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1:59

석감(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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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6대 황제
석감 | 石鑒
출생 불명
후조 위군 업성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사망 349년 2월
후조 업성 황궁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6대 황제
349년 11월 ~ 35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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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감(鑒)
부황 태조 무황제
형제자매 13남 중 3남
대랑(大朗)
작위 대왕(代王) → 의양왕(義陽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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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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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6대 황제.

제3대 태조 무황제 석호의 서자이자, 3남이었으며 제5대 팽성왕 석준(石遵)과 제4대 초왕 석세(石世)의 형이었다.

2. 생애

건평 4년(333년) 8월, 중산왕 석호가 승상, 위왕(魏王)에 올라 후조의 정권을 장악하자, 석감은 다른 석호의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왕위에 올라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건무 3년(337년) 정월, 석호가 천왕을 칭하면서 여러 왕들의 작위를 격하할 때, 석감의 작위도 공작으로 내려갔고 봉지도 의양공(義陽公)으로 옮겨졌다.

건무 5년(339년) 8월, 천왕 석호는 동진의 유량이 주성(邾城)에 정예병 10,000여 명을 배치한 것을 꺼려 기안(夔安)을 대도독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보병 50,000명, 기병 20,000기와 석감, 석민, 이농, 장하도(張賀度), 이토(李菟) 5명의 장수를 통솔하여 북형주 일대를 침범하고 주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주성을 수비하던 동진의 예주자사 모보는 유량에게 급보를 보내며 구원을 청했지만, 유량은 주성이 견고할 것이라 여겨 구원병을 곧바로 보내지 않았다.

건무 5년(339년) 9월, 석민이 면음(沔陰)에서 동진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 채회(蔡懷)를 전사시켰다. 기안과 이농은 면남(沔南)을 함락시켰고, 장수 주보(朱保)도 백석(白石)에서 동진군 크게 격파해 동진의 장수 정표(鄭豹), 담현(談玄), 학장(郝莊), 수상(随相), 채태(蔡熊)를 죽였으며, 장하도는 주성을 점령하고 동진군 6,000여 명을 척살하였다. 주성이 떨어지자 기안은 장수들을 통솔해 호정(胡亭)을 점거한 뒤, 동진의 강하군(江夏郡)을 침구하기 시작하니 동진의 역양태수 정진(鄭進)과 장수 황충(黄沖)이 투항하였다. 기안은 계속 나아가 석성(石城)을 포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이에 맞서던 동진의 경릉(竟陵)태수 이양(李陽)과 동진군 5,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후 방향을 틀어 한동(漢東)을 약탈해 백성 7,000여 호를 포로로 잡고 후조로 귀환하였다. 정벌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석감은 관중(關中)을 통치하게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노역과 부세를 무겁게 부과하여 인심을 잃었다.

건무 11년(345년) 정월, 친구 이송(李松)이 석감에게 권하였다.
"문무관리들 중 머리카락이 긴 자가 있으면 그것을 잘라 관의 끈으로 삼고, 남은 것은 궁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떤가?"
석감이 그의 말에 따라 부하들의 머리카락을 번번이 자르니, 결국 머리카락이 잘린 석감의 장사가 도망쳐 이 일을 천왕 석호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이를 들은 석호는 격분하여 우복야 장리(張離)를 서정좌장사, 용양장군, 옹주(雍州)자사로 삼아 해당 사건을 조사케 하였다. 장리의 조사 결과 과연 사실로 드러났고, 석감은 업(鄴)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석감에게 이를 권했던 친구 이송 역시 체포되어 처벌받았으며, 동생 석포(石苞)가 석감을 대신해 관중을 통치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정월, 석호가 마침내 황제를 칭하자, 석준은 여러 황자들과 함께 왕으로 높여져 의양왕이 되었다.

