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2:56:21

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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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소하 (酇侯 蕭何) 유후 장량 (留侯 張良) 회음후 한신 (淮陰侯 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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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위 찬후(酇侯) 소하 2위 평양후(平陽侯) 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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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colbgcolor=#fff,#000>문종후(文終侯)
작위 찬후(酇侯)
최종직위 상국(相國)
본관 (蕭)
(何)
생몰연도[1] 기원전 257년 10월 12일 ~ 기원전 193년 7월 8일
고향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망지 장안(長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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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패현의 주리(沛縣 主吏)
전한,(유방→유영), 승상(丞相)→ 상국(相國) }}}}}}}}}

1. 개요2. 생애
2.1. 진나라의 관리2.2. 전시재상 (戰時宰相)
2.2.1. 유방을 추대하다2.2.2. 한나라의 승상2.2.3. 한신을 천거하다2.2.4. 전쟁의 기반
2.3. 제국의 재상
2.3.1. 사냥개와 사냥꾼2.3.2. 성야소하, 패야소하2.3.3. 미앙궁을 건설하다2.3.4.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하다
2.4. 최후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전한(前漢) 한고제(漢高祖) 시대 정치가. (秦) 시대에도 관직을 지냈다. 이후 유방(劉邦)의 행정 최고 참모로 그의 천하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유방에게 막대한 공을 인정받아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받았다.[2]

천하통일 후 식읍 7,000호를 하사받고 차후(酇侯)로 봉해진다. 전설의 관직이라 할 수 있는 상국(相國)에 임명되고 관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 명예인 구석(九錫)을 수여받아 한나라 역사에서도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시호인 문종(文終)과 합칭해 차문종후(酇文終侯)라고도 한다.

전쟁에서 보급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 유방이 십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항우와 싸워 허구헌날 참패하여 매우 힘들 때마다 소하는 흩어진 병력과 물자를 다시 추스르고 후방에서 지속적으로 물자와 지원병력을 보급해서 전쟁을 승리하고 결국 천하통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장량이 병사를 움직여 무엇을 얻을 것인지, 어떻게 얻을 것인지를 계획으로 짜면 그것을 한신이 탁월한 심리전과 용병술로 실행한다. 그러면 그것을 실행할 병사와 전쟁에 사용할 물자는 누가 어떻게 보급해오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텐데, 소하는 유방이 역사의 승리자로 남을 때까지 이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항우 입장에서는 수없이 유방의 대군을 참패시켰는데도 좀비처럼 유방이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병력으로 끊임없이 도전해오니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여서 인구나 식량을 뚝딱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소하가 한 것은 중원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경제력도 가장 막강한 지역이었던 구 진나라 지역에 대한 행정력을 잘 활용한 것으로 후술할 각종 진나라의 지리와 산물에 대해 기록된 서적 및 서류를 확보한 덕에[3] 징집 가능 대상자들의 정확한 숫자, 그리고 매년 걷어들이는 세금 및 곡물에 대해서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했으며, 이 덕에 지속적으로 유방에게 병사와 식량을 보급을 할 수 있었다. 행정 서류를 활용한 지역에 대한 호구 및 토지 파악은 탈세 방지에 매우 중요한 절차로, 땅문서, 호적 문서 관리만 잘 해도 세금을 매길 땅과 사람이 몇 배씩 증가하게 된다. 역사에서 호구조사, 호패법, 지도 작성 같은 주민등록 정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도 이걸 실시하면 세금이 제대로 걷혀서 별다른 경제개발 없이도 정부의 자금력이 뻥튀기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 정책은 정부가 어느정도 커져서 충분한 행정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 당시 유방으로써는 꿈도 못 꿀 일인데 소하 덕분에 이 과정을 날로 먹은 것이다.[4]

현대전에서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보급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하기엔 입아플 정도인데,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소하의 지속적인 후방 보급과 지원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괜히 한신, 장량과 더불어 삼걸로 꼽히는 것이 아니며, 후대 국가의 군주들이 괜히 소하 같은 신하를 두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려 후대에 능력있는 재상을 평하는 글에는 반드시 관중소하가 언급된다.[5]소하의 아버지는 소전이고, 소하의 어머니는 임(壬)씨이다. 소하의 부인들은 감(甘)부인, 동(同)부인, 효혜공주(孝蕙公主)로써, 소하(蕭何)의 딸들은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2. 생애

2.1. 진나라의 관리

소하는 강소성(江蘇省) 서주시(徐州市)에 있는 패현의 풍읍이 고향이었다. 평소에 법 관련 공부를 했었는지, 현내에 소하보다 딱히 법률이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의 현령은 소하를 주리(主吏)로 두고 있었다.[6] 유방과는 이때부터 면식이 있었다. 사마천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별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다만 조상국세가에서는 소하와 조참을 현의 아전들 중에서는 호걸이라고 부를 만했다고 평한다.

이때 유방은 딱히 벼슬도 하지 않는 백수였는데, 이것저것 관청에서 곤란해질 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소하는 유방을 적당히 도와주었다. 나중에 유방이 정장(亭長)이라는 조그마한 벼슬을 하나 하자 그때도 일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소하가 유방의 사정을 이것저것 도와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보통 의례적으로라도 "태조의 신령한 덕을 알아보아서……" 같은 식의 언급이 있을 만도 한데, 사기(史記)나 한서(漢書)나 그 동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없다. 소하가 유방의 진면모를 알아차려 그를 도와주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고조본기(高祖本記)에서는,
유계(유방)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나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라고 발언하는 부분이 있다. 이게 자그마치 정사에 기록된 언급이다. 유방이 땡전 한푼도 없으면서 여공(呂公)에게 하례금을 1만 전 내겠다고 허세부렸을 때에 대한 언급이다.

딱히 유방을 소하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일 하나만으로는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높이 여겼다고 해도 하는짓이 너무 터무니 없으면 빈정거릴 수도 있고, 친밀하다보니 별 부담없이 사실만을 말할 수도 있고 임협(任俠)의 태도로 이웃끼리 돕자고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그 이유에 대해선 알아서 생각해보자.[7]

여하간 이런 이후에도 유방을 소하가 꾸준히 도와준 사실은 분명하다. 유방이 함양(咸陽)으로 요역하러 떠날 당시에도, 다른 사람들이 300전씩을 보태줄 때 유독 소하만 혼자 500전을 보태주었다.

일 잘하는 사실은 이때부터 유명했는지, 진나라의 어사(御史)들이 패현으로 와서 감찰을 하거나 같이 일을 처리할 때도 가장 일을 잘했고, 진나라 어사들도 감탄해서 그를 데려가서 입조시키려고 했지만 소하는 손사레를 치며 가지 않았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도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 망해가는 진나라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물에 잠기고 있는 거대한 배에 안 타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8]

2.2. 전시재상 (戰時宰相)

2.2.1. 유방을 추대하다

소하에게 500전을 받고 유방이 함양으로 떠나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하여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소하가 있던 패현의 현령 역시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먼저 반란에 동참해야 하겠다고 여겨, 마침 함양으로의 이동을 때려 치우고 망탕산(茫荡山)에서 숨어 지내던 유방을 번쾌(樊噲)를 보내어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정작 유방이 돌아올 때가 되자, 마음이 또 바뀐 현령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유방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유방과 친해보이던 소하와 조참(曹參)을 죽여버리려고 했다. 느닷없이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된 소하와 조참은 부리나케 성벽을 넘어 도망쳐서 유방에게 붙어버렸다. 유방이 "현령 그놈을 잡아 죽여야 패현이 무사하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성 내로 화살에 묶어 쏘아 보내자, 성 내에서 이에 호응하여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게 된다.

