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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리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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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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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 1989-90 · 1990-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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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2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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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FIFA 월드컵 골든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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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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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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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FIFA 올해의 선수 | ||
수상 로베르토 바조 |
2위 호마리우 |
3위 데니스 베르캄프 |
1993 Onze d'Or | ||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로베르토 바조 | 알렌 보크시치 | 호마리우 |
Player of the Year 1994 | ||
수상 파올로 말디니 |
2위 로베르토 바조 |
3위 호마리우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호마리우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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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 |||||||||||||||||||||||||||||||||||||||||||||||||||||||||||||||||||||||||||||||||||||||||||||||||||||||||||||||||||||||||||||||||||||||||||||||||||||||||||||||||||||||||||||||||||||||||||||||||||||||||||||||||||||||||||||||||||||||
1992 잔루카 비알리 (1650만 유로) |
→ |
1993 호마리우 (1200만 유로) |
→ |
1994 미카엘 라우드루프 (960만 유로) |
CR 바스쿠 다 가마 영구결번 |
No.11 |
<colbgcolor=#e61e2b><colcolor=#ffffff>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상원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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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풋볼 클럽 No. 11 | |
호마리우 Romário |
|
본명 |
호마리우 지 소자 파리아[2] Romário de Souza Faria |
출생 | 1966년 1월 29일 ([age(1966-01-29)]세)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체격 | 키 168cm / 체중 71kg |
직업 |
축구 선수 (
중앙 공격수 / 은퇴) 정치인 |
클럽 |
CR 바스쿠 다 가마 (1985~1988) PSV 에인트호번 (1988~1993) FC 바르셀로나 (1993~1995) CR 플라멩구 (1995~1996) 발렌시아 CF (1996~1997) → CR 플라멩구 (1997 / 임대) CR 플라멩구 (1998~1999) CR 바스쿠 다 가마 (2000~2002) 플루미넨시 FC (2002~2004) → 알 사드 SC (2003 / 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 (2005~2006) 마이애미 FC (2006)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2006 / 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 (2007) 아메리카 풋볼 클럽 (2009) 아메리카 풋볼 클럽 (2024~) |
감독 | CR 바스쿠 다 가마 (2007~2008) |
국가대표 | 70경기 55골[3] ( 브라질 / 1987~2005) |
정치 |
브라질 연방하원의원 (2011~2015) 브라질 연방상원의원 (2015~ ) 브라질 연방상원 제2부의장 (2021~2023) |
통산 득점 | 772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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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결코 운동선수였던 적이 없다. 만약 내가
훈련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욱 많은 골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만큼 행복하진 않았겠지.
브라질의
정치인,
축구 선수. 포지션은
중앙 공격수.1994 월드컵에서 절정의 활약으로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펠레의 은퇴 이후 월드컵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셀레상에 24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클럽에서는 PSV와 바르셀로나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은퇴하기 직전까지 꾸준히 기량을 유지했다.
한편으론 높은 프라이드와 거친 언변, 불성실한 훈련 태도, 그러면서도 항상 뛰어난 경기력으로 자신을 증명한 점 덕분에 사람들에게 ' 악동'으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리우데자네이루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13세 때 CR 바스쿠 다 가마 유소년 팀에서 호마리우를 주목했다. 하지만 작은 키 때문에 뽑지 않았는데, 대신 입단한 오라리아 AC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이자 결국 정식으로 오퍼를 넣었다.1988 서울 올림픽에 브라질 대표로 참가했는데, 팀은 소련에게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호마리우는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이로써 전세계 스카우트들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고 잠재력을 인정받은 호마리우는 즉각 유럽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무렵 바르셀로나는 막 요한 크루이프 체제를 꾸려 세계적인 선수들을 끌어모으던 시기로, 호마리우 역시 바르셀로나 이적이 유력했다. 그런데 도중에 거스 히딩크가 가로채서 에레디비시의 명문팀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히딩크는 호마리우 경기 비디오를 보고, 올림픽을 마치고 리우로 귀국하는 호마리우를 공항에서 붙잡아 "지금 너를 데려가려고 하는 바르셀로나,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보다 우리 PSV가 더 낮은 클럽이고, 에레디비시가 라리가보다 한 수 아래인 리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작정 빅 리그의 대형클럽으로 가면 적응을 못하고 벤치에서 허송세월할 확률도 분명히 있다. 그 전에 검증이 된 리그인 에레디비시에서, 그것도 유러피언컵도 나가는 PSV에서 뛰어서 실력을 갈고 닦는 것이 너의 커리어에 더 좋을거다"라고 설득했다. 히딩크의 진솔한 설득에 호마리우는 마음이 움직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에인트호번과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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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경기 124골 24도움
당시 PSV는
거스 히딩크의 지휘 아래 전년도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 클럽이었기에 더 메리트가 있었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PSV 시절 110경기 98골[5]을 찍으며 유럽 무대에서 확실히 통한다는 것을 인증했다. 또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득점왕에만 두번 등극하는 등 유럽 최고 클럽들간의 대결에서도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았다.매번 논란이 되던 기강 문제도 PSV에서는 별일 없었다. 당시 일화로 히딩크는 기강을 잡기 위해 정해진 훈련 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벌금과 함께 훈련에서 제외시켰다. 당연히 선수들은 일찌감치 와서 몸을 풀었으나, 호마리우는 매번 귀신같이 훈련 시작 1분 전에 도착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호마리우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히딩크의 손목시계의 시간에 맞춰놨기 때문이다. 이걸 알아챈 히딩크는 자신의 손목시계의 시간을 앞으로 돌려놨고, 결국 시간에 늦게 된 호마리우는 그 날 히딩크가 명단에 제외함으로써 당일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PSV는 2:0으로 승리했다. 호마리우 없이 팀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 당시 호마리우가 실력 향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딴 짓만 하고 돌아다니자 히딩크가 자극을 주려고 한 행동인데, 경기 이후 일부러 3일 동안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에 제대로 자극받은 호마리우는 며칠 뒤에 있었던 부쿠레슈티와의 챔피언스 리그 2차전 회의에서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다고 하며 해당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6] 해트트릭[7]을 기록하며 5:1 승리에 일조했다. 히딩크의 계획이 제대로 통한 셈이다.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나고 악수를 나누며 훈훈하게 마무리.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 웨이'가 한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는데, 여기서 호마리우는 히딩크를 자신의 절친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지금도 매우 돈독하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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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경기 39골 11도움
1993년 마침내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같은 해에는 전 소속팀인 PSV에서의 활약과 겹쳐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하였다. 이 시기 바르셀로나는 한창 드림팀으로 리그를 호령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0골을 넣겠다고 호언장담했다.[9] 그리고 진짜로 33경기 30골을 넣어버렸다.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시즌 중반, 자국에서 리우 카니발이 열릴 때가 되자 호마리우는 카니발 축제에 가고 싶다면서 크루이프 감독에게 떼를 썼던 일이 있었다. 아직 치러야 할 경기가 많이 남아 있어서 그의 휴가 요청은 당연히 말이 되지 않았지만, 진심이었는지 헛소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크루이프는 오는 일요일에 있을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하면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엘 클라시코 당일, 호마리우는 놀랍게도 천하의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해트트릭과 어시스트 1개를 기록했고 바르셀로나는 5:0 승리를 거뒀다. 20분 만에 2골을 넣은 호마리우는 크루이프에게 '감독님, 1시간 뒤에 비행기가 출발합니다'라고 교체를 요청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당당히 리우행 비행기를 탔다. 레알 감독이던 호르헤 발다노는 "이건 사기다. 호마리우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선수 아닌가!"라며 탄식했다고.
