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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覇) 월(越)나라 35대 국군 2대 왕 월왕 구천 越王 勾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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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미(羋) | ||
휘 | 구천(勾踐, 鳩淺[1]) / 담집(菼執)[2] | ||
아버지 | 월왕 윤상 (越王 允常)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520년 추정 ~ 기원전 464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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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제35대 군주이자, 제2대 왕. 범려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멸했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2. 생애
2.1. 오왕 합려에게 승리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 아버지 윤상(允常)이 사망하자 태자 구천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이때 복상 중이었는데, 윤상의 부고를 알게 된 오왕 합려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구천은 결사대를 구성하여 맞서 싸우면서 집단 자살을 시켰고,[3] 눈앞에서 벌어진 난데없는 집단 자살쇼에 오나라 군인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틈을 타 본대로 기습을 가했다. 이 계책으로 취리(檇李)에서 오나라 군대는 월나라 군에게 대패하고, 합려는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어 이로 인해 진중에서 죽는다.2.2. 오왕 부차에게 패배
월왕 구천 3년(기원전 494년), 오나라에서 태자 부차가 오왕으로 즉위했으며,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오나라를 부흥시키고, 부차는 구천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이 소식을 들은 구천은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석매를 보내 오나라를 먼저 쳐들어갔으나 대패하여 오히려 월나라의 도읍이 포위되고 말았다. 부초 전투에서 크게 패한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구천은 범려의 진언에 따라 부차에게 항복하며 부차는 이를 받아들였다. 중신 오자서가2.3.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
그러나, 왕이었던 구천은 오나라에서 부차의 노비 노릇을 하게 되었다. 몇 년간 치욕을 겪다가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사기에는 월왕 구천이 아닌 범려가 잡혀갔다고 적혀있다. 그마저도 2년 후에 풀어주었다고 하며, 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은 열국지인데, 열국지는 정사가 아닌 소설이다. 즉 와신은 정사지만 상담은 소설이라는 것. 심지어 열국지의 출처가 되는 춘추좌씨전에도 부차에게 잡혀가서 쓸개를 핥았다는 말은 없다.
- 미디어에서는 구천의 아내가 부차의 첩 노릇을 하기도 한다.
-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차가 병이 들자 범려의 간언을 듣고 부차의 똥을 핥았다.
- 구천이 부차의 마부 노릇을 한 적도 있다.
2.4. 복수의 칼을 갈며 월나라를 부흥시키다
월왕 구천 7년(기원전 487년),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겉으로는 부차에게 복속된 척 하면서 은밀하게 오나라의 국력을 악화시키고 월나라의 국력을 키우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매일 쓰디 쓴 쓸개를 핥아먹으며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 자식을 많이 낳은 집에는 세금을 덜 내거나 면제하는 등 출산과 결혼을 장려했다. 나이든 여자가 젊은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는 등, 결혼 통제 정책을 펼쳤다.[4]
- 범려의 계책에 따라 오왕 부차에게 재물과 미녀 서시를 보내서 부차가 국사에 전념하지 않고 쾌락에 빠지게 만들었다.
2.5. 월나라의 역습, 오나라의 멸망
오왕 부차는 서시와의 향락에 빠졌으며, 간신 백비의 말을 듣고 명신 오자서가 자살하도록 만드는 등, 오나라의 정치는 혼미해졌다.결국 오왕 부차가 중원의 회맹에 나갔을 때를 노리고 구천이 오나라를 공격했다. 부차는 당황하여 오나라로 되돌아와서 황급히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부차는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구천은 순간 망설였지만 범려가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다만 전에 자신을 살려줬기 때문에 차마 죽일 수가 없었는지 백호의 장[5]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산에서 얼굴을 가린채 자결했으며 오나라는 멸망했다. 한때 패자의 위세를 떨치던 강성한 오나라는 고작 몇년 만에 허무하게 멸망하였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구천은 중원의 제후들과 회맹을 하고 패자가 되었다.
2.6. 토사구팽?
