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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프랑크 왕국의 왕조. 카페 왕조의 본가이자 전신이다.2. 역사
로베르 가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계보가 불확실하다. 7세기 메로빙거 왕조 시절 클로타르 3세의 궁재이자 궁정백으로서 왕의 측근이었던 로베르(Robert)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다고베르트 1세의 궁재였던 로베르의 동생 에를레베르(Erlebert)의 후손이라는 설, 다고베르트 1세의 상서(尙書)이자 투르와 파리의 주교인 투르의 흐로도베르트(chrodobert)[1]의 아들이자 역시 다고베르트 1세의 상서인 에스바이의 람베르 1세(Lambert I)가 클로테르 3세의 궁재 로베르의 아버지라는 설, 라옹 백작 에르베(Hervé)가 조상이라는 설, 르망 백작 로제(Roger)가 조상이라는 설 등이 있다. 참고로 이 중에는 흐로트베르트->람베르 1세->로베르로 이어지는 가계가 요즘에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소개된다. 크킹3 계보도에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로베르 왕조의 조상중 가장 확실한 것은 람베르 2세부터이다. 에스바이의 람베르 2세[2](Lambert II de Hesbaye)는 최초의 에스바이 백작으로, 그는 딸을 샤를 마르텔에게 시집보낸 카롤링거 왕조의 최초의 동맹자 중 한명이었다. 이후 그의 아들은 샤를 마르텔 시절 궁정을 보좌했던 에스바이 백작이자 상 라인에서의 백작(comte en Oberrheingau)과 보름스가우에서의 백작(comte en wormsgau)[3]인 에스바이의 로베르(Robert de Hesbaye)인데, 그는 이탈리아에 순찰사(missus dominici)로 보내지거나 궁정백에 임명되기도 하는 등, 카롤링거 왕조의 중요한 측근이었다. 로베르의 사후 그의 작위는 분할상속되어 그의 장남 캉코르(cancor)는 상 라인과 보름스가우에서의 백작직을 이어받았고, 아들 투림베르트(Thurimbert de Hesbaye)가 에스바이 백작직을 이어받았다. 투림베르트는 네우스트라시아와 아우스트라시아에서의 백작(comte en Neustrie et Austrasie)[4]으로서, 활동 반경을 네우스트라시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양 지역까지 넓혔다. 그의 아들인 로베르 2세 대에는 사촌인 하임리히가 카롤루스 대제의 작센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그가 이어받았던 상 라인에서의 백작과 보름스가우에서의 백작직을 다시 이어받았다.
이후 에스바이 백작가는 그 다음인 로베르 3세에 이르러 카롤루스 대제의 왕비 힐데가르드의 조카 발드라데와 결혼해 간접적으로 왕실과 인척이 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위그 카페의 증조할아버지인 로베르 르 포르(Robert le Fort)[5] 역시 카롤루스 왕조의 측근으로서, 경건한 루도비코스 1세 사후 왕조의 내분에서 대머리 샤를 2세의 편을 들어 그가 서프랑크 왕이 되는 데 공헌한 덕분에 투르와 앙제에 순찰사로 파견되는 등 여러 공직을 수행해 나갔다. 그는 가족들이 전통적으로 살던 에스바이를 떠나 서프랑크에 정착했다. 그런데 이후로 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는지 한동안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858년 샤를 2세의 형인 동프랑크의 왕 루트비히 독일인이 서프랑크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동프랑크 편에 참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 전쟁이 끝난 이후 샤를 2세는 그를 달래기 위해 브르타뉴인들을 상대하는 네우스트리아 변경백[6]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앙주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에 격화된 바이킹의 침공을 루아르 강과 센강 어귀에서 안정적으로 막아내 왕의 신임을 얻었다 865년에는 푸아티에 지역에 투입되어 그곳을 침공한 바이킹을 격퇴했다. 그 해, 그의 아내 아델라이드의 친척 블루아, 샤토됭, 샤르트르 백작 외드가 자식 없이 사망하며 대가 끊기자 아내가 상속할 몫의 지참금으로서 해당 작위를 상속했다. 그러나 866년, 브리사르트에서 바이킹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고 만다. 이후 가독은 큰아들 외드가 상속했다.
