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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1><colcolor=#ffc224> 필명 | 김용 (金庸[4], Jin Yong) | ||
본명 | 차렁융 (查良鏞, 사양용, Louis Cha Leung-yung) | ||
출생 | 1924년 2월 6일 | ||
중화민국 저장성 사오싱시 하이닝시 | |||
사망 | 2018년 10월 30일 (향년 94세) | ||
홍콩 해피밸리 양화병원 | |||
직업 | 언론인, 작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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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1><colcolor=#ffc224> 학력 | 중국 국민당 중앙정치학교 외교부 중퇴 (1944) | |
중국 장쑤성 쑤저우 대학교 법학과 학사 (1946-1948) | |||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인문과학 ( B.A./2005) | |||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고고학과 인문과학 ( Ph.D./2010) | |||
작가 활동 | 1955년 – 1972년 | ||
장르 | 무협 | ||
부모 | 부 차슈힝(查樞卿, 사추경) (1894-1951) | ||
모 초이룩(徐祿, 서록) (?-1937) | |||
배우자 | 도우지판(杜治芬, 두치분) (1948년 결혼-1953년 이혼) | ||
주무이(朱玫, 주매) (1953년 결혼-1976년 이혼) | |||
람록지(林樂怡, 임낙이) (1976년 결혼) | |||
자녀 | 4명 (2남 2녀) | ||
묘소 | 홍콩 란타우 섬 보련선사 해회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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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권의 무협 소설 작가이자 홍콩의 신문사 명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다.무협이라는 장르가 대중성을 넘어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도록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5] 김용을 부르는 호칭으로는 대협(大俠) 또는 신필(神筆)이 있으며, 막대한 업적과 영향력으로 인해 동서고금공전절후(東西古今空前絶後)의 작가로 불렸다. # 또한 중국의 셰익스피어[6], 중국 문학의 톨킨[7] 등으로도 불린다. 김용의 작품은 김용이 사망한 지금도 드라마, 영화 등으로 꾸준히 각색되고 있다.
김용이 쓴 소설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실제 역사랑 연관지어 대체역사물 성격의 작품을 주로 쓰는 경향이 있었다.[8] 그래서 무협물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보면 그가 모티브로 하거나 인용한 중국의 역사와 시, 문장, 도교와 불교에 대한 수준높은 통찰에 감탄하게 된다. 또한 1950년대 중반 작품 전기에서 1970년대 초반 후기까지 작품이 이어지면서 보여지는 김용의 역사적 시각이나 사상적 변화 혹은 전개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볼거리 중 하나다.
2. 생애
김용은 1924년 2월 6일, 중국 저장성 하이닝현 위안화진에서 태어났다. 김용의 가문인 하이닝현의 사(査)씨 가문은 명문거족이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 문신으로 ‘경업당집(敬業堂集)’을 남긴 사신행(査愼行)이 그의 직계 조상이며, 옹정제 때 유명한 문인으로 문자의 옥으로 처형된 사사정(查嗣庭)은 그의 직계 조상인 사승(查昇)의 당형(堂兄)이다. 가문은 명청교체기 22명의 진사를 배출했다. 강희제가 사씨 집안을 두고 “문중에 진사가 열 명, 숙질 중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다섯 명”이라 감탄할 정도였다.김용 당대에도 가문의 명성은 이어졌다. 사촌형 자량자오(査良釗, 사양쇠)가 국립쿤밍사범학원(國立昆明師範學院) 원장, 국립대만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또 다른 사촌형 자량젠(査良鑑, 사양감)은 법률가로 대만 행정원 법무부장과 최고법원장을 지냈다. ‘낙엽(落葉)’ ‘우연(偶然)’ 등을 쓴 ‘중국 현대시의 개척자’ 쉬즈모(徐志摩, 서지마)도 친척이다. 김용의 친형 자량정(査良錚, 사양쟁) 또한 ‘무단(穆旦·목단)’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저명 시인이다. 이처럼 학자 가문에서 태어난 김용은 유년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학문을 익히며 보냈다. ‘ 사서삼경’, ‘ 제자백가’ 등 유교 경전에 더해 불교· 도교 경전까지 섭렵했다. 특히 불경에 대해서는 스스로 높이 평가할 정도로 이해가 깊었다. 그외 시와 서화, 한의학, 바둑과 서예에도 상당한 조예를 쌓았다. 이때 익힌 동아시아 고전이 훗날 작가로 성장하는 토양이 됐다.
대학 시절 김용은 급진 개혁주의자로, 국민당의 학생 통제 행위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당시 중앙정치학교 교장을 겸임한 장제스 총통과도 거리를 두게 된다. 자유인이 된 김용은 중앙도서관 임시 사서로 일하며 각종 책을 두루 탐독했고,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항저우 동남일보(東南日報)에서 외신 번역 일을 맡았다. 1946년 김용은 개신교계 명문대 쑤저우대학(蘇州大學·현 대만 동오대) 법학원에 편입해 국제법을 전공하고 1948년 졸업했다. 쑤저우대학 시절 상하이(上海) 대공보(大公報)에 입사, 국제부 외신 번역기자로 일하다 졸업 후 홍콩지사에 발령받았다.
1950년 김용은 청운의 꿈(입신출세)을 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으로 갔다. 출중한 영어 실력을 살려 정무원(현 국무원) 외교부에서 일했으나, 중국공산당 이념과 대외정책은 그와 맞지 않았다. 외교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다시 홍콩 대공보로 돌아갔고, 1952년 신만보(新晩報)로 자리를 옮겨 부편집장을 맡았다. 이 시기 김용의 아버지는 중국 공산화 이후인 1951년 반동지주로 몰려 총살당했다. 김용의 팬으로 알려진 덩샤오핑은 훗날 그에게 아버지 처형 문제를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9]
신만보 시절 김용은 평생 지기 천원퉁(陳文統)을 만난다. 김용과 동갑인 그의 필명은 ‘ 양우생(梁羽生·량위성)’으로 1952년 첫 무협 작품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발표하기도 했고 김용과 마찬가지로 명문학자 가문의 자제였다. 이 두 사람의 재능을 알아본 신만보 편집장 뤄푸(羅浮)는 신문에 무협소설을 연재할 것을 제안했다. 이 때부터 김용은 본명 자량융(査良鏞)의 마지막 자를 파자(破字)해 ‘김용(金庸·진융)’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용의 첫 작품은 1955년작 ‘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으로 ‘청 건륭제가 실은 옹정제의 친아들이 아니며, 건륭제에게는 만주족이 아닌 하이닝 출신 한족의 피가 흐른다’는 야사를 모티프로 했다. 건륭제 후궁 중 위구르족 공주로서 ‘몸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 향비(香妃)라 불린 함향공주(含香公主)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한족과 이민족의 갈등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독자들 사이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6년 김용은 두 번째 소설 ‘ 벽혈검(碧血劍)’을 홍콩상보(香港商報)에 연재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명 멸망의 원인이 된 ‘ 이자성의 난’을 배경으로 명나라 마지막 천자 숭정제에게 살해당한 명장 원숭환의 아들 원승지(袁承志)가 무림에서 무공을 갈고닦아 아버지의 복수를 꾀한다는 줄거리다. 이 작품 또한 대성공을 거뒀다.
