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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갈등/아시아/대한민국/대지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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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 분단 이전

조선은 기본적으로 각 지방의 역사성을 인정하던 국가였으므로 지역갈등이 1980년대 영호남 수준은 아니었다. 평안도보다 인구가 적고 정치적으로 구한말까지도 한양에 큰 대항을 못한 오지인 함경도조차 조정에서는 한치도 버릴 수 없다고 하며 백두산이 중시되기도 할 정도였다. 신분 갈등이 컸으며, 앞에서 언급한 한양 북촌/남촌간 지역 갈등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낮은 사람이 사는 지역을 차별하게 되는 경향까지는 있었다. 이런 갈등의 원인은 현재와 달리 신분제에 있었으므로 현대적인 지역갈등과 무관하며, 이것이 지금도 이어졌다면 지금도 양반 가문을 출세시켜야 한다.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는 갈등만 여기에 서술한다. '서북' 지방은 북한 안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일단 이곳이 '상놈'이 주로 산다고[1] 정치적인 면에서 나쁘게 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으며, 애국가를 평양 출신이 지었다고 나쁘게 보는 인식이나 마라토너 손기정이 평안도 출신이라고, 숭실대학교가 평양에서 유래한 학교라고, 유한양행이 평양 출신이 세웠다고 차별하는 인식은 없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악감정은 북한 정권이 주된 원인이다. 특히 분단이 되자 가장 통일에 대한 열망이 강한 쪽은 남쪽을 주로 택한 실향민이었다. 아예 청죽회라고 하는 국군의 파벌은 서울 사람과 북한 지역 출신 육사 생도들이 영남 출신 육사 생도가 많던 하나회와 대응하던 곳이고, 이 파벌은 갈려나갔어도 지역보다는 정치적 안배가 중요했기 때문에 고향이 북한에 넘어간 백선엽 같은 인사는 박정희와 친분이 있어 출세하기도 했다. 훗날 임동원처럼 정계에 복귀하여 한국의 장관 등을 지낸 고향이 평안도인 청죽회 출신도 있다.

1.1. 한성 vs 관서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방에 대한 양반, 벌열(고관대작이 많은 집안)이 살지 않는 지역의 신분제에서 파생된 차별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한양에 많이 살던 벌열 같은 상류층의 이너 서클이 나머지들을 차별한 것이지, 한강 이북에 해당하는 지역 자체가 노비도 적기 때문에 남쪽보다도 노비의 가격이 몇 배 비싼데 과거에 합격한 이름만 양반이거나 중인 이하의 아주 낮지는 않아도 특별하지는 못한 계층이 차별받은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경제력이 지방 중 가장 강한 지방 중 하나인 평안도에서 정치적인 면에서 저항이 두드러졌다. 평안도 사람들만 유의미하게 차별을 당했다기보다는 서울 사람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지방 사람들이 열세에 있었다는 의미로, 세력이 강해진 평안도 사람들이 공론화를 좀 했을 따름이지 실제로 호남, 영남 등에서도 이와 같이 자신들이 차별받는다는 인식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북한에 넘어가면서 정보는 부족해진 마당에, 현재적 관점에서 지역차별을 논하면서 한국 인터넷 상에 과장된 주장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2020년대 정도되면 분단 이전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심지어 노년층마저 공식적으로도 저런 주장을 하기도 한다. 1960년대에만 해도 경성(서울)과 평양의 축구경기인 경평전을 다시 보고 싶고, 남하하지 못한 여러 선수가 북한의 밑에서 신음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어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주장도 있었으나 #, 후대에는 그 소문이 왜곡되면서 한일전 같은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진지하게 나올 정도다. # 김용식[2]처럼 경성 팀 출신이 평양 팀으로 이적하는 사례도 당시에 있었는데 말이다. # 경상도는 평영남비니, 전라도는 정여립의 난을 들며 악의적으로 차별을 과장하는 주장이 많지만 이 지역은 북한에 넘어가 사실검증조차 매우 어렵다.

평안도는 '영남'이나 '호남'처럼 '관서 지방'이라는 별칭이 있다. 함경도의 경우 평안도와 경제적 여건의 차이도 크고, 왕실 출신 끼리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이나 아예 자치를 요구하던 이시애의 난[3]처럼 대결의 양상도 좀 달랐고 조선 중후기에는 타 도에 비해 약한 경제력에 대단한 저항이 보이지 않았다. 차별에 저항할 때는 자신의 도를 좀 도와달라고 그랬지 북한 정권을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시대이기에 함경도나 평안도 등이 같이 연합하려는 경우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영토 편입의 역사부터 강동6주와 공민왕의 영토 수복만 고려해도 3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고, 영토 편입의 시간이 오래되어도 문화적으로도 함경도는 민요가 평안도가 아니라 아예 강원도와 경상도와 엮여 '동부민요'를 이루는 등 평안도와 이질적인 지역이었다. 평양과 서울의 거리의 두 배 이상이 평양과 함경도의 청진의 거리며, 평양과 서울 사이에는 비교적 낮은 1000m를 넘는 산도 드문 멸악산맥이 있지만 함경도의 큰 도시로 가려면 백두대간을 넘어야 한다. 특히 북쪽에는 한라산보다 높은 산들이 장애물로 기능한다.