이렇게 이적하자마자 맹활약했지만, 호마리우는 사생활 문제가 심각했다. 한마디로 술과 여자를 끼고 살았다. 이런 광란의 밤[10]을 보다 못한 요한 크루이프 감독이 잔소리를 하자, "감독 일이나 똑바로 하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골도 넣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사생활과 무관하게 일단 시합에서 꾸준히 골은 넣어주니까 크루이프도 더 이상 강제하지 않고 넘어갔지만,[11] 호마리우가 이렇게 훈련장에서 대놓고 감독을 쌩까며 지시에 따르지 않자 이미 이전부터 크루이프 감독과 스타 플레이어들 간에 잡음이 있어왔던 바르셀로나의 팀 케미는 박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크루이프 감독은 당시 팀내에서 자신을 능가할 올타임 레전드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라우드루프를 호마리우를 기용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벤치에 앉히기 시작했다. 당시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던 라우드루프에 대한 크루이프의 박대는 당시에 많은 비판과 논란을 낳았다. 라우드루프 역시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가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며 분개했다. 이렇게 둘의 갈등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크루이프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라우드루프를 제외시켰다. 라우드루프는 관중석에서 결승전을 지켜보았고 이는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결국 팀 분위기가 작살난 바르셀로나는 1993-94 시즌 라리가 우승을 해내지만 시즌 말미에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4:0으로 역사에 남을 참패를 당하였고, 이후 라우드루프가 복수를 위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드림팀도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에서 첫 시즌에 33경기 30골의 맹활약을 펼쳤고 비록 시즌 마지막 경기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4:0 대패를 당했지만 직후 월드컵에서 나가 맹활약하여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로베르토 바조의 이탈리아를 침몰시키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어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또한 1993-94 시즌과 1994년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통해 그 해 FIFA 올해의 선수도 수상한다. 하지만 월드컵 직후 복귀하여 귀신같은 부진에 빠지게 된다. 1994-95 시즌 전반기에 라리가에서 불과 4골 밖에 넣지 못했다. 그러자 그동안 참아왔던 크루이프도 호마리우를 본격적으로 갈궈대기 시작했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언론에 대고 직설적으로 호마리우를 비난했다. 결국 이에 빡친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의 생활은 너무나 불행하다면서 브라질 귀국을 선언하고 이적을 요구했다. 결국 이적한지 16개월 만인 1995년 1월 바르셀로나는 호마리우와의 계약 해지에 합의했고 호마리우는 브라질로 돌아갔다.
브라질에 돌아와서 CR 플라멩구로 이적했다. 하지만 그 뒤의 클럽 경력은 아래와 같이 순탄치 못했다.
바르사에서 플라멩구로 이적 → 반년 뛰고 발렌시아로 이적 → 반년 뛰고 플라멩구로 임대 → 플라멩구로 완전이적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사고뭉치스런 성격 때문에, 어느 팀으로 옮겨도 끝내 감독이나 동료와 불화를 일으키고 새 둥지를 찾아 떠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결국 1998년에 플라멩구로 복귀한 때를 끝으로 유럽 리그에선 더 이상 호마리우를 볼 수 없었다.
2000년에 친정 CR 바스쿠 다 가마로 돌아왔으며 당해 리그 20골로 득점 2위,[12] 기타 대회에서 50골을 더 넣으며 한 시즌에 70골로 대선배 호베르투 지나미치의 61골을 넘어 브라질 역사상 한 시즌 최다 득점 신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01년에 21골을 넣으며 기어코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이번에는 브라질 리그에서 올해의 팀에 못 들었지만 2년 연속으로 남미 올해의 팀에 포함되었다. 결국 바스쿠에서 다시 부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개인 통산 1000골을 넣기 위해 2003년엔 카타르, 2005년엔 다시 바스쿠, 2006년엔 미국, 호주에서 뛴 경력도 있다. 호주(4경기)와 카타르(3경기)에선 대충 하고 금세 나왔지만 바스쿠에 입단한 해인 2005년에 22골로 리그 2번째 득점왕을 차지하며 역시 바스쿠의 레전드다운 모습을 보여줬고, 미국에선 1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도 차지했다. 그리고 2007년 5월 20일 자칭 1000골을 기록했음을 선언한다. FIFA에서는 1000골을 축하했지만,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유소년 축구나 친선경기 등에서 넣은 골도 포함해서 집계했기 때문이다.[13]
2007년 CR 바스쿠 다 가마[14]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고 2008년 4월 은퇴를 선언했다.