일단 반란이 일어나고 나자, 이제 사람들을 이끌 주모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유방에게 이 일을 부탁했다. 유방은 거부하고 소하와 조참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 내뺐지만, 소하와 조참의 거듭된 만류와 설득으로 포기하고 현령 자리를 받아들인다.

일설에 따르면 유방은 그저 거부하는 척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내심 좋으면서도 몇 번 사양하다가 수락했다는 것. 한편 사기에 적혀 있기로는, 소하나 조참이 생각했을 때 유방의 지지도가 높아 굳이 대세를 거스를 이유도 없는 데다가, 만약 반란이 실패했을 경우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한사코 유방에게 양보했다는 이야기.[9] 정확한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오랜 도피 생활에 지친 유방에게는 갑자기 현령이 되어달라는 부탁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거부한 것일 수 있다. 소하와 조참 역시 모두를 이끌 우두머리로는 유방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여 추대한 것일 수 있다. 하여간 유방은 그렇게 해서 패현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패현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에서 패공(沛公)으로 불리게 된다.

2.2.2. 한나라의 승상

거병 후 소하는 유방의 옆에서 여러 공무를 도왔다. 한동안 소하는 기록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유방이 항량(項梁)의 세력에 편입되고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와중에 장수가 아니었던 소하가 눈에 띌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소하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유방이 함양 입성에 성공하고 난 후였다. 본래 시골 무리들 정도였던 유방과 그 부하들이 진나라 제국의 수도였던 함양에 입성하고 나서, 대부분은 보물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소하만은 진나라 승상부에 보관되어 있던 여러 문서와, 어사부의 율령도서(史律令圖), 지적도 및 호적부 등의 문헌들을 수집하여 깊숙한 곳에 감추어 보관했다.

이로 인해 유방은 훗날의 전쟁에서 중국 전역의 요새, 각 지역의 호구 수 및 경제력과 생산량,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지역 등의 여러 정보를 파악하여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었다. 반면에 유방의 뒤를 이어 입성한 항우는 화끈하게 궁실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10]

항우가 유방의 뒤를 이어 함양으로 진격해 오자 유방의 처지는 곤란해졌고, 홍문연(鴻門宴)의 일이 있은 후에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가 항복한 장한(章邯)을 비롯한 진나라의 항장 출신 번왕들이 유방을 견제하는 형세가 되자, 유방도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항우를 공격해버릴 생각을 품었다. 주발(周勃), 관영(灌嬰), 번쾌 등도 모두 이에 동의했다.[11]

하지만 소하가 "무작정 돌격하는 것보다 일단 살아서 힘을 기르는 게 낫지 않습니까?"라며 이들을 저지한다.[12] 이에 유방이 "그럼 일단 너부터 죽이고 시작할까?"라며 화를 냈지만, 소하는 "여기서 죽으나 항우랑 싸우다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니 저승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며 태연하게 응수했다. 유방도 성질머리를 죽이고 소하의 말을 듣기로 하고, 곧 그를 승상으로 임명한다.

2.2.3. 한신을 천거하다

이때 미래의 천하 대장군 한신 하후영(夏侯嬰)의 천거로 군량을 담당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에 임명되었으나, 딱히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남다른 소하는 한신과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눈치챘다. [13]

당시 유방군의 상황은 대단히 좋지 못했는데, 촉으로 향하는 유방군이 산시성 남정(南鄭)에 이를 무렵이 되자, 이 벽지를 견디지 못하고 하루에도 여러 장수 수십 명이 탈영하는 막장과도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머나먼 지역에 고향을 두고 있는 병사들도 매일마다 동쪽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노래만 불러댔다.

이런 판국에 한신 역시 중용을 받지 못하자 냅다 달아나버리고, 이 사실을 들은 소하는 미처 사정을 고할 겨를도 없이 한신의 뒤를 쫒아 추격했다. 이때 유방은 이제 소하마저 나를 버리고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두 팔을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하가 돌아오자 기쁘면서도 화가 나서 이유를 물었는데, 소하는 한신을 쫒아가 데려왔다고 말하고,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할 것을 권했다.

유방은 놀랍기도 하고 소하가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지만, 뭐하다 굴러들어온 놈인지 알 수 없는 한신을 천거받고 당황한다. 그래도 소하가 천거하니 믿고 쓸 만한 구석은 있겠다고 여겼지만, 대장군이라는 자리는 모든 장수들과 병사들을 지휘하는 직위이며 아무한테나 휙 던져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하는 그런 유방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며 끝까지 유방을 설득한다. 마지못해 설득당한 유방이 "알겠어! 알겠으니까 대장군 하라고 해! 됐지?" 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소하가 다시 한 번 더 직언을 날린다.
대왕께서는 평소에 너무나도 오만무례하십니다. 이제 대장군을 임명한다고 분부를 내리셨으나, 앞으로 모든 병사를 다스릴 대장군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하십니다. 이런 오만한 태도 때문에 한신 같은 호걸들이 대왕의 곁을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왕께서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시려거든, 반드시 길한 날을 잡아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제단을 세우고 크게 예를 갖추어 식을 거행해야만 모두가 따를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를 갖추고 있지만 어쨌든 자기 주군에게 "니가 평소에 너무 싸가지 없게 구니깐 다들 니가 싫다고 떠나잖아." 하고 까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유방 부하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유방이 황제가 된 후에도 왕릉(王陵) 등이 "폐하는 천성적으로 오만불손하시고 예절을 너무 모르십니다."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다만 왕릉은 특별한 케이스인데 유방이 그저 동네 양아치에 불과했던 시절에 왕릉은 이미 패현 근방에서 자기 세력을 소유했다. 유방도 이때는 왕릉을 큰 형님으로 모셨다. 훗날 유방의 세력으로 편입되면서 왕릉이 스스로를 낮추고 신하의 예를 취하긴 하지만, 유방은 여전히 왕릉을 신임하고 예우했다. 그래서 황제가 된 후에도 유방이 여전히 믿는 신하였고, 왕릉 본인의 깐깐한 성격도 있었기에 매번 직언을 날렸다.

황제가 되기도 전의 유방을 따르던 부하들이면 말하는 게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게 뻔하다. 기록을 보면 서로 대하는 게 한 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아니라 마피아 보스와 조직 간부에 더 가깝다. 유방이 항우를 쓰러트리고 마침내 한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그동안 추종했던 부하들 모두가 '그동안 내가 세운 공이 얼만데 황제께서 내게 가장 큰 상을 내리겠지?' 생각하며 서로 자기 공이 크다고 주장하고 술에 취해 궁궐 기둥에 칼부림을 하는 무엄한 행동을 거진 1년 동안 해왔다.

2.2.4. 전쟁의 기반

한신을 얻은 유방이 이윽고 동쪽으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소하는 산시성 남정에 남아 파(巴)와 촉(蜀)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반포하여 이 지역을 확실한 한나라의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삼진을 평정하는 한나라 군대의 군량과 마초는 모두 여기서 끌어올린 부세 덕택이었다.

기원전 205년, 삼진을 평정한 유방이 마침내 여러 제후들과 함께 초(楚)나라 항우에게 도전할 때, 소하는 같이 움직이지 않고 훗날의 혜제(惠帝)인 태자 유영(劉盈)과 함께 섬서성 임동현 동북쪽인 역양(櫟陽)에 남아 관중(關中) 지방을 지켰다.