독립협회는 기호지방인 고려 왕조의 중심이었던 개성이나 강화도까지 한양에 비해 차별받았다고 보았고, 평안도 쪽에서 난을 일으킨 세력도 호락논쟁 등 주류 성리학계의 논쟁에서 패배한 비주류 노론이나 영조대 이후 정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소론들이었다.[4] # 평양에 비하면 역사적 중요성[5]도 언급되지 않고, 18세기 들어 경제 발전을 이루며 일제강점기는 돼서야 남부에 비견되게 성장한 함경도, 출륙 금지령까지 내려진 제주도[6]보다는 사정이 나은 부분도 있으나 이중에서 그나마 대규모 저항이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라이벌이 되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다만 평안도는 물론 함경도, 제주도도 이제마 북청 물장수, 김만덕의 사례처럼 1980년대 영호남 마냥 인간적인 갈등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아직 근현대적인 조직적 정치선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이때의 지역갈등은 일종의 라이벌 의식에 가까웠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평양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이태준의 패강랭에 보면 잘 드러난다. 그것도 평양에도 좀 괜찮은 문물이 있다는 것 정도지 오늘날로 따지면 '경향분기'라는 극심한 정계에서의 모든 지방 차별을 제외하면 서울과 부산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다.

게다가 평안도끼리도 자기끼리 뭉친 것이 아니었다. 1717년의 관서변무소 사건에서는 평양에는 선현의 유풍이 있지만, 나머지 지역은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특히 청북 지역은 더욱 문란하고 혼탁하다는 식의 암행어사 여필희의 상소문을 비난했는데, 청천강 이북과 평양의 갈등이 있었다. 심지어 평양과 청북(청천강 북쪽)의 유생들끼리 “자기들이 서로 원수처럼 원망하게” 되었다. 청북이라도 강계와 같은 지방은 오히려 여필희가 보여준 정치적 행동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아예 이 당시에도 개인적으로는 한양의 사대부들이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마저 존재했다. (pdf) 이재난고라는 영정조 시기에 쓰인 이재 황윤석의 일기에 "최근 재상과 명사들이 관서 사람들에게 문,무과 생원, 진사를 막론하고 기생에게 대하듯이 아끼고 잘 대해주어서 관서(평안도) 사람들이 오히려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에"라는 식의 언급까지 등장한다.

사투리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지방 사투리가 비하받는 경우는 적어도 서울말이 우선이었고 #,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런 인식이 심해져서 전라도 군산 출신인 채만식이 자신의 고향 사투리가 영남이나 관북(함경도)·관서(평안도)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든지, 함경도 경성 출신인 김광섭도 고향 사투리가 문학은 물론 연애에도 불리하다고 할 지경이었으며, 특히 평양은 평양 토박이인 주요한처럼 광복 후 한국 정치인으로 일한 인사가 평양은 문화적으로 뒤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평양 출신의 문화인이나 예술가는 평양보다는 경성(서울)을 무대로 하고 활약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 패강랭이라는 소설에서도 평양 기생이 아예 말투를 서울말로 고치는 묘사도 등장한다. 몇몇 남한의 지방 사람보다도 사투리에 대한 자부심이 낮은 모습마저 섞여 있다.

1960~80년대까지는 대한민국 한정 함석헌, 이승만처럼 이것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노년층도 있었으며, 당시에는 이것을 '한국의 지역갈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린이 행진곡 같은 동요에서 아이들의 고향이 함경도, 평안도 등으로 나오는 등 진심으로 북한이 통치하는 곳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여겼다. 북한에서는 유일사상을 위해 지역주의를 죄악으로 여기고 적화통일을 강조했기에 그 언급조차 찾기 힘들다. 북한은 대체로 남한의 주민을 지배층에 억압받는다는 식으로 교육하며 주민을 적화통일, 즉 '해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안창호조차 근원적으로는 '상놈' 출신이었기에 한양 출신이 많은 양반 계층이 차별했던 것이다.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를 서울에서 조직된 수양동맹회에 합친 인물이 안창호다. 그의 이름을 딴 도산공원은 그래서 남한에서는 서울에 있다. 한양 출신도 양반에 가깝지 않으면 안창호를 지지했고, 황해도 출신이라도 이승만 같이 양반가라면 그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에서도 양반과 무관한 사람이면 평양박치기가 '종로는 조선의 자존심이다'라고 주장하는 구마적을 모시는 식의 묘사가 등장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에는 이것을 거의 기억 못해 교과서에서 '차별'이라는 단어만 보면 남북한 문제, 영호남 지역갈등, 아니면 현대에는 평안도보다 접하기 쉬운 유럽 여러 국가의 지역갈등과 유사한 양상으로 오인할 여지가 있으나 문화나 경제적 교류[7]는 활발했으며, 이 시대의 지역갈등의 원인은 신분제의 철폐로 사라진지 오래다. 사회주의에 가장 반대가 심한 평안도에서 외세에 아부하여 얻은 총칼로 권력을 잡은 김일성에 의한 분단과 6.25 전쟁에 결부되는 증오가 아니었으면 평양 출신 숭실대학교, 함경도 출신 이제마를 현대 한국인이 대하는 것처럼 정말 제주도 같은 평범한 지역으로 여겨질 수 있던 곳이었다. 분단으로 지역감정이 약해졌다는 주장은 북한 주민까지도 원래 사악하나 분단으로 갈라졌으니 더 이상 설치지 않아서 착하게 착각하게 된다는 주장과 다름 없는 혐오에 기반한 주장이다.

