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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66cc> 요진 제3대 황제
요홍 | 姚泓 |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제호 | 말황제(末皇帝) |
연호 | 영화(永和, 416년 ~ 417년) |
성 | 요(姚) |
휘 | 홍(泓) |
자 | 원자(元子) |
생몰 기간 | 388년 ~ 417년 |
재위 기간 | 요진의 황제 |
416년 ~ 417년 | |
부친 | 요흥(姚興) |
[clearfix]
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후진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멸망군주이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다. 통칭 말황제(末皇帝)이다.2. 생애
388년에 훗날 후진의 제2대 황제가 되는 요흥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394년 요흥이 즉위한 뒤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요홍은 태자 시절에 박학했고 시에 심취했다. 요홍은 고조 문환제 요흥의 태자였으나, 요흥은 태자인 요홍보다 요홍의 아우인 요필을 더욱 총애했다. 이 때문에 후진에서는 요필의 일파와 태자 요홍의 일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요홍 일파와 요필 일파의 대립은 요흥이 병으로 누워 붕어하기 직전까지 첨예하게 이어졌다. 요필 일파는 모반을 일으켜 요홍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요흥이 병을 무릅쓰고 나타나면서 모반은 실패했고 요필 일파는 처형되었다.416년 요흥이 붕어하고 요홍이 제3대 황제로 즉위했다. 요홍의 재위기간에는 후진 내부의 불만이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게다가 후진은 흉노 혁련씨의 북하와 동진의 권신이자 명장인 유유로부터 지속적인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417년, 유유의 부장 왕진악이 장안의 평삭문을 무너뜨리자 요홍은 성에서 나와 항복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의 11살 먹은 아들 요불념이 어차피 항복해봐야 살해당할 것이라 경고한 뒤, 자신은 성벽 위로 올라가 자살했다. 황제 요홍과 그의 자제들, 그리고 친척들은 왕진악의 진영으로 가 항복했고, 유유에게 붙잡혀 수도인 건강으로 압송되었다. 과연 어린 아들 불념의 말대로 요홍과 그의 가까운 일족들만이 유유에 의해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강남으로 옮겨졌다.
3. 후일담
마지막 황제인 요홍은 비록 참수되었어도 건강 일대로 압송된 후진의 요씨 황실은 나름대로 꽤 대우받은 것으로 보인다. 훗날 남제를 창건하는 태조 고황제 소도성이 세력을 굳혀갈 때 여러 차례 반소도성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에 소도성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반란 세력에게도 일절 협조하지 않은 태수들 중 고조 문환제 요흥의 손자 요도세의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소도성이 정권을 굳힌 이후에도 중도파들을 해코지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에, 요흥의 후손들은 그럭저럭 남조에서 귀족 대우는 받았던 것 같다.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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