소하는 단순히 관중을 지키기만 한 게 아니라, 한나라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궁실을 건축하며,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관중 각 지역에 군과 현을 두어 행정조직을 완비했다. 즉, 혼자서 국가의 기반을 마련해놓은 것. 소하는 이러한 일을 할 때마다 유방에게 보고했으며, 유방에게 보고하기 힘들 때는 알아서 적절하게 처리하고 유방에게 보고하면 유방은 별말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소하가 담당한 지역은 어디 촌동네가 아니라 관중과 한중으로, 이 지역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진나라가 나머지 육국을 압도하여 전국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었던 지역이었다. 혼란한 시기라서 옛날의 그 힘은 온전히 나오지 않더라도, 제대로 다스리기만 하면 최소한 항우의 세력에 비해 경제력에서 밀릴 이유는 없었던 것. 문제는 진나라가 멸망하며 무너진 행정조직을 복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소하가 해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물론 여기에는 앞서 소하가 진나라 왕성을 접수하면서 빼돌렸던 문서나 서적, 서류 등이 큰 역할을 했으며, 항우 스스로 관중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고 유방은 오히려 그들을 위무함으로써 관중 사람들의 항우에 대한 전쟁의지가 남다르게 되었단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후 항우와 유방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소하가 마련해놓은 기반이 빛을 발하게 되었는데, 유방이 항우를 붙들어 놓으면서 숱한 패배로 인력과 물자를 잃었지만 후방에서 쏟아지는 보급이 그런 손해를 충분히 메워주었던 것. 유방이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항우의 공세를 견뎌내고 있는 사이 한신의 군대가 북방을 완전히 쓸어버리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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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양(滎陽)의 위치

이를테면 팽성대전의 사례가 있다. 팽성의 싸움에서 60만 대군이 처참하게 박살나자 유방은 형양(滎陽)에서 한신과 합류하고 패잔병을 수습하며 재기를 시도했는데, 이때 소하가 관중의 노약자들까지 끌어모아서 병력을 만들어 보내주었고, 유방은 이 병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격파해서 대치 상황을 이루어냈다.[14] 훗날 유방이 회상하기를 남은 병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방도가 없어서 관중 땅 전체를 포기하고 물러서려고 할 때 이미 10만이 넘는 병력이 몰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병력을 본 유방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만약 소하의 조치가 없어서 유방이 농성에 실패했다면 유방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은 물론, 구심점이 없어진 다른 장수들도 합류하지 못하고 흩어진 채 각개격파당하면서 이릉대전 때의 촉한 이상으로 피해가 나왔을 수도 있다. 때문에 유방은 다른 공신들의 공은 전체로 따지면 일부지만, 소하는 그렇지 않다고 평가한 것.

게다가 이 과정에서 나올 법한 내부의 분란도 일어나지 않도록 잘 수습했다. 아무리 관중과 파촉의 생산력이 막대하다지만 노약자까지 동원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인력과 물자를 뽑아내다보면 불만이 없을 수가 없으며, 최악의 경우 백성들의 집단 봉기나 초나라와의 내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항우 쪽에서 이미 신안대학살 등으로 관중의 여론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덕분에 내통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내부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은 것은 소하 덕분이었다.

이때 유방은 항우를 막는 데 바빠 자신의 본거지인 관중을 소하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유방은 소하가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시도때도 없이 사람을 보내 소하를 칭찬하고 있었다.[15] 이때 포생(鮑生)[16]이라는 사람이 소하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한왕은 전장에 나가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자를 여러 번 승상께 보내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왕이 승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승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리자면, 승상께서는 자식과 손자 및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아 모두 한왕에게 보내 한왕의 싸움을 도와 온 힘을 다하라고 하십시오. 한왕은 필시 승상에 대해 안심을 하고 다시 신임을 할 것입니다.

이에 소하는 그 말대로 시행했다. 이후 진짜로 유방은 소하에 대해 안심하고 마음을 놓게 된다. 가장 군주에게 의심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뛰어난 처세술로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소하의 도움 등에 힘입어 BC 202년,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2.3. 제국의 재상

2.3.1. 사냥개와 사냥꾼

천하가 평정되고 나자, 이젠 천하통일에 힘쓴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할 차례였다. 문제는 웬만한 공신들 모두가 "내가 제일 공을 많이 세웠다!" 하면서 싸우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도저히 결론이 나지 못한 것. '유경, 숙손통 열전'의 언급을 보면, 이 당시 공신들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군신들이 연회석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

이때, 보다못한 유방은 자신이 직접 소하를 차후(酇侯)에 봉하고, 개국 공신들 중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였다.[17] 이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서 항의했다.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기를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함으로써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같이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이때 유방의 대답은 그야말로 걸작 그 자체. "너희들은 사냥개를 알고 있냐?"고 유방이 묻자 모두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했고, 유방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이다. 그러나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려는 주는 것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들을 잡아왔을 뿐이라 그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소하는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 공로는 마치 사냥꾼의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많아봐야 2-3명이 나를 따랐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네 일족 사람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모든 군신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일단 소하를 필두로 모두 봉작을 받고 나자, 이번에 여러 군신들은 "공신의 서열을 정해달라"면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추천했다. 조참이 수많은 싸움터를 전전하며 몸에 70개가 넘는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그 이유.[18] 하지만 이미 유방은 군신들의 반대를 모두 꺾어버리고 소하에게 최고의 봉작을 주었는데, 이제 와서 조참을 최고 공신으로 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게 뻔해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해주고 싶었다. 이때, 유방의 심기를 알아차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19]가 발언하였다.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에 걸쳐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벌인 폐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그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리자 혈혈 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폐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그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한 일입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는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때였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번에 걸쳐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 한들 한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을 얻음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시옵소서.

즉, 조참 같은 사람은 100명이 없어도 무방하지만 소하의 공은 맨 위로 올려야 한다는 것. 이에 유방은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했고, 소하에게는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를 수 있고, 칼을 찬 상태로 황제를 볼 수 있고, 황제를 배알할 때도 작은 걸음이 아니라 큰 걸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 소하의 편을 든 악천추도 역시 보상을 받았다.

유방은 이런 조치 이외에 따로 2천 호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이는 과거 유방이 함양으로 떠날 때, 소하만 2백 전을 더 주었던 일 때문.

2.3.2. 성야소하, 패야소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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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을 유인해 죽이다[21]

그렇게 무탈하게 지내던 와중, 기원전 196년, 한나라를 떠들썩 하게 했던 진희(秦豨)의 반란이 일어났고, 유방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떠났다. 이때, 관중에 있던 한신은 진희의 반란에 동조하여 내부에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미 초한전쟁이 이어질 시기부터 "나 왕 시켜 주라" 등등 유방의 어그로를 끌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유방에게 사로잡혔다가 풀어지는 등 분위기가 대단히 심상찮았기에 선수를 쳐보려고 했다는 이야기. 이 반란 모의의 신빙성이야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쨌든 이 시점에서 여후(呂后)는 한신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신의 용병술이 워낙 대단하니 함부로 적대 의사를 표방하고 잡으려고 하면 되려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이때 여후가 계책을 물어본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평생 행정만 맡아온 소하에게 참으로 뜬금없는 요구같긴 하지만 한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고 천거한 사람이 소하니, 소하만큼 한신이라는 인물을 잘 파악하는 사람은 없을거라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소하는 이미 진희가 패배했다고 거짓 정보를 꾸몄고, 한신에게 "축하하러 오는 게 신변에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에 한신은 의심없이 궁으로 나왔다가, 여후가 준비해놓은 무사에게 사로잡혀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신은 소하의 추천으로 인해 한나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소하 때문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송(宋)나라 사람 홍매(洪邁)는 자신의 저서인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이제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도 소하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항간에 성공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 떠돌게 되었다(信之爲大將軍, 實蕭何所薦, 今其死也, 又出其謀. 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고 기록하였다.[22]