이 지역갈등은 평안도 지역의 경제력은 높아졌으나[8] 상대적으로 정치에서 차별받고 유교적 질서가 비교적 약화된 조선 말기에 두드러진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할 수준의 권력은 부족한 편이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신분 제도에서 파생된 갈등이었기 때문으로, 한마디로 평안도는 이곳 출신이면 아예 진정한 양반이 없어 '상놈'이 된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양상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 같은 개혁론자들 또한 관서지방에는 양반이 없다며 무시하는 등에서 그 실태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진짜로 역사와 같은 명분을 내세우면 어떤 학자도 그곳을 폄하하지는 못했고, 그나마 현대에 비유하면 '현명함' 같은 것이 거론되어[9], 그곳 사람들이 수능은 못 보지만 수시로 대학을 잘 간 것과 유사한 양상 때문에 불만이 있던 정도다. 윤두수와 같은 평양과 출신으로는 별 상관없는 인물마저 평양에서 기자의 존재를 부각시킨 이래 기자는 문명의 상징이 되어 평양의 도시 이미지를 새로 거듭나게 했다는 설도 있다.

백제 멸망 이후 몰락해서 흔적이 옅어진 백제의 수도들이나 옛 신라의 수도로서 많은 유물들과 사적들이 존재하지만 영향력과 중요성을 많이 잃었던 경주와는 다르게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고려 왕조가 매우 아끼는 도시였으며 그때부터 수도에 이은 제2의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에 기인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이는 서경별곡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이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그런 것들 때문에 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8년 3경에서 강등당한 동경(경주), 남경(서울)과 달리 평양은 공민왕 대까지 개경과의 선이 그어졌을 뿐 제 2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향유했다. 다만 이때도 원 간섭기의 혼란으로 인적, 물적 자원은 상당히 크게 파손된 상황이었다. 그나마 황해도(당시 서해도)는 고려시대 내내 많은 정승들을 배출하며 수도권 주요 배후지로서 기능하였다.

평안도의 지위는 경제적으로는 모를까 정치적으로는 조선시대 거의 내내 소외되었다. 평양부 문서에는 역사, 경제적으로는 조정의 관심이 있으나 이에 반해 출세길은 막히는 현상이 언급된다. 우선 원 간섭기, 여말선초에 홍건적의 난 등 북방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이곳이 초토화되어 명문가가 될 사람이 적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원 간섭기의 혼란에도 살아남은 평양 출신 영의정 조준의 가문 같은 소수의 예외가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조준의 평양 조씨 가문도 조준의 손자 대 이후로는 공을 세우지 못해 정치에서 밀려난다.

1633년 인조 대에도 이미 이에 대한 우려가 조정에서 나온다. 이조에서는 "하늘이 인재를 내는 데 있어서 문벌에 관계가 없는데 또 지방에 따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라고 운을 떼고, "조종조에서는 서북 사람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재능과 품행이 있으면 대각(臺閣)을 두루 역임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백여 년 전에 문형()[10]을 맡은 어떤 재상이 서쪽 지방에 사신으로 갔다가 본도의 선비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사리에 맞지 않은 말을 지어내어 처음으로 양계(兩界)[11] 사람들이 청현(淸顯)의 벼슬을 못하게 막았기 때문에 먼 지방 사람들이 다시금 명성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 성대(聖代)가 중흥하여 만화(萬化)가 다시 새로워져 한 시대의 인재가 모두 발탁되었는데도, 유독 서북인들만은 아직도 잘못된 구례(舊例)를 따라 마치 외방 사람처럼 무관하게 보고 있으니, 이는 천지와 같이 넓고 큰 성덕(聖德)에도 오히려 유감된 점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우려를 하고 있다. #

분단으로 인해 북한에 편입된 지역의 서원에 대한 정보가 적어 서원 분포까지 차별이 있었다는 생각도 있다. 그런데 서원 정도면 그나마 지역적으로 평등한 편이라, 조선 초기에는 오히려 평안도에 경기도보다도 서원이 많았다. 조선 후기도 경상도가 서원이 많은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사항이 없다. # 서원은 오히려 조선 후기에는 전라도보다도 많았지만 이미 정치적 실권과 그 분포가 크게 연관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지금보다 더 심한 서울 공화국의 측면이 있었다. (pdf) 병자호란까지의 상처가 심한 17세기 이후부터 이런 경향이 있다. 1661년 현종 시기에는 한양과 삼남 사람만 높은 직위에 있고, 황해도와 평안도와 함경도는 물론 남한이 주요 지역을 차지한 강원도까지 그런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없다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백년 뒤 정조의 시기에는 18세기 후반부터 급작스럽게 평안도에서 과거 급제자가 늘어났는데, 지방 안배를 위한 식년시 같은 시험에서 전국에서 두번째로 문과급제자가 많은 고장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 인구의 2.55%에 불과한 한성부 거주자가 전체 문과 급제자의 43.01%를 차지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 그전 인조~숙종 시기 중요한 관직인 청요직에 오를 수 있는 승문원 분관자 중 한성 출신이 96명 중 73명, 충청도와 경상도만 5명을 넘길 수 있었고 경기도와 황해도 출신까지는 그런 사람이 극소수 있었지만 평안·함경·강원 지역에서는 1명도 이런 사람이 없었다.

