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
박정애 朴正愛 | Pak Chong 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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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7년 8월 추정 |
러시아 제국
하산 (現 러시아 연방 극동 연방관구 프리모리예 하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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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8년[1] (향년 90~91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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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인 |
배우자 | 김용범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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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보기 드문 여성 정치인으로 김일성을 지지해서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숙청당했다. 그러나 복권되어서 말년을 살다가 애국렬사릉에 그의 남편인 김용범과 합장되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907년 러시아 제국 크라스키노[2]에서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이주한 빈농의 딸로 출생했다. 정확한 생일이 알려져 있진 않은데 8월 즈음으로 보인다. 1957년 8월 23일에 주북 소련 대사관에서 박정애에게 50세 생일선물을 보냈기 때문이다. 1923년 소련 공산주의 청년회에 가입했으며 1929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해당하는 보로실로프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 비행기공장에 배치되었는데 그곳에서 공청 선전부장을 지냈다고 하며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모스크바 시절 모스크바 노농대학을 나왔다는 말도 있다. 이후 국제적색노동조합 소속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지하 노동운동을 주도하면서 수차례 투옥되었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의 코민테른 요원 김용범과 부부로 위장하였으나 실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는데 부부가 함께 감옥에 끌려가곤 했고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여운형의 조선인 정치범 석방 요구에 따라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정치범 석방을 지시하면서 석방되었다.2.2. 소련군정기
아베 총독은 평안남도 도지사 후루카와 가네히데에게 여운형과의 합의에 따라 인민위원회를 설립하라고 지시했고 그녀는 평남 인민위원에 초빙되었다. 당시 평남에서는 공산주의의 기반이 매우 빈약했으므로 그녀는 현준혁, 장시우, 리주연 및 남편 김용범과 함께 8월 17일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를 수립해 여성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소련군정으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아 북한의 새 지도자 후보로 고려되기도 했으나 결국 김일성에게 밀려났다. 남편 김용범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을 주도했다. 다만 박정애 본인은 자신이 소련의 후보자 목록에 있던 것도 몰랐다.그녀는 김일성과 만난 후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서북5도당책임자급열성자대회에 대표로 참여하였고 회의 끝에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 평안남도 집행위원에 선출, 부녀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성운동에 집중해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즉, 초대 여맹 위원장이다. 이때 봉건 인습 청산, 축첩제 폐지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에 찬성하는 찬탁 운동을 전개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후 인민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8월 북로당 창립대회에서 주석단에 선출되어 평남대표로 참석하여 김일성을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회의 결과 당연히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중앙위원회 부녀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양곡수매사업에 참가하여 농업 전문가로 활약했다.
소군정기 박정애의 모습(왼쪽에서 두번째) |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중앙당학교에서 <조선공산당건설> 과목을 강의했다. 한편 북한의 유력한 정치인 중 한명이었던 그의 남편 김용범은 1947년에 위암으로 사망한다. 북로당 2차 당대회 이후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었다.
2.3. 김일성의 사바카
1차 최고인민회의 선거 이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중앙선거지도위원장으로 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를 지도했다. 6.25 전쟁 발발 후 허가이와 김일성의 정쟁이 발생하자 김일성을 극력 지지하여 박창옥, 박영빈, 박금철과 함께 허가이를 맹공하였고 그 공으로 허가이가 차지하고 있던 비서 자리를 받았으며 '사바카'라는 악명을 얻었다. 1951년 허헌이 사망한 후 정치위원직을 물려받았다. 1952년 소련 공산당 19차 대회 대표단에 북한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각도당열성자대회에 참여했다. 김일성을 숭배하는 각종 논문을 발표하는 등 김일성을 찬양하는 각종 작업에 열렬히 참여하였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2년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선 남로당파 숙청을 담당하였다. 그녀의 난타를 당했던 허가이는 1953년 7월에 자살했는데 그녀는 그의 죽음을 당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변절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이후 열린 중앙위원회 8차 전원회의에서 로동당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7월 27일 휴전협정 때 김두봉, 남일과 함께 등장하기도 했지만 숙청당한 후 모든 공식 선전물에서 삭제당했다.휴전 협정 서명을 지켜보는 김두봉과 박정애, 사진 상에서는 잘렸지만 박정애 옆에는 남일이 있다.[3] |
1954~1956년 사이 김일성의 소련파, 연안파 숙청이 시작되자 그녀는 다시 김일성을 지지하였으며 1956년의 3차 당대회에서도 김일성의 입장을 지지하여 김일성의 적들을 종파주의자들로 공격했다. 3차 당대회에서 부위원장 겸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당 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6월 김일성을 따라 소련을 위시로 한 9개국 방문을 떠났으며 흐루쇼프, 미코얀, 브레즈네프 등을 만났다. 몽골 순방을 마지막으로 김일성과 귀국한 그녀는 남일과 함께 김일성에 대한 소련의 지지를 호소하는 한편 개인숭배를 규탄하며 유화책도 제시했으나 결국 8월 전원회의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김일성 반대파와 김일성파가 격돌하게 된다. 김일성은 자신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도 없었고 살기 위해서 발악적으로 일어난 것에 가깝던 김일성 반대파들을 몰살시키는데 성공한다. 려정의 수기에 따르면 8월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이 예정에 없던 발언을 신청할 때 사회자를 맡고 있던 것이 박정애였는데 크게 당황하며 이를 허락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으나 김일성이 이를 막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아서 발언을 허락했다고 한다.