이를 발판으로 김용은 1957년 새로운 작품을 내놨다. 북송이 여진족 금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패한 뒤 남송 건국, 주전파와 주화파의 갈등,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과 송 멸망 등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한 ‘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이 그것이다. 실제 역사·지리·인물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무협소설의 지평을 대하역사소설로까지 넓혔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작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사조영웅전은 이후 영화, TV드라마, 컴퓨터게임으로 각색되고, 중국과 구미 각국에서 대학 교재로 사용되기도 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작가로서 명성을 공고히 하던 김용은 언론인으로서 새 도전을 하기 위해 1959년, 홍콩에서 명보(明報)를 창간, 발행인·사장·주필을 겸했다. 매체 발간을 맡은 김용은 명보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1959년 명보 창간과 동시에 신작 무협소설 ‘ 신조협려(神鵰俠侶)’를 명보에 독점 연재했다. 김용은 이때부터 낮에는 신문사 경영자 겸 편집자로, 밤에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이중생활을 하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신조협려'는 ‘사조영웅전’ 속편으로 시대 배경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의 남송 침공기다. ‘사조영웅전’에서 사망한 양강의 아들 양과가 아버지 죽음을 둘러싼 은원(恩怨)을 알아가고,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스승 소용녀와 사랑을 이루고자 투쟁한다. 장르적으로는 로맨스물로, 작품 구성의 치밀성과 등장인물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여성 스승과 남성 제자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소재로 여겨졌다. ‘신조협려’는 훗날 독자에게 “최고 무협소설은 아니더라도 최고 연애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용은 ‘신조협려’ 인기에 힘입어 1959년 ‘ 설산비호(雪山飛狐)’도 선보였다. 만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등장인물의 회상과 내레이션을 통해 수개월, 수년, 수십 년 전 사건이 ‘이야기’로 재현되는 액자소설이다. 한 화자 이야기를 다른 인물이 반박하고, 다른 인물이 또다시 반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모든 인물 이야기를 종합해야만 전체 줄거리를 알 수 있다는 점, 작품 결말을 독자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취했다는 점 등 때문에 김용 무협소설 중 독특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듬해인 1960년 김용은 ‘설산비호’ 속편 ‘ 비호외전(飛狐外傳)’ 연재를 시작했다. 전작 주인공 호비(胡斐)의 10대 시절을 다룬 작품이다.
‘신조협려’부터 ‘설산비호’, ‘비호외전’까지 명보에 독점 연재된 모든 무협소설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신생 매체 명보는 치열한 홍콩 언론계에서 금세 입지를 다졌다.
1961년 김용은 다시 명보에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연재를 시작했다. 훗날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와 더불어 ‘사조삼부곡(射三部曲)’으로 불리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원나라 말 명나라 초, 원 마지막 황제 혜종 토곤테무르 재위기다. 송 멸망 후 한족이 원나라에 맞서고자 제작한 신비의 병기 ‘의천검’과 ‘도룡도’를 둘러싸고 무림 고수들이 벌이는 암투, 강호 세계의 은원, 한족과 몽골족의 갈등 등을 다뤘다.
이 여세를 몰아 김용은 1961년 장편(掌篇) ‘ 원앙도(鴛鴦刀)’, 단편 ‘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등도 연달아 썼다. 원앙도는 원도(鴛刀)와 앙도(鴦刀)라는 길고 짧은 칼 한 쌍을 차지하면 천하무적 무공을 지니게 된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백마소서풍’은 김용 소설 중 유일하게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서역 한 마을에 버려진 한족 소녀 이문수(李文秀)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다.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63년, 김용은 불법(佛法)을 지키는 여덟 신장(神將)인 천(天)· 용(龍)·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소재로 한 ‘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선보였다. 북송과 거란족 사이 요(遼) 분쟁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은 작품으로, 거란인이면서 한인으로 자란 비극적 영웅 소봉, 무예를 싫어하면서도 수많은 절기를 몸에 익히는 단예, 파계한 소림사 승려 허죽, 멸망한 ‘대연국’의 후예로 왕조 부흥을 꿈꾸는 모용복 등 네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화려한 무공 묘사가 압권이다.
1964년, 김용은 잠시 무림 세계를 떠나 불법 세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때 발표한 작품 ‘ 연성결(連城訣)’은 불가에서 말하는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 즉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욕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독(三毒心)을 주제로 삼았다. 작품 도입부에서 주인공 적운이 모함을 받고 투옥되는 상황 묘사는 뒤마의 ‘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연상시킨다. 실제로는 김용이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던 종 ‘화생’에게 들은 기구한 과거사를 모티프로 한 것이다.
본명이 ‘개잡종(狗)’인 석파천을 주인공으로 한 1966년작 ‘ 협객행(俠客行)’도 인기를 끌었다. 시인 이백의 동명 시를 제목으로 삼은 이 작품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품성 바르고 순수한 주인공이 강호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1967년 김용은 임청하의 명연기로 널리 알려진 영화 ‘ 동방불패'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 소오강호(笑傲江湖)’를 세상에 선보였다. 소오강호는 등장인물 유정풍과 곡양이 만든 소(蕭·피리)와 금(琴·거문고)의 합주곡. 문자적 의미는 ‘강호의 속박을 비웃는다’는 뜻이다. ‘정(正)과 사(邪)의 대립은 모호하다’는 작품 주제를 상징한다. 정파와 사파의 의견 차이에 구애하지 않고 우정을 지켰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무림들의 상황을 풍자한 제목이다. ‘동방불패’는 이 작품 속 일월신교 교주로 절대 무공을 지닌 존재다. 김용 소설 중 드물게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역사적 배경도 불명확하다.
3년 후인 1970년 김용은 춘추시대 오(吳)나라에 복수를 다짐한 월왕 구천과 충신 범려 앞에 뛰어난 검술과 지혜를 가진 여인이 나타나 오를 멸망시키는 걸 도왔다는 ‘월녀(月女) 전설’을 모티프로 한 소설 ‘ 월녀검(月女劍)’을 완간했다.