바스쿠 다 가마 시절에는 2000 FIFA 클럽 월드컵에서 맨유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며 3:0으로 완전히 떡실신시킨 적이 있다. 사실 바르셀로나 시절에도 호마리우는 1994-95 챔피언스 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조별 라운드 2경기에서 모두 골을 넣으면서 팀의 1승 1무를 이끈 적이 있었다. 아무튼 천재는 늙어도 천재다. #
그런데 깜짝 복귀를 선언하지 않나, 탈세 혐의로 법정에 서질 않나, 2009년 9월엔 정치인으로 변신한다는 뉴스까지 떴다. 그런가 하면 2012년엔 자기 아들을 방출했다는 이유로 바스쿠의 유소년 코치에게 폭언을 퍼부으면서 1000골 기념으로 세워진 자신의 동상 전복 운동까지 유발하고 있다.[15] 하여간 은퇴한 뒤에도 여전히 떠들썩하다.
2024년 4월, 자신의 아들인 호마이뉴와 같이 뛰는 게 꿈이라면서 아메리카 풋볼 클럽으로 현역 복귀를 선언하였다.
2.2. 국가대표
호마리우는 1988 서울 올림픽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회 득점왕을 차지하지만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목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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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호마리우는 단 한 경기만 출전했다. 실력이야 나무랄 데가 없지만, 이미 팀 분위기를 망치는 놈으로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선 1992년에 감독 디스를 해서 아예 뽑히지도 못할 뻔했으나, 브라질이 남미 예선에서 볼리비아에게 사상 처음으로 패배하는 등 졸전을 벌이자 감독이 백기를 들고 긴급 호출하여 비로소 참가할 수 있었다.
1992년에 국가대표에서 탈락했다가, 1993년에 다시 발탁된 이후 인터뷰에서 "복귀전에서 2골을 넣겠다"라고 호언장담하고 그대로 실천하면서 브라질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다. 역시 호마리우다운 일화였다. #
이후 호마리우와 베베투의 투톱이 이끄는 브라질 대표팀은 첫 라운드부터 승승장구했고, 호마리우는 단연 최고의 활약을 한다. 매경기 골 아니면 어시스트나 페널티킥 획득 등, 폭발적이면서도 능구렁이 같은 연계와 드리블 돌파 후의 패스나 피니시로서 호마리우는 대회 내내 '브라질의 마라도나'라고까지 불렸다.
|
이 대회 호마리우의 활약을 스탯 위주로만 요약한다면,
1차전 러시아전 - 결승골, 페널티킥 유도
2차전 카메룬전 - 결승골, 드리블로 베베투의 추가골 기점
3차전 스웨덴전 - 동점골
16강 미국전 - 드리블로 베베투의 결승골 어시스트
8강 네덜란드전 - 선제골
4강 스웨덴전 - 결승골
결승 이탈리아전 - 침묵
즉 결승전 이탈리아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결승골과 동점골 및 결승골 어시스트 같이 순도도 만점인 활약도였다. 물론 공격 포인트 이외의 플레이에서는 더 기여도가 높았는데 당시 브라질 주전 플레이메이커였던 10번 하이의 부진으로 호마리우가 2선에서 플레이메이킹까지 도맡으며 공격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결승에서는 로베르토 바조가 이끄는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다. 승부차기에선 2번 키커로 나와서 pk 선방의 달인인 잔루카 팔리우카를 가볍게 속이고 성공시킨다. 가끔 호마리우가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수비진에 막혀서 부진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경기력은 비슷했으나 스탯이 없는 이 대회의 유일한 경기여서 그런 말이 나오는 듯.[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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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당시 최고의 선수로 등극한 21살의 호나우두와 콤비를 이루며 또다시 코파 아메리카의 우승을 이끈다. 호마리우는 대회 3골 기록. 당시 호마리우와 호나우두는 신구 조화를 완벽히 이루면서 스타일 면에서도 시너지가 폭발하며 1997 컨페더레이션스컵까지도 모두 휩쓸어버린다.
특히 결승전은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동시에 해트트릭을 하면서 호주를 6:0으로 아주 박살을 낸다. 당시 호나우두는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으로 이미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세계 최고의 선수였는데 그런 호나우두와 함께, 그것도 30대의 나이로 경기를 뛰면서 전혀 밀리지 않았던 선수가 바로 호마리우다.
