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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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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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 ||||||||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
제2대 미즈노 렌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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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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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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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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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 ||||||||
<colbgcolor=#fff,#1f2023> 고영희 | 권중현 | 민상호 | 박제순 | 송병준 | |||||
이근상 | 이근택 | 이완용 | 이재곤 | 이지용 | |||||
이하영 | 임선준 | 장석주 | 조중응 | 조희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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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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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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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찬의 | |||||||||
김현수 | |||||||||
칙임 참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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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 ||||
민병석 | 윤덕영 | 이윤용 | |||||||
칙임 참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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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로 | 윤갑병 | 이겸제 | 이범익 | 이진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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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란교 | 정대현 | 정석모 | 정석용 | 정해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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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업 | 황종국 | ||||||||
참의 | |||||||||
강필성 | 김병원 | 김성규 | 김제하 | 박상준 | |||||
어윤적 | 유만겸 | 유성준 | 진희규 | 홍정철 |
- [ 1940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1000><bgcolor=#062861><-5> 고문 ||
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재직 중 사망. |
조선귀족 후작 | |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병길 李丙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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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년 1월 12일 |
사망 | 1950년 12월 29일 (향년 45세) |
본적 |
경성부
종로구 옥인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
본관 | 우봉 이씨 |
호 | 이당(二堂) |
학력 |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 철학과 / 졸업) |
경력 |
조선귀족
후작 동요회 이사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배영동지회 이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 |
조부모 | 조부 이완용, 조모 양주 조씨 |
부모 |
친아버지
이항구, 친어머니 김진구 양아버지 이승구, 양어머니 임건구 |
남매 |
남동생 이병희,
이병주, 이병철 여동생 이병오 |
자녀 | 아들 이윤형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의 손자이며 그의 아들 이항구의 장남이다.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였으며, 훗날 3대가 모두 희대의 민족 반역자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2. 생애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1] |
1905년 1월 12일에 태어났다. 원래 이항구의 장남이지만,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가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자 1914년 백부 이승구의 사후 양자로 호적이 입적됨으로써 이완용의 장손이 되었다.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이 사망한 후, 같은 해 3월에 종5위로 이완용의 후작 작위를 이어받아 습작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출신답게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7년 2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2.1. 친일 행적
그는 자기 할아버지 명성 뒤에 숨어 음주가무나 즐기면서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매국노의 후손 그 자체로써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인다. 1927년 2월 다이쇼 덴노 장례식과 1928년 9월 쇼와 덴노 즉위 대례식에 각각 후작 대표로 참석했고, 이후 11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7년 7월 한성은행의 대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2] 1931년, 1932년 정5위 후작 자격으로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촉탁을 지냈으며, 1932년 12월에 종4위로 승서했고, 1934년 일본 궁내성 식부직 어용계를 지냈다.귀국한 이후 1935년 10월부터 1941년까지 조선신궁에서 열린 각종 행사에 조선귀족 총대로 참석해 참배를 올렸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친일단체 '동요회(同耀會)' 발기인회에 참석해 동요회 발기인 겸 이사장에 선출되었고, 간부들과 함께 조선신궁을 참배를 한 뒤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같은 해 9월 이홍묵, 박부양, 김호규, 한상억 등과 함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를 방문하여 중일전쟁과 관련된 국방헌금 1만원을 헌납했다.[3]
「시국에 대한 나의 각오」 - 경성일보 1937년 11월 9일 |
1937년 11월 경성방송국의 제1방송 국민정신작흥 강연에 직접 출연해 '시국에 대한 나의 각오'를 주제로 친일 연설을 하였다. 첫 방송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는데 "저는 반도에서 태어난 제국신민의 한 사람입니다. 당면한 시국에 대해 「 황국신민의 서사」를 읊조릴 때 저는 정말로 대일본제국의 국민정신총동원에 대해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이 우러나는군요. 무엇인가 강하게 가슴 속에서 벽차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현재 반도를 뒤덮고 있는 적성이 강력하게 파도치는 때 지하에 계신 조부께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기꺼워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등 일제를 향한 찬양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와 동시에 「 황국신민서사」를 하루에 삼창하자고 주장했다. 해당 강연의 내용은 『 경성일보』 1937년 11월 9일자부터 13일자에 4회동안 연재되었다고 한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12월 동요회 이사장 자격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영국을 타도하자는 반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결성된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또한 11월에는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의 참사와 상임참사로 선임되었다. 1940년 5월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취제역에 취임했고, 같은 해 8월 동아합동목재주식회사 취제역에 취임한 후 1941년 10월까지 재직했다.
1940년 10월부터 1942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아 활동했으며, 같은 달 국민총력 경기도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또한 11월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가 열리자 초대를 받고 참석하여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4월 조선귀족들이 조직한 사단법인 조선귀족회의 이사에 취임했다가 1944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강원약업주식회사의 취제역으로 취임했고, 5월에는 경성건물주식회사의 취제역 겸 대표취제역으로 취임해 1943년 12월까지 재직하기도 했다. 1941년 5월 정4위 자격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 참의에 임명되어 1945년 8월 해방이 될 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였고, 그러는 동안 매년 1800원에서 2400원이 되는 수당을 받았다.
1941년 6월 부여신궁 조영공사에 중추원 봉사대원으로 참여했고, 8월에 흥아보국단 상임위원과 경기도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또한 같은 달 임전대책협의회의[4]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9월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가 통합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이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1942년 미나미 지로가 총독 자리에서 이임하자 <매일신보> 1942년 5월 30일자에 「통치사의 획시기」라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더욱 지원병 제도 · 창씨제도를 실시해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는 길을 열어 놓은 치적은 우리들이 얻지 못할 공적이올시다."라고 그의 민족 말살 정책을 옹호했다. 같은 해 6월 신임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가 부산항에 입항할 당시 귀족 대표로 환영 행사에 참석했고, 11월에 조선산금흥업주식회사의 취제역으로 취임했다.
일제에 백금을 헌납한 이병길. - 매일신보 1944년 12월 17일 |
1943년 1월 조선저축은행의 감사역에 취임하면서, 동시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어 1944년까지 활동했으며, 같은 해 6월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참여에 선임되었고, 북청철산주식회사 취제역을 지냈다. 1944년 4월 강원약업주식회사가 강원생약주식회사로 바뀐 이후에도 계속 취제역을 맡았고, 7월에 강원임업주식회사의 취제역에 취임했으며, 12월 조선지방해군 인사부에 백금반지 4개와 백금시계 3개를 헌납했다. 1945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의 취제역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2. 해방 이후
이병길의 체포를 알리는 기사. |
해방 후, 1945년 11월 3일 미군정에 의해 중추원 칙임 참의직에서 파면되었다. 1949년 3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8월 재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과 전라북도 익산 소재의 소유 임야 중 2분의 1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12월 28일에 향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여담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같은 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할아버지 이완용, 아버지 이항구와 함께 3대가 모두 수록되었다.
-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병길과 그의 조부 이완용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파일:이윤형.jpg | |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 -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
- 훗날 그의 아들 이윤형은 캐나다에서 거주하고 있다가 1980년대 말 대한민국에 귀국해 친일파 후손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걸면서 자신의 증조부인 이완용의 땅을 돌려받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89년에서 1992년까지 17건의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한 바가 있다. 결국 1997년 재판부의 판결을 통해 시가 30억 땅을 되찾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부동산에 전부 팔아버린 다음 다시 캐나다로 떠나버렸고, 2005년 다시 대한민국에 돌아와 2006년까지 지속적으로 토지 반환 소송을 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