1957년 8월 3일, "해내해외에서 일제를 반대하는 민족해방투쟁에 있어서와 해방 후 조국의 자유와 독립과 공화국의 민주기지강화를 위한 사업에서 조국과 인민 앞에 특출한 공훈을 세웠으며 세계 각국 인민들 간의 평화를 위한 위업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50세 기념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8년 9월 7일, 김일,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2.4. 몰락
어쨌든 김일성의 최대 위기에서 김일성을 굳건히 지지한 공으로 1961년 개최된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지만 이때쯤 가면 만주파, 갑산파의 세력이 너무 강해져서 그녀의 영향력은 많이 축소된 후였다. 그래도 부활한 정치위원회 위원에는 재선되었다. 1961년 9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전임 농업상 림해가 숙청당하면서 농업상을 겸임하여 1962년 10월까지 재임하였는데 현재까지도 북한의 유일한 여성 농업상이다. 하지만 1962년 10월 농업성이 농업위원회로 승격되면서 김만금에게 농업위원장 자리를 내주게 된다. 1962년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으나 각종 주요 공개석상에 자주 나오던 과거와 달리 1969년에 이르러서는 체육, 교육 관련한 보잘것 없는 행사에만 이따금 얼굴을 내밀었다. 이정식, 로버트 스칼라피노 연구에서는 2차 당대표자회 때 정치위원회에서도 방출되었다고 적었으나 이는 보선된 정치위원회 명단을 정치위원회 전체 명단으로 혼동한 것으로 보이며 북한에서의 보도를 보면 이후 명목상의 정치위원 자리 자체는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회집행부에는 선출되었으나 정치위원회는 물론 중앙위원회 위원에서조차 탈락했다. 이후 공식 선전물에서 삭제당하면서 숙청당한 게 확실해졌다. 성혜랑의 회고에 따르면 김성애와의 권력다툼에서 져서 그렇게 됐다는데 사실이라면 김성애를 김일성에게 소개한 것이 박정애였으니 배은망덕이 따로 없다. 성혜랑의 글에 따르면 상업상으로 좌천되었다가 영변 약산단 공장 사감으로 하방당했다고 한다. 공작원 김용규는 박정애가 김정일의 부화방탕한 사생활을 비판하였다가 김정일에게 찍혀서 5차 당대회에서 숙청되었다고 증언했다.
2.5. 복권
숙청된 후 1970년대에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복권되어 곱게 말년을 보낸 것이 주북 러시아 대사관 측에 확인되었다. 1998년 사망한 후 남편 김용범과 함께 애국열사릉에 합장되었다. 김정은 시대에도 복권 상태가 유지되는지 2022년에 김일성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배포된 화보집에 그녀의 사진이 다수 수록되었다.3. 여담
성혜랑은 그녀를 인터뷰한 기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당연하지만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무척이나 총명하고 재치 및 여자의 감각이 무척이나 뛰어나 그렇게 재밌있고 똑똑한 여자는 처음 봤다고 한다.비슷하게 북한에서 여성 고위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허정숙이 있다. 각각 김용범의 아내와 허헌의 딸이라는 가족관계가 있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둘 중에서는 박정애의 위상이 더 높았는데 박정애는 북조선로동당 창당대회나 휴전협정 서명 같은 북한의 중요한 역사적 장면들에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등장할 정도였고 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까지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숙청되지 않고 고위직에 있었던 허정숙과는 달리 박정애는 복권되어서 말년을 곱게 보내기는 했지만 중간에 숙청된 적이 있다.
현재까지 김씨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지 않고 정치국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 정치국 위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정일 시대에 김경희가 정치국 위원에 선거된 적이 있지만 오빠 김정일이 아니었으면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찍이 사망한 남편 김용범은 조선로동당의 전신이 되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당수로 북한의 지도자 후보급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부부가 쌍으로 북한 정권과 그 전신의 중핵이었던 셈이다.
4. 매체에서
5.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 도서출판선인.
-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 도서출판선인.
- 성혜랑, 등나무집, 지식나라.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여성 모략가 박정애, 북한 573(2019.9).
[1]
다만 이 1998년 사망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1998년 사망설을 발굴한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박사는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대사가 업로드한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이를 확인했다고 언급했는데 문제는 원본 게시물에는 박정애의 기일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 허나 자료를 입수한 출처가 민감하기 때문에 애둘러서 페이스북 게시물이라고 둘러댔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2]
유일하게 북한과 바로 접해 있는 러시아의 행정구역인
하산스키 군의 마을이다.
[3]
김두봉 숙청 이후 김두봉이 삭제되고 김일성, 박정애, 남일 세 사람만 남았다가 박정애도 숙청되면서 현재 북한이 사용하는 버전에선 김일성과 남일만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