 꽤 있었겠고 여색을 즐기긴 했겠지만[10], 이런식으로 초대 황제가 되도록 많은 자식을 두는 것은 단순히 여색을 밝혀서만이 아니라 정권 초기 왕실의 친위세력인 종친을 늘린다는 점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많이들 했던 일인데 유독 사마염에게서만 여색을 밝히는 이미지가 덧씌워 진것은 후대의 악의적인 기술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11] 또한 사마염의 자식들은 나중에 팔왕의 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실왕으로써 세력을 키우고 성장하는 인물들인데 이런 황자, 황녀들을 보필하고 나중에 이들이 활용할 조직을 마련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궁녀와 여관조직, 궁내조직이 급격하게 확장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적국인 오나라 궁녀들이 하루 아침에 나라가 망해 길거리에 내쫒길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외면않고 새 황실에 들여서 추가적인 민간 처녀들의 징발을 하지 않으면서 여관조직을 확충한 진무제는 굳이 사치를 부리지 않고 공손술의 집기를 그대로 가져다 썼을 뿐인 후한 광무제의 사려에 비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진의 정통성 없음을 들어서 서진이 당시 명문 사대부들의 연합정권 성격을 띈 왕조로 사마씨는 그들의 대표 정도로 평가받았다거나, 그렇기에 당시의 명문가들이 황제의 권위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의 추론들도 있지만, 당시 진 조정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봤을 때, 병으로 골골하던 말년에 좀 풀어졌던 걸 제외한 시절, 특히, 오 멸망전 이후 천하통일 시기 사마염의 권위는 절대 낮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당장 중신들이나 네임드 장수들이 독발수기능 하나 못 잡고 빌빌댈 때, 다소 무리가 따르는 행동을 해서라도 마륭을 전적으로 지원해서 난을 해결한 일이나, 오 멸망전때 가충과 같이 조정에서 힘 있는 중신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밀어붙여서 천하를 통일한 일을 생각해 보자. 중신들이 반대하는 과정을 스스로 뒤엎어버리며 자신의 방법을 관철하는 것 자체가 황제의 권위가 꽤나 강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인데, 그걸 결과까지 제대로 내 버렸다면? 그런 일을 해 낸 사마염이 가진 황제의 권위라는 게 절대 약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유선이나 손호를 놔 둔건 그렇다 치고 당장 전 왕조이자 이번 왕조의 베이스가 되는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도 별다른 견제 없이 편히 살게 놔 두었다는 것이야말로 사마염의 황권이 전 왕조를 그다지 견제하거나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걸 방증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당장 서진이 암군의 등장과 황족들의 내란,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단명했고, 강남으로 도망가서 세운 동진의 황권이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빌빌대다 끝난 탓으로 사마염에 대한 평가가 박해질 수 있고, 그러다보니 진서에서는 사마염에 대해서 썩 검증되지 않았다고 보여지는 카더라식 에피소드들도 많고, 사마염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후세에 박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마염이 능력이 없는데 천하를 거져 먹었다거나, 대단한 덕이 있거나 관용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면서도 신하들을 찍어누를만한 권위가 없어서 신하들이 한 디스들을 듣고도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거나 하는 평가는 어느정도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다.
3.5.1. 태자 책봉 문제
한번은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라고 했을 때도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한마디로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니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그래서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해 답변을 쓰게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가충에게 부탁해서 답안지를 받았으나 '이렇게 훌륭한 변려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몇명 없으니 나중에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준 것을 황제께서 아신다면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문장력이 평범한 사람을 골라서 답안을 쓰게 하고 태자께서 베끼도록 하십시오.'란 조언을 듣고 가남풍은 잘 쓴 것도 아니고 못쓴 것도 아닌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 사마염은 이것만 믿고 사마충을 인정하고 말았다.