유방은 소하가 한신을 죽이는 데 한몫 했다는 말을 듣고, 소하를 상국(相國)에 봉하고 5천 호의 식읍을 더하고 호위대를 붙여주었다.[23]

2.3.3. 미앙궁을 건설하다

이미 유방은 진나라 시대의 흥락궁을 보수하여 장락궁이라고 개칭하고 사용하고 있었는데 소하는 여기에 더하여 미앙궁(未央宮)을 건설하였다.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 등등 여러 가지를 만들었는데, 마침 한왕 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유방은 그 장관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지만, 유방도 바보가 아닌지라 저렇게 궁궐을 크게 짓고 하면 백성들의 부담이 장난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흉노의 침입도 부담스러웠던 상황. 이 때문에 유방은 소하를 호되게 질책했지만, 소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궁실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릇 천자가 사해를 자기 집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 궁궐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고, 또한 이후로는 이보다 더 장엄한 궁궐을 축조하지 말도록 영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아직 천하가 안정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와중이므로 누가 비판할 사람도 없으니 잽싸게 궁궐을 지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는 이거보다 더 크게 지으면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유방도 화를 풀고 기뻐했다. 물론 후대의 군주들은 선대 지침 따위는 무시하고 더 크고 호화롭게 지었다. 그래서 사마광 자치통감에서 궁궐을 크게 지어서 권위를 살린다는 이야기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2.3.4. 처세술로 위기를 모면하다

소하가 승상의 자리에 오르자 여러 사람들이 소하를 축하하였다. 헌데 유독 소평(召平)이라는 사람만은[24] 축하를 해주기보다 소하를 걱정해주었다고 한다. 소하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딱히 기분상해 소평을 쫓아냈다는 말은 없다. 소평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거나 아니면 새겨듣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텐데, 소하의 성정을 생각하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새겨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방이 형양-성고에서 항우군을 상대로 무한방어를 시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군량이 기일까지 운송되지 못하자 유방이 서찰을 보내왔는데, 이상하게도 서찰에는 질책이나 독촉은 하나도 없고 안부만 묻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하가 이상하게 여기자 포생(鮑生)이라는 선비가 곁에서 조언을 해주었다.
"대왕께서는 승상께서 변심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의심을 풀고자 한다면 자손들을 대왕이 계신 최전방으로 보내 군무를 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의심이 풀릴 것입니다."

이에 소하는 군량을 조달하면서 자식들을 유방 곁으로 보냈고, 유방은 의심을 풀었다. 이후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 유방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게 된다. 유방은 떠나기 전에 소하에게 별 이유없이 후한 상을 내리고 자유로이 부릴 수 있는 호위대를 하사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소하에게 소평이 귀띔을 해주었다.
"화가 승상의 몸에 미친 듯 합니다. 지금 황제께서는 반란군을 소탕하느라 친히 외지로 출정하셨는데, 승상은 큰 고생을 하지 않고도 상이 늘어났으니 이게 과연 좋은 일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한신이 반란한 일 때문에 황제께서 크게 놀란 상태인데, 지금 여기서 '호위대'를 하사하신 것이 과연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소하는 곧바로 식읍의 추가와 호위대를 사양하고, 모든 가산을 황제의 군비로 사용하게 했다. 이에 유방은 의심을 풀었다. 이후 기원전 195년, 이번에 유방은 구강왕 영포(英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소하에게 사람을 계속 보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았는데, 이 모습을 본 소하의 주변 사람이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승상께서 멸족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황제가 그대를 여러 번 떠보는 것은, 그 명성이 너무 엄청나서 그런 것입니다. 일부러 명성을 떨어뜨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에 소하는 일부러 백성들의 집을 싸게 사들여 명성을 더럽혔다. 이에 유방은 어느 정도 안심을 했는데, 실제로 귀환하는 길에 보니 백성들이 "승상이 강제로 백성들의 집을 사들입니다. 벌써 수천 명이 집을 빼앗겼습니다"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이를 믿게 되었다.

유방은 백성들이 무더기로 보낸 탄원서를 보고 허허 웃더니 "승상이 백성들의 민심을 어루만짐이 이런 것이었단 말이오?"라고 하면서, 소하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며 직접 백성들에게 사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눈치를 줬는데, 이때 소하는 질책당하는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에 평소 구상하던 정책을 이야기할 기회라고 여겼다. 그래서 진나라가 만든 황제 전용 사냥터(상림원)를 개방하여 백성들의 농지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주청을 올렸다. 그러자 유방 입장에서는 소하가 자신이 한 짓은 발뺌하면서 오히려 황제의 재산을 이용해 자기 명성을 올리려 한다고 오해하였고, "네놈이 어지간히 뇌물을 받아먹었구나, 감히 내 상림원을 상인 놈들에게 팔아먹을 속셈이냐?"라며 괘씸하다면서 소하를 옥에 가둬버린다.

며칠 후, 왕씨(王氏) 성을 가진 위위[25]가 나서서 소하에게 내린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간언한다.[26] 유방은 진시황 이사의 경우를 거론한다. 허물은 신하가 취하고, 업적은 군주에게 양보하는 것이 신하의 미덕이라 들었는데, 소하는 뇌물을 받으면서 황제의 재산을 이용해 업적을 취하려 하였으므로 가두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왕위위는 즉각 반박했다.
폐하가 항우, 영포, 진희와 싸울 때도 관중을 굳게 지킨 것이 승상이었습니다. 그때 승상이 한 발짝만 움직였어도 폐하를 무너뜨리고 천하대업을 이루었을텐데, 이제 와서 뇌물과 업적을 탐내며 일을 꾸민단 말입니까?[27] 그리고 진시황과 이사의 경우를 말씀하셨으나, 그렇게 군주에게만 공이 돌아가는 탓에 진시황이 허물을 마다하고 싫은 말에 귀를 닫아 결국 진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진시황과 이사를 본받겠다는 천박한 말을 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유방은 뉘우치는 바가 생기고 마음이 편치 않아 소하를 곧바로 석방했다. 감옥에서 나온 소하는 맨발로 유방을 찾아와 사죄하였고, 그 모습을 본 유방은 "나는 네가 평소에 말한 것처럼 진짜로 걸주(桀紂) 같은 폭군이었다."라고 하면서 소하에게 진심으로 뉘우치며 사죄하였다. 해석에 따라서는 '너는 끝까지 착하기만한 신하고 괴롭힌 나만 폭군이 됐네?' 하며 뒤끝을 부리는 모습이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부터는 더이상 의심하지 않았고 소하의 진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실 이때 유방은 영포와의 싸움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후였다. 소하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적인 태도는 자신이 죽고 난 후에 명성이 어마어마한 소하가 헛된 짓을 꾸밀 경우에 대한 불안감이 이유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왕위위가 유방에게 말했듯이, 소하가 정말 반역을 할 생각이었다면 그전에 더 좋은 기회가 많았기에 이를 이유로 유방이 잘못된 감정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참고로 이는 한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신은 워낙 의심 살짓을 많이 한데다 처세술에는 영 빵점이었기 때문인지 이런 식으로 그를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

유방은 곧 숨을 거두었고, 이후 혜제가 즉위하게 되었다.