1972년에는 최후의 대작 ‘ 녹정기(鹿鼎記)’를 마무리했다. 1969년부터 4년간 계속한 연재의 결실이다. 청 최전성기를 시대 배경으로 삼아 강희제 등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허구적 상상력과 절묘하게 엮어 쓴, 이른바 ‘신필(神筆)’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녹정기’를 마지막으로 김용은 더 이상 새로운 소설을 쓰지 않았다. 대신 출간한 작품을 개작해 재출간하는 데 집중했다.
김용의 무협소설들은 동서양의 수십개국에 번역되었으며, 대만에서 1천만부, 중국에서 3억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적판 미포함, 해적판까지 포함한다면 어마어마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김용은 언론사 사주로서 회사 경영과 사업 확장에도 매진했다. 명보 자매지로 석간 명보만보(明報晩報), 월간 명보월간(明報月刊), 주간 명보주간(明報週刊) 등을 잇달아 창간했고 출판계로 영역을 넓혀 명보출판사, 명창(明窓)출판사를 설립했다. 1991년 지주회사인 명보기업유한공사를 세워, 언론사 최초로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 당시 명보그룹 순이익은 1억 위안에 달했고, 상장 직후 김용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4년은 김용에게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해 5월 김용 전작 15종 36권이 ‘김용작품집’으로 공식 출판됐다. 그해 중국 ‘독서잡지(讀書雜志)’는 20세기 중국 대표 소설가를 꼽으며 루쉰, 선충원, 바진에 이어 김용을 네 번째로 올렸다. 이후에 조사한 중국출판과학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국민 열독 조사'에서 김용은 바진, 루쉰, 충야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이 당시 베이징대학에서 명예교수직도 받았다. 옌자옌(嚴家炎) 베이징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명예교수직 수여식에서 “김용의 창작 실천은 또 하나의 문화대혁명이고, 조용히 진행된 혁명”이라고 상찬했다. 이듬해 베이징대에 ‘김용 소설 연구’ 과목이 정식 개설됐다. 1997년에는 홍콩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상업적 성공, 문학적 성취에 더해 언론사업 성공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김용은 노년에 향학열을 불태웠다. 2005년 81세의 나이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0년 86세 때 역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1. 절필
녹정기 이후 김용은 절필 선언을 했고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다만 이전에 쓴 소설의 개정판은 계속 나왔는데, 신문 연재로 작품을 썼던 터라 개연성이 부실해서 스토리를 좀 더 매끄럽게 고친 것으로 보인다.30년의 절필을 뒤로 하고 복귀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김용 본인이 자신을 무협 작가라기보다 언론가, 평론가 쪽으로 불리길 원한다는 말도 있었다. 자신의 소설을 무협소설보단 역사소설로 불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협소설로 유명세와 대학교수 등 사회적 지위도 얻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알고보면 무협소설 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으로 일부 무협 마니아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다만, 자신이 쓴 소설의 개정판을 지속적으로 발간한 것으로 볼 때 김용은 자신이 무협소설 작가로서 활동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기 보단 어디까지나 자신의 본업은 소설가가 아니고 언론인이라 생각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하다. 이후 본인 소설 실사화 작품에 대해서 꾸준히 평을 한걸 보면 확실하다.
김용의 친구이자, 또 하나의 무협소설계의 거벽인 양우생이 "생전 김용은 고작 신문 홍보를 위해 연재했던 흥미 위주의 소설들 때문에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모두 묻혔다며 한탄했다."라고 증언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소설가보단 언론인으로 더 알려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왠지 코난 도일이 자신이 셜록 홈즈로만 너무 유명해져서 정작 인정받고 싶었던 역사 소설 등에서는 인정받지 못해서 영 껄끄러워했다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추리 소설은 깊은 작품성보다는 대중들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소설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용이 무협소설을 썼던 기억을 굳이 껄끄럽게 여긴다면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2.2. 사망
▲ 김용의 별세 소식을 1면 헤드라인 뉴스로 전한 중국 일간지들.
2018년 10월 30일 17시 30분, 홍콩 양화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 # 며칠 뒤인 11월 13일에는 마블 코믹스의 아버지인 스탠 리도 사망해서, 중국 내에서는 이 둘을 함께 추모하기도 했었다. 아마 한국 무협팬들에게 김용에 대한 조문으로는 역시 무협소설 작가인 진산이 쓴 신필 김용, 강호를 떠나다!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시진핑 주석, 리커창 총리, 원자바오 전 총리, 주룽지 전 총리, 마윈 알리바바 그룹 회장, 캐리 람 행정장관도 그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그가 사망한 다음 날인 31일 오후 3시 트위터와 중국의 모바일 서비스인 웨이보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해시태그가 14억 9000만 건에 이르렀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불과 20시간 여만이다. 중국 대륙의 네티즌 인구가 8억명 남짓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어를 구사하는 지구촌의 모든 인구가 한 두번씩 인터넷 공간에 추모 글을 남기거나 리본을 단 셈이다. 중화권 언론들은 31일자 조간에서 일제히 김용의 별세를 1면 톱 기사로 다뤘다. 인민일보 해외판은 '세상에 김대협(협객)이 더 이상 없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올렸고 신화망과 인민망, 환구망도 신속하게 김용의 별세 기사를 보도했다. 중국 대륙의 신문은 물론 중국어로 발행되는 싱가포르 최대 권위지 연합조보조차도 1면 톱 기사였다.
장례식은 11월 13일 비공개로 진행됐다. 장례식은 홍콩장례식장에서 진행됐고 오전 9시 발인식이 거행됐다. 영구는 란터우 섬(大嶼山) 보련선사(寶蓮禪寺) 해회탑(海會塔)에서 화장됐다.
13일 환구시보에 따르면 김용의 장례식에는 알리바바 회장 마윈, 배우 유덕화, 초대 홍콩 행정장관 퉁치화, 전 홍콩 의원관리국 주석 에드워드 렁, 배우 황샤오밍, 영화감독 허안화, 영화감독 두기봉, 영화 제작자 장지중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찾았다. 마윈이 보낸 조화에는 '일인강호, 강호일인(一人江湖 江湖一人)'이 적혀 있었고 유덕화는 조화에 '덕성이 높고 명망이 크다(德高望重)'는 글귀를 넣어 고인의 위대함을 기렸다. 홍콩 현지 매체들은 김용의 장례식장에 조화가 넘쳐나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면서 매우 보기 드문 장면이라고 보도했다. 홍콩 박물관에 특별 애도 장소를 마련해 일반인도 조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날 홍콩 박물관에는 아침 일찍부터 일반인들의 조문 행렬로 장사진을 쳤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김용의 추모식에 참여했다.
