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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 |
호 | 우정(雨亭) |
자 | 자중(子中) |
출생 | 1849년 ( 철종 즉위년) 11월 2일[1] |
충청도
회덕군 (現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
|
사망 | 1916년 1월 25일 (향년 66세) |
본관 | 제주 고씨 (濟州)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주요 경력 |
중추원 참의 황해도 관찰사 법부 대신 탁지부 대신 조선귀족 자작 이왕직 장관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가족 |
아들
고희경 손자 고흥겸 |
친인척 | 증손 고중덕 |
비고 |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1909년,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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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 정미칠적 및 경술국적 중 1명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중(子中), 호는 우정(雨亭).2. 생애
1849년 11월 2일 한성부에서 중국어 역관 고진풍(高鎭豊)과 전주 이씨 이일준(李一遵)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867년 19세의 나이로 식년시 역과 왜학( 일본어) 전공에 2등 2위로 급제했다. # 젊어서부터 개화 사상을 접해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으며 1876년 5월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에 일본어 통역으로 수행해 일본을 시찰했다. 1880년 5월 원산항 개항 때 사무관으로 종사하고 같은 해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1882년 6월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이 인천에 도착해 있을 때 차비 역관으로 영접과 통역을 담당했으며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는 조계정 사무를 담당했다. 1884년 2월 양지현감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날 다시 간성군수에 임명되었고 9월 지평현감으로 옮겼으며 10월 통리교섭사무아문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삭녕군수로 옮겼다. 1885년 4월 고양군수에 임명되었다가 11월 연천현감으로 옮겼으나 곧바로 사직했으며 1886년 4월 기기국 방판으로 관직에 복귀해 종목국 사무를 겸임했다. 1894년 6월 내무부 참의에 임명되어 9월 의화군 이강이 보빙대사로 일본을 방문할 때 1등 수원으로 수행했으며 갑오개혁에도 참여하였다. 1895년 4월 학부 협판에 임명되어 5월부터 8월까지 일본 특명전권공사를 지냈다. 1896년 1월부터 3월까지 농상공부 협판을 지내면서 2월에는 농상공부대신 사무를 서리했고 3월에 외부 협판에 임명된 후 9월부터 외부 대신 사무를 서리했으며 7월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897년 9월에는 다시 학부 협판에 임명된 후 1898년 7월부터 10월까지 학부대신 사무를 서리하면서 양지아문 부총재관을 겸임했다. 1898년 10월 탁지부 협판에 임명된 후 탁지부대신 사무도 서리했으며 1898년 10월에 열린 관민공동회에 정부 측 참석자로 참여한 일로 11월 징계를 받았으나 곧바로 탁지부 협판으로 복귀했다.1903년 2월부터 11월까지 다시 일본 특명전권공사를 지냈고 12월부터 다시 탁지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1904년 5월 학부 협판으로 옮겼다. 1905년 5월 법부 협판에 임명되었다가 7월 평리원 재판장과 중추원 참의를 거쳐 10월부터 황해도 관찰사 겸 황해도 재판소 판사를 지냈고 1906년 6월 제실회계심사국장에 임명되었다. 1907년 2월 서울에 장훈학교를 설립하고 4월에 교장에 취임했으며 5월에 성립된 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어 1908년 6월까지 재임했다. 재임 중이던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관련해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면서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 등과 함께 양위를 주장했다. 고종 강제 퇴위에 앞장서는 한편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이완용 - 총리대신, 송병준 - 농상공부대신, 임선준 - 내부대신, 이병무 - 군부대신, 조중응 - 법부대신, 이재곤 - 학부대신과 함께 정미칠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07년 10월 조선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1907년 10월 고종의 강제 양위와 정미 조약 체결에서 보여준 공로가 인정되어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3월 탁지부대신으로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시정 개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일시 대부금에 관한 계약'에 조인했다. 1908년 6월 법부대신에 임명되었고 8월 조선에 대한 자선 구제와 복리 증진을 명분으로 진출한 동양협회[2]의 취지에 찬성해 100원을 기부했으며 10월에 일본 적십자사에서 특별 사원장을 받았고 11월에는 대한산림협회[3] 명예회원으로 참여했다. 1909년 6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황태자 도한 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0월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임시로 법부대신의 사무를 서리했는데 11월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맞춰 대한제국 내각 및 한성부민회 주최로 장충단에서 관민 추도회를 열 때 발의에 참가하고 추모했다. 같은 달 말에는 일진회가 성명서를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자 이완용의 지시로 오사카 조폐국 시찰 명목으로 일본을 방문해 수상 가쓰라 다로를 만나 '합방안 5개 조항'을 제출했으나 거절당했다.