태녕 원년(349년) 4월, 무제 석호가 붕어하고 석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섭정을 맡은 유 태후는 측근 장시(張豺)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장시가 사양하며 팽성왕 석준을 좌승상으로 삼고 의양왕 석감을 우승상으로 삼아 위로하라 청하니, 유 태후가 이를 따랐다.

태녕 원년(349년) 5월, 팽성왕 석준이 정변을 일으켜 석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때 석감은 시중•태부에 제수받았다.

태녕 원년(349년) 11월, 석준이 고민 끝에 의양왕 석감, 낙평왕 석포, 여음왕 석곤, 회남왕 석소(石昭) 등을 불러 태후 정씨와 더불어 석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해 의논하였다. 황제 석준이 먼저 말하였다.
"석민의 신하답지 못한 행적이 점차 현저해지고 있어 지금 그를 주살하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의양왕 석감 등은 모두 입을 모아 마땅히 석민을 주살해야 한다며 찬성했지만, 태후 정씨만이 반대하며 말하였다.
"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만약 극노(棘奴: 석민의 아명)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날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약간 교만하고 방종하여도 용서하고 함부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어머니인 태후 정씨가 이렇게 말하자, 석준은 석민의 주살을 취소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이때 석감은 밖으로 나와 환관 양환(楊環)을 보내 석민에게 회의 내용을 일러바치게 하였다.

석민이 석준을 사로잡아 곤화전(琨華殿)에서 살해하고, 아울러 태후 정씨, 황후 장씨, 황태자 석연, 중서령 맹준, 좌위장군 왕난, 상광록대부 장비(張斐) 등도 죽였다.(1차 석민의 난) 이에 석감은 스스로 후조의 황제로 즉위하여 대사면령을 내리고, 석민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고 무덕왕(武德王)에 봉하였다. 이농은 대사마에 임명되고 석민과 나란히 녹상서사를 겸했으며, 낭개(郎闓)는 사공, 진주(秦州)자사 유군은 상서좌복야, 시중 노심은 중서감에 임명되었다.

당시 진주와 옹주에서 발생한 유민들이 서쪽 방두(枋頭)로 가, 동진에 투항한 저족 수령인 포홍에게 복속되니, 그 무리가 100,000여 명에 이르렀다. 석감은 포홍의 세력이 두려워 그를 회유하고자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 서정대장군, 옹주목, 영 진주자사로 삼았으나, 포홍은 응하지 않았다.

태녕 원년(349년) 12월, 석감은 비록 제위에 올랐지만 석민과 이농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기에, 낙평왕 석포[1], 중서령 이송, 전중장군 장재(張才)에게 명해 석민을 곤화전에서 야습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석민을 습격해도 이기지 못 하는 바람에 궁중은 큰 혼란에 빠졌고, 석감은 석민의 보복이 두려워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결국 석포, 이송, 장재는 석민에게 붙잡혀 그 날 밤에 서중화문(西中華門)에서 참수당하였다.

양국(襄國)을 진수하던 무제 석호의 또다른 아들 신흥왕(新興王) 석지는 황궁에서 소란이 일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섭두(灄頭)의 강족 요익중, 방두의 저족 포홍과 연합하여 석민과 이농을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다. 이에 석민은 여음왕 석곤(石琨)을 대도독으로 삼아, 태위 장거(張擧), 시중 호연성(呼延盛)과 함께 군사 70,000명을 거느리고 석지를 토벌케 하였다. 이때 조정 내에서도 중서량 석성(石成), 시중 석계(石啓), 전(前) 하동(河東)태수 석휘(石暉)도 석민과 이농을 주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모두 석민에게 살해당하였다.