구천은 복수에 성공하고 월나라의 전성기를 열었지만, 모든 것을 이룬 후에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아는 신하들을 죽일 것이라 예상한 범려는 잠적해버리고, 명신 문종을 자살하게 만들었다[6]. 월나라 전성기는 길지도 않았고 구천도 오래가지 않아 병사한다. 구천의 사후 월나라는 쇠퇴하였으며 결국 초나라에 멸망하고 만다.3. 평가
한자문화권에서는 고난과 복수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군주가 고난을 겪을 때 신하들이 구천을 언급하면서 위로하는 것은 거의 클리셰 수준.[7]하지만 정치가 워낙 혹독하고 잔인했으며, 말년에는 그 자신이 고난과 복수를 함께한 명신들을 신뢰하지 못해 숙청해버렸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천하통일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오나라 하나만을 멸망시켰을 뿐인데 성급하게 유능한 대신들의 토사구팽에 들어섰다는 점도 거론되면서 원대한 포부를 가지지 못했다고 평가 받는다. 적어도 비교대상인 부차는 제나라 정벌을 진행하고 회맹에 끼여들어 패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확실하게 내비쳤으니 포부만은 구천보다는 컸던 셈이다. 실제로 월나라는 구천 이후로 그 국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채 소극적으로 행동하다 내분으로 점점 약해지고 결국 국력을 회복한 초나라에게 허망하게 멸망하고 만다.[8]
4. 유물
- 전설에 따르면 구천은 '월왕 구천검'이라는 8자루의 명검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1965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지는 동검이 발굴되었으며, 월왕구천검이라고 써있었다.
5. 기타
- 황산벌 전투의 명장, 계백 장군도 전투를 앞두고 “옛날 월왕 구천도 5천의 군사로 오나라의 70만대군[9]을 물리쳤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라는 언급을 하며 사기를 북돋기도 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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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왕구천검(越王句踐劍)에 새겨진 명문에 적힌 이름.
[2]
사기색은(史記索隱),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
[3]
노역을 시키려고 끌고 온 사형수들에게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을 대가로 자살을 시킨 것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고, 인터넷 상에서도 역사적 사실처럼 기술된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사형수 자살은
열국지에서 창작된 허구이다.
사기 원문에는 "越王句践使死士挑戦, 三行, 至呉陳, 呼而自剄(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는데,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그어 죽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물론
사기에 기재된 내용이 믿기 어렵기도 하다. 명령에 따라 자살을 할 만큼 정신력이 뛰어난 군인이라면 정예병에 가깝다는 건데, 그걸 적군을 하나라도 줄이는 데 쓰지 않고 자살시키는 것은 바보짓이고, 그런 짓을 하면 아무리 적군이 당황하더라도 패배하는 게 정상이다.
카미카제 참조. 차라리
관창이나
김반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을 하는 게 득이다.
사기의 기술 자체가 너무 황망하다 보니 창작이 좀더 설득력이 있고, 마치 실제 역사처럼 리얼하게 와 닿는 것이다. 저런 자살쇼는 한 사람이라도 두려워서 실행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사기에 떡하니 기재되어 있으니 그런 일이 있다고 믿는 것이지, 실제로 자살쇼를 기획한다고 하더라도 연습을 해 볼 수도 없으므로, 막상 실행단계에서 일사불란하게 자살 퍼포먼스에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4]
나이 든 여성은 난임 확률이 크게 올라가며 젊은 여성 대비 출산시 사망, 유산, 장애아를 낳을 확률이 높다. 구천은 한 나라의 왕이라 백성들에게서 경험으로 전해지던 정보를 취합해야 하는 위치였으니, 이 지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5]
호는 가구를 세는 기본 단위로, 백호는 1백가구. 즉 왕에서 동네 이장으로의 대강등이며, 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 셈이다.
[6]
누군가 '문종이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라는 참소를 올리자, 문종에게 보검을 내리면서 "일전에 경이 오를 멸할 7가지 계책을 올렸는데, 과인이 3가지를 써서 오를 멸망시켰다. 남은 4가지는 경이 지하에서 선왕을 모시면서 시험해보는 것이 어떤가?" 라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문종은 결국...
[7]
좀 다른 사례로 인조 시기에는 와신상담이 12건 등장하여 숙종 다음으로 많은데 이 시기는 명청교체기 시기에 두 번의 호란이 터진 시기다. 헌데 인조의 경우 결국 와신상담에 실패했고 가능하지도 않아서인지 인조 15년에 직접 인조가 문서에 (와)신(상)담이란 말 쓰지 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8]
월나라가 제나라와 싸우게 되는건 구천의 4대손 예왕 때의 일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월나라는 강국이었지만(전대인 주구왕 시기만 해도 묵자가 당시 강국으로 제나라, 삼진, 초나라와 월나라를 들었다.) 아무래도 구천 때만은 못했는지 죄다 말아먹고 말년에는 도읍을 옮겨야 할 정도로 월나라가 쇠퇴한다.
[9]
다만 이건 과장이긴 하지만 그 만큼 수많은 오나라 군대들을 상대했다는 이야기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