위그 카페의 큰할아버지 외드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겨우 10대 초반 정도로, 아버지의 작위를 상속했으나 얼마 안가 샤를 2세는 네우스트리아 후작 작위를 박탈해 외드의 이복형인 벨프 가문의 위그에게 수여한다. 위그는 외드와 로베르 형제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 그를 보호했다. 당시 외드에게 남은 영지라곤 보스(beauce)와 투렌 두 지역 뿐이라, 형제는 한동안 상당히 가난하게 생활해야 했다. 30살 무렵인 882년, 벨프의 위그 등 친척들의 지원으로 파리 백작에 선임되었고, 885/886년 겨울 동안 바이킹이 파리를 포위하자 방어전을 지휘해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카롤루스 왕조가 분할상속과 내분으로 약화된 상태였기에, 외드와 로베르 형제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덕분에 당시 서프랑크 국왕 뚱뚱한 카를 3세에게 보상으로 투르, 블루아, 앙제 등을 수여받는다. 886년 이복형 위그가 사망하자 그가 아버지 대신 상속받은 앙주 백작 직을 포함한 모든 직위를 되돌려받았다. 여기에는 위그가 개인적으로 가졌던 투르의 생마르탱 대성당 수도원장 직위도 포함되어 있어, 상당한 영토와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카를 3세가 귀족들에게 폐위되자, 바이킹을 격퇴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다. 네우스트리아 변경백 직위는 동생 로베르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 지지 세력도 만만찮아 사후 카롤루스 왕조의 샤를 3세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가,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가 다시 왕위를 찬탈한다. 로베르 1세의 아들 대 위그(위그 르 그랑)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왕녀인 작센의 헤드비게와 결혼하여 위그 카페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카페 가문이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시기가 아직 중세적 상속 체계가 자리잡히기 이전의 시절이었고, 군주라는 자리는 전임 군주의 명백한 직계 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역 영주들이 합심해서 다른 가문 사람을 선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로베르 가문은 서프랑크에서 꽤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7]
이후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5세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자 로베르 왕조의 프랑크 공작(dux Francorum)[8] 겸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가 987년 프랑크 왕에 선출된다.
3. 이후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카페 직계 문서 참고하십시오.4. 계보
- 랑베르 2세, 헤스펭가우(에스바유) 백작
- 캉코르
- 하인리히
- 그랍펠트의 포포, 바벤베르크 가문의 시조
- 란드라다
- 성 크로데강
- 헤스펭가우(에스바유)의 지그람
- 앵그람, 헤스펭가우(에스바유) 백작
- 헤스펭가우(에스바유)의 에르망가르트 (에멩가르드), 루도비쿠스 1세의 배우자
- 튀랭베르
[1]
로베르라는 이름의 프랑크어 형태
[2]
람베르 1세가 아닌 이유는 클로타르 3세의 궁재 로베르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 중에 헤스바이의 람베르 1세가 있기 때문이다
[3]
현재의 보름스 시 주변의 백작령이다
[4]
네우스트라시아와 아우스트라시아를 소유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에스바이 백작(comte de Hesbaye)처럼 comte de는 그 지역을 소유한다는 의미이고, comte en은 그 지역에서 활동한다거나 주둔한다는 뜻에 가깝다
[5]
영어로는 로버트 더 스트롱(Robert the Strong)이다
[6]
당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은 남부와 북부 두개로 나뉘어 각각 브르타뉴인과 바이킹을 상대했는데, 로베르는 그중 전자에 임명된 것이다
[7]
다만 남프랑스의 거의 1/3을 가지고 있었던 툴루즈 가문이나 푸아티에를 중심으로 루아르 강 일대를 휘어잡고 있었던 푸아투 가문이 지배 영지와 동원 병력 규모만 놓고 보면 카페 가문보다 더 강한 집안이었다. 본문에서도 후술하듯이 카페 가문의 직할지는 초기에는 오를레앙과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드프랑스 일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곳이 프랑스의 핵심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좀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푸아투 가문은 얼마 안 가서 단절되었고, 툴루즈 가문은 훗날 카타리파 이단 문제와 연루되어 발생한 알비 십자군의 진압 활동으로 인해 영지 지배력이 쇠퇴하면서 몰락했다. 그 밖에 다른 가문, 즉 보르도를 중심으로 남프랑스의 패권을 휘어잡은 아키텐 가문이나
필리프 1세의 숙부가 시조인 카페-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동부의 핵심 요충지인 부르고뉴 일대와 동북부 플랑드르의 상당 부분, 심지어 포르투갈 왕위(14세기 후반까지 존속한
보르고냐 왕조)까지 차지했다. 그러므로 카페 가문은 존엄왕
필리프 2세 등장 이전까지는 직할 영지 규모나 군사력에서 상당한 약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8]
프랑크 공작이라는 작위를 프랑크 왕국 대장군이라고 풀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틀린 것으로, 대장군에 해당하는 관직은 따로 있었으며 이 직위는 '프랑크 왕국 2인자' 정도의 어감을 가진 경칭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