정조의 언급에 따르면 함경도 사람은 6품에서 멈추고, 영호남 사람의 등용에서도 '제일 낮은 관직조차 (인사 담당 관리를) 반드시 일깨워 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평안도는 인재 등용이 절실한 곳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개성, 강화처럼 서울이 아니면 아무리 서울과 가까워도 무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안도는 조선 극초반과 구한말을 제외한 500여년 동안 주요 정승 하나 배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효종대의 선우협(1588~1653)[12]이라는 문인까지만 제대로 평안도에서 등용된 인물이라고 파악했다. 함경도는 조정 차원에서는 영흥, 함흥 등 '풍패지향'[13]이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이 주목받기는 해도 인구 자체가 적어 아예 대한제국 시대 즈음 돼서야 이용익[14] 등 정치계에서 유명한 인물이 등장한다. 고려 시대에 함경도는 아예 고려의 영토가 아닌 곳이 많아 조정 인사 자체를 배출할 여력도 없었고 평안도도 고려 말에는 아예 원의 통치를 받다가 공민왕 때 수복하는 혼란에 비슷한 처지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이는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으로 경제력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도 영향을 미쳐 과거 합격자의 수에 비해 높은 자리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폐단을 낳아 결국 홍경래의 난 같은 극단적인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청천강 북쪽 청북이 평양이 있는 청남보다 과거 합격자가 많았고, 저 당시는 평안도가 경상도보다도 과거 합격자가 많았다. 평안도의 유생은 '삼남과 대비한[15]' 지역적 요구를 주장하지도 않은 가운데 급격한 문화적 성장과 '경향분기'라는 충청도의 호론과 남인 중 영남마저 한양의 경남이 제압하는 한양이 우세하는 흐름 때문에 한양과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교적 충의를 강조하여 평안도 출신이 이런 반란자를 제압하는 양상도 있었다. # 예컨대 임상옥 같은 평안도 상인은 이 홍경래의 '반란군'을 진압할 '의병'을 지원하기도 했다. 일단은 이 의병이 평안도의 권력을 잡아 어느 정도 평안도 문인이 중앙에 더 활발히 진출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 임상옥은 중인 출신이기에 당상관은 되지 못해도 다른 어떤 조선의 지방의 중인 출신에 비해서도 정치적으로 출세한 편이었다. 문제는 평안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와 유사한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최충, 척준경, 정중부, 최충헌 등의 주요 조정 인사를 배출하여 삼남에 아웃풋이 크게 밀리지 않았던 황해도(서해도) 역시 조선시대에는 정계에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는데 조선조 500년간 당상관급 관료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다만 이곳을 본관으로 하는 연안 이씨, 평산 신씨, 문화 유씨, 해주 최씨 같은 명문가가 있어 당상관급 관료를 배출하는 경우는 있는데 출생지가 황해도인 경우는 찾기 힘들다. 이승만, 김구의 조상처럼 몰락한 양반 가문이 사는 경우는 있어 이들이 '기호파'의 주요 인물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애시당초에 좁은 면적으로 평안도는 물론 조선 말기에는 강원도 다음으로, 함경도보다도 인구가 적은 지역이었기에 특별하게 출세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실제 구한말 서양인사들 역시 평안도와 함경도인들이 겪는 차별의식에 대해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름난 조선시대 유명인들의 출신지를 찾아 검색해 보면 북삼도가 얼마나 소외되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특히 고려시대, 일제강점기 유명인들의 출신지도 찾아본다면 이들 지역의 지위가 조선시대에만 유독 얼마나 후퇴했는지 체감할 수 있는데 북삼도의 정치적 위상은 구한말에 가서야 회복한다. 이용익이 함경도계지만 황실의 총애를 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차별로 인한 한양-서북간 갈등은 현대에는 해학으로 해석하는 구한말 이전을 다룬 봉이 김선달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한양과 평양의 지역감정이 드러난다는 해석이 있을 지경이다. 다만 유의할 점은 조선 곳곳에 이런 설화가 있듯 '그 지방 사람이라서' 차별이 아니라 양반이 아니라 차별받는 점이 강하다는 점이다. 진주 쪽에서 박문수가 백정의 조카 노릇을 했다는 설화도 있듯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단결하지 못하고 편을 갈라 충돌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한 사례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해 한용운 선생에게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이 가져야 한다"고 하기에 만해가 왜 그러냐고 질문하니 "기호 사람들[16]이 500년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못했으니 그 죄가 크고, 서북은 500년간 박대를 받아왔으니 그렇다."고 주장했다가 만해 선생이 뒤도 안 돌아보고 인연을 끊어버렸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윤치호가 주장한 경력이 있다. 다만 이 주장은 안창호 문서에서 보듯 안창호가 지역감정을 부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지역을 차별한 조정 출신인, 고종 황제의 탄신일에 평양 쾌재정에서 연설을 하여 안창호가 유명세를 얻은 것이고, 한양에서 다음 연설을 할 정도로 본인도 한양을 중시하기도 했다. # 여운형은 경기도 출신인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일화도 있다. 두 파가 갈라진 가장 큰 원인은 신분 차이다. 그래서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이 기호파에 섰으며, 두 파가 싸운 것도 "한양 양반네"와 "변방의 상놈" 간의 갈등이었다고 한다. #

실제로 언급되는 일화는 윤치호가 평안도 사위를 받아들일 때 한양의 명문가가 들여선 안된다는 반대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대한민국의 평안도 출신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도 고려 때까진 안 그랬는데 조선 왕조가 들어서며 이유는 모르지만 조정에서 차별이 있었고 자신의 고향을 상놈이 많은 곳이라고 묘사하였다. #

그리고 개성 서울과 같은 기호 지방에 속하지만 개성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탓에 조선 왕조가 개성의 왕족들을 많이 죽이거나 탄압했기 때문에 개성 사람들은 조선 왕조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심지어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적대적인 감정을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개성과 평양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묘청의 난이란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왕족을 죽였다는 것도 무슨 아르메니아 대학살 같은 건 아니다. 개성시/역사 문서를 확인할 수 있다.