3.5.2. 환령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는데,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라고 묻자 사례 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의 환제와 영제와 같사옵니다."라고 폭풍 디스를 했다.이에 사마염이 "아니, 환제와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오? 짐이 그들과 동급이란 말인가?!"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했지만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대신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더구나 서진 시대보다 후한 말기 시대가 더 개념 있는 신하들이 많았다. 영가의 난 당시에 숙청당한 청류파 인사들만 봐도 그렇다. 그래도 사마염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환제나 영제는 이런 직언을 훨씬 더 많이 들었는데 그 직언을 나오는 족족 씹어버리면 다행이지 직언을 한 신하들의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욕을 먹은 통일군주가 사마염이 유일한 건 아니고 그 한 고제도 주창이라는 신하에게 "이 걸 주 같은 양반아"라는 소릴 듣기도 했다. 다만 이는 본래 유협집단 출신인 한 고제와 측근들의 특수성에 기인한 면이 있고, 개인적인 인간성이야 어쨌든 통일 과정에서의 역할과 군주로서 보여준 수완으로는 사마염보다 훨씬 높게 평가받는다.
어쨌든 신하들로부터 군주로서의 능력에 대해 독설을 먹는 모습이 수 차례 보이는 꽤나 드문 케이스다. 좋게 보자면 저렇게 극딜을 당하고도 피 보는 일은 또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한 인물이다. 누울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사마염의 그런 성품을 알기에 더 저런 일들이 잦았겠지만서도 욕은 먹었어도 최소한 그렇게 말하는 신하들을 존중은 해 줬었다. 그래도 진의 시황제나 후한, 위의 조조, 조비 등 권력자들의 집단 학살, 암투와 비교하자면 사마염이 훨씬 초대 황제의 치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5.3. 번건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왜 짐의 주변에는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라고 물은 적이 있느데 "폐하께서는 등애도 똑바로 못 보시면서 어찌 제갈량을 찾으십니까." 라고 까이기도 했다.왜 등애가 나왔는고 하니 종회의 난 당시 억울하게 일족이 주륙당한 등애의 신원도 못하는데 제갈량 같은 신하가 있어 제대로 쓰여지겠느냔 뜻이다.
이에 사마염이 등애의 신원을 해주었고 자손들도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어찌보면 선제[12]의 실책을 인정하는 셈이니 굉장히 위험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들어주었다.
3.5.4. 기타
사마염은 통일 과정을 주도해 실적을 쌓았다. 오를 병탄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한 건 어디까지나 사마염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초대 황제 중 가장 천하를 거저먹은 케이스로 보이겠지만, 후세 남북조 시대가 진행된 경과를 보면 강동 지역 병탄이 그렇게까지 마냥 쉬운 일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렇게 놀고먹는 순간에 있어서도 사마염은 병탄한 강동 지역의 행정,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꽤나 신경을 쓰고 있었고, 이때 행한 행정, 경제적인 배려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후세들이 북조에게 대항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마염이 이 부분까지 내팽개쳐두고 신경쓰지 않았다면 남조는 그렇게까지 오래 버틸 수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13][14]다만 몇 가지 해프닝을 보면 사마염이 리더십과 행정력, 위엄은 있었지만 책임감은 꽤 부족했다. 손오의 대도독인 육손의 아들 육항이 죽자 그 틈을 노리자고 한 진나라의 충신 양호의 상소대로 일찍이 손오를 정벌했다면 280년이 아닌 몇 년 전에 달성을 했을 것이고, 양호의 상소대로 따르지 않았다면 천하 통일은 커녕 천하 통일 직후처럼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 밖에도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 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4. 평가
진 무제는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
진서 무제본기
진서 무제본기
진 무제는
혜제의
혼약(昏弱)함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교체시키지 않았고,
가후의 악함에 대해서는 몰라서 폐위시키지 못했으며,
양준이 제 마음대로 정권을 뒤흔들었어도 물리치지 아니하였으니, 스스로 난을 끼친 것이라고 하겠다.