3. 문학적 평가
3.1. 긍정적 평가
현대 중화권에서 김용의 소설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김용의 무협은 단지 많이 읽히고 잘 팔리는 통속, 대중 소설을 넘어서 유교, 불교, 도교 등 중국 전통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국을 읽는 창 또는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김용은 뛰어난 스토리텔러인데다가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뛰어난 작가이다. 특히 자신의 소설 속에 쏟아내는 그 엄청난 지식은 가히 압권으로 어문학, 철학, 사학, 종교학 등 중국 전통의 인문학 전반에 높은 수준의 식견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신필(神筆)'이라 불린다. 판타지에 J. R. R. 톨킨이 있다면 무협에는 김용이 있다고 할 정도로 서양의 중국 관련 교재에도 김용의 소설이 등재되어 있으며, 영미권에서 톨킨의 판타지를 톨킨학으로 부르면서 연구하듯이, 중국어권에선 김용의 무협을 김학 혹은 용학이라고 부르면서 연구하고 있다. 김용을 연구하는 김학 연구로 학위를 받은 대학교수들도 수두룩하다.
김용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대단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색채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0] 이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제멋대로 날뛰고 영악하지만 몹시도 총명한 여주인공 황용,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불구자 영웅 양과, 감정을 봉인하고 살아가다 점점 인간성에 눈뜨는 소용녀, 잔인한 악당 두목에서 순정에 눈뜬 소녀로 탈바꿈하는 조민, 권력을 탐하다가 남자이길 포기하고 여자의 삶을 희구하는 타락한 권력자 동방불패[11], 무술의 무자도 모르면서 누구보다 두둑한 베짱과 인망을 가진 위소보 등이 그러하며,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후대의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금서로 지정되어 주목받지 못하다가[12] 1980년대부터 대만의 <아호>라는 철학 잡지에서 처음 주목을 받았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했던 현대신유학의 대표 잡지에서 그의 작품을 철학적 관점에서 수차례 심도있게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천룡팔부는 민족의 화해와 중원문화의 자긍심을 넘어 불교의 철리를 무협의 형식을 빌어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평가했고, 소오강호는 독고구검의 검법을 빌어 도교 미학의 상징성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고, 사조영웅전은 유가의 우직한 선비상을 곽정이란 캐릭터를 통해 훌륭하게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그의 문체는 피동문을 난발했던 3,40년대 중국 문학가들과는 달리 매우 현대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그리고자 했던 소설 무대의 공간은 중화문화의 고전적 요소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 그가 그린 세계는 민족 간의 대립을 넘어선 화해의 지평이었고 , 파벌 간의 투쟁을 무력화하는 절대무공의 경지였다.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은 항상 거대한 계파 간의 투쟁에 상처입은 개체 민초의 소중한 불씨를 되살리는 데에서부터 눈부시게 데뷔한다. 천룡팔부의 소봉, 신조협려의 양과, 사조영웅전의 곽정, 의천도룡기의 장무기가 모두 그렇게 무대 속에 등장하였다.
그의 소설은 중국 교과서에도 수록되고 있다. 2004년 11월 베이징에서는 인민교육출판사에서 최초로 김용의 대표작인 천룡팔부의 일부를 교과서에 수록했다. 3차에 걸친 엄격한 검정을 거쳐 검정위원들은 김용의 작품 두 편을 선정했다. 그 후 2007년에 설산비호 중 제5회의 내용 일부가 재차 베이징시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홍콩에서는 김용의 이름을 동아시아에 떨친 작품인 사조영웅전 중 제 30회의 일부가 교과서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설산비호>가 수록되는 대신 < 아Q정전>의 일부가 교과서에서 빠졌다. 그리고 위화의 < 허삼관 매혈기>는 <진환생진성>을 대체했다. 루쉰 소설의 일부가 교과서에서 삭제되자 루쉰과 김용의 지지자들은 두 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루쉰파는 김용 소설이 통속 소설에 불과하다고 폄하했고, 김용파는 루쉰파를 혁명의 오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두 파로 갈린 지지자들의 흥분 상태와는 달리, 검정위원들과 문단에서는 김용 작품의 교과서 수록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들은 30~40년대의 중국 소설이 현대 중국문화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엔 한계에 이르렀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부족한 부분은 김용의 작품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인식에 동의했다. 김용 작품이 지닌 현대적 문체의 매력, 수준 높은 문학성, 모방할 수 없는 심리묘사와 경관묘사 등은 김용의 작품이 지닌 문학적 뛰어남이다. 이와 더불어 김용의 작품은 중국문화의 위대한 가치를 고양시켰다고 보았다. 중국의 협의(俠義) 정신, 민족 단결적 요소, 개성 해방의 추구, 도덕적 희생정신 등은 문학성과 더불어 교육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결론이었다. 김용의 작품은 싱가포르에서도 수록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사조영웅전’은 싱가포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부분 전재되어 (화교 후예가 인구의 70%인) 싱가포르 청소년들로 하여금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다. 또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중문학의 부교재로 쓰일 정도로 서양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용은 삼류 통속소설로 치부되던 무협소설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 받는다. 옌자옌 베이징대학 중어중문학 교수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아(雅·순수문학)와 속(俗·대중문학) 쌍방의 문학 경험을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와 속을 초월한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네 가지 업적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1) 삶과 오락을 동시에 달성하고 통일했다. 2) 사실주의라는 주류 예술 사조에 비범한 상상력을 결합했다. 3) 전통 백화문 소설 형식과 언어를 유지·개조·창신(創新)했다. 4) 순수문학과 대중(통속)문학의 벽을 깨고 진정한 아속공상(雅俗共賞·식자와 서민이 함께 감상하고 즐기는 것)을 달성했다"라고 평했다. 옥스퍼드 현대 세계 문학 가이드에 의하면 김용의 소설은 퀄리티가 매우 뛰어나고 고상한 취향과 저급한 취향에 모두 어필할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13] 또 그의 작품은 다른 현대 작가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세계 중국 공동체를 분리하는 지리적, 이념적 장벽을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14]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조설근의 < 홍루몽> 외에 달리 없다.[15]
김용처럼 실제 역사와 가상의 무협세계를 버무려 어색함 없이 서사를 이어갈 정도의 필력과 박학다식을 겸비한 작가는 지금까지도 거의 없다. 김용 월드는 단순한 역사적 시기와 사건을 무협에 소재로서 얼추 끼워넣는 얄팍한 퓨전이 아니다. 역사와 무협을 독자가 느끼기에 위화감없이 결합시키는 건 둘째치고, 작가가 표현하기에 가장 어려운 건 작품 속에 녹아있는 중국 문화사의 엄청난 식견이다. 예를 들어 서검은구록에서 유명한 궁중야사인 청향비와 건륭제의 출생 이야기를 진가락이라는 인물을 통해 절묘하게 엮어내고, 벽혈검에서는 민간에서 떠도는 장평공주와 독비구난의 전설을 가지고 구슬픈 로맨스를 만들어냈다. 소오강호의 조천추와 영호충의 술잔 이야기, 강남사우의 금기서화 에피소드, 천룡팔부의 단예의 산다화, 허죽의 진롱기국, 아벽의 강남시사 등 중국 문화의 다양한 정수를 김용처럼 자연스럽게 감성적으로 작품 속에 풀어낸 작가는 김용 본인을 제외하고는 없다. 그것도 자료 수집에 절대적으로 편리한 인터넷조차 없던 시절에 이정도 식견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동아시아 고전을 한껏 배우며 자라난 환경 덕분도 있을 것이다.
