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01년 7월 25일에 태어났다. 일명 장효익이란 이름으로 독립군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 한번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함경남도 삼수군에 있는 석전양복점에서 일하면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반일단체인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7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방 이전까지 투옥되었다. 북한에선 그가 김형직의 가르침을 받아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흔한 김비어천가의 일환일 뿐이다. 그외에 김일성이 김정숙을 보내서 삼수공산주의자공작위원회를 1937년 6월에 조국광복회 신갈파지회로 개편하게 했다고 하는데 글쎄...일본 패망 이후 석방,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조선민족함경남도집행위원회가 수립, 이후 1945년 10월 4일에 동 조직이 함경남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면서 인민보호국장에 임명되었으며 함경남도 검찰소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7일에 열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결성 회의에 함경남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찰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47년 11월, 조선법전초안작성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어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검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초대 최고검찰소 검사총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의 실세인 박금철과의 불화로 인하여 박금철이 일제 감옥 하에서 전향했다고 폭로했다가 1953년 12월 2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검사총장에서 철직되고 리송운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다행히 숙청은 면하여서 1956년 4월, 조국 보위후원회 중앙위원장을 맡았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12월, 조국전선 상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 1월, 조쏘 친선협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59년 5월, 김창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1월, 적십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66년 8월, 월남에 대한 미군의 집행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며 그럭저럭 활동을 이어나갔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중앙군사위원회에서도 일했다고 하는데 뭘 했는지는 불명.
그러다가 1974년 11월 25일에 조용하게 사망했다. 북한은 일체의 부고를 발표하지 않았으나 이후 애국렬사릉에 반일애국열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 '위대한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하였다'라고 나름대로 좋게 말해주고 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조선대백과사전.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