당시 브라질의 나이키 투어가 이 둘을 필두로 한 마케팅이 절정에 오른 시기. #
1998 프랑스 월드컵 시작 전에는 호나우두와 같이 득점왕, 또는 MVP 후보 1, 2위에 오를 정도로 사람들의 큰 기대를 모았고 데니스 베르캄프,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스타 선수들에게 굴욕 아닌 굴욕을 주었다. 호마리우 또한 "1998 프랑스 월드컵은 나와 호나우두의 대회가 될 것이다"라며 호언장담했지만 대회 4달 전에 큰 부상을 당하며 결국 최종 엔트리에 뽑히지 못한다. 호마리우의 자리에는 과거 투톱으로 발을 맞춘 동료이자 앙숙이었던 베베투가 발탁되었고 34세의 베베투는 이 대회에서 전경기 출전하여 3골 2도움을 기록하며 선수생활의 황혼을 장식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결국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 호나우두의 발작 증세로 인한 부진으로 3:0으로 완패하여 준우승에 그치게 되고 호마리우의 공백이 아쉽게 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호마리우는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브라질 대표팀은 전년도 컨페더레이션컵 부진으로 감독을 경질하고도, 여전히 남미 예선에서 헤매서 호마리우를 발탁하라는 여론이 거셌다. 방탕한 사생활과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원흉이었던 노장 호마리우의 발탁은 브라질로서도 모험이었으나, 당시 브라질의 루솀부르구 감독은 결국 호마리우를 발탁하는 결단을 내렸다. 호마리우는 발탁되자마자 첫경기에서 3골, 두 번째 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대파하는 주역이 되었다. #
그러나 결국 루솀부르구 감독도 경질되고 새로운 감독이 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는 호마리우를 2경기 정도 기용하고 끝내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호마리우는 TV에 출연해 국가대표 발탁을 호소하는 언플을 해대고,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서 권했지만 스콜라리 감독은 끝내 최종 엔트리에 뽑지 않았다.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스콜라리 감독 성향이 팀 분위기를 망치는 선수는 질색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실 브라질 국민이야 극성이었지만, 타국의 반응은 '호마리우 아직 은퇴 안했냐' 정도였다. 세계의 관심사는 '호나우두가 얼마나 제 컨디션을 발휘하는가'였고, 호마리우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 오히려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한 마르시오 아모로소의 탈락이 논란거리였다. 결국 2005년 39세의 나이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축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골을 넣는 감각 만큼은 손에 꼽을 정도로 괴물 같은 결정력을 가진 선수였다. 공격수마다 장기가 있고 개성이 달라 딱히 어느 누가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호마리우를 꼽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심지어, 그 자존심이 강한 라이벌 국가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레전드 디에고 마라도나까지 그를 극찬했을 정도면 말 다한 것이다.[19]그의 불성실한 자세나 축구관이 재능에 걸맞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비상식적인 타이밍에 여유만만하게 톡 차서 골대 안으로 공을 밀어넣고 돌아서는 모습은 뭐라하기 어렵지만 그 불량함과 어울리는 데가 있었다. 한 마디로 축구를 정말 쉽게 했다. 트래핑은 당대 최고를 논할 만했으며 볼 컨트롤도 무척 뛰어났고 드리블을 비롯한 스피드와 균형감각, 체력까지도 매우 뛰어났다. 스트라이커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재능이 S급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다.
이렇게 제반조건이 뛰어난 선수라도 활용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호마리우는 크루이프 말대로 골 에어리어 안, 즉 골을 노리는 상황에서는 재능으로 똘똘 뭉친 모습을 보여줬다. 호마리우는 그의 장기인 포킹, 소위 꼬발로 공을 툭 차서 넣는데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일반적인 슈팅 역시 뛰어났으며 양발로 모든 옵션들을 자유자재로 선택해서 쑥쑥 집어넣곤 했다. 이따금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골을 넣는 게 어이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주로 골을 넣는 패턴을 하나 설명하면 공을 몰고 슬금슬금하다가 치달을 한 번 한다. 수비수는 당연히 호마리우의 움직임을 보고 따라 움직여야 되기 때문에 그 찰나의 시간 동안 호마리우는 수비수보다 앞서게 되고 슛각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꼬발로 툭 차든 세게 차든 골키퍼 보고 찍어서 차든 골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패턴이 많았다. 참고로 수비수와 경합을 하면 자유로운 슈팅이 힘들고 골키퍼가 슛각을 제한시킬 때 아무렇게나 슛을 하면 공격권이 넘어가기 쉽다. 호마리우처럼 잘 차야 한다. 즉 간단하게 돌파-슛-골이라는 말도 안되는 공식을 가졌던 선수였다.
애초에 호마리우는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수비수가 지나치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호마리우가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했던 경기에서 넣은 첫 골을 보면 가까이 붙은 수비수를 한 번의 터치 후 달려서 벗겨내고 툭 차서 쉽게 골을 넣는다. 수 싸움이 뛰어나 움직임이 수비수보다 한 템포 빨랐고 스피드, 볼 컨트롤까지 좋았다.
그러다 보니 빠르기만 하거나 몸싸움만 잘해서는 그를 막아낼 수 없었고 둘 다 뛰어난 수비수(바레시, 말디니)도 뚫어버리는, 글자 그대로 사기 유닛 그 자체였다. 이렇게 천부적인 재능으로 한 순간 열린 슛각을 만들고 어떤 타이밍에 슛을 해야 가장 효과적인지를 매우 잘 알고 잘 찼다. 또한 헤더 역시 상황에 맞게 방향을 크게 바꾸는 헤더, 방향을 살짝 바꾸는 헤더, 툭 띄우는 헤더, 바닥에 찍는 헤더 등을 선택해 가며 간단하게 넣었다. 비록 키는 170이 안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수의 사각이나 빈 공간을 잘라 들어가며 경합을 하지 않거나 적게 하는 식으로 단신 스트라이커치고 꽤 쏠쏠하게 헤딩골을 넣었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축구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며 벙찐 골키퍼와 수비수를 비웃듯이 도발하는 여유만만한 골 셀레브레이션은 덤이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슈팅 상황을 설계하고 타이밍을 쥐고 흔드는 능력은 정말 만화에나 나올 것처럼 초현실적인 부분이 있었다.
여기까지면 마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만 강력한 선수 같지만,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지나치게 강했을 뿐이고 바깥에서 여유롭게 패스를 뿌리고 받아 드리블로 돌파하는 능력도 있었다. 오히려 골이나 개인기 위주의 하이라이트와는 달리, 박스 아래 2선에서도 방향전환과 연계 플레이로 주변 팀원들의 플레이도 살리면서 전진하는 능력이 발군이다.