한편, 무협계 자체의 거대한 명성으로 이후 한국 무협의 방향에도 꽤 영향을 준 작가다. 김용의 이른바 영웅문( 사조삼부곡) 시리즈는 1980년대 국내 무협계의 인기를 견인하다시피 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개방(사조영웅전)이나 독고구검(신조협려, 소오강호), 무당파(의천도룡기), 마교(의천도룡기, 소오강호), 화산파(소오강호) 등 오늘날 무협물에서도 자주 소비되는 개념들의 분위기나 설정에 많은 영향을 줬다. 만화계에서도 박성우처럼 김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가들이 있다. 물론 한국 무협은 김용 외에도 정/사파, 구파일방 설정을 잡고[16] 중국 역사에서 빗겨가 무림쟁투만을 주 요소로 그리기 시작한 와룡생과 여기에 짧고 간결한 문체와 뭔가 있어보이는 묘사를 깔고 들어가는 고룡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17] 그 혼자 영향을 준건 아니지만, 또다른 중화권 신파무협의 대가 양우생보다는 훨씬 많은 영향을 줬다.
3.2. 부정적 평가
김용이 위대한 무협작가로 평가받긴 하지만, 그 역시 신문연재로 인한 개연성의 문제, 후속작과 이후 개작을 통한 설정 변경 문제, 대필 문제, 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연재 기간과 절필 선언 등으로 인해 일각에선 비판을 받기도 한다. 물론 절필이야 본인 맘에 안 차는 글 쓰느니 그게 깔끔할 순 있겠지만, 팬들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사실 개연성의 문제는 전체적인 재미로 보면 상쇄될 수 있는 부분이고 이후 개정판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스토리를 좀 더 매끄럽게 고쳐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지만,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 사이에 설정이 달라지면서 생기는 설정충돌은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항룡십팔장은 원래 홍칠공이 역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창시해낸 독자적인 장법이었으나, 사조삼부곡 이후에 나온 천룡팔부에서 '개방 방주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무공'으로 항룡이십팔장을 등장시키는 바람에 이쪽 설정으로 전작을 개정하기도 했고, 대리 단씨의 무공은 선천공이었고 왕중양의 무공이 일양지였는데도 천룡팔부에서 거꾸로 대리 단씨들이 일양지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왕중양의 무공이 선천공으로 변경되는 등 후기에 나온 소설들에 주로 맞추는 식으로 때때로 설정이 변경되고 이를 뒤늦게 수습하는 개작 등이 일관성에 있어 흠이 되었다.
다만 이 역시 소위 ' 김용 월드'에 속하는 작품간의 설정 충돌 문제는 문학적인 영역, 특히 평론의 영역에서는 크게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학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각각의 작품들'이고, 그 작품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세계관을 즐기는 것은 매니아, 또는 오타쿠 특유의 향유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아예 연작, 즉 작품간의 연속성을 전제로 씌여진 삼부곡 정도면 모를까 삼부곡과 작품들과 같이 독립적인 작품들 사이에 설정상의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독립된 작품이다'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 점에서 보면 김용은 1920년대 출신치고는 이런 '매니아 특유의 작품 향유 방법'에 대단히 친절한 작가에 속한다. 상기된 것처럼 '님 설정 오류요'하고 지적받으면 개정판에서 고쳐줄 정도니까. 김용을 시대를 앞서나간 오덕문화의 선구자 취급하는 것이 꼭 현대 오타쿠의 눈으로 봐도 모에한 여캐를 조형해 냈다는 이유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작품의 서사 자체보다는 그 세계관이나 설정등을 즐기는 오타쿠적 향유문화에도 몹시 친절한 작가이기 때문인 면도 있다는 것.
김용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대필 문제 때문에 김용 소설 세계의 뛰어난 완성도가 당사자만의 업적은 아니라는 의혹을 사기도 한다. 실제로 천룡팔부는 작가 예광이 대필한 부분이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작이다. 물론 신문연재를 통한 속필, 설정 충돌과 변경, 잦은 개작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김용 특유의 문학적 완성도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나, 단지 '신필'이라는 한 마디로 추앙하기에는 빈틈도 있고 약점도 있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필 문제는 사망 이후 2020년 국내 번역출간된 천룡팔부 신수판에서 김용 본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해명하니 팬이면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그 덕분인지 천룡팔부는 구판과 신수판의 갭이 가장 큰 작품이 되어서 많은 내용과 설정이 개작되었다. 다만 아주의 죽음이 예광의 창작이라서 김용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등의 루머는 신수판에서도 똑같은 전개임이 밝혀져서 헛소문으로 일축되었다. 1차 개정판인 삼련판이 1980년에 나왔기에 예광이 대필한 부분은 한국에는 소개된 적도 없다.[18] 그리고 천룡팔부의 다른 김용 작품과 확연히 다른 비현실적이면서 신비한 분위기 또한 김용이 작중 분위기에 맞는 의도적 연출이라 언급하였다.
4.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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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천룡팔부》와 《사조삼부곡 시리즈》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함. [B] 《설산비호외전 시리즈》와 《서검은구록》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함. [C] 《벽혈검》과 《녹정기》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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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영웅문으로 알려지기도 한 사조삼부곡. 즉,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제일 유명하고 그 외에도 천룡팔부, 소오강호(한국에선 동방불패로 유명), 녹정기 등 총 15작품을 집필하였다.
스스로 지은 14개의 소설의 첫머리를 따서 다음과 같은 대련을 짓기도 했다.