홍대용
홍대용
홍대용의 평가는 제대로 핵심을 찌른 건데, 당시 서진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런저런 문제가 아예 없진 않았으나, 범군 수준이라도 되는 황제가 후대에 왕위에 올랐거나, 적어도 양준이 제대로 깡과 능력이 있는 권신이 되어서 반대자들을 적당히 찍어누르고 포섭해 가면서 혜제를 바지 황제로 만들고 전횡을 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거나[15], 아니면 사마염의 유언에 맞도록 사마염 자신이 애시당초 위관과 사마량에게 힘을 좀 실어줬다면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으로 이어질 정도로 서진이 막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사마충과 가남풍, 그리고 양준을 막지 못한 사마염의 처신은 서진 왕조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다.
사마염의 가장 큰 단점은 성격이 너무 물렀다는 점이다. 사마충이 어리석고 통일 제국의 2대 황제가 되기엔 바람직 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년 시점까지도 장자를 태자에서 폐하면서 바뀔 혼란이나 뒷정리에 대해서 결단하지 못했다.[16] 물론 인간적으로는 재능이 떨어지는 아들을 단지 그 이유로 태자에서 폐하면, 본인이 가진 그 종법 상 정통성 때문에 그 최후가 필시 좋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주저한 것이겠지만[17] 결과물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는 것. 이런면에서 사마염의 평가는 군주로써는 인간적으로 무른 성격이었다는 것 때문에, 후계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아들 하나 잘못 낳았다는 것 때문에, 다른 영명한 후계자로 바꿀만한 대안들이 충분히 더 성장할 시간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억까를 당하는 면도 꽤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다못해 사마충 시대에서도 장화나 배외, 하다못해 가남풍의 사촌오빠 가모 정도만 되어도 능력과 충성심 충분히 있는 인물들이어서 가남풍이 집권하던 10년 동안 나라가 그런대로 평온하게 굴러갔다. 사마휼만 죽지 않았다면, 혹은 사마윤이 무사히 황태제가 됐다면, 종실들이 자기가 혜제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개싸움을 벌이는 일까진 없었을 것이다. 사마예 같은 유능한 황족들이 명나라 영락제 급의 능력과 세력만 있었어도 팔왕의 난은 조기제압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사마염 입장에선 안 좋은 후대 if가 줄줄이 터지는 바람에 망한 감도 없잖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위관의 딸은 성정이 어질고 후덕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당대 전근대 부녀의 덕이고, 가남풍만한 정치력이 있는지도 고려해봐야 하는 일일것이다. 그나마 가남풍은 양준을 처리해 10년간은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다지만 위관의 딸이 그만한 정치력이 없다면 결국 나라를 망치는 게 가남풍에서 양준이 되는 것 뿐이다. 물론 위관의 딸이 황후가 될 경우 위관에게도 좀 더 권력이 주어지겠지만 그가 양준과 전면승부를 벌일지 사마량처럼 회피할 지는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위관 정도면 보신주의자 기질이 있기는 해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굴려가면서 혜제를 적당히 보필해 갈 수준은 되는 인물이었으니 가충이나 양준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사마량도 사마의의 아들로 황실에서 촌수도 꽤 높은 축에 들어갔던 데다, 성인군자는 아니어도[18] 다른 원로인 사마륜이나 사마융 수준의 찌질이나 병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황족들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물론 사마염이 말년에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황후와 양준이 조서를 조작해서 사마량을 쫓아내기는 했다. 사마염은 죽기 직전까지 사마량을 찾았지만 좀 더 건강했을 때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중요한 것은 사마염의 이런 결정이 분명히 아쉬운 면이 꽤나 있지만, 이해를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후계 문제를 제하고 보면 사마염은 이전 세대인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나 이후의 서진 황제들과 팔왕들, 동진의 황제들에 비해 긍정적인 면이 상당히 많다. 사마진에 대한 악평이 많은 진서에서조차 그를 두고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개국의 군주으로써 그는 여러 명군의 자질이 있었다.