소위 바르셀로나 전술에서 메시의 제로톱의 역할을 호마리우는 당시 브라질과 바르셀로나에서 이미 시전한 셈. 사실 작지만 강하고 다재다능한 스트라이커라는 측면에서 호마리우와 가장 플레이 스타일이 유사한 선수는 메시보다는 아구에로지만, 이 아구에로조차 호마리우와 비교하면 축구를 힘들게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참고로 게으르고 불성실하다는 것에 대해선 오해의 소지도 약간 있는게, 호마리우는 감독과 코치의 호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 단위 훈련은 죽도록 싫어했지만 혼자서 자율적으로 몸 관리하거나 스킬 연습하는 것은 꽤 성실했던 선수였다. 관리 실패로 일찍 저문 브라질 출신 후배들인 호나우지뉴와 호나우두가 관리에 실패했을 당시 똥배가 튀어나온 모습으로[20] 축구계를 놀라게 했지만 호마리우는 팀 훈련은 개판쳤어도 자기 개인 몸 관리는 꼬박꼬박 아침 일찍 일어나서 트레이닝하면서 챙기는 선수였기에 그 때문에 호마리우는 호나우지뉴, 호나우두와 달리 늘 프로 축구선수에 걸맞은 탄력적인 몸매를 유지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CR 바스쿠 다 가마 (1985~1988, 2000~2002, 2005~2006, 2007)
- 세리 A: 2000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87, 1988
- 코파 메르코수르: 2000
- PSV 에인트호번 (1988~1993)
- 에레디비시: 1988-89, 1990-91, 1991-92
- KNVB 베이커: 1988-89, 1989-90
- 요한 크루이프 스할: 1992
- FC 바르셀로나 (1993~1995)
- 라리가: 1993-94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4
- CR 플라멩구 (1995~1996, 1997, 1998~1999)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96, 1999
- 코파 메르코수르: 1999
- 알 사드 SC (2003)
- 카타르컵: 2003
- 아메리카 풋볼 클럽 (2009)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세리 B1: 2009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94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997
- 코파 아메리카: 1989, 1997
- 올림픽 은메달: 1988[21]
- 브라질 U-20 축구 국가대표팀
- 남미 U-20 챔피언십: 1985
4.2. 개인 수상
- FIFA 올해의 선수: 1994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00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5, 2000, 2001
- FIFA 월드컵 골든볼: 1994
-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9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볼: 1997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골든슈: 1997
- FIFA 클럽 월드컵 브론즈볼: 2000
- FIFA 클럽 월드컵 득점왕: 2000
- FIFA 클럽 월드컵 올스타팀: 2000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89-90, 1992-93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89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88-89, 1989-90, 1990-91
- KNVB 베이커 득점왕: 1990-91
- 라리가 득점왕: 1993-94
- CONCACAF 골드컵 베스트 XI: 1998
- 올림픽 남자 축구 득점왕: 1988
- 남미 U-20 챔피언십 득점왕: 1985
- 볼라 지 오우루: 2000
- 볼라 지 프라타: 2000, 2001, 2005
- 세리 A 득점왕: 2001, 2005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1986, 1987, 1996, 1997, 1998, 1999, 2000
- 코파 두 브라질 득점왕: 1998, 1999
- 토르네이루 리우-상파울루 득점왕: 1997, 2000
- USL 퍼스트 디비전 MVP: 2006
- USL 퍼스트 디비전 득점왕: 2006
- 바스쿠 다 가마 올해의 선수: 1987, 1988, 2000, 2001
- 옹즈도르: 1994
- 옹즈 드 옹즈: 1993, 1994
- RSSSF 올해의 선수: 1994
- 트로페오 EFE: 1993-94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94
- 골든풋: 2007
- FIFA 100: 2004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F 6위)
- 글로브 사커 어워즈 플레이어 커리어 어워드: 2022
5. 정계 활동
"내가 감독이 될 거냐고? 웃기는 소리,
난 아마도 나 같은 놈을 절대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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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리우는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부터 정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더 이상 축구계에서 활동하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살고 있다.
오히려 2009년 자신의 아파트를 팔아 빚을 청산하는 김에
2014 브라질 월드컵 개최 당시에는 이에 따른 무리한 경제적 투자를 비난하기도 했다. 덕분에 비난을 삼가고 무조건 개최만 하면 된다라는 발언을 한 펠레를 두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우상으로 생각하던 호나우두와도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그래도 호나우두와는 '오해가 있었다'라며 좋게 넘어갔다.
그런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4강전에서 독일에게 1:7이라는 대패를 기록하면서 월드컵 개최 지지 정계인사들이 알게 모르게 비난을 당하는 것과 달리, 애초에 개최를 부정적으로 보던 호마리우는 반사이익을 얻게 되었다는 평이다. 물론 호마리우도 조국이 저렇게 대패하는 것을 결코 기분좋게 바라봤을 턱은 없을 테지만. 여하튼 2014년 선거에서도 6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선 리우데자네이루 주지사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지만 득표율 8.6%로 4위에 그치며 낙선하였다.
2022년 브라질 대통령 선거 국면에선 진영을 옮겨 자유당으로 이적해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지지했다. 다만 보우소나루가 항목에도 있듯 구설수가 많은 인물이라 논란을 의식한듯 호마리우 왈 "그는 가족을 옹호하고, 그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는 낙태와 마약의 합법화에[22] 반대하며, 이는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일치한다. 그는 자발적이며, 우리 모두와 같은 문제와 결함이 있지만, 발전하는 브라질을 보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호마리우와 함께 브라질 국대를 이끈 동료였던 베베투는 노동자당의 룰라 다 시우바를 지지하면서 199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었던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사실 둘은 축구 콤비로 유명하지만 국대 시절부터 개인적인 사이는 나빴다고 알려져있다. 젠틀하고 온화한 성격의 베베투와 달리 좀 안좋게 보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기질이 있는 호마리우는 성격부터 영 딴판이었다. 오죽하면 비행기나 버스를 타도 서로 옆자리에 쟤는 앉히지 말라고 할 정도였는데, 정작 월드컵에선 역대 콤비 1위에 선정되어도 무리가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서로 보조해주며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까지 일궈낸다. 그래서 이때 잠깐 화해했다가 월드컵이 끝나고 다시 멀어진거 아니냐는 설도 있다.