2.4. 최후

한혜제 2년(기원전 193년), 소하가 병에 걸려 죽을 날이 다가오자 혜제가 소하를 찾아와서 차기 재상을 물었다. 황제께서 더 잘 알 것이라던 소하는 혜제가 "조참이 어떤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좋은 재상을 얻었으니, 소하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소하는 전답과 가옥을 살 때는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했는데,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소하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은 이러하였다.
나의 후대가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한 면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소하는 본래 조참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해서 그와 몹시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소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참은 "내가 상국이 되겠지." 하고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짐을 꾸렸는데, 진짜로 황제의 사자가 곧 조참을 부르러 왔다. 상국으로 임명되고 난 조참은 일이라고는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는데 그 이유가 폐하도 선제보다 못하고, 내 능력도 소하에 미치지 못하는데, 소하가 한 그대로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나?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의문을 가지던 혜제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납득했다.[28] 여기서 유래된 것이 바로 소규조수(蕭規曹隨)의 고사이다.

3. 평가

관중, 제갈량 등과 함께 중국사 명재상의 대명사. 《사기》<소상국세가>에서는 소하가 죽고난 후에도 황실이 소하의 후손을 찾아 작위를 잇게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위에 나온 일화들을 정리해보자. 그의 마스터플랜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유방을 조직의 수장으로 추대하고, 한신의 출중함을 알아보고 그를 대장군으로 추천하는 등 주요 인사관리는 모두 소하의 공적이다. 함양을 점령했을 때 승리에 도취된 유방의 무리들과 달리 오직 소하만이 지리와 인적 사항 등 정보를 수집했다. 파촉으로 몰려, 진의 장수들과 항우의 군대가 유방의 세력을 끝장낼 수 있는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결사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부르짖을 때도 역시 오직 소하만이 흥분한 조직을 평정하여 위기를 극복해냈다. 관중에 대기근이 들어 아무런 일이 없어도 나라가 휘청거릴 상황에서 항우라는 막강한 적까지 엄습하고 있음에도 소하는 언제나 병력을 채우고 병장기와 식량, 마초를 보급해냄과 동시에 한나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냈으며, 이렇게 매번 깨지면서도 재기하고 싸우는 유방의 군세에 결국 항우는 무너진다. 항우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신이었지만, 결국 항우를 이긴 것은 소하인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통일 이후 법령을 세우고 행정을 완비하는 등 국가 실무 기반 또한 소하의 공적이다. 공신이 국가에 미치던 해악이 모든 역사에서 입증되었듯이, 한신의 죽음에 소하가 관여되었다는 것 또한 소하의 선견지명이라 볼 수 있다.[29]

다만, 그런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초한지 같은 소설에서 소하의 활약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실제 사기나 한서 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도 소하는 한신같이 군대를 이끌고 추풍낙엽으로 적을 무찌르거나, 장량처럼 계책을 내 전략을 수립하지도 않아 기록도 이들보다 분량이 적다. 심지어 사기에서 조참보다도 기록의 분량이 적었다가 한서에서 파촉으로 쫓겨난 유방이 항우와 일전을 치르려는 걸 말리는 대목을 추가해 조참의 기록과 겨우 분량이 비슷해졌을 정도다. 그러나 소하는 그런 영웅들의 화려한 전설 뒷편에서, 그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묵묵히 마련해 주었다. 삼진을 평정한 한신의 공에는 파와 촉에서 물자를 끌어올린 소하의 공훈이 있었다. 유방은 팽성의 싸움에서 유례없는 대패를 당했으나 소하의 보급에 힘입어 이를 극복했다. 유방과 항우 최후의 광무(廣武) 대치 당시에 이르러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항우 측이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자고 반쯤 애원하는 것을 유방이 코웃음치며 비웃을 정도였다. 항우는 그 이전까지 유방을 수차례 격파했지만, 소하의 보급이 이어지면서 결코 유방에게 결정타를 먹이지 못했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소하는 관중을 지키며 그 기반을 든든하게 했다. 또한 한신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했고,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경거망동도 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다른 공신들이 주살되는 와중에서 몇 번을 의심받으면서도 천수를 누렸다. 오히려 의심을 받을 때마다 지인들의 진심어린 조언을 받아들여 의심을 푸는 사례를 통해, 그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현명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선구안과 인망까지 보여주었다. 서한삼걸 중 소하는 가장 튀지 않는 일생을 살았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일생은 영광된 일생이었다.

사마천은 소하에 대해 이렇게 평론을 남겼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으며, 그 명성은 후세에까지 전해져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30]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될 만하다고 하겠다.

4. 여담

  • 혜제 2년 소하가 세상을 떠나자 적자 소록이 차후의 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나중에 후손이 끊어지자 서자의 후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차후를 세습한 후손이 죄를 지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5번이나 후사가 끊겼지만 한나라 조정은 그때마다 소하의 후손을 찾아서 후로 봉하여 작위를 잇게 했다. 이러던 중 봉국이 패군의 차(酇) 땅에서 남양군의 찬(酇) 땅으로 바뀌어, 작위명도 차후에서 찬후로 바뀌었다. 서한 내내 이어진 찬후의 작위는 왕망이 집권하면서 소향후(蕭鄕侯)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폐지되었는데, 동한이 들어선 후 장제가 소하의 후손인 소웅을 찾아 다시금 찬후에 봉하니 이는 유방의 공신들 중에서도 그 사례를 찾기 어려운 두터운 은전이었다. 당장 서한 시대에 왕으로 봉해진 유씨 종실들과 그 자손도, 광무제와 가까운 친척이거나[31], 동한 수립에 공이 없으면[32], 예외없이 신나라 성립으로 더 이상 종친이 아니게 되어 몰수된 직위와 영토를 안 돌려주고 서인 취급했는데, 유씨가 아닌 소씨를 일부러 찾아냈다는 것부터가 대단한 특혜다.
  • 소하의 24대손이라고 자처한 태조 고황제 소도성 위진남북조시대의 남조인 남제를 건국했다. 또 고제 소도성의 족제 소순지의 아들로 친척 조카이자 소량를 건국한 고조 무황제 소연은 소하의 25대손을 칭했다. 즉, 소도성과 소연은 항렬상으로 삼촌과 조카 관계였기 때문이다. 헌데 정작 이렇게 소하의 후손을 자처한 고제 소도성은 한고조 유방과 같은 유씨 일족[33]의 국가였던 유송을 멸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유송 황실을 도륙했다(...)
  • 워낙 유능하고 좋은 신하로 유명하다보니 훗날 거란( 요나라)제국의 시조였던 야율아보기는 한고조 유방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황실의 성인 야율씨를 중국식 성인 '유씨'로 개성하면서 다른 부족의 성을 죄다 '소씨'로 바꿨다. 이 뜬금없는 개소리와 희한한 짓거리에 황실과 신하들은 당연히 크게 반발했고, 이에 야율아보기는 황제의 성을 야율씨로 환원했지만 소씨는 끝까지 남겼는데 그 이유가 "난 유방은 아니지만 소하를 거느리고 싶다!"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거란 8부족 중 황실 친족인 3부족은 야율씨를 썼고, 나머지 5부족은 죄다 소씨가 되어 버렸다. 거란의 인물들( 고려에도 쳐들어온 소배압, 소손녕 등)이 야율씨 아니면 소씨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하는 죽은 후 1,000년이나 지나서 졸지에 수많은 거란족 후손을 입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저 일화에 불과하며,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야율아보기 항목 참조.
  • 중국에서는 소하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소하여래불이라는 불상을 만들었다.