홍경래의 난 문서에 구체적인 지역감정의 사례와 이유가 나와있다. 아예 독립을 추구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고, 대한제국 평양부를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관군에 협력한 배신자들이 생겨 반란군이 진압당한다. 이들의 자부심은 고조선 고구려의 도읍이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자(상)에 대해서는 아예 남부지방을 기반으로 삼았던 통일신라에서도 의식하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옛 역사부터 따져보면 민족의 주도권이 평양부에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다. 당시 평양부를 제외하고도 서울 주변이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소외를 당하는 경우는 많았으며, 반역향 문서를 보면 한성과 경기도를 제외한 전 지방이 소외를 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는 유교적 질서가 약하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소외가 있었을 뿐이다. 채수영도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주장을 하며 충청도, 전라도에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여 이 고장 주민이 동조하기도 하거나, 제주도에서는 아예 홍경래의 소식에 자극받은 민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과 관련해 계급을 강조하는 주장이 많은 것이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홍경래의 난은 실패했지만 이 영향으로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고 묘사한다. # 봉이 김선달도 한양의 양반, 상인, 위선자를 골탕먹이는 내용이다.

다만 과거 제도 자체는 전 지역에 거쳐 기회가 주어졌기에 이것을 두고 조선 사회가 역동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평안도 정주 같은 곳이 중앙 정계 진출은 못해도 과거 급제자는 한양 다음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정조 같은 인물도 서북 지역을 포함한 지역 차별을 줄이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과거 시험 문서에 언급되듯 애초에 과거에 급제해도 명문가가 아니면 높은 관직을 얻기 어려웠는데, 이 지역은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가가 드물어 출세가 힘들었다. 심지어 과거 시험 문서에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호 지방, 특히 한양 명문가에 양반 계층이 있던 하삼도마저 밀리는 현상이 언급되는데, 하물며 양반이 드문 이곳은 더 심했으리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일제강점기 축구 시합들 가운데 경성부 팀과 평양 팀이 서로 겨루는 경평전이 유명했었다. 그런데 이 경평전은 오히려 민족단합을 위한 시도로 해석된다. 남북교류를 언급할 때마다 틈틈이 경평전을 부활하자는 말이 나온다. 1929년 조선일보 안재홍 부사장은 이 경기를 주최하는 자리에서 “조선의 양대 도회인 평양과 경성 두 도시의 친목을 위하여 실로 축복하여 마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당시의 지역갈등은 문벌에 의한 차별이 컸기에 그것과 상관없는 일반인 사이에 문화, 경제적 교류는 활발했고 조선시대에도 동학 농민 운동이나 임술농민봉기 같이 남쪽에서 시작한 봉기에 호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북 분단은 이것과 관련이 없다. 평양부는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듯 수많은 교회와 성당들이 지어지며 기독교가 우세하였고, 종교에 부정적이던 당시의 공산주의와는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당시 사회주의가 우세한 곳은 대구부였다. 우연히 소련이 북쪽에 있어 38선을 기준으로 북한이 점령되었을 뿐이다. 한경직 목사같은 북한의 탄압을 피한 기독교인을 대한민국이 받아들여 현재까지 기독교계에 반공 성향이 남아있다. 가장 극적인 예시는 고향 평안북도 신의주를 그리워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인데, 그는 경기도 출신의 심훈이나 여운형과 인연이 있었고[17]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받아 일제강점기의 광고에 나올 지경이었다. 아예 1988 서울 올림픽 최종 성화 봉송 주자였으며 지금도 손기정이 일본인처럼 소개되는 시각에 반대 여론이 크다. 게다가 그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북한군에 숨어사는 신세였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 정부가 세워질 당시 소련과 김일성에 의해 막대한 권력을 얻게 된 일부를 제외하고 그렇게 순순히 좋아하지는 않았으며, 심지어 신의주에서는 소련군 진주 1년도 안되어 관청을 점거하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탱크와 야크기로 진압당했다. 한국에서는 이를 '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로 부르며 70년대 초반까지 기념했다. 김일성은 '죽장군'이라며 가혹한 수탈을 싫어했지만 이미 김일성 밑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력을 얻었으므로 저항이 힘들었다. # 토지개혁 때도 전쟁이 끝나고 북한 정부가 약속을 어기며 땅을 빼앗자 엄청난 갈등이 있었지만 이미 김일성에 의해 한 자리를 얻은 사람들이 진압한다.

평안도 출신 조만식은 "고향을 묻지 마라"는 표어를 내걸고 지역감정 타파에 앞장섰다고 한다. # 평안도에서 태어난 가수 현미도 그렇게 대한민국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다. 북한의 표준어 문화어는 평양말을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과거에 쓰던 서울말을 썼다고 평가 받는다. 북한 헌법에서 1970년대까지는 서울이 자국의 수도로 명시되었다. 한반도 남부 지역과의 관계는 딱히 언급이 없고, 평안도 출신 백석이 〈 통영〉이라는 시를 지었듯 오히려 애착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서북지역의 차별을 다룬 택리지에서도 인품에 대해서는 경상도와 더불어 호평이 적혀 있었다. 저자의 고향인 충청도를 비롯한 경상도와 평안도가 아닌 지방들은 모두 폄하했는데, 이는 정치적 지지 기반을 중심으로 인물 평을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통일 한국의 경우는 북한 사람과의 가치관과 문맹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통일을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경제적 격차보다도 문맹성에 대한 혐오 정서가 커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시대의 지역감정은 북한에 대한 혐오 정서를 가진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이야기다. 이때의 지역감정이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하기 쉽다. 인터넷에서는 이를 과장하는 경향이 심한데, 평안도 실향민마저 깎아내린다든가[18], 여운형과 같은 경우는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독립운동 당시 한양과 평양은 싸우기만 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 # 이건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백제와 신라 간의 갈등이 전라도, 경상도의 지역갈등으로 비화된다는 주장, 더 비슷하게는 제주도가 모든 면에서 차별받는다고 주장하고선 이 차별이 현대에도 이어져 제주도의 모든 것을 멸시하게 된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즉 영호남 지역갈등과 비슷한 양상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많으나 그 봉이 김선달도 한양의 선비와 어울리는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19] 그러나 태영호 같은 탈북민은 북한이 개방하는 순간 한국에 알려진 각종 오해가 풀리며 오히려 악감정이 사라진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가령 미디어를 통해 진심으로 북한 주민이 사회주의를 좋아하는 것 마냥 북한 주민이 묘사되었으나 사실은 이들도 돈을 제대로 벌고 싶어하지만 그런 모습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 남북정상회담 당시 평양 사람이 딸 자랑하는 인터뷰 #가 인터넷에 퍼져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으나 묻히기도 했다. 인정할 부분이 있으면 그래도 인정해주던 조선시대와 달리 21세기가 이 지역에 대한 감정이 더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다만 사람들이 '평안도 지역감정론'에 대해 자세히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고향에 얽힌 실향민의 사연이 안타깝다든가, 음식점 상호에 평안도에 관련된 지명이 나와도 그게 어디있는지 모르고 그냥 상관하지 않거나,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말투가 어디 말투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다는 식의 반응도 있다.

