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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의 민족 정체성을 보유하면서, 브라질의 시민권을 보유하는 사람을 말한다.2. 역사
브라질 식민지가 막 처음 개발되던 16세기 당시 포르투갈은 이웃나라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자국 내 잔류해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종교재판을 벌이고 이들을 박해하였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이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 유대인 마름들이 무슬림 지주들을 대신하여 기독교인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거두었고,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증오가 유대인들에게로도 향했기 때문이었다.다른 한편으로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은 인구 1백만여 명 정도의 소국이었고, 해외로 식민지를 확대하는 와중에 인력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한해서는 종교 박해가 적은 편이었다. 유럽 본토에서 몰래 유대교를 믿는게 발각되는 화형을 당하거나 재산을 몰수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식민지 내에서는 같은 죄목으로 화형이나 재산 완전 몰수 같은 극단적인 제재을 받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투옥당하는 선에 그쳤다. 이러한 연유로 이 당시 브라질로 이주한 유대인의 대부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종교 재판을 피해 온 세파르딤이었다. 물론 포르투갈에서 식민지 내에서 유대교를 관용한 것은 아니었기에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일가족이 이민한 유대인들은 명목상으로 기독교인으로 위장하고 이주하였고, 식민지 내에서도 공식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포르투갈의 유대인들은 종교재판의 박해를 받아 재산을 빼앗기고 브라질로 추방되었는데 이들은 식민지에 원래 압송되어 살던 흉악범들과 매춘부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 일종의 질서와 산업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들에게
사탕수수 경작법을 가르쳤다. 이렇듯 상이한 모든 경우에 아메리카에 사람이 살고 농사를 짓게 한 것은 유럽 정부의 지혜와 정책이 아닌 무질서와 불의였다.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저
국부론 / 애덤 스미스 저
이들 포르투갈 유대인들은 브라질에 이주한 이후에는 식민지에서 농장 경영주 지주로서 원주민들이나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지주로서 윤택하게 살게 되는데, 유럽에서는 사회적 소수자에 가난한 소상인 계층이던 이들이 포르투갈 식민지 주류 계층으로 올라서면서 브라질 상류 사회가 연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결국 이들의 후손들은 세대가 지나면서 유대교 교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가톨릭 사회와 완전히 동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오늘날 브라질 유대인들의 직계 기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민 1~2세대들의 경우 몰래나마 엄격하게 유대교 율법을 준수하였으나, 몇 세대를 거치며 완전히 가톨릭화되었기 때문이다.
브라질 식민지는 포르투갈 본토에 비해서 덜했다 뿐이지 반유대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포르투갈 종교재판소는 포르투갈 본토에서 브라질, 카보베르데, 고아를 포함한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콘베르소[1]들이 다시 유대교로 원복하는지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브라질 식민지의 포르투갈인 지주들은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유대인이나 하는 하찮고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기피하였고, 농장 내 서기 일은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 중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알던 사람을 뽑아서, 새로 포르투갈어를 가르친 후에 대신 시켰다. 브라질에서 유대교 종교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금지는 1821년까지 이어졌다.
물론 브라질 영토 내 모든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으로 위장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브라질 북부가 네덜란드 영토였던 시절 네덜란드가 유대교를 비교적 관용했던 영향으로 17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통치 기간 동안오늘날 브라질 땅에서 최초로 공식적인 시나고그가 세워지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시나고그인 카할 주르 이스라엘 시나고그를 1636년에 헤시페에 세웠다.
2.1. 브라질 독립 이후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1824년 최초의 브라질 헌법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19세기 브라질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커뮤니티를 공식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브라질에 체류하던 유대교 신도 인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 동유럽과 서아시아 발 유대인들의 대량 이민에도 불구, 공식 통계상 약 7,000여 명 규모로 집계된 점을 볼 때 브라질 사회 역시 반유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미 1810년부터 일부 모로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으로 위장한 상태에서 포르투갈령 브라질에 입국하여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생산된 고무를 수출하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자, 이들이 시나고그를 공식적으로 다시 운영하면서 브라질의 유대교 사회는 일단 공식적으로 다시 부활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브라질에는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대개 러시아 제국 내 포그롬을 피해 이주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들로, 오늘날 기준으로는 리투아니아계 브라질인, 폴란드계 브라질인, 러시아계 브라질인 등으로 이중삼중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당시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브라질이라는 국가가 다소 생소했는데도 불구 1867년을 시작으로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이민은 나름 활발했던 편이었는데,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조직폭력배들이 포그롬을 피해 해외 이주를 희망하는 유대인 중 어린 소녀들을 골라서 사기 인신매매를 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 해당 현상은 포그롬이 반유대주의를 낳고, 포그롬에 희생된 유대인 중 사회적 강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였는데, 이들 갱단은 포그롬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여 해외로 인신매매될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 여성들 그중에서도 농촌의 빈곤 계층을 주로 노렸기 때문이었다.