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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자작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본관 | 신 안동 김씨 |
자 | 중원 (仲遠) |
호 | 해사 (海士) |
출생 | 1835년( 헌종 1년) 3월 19일 |
사망 | 1919년( 다이쇼 8년) 11월 27일 (향년 84세) |
직업 | 관료, 정치인 |
종교 | 유교 (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자작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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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귀족. 본관은 신 안동 김씨,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2. 생애
1835년 3월 19일 공조판서를 지냈던 김온순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양 외조카로 서재필이 있으며 잠시 서재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1]1861년 (철종 1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1872년 성균관 대사성,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874년 이조참의를 역임하였고 1879년부터 높은 관직을 거쳐 그1883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 복귀해 이조참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1886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공조, 형조, 이조, 예조 등의 장관직을 두루 거쳤다. 1894년 (고종 31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민심 수습과 사태 진압을 담당했다. 1894년 개화파 정권이 성립되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4년 후 궁내부 특진관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900년에는 의정부 참정, 이후 의정부찬정, 홍문관 학사를 지냈다.
1900년, 을미사변 당시 군부대신인 안경수를 비롯한 개화파 인물들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고 일본으로 도주한 유길준, 박영효 등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1903년 탁지부 대신이 되얺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보유한 백여 명의 하인 중 하인 몇 개와 돈의 일부를 기부하였다.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유작으로 사공도의 '시품'이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 보물로 소장되어 있다.
1910년 10월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가 수여되었다. 1919년 11월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작위는 손자 김호규에게 습작되었다.
3. 기타
-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는데 현재 서울대학교를 나온 것과 동일한 수재였다. 백성(국민)들을 매우 멸시하였다.
[1]
혈연상 외조카가 아닌 양 외조카이기 때문에 도의적으로는 서로를 외숙부-외조카로 여길지라도 실제 혈연상으로는 아무 관계없는 남남이다. 서재필이 자신의 7촌 숙부 내외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서 김성근과 인척관계가 되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