분단 이전 이 지역은 오히려 상업 발달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지역이었으며, 평안도에서 과거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시대나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당시 조선에 해당되는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제도적 차별이 없어졌다. 심지어 지역차별의 양상도 평안도의 약한 유교적 질서와 연관되어, 북한이 가난해지고 신분질서가 공고해진 지금과 다르다. 함석헌 같은 사람은 상놈이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평등함을 옹호하던 사람이었다. 김일성은 그런 평등한 자기 고장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권력을 얻었다며 비열하게 보았다. 분단이 되자 북한이 싫어 월남한 실향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지역이 서북 지역이었다. 통일과 관련해서는 문화로 따지면 지역 문화가 어느정도 예절을 고려하고 말투가 서울과 상대적으로 비슷하며, 평양 신의주 같은 그나마 경제수준이 높은 도시를 보유한 평안도보다는 직설적이고 이질적인 말투를 쓰는 함경도가 차라리 갈등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2. 남한 VS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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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대한민국의 실효통치 지역 대 북한의 실효통치 지역 사이의 한반도 최대의 지역감정. 앞서 언급했듯 남북한의 갈등은 윗문단에 서술된 것과 전혀 관련이 없고 하나 예를 들면 한국전쟁 때 지금의 북한 땅도 통일로써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다가 전쟁터에서 숨진 사람들이 매우 많다. 실제로 속초, 철원 일대는 북한 정부의 땅을 대한민국이 통치하게 된 것이다. 지역감정임을 서술하기 위해 '남한'과 '북한'이라고 제목을 단다.

국제적으로는 지역감정이 아닌 사이 나쁜 이웃나라의 관계로 보며 실제로도 점점 그렇게 되가는 중이지만, 일단은 북한(김정은)은 '대한민국'은 영원한 주적이자 언젠가는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서로는 한반도 전체는 언젠가는 자신의 영토면 좋겠다고 하고 있으므로, 지역감정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북한을 외국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북한 쪽이 훨씬 상대를 자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탈북민은 아예 자신을 외국인 취급하는 것을 싫어한다.[20] 하다못해 결혼 관련 회사를 찾아봐도 이 사람들은 한국인으로 인정된다는 글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통일을 정말 원한다면 '북한 주민들을 ‘자원’보다 ‘동포’로, 북한 땅은 ‘착취 대상’ 아닌 ‘우리나라 땅’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 그만큼 북한도 한국 땅이라는 인식, 북한 안의 당 간부 중에는 남한이 '조선'의 것이라는 생각이 북한 출신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남북한 전역을 같은 민족, 한 나라의 땅으로 보는 북한 사람들[21]과 북한을 남의 나라로 여기는 경우도 많은 남한 사람의 가치관이 민족 정체성이 다르다고 할 부분이 있을 정도다.

탈북민의 경우 85%가 남한 주민에 호감을 갖고, 남한 주민은 67%가 탈북민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조사가 있다. #

3. 남한

3.1. 영남 vs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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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내 가장 대표적인 지역갈등 중 하나로, 내용이 너무 길어 문서가 따로 분리되었다.

3.2. 수도권 vs 비수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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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체가 많은 전국의 상경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체성적인 갈등은 없어 위의 영남 vs 호남만큼은 각자 출신 정치인들 간의 비난 및 비방과 인터넷상의 키배를 제외하면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22] 그러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감정은 대한민국에서 실질적으로 꽤나 심각한 지역감정. 과거에 비해 지방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수도권의 광역화가 갈수록 진행되어 21세기에는 수도권이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이상(약 2,600만)을 차지하게 된 반면에 비수도권은 위 영남 vs. 호남 단락의 경제적 갈등 기원설과 같이 비수도권 내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만 전략적으로 집중 육성된 수도권에 비해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지방소외론' 이 대두되었다.

차라리 호남의 경우에는 정치적 갈등 때문에 생겨났다고 했지, 이쪽은 한양 vs 서북만큼, 그 지역 갈등조차 수도권과 지방 간 갈등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는 것이다. 평안도의 홍경래의 난에 대해 충청도, 제주도에서 동조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신분과 연관된 문제가 크고, 문화 격차나 경제 격차와 관련된 문제는 적어 현재와 같은 갈등 요소는 그나마 적었다.