첫째, 그는 관대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넓었다. 진서 무제본기에서 그에 대해 설명할 때 처음으로 언급하는 서술이 바로 '관대하고 은혜로우며 인자하고 후덕하여 성격이 진중하고 도량이 있었다'는 서술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의견도 잘 들었다. 조위, 촉한, 손오의 대신, 주요 신료, 장수들도 대부분 그가 문제없이 기용했다. 마륭간의 일화를 보면 웬만한 명군과 명장의 미담이라고 칭송해도 이상하지 않다. 덕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하여 정국의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마소가 조모나 혜강을 죽여서 민심의 비판을 받고 촉멸전을 성공해서야 간신히 무마한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사람이 너무 관대한 나머지 악평을 듣는 신하들도 보호한 탓에 문제가 된 면도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둘째, 그는 선대나 후대와 달리 피를 보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통일( 오멸망전)과정에서도 다가온 멸망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오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한 것 외엔 과도하게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위 원제 진류왕 조환, 촉 후주 안락공 유선, 오 말제 귀명후 손호 같은 위오촉 왕조의 군왕, 종실들과 한 왕조의 종실 후인은 모두 그의 치하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마염 이후 3백년간의 위진남북조시대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셋째,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성실했으며, 지방을 다독이는 정책을 잘 했다. 오나라를 평정한 후, 그는 원래 오나라의 관리를 등용하여 그 지방을 다스렸다. 또 통일 후 중국 내부에서 가혹한 정치는 없애고, 정령을 간소화했다. 북방으로 이주한 오나라 사람들에게는 각각 요역부세를 10년(장리)과 20년(백성백공)간 면제하는 등 민심을 얻으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19] 노는 걸 즐겼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손에 놓지도 않아 그의 25년 치세를 다룬 진서 무제본기는 정석적으로 각종 문제들을 처리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한 일화들, 정책들로 가득하다.
덕분에 진나라 초기 진무제 사마염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나라는 발전하고 위나라 시기 전시체제의 각박함에서도 많이 벗어나, 백성들은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다. 사마염 치세의 중국은 서북방의 이민족 침공과 오나라와의 대결 외엔 비교적 태평했고, 백성들도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사마진에 비판적인 진서나 기타 사서에서조차도 이 시기를 두고 "백성들을 평화롭고 세속은 고요했으며, 각 가정에 공급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만족시켰다.(民和俗靜,家給人足)"라고 평가했었는데, 현대의 연구로 따져도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진무제의 선정과 태평치세를 보통 태강의 치라고 하는데, 태강은 진무제가 마지막 10여년간 썼던 연호로, 말년에 정치가 흐트러지고 나라가 어지러웠다는 사마염의 이미지와는 오히려 정 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대외정책만 보더라도 부여를 비롯한 전통적인 이민족 동맹을 우대하고 보호하였으며 부여 외에도 요동-한반도에 거주하던 여러 민족에 대한 동방 정책을 유화적인 기조로 나아가 많은 신경을 썼다.
총체적으로 보면, 사마염은 후대의 악평들과는 달리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괜찮은 인물이었다. 중국사의 역대 통일왕조 초대 군주 중에 가장 관대한 인물이기도 했고, 군주라는 시각을 잠시 내려놓고 보면 개인으로서는 인간적으로 호감이 갈만한 일화들도 제법 있는 사람이다. 노는 걸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던거 같기는 하지만 비슷하게 여러 인간적인 일화로 민간의 호감을 산 건륭제가 보여준 실제의 인성적인 결함에 비하면 결함이라고 할 것도 못 된다.[20][21] 다만 후계자 선정을 잘못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모든 IF들이 죄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터지면서 영가의 난이란 비극이 생긴 것은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사마염은 황태자를 바꾸면서 생길 피바람을 감당하기엔 너무 성정이 물렀고, 때문에 몇가지는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사마염에게 있었음에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후대가 어떻게 잘 해주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손을 쓰지 못했다. 이러한 인간적인 망설임과 주저함이 후대에 서진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쳐 사마염에 대한 악평으로 돌아왔다.
5. 번외: 부여와 재조지은
夫餘國 在玄菟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000리인데, 호( 戶)는 80,000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22]
한국사에도 큰 영향을 줬는데, 바로 부여에
재조지은을 행했다는 점이다.
