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12:15:07

석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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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2대 황제
해양왕 | 海陽王
출생 314년
전조 광평군 양국현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사망 335년 (향년 22세)
후조 광평군 양국현 숭훈궁
(現 허베이성 싱타이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후조 황태자
330년~ 333년 8월 17일
제2대 황제
333년 8월 17일 ~ 3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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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홍(弘)
부모 부왕 고조
모후 정씨
형제자매 4남 중 차남
대아(大雅)[1]
작호 해양왕(海陽王)
연호 연희(延熙, 334년)
}}}}}}}}} ||
1. 소개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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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2대 황제.

고조 명황제 석륵(石勒)의 차남으로 석륵의 6촌동생인 석호(石虎)에 의해 폐위되어 묘호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폐위된 후 해양왕(海陽王)에 봉해졌다.

2. 생애

석홍은 정씨 소생으로 33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학문이 뛰어나 국가를 안정시킬 인재로 인정받았으나, 심약하고 군사적인 재능이 떨어졌다. 실제로
치세에는 명군이 될 것이지만 난세에는 암군이 될 것이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당대가 다름아닌 난세였다.
당시 중산왕(中山王) 석호는 강대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석륵과 후조의 대신들은 석홍이 석호를 통제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신하들은 석륵이 붕어하기 전까지 계속 석호에 대한 처리를 하도록 권고했지만, 석륵은 계속 망설이며 미뤘다. 역시나 석홍은 심약했고, 석호의 세력이 강대했기 때문에 석호를 견제하지 못했다.
333년에 석륵이 병환으로 몸져 눕자, 석호는 궁궐을 장악한 후 조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등 전횡을 부렸다. 그리고 7월 석륵이 결국 석호를 처리하지 못한채 붕어하고, 석호는 망설이는 석홍을 황제에 즉위시켰다. 석홍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석호에게 제위를 양보하려고 했으나, 석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석홍을 제위에 올려 놓은 다음 모든 실권을 자신이 장악했다. 석홍은 석호의 훌륭한 괴뢰 황제가 되었다. 석호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에 불타 있어서 먼저 여러 왕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석륵의 아들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결국 석홍을 제외하면 모두 죽었으며 어린 애들은 모두 거세당했다. 대신 공석이 된 왕위는 모두 석호의 자식들이 차지했다. 이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석호는 이를 모두 격파했다.

8월에 석호를 승상, 위왕, 대선우로 삼으면서 구석을 덧붙여주고 위군 등 13개 군으로 국을 만들어 백관을 총체적으로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석호의 자식들을 왕으로 책봉하고 석호의 부하들도 각기 관직을 임명했다.

334년에 연호를 연희(延熙)라 고쳤고, 4월에 석홍이 석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석호는 이를 거절했다. 그렇게 세 번째로 조정 대신들이 선위할 것을 권하자,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자신은 황제가 아닌 '천왕'(天王)의 지위에 올라 섭정했다. 334년 11월에 폐위되어(연희정변) 석홍은 해양왕에 봉해졌고 태후 정씨, 석굉, 석회 등과 함께 숭훈궁에 유폐되었다가 곧 살해당했다.(335) 석호는 그후에도 천왕의 지위에 있었으나, 사실상 황제였고, 말년에야 황제로 즉위했다.


[1] 북위를 다룬 역사서인 《 위서》에서는 제6대 현조 헌문제 탁발홍의 휘를 피휘하여 '석대아'(石大雅)로 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