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3:49:43

명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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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 진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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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제2대 황제
명제 | 明帝
파일:attachment/dongjinmyeongje.jpg
출생 299년
서진 서주 낭야국 개양현
(現 산둥성 린이시)
즉위 323년 1월 3일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사망 325년 10월 18일 (향년 26세)
동진 양주 단양군 건강현 동당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무평릉(武平陵)
재위기간 동진 진왕세자
317년 ~ 318년 5월 10일
동진 황태자
318년 5월 10일 ~ 323년 1월 3일
동진 제2대 황제
323년 1월 3일 ~ 325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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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소(紹)
부모 부황 중종 원황제
친모 건안군군, 계모 원경황후
형제자매 6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명목황후
자녀 2남 3녀
도기(道畿)
작호 진왕세자(晉王世子)
→ 태자(太子) → 황제(皇帝)
묘호 숙조(肅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령(太寧, 323년 ~ 3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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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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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晉)의 6대 황제이자 동진(東晉)의 2대 황제. 묘호는 숙조, 시호는 명황제. 휘는 소(紹). 자는 도기(道畿). 사마의의 현손이자 사마의의 사남 사마주의 증손이며 사마근의 손자이고 진원제 사마예의 아들이다. 동명인 진 문제 사마소는 사마의의 차남이자 사마주의 이복 형으로 명제의 큰증조할아버지에 해당한다.

2. 생애

원강 9년(299년)에 진원제와 후비 예장군군 순씨(豫章郡君 荀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마소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박식했다. 사마소가 어릴 때 장안에서 황제의 칙사가 오자 원제가 물었다.
진 원제: "네가 보기에는 태양이 멀리 있겠느냐, 아니면 장안이 더 멀리 있겠느냐?"
진 명제: "장안이 더 가깝습니다. 왜냐면은 태양이 있는 곳에서 사람이 왔다고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진 원제는 기특하게 여기고 다음날 주연을 베풀어 문무백관을 불러 놓고 다시 사마소에게 물어봤다.
진 명제: "태양이 가깝습니다."
진 원제: "아까는 장안이 가깝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 명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눈을 뜨면 태양을 볼 수 있지만 장안을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감탄했는데 특히 진 원제는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1]

그는 철이 들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지간에는 화목했으며 어진 사람과 유학자를 존경하고 장졸과 백성을 사랑했다. 또 문장, 서예, 학문, 병법 모두 뛰어나 신하들도 감탄했고 인심을 얻었다. 건흥 초기에 동중랑장이 되어 광릉을 지켰다.

건무 원년(317년), 세자(世子)가 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태자가 되었다. 대장군 왕돈은 자기가 찬탈하는데 진 명제가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가 효성이 없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모함하여 여러 번 폐위하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진 원제가 사망하자 사마소는 부황의 장례를 치르고 황제에 즉위했다.

태녕 원년(323년) 4월, 왕돈은 황위를 찬탈하려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군사를 고숙으로 이동시켰고 이듬해 정월에는 충신 주숭 등을 죽이고 회계를 습격했다. 이에 진 명제는 직접 친정에 나서게 된다. 왕돈은 이때 친정하러 온 진 명제의 진채를 형 왕함으로 하여금 기습하게 했는데 오히려 개발렸다. 왕돈은 절망하여 "실로 형님은 계집애와 같은 늙은 영감이었다. 아아, 우리 집안이 드디어 망하는구나!"라며 앓아누웠다. 거기에 진 명제가 이 틈을 타 기습해서 또 다시 대패하자 그대로 넘어가서 죽었다. 진 명제는 왕돈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부하인 전봉, 심충 등을 주살하며 반란을 평정했다. 그러나 왕씨 일족들을 죽이지 않았으며 왕돈의 가솔이 그를 안장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담당 관원이 왕도, 왕빈 등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왕씨 일가라고 무조건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 명제는 왕도가 왕돈의 사촌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반란 토벌에 공을 세웠다면서 상을 내리고 신임하며 더욱 중용했다.