부여가 모용선비부의
모용외에게 공격받아 피해를 입자 호동이교위 선우영에게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 모용외로부터 부여를 구하여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켰다.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000리인데, 호( 戶)는 80,000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爲慕容廆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爲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 爲惡虜所滅, 甚愍念之. 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爲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 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明年, 夫餘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廆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廆衆退, 羅得復國. 爾後每爲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冀二州, 禁市夫餘之口.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조[22]
여러모로 진무제의 정책은 고대 한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가 재정비한 위진의 율령은 삼국이 받아들였던 그 율령으로, 삼국 초기 율령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판단하며 따라서 초기 한반도 국가들의 국가정체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동이교위를 설치하고 부여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모용선비의 세력 확장을 늦춘것은 고구려와 부여에게 모용선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발전할 유예기간을 주었다. 이 기간 동안 세력을 키운 고구려가 한사군을 병합하여 위진의 선진문물을 흡수한 것, 서진이 삼한과의 무역 관계에 있어서 골고루 상당한 특혜를 주어 경제 발전에 적지 않게 이바지한 것[23], 그 전에는 일개 군 태수 따위 정도 대우 밖에는 못 받았던 마한왕, 진한왕, 변한왕 등의 처우를 한 단계 올려준 것은 대단히 의미가 컸다.
그러므로 의외로 한국사 흐름에서 진무제 사마염은 단순히 삼국지 등장인물로써가 아니라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6. 가족 관계
아내 | 자녀 | 봉작 | 이름 | 탄생 | 사망 |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艷) | 장남 | 비릉도왕(毗陵悼王) | 사마궤(司馬軌)[24] | ? | ? |
차남 | 혜제(惠帝) | 사마충(司馬衷) | 259 | 306 | |
3남 | 진헌왕(秦獻王) | 사마간(司馬柬) | 262 | 291 | |
7녀 | 평양공주(平陽公主) | ? | ? | ? | |
8녀 | 신풍공주(新豊公主) | ? | ? | ? | |
9녀 | 양평공주(陽平公主) | ? | ? | ? | |
무도황후(武悼皇后) 양지(楊芷)[25] | 16남 | 발해상왕(渤海殤王) | 사마회(司馬恢) | 283 | 284 |
효회태후(孝懷太后) 왕원희(王媛姬)[26] |
17남 | 회제(懷帝) | 사마치(司馬熾) | 284 | 313 |
귀인(貴人) 좌분(左棻)[27] | 자식 없음. | ||||
귀빈(貴嬪) 호방(胡芳)[28] | 11녀 | 무안공주(武安公主) | ? | ? | ? |
부인(夫人) 제갈완(諸葛婉)[29] | 자식 없음. | ||||
미인(美人) 심씨(審氏) | 4남 | 성양회왕(城陽懐王) | 사마경(司馬景) | ? | 270 |
8남 | 초은왕(楚隠王) | 사마위(司馬瑋) | 271 | 291 | |
16남 | 장사려왕(長沙厲王) | 사마예(司馬乂) | 277 | 304 | |
재인(才人) 서씨(徐氏) | 5남 | 성양상왕(城陽殤王) | 사마헌(司馬憲) | 270 | 271 |
재인(才人) 궤씨(匱氏) | 6남 | 동해충왕(東海沖王) | 사마지(司馬祗) | 271 | 273 |
재인(才人) 조씨(趙氏) | 7남 | 시평애왕(始平哀王) | 사마유(司馬裕) | 271 | 277 |