飛
雪
連
天
射
白
鹿(비설련천사백록) 휘날리는 눈발은 하늘로 잇닿으니 흰 사슴 쏘아가고,
笑 書 神 俠 倚 碧 鴛(소서신협의벽원) 글발을 비웃는 신비한 협객은 푸른 원앙에 기대노라.
笑 書 神 俠 倚 碧 鴛(소서신협의벽원) 글발을 비웃는 신비한 협객은 푸른 원앙에 기대노라.
구절 순서대로 김용 작품을 나열하면, 비호외전, 설산비호, 연성결,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백마소서풍, 녹정기, 소오강호, 서검은구록, 신조협려, 협객행, 의천도룡기, 벽혈검, 원앙도이며 이는 김용군협전(국내 정발명 의천도룡기 외전)이란 게임에서도 핵심적인 문구. 대련에 속하지 않은 것으론 월녀검이 있어 합해서 총 15작이다. 이 15종 말고는 무조건 가짜니 낚이지 말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읽을 만한 한국어 번역본이 정말 몇 안 된다. 한국내에서 김용 작품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힘들게 만드는 요소인데 해적판은 물론 김영사에서 출간한 신수판 역본들도 좋은 번역은 몇 안된다. 게다가 독서인구 감소를 비롯한 출판시장 악재가 많아서 이 문제가 해결될 일도 요원하다.
사조삼부곡의 경우 구판을 번역한 고려원 역본은 6권 안에 끼워넣는다고 스토리 전개와 크게 상관없다 싶은, 그러나 작품의 문학성과 인문학적 경지를 드러내는 장면들을 마구 잘라낸 엄정하지 못한 번역이고 신수판을 번역한 김영사 역본은 의천도룡기를 제외하면 실력 떨어지는 역자들이 맡아 한국어 구사능력부터 확연히 떨어진다. 그나마 사조삼부곡과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는 정식 번역(신수판)이라도 나왔지 나머지 아홉 작품은 수십년전에 나온 해적판 밖에 없다.
중원문화에서 주로 출간한 해적판들은 번역과 교정이 정말 형편없는데 80년대 해적판보다 개정판 타이틀 달고 나온 이후 역본들의 오탈자와 교정이 더 나쁜 것으로 악명높다.
절필 선언을 했지만 한국에 잘 알려지지가 않아서 위작이 많다. 유명한 위작으로 장백산맥 2부작이 있는데, 황당하게도 1부는 상관정, 2부는 고룡 작품. 작가조차 다른 두 작품을 멋대로 엮어서 출판했다. 비슷한 예로 녹정기 2부는 양우생 작품. 그밖에 사조삼부작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화산논검이라는 그럴싸한 위작-심지어 미완-을 비롯해 의천도룡기 외전, 신조협려 외전, 구음진경[19] 등이 있다. 이들 중 화산논검은 한 번만 읽어봐도 설정이 영웅문과 충돌되는 점을 엄청나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화산논검만의 오리지널 설정도 이 부분과 저 부분의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너무 선정적이다.
김용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주된 소재로 빼놓지 않고 다뤘지만 노루표 무협지식 외설 묘사는 일관되게 지양했다. 노골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건 의외로 남녀간 애정보다 사내들의 우정을 훨씬 중시했던 고룡의 작품이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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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소설이 원작인 2차 창작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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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사조삼부곡은 자주 드라마화되는 걸로 유명하여 의천도룡기는 매년, 신조협려는 2년마다, 사조영웅전은 3년에 한번 꼴로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중국 대륙 등 중화권 국가면 다 한 번 이상 만들었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팬들은 드라마판의 명칭 뒤에 제작연도를 붙여서 구분한다. 신조협려의 경우, 같은 1998년에 싱가포르와 대만에서 두 가지의 버전이 동시에 제작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연도 뒤에 제작 국가까지 붙여서 구분한다.
초기작들은 대부분 원작 중시 드라마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스토리나 주요인물들의 성격같은 요소가 바뀌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2008년판 사조영웅전으로 거기서는 원작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국내 대중문화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박성우의 천랑열전, 나우의 경우는 김용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은 작품이다. 퓨전 판타지 소설 묵향도 김용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추가로 김용 관련 소설 작품들의 경우 중국, 대만 등 김용 소설 작품들이 인기있는 도시 한정으로 게임 기획의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신조협려 등의 개별작품의 게임화 외에도 의천도룡기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김용군협전[20]이 유명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상업적 게임 작품으로는 모든 소설 대부분을 보여준 지 오래된 문제 때문인지 여러가지 동인 게임 리메이크 또는 웹 게임을 포함한 융합 게임 위주의 게임 기획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21]
6. 주요 수상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OBE (1981)
- 레지옹 도뇌르 훈장 5등급 슈발리에 (1992)
- 홍콩 대자형훈장[22] (2000)
-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1등급 코망되르 (2003)
7. 여담
- 그의 필명 첫글자인 金을 '김'과 '금' 어느 것으로 읽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은 없다.[23] 김성탄 #, 김일제 #, 김의, 김선 김성탄 등의 예처럼 '김'으로 읽는 것이 현재는 더 보편적 관행이나, '금'으로 읽어야 옳다는 주장도 있다.
- 녹정기 서두에 등장하는 명·청 교체기의 문인 사계좌(査繼佐, 자는 伊璜)가 그의 선조라고 한다.
- 홍콩에선 작곡가 황점(黃霑), 소설가 예광(倪匡)[24], 미식 평론가 채란(蔡瀾)[25]과 함께 홍콩 4대 재자(香港四大才子)로 불린다. 이 중 황점이 2004년에 별세했고, 예광과 김용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현재는 채란만 생존 중.
- '한 번 쓴 인물이나 줄거리, 감정, 나아가 세부적인 내용조차 중복해서 쓰지 말자'라는 것이 집필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용의 소설은 자기 복제라고 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으며 각각의 작품의 시대, 주제, 캐릭터 등이 모두 다르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녹정기는 그때까지 써왔던 김용 소설과 전혀 딴판으로 달라서 연재중에 '다른 사람이 대필한 것이 아니냐'라는 독자들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게다가 1960-70년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서브컬처에 나오는 여캐릭터 군상들이 다 나온다. 감정을 완전히 봉인한 냉미녀에 노빠꾸 우격다짐 야생마, 순정파 안데레나 SM 변태 여성부터, 소위 ' 합법로리'로 불리는 나이는 성인인데 몸은 여아인 캐릭터까지 이미 김용의 작품에서 등장했다.