진 명제는 능력이 좋고, 사람도 좋아 명군의 자질이 컸고 실제로도 명군이지만 불행하게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왕돈의 난을 진압하느라 모든 공력을 다 소비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태녕 3년(325년) 윤8월, 진 명제는 재위 2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건강 동당에서 사망하고 무평릉에 안장되었다. 동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황제다운 군주였다 하겠다.

3. 여담

진나라 선제 사마의 공손연을 평정하자 대거 살육을 행했다.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살해하였으며, 그 뒤 위나라의 정(鼎)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명제 때 왕도(王導)가 모시고 배석했다. 명제가 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선제가 창업을 시작한 일을 진술하고 더불어 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 조모에 관한 사건(사마소가 조모를 죽인 일)을 진술했다. 이에 명제가 말하니

“만약 왕도 공의 말대로라면 진나라(晉)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하고 책에 얼굴을 파묻으며 몹시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진서(晉書) 제기 1권 선제기(宣帝紀)[2]
위나라 시기에 조상이자 진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사마의가 수많은 이들을 주살한 고평릉 사변이나, 사마소가 황제인 조모를 살해한 과거의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언급이 있다. 황제이자 사마의의 직계 후손인 진명제조차 이렇게 부끄러운 감정을 가졌을 마당에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려주는 자료다.[3]

검증되지 않은 설에 따르면 명제는 수염이 갈색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어머니가 갈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며 갈족도 소멸한지 너무 오래되어 그들이 정확히 어떤 외모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4] 북주 무제의 경우도 외모가 서구적이었을 거라 추측했던 일부 학자들이 있었지만, 2024년에 무제의 유골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한 결과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

4.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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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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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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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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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부분의 晉書 원문은 다음과 같다. 幼而聰哲,爲元帝所寵異。年數歲,嘗坐置膝前,屬長安使來,因問帝曰:「汝謂日與長安孰遠?」對曰:「長安近。不聞人從日邊來,居然可知也。」元帝異之。明日,宴群僚,又問之。對曰:「日近。」元帝失色,曰:「何乃異間者之言乎?」對曰:「舉目則見日,不見長安。」由是益奇之。 [2] 及平公孫文懿,大行殺戮。誅曹爽之際,支黨皆夷及三族,男女無少長,姑姊妹女子之適人者皆殺之,既而竟遷魏鼎云。明帝時,王導侍坐。帝問前世所以得天下,導乃陳帝創業之始,用文帝末高貴鄉公事。明帝以面覆床曰:「若如公言,晉祚復安得長遠!」迹其猜忍,蓋有符於狼顧也。 [3] 즉 일가 친척조차 조상의 행위를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겨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진회의 후손인 진간천이 과거에 급제 후 악비의 묘소를 참배하고 자신의 선조에 대해 수치스러워 하던 것과 매우 비슷하다. [4] 갈족임이 확실한 유골을 토대로 DNA 분석하여 복원하지 않는 이상, 실제 그들이 어떤 생김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전까지는 그저 몇몇 기록만으로 추측할 뿐인데, 전근대의 기록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수사적인 의미에서 쓰인 묘사를 맹신할 수도 없다. 실제로 전근대 중국에선 전형적인 동북아인을 묘사할 때도 붉은 머리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서양인들이 조선에 왔을 때는 마치 조선인들이 백인(아리아 인종)처럼 생겼다고 기록한 바 있었다. 또한, 갈족의 외모가 어땠는지와는 상관없이 전근대 동아시아는 대부분의 시대에서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를 아름답다고 여겼다는 걸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는데, 바로 불상 미인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스러운 대상을 묘사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최대한 미화했기에 불상도 당시의 미적 기준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불상이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 그리고 미인도는 말 그대로 미인을 묘사한 그림인데, 이 또한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들을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