5. 대중매체에서

모토미야 히로시 적룡왕에서도 전체적인 이미지는 비슷하다. 등장인물 소개에서는 유방의 소꿉친구라고 나온다. 번역 문제로 "게릴라"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장면은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함양의 많은 재물과 미녀들을 보고 광분하자 "용서하십시오"라더니 유방에게 직접 수정펀치를 날린다! 그 후 바로 유방의 욕심에 대해 간언하고 함양에서의 약탈 등의 불상사를 막는다. 그리고 갑옷을 입고 있는 장면도 제법 나오며 한신의 삼진 제압전에서는 직접 칼을 들고 적을 베는 장면이 있다. 이 작품의 소하가 아마 미디어 속의 소하 중 제일 터프하게 묘사된 소하일 듯. 어쨌든 중반까지는 제법 얼굴을 비추지만 수수에서 박살났다가 물자를 보충해 줄 때 즈음해서 공기화되고 만다. 후방보급담당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 장량과 틀어지게 된 계기가 한신의 토사구팽으로 나온다. 끝까지 한신을 살려두고 공적을 기리려 했던 소하와 달리 장량은 살기 위해 결국 여치에게 붙어서 토사구팽 작업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소하도 결국엔 여후에게 굴복하여 한신을 제거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한신이 교살당한 후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한신의 수급을 칼로 직접 베어서(!) 병상에 누워있는 한고조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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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유기의 소하

코에이의 역사 게임에서는 묘하게 다른 한삼걸에 비해 푸대접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초한지 기반 게임인 항유기에서는 이 게임 자체가 내정이 간략화된 편이라서인지 크게 눈에 띄는 장수는 아니다.[34] 특히 다른 한삼걸인 장량과 한신의 굇수 같은 능력치에 비하면 소하는 90을 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못미. 다만 통솔이 78이라서 저 정도면 내정에서 굴릴 정도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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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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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역시 한삼걸 둘이 각각의 분야에서 100을 찍는 것과 달리 소하만 정치가 100이 아니다. 삼국지 시리즈에서 정치가 실질적으로 물자 조달, 보급, 행정처리 등을 아우르는 능력치임을 감안했을 때(그래서 한호 같이 전장에서 물자 조달을 잘한 장수는 장군이어도 정치가 높은 것이다) 소하가 100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다. 하필이면 같은 시대에 존재하는 인물이 각각 통솔 100의 한신, 무력 100의 항적, 지력 100의 장량, 매력 100의 유방이 있는데 정치 100만 없어서 더 눈에 띈다. 저들이 각각 사기적인 특기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소하는 특기 마저 잡장만도 못한 걸 받을 때도 많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11의 둔전.

어쨋든 100은 아니어도 우월한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내정 분야를 맡기면 알아서 다 하는 뛰어난 인재다. 지력 수치도 80대 중반이라서 장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계략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90이 넘는 건 아니니까 아예 계략 쪽으로 투자하는 것은 아쉽다. 전투 능력도 낮아 전장에서 활용하기란 힘들다. 내정에 특화된 장수이니 내정 쪽으로 잘 활용하자.

삼국지 9PS2판에서 신무장 이름을 숙아로 쳐야 나온다. 능력치는 58/21/86/98 지식모략이 1개이며 책략이 2개만 가지고 있다. 어째선지 후속작인 삼국지 10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9편에 등장하지 못한 팽월, 포숙이 추가되었다. 서한삼걸 중에서 소하는 10편에서 나오지 못했다.

삼국지 11에서 다시 등장했다. 능력치는 21/17/86/98/89의 순욱의 하위호환이다. 특기는 화려한 명성에 비해 수수한 느낌을 주는 둔전.[35]

삼국지 12에서는 31/27/86/98 병종은 창병. 전법이 전군색적이지만,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비책이 사용이 가능하다.

삼국지 13에서도 여지없이 등장. 보급계의 원조답게 셔틀 1위의 그 인물이다. 능력치는 31/27/86/99 고대 무장들 중에서는 두 번째로 정치력 2위다. 특기도 9짜리가 무려 3개이고 쩔어주는 능력자이기는 하나 아쉽게도 중반 이후부터는 후방에 배치되어 농지와 시장 셔틀로 전락하고 만다. 전법은 군략지원에 중신특성도 원정보좌. 군략지원이라는 전법 자체는 나쁘지는 않고 의미상으로는 소하에게 걸맞지만, 소하의 능력치로는 전장에서 굴려먹기는 영 좋지 않아서 효용성이 나쁘다. 더욱이 같은 한삼걸인 장량이 통솔 70대에 전법까지도 군략지원의 상위호환인 왕좌를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빛이 바래는 감도 있다. 정 전장에서 굴리겠다면 무력과 통솔이 높은 무장과 인연을 맺은 후 이들을 소하의 부장으로 편성해서 출전시키자. 특기는 농업9 / 상업9 / 설파9 / 문화5 / 교섭7 / 언변7 억지로 전장에서 굴리는 것보다는 특기도 특기거니와 중신특성도 내정관련이니 군주내정중신을 맡겨서 사용하는 쪽이 훨씬 낫다. 다만 저 화려한 내정특기조차 장량 또한 전부 가지고 있기에 서글프다. 특이하게 위명이 집정인데, 레벨 4의 내정 관리계 취종 위명에는 재상, 집정, 권위 셋이 있고 이 중 재상은 선량한 명재상, 권위는 악한 세도가, 집정은 그 사이쯤의 컨셉 플레이가 가능한 위명이다. 말년에 한신을 죽인 것 때문에 재상이 아닌 집정으로 책정된 모양이다.

삼국지 14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했다. 소하의 능력치는 21/17/86/99/89 이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는 천하그룹의 이사로 나온다. 진시황한테 40년 동안 짬쳐먹고 이거밖에 못하냐며 까이고 딱히 능력도 보여주는 면이 없어서 그냥 눈물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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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도 풍수사 계열의 고대 무장으로 출전했다. 고유 효과로 사신 소환에 주위 강행+주위 집중을 가지고 있어 문관 계열 아군 장수들을 서포트하기 쉽지만 문제는 코스트가 19코스트로, 모든 풍수사중에서 코스트를 가장 많이 먹는다는 게 난점. 일치단결 강보 같은 저코스트 고효율 무관 유닛을 앞세우고 책략 딜러를 많이 기용한다면 훌륭한 서포터로 기용할 수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양수(삼국지)로 환생하는데, 양수가 평소에도 조조에게 밉보였다가 계륵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처형당한 인물이란 걸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이 작품의 조조는 바로 한신의 환생이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의 성우는 허성재. 서한삼걸 장량 다음으로 출연한다.[36] 오리지널 설정으로 "SD 소하"라는 3등신화 이벤트가 있는데,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모양이다. 유방의 거병 초창기부터 함께 하며 내정을 책임지고 추대를 도운 업적이 소개된다. 해하 전투 이후 여태후와 모의해 한신을 체포하는데 일조한 뒤, 부동산 갈취를 해 의심을 피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

5.1. 초한전기

배우는 양립신. 더빙판 성우는 오세홍 / 카츠라 카즈마사.

초반부터 유방과 친분이 있던 관리답게 서한삼걸 중 제일 첫 번째인 1화에 등장한다. 유방이 사고를 치면 뒷처리를 해주고 있었으며, 유방이 여치와 혼례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등 여러모로 유방에게 도움을 준다. 진나라의 무리한 부역을 어쩔 수 없이 행하게 하자 유방에게 미안해하고 유방도 자신이 죽거든 자기 가족의 뒷일을 부탁할 정도로 신분을 넘어서 친분이 깊게 나온다. 1화에서 유방의 아내 조씨를 희롱하고 도망치다가 유방과 그 동생들에게 붙잡혀서 두들겨 맞은 사람이 사실 조정에서 파견한 사마령이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깨달은 유방에게 소환되어(?) 사마령임을 확인하고는, 풀어주고 술을 먹여 달래서 보내 놓고 조참을 시켜 사마령을 죽였다.[37][38] 이때부터 소하는 유방의 뒤를 봐주면서 도와주던 것이었다.