- 2004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자신의 최고 걸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모두 내 자식이라 경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27] 또 중국의 역대 왕조 중 당· 송 시대, 특히 송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대엔 문인들이 예의 바르고 서로 존경하고 인간미가 있었고, 당은 강성하고 무협이 발전한 시기였다.”라고 평했다.
- 덩샤오핑이 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 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을 정도라고.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김용은 당대 홍콩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화대혁명에 비판적이었다. 1966년, 김용은 자신이 창간한 일간지 명보에 “문혁은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한다”는 사설을 실었고, 그 외 문혁 당시 마오쩌둥의 추종자로 나라를 쥐고 흔들었던 모택동의 부인 장칭을 비롯해 마오쩌둥의 동료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 4인방’을 강력 비판하는 글을 써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67년 홍콩에서 중국 공산당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반(反)영국 폭동이 벌어졌을 당시 중공 추종 세력에 의해 암살 대상자 명단에 오른 적도 있었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과 그의 오른팔이였던 저우언라이는 김용의 소설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 사실 김용의 수난은 중화민국에서도 있었는데, 당시 대만에 있던 국민당은 사조영웅전의 사조가 과거 마오쩌둥이 쓴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여겨서 김용 소설들을 수십년간 금서로 처분했고, 대만에서 유통되던 사조영웅전 해적판조차 사조영웅전으론 못나오고 대막영웅전으로 고쳐서 나와야 했다. 동사서독의 동사는 대만을 뜻하는 것이라는 혐의도 받았다. 상기되어있듯 젊은 시절엔 꽤나 급진파로 장제스와도 거리가 있었고, 중공 정부에서 일하다 또 노선이 맞지 않아 결국엔 홍콩에 정착했던걸 상기해보면 이래저래 이념 분쟁의 피해자 중 한명.
- 김용의 작품에서 사촌오빠 캐릭터는 무조건 초반에 히로인과 연인관계였다가 이래저래 찌질거리면서 히로인을 매정하게 내치는 악역으로 나온다(천룡팔부의 모용복, 연성결의 왕소풍 등). 그 이유는 김용의 사촌형[28]이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서 가족 내에서의 평판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황용과 소용녀의 모티브는 김용이 짝사랑했던 홍콩의 여배우 하몽(夏梦)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김용이 하몽의 외모에 감탄하며 " 서시(西施)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직접 본적이 없다. 나의 생각엔 서시가 만약 하몽만큼의 미모였다면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虚传)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다. 김용은 1953년 하몽과 사귀기 위해 첫번째 부인과 이혼했고 그녀를 위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김용의 열렬한 구애를 거절했고 1954년에 부유한 상인인 임보성(林葆誠)과 결혼했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김용은 이후 1956년 5월 1일 동료 신문기자인 주매와 재혼했다.
- 김용은 작가 및 언론인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사생활적인 부분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왜냐하면 김용은 결혼을 총 3번했는데 2번의 이혼 모두 김용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일방적으로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첫번째 부인이랑은 김용이 1953년에 여배우 하몽에게 연정을 품은 것을 계기로 이혼하였고 두번째 부인인 주매(朱枚) 에게도 김용이 <명보>의 사옥 근처에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던 16살 소녀 임낙이(林樂怡)와 불륜을 저지른 끝에 임낙이와 따로 살림을 차리면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하였다. 김용의 두 번째 부인인 주매는 신문기자 출신으로 김용과 함께 신문 <명보>를 공동창업한 사람이고 자신의 악세사리까지 팔아서 <명보>를 유지시켰을 정도로 <명보>에 대한 애착이 컸으며 김용에게도 조강지처인 여성이었다. 주매는 1976년 김용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후 우울증에 걸려 고독하고 가난하게 여생을 살다가, 1998년 11월 8일 홍콩 완차이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첫째 아들인 사전협(査傳俠)은 부모님의 이혼을 말리다가 아버지가 끝끝내 어머니를 버리자 그 충격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
- 그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15부작 전부가 여러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되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저자 김용으로 출판한 위작도 많이 있었다. 고려원은 1986년 김용의 작품 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사조삼부곡을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는데 당시 무려 800만부[29]가 팔렸다. 고려원이 도산해서 사라진 후 사조삼부곡은 김영사에서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했다. 사조영웅전이 2003년, 신조협려가 2005년, 의천도룡기가 2007년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예전에는 고려원본을 비롯해 대부분이 정식 라이선스 없이 무단으로 번역 출판되었지만 한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한 것이 1996년, 홍콩이 베른협약에 가입한 것은 1997년이므로 이 이전에는 홍콩의 저작물은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었다.[30] 조약 가입한 후로는 소급효가 적용되므로 당연히 정식 라이선스가 필요하다.[31]
- 북한에서도 그의 소설을 읽는다고 한다. 김용의 말에 의하면 기존에 출간된 불법 판본들은 현재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 사람들이 읽고 있으며 북한군인도 즐겨 읽고 있다고. 이 이야기는 잘 아는 북한 관료를 통해 들었다고 한다. #
- 알리바바 그룹 창업주 마윈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용이라고 한다. 실제로 마윈 회장은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김용과 그의 무협소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마윈은 앞서 지난 2016년 2월 24일 김용의 92세 생일을 축하하는 동영상을 직접 제작해 타오바오 크라우드펀딩(淘宝众筹)에 올리기도 했다. 축하 영상에서 마윈은 “김용의 무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 기업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줬다”며 “창업 초창기, 알리바바 창시자 18명 중 16~7명 모두가 김용의 무협소설을 매우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용의 소설은 상상력과 낭만주의, 의협심이 풍부하다”며 “특히 정의를 실현하는 의협 정신은 나와 알리바바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마윈 회장의 김용 무협소설을 향한 애정은 알리바바 사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마윈의 사무실은 무협소설 색채가 가득한 ‘도화도(桃花岛)’로, 회의실은 ‘광명정(光明顶)’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회의실 내부에는 김용이 친필로 직접 쓴 문구 ‘못에 가서 물고기를 탐내는 것보다 물러나서 그물을 뜨는 편이 더 낫다(临渊羡鱼,不如退而结网)’가 걸려 있다. 이 밖에도 알리바바 직원들은 모두 무협 또는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닉네임을 갖고 있다.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소오강호(笑傲江湖)’ 속 고독한 검객 ‘펑칭양(风清扬/ 풍청양)’을 자신의 닉네임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평소 마윈 회장은 김용 무협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장을 자주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앞서 마윈은 지난 2014년 김용을 직접 만났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윈은 김용이 사망하자 성명서를 보내며 "김용의 죽음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의 큰 손실"이라며 "특히 그의 작품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여겨온 알리바바에는 더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애도를 표했다.