미인(美人) 조씨(趙氏) | 18남 | 대애왕(代哀王) | 사마연(司馬演) | ? | ? |
부인(夫人) 이씨(李氏) | 9남 |
회남충장왕 (淮南忠莊王) |
사마윤(司馬允) | 272 | 300 |
15남 | 오효왕(呉孝王) | 사마안(司馬晏) | 281 | 311 | |
보림(保林) 엄씨(嚴氏) | 10남 | 신도회왕(新都懐王) | 사마해(司馬該) | 272 | 283 |
미인(美人) 진씨(陳氏) | 11남 | 청하강왕(淸河康王) | 사마하(司馬遐) | 273 | 300 |
제희(諸姫) | 13남 | 여음애왕(汝陰哀王) | 사마모(司馬謨) | 276 | 311 |
재인(才人) 정씨(程氏) | 14남 | 성도왕(成都王) | 사마영(司馬穎) | 279 | 306 |
생모 미상 | 장녀 | 상산공주(常山公主)[30] | ? | ? | ? |
생모 미상 | 차녀 | 장광공주(長廣公主)[31] | ? | ? | ? |
생모 미상 | 3녀 | 형양공주(滎陽公主)[32] | ? | ? | ? |
생모 미상 | 4녀 |
형양장공주 (滎陽長公主)[33] |
? | ? | ? |
생모 미상 | 5녀 | 번창공주(繁昌公主)[34] | ? | ? | ? |
생모 미상 | 6녀 | 양성공주(襄城公主)[35] | ? | ? | ? |
생모 미상 | 10녀 | 만안공주(萬安公主) | ? | ? | ? |
생모 미상 | 12녀 | 영천공주(潁川公主)[36] | ? | ? | ? |
생모 미상 | ? | 영수공주 | 사마수려 | ? | ? |
- 18남 7녀로 총 25인. 그러나 상당수가 요절했고, 팔왕의 난으로 형제끼리 서로 죽이면서 사마치와 사마안 둘만 남는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가의 난으로 몰살당했다. 가장 오래 산 아들이 48세에 죽은 혜제 사마충으로, 30세를 넘긴 아들도 사마충, 사마간, 사마치, 사마안, 사마해 5명이 전부이며 사마충만 빼면 이들마저도 전부 30대 초반에 죽었다.
- 이들 빼고도 역사에 기록한 첩은 10여 명이 더 있다. 아들 8명이 더 있으나 요절하여 기록되지 않았다.
- 또한, 서진에서 정상적인 권력을 누린 유일한 황제이다. 사마충은 가남풍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고 팔왕의 난에 휩싸여 죽고 만다. 진 회제, 진 민제는 전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죽는다. 진나라가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 즉위한 진 원제는 왕돈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다. 진 명제 때 황제권을 되찾는 것 같았지만 요절하고 이후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환온, 환현 같은 신하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효무제 때 잠시 황제권을 되찾는 듯 싶었으나 효무제가 어이없이 죽고 난 후 진 안제와 진 공제는 유유의 꼭두각시 신세가 되어 유유에 의해 살해당하고 결국 진나라는 멸망당한다. 그리고 진나라 황족인 하내 사마씨들은 유유에 의해 거의 몰살당한다.
7. 기타
고려의 8대 군주인 현종과 자가 같다.8.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무제(서진)/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현대에 표준으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으로는 266년이기 때문에 이것을 265년으로 간주해야 할지 266년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2]
음력
265년
12월 13일 ~
290년
4월 20일
[3]
사후 추존
[4]
한문제 이후 군주의 상례는 이일역월(以日易月) 즉, 하루를 한 달로 치는 변칙을 취하였다.
[5]
여기서 3년상을 주장해 밀어붙인 인물이
양호였으며, 반대한 사람은
부현이었다.
[6]
조씨의 제위를 뺏었지만 조씨를 차별하지 않았는지 조창의 아들 조해에게는 어머니 왕원희가 머무는 숭화궁의 관리자로 임명했고, 조식의 아들 조지 역시 산기상시로 임명해서 곁에서 자기를 섬기게 했다. 정확히는 옥좌에 앉은 적통 계열이 아닌 제후왕이라는 명목으로 밀려난 서얼 계열을 챙겨준 게 맞다고 봐야 할 듯.
[7]
당장 저 일화의 경우 실제로 벌어졌다면 황제 이전에 석숭의 정적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사건이다.
