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1:41:34

리영


파일:최고인민회의 CI.sv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rowcolor=#003478,#C39335>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허헌 김달현 리영 최원택 백남운
<rowcolor=#003478,#C39335> 제5기 제6기 제7기 제8기
황장엽 황장엽 양형섭 양형섭
제9기
제10기 제11기 제12기
양형섭 최태복
제13기
제14기
최태복 박태성 박인철
상위 둘러보기 틀로 이동하기
}}}}}}}}} ||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889년 4월 1일, 함경북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 상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 1913년 남경 강녕 제1실업학교를 1년간 다녔으며 재학 중 광복회를 조직했다. 졸업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21년 서울청년회 조직에 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김은국과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을 조직했으며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 때는 화요회와의 반목 때문에 입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로당 연구에 따르면 조선공산당 창건 멤버가 맞으며 선전통신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1927년 12월 21일, 서울파 지방대표들을 소집하여 소위 춘경원당으로 불리는 독자적인 당을 수립하려고 하였고 책임비서에 선출, 1928년 1월에 독자적 공청 수립까지 했으나 1928년 초, 이미 이들의 노력에 대해서 다 파악하고 있던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4년간 복역했다.

석방 이후 1939년 스탈린단을 조직,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다시 도모하였으며 8.15 해방 이후 서울에서 최익한과 함께 장안파를 이끌어 조선공산당 서울시당을 조직하였다.

다시 조선공산당을 장악하려는 박헌영과 격렬히 충돌하였다. 1945년 9월 30일, 평양에 다녀왔으며 10월 15일에 다시 돌아왔다. 북한은 이를 두고 리영이 김일성의 품에 안겼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당연히 평양을 점령한 소련 당국과 접촉하기 위함이었다. 소련으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미국의 2차 대전 공헌을 인정하고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민족 부르주아들을 포섭해야 한다는 10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경주의자로 인식되어 당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며 오기섭은 리영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이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리영과 장한파는 11월 24일, 공개성명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김일성에게조차 좌경 분파주의자로 공격을 당했다.

이후 1947년 5월, 여운형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여기에 참석, 백남운 등과 함께 중앙위원회 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가했다. 리만규, 권태양, 엄항섭, 림해, 고광, 조두원, 홍명희, 백남운 등과 함께 13인위원회에서 단독선거 배격운동 결정서 작성에 참여했다. 1948년 9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준비위원회 결성에 홍명희, 리극로 등 68명과 함께 참가했으며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의장단 및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근로인민당에서 탈퇴하고 북조선로동당에 가입했으며, 남북로당 합당 때 김일성은 그를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시켜 주려했으나 박헌영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1951년 1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로력훈장을 받았다. 1953년 12월, 김달현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조국전선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1958년 10월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 8월 13일에 사망하였을 때 북한 매체는 이를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복권되었는지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심지연(1991), 근로인민당 연구 -창립과정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3(1).
  • 이정식, 로버트 스칼라피노,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파주: 돌베개, 2015).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