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9:46:13

리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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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제1대 무임소상
리극로
李克魯 | Ri Kuk Ro
파일:external/www.segye.com/20101008001909_0.jpg
출생 1893년 8월 28일
경상도 의령현 지산면 듬실 가운데뜸
(현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827번지)
사망 1978년 9월 13일 (향년 85세)
평양시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1948 ~ 1978)
재임기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무임소상
( 1948년 9월 9일 ~ 1953년 12월 20일)
제1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1953년 12월 23일 ~ 1957년 9월 17일)
제2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 1957년 9월 18일 ~ 1961년 3월 25일)
경력 조선어학회 간사장
조선어학회 회장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 위원
남북연석회의 위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학력 창신학교 (졸업)
퉁지대학 (예과 / 수료)
베를린 대학교 (경제학 / 박사)
정당 건민회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어학자,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 본관은 전의(全義)로 전서공파 28세손 로(魯) 항렬이다. 호는 '고루'로, 이름인 '극로'를 중국식(커루, Kèlǔ)로 읽은 이름이다. 해방 직후 서적들에서는 동정(東正)이라는 호도 발견되는데, 어떤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해외에서 활동할 때도 '고루'라는 호를 이름으로 사용해서 'Li Kolu'라고 적었다. #

두음법칙을 적용한 이극로 표기가 유명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본인의 이름을 리극로라고 표기해 왔으며, 그가 정착한 북한에서도 그와 관련된 학자들의 생각을 김일성이 지지하여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리극로로 표기한다.

2. 생애

파일:external/ph.idomin.com/349216_264154_4624.jpg 파일:external/goru.kr/e4683fb8272c3d8e20c5f8cf1f86e689_bXBsyRm1M.jpg
리극로의 장년기 리극로의 애국렬사릉 묘지에서 유족들
리극로 연보.

지금의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1]에서 이근주(李根宙)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관련기사) 상하이 퉁지대학 예과 수료 후 1927년 독일로 유학을 가서 베를린 대학교에서 주경야독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으며, 이어 이 대학교 동방언어 학부에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여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럽에 있던 시절에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주목받았다.( 관련기사) 특히 일본의 한국어 말살 정책에 대한 우려로 인해 1928년 프랑스에서 한국어 사료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소르본 대학의 구술 아카이브에 남은 녹음본은 2011년에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영상)

1929년에 귀국하여 한국어 학자로 많은 활동을 한다.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 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처음으로 한국어의 표준어 규정을 정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표준어가 없다 보니 지역 간에 의사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2년 리극로가 평안북도 창성군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던 중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식당 주인에게 고추장을 청하였는데, 주인이 '고추장'을 못 알아듣다가 일행들의 설명을 들은 이후에야 "옳소, 댕가지장 말씀이오"하더니 고추장을 내왔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 일을 계기로 리극로가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리극로는 한글 운동에 앞장섰던 제1세대 한글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구속되는데, 그것도 그냥 연루되어서 구속된 정도가 아니다. 리극로는 조선어학회의 멤버 중 최현배, 이윤재와 더불어 핵심인사로 지목되어 구속 당한 인물이다. 그리고 리극로는 1943년에 징역 6년을 선고(이외에 최현배는 징역 4년을 선고.) 받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고 8월 17일이 돼서야 최현배와 같이 출옥했다. 당시 굉장히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하는데, 리극로가 출옥했을 때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있다. 관련 글

광복 이후 리극로는 다시 한글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그런데 1945년말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나면서, 반탁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서 반탁운동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 1948년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연석회의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했지만 리극로는 그냥 북한에 남으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조봉암과도 같이 일할 정도로 상대가 좌파라고 배척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김구와 함께 활동하는 우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봉암은 박헌영의 독단과 당 운영에 회의를 느끼고 공산당을 탈당했다.)

그런데 리극로는 이승만과 사이가 정말 나빴고, 남쪽에서 이승만의 집권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고 한다. (박태균 저, <한국전쟁> p.51 참고). 이승만 돈암장에 거주했던 시절 공보비서를 역임한 최기일 박사의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도 리극로에 대한 내용이 짤막하게 나오는데, 리극로는 이승만에게 나름의 호의감을 가지고 장문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리극로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는 사실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보낸 팬레터에 같이 섞여서 도착을 한거였는데 팬레터 치고는 한 편의 논문과도 같은 장문의 편지였고, 최기일 본인은 리극로의 편지를 보고 나름 감명을 받았던 듯 하다. 그래서 리극로가 열은 한글 강좌에도 몇 번 참가해서 한글 수업도 들었다고 한다. 훗날 리극로가 결국 월북한 거에 대해서 최기일 박사는 이러한 유능한 인재를 포용하지 못한 이승만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평을 내렸다. 다만 윤치영을 비롯한 이승만의 최측근들은 리극로더러 싱거운 사람이란 식으로 뒷담을 깔 때도 있었다고 한다.

공직으로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단을 지냈고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12월 20일부터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기 6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 1957년 2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선되었다. 딱히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추후에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로 인한 숙청 과정에서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한글 보급 및 한글 연구에 몰두하면서 지냈다고 하며 1949년 10월 조선어문연구회 위원장에 취임했고 김두봉이 실각한 이후로는 북한의 어문정책을 담당하였다. 1961년 3월 23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2기 9차 회의에서 부위원장에서 해임되었다.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 1965년 7월, 정로식 장의위원,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 1974년 1월, 박열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회 의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맡다가 1978년에 병사했으며 묘소는 북한의 국립묘지인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다. 월북 인사였으며 끝까지 숙청당하지 않고 고위직을 맡았다. 이 북한 정권에서의 활동 때문에 공식적인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지 못하였다. 만약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있었으면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유공자 자격을 받았을 수도 있다.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자판과도 약간 관련이 있다. 공병우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 환자로 방문한 리극로에게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화를 받아서 한글에 대한 열정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 글)

그의 장남인 리억세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합성약(양약)을 전공하였으며,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소련 레닌그라드제약대학에서 유학한 한의학자다. 본래 아버지를 따라 어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1948년 월북 직후 김일성의 권유에 따라 자연과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조선고려약기술쎈터 실장과 단국민족통일협의회 부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전후 남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 인터뷰에 따르면 리억세의 아내 리원영도 신경내과 전문의이며, 리원영의 아버지 리병남은 해방 직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와 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해 북한 초대 보건상을 역임했다고 한다. 리병남은 종로2가 파고다극장 근방에 소아과를 개업히기도 했다고 한다. 리억세의 동생 리대세는 국가과학원 중앙광엽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 인근의 오천리, 봉곡리, 성산리와 함께 전의 이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