1910년 3월 토지조사국 관제 발표와 함께 탁지부대신으로서 경술국치 때까지 토지조사국 총재를 겸임했다. 1910년 8월 22일 탁지부대신으로서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에 참석해 가결시킴으로써 황족 대표로 참석한 이재면과 더불어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시종무관장 겸 친위부장관 이병무 등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2월 조선귀족의 실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명농회 조직에 참여해 취지서와 규칙을 발간했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10만원을 받았고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으며 8월 29일 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매일신보> 특집호에 '공축 병합 일주년 기념'이라는 기념 축사를 게재했다. 1912년 8월 '한일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1월 조선귀족 대표로 일본 교토 모마야마 백일제에 참석해 참배했으며 12월에는 정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7월 도쿄에서 열린 메이지 덴노 1주기 추도식에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5월 특별유공회원으로 50원을 기부했으며 11월 다이쇼 덴노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월 25일 사망했는데 사망 당일에 종3위로 추서되었으며 2월에 치러진 장례식에 일본 정부가 보낸 칙사가 참석했다. 그의 작위는 1916년 3월 장남 고희경이 세습했다.
3. 기타
- 장남 고희경(1873~1934)과 손자 고흥겸(1893~1939) 모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였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후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 등을 국가에 몰수당하게 된다. 고희경의 후손들은 선조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고 고희경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매각한 대금 4억 8천여만 원을 국가에 반환하기도 하였다. # 그러면서도 고영희의 증손자 고중덕[4]은 조상의 토지를 되찾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기도 하였으나[5] 결국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내려졌다.[6]
- 상술했듯 을사조약 이전부터 친일파였던 인물이었다. 이는 같은 정미칠적 + 경술국적인 이병무와 조중응, 정미칠적인 송병준도 마찬가지. 사실 고영희는 이를 넘어 강화도 조약 이전에도 친일파였기에 개화파 출신 매국노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한 셈이다. 특히 상술했듯 중국어 역관의 자식인데도 일본어 과거에 응시, 합격한 것을 보면 1860년대에도 친일 성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대한제국의 매국노 중 최고령이기도 하다. 1849년생으로 대한제국의 매국노들 중 유일한 1840년대생이면서 고종보다 연상인 인물이다. 매국노들 중 가장 유명한 이완용보다는 9세, 고영희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매국노 권중현보다는 5세, 민영휘와 고종보다도 3세 많다. 반면 최연소 매국노는 윤덕영(1873년생).[7]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그의 조카다. 중부(仲父) 고영희와 달리, 예술인인 고희동에게는 특별한 친일행적이 없다.
[1]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는
12월 1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
1907년 2월 조선과
대만의 식민화를 보조하고 촉진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직된 단체.
[3]
대한산림협회는 일제가 전국의 산림 측량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단체로 일본인 측량 기사를 초빙해 산림 사업을 주관했다.
[4]
마지막으로 생존한 조선귀족 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적어도 2016년까지는 생존이 확인되었다.
[5]
정확히는 고조부인 고영희의 재산은 순순히 반납했으나, 증조부 고희경의 재산에 대해서는 반발하며 소송에 나섰다.
#
[6]
해당 재판의 판결문
[7]
아이러니하게도 최고령 매국노 고영희가
강화도 조약 전부터 친일파였고 친일을
개화파로 출발했던 것과 달리 최연소 매국노 윤덕영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친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