[8]
사실 사마염이 정말 진심으로 총애한 후궁은 재기 넘치는 성격으로 평소에 사마염에게 조언을 많이해 준
호방이며, 궁녀들이 뭘 하건 말건 거의 호방의 거처에만 머무른 경우가 많았다고 진서에서조차 적고 있다. 그외에 문재가 뛰어나 사마염이 문서 작성을 맡기곤 했던
좌분이 좀 예우를 받은 수준.
[9]
물론 사마염이 총애한 후궁인
호방의 사례에서도 나오듯이 정권 초기에 다량의 궁녀를 뽑은것은 사실인데 무슨 1만궁녀 운운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거다.
[10]
무원왕후가 3부인 9빈을 충원할 때 미색이 떨어지는 여자들만 뽑자 화가나서 다 무효화시키고 본인이 그냥 직접 뽑았단 일화도 있긴 해 여색을 안 즐겼다고 할 수는 없을듯하다.
좌분 같이 순수하게 문학적 재능이 있어서 선발한 케이스도 있기는 하지만.
[11]
당장 사마염을 욕하는 기술을 한 진서를 쓰라고 한 당태종 이세민만 해도 자기가 죽인 형제들의 아내들을 비롯해 닥치는대로 여색을 취해 수많은 자식을 본 진정한 귀축색마였다.
[12]
자기 아버지인
사마소
[13]
단적으로 낭야왕 사마예가 강동에 내려갔을 때 초기의 인사들 중에는 오나라 때 명문가들의 자손들이 많았다. 감녕의 증손자
감탁이랄지, 주방의 손자이자 주처의 아들인 주기, 고옹의 손자인 고영 등이 있다. 사마염이 어느 정도 강동 지역의 민심을 잡아놓지 않았다면 저 어지러운 시대에 강동이라고 오나라 부활 세력 따위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당장 주기가 아버지의 죽음이 어떠했는지 알면서도 끝까지 사마씨를 따르며 진민에게 호응하지 않고 엿먹인 걸 생각해보자. 그렇기는 한데 장창, 두도, 진민의 반란 쓰리콤보가 터졌던 거 보면 그쪽이라고 민심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14]
사마염이 했다는 강동지역에 대한 배려라는 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그 지역의 호족이나 유력자들을 꽤나 적극적으로 등용은 했지만 지역 자체에 대한 통제는 강하게 하지 않았던 방식이었는데 이 때문에 혜제 때 일어난 장창의 난에서 진압병력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제대로 준비 못 하고 나선 신야군왕
사마흠이 전사해버린다던가 혹은 회제 때의 진민의 난 진압에 시간이 꽤 걸리는 문제들이 훗날 생기기는 했었다. 다만 강남의 호족이란 세력들은 오나라때부터 자기들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어느정도는 안정적으로 보호를 해 줄 수 있는 세력에 대해서는 후하게 평가하다보니 사마염의 저런 정책을 꽤 좋게 본 모양이다. 진민이 난을 일으켰을 때 간을 보던 감탁이나 고영이 그 동네에서 진민이 적극적으로 왕 노릇 하려던 걸 보자 그대로 배신한 것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상이었다. 저런 난의 와중에도 강남지역의 호족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놈들보단 그래도 사마씨가 우리를 안정적으로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이다"라는 인식이 생기기는 했었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훗날 동진으로 그대로 이어져서 비수대전같은 큰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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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양기나 동진의
환온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실권은 가지되 찬탈하기는 힘든 정도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조조 정도인데 황제를 조조 정도까지 쥐락펴락하기엔 견제 세력은 있는 정도다. 양준의 경우는 의뢰로 사람이 잔인하고 악랄한 구석은 없는 편이었는데 욕심은 많은 대신에 좀 비겁하고 옹졸해서 용렬한 구석이 있다보니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권력을 움켜쥐고 농단할만한 그릇이 못 되었고, 양준의 동생들은 의외로 행동거지가 괜찮다는 평을 받는 사람들이라서 권력을 농단할 만한 인격들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가남풍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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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이 죽을 때를 보면
사마간이나
사마윤 같은 나이가 적당히 차고 무난한 이들도 있었으니 황태자를 바꾸고자 하면 충분히 바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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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어디를 둘러봐도 재질이 떨어지거나 군주가 택현하는 과정에서 폐태자가 된 이들은 근본적으로는 후계자로 내세워진 이들의 정통성 정립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제거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비슷한 시기에 폐태자가 되었다고 살해당한 오나라
손화의 예도 있었고 말이다.