수도권과 달리 ' 지방'이라는 분류는 상호 교류도 적고 별 상관없는 지역들을 수도권이 아니라는 하나의 공통점만 가지고 한데 묶은 정체성이 모호한 용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역감정 구도는 지역별로 체감차가 크다.

그러나 다른 소모적 지역감정에 비해 이 쪽은 실질적 이권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수도권 규제 해제나 행정수도 이전 논란 때처럼 이권이 충돌할 때마다 다시 부각되고 있고, 지역감정에 이미 염증을 느끼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신지역주의의 발현을 억제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도 자기지역 중심주의가 조금씩 실체화되고 있다. 영남과 호남간의 지역감정은 사실 실질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의 살림살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기껏해야 정치 엘리트와 지역 토호 몇몇의 이해관계와만 결부되었을 뿐이지만, 이러한 지역감정은 지역감정이 아니라 지역갈등이라는 사회적 균열의 하나라고 봐야할 것이다.

수도나 최대 도시와 그 인근 도시들 vs 나머지 지역들간의 지역 감정은 단지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에 존재하기는 한다. 서울 공화국이란 용어에서도 나왔듯이 대한민국의 소용돌이적 구조, 즉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적 집중현상은 심각한 상황이라서 간단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23] 물론 근대화가 진전되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수도 또한 규모가 막대하게 커질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이러한 도시화는 정확히는 도농 격차를 훨씬 더 크게 유발하지 수도-지방 격차를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지방과 시골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항상은 아니더라도 종종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심각한 수도 집중 현상이 언어 습관에도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3.3. 부울경(PK) vs 대구경북(TK)

경상도는 대한민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도이며 부울경과 대구경북은 문화와 정치성향[24] 등 이질적인 부분이 많으나 같은 경상도라는 인식 하에 갈등이 억제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일상에서 서로 느끼는 감정은 크지 않은 편이지만, 지역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쌓인 것이 많다. 1980~1990년대 야구에서도 TK와 PK는 전라도 팀을 상대할 때까지는 아니어도 더비에 대해 은근히 경쟁심리가 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25][26]

특히 낙동강을 두고 여러 가지의 갈등을 빚은 사례들이 가장 유명한데, 대구 vs 부산의 갈등으로 1990년대 위천산업단지의 조성을 두고 갈등을 빚은 것이다. 과거 금호강이 오염이 엄청나게 심한 강이어서 낙동강 오염의 주 원인이 될 정도였으며, 1991년 페놀 유출 사건, 다이옥신 유출 사건 같은 굵직한 환경오염 사고가 터지면서 부산시민들 사이에선 ' 쟤들 때문에 우리가 똥물 다 마시는 거 아니야?'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상황. 또 대구가 상류지역인 구미 지역에 취수원 이전을 추진하면서 구미시와도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27] 심지어는 4대강 사업의 보 명칭을 두고 싸우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한 때 매우 미묘한 오월동주 관계였는데 1990년 1월의 3당 합당 1992년 대선 국면 때의 우리가 남이가 사건 등으로 사실상 같은 지지 성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오월동주 관계를 만들어낸 YS가 PK 출신이었기에 시작은 PK 주도였는데, 이에 대해 TK에서 반발이 거셌고[28] 이후 YS가 퇴임하고 한나라당의 성격이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 TK가 PK를 호구 취급하는 구도로 둘의 관계가 역전되어 2010년대에는 이런 상황이 극대화되었다. 한편, 양 사이의 제휴 관계가 아직 견고했던 2000년대 초반 호남 기반의 민주당에서 비주류로 묻혀있던 경남 출신 노무현 2002년에 기적적으로 당선될 무렵부터 노무현과 친노 진영 인사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PK의 정치 성향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2017년부터는 친노, 친문계가 주류인 민주당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지역으로 탈바꿈했고, TK는 기존의 자유한국당이 계속 강세를 보여 2017년의 정권교체와 이듬해인 2018년의 지방선거를 계기로 사실상 이 둘의 관계는 1990년 1월 이전으로 잠시 돌아갔으나[29] 2022년의 정권교체와 같은년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 당시에도 가덕도와 밀양 중 어디에 신공항을 짓느냐를 두고 TK와 PK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동남권 신공항 건설 논란에서 지역갈등이 심해지자 박근혜 당시 정부에서 밀양 신공항으로 내정설이 나돌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부득이하게 기존 가덕도신공항 밀양 신공항만 진행하던 용역에서 김해공항 확장안을 쑤셔넣어 2016년 6월 21일, 최종적으로 대구국제공항 국제선 200만여명을 김해 신공항으로 통합시켜서 3800만명 규모의 통합터미널을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2016년 7월 10일, 대구 경북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건설하겠다며 합의를 위반하고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국토교통부가 이를 지원함으로 인해 김해신공항의 터미널 3800만명의 통합규모에서 1500만명/1단계규모로 축소적용하고,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에 500만명/1단계, 1000만명/2단계로 추진을 지원하여, 결국 가덕도신공항 재추진의 빌미를 주게 된다. 이를 가지고 대구 시민들이 부산으로 원정을 가서 건설 반대를 주장하는 모습도 보였다. #

3.4. 광주전남 vs 전북

우선 문화권부터 전북과 전남이 크게 다른 양상을 띄고 있으며, 완주부터 김제에 이르는 전북 북부방언의 경우 충청 방언의 영향을 약간 받아 흔히 알고 있는 서남 방언과는 다른 여유로운 말씨를 지닌 덕에[30] 전북 사람이 전남 사람을 만나면 보수적이고 기가 세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또한 전라도의 소외를 막기 위해 뒤늦게 개발한 쪽도 거의 대부분 전남 지역이었고 이에 대해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전북 주민도 꽤 된다. 88올림픽고속도로(현재 광주대구고속도로)가 원래 전주로 연결되었어야 했는데 광주의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서 광주로 이어졌다는 카더라도 돌고 있다. 전북의 뉴스를 보면 광주와 전남의 개발 및 투자현황과 비교하며 투덜대는 내용이 많다. 혁신도시 공공기관 이전부터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방사광 가속기 유치전에 이르기까지 전라도 내 균형발전 타령하면서 알맹이는 광주전남이 쏙 빼가는 행태가 계속되자 영호남 지역갈등 이상으로 광주전남에 치를 떠는 전북 주민들도 있다.