[1]
김용 본인에 대한 경칭
[2]
홍콩의 최고등급 훈장, 2000년 수훈.
[3]
대영제국 훈장 4등급, 1981년 수훈.
[4]
김용이란 필명은 용(鏞)자를
파자해서 만든 이름이다.
[5]
실제 후술되어있듯 오늘날 몇몇 교과서에도 김용의 작품이 실려있다.
[6]
NPR 기사
[7]
BBC 기사
[8]
물론
소오강호나
연성결 같이 실제 역사 사건과 별 연관이 없이 쓴 작품도 있다. 애초에 김용작 중 후반기에 속하는 이 작품은 주제 자체가 탈속한 삶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9]
덩샤오핑도 문혁 때 중국 공산당에 의해 큰아들이 장애를 얻고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다 손에 상처를 입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는 것이 아이러니.
[10]
이 때문에 친구이자 라이벌인
양우생은 필명으로 정체를 감추고 "김용 작품은 서구적이며 음탕하다."고 깐 적이 있다. 김용의 작품이 매우 예술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고룡도 언급했듯이 서양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적나라한 묘사를 은근히 많이 구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11]
김용이 만들어낸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기괴한 설정으로 당시는 물론 지금도 굉장히 많이 회자되는 등장인물이다.
[12]
중국 공산당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도 한 동안 금서로 분류하였다.
[13]
출처
[14]
출처
[15]
인지도야 <
수호전>, <
삼국지연의>, <
서유기>가 높다 할 수 있지만, 이들 작품은 서사와 격렬한 감정들의 묘사는 뛰어나지만, 일상생활의 정경과 섬세한 애정까지 아우르는 것은 아니었다. 홍루몽을 보면 이 작품이 과연 건륭제 시대에 나온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히 치밀하고 섬세한 인물묘사와 애정이 표현되어 놀라게 된다.
[16]
물론 구파일방 항목에도 있듯 와룡생의 구파일방과 지금 구파일방 개념은 다르다. 애초에 개방은 김용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
용대운과
야설록이 대표적이다.
문정후도 고룡의 영향을 제법 받았다.
[18]
예광이 대필했던 부분은 모용복 등장 직전부터 36동 72도주 등장시점까지. 국내 신수판 번역기준으로 6권 후반부터 7권 후반까지 구간이다. 모용복이 등장하고 얼마되지 않아 정춘추와 싸움으로 아자가 실명한다. 이는 아자의 잔인함에 학을 뗀 예광의 조치라 하며, 이후로 아자의 행동이 큰 폭으로 감소한다. 물론 이때부터 소봉이 오래도록 등장하지 않고 허죽이 주인공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
3권짜리로 영웅문의 진짜 영웅 왕중양이 주인공이다. 천하오절이 총출동해 왕중양이 넘버원맨이 되는 과정을 실었다. 시대상 화산논검과 사조영웅전을 잇는 소설
[20]
그 후속작인
무림군협전은 결국 국내 정식 발매되지는 않았고, 이를 한글화 하려는 일반 유저들이 오랜 시간 끝에 힘을 모아 작업을 했으나 완벽한 한글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92% 한글화로 멈췄다. 최근에는 무림군협전을 리메이크한
협객풍운전의 한글화가 완료되었다.
[21]
중국산
웹 게임을 그대로 가져와서 서비스하는 국내사정상 정식 서비스된 물건도 많다.
남제북개라거나
일대종사라거나.
[22]
최고등급.
[23]
물론 신해혁명 이후의 현대 인물은
중국어 '진(jīn)'으로 읽는 것이 원칙이지만 '김용'의 예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24]
앞서 천룡팔부를 대필했던 그 작가로 무협 소설(육지금마 등)도 있지만 그 쪽보단 사이언스 픽션 쪽을 주로 집필했고 이쪽으로 더 유명하다. 원진협(原振俠), 위슬리(衛斯理) 시리즈가 대표작.
[25]
그가 출연한 몇몇 음식 프로그램의 제목을 김용이 손수 친필로 적어서 로고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채란 쪽 말고 김용이 직접 타이틀을 친필로 작성해준건 ATV의 해외
화교를 다룬 다큐멘터리 尋找他鄉的故事 정도.
[26]
장철과 김용은 비슷한 또래(장철은 1923년생, 김용은 1924년생)에 대학동창이었기 때문에 절친했다. 또
천룡팔부의 일부분을 대필할 정도로 김용과 절친했던 작가 예광은 장철과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이 매우 친했고, 장철은 말년에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벽혈검,
비호외전,
협객행을 영화화 하였다. 김용과 장철은 대학동창이라는 점 외에도 김용이 한 때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도 연출하기도 하는 등 영화에 손을 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친했을지도 모른다.
[27]
다만 다른 인터뷰에선 '후기로 갈수록, 장편일수록 명작'이라고 말한 적도 있긴 하다.
[28]
서지마(徐志摩(쉬즈모), 1897~1931)라고 하는 당대의 유명 낭만주의 시인이었으나 35세의 젊은 나이에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다 사고로 추락사했다. 그의 필명이 운중학이었는데,
천룡팔부에서 운중학이라는 색마 악역이 등장한다.
[29]
출처: 한기호 (2011년), 『베스트셀러 30년』,
교보문고, 76쪽과 122쪽.
ISBN 978-89-94464-84-8.
[30]
국가간 저작권 보호는 호혜주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너네가 우리 걸 보호하지 않는데 우리가 너네 걸 보호할 이유가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양자/다자간 조약으로 해결한다. 한국이 1957년 일본법을 베껴 처음
저작권법을 제정했다. 여기에 외국인의 저작물도 보호한다는 규정이 있기는 하나 그냥 립서비스다. 1996년에는
베른 협약에 가입하였고 저작권법 개정으로 소급효도 인정되게 된다.
홍콩은 1997년에서야 UCC와 베른 협약에 가입했다. 이 때를 홍콩과 한국이 서로 저작권을 지켜줄 의무가 생긴 시점으로 봐야한다.
[31]
다만 새로 번역 출간할 때에는 정식 라이선스가 필요하지만, 베른 협약 적용 이전에 국내 출판된 서적은 계속 인쇄해서 판매할 수 있다. 또한 베른 협약 적용 이후에 새로운 번역자가 내용을 추가하는 등 개정판을 내더라도 기존의 주요한 창작적 표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면 베른 협약 이전에 출판된 것과 동일한 저작물로 보아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다(대망 사건). 따라서 김영사 이외 다른 출판사의 판본들도 '정식 라이선스는 없지만 저작권법 위반은 아닌' 상태로서 합법적으로 판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