용양장군 손복도와 장수 유수(劉銖) 등도 석민과 이농을 죽이기 위해 갈족 병사 3,000명을 이끌고 호천(胡天)에 매복할 계획을 세웠다. 손복도는 석감을 끼고 석민을 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 여겨, 휘하 장수 30여 명과 더불어 당시 중대(中臺)에 머무르고 있던 석감의 신변을 확보하려 였다. 손복도와 장수들이 궁중의 각도(閣道)를 헐면서 석감을 찾아오자, 석감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손복도가 답하였다.
"이농 등이 반란을 일으켜 동액문(東掖門)에 있으니, 신은 위사(衛士)를 엄히 인솔하여 이들을 토벌하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그러자 석감이 답하길,
"경은 공신이므로 관(官)을 위해 힘을 써주도록 하라. 짐은 대 위에서 보고 있을 것이니, 행여 보답이 없을까 걱정 말라."
라 하였다. 손복도는 석감의 의사를 확인하고, 나아가 석민과 이농을 습격했지만, 이기지 못 하여 봉양문(鳳陽門)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손복도의 공격을 막아낸 석민이 금명문(金明門)을 부순 후 군사들을 이끌고 중대로 향하자, 이 과정을 지켜보던 석감은 석민과 이농이 자신을 살해할 것이 두려워 바로 중대에서 내려와 말을 타고 석민과 이농에게로 가,
"손복도가 반란하였으니 경들은 의당 이를 토벌하라."
라 고하였다. 이에 석민과 이농은 다시 군사를 돌려 봉양문에서 손복도의 무리를 무찌르고 손복도를 참수하였다. 이 전투로 봉양문에서 곤화전에 이르기까지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피는 흘러서 도랑을 이룰 지경이었다. 봉양문으로 들어간 석민이 감히 병장기를 드는 자는 참수하겠다 엄명을 내리니, 갈족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모두 성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석민은 석감을 어룡관(禦龍觀)에 감금시키고, 상서 왕간(王簡), 소부 왕울(王簡)에게 무리 수천 명을 주어 지키게 하면서 먹을 것만 매일 던져주었다. 또, 석민은 수도인 업성에 살호령(殺胡令)을 내리고, 군사를 풀어 호와 갈족이면 귀천, 남녀, 노소 구분없이 죽이게 하여 200,000여 명을 대량 학살하였다. 학살로 생긴 시체들은 모두 업성 밖에 내다버려 들개와 이리의 먹이가 되게 하였다.(2차 석민의 난)

청룡 원년(350년) 윤정월, 정권을 잡은 석민이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자신의 성씨를 "이(李)"로 고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재 조서(趙庶), 태위 장거, 중군장군 장춘(張春), 광록대부 석악(石鍔), 무군장군 석녕(石寧), 무위장군 장계(張季) 등 후조의 공경대신들은 양국으로 달아나 신흥왕 석지에게 의지하였다. 여음왕 석곤은 기주로 가 할거하기 시작하였고, 부구(滏口)의 무군장군 장침(張沈), 석독(石瀆)의 장하도, 여양(黎陽)의 건의장군 단근(段勤), 상벽(桑壁)의 영남장군 양군(楊群), 양성(陽城)의 유국(劉國), 진류(陳留)의 단감(段龕), 섭두의 요익중, 방두의 포홍 등은 제각기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며 이민을 따르지 않았다. 이때 석곤, 장거과 거기장군 왕랑(王朗)이 힘을 합쳐 군사 70,000명을 이끌고 업성을 공격했으나, 이민은 직접 창과 칼을 들고 출격해 업성 북쪽에서 이들을 무너뜨리고 3,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석곤 등이 패하여 퇴각하자, 이민은 이어서 장하도를 토벌하기 위해 이농과 함께 석독으로 향하였다.

황제 석감은 이민, 이농이 모두 부재 중인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부구의 장침에게 환관을 보내어 업을 습격하라는 밀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환관은 장침에게 가지 않고 이민과 이농에게로 가 석감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를 들은 이민과 이농은 즉시 업으로 회군하여 석감을 폐위시켰다. 재위 103일만에 폐위당한 석감은 머지 않아 이민과 이농에게 처형당하였고, 이때 무제 석호의 손자 28명도 그와 더불어 죽임을 당하였다.(청룡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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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준이 황제일 때, 반란을 획책하다가 업으로 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