[18]
사실 이 사람은 성인군자라서 문제가 된 케이스이다. 현실정치의 시궁창에서 자기 길을 제대로 만들기엔 너무 무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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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초에 오나라 땅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고 반진과 친 손씨 성향이 강해서 그의 치세 내내 그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곳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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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궁녀니 사치가 심했느니 하는 진서의 서술도 약간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서의 서술 자체가 썩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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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보면 관대하고 너그러운 부분이 많았던 인간 사마염에 비하면 인간 아이신기오로 홍력은 말년으로 갈수록 긴장이 풀려 나태해진 것과는 별개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임을 독차지해서인지 국가경영을 잘 해내던 청년~중년기에도 인간적으로는 꾸준히 독선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예를 들어 원로대신인 장정옥(
명사의 편찬자이기도 하다.)은 강희 시절부터 고생하고 옹정 연간에 하드코어한 군기처 노동까지 견뎌내었기에 옹정제가 크게 신임하여 '너 죽으면 태묘에 배향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주었다. 어느날 건륭제에게 장정옥이 "저 죽을 날도 머지 않았는데 태묘 갈 수 있죠?" 물었다가 '어디서 선황의 유지 운운하며 김칫국부터 들이키느냐' 하는 건륭제의 불쾌한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건륭제는 이후 다시 허락해줬다가도 "야 니가 그러고도 태묘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같은 투로 거절하는 등 밀당을 벌였다. 어느새 장정옥은 일가족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니 건강은 나락으로... 결국 강건성세의 손꼽히는 권신이자 명신임에도 장정옥은 태묘 배향을 확언받지 못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향에서 세상을 하직했는데, 막상 죽으니 안쓰러운지 건륭제는 그제서야 장정옥을 태묘에 배향해 주었다. (이 일화는
연희공략에서도 소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옹정제의 총신이자 고명대신이었지만 말년에 장정옥과의 암투로 분란을 일으켰던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는 장정옥과 마찬가지로 선제에게 약조받아 태묘에 배향되었음에도 사후에 조카들이 호중조 사건에 연루되어 가문이 박살나면서 태묘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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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번역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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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만 이것은, 마한이 삼한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는 걸 막겠다는 서한 이래 중원 정권의 견제 정책 연장이기도 했다. 근초고왕의 백제가 일시 한반도 내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이런 견제를 잠깐 뿌리친 것이었으나, 곧이어 진한 사로국 또한 얼마안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원 정권의 오랜 견제와 의도는 다른 쪽으로 실현된다.
[24]
2세에 요절해서 차남인 사마충이 사실상 적장남이었다.
[25]
양준의 딸로 양염의 당질녀이며 사마충의 계모.
[26]
원래는 사마염의 첩 중에서 재인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아들
사마치가 제위에 오르자 효회태후로 추증되었다. 사마소의 아내
왕원희(王元姬)와는 다른 인물이다.
[27]
좌분 또는 좌빈. 좌옹의 딸이자
좌사의 누이.
[28]
호분의 딸.
[29]
제갈충의 딸.
[30]
두 눈이 먼 장님. 남편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를 사마염에게 대접하기로 유명한 왕제(王濟).
[31]
남편은 진덕(甄德).
[32]
남편은 노심(盧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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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형양공주와 작위가 같은 걸 보면 동복 자매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공주'는 황제의 딸에게, '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에게,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여지는 칭호. 남편은 화항(華恒).
[34]
남편은 위선(衛宣). 하지만 이혼했다.
[35]
남편은
동진 초기의 권력자이자 반역자인 왕돈(王敦).
[36]
남편은 왕수(王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