유방 일행이 망탕산에 가서 어려움을 겪자 패현의 현령을 설득해 유방 일행을 다시 받아들이라고 조언하지만 실패하고 이를 좋지 않게 여긴 현령이 죽이려 하자 도망을 가 도망자 신세가 되고만다. 그리고 망탕산에 가서 유방과 같이 반란을 일으켜 패현을 점령, 자신을 그곳의 우두머리로 추대하려는 마을 원로들을 설득시켜 유방을 패공으로 추대하게 된다.[39] 이때부터 유방에게 존칭을 쓰며 장량 한신이 없는 초반 유방군의 책사 역할을 하게 된다.

유방이 항우군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보급을 맡기 시작한 걸로 보이며 장량이 들어오고 나서도 유방 곁에서 조언을 하고 있으며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점령하자 다른 장수들이나 주군인 유방이 정신 못차리고 놀고 있을 때 진이 가지고 있던 모든 행정 문서를 챙기는 비범함을 보여줬다. 홍문연 직전 항백에게 "항우가 우리 주군을 다짜고짜 죽이려 든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의형제에게도 이따위 식으로 구는데 천하를 어떻게 다스리려고 하느냐!"며 강하게 따지고 퇴장한다. 항우가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면서 벽지인 파촉으로 내칠려고 할 때도 번쾌를 비롯한 부하 장수들은 죄다 반대를 했지만, 소하가 "내가 진나라의 행정 문서를 살펴보니 파촉은 전란에서 벗어나 있고 산세가 험해 방어하기 좋은 요새이니 우리에게 제격이다"란 발언으로 모두의 불만을 잠재웠다. 역시 소하.

전반적으로 소속과 입장을 초월해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장량[40]에 비해, 이쪽은 완전한 유방군의 2인자라는 느낌. 유방과 그 휘하 장수들간의 의견 조율에 힘쓰고, 충직하게 유방을 모시면서 역사 그대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성과를 내기에 유방도 그 휘하 장수들도 모두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유방이 소하를 대할 때와 다른 장수들을 대할 때의 태도나 말투차이만 봐도, 유방군 안에서 그가 가진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 일단 내부에 불만이나 문제가 생기면 다들 소하부터 찾는다.

다만 '상황이 안 좋게 변함 → 유방 고민 → 휘하 장수들이 우우거리며 반발 → 소하가 장수들에게 '이러지 말라능, 좀 기다려 보라능'이라며 중재 → 장수들이 "뭐 소하횽이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라며 진정하는 패턴'이 극중에서 자주 연출되기 때문에, 가운데 끼어서 전전긍긍하는 중간 관리직의 모습 같다고 하는 목소리도 있다. 허나 이 또한 그만큼 소하의 높은 덕망과 위치를 보여주는 연출이다.

한동안 출연이 뜸하다 66화에서 함양 전투 이전 보급로가 끊어졌을 때, 군량 걱정을 하던 유방은 "군량은 소대인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모두가 수긍하며 등장하지 않아도 존재감을 나타내며 결국 같은 회 간만에 모습을 나타내는데, 이때 유방은 진평의 이간계를 위한 자금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국고에서 금자 4만 냥을 빼냈었다. 소하는 "대왕께서 4만 냥을 빼가셨는데…" 하며 유방을 추궁하자 왕인 유방마저도 쩔쩔매는 모습으로 위엄을 보인다. 그거 모으느라 힘들었지만 어차피 그 돈은 대왕의 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왕인 유방을 갈구는 모습은 역시 소하라며 탄복을 할 수밖에 없는 장면. 유방도 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신하인 소하에게 늘 '소대인'이라며 높여 부른다. 같은 서한삼걸인 장량은 '자방' 또는 '자방 선생'이라 부르며, 한신은 직책인 대장군이나 '한신'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확실히 대우를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 회에서는 한신을 죽이려는 여후를 도와 유인하고, 이 일로 제거 당할까봐 조참에게 자신은 곧 체포될 테니 그때 횡령죄로 탄핵해달라고 한다. 결국 유방이 고향에서 조씨에게 "소하가 탐관이 됐다." "그래도 탐관이 낫다. 야심은 없으니까."라 하여 옥에 갇혀도 죽을 위기는 모면했지만, 여기까지만 나오기 때문에 이 드라마만 본 사람은 소하가 그렇게 물러난 것으로만 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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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신규 책봉 1위 차후(酇侯) 소하 2위 평양후(平陽侯) 조참