6. 여담
- 호마리우가 활약하던 당시 국내에선 로마리오로 불렸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단 잘못 부른 셈인데, 애당초 인터넷이 오늘날처럼 활성화된 시절도 아니라 모든 축구기사는 '수비불안'과 '문전처리 미숙'[23] 두 마디로 퉁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도 부족하던 시기였고, 연장선상에서 외국어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져 94년 월드컵 중계도 공식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로마리우인데도 불구하고 로마리오로 칭해질 정도였다.[24] 이후 국가별 발음의 차이와 표기법에 대한 이해도가 늘어난 21세기가 되어서야 호마리우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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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자라며 축구선수가 될 수 있었던지라
악동 이미지와 안 어울리게효심이 극진한 걸로도 유명했다. 이중 유명한 일화로 미국 월드컵 직전이었던 1994년 5월 5일, 호마리우 아버지의 납치 소동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납치당했단 소식을 듣자마자 호마리우는 곧장 기자회견을 열어 "아버지가 납치당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정신적으로 버틸 수 없어서 '축구선수를 은퇴'하겠다."라는 브라질 전 국민이 충격을 먹을 인터뷰를 날렸다.[25] 당연하게도 축구에 대한 자부심 하나는 굉장하던 브라질은 호마리우의 은퇴를 막기 위해서 정부와 갱단을 비롯한 모든 합법/불법 조직들이 일치단결해 납치범들과 호마리우의 아버지를 찾아 전국 곳곳을 들쑤시게 되었고 결국 납치범들은 이에 기겁해 기자회견으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스스로 호마리우의 아버지를 풀어줬다.(...) 아버지가 돌아온 뒤 호마리우는 은퇴를 번복하고 1994년 월드컵에서 최고의 파트너 베베투와 함께 맹활약을 보이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고 포포투 인터뷰에서도 "존경하는 축구 영웅 같은 건 없었고, 있다면 오직 우리 아빠"라고 하며 아버지에 대해 지극정성임을 드러냈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진실 혹은 거짓에서 다루기도 했다. 내용 상 재미를 위해 약간의 각색이 있긴 하지만[26] 결론은 진실.[27]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최고의 선수에서 5위, 공격수 3위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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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루니 닮았단 소리도 듣는다. 사진은 2015년 국회의원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선수 시절보다 멋있어졌다는 평이 있다.
- 2010년대 들어 여자친구와 열애중이라는 기사가 떴는데, 문제는 새로운 애인이 호마리우 딸의 친구라고(...). 나이차가 19세, 29세 기사마다 좀 다른데 어느 쪽이든 쇼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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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앞두고
가브리에우 제주스에게
섹스는 월드컵 전에 많이 하고 월드컵에서는 경기에만 100% 집중할 것을 당부했다.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다기사 이에 대해 축구 팬들은 호마리우다운(...) 조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 FC 바르셀로나 시절 골대 맞추기 내기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함께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게 참교육을 당한 적이 있다.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호마리우가 서로 팀의 넘버원이라고 유치한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보던 크루이프는 전설적인 공격수였던 자신이 최고라며 둘 싸움에 참전하는 이 시대의 참스승 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서로 공을 10번 차서 크로스바 맞추는 내기를 하기로 했고, 다른 선수들도 간만에 흥을 돋울 거리가 생기니 승부와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그리고 결과는 스토이치코프 2번, 호마리우가 3번. 이에 호마리우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자 크루이프는 단숨에 6번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호마리우는 겁도 없이 인정할 수 없다고 개겼고, 가만히 듣던 크루이프는 갑자기 왼발로 공을 냅다 갈겼는데 그게 그대로 크로스바에 적중했으며, 그걸로 호마리우는 바로 아닥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8]
7. 어록
그라운드에서 뭘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데 연습을 왜 해야 하지?
- 호마리우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어록이다. 실제로 저 발언처럼 게으른 천재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 호마리우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어록이다. 실제로 저 발언처럼 게으른 천재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바르사 입단 후 93-94 시즌 개막 전) 올 시즌은 리그에서 30골 이상을 기록하겠다.
실제로 30골을 기록하고 리그 득점왕을 수상.
실제로 30골을 기록하고 리그 득점왕을 수상.
(
1994년 미국 월드컵 개막 전) 이 월드컵은 내 대회가 될 것이다.
실제로 우승하고 골든볼을 수상.
실제로 우승하고 골든볼을 수상.
저는
호나우두보다 골에 대한 눈이 더 뛰어납니다. 그리고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위치 선정도 그보다 뛰어나죠.
에드문두와 함께 뛰지 않는 게 바로 내 꿈이다.
에드문두는 바스쿠 다 가마에서 호마리우와 투톱 공격 콤비.
에드문두는 바스쿠 다 가마에서 호마리우와 투톱 공격 콤비.
신은 나의 골들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시기 위해 나를 창조하셨다.
(호마리우가 거의 모든 대회에서 득점 선두를 달릴 당시 여러 나이트클럽에서 목격된 것을 묻는 질문에) 나는 너무 많이 자면 득점을 못 올린다. 그게 내가 밤과 친구인 이유다.
내가 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밤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 낮에는 안타깝게도 모든 걸 봐야 한다.
난 내가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내가 뛰는 것에 대해 행복해야 한다.
(
펠레가 언론에다 호마리우의 은퇴를 종용하자) 입 다문 펠레는 시인이다. 필드 위의 그는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이고… 하지만 바깥에서의 그는 입에 축구화를 처박아야 한다.
나는 돈과 같다. 사람들은 결국 날 좋아하게 된다.
득점자는 언제나 칭찬 받아야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내가 찬 공은 우리 엄마도 막을 수 있는 슛이었다.
내 후계자는 보이지 않는다. 펠레는 오직 펠레 하나였고, 마라도나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호마리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페널티 에어리어에서라면 내가 역대 최고라고 생각한다.
내가 감독이 될 거냐고? 웃기는 소리.
난 아마도 나 같은 놈을 절대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운동선수였던 적이 없다. 만약 내가 훈련을 제대로 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더욱 많은 골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만큼 행복하진 않았겠지.