[2]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갓 입항한 피해자들은 마치 중세의 노예 시장 비슷하게 자신들을 데려가려는 포주들 혹은 하인을 찾는 부유층들 앞에서 알몸으로 행진하며 치아의 상태 등등을 검사받아야 했고( 스페인어) 브라질의 여타 유대인들은 이렇게 인신매매된 여성들과 같은 시나고그나 유대교도 묘지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들은 별개의 시나고그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한 편 남미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인신매매 관련한 언급은 미국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반유대주의적인 목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 편이다. 참조
이런 인신매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 여성을 뜻하는 이디시어/포르투갈어 단어 polaca가 리우 데 자네이루와 상파울루에서 부정적인 쪽으로 사용되자,[3] 브라질 대사관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넣었고, 브라질에서 폴란드인들을 polonesa/polonês으로 바꿔 부르도록 요청하였다. #[4] 하지만 브라질의 유대인 환락가 관련한 신화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유럽인들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던 이유는 약간 달랐는데,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반까지 웬만한 유럽 국가보다 소득이 높았기 때문에 이민자가 많았고, 브라질의 경우는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자국민들을 백인화한다는 계획 하에 유럽발 이민자들에게 이민 보조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브라질의 아슈케나지 유대인 인구 상당수는 이렇게 이민 보조금을 받고 파라나주에서 농촌을 건설했던 유대인 농민들의 후손으로 나온다. 수백여 년간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유럽인 남성들이 현지 원주민 여성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낳은 혼혈인들 중 금발이나 벽안은 극히 드물었다. 바로 이 때문에 브라질 사회에서 금발벽안은 고귀한 신분이나 혈통을 나타나는 척도 역할을 했고, 독립 이전 브라질 사회에서 백인 여성이 사회적으로 기피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는 독립 이후 브라질 정부의 공공연한 백인우월주의 정책으로 이어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 유대인 여성들이 매매당하는 현상이 유독 과도한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오스만 제국이나 모로코, 지브롤터 등에서 일부 세파르딤이나 미즈라힘들이 브라질로 이주하였지만, 이들의 수는 아슈케나짐에 비해 적은 편이었으며, 가족 단위 이민보다는 개인 단위 이민이 많았다.
전간기 헝가리 왕국(1920~1946)에서는 심각한 반유대주의 운동이 벌어졌고 헝가리 유대인들 중 일부가 브라질로 이민한다. 하지만 브라질 정부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받아주는데 부정적이었고, 이들 중 브라질에 장기 체류하거나 영구 정착한 사람들은 소수였다.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가 부상할 때 독일 유대인 일부가 브라질에 한시적으로 망명하였으며,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이스라엘 건국하면서 아랍권 각지에서 반유대주의가 폭발한 것을 계기로 1950년대 후반 수천여 명 규모의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이 브라질로 이민하였다.
3. 역이민
유대계 브라질인들이 미국 혹은 이스라엘로 재이민하는 경우도 많다. 이스라엘에서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대인 인구가 의외로 많은데 대개 브라질에서 이스라엘로 다시 이민한 경우이다. 브라질에서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지 유대인 중 한국에 그나마 알려졌던[5] 인물로는 아다르 간델스만이 있다. Brazilian media highlights miss Israels local roots4. 현황
오늘날 브라질 유대인 인구 중 3/4 가량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 1/4은 세파르딤/미즈라힘이라고 한다. 아슈케나짐은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인 이민이 집중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반대로 세파르딤/미즈라힘들은 북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대체로 브라질 유대인 인구의 약 68%가 대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주로 비즈니스, 법률, 의학, 공학, 예술에 종사하고 있다. 대부분 사업을 하거나 자영업자이다. 브라질 지리통계연구소(IBGE) 인구 조사에 따르면, 브라질 유대인의 약 70%가 중산층과 상류층에 속한다고 한다.
브라질 지리통계연구소(IBGE)에 따르면, 브라질은 2010년까지 약 107,329 명으로 세계에서 9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를 가지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르헨티나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유대인 인구를 가지고 있다. 브라질 유대인 연맹(CONIB)은 브라질에 120,000 명 이상의 유대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4.1. 인물
[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2]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의 미국으로 이민 온 동유럽 유대인들의 평균 문해율은 약 74%였으나, 이렇게 미국으로 이민이 가능한 사람들은 동유럽 유대인 사회에서 비교적 잘 살던 사람들이었고, 1897년 러시아 제국 내 유대인들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숫자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인신매매당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슈테틀이라는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지방 마을에 살던 문맹들이었다. 유대인 사회 역시 전근대 당시 보수적인 시골 동네에서 여성들에게 글도 안 가르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3]
인신매매 피해자들은 동유럽 유대인 사회 각지에서 왔으나 포주들 중 바르샤바 출신이 많아서 이렇게 불리곤 했다. 한 편 아르헨티나나 우루과이에서는 Polacas가 아니라 Esclavas Blancas(백인 노예)로 불렸다.
[4]
유사 사례로 카프탄 입은 사람을 의미하는 카페퉁(cafetão)이란 단어 뜻이 포르투갈어와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5]
#1
#2
#3
[6]
세파르딤 은행가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