[1] 음력 [2] 한고제 유방은 장량에게 당시 가장 비옥한 지역인 제나라 땅 30,000호를 스스로 자유롭게 고르게 해 식읍으로 하사하려고 했었지만, 장량은 식읍이 너무 많다고 거절하고 10배가 적은 유방을 처음 만난 유(留)지역 3,000호를 요청했다. 이에 유방은 장량이 욕심 없다고 대만족하며 요청한 식읍과 함께 유후(留侯)로 봉한다.(참고로 소하가 1등 개국공신으로서 하사받은 식읍 규모는 7,000호였다.) [3] 이 물건들은 만약 소하가 빼돌리지 않았다면 항우에 의해 전부 태워질 운명이었다. [4] 현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황제에 비유하면, 한신은 국방부 장관, 장량은 비서실장, 소하는 국무총리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의 군 관련 인사를 통틀어도 소하만큼 넓은 영역에서 공적을 세운 인물로는 조지 C. 마셜 원수 정도밖에 없으며, 그런 마셜 원수조차도 징세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된 적도 없었다. 스타크래프트로 비유하자면 일꾼의 자원 채취와 생산 건물에서 하는 생산, 업그레이드와 테크 트리 결정을 모두 도맡아서 한 것이다. [5] 대표적인 것이 제갈량을 평가한 진수의 각주로 "제갈량의 국정운영능력은 관중소하에 비견되나 한신, 왕자 성보가 있던 소하 관중과 달리 뛰어난 장수가 없어서 군사적인 재능은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했다. [6] 진나라 때 생긴 지방의 관리로 군수나 현령에 속하여 인사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관장했다. [7] 사실 당시 상황만 놓고 보면 현령이 명망높은 손님(여공)을 모셔다 크게 잔치를 벌이는데 갑자기 동네 건달인 친구놈이 찾아온 데다가 가진 것도 없는 놈이 일만 전이라는 허풍을 내놓는다면 소하같은 반응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유방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어도 저 상황은 당장 제3자에게 큰 결례가 되는 일이였고 그로 인해 유방이나 소하 본인이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기에 말이다. [8] 사실 이런 면만 봐도 어쩌다 지방에 하찮은 공무원이 뜬금없이 명재상이 되었다기 보다는 이유가 있어서 웅크리고 있는 원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난다. 우연이라면 하필 그렇게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고향 마을에 자기가 모시게 될 건달 유방이 있었다는 것. [9] 사실 소하와 조참은 현령과 마찬가지로 진나라 관리였으므로 그들 본인보다는 유방을 내세우는게 훨씬 더 인심을 모으는 것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 원래 인망만큼은 동네 건달들을 죄다 모을 수 있었던 유방 쪽이 소하보다도 더 낫기도 했고. [10] 유방은 불사르거나 하지는 않고 함양의 휘황찬란한 모습에 넋이 나가서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취하려고 했으나 번쾌와 장량이 '우리가 그런 짓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잖습니까.'라고 일갈해서 뒤늦게 정신을 차려 민심 수습에 집중했다. [11] 주발, 번쾌, 관영, 유방 등은 모두 촉 지방과는 천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는 서주 강소성 사람이다. 당연히 열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12] 한서 소하전. [13]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점인데, 이 당시 한신은 단순히 능력은 있는데 운이 없어서 주목을 못받는게 아니라, 자기 어필이 끔찍할 정도로 안되는, 남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어서 타인의 무시욕구를 유발하는 정도였던 사람이다. 그런 한신까지도 색안경을 쓰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통 비범한 게 아님을 재확인 할 수 있는 부분. [14] 항우본기의 팽성 전투 기록에 소하의 언급이 나온다. 즉 적국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마주칠 리도 없는 후방 보급관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것이니 도대체 어떻게 한나라 쪽은 병사들과 보급이 마르지 않냐는 의문이 초나라 군대에 팽배했다는 얘기이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와 전쟁의 승패와도 직결되는 요소인데,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진지를 점령한 롬멜 장군이 불과 5일 전에 미국에서 발송된 편지가 아프리카의 최전선 진지에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 패배를 직감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15] 유방과 항우의 성향과 태도가 180도 다르다는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측근이 의심가는 상황에서 유방은 이렇게 칭찬을 하거나 상을 내려줘서 의심을 드러내지 않고 떠보고는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처리한 반면, 항우는 너무 솔직하게도 갖고있던 의심을 계속 증폭시키며 대놓고 견제를 해버려서 결국 해당 인물을 죽이거나 떠나가게 만들었다. [16] 포씨 성을 가진 벼슬하지 않은 선비 정도로 보면 된다. [17] 한고제는 장량에게 제나라 지역 3만 호 식읍 수여를 공식적으로 제안 하였지만 장량이 너무 많고 자신은 욕심이 없다며 거절하였고, 소하 다음 2등으로 식읍을 많이 받은 인물은 위나라 평양 지역 1만호를 하사(소하처럼 한 번에 많이 하사 받은건 아니고 계속 수여 받은 것을 다 합친 숫자이다.) 받은 군부 내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던 조참이다. [18] 사마천은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에서 조참의 공은 한신에 버금간다고 기술했다. [19] 훗날 공신서열 61위로 안평경후로 봉해졌다. 참고로 바로 뒷순위인 62위가 그 장량이다. [20] 성역소하패역소하(成亦蕭何敗亦蕭何)라기도 한다. [21] 원곡선(元曲選)에 실린 그림 [22] 하지만 소하의 배신이라고 하기도 뭐한게 이제껏 한신은 계속해서 사망 플래그를 쌓아왔던 데다가 하필이면 여후는 위험분자는 못봐주는 성격이었다. 사실 소하는 어쩌다 끼인 것일 뿐 실제 한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사실상 여후다. 거기다 여후는 고제가 없을 때 전격적으로 한신을 처단한 것이고. [23] 유후세가의 기록을 보면, 유방이 소하를 상국에 임명하도록 권한 사람은 장량이었다. [24] 진나라 시절엔 동릉후까지 맡아봤던 꽤 거물이었는데, 이때는 관직을 다 잃고 참외 장사를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 참외를 동릉과라고 놀렸다. 이 참외는 큼직하고 맛도 굉장히 훌륭했다고 한다. [25] 衛尉. 궁궐의 경비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고관대작 중의 하나이며 녹봉은 2천 석 정도 된다. [26] 앞의 포생과 소평이 조언해준 것도 그렇고, 소하가 유방의 의심을 사는 상황에서도 챙겨주는 이가 이렇게나 많은 것을 보면 소하가 상당히 인망이 두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27] 이 논법은 후일 고제의 아들인 문제가 주발을 의심할 때 생모인 고황후 박씨가 "주발이 여씨를 타도할 때 북군을 지휘했음에도 딴 마음을 품지 않았는데 이제 와 모반을 일으킨단 말이냐?" 식으로 질타하였고 결국 주발은 풀려났다. [28] 유방 등은 계속 싸우러 나갔지만, 혜제는 전쟁 중에도 관중에서 소하와 같이 있었다. 소하가 어떤 사람인지는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29] 말하자면 장량이 나라 자체를 건국할 큰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한다면, 소하는 유방의 세력과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지금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청사진을 그려주는 사람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30] 주문왕의 신하로 문왕을 보좌했던 사람들이다. 이 둘과 태전(泰顚), 남궁괄(南宮括)을 더해 '문왕사우(文王四友)'라고 불렸다. 이 중 남궁괄은 봉신연의에도 등장하는 그 사람 맞다. [31] 즉 같은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들 [32] 유발의 후손조차 아니라서 광무제와 촌수가 제법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복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광무제로부터 새로 왕으로 봉해진 유씨 종친들이 몇 있었다. [33] 전한 고조 유방의 직계 자손은 아니고, 유방의 동생이었던 초원왕 유교(전한)의 21대손이 바로 유송을 건국한 고조 무황제 유유였다. [34] 능력치 체계 때문에 눈에 안 띄는 거라곤 해도 그 능력치 체계를 잡은 게 코에이이므로 결국 신경을 안 써줬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전투력 같은 것도 능력치 체계가 아니라 ABC급으로 나뉘는 능력치여서 항우가 영포나 번쾌랑 똑같은 A급을 받았다면 항우가 눈에 안 띄었을 것이다. [35] 실제 보급왕으로 유명한 소하에겐 둔전제 자체는 충분히 어울리긴 하지만, 삼국지 11의 특성상 특기가 일부 주둔지나 부대 등에 제한적으로만 적용되기 때문에 실제 소하의 활약상에 비하면 매우매우 미비하다고 할 수 있다. [36] 출연순서는 박랑사 사건의 장량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소하 본인, 마지막이 한신이다. [37] 진시황이 패현을 행차할 때 유방이 집에 숨어서 병사들을 보며 사마령이 생각난다며 그 인간이 다시 돌아올까라고 하자, 소하가 그 일은 걱정하지 말게.라고 했다. [38]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이 사마령이란 사람이 황제가 행차하기 전에 행차할 마을의 동태를 비밀리에 감시하고 보고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런데 (사마령이 어떤 죄를 지었건 간에) 유방 일행이 그 사마령을 잡아놓고 팼으니, (자신이 저지른 죄는 감추고) 황제에게 돌아가서 보고하기만 하면 유방 일행은 물론이고, 패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다. 소하가 사마령임을 알아보고 유방 일행에게 이 사람을 잘못 건드렸으니 돌아가서 입만 뻥끗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을 것이라 했고, 사마령도 잔치가 끝나고 "너희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줄 테다!"라고 외치고는 돌아갔다. [39] 마을 원로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사실 유방을 진정으로 우두머리감이라 생각해서 추대한 건 아니고 실패할 경우 자신이 죽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신과 관련된 사람까지 모조리 죽게 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 유방을 추대한 것 같았으나 막상 유방이 패공이 되고 나자 임기응변과 지도자로서의 판단력이 뛰어난 걸 보고 진정으로 그를 따르게 된 듯하다. [40] 일단 장량은 한왕의 소속으로 완전히 유방 소속은 아니다. 장량이 본격적으로 유방의 휘하에 들어온 건 진 멸망 이후 한왕이 항우 밑에서 사실상 억류되다시피 있다가 자결한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