8. 호마리우에 대한 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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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마리우가 아르헨티나 선수였다면 마라도나의 자리는 호마리우가 대신 차지했을 것이다.
펠레
펠레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호마리우는 1986년 월드컵의 마라도나와 같은 영향력을 가졌다. 두 선수 모두 거의 혼자의 힘으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제 마라도나가 은퇴했으니 그가 세계 최고의 선수이다.
마리우 자갈루
마리우 자갈루
침대 위의 황제.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의 엄청난 팬이었다. 월드컵 당시 미국에서 그는 호마리우를 따라다니는데 온 시간을 보냈다. 호마리우가 내게 찾아와서 '이 놈 좀 어떻게 해 봐요. 나를 가만 놔두질 않아' 라며 투덜거릴 정도였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의 엄청난 팬이었다. 월드컵 당시 미국에서 그는 호마리우를 따라다니는데 온 시간을 보냈다. 호마리우가 내게 찾아와서 '이 놈 좀 어떻게 해 봐요. 나를 가만 놔두질 않아' 라며 투덜거릴 정도였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그는 우표만한 크기의 좁은 공간에서 모든 것을 해낸다.
둥가
둥가
골 에어리어의 천재. 그는 열심히 하지 않고도 위대한 일을 해내는 드문 능력을 지녔다.
브라질은 그가 없이는 결코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지도한 최고의 선수? 바로 호마리우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그에게서 무엇이든지 기대할 수 있었다. 그의 테크닉은 실로 비범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골을 터뜨렸다. 흥미롭게도 그가 넣은 대부분의 골들은 발가락 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호마리우가 하는 짓은 꼭 어린아이 같다. 이 놈은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요한 크루이프
브라질은 그가 없이는 결코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지도한 최고의 선수? 바로 호마리우가 되어야 한다. 당신은 그에게서 무엇이든지 기대할 수 있었다. 그의 테크닉은 실로 비범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골을 터뜨렸다. 흥미롭게도 그가 넣은 대부분의 골들은 발가락 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호마리우가 하는 짓은 꼭 어린아이 같다. 이 놈은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요한 크루이프
그는 내가 함께 일해온 선수 중 가장 흥미로운 선수이다. 그는 만약 내가 큰 경기에 앞서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안심해, 코치. 내가 득점해서 우리 팀이 이길 테니까.' 놀라운 것은 그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십중팔구 그가 골을 넣고 팀이 정말 승리했다는 것이다.
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
그의 컨디션이 최상이면 그는 막기가 불가능하다. 그 유례가 드문 선수. 심지어 2000년 당시 클럽 월드컵에서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테크닉과 골을 향한 눈을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벌써 그의 전성기를 지난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야프 스탐
야프 스탐
이 녀석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아마 그의 태도가 일으킨 감독들과의 문제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는 이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야. 그는 엄청나게 빨랐고 선수들을 제치며 드리블할 수 있었고 피니쉬에 관해서라면 둘째라면 서러웠지. 또 그는 수비수들이 바보로 보일만큼 공을 뺏어내기가 어려웠어. 유일무이한 재능이야.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믿을 수 없는 피니셔.
그와 같은 스트라이커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으며 그는 재고의 여지없이 내 드림팀에 포함될 것이다.[31]
내가 본 최고의 선수? 반 바스텐이나 호마리우 중 하나겠지.[32]
디에고 마라도나
그와 같은 스트라이커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으며 그는 재고의 여지없이 내 드림팀에 포함될 것이다.[31]
내가 본 최고의 선수? 반 바스텐이나 호마리우 중 하나겠지.[32]
디에고 마라도나
(여태까지 함께했던 최고의 파트너로 호마리우를 꼽으며) 그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내 패스를 활용할 수 없었다.
미카엘 라우드루프
미카엘 라우드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 그는 종종 경기 중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골 기록을 보면 도저히 논쟁이 불가능했지. 그는 무에서 골을 창조해내는 선수야. 그의 피니쉬는 비범했고 나는 종종 그가 탁월한 수비수들을 시체를 지나는 것 같이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 오늘날 그와 같은 선수는 없어.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그에게 한 뼘의 공간만 내줘봐. 아마 그는 수비수들을 돌아버리게 할 걸? 그는 예외적인 테크닉과 10-15미터 내에서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지녔어. 그는 스피드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고 침착하게 골문을 가를 수 있었어. 모든 게 그에겐 너무 쉬웠지. 즐겨라, 즐기게 놔둬라. 그게 그의 철학이었지. 대단한 개성이야.
알베르트 페레르
알베르트 페레르
이 길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던 것이 바로 그를 TV에서 보던 1994년이었다.
호나우지뉴
호나우지뉴
빠르고 기술적이며 골 앞에서 치명적인, 마크하는 것이 고통 그 자체인 선수. 스티브 브루스와 게리 팔리스터는 그와 같이 발 빠른 선수와는 맞서본 적이 없다고 했어.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의 그날 밤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지. 그는 2골을 넣었고 우리를 갈가리 찢어놨어.
데니스 어윈
데니스 어윈
호마리우는 아마 내가 대적한 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선수였을 것이다.
게리 네빌
게리 네빌
그는 마치 번개와 같았다. 정말 보고서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호마리우는 당신이 알아채기도 전에
크루이프 턴을 하고 지나갔다. 그는 상대 선수들을 시체처럼 보이게 제치고 결국 골문을 가르곤 했다. 그는 진정한 오만함과 으스댐을 지녔었다.
라이언 긱스
라이언 긱스
9. 같이 보기
1
타파레우 · 2
조르지뉴 · 3
히카르두 호샤 · 4
호나우당 · 5
마우로 실바 · 6
브랑쿠 · 7
베베투 · 8
둥가 ⓒ · 9
지뉴 10 하이 · 11 호마리우 · 12 제티 · 13 아우다이르 · 14 카푸 · 15 마르시우 산투스 · 16 레오나르두 · 17 마지뉴 18 파울루 세르지우 · 19 뮐레르 · 20 호나우두 · 21 비올라 · 22 히날디 |
마리우 자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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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네트 안데르손과 공동 수상.
[2]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
[3]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4위.
[4]
FIFA 공식 역대 득점 3위.
[5]
리그만 저렇고 기타 대회까지 합치면 149경기 128골로 무려 100득점이 넘는다.
[6]
1차전 원정에서는 0:1로 패배한터라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7]
이전 버전에선 25분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했다고 잘못 서술되어 있었으나, 공식 기록은 46분, 49분, 86분으로 사실이 아니다.
#
[8]
후에 히딩크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에 부임했을 때
안정환에게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훈련시켰다고 한다.
[9]
이 때 드림팀이 유명한 원조(1기) 드림팀이다. 찾아보면 알겠지만 선수진이 상당히 화려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다시피 3기 드림팀이라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의 감독이었던 과르디올라가 바로 이 1기 드림팀 멤버다.
[10]
호마리우 자신도 밤은 언제나 나의 편이라는 말을 했다.
[11]
이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호마리우 한명으로도 골치가 꽤 아팠을텐데 또 다른 또라이이자 'Crazy Boy'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도 있었다.
2010년대로 비유하자면
안토니오 카사노와
마리오 발로텔리가 한 팀에 있는 거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호마리우와 스토이치코프 외에도 게으른 천재
미카엘 라우드루프까지 있었다.
[12]
리그 MVP인 볼라 지 오우루와 베스트 11인 볼라 지 프라타에 선정되고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와 남미 올해의 팀도 수상하였다.
[13]
사실 유스 골기록을 정식으로 넣기 좀 그런게, 유스 경기는 수준차이가 나면 스코어가 넘사벽으로 나기 십상이다.
메시 같은 경우는 유스에서만 900골을 넣었다. 90년생인
보얀 크르키치도 유스를 비롯한 비공식 기록을 합치면 1000골 넘게 넣었다.
[14]
이 시기 호마리우는 감독 겸 선수로도 뛰었다.
[15]
사건 이후 당시 회장이던 대선배
호베르투 지나미치와 갈등이 생긴 것도 원인이었다. 제아무리 호마리우가 바스쿠의 레전드라 하지만 바스쿠 그 자체로 평가받는 지나미치와 관계가 틀어졌으니 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16]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나오지 못했지만, 스페셜 하나 만들고 간
프랑코 바레시가 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된다.
[17]
1995년은
조지 웨아가 수상했다.
[18]
참고로 가장 많이 받은 선수는
펠레로 무려 7회나 선정되었다.
[19]
다만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인이긴 해도 축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브라질 선수들의 뛰어난 퍼포먼스 등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가끔씩 펠레와 서로 논쟁이 오고 가기는 하지만 호나우지뉴와 만나 사진을 찍거나 호나우두에 대해서는 "부상만 아니었으면 나를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하는 등 국민적인 감정과 축구는 별개로 두는 듯 하다.
[20]
호나우두의 경우 갑상선 문제도 있었지만, 갑상선은 2007년쯤 발병했고 호나우두가 호돈 소리 듣게 된건 이미 2000년대 초반 레알 이적 후 얼마 안된 시점부터였다. 즉, 갑상선 이전부터 자기관리 안해서 살이 많이 쪄있는 상태였고, 갑상선까지 발병하자 완전히 임산부 수준으로 똥배가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21]
이때가 A매치로 인정받은 마지막
올림픽 축구 대회였다.
[22]
대마초 합법화를 말하는걸로 보인다.
[23]
'골 결정력 부족'은 2000년 즈음부터 많이 쓰인 표현이다.
[24]
비슷하게 90년대 후반
호나우두도 국내 유명 일간지에서 영어식으로 발음한 로날도로 불렸다.
[25]
상술한대로 이 때는 월드컵 개최까지 단 며칠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당시 호마리우는 주전급을 넘어 브라질 팀의 에이스로 여겨지던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호마리우의 월드컵 불참은 개인의 퍼포먼스로든 팀의 전력면으로든 여러모로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26]
아버지가 어린 시절 이혼해 자신을 양육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이 세계적인 선수가 되자 자기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다녀 사이가 나빴다는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있었다.
[27]
박항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2018년에 캄보디아로 휴가를 오자 납치를 당했지만 납치한 사람들이 박항서를 알아보고 다시 공항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28]
그리고 후일담. 훗날 크루이프는 이 일화를 밝히면서 마지막에 맞춘 슛은 사실 뽀록이었다고 고백했다.
[29]
웃기게도 요한 크루이프 역시 호마리우와 비슷하게 게으른 천재였다.
[30]
물론 지쿠가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 했다고 지쿠를 호마리우보다 낮게 평가하는 이는 별로 없다. 애초에 괴물급이 즐비한 브라질에서도
펠레,
호나우두,
가린샤 다음으로 평가될 정도다.
[31]
자서전에서
[32]
Placar와의 인터뷰에서
분류
- 1966년 출생
- 리우데자네이루 출신 인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 공격수
- 브라질의 축구감독
- 브라질의 남성 정치인
- 운동선수 출신 정치인
-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 CR 바스쿠 다 가마/은퇴, 이적
- PSV 에인트호번/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
- CR 플라멩구/은퇴, 이적
- 발렌시아 CF/은퇴, 이적
- 플루미넨시 FC/은퇴, 이적
- 알 사드 SC/은퇴, 이적
- 마이애미 FC/은퇴, 이적
-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아메리카 FC/은퇴, 이적
- CR 바스쿠 다 가마/역대 감독
- 선수 겸 감독/축구
- 브라질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 1987 코파 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참가 선수
- 1989 코파 아메리카 브라질 참가 선수
- 1997 코파 아메리카 볼리비아 참가 선수
- 브라질의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
- 1998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
- 브라질의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 1997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사우디아라비아 참가 선수
- 브라질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옹즈도르 수상자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FIFA 월드컵 골든볼 수상자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985년 데뷔
- 2009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