최근에는 의과대학·공공기관 지역인재 광역화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다. 전북은 양과 질 모두 나주혁신도시에 후달리는 전주혁신도시로 인해 공공기관 지역인재 광역화를, 광주전남은 전북보다 인구가 2배 많은 거에 비해 의대 TO는 235명과 250명으로 15명밖에 차이가 안 나 의과대학 지역인재 광역화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31][32]

정치적으로도 전북 전남은 약간 이질적이다. 역사적으로도 박정희 정부 초기까지는 전북의 경우는 보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고[33], 1992년과 1996년에 보수정당 국회의원이 당선되기도 했다.[34] 광주광역시· 전남 지역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호남의 이미지처럼 민주당계 정당 지지 성향이 강하고 보수정당은 거의 발을 들이지 못하며(단, 여순광 제외), 가끔 진보 계열에 자리를 내주기도 하는 반면, 전북에서는 시,도의원이 가끔 보수정당에서 당선되곤 했다. 학생운동권 가운데 뉴라이트로의 전향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도 전북대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수성향도 있기는 하다는 거지,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지지와 비교할 바가 못된다.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호남 비하 중 홍어드립이나 광주와 관련된 지역드립을 치면서 전남 전북이 통째로 같이 엮이기도 했는데, 사실 전북은 상술한 것처럼 정치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엮인 것도 아니었고, 지역드립이 심화될 시기 우승하면서 홍어 드립이 엮였던 KIA 타이거즈의 메인 연고지도 아니었다. 이 때문인지 전북은 광주 전남지역과 엮이는걸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전남북 사이의 이질감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를 거치며 "호남 홀대론 외쳐서 뽑아줬더니 결국 전북 소외는 그대로다. 전북은 2중대일 뿐이었나"라는 전북의 불만이 쌓이면서부터였지, 그 이전까지는 전남북 사이에 딱히 갈등거리도 없고, 인적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으로, 5.18 당시에도 광주가 고립되기 전에 전북의 친척집으로 피신해있거나 연락을 주고 받은 광주 시민들이 꽤 있었는데, 전북에선 이런 친지들을 통해 실상을 들어 웬만큼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타지역에 비해 많았고, 뿐만 아니라 5.17 쿠데타의 첫 희생자가 전북대학교의 이세종 열사였던 만큼 이 참사를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았다.

3.5. 대전세종충남 vs 충북

이쪽 또한 서로 미묘한 감정이 있다. 그냥 충청도로 뭉뚱그려 묘사하는 언론매체가 많아 충청도 사람이나 지역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면 잘 모르지만, 충남과 충북은 서로를 다르게 생각한다. 다만 충남과 충북의 중심도시가 한 광역권으로 엮이니, 단순히 외부에서 봤을 때 그냥 충청도로 뭉뚱그려져 묘사되는 것일 수도. 대체로 충북에서는 충남에 개발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 및 박탈감이 있는 편이고[35], 충남에서는 충북이 어거지를 부려 일을 엉뚱하게 만든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대전의 경우 예전에는 충남 소속이긴 하였으나 독립 이후에는 기존 충남지역과는 이해관계가 달라진 부분도 많기 때문에 독자노선을 걷는 일도 꽤 있다.[36] 하지만 근본이 충남이니만큼 충북보다는 충남과 사이가 더 가깝다. 2012년부터는 세종시까지 끼어들어 구도가 더욱 복잡해졌다. 청주 지역에서 세종의 모태가 충북이라고 거의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세종특별자치시의 전신인 연기군이 청주 생활권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치원읍[37], 부강면[38]을 제외한 지역은 공주나 대전의 배후지 성격[39]이 강했으므로 전체적인 면에서 청주 생활권이라 볼 수 없다.

충청도는 동서로 길쭉하기 때문에 서쪽과 동쪽의 지역색 차이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즉 충남과 충북의 차이가 의외로 꽤 있다는 의미. 대체로 충청도 하면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서쪽(즉 충남 중서부)의 것에 가깝다.[40] 가운데의 경부선 라인[41]은 비교적 큰 도시들이 많아 지역색이 옅은 편이며[42][43] 충북 동부지역은 앞에서 언급한 충청도 스테레오타입과는 좀 거리가 있다. 충북 최동단인 제천시나 단양군 쯤 가면 행정구역만 충청도지 생활권도 문화도 모두 강원도에 가깝다. 충주시는 충북 동부 내지는 동부+북부 중심지로서 성격이 강했으나, 근대화 이후 도로/철도교통 측면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탓에 전통적인 힘은 상실했고, 제천시만큼은 아니지만 원주시 생활권에 가까워져려는 추세다. 도청 소재지마저도 지역색이 엷으니, 충북의 지역색이 충남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래도 충북 지역 언론은 충북이라는 이름을 꽤나 강조한다.

한편 충남북은 미묘하게 정치성향 역시 다른데, 양당제 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제3당이 있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충남(+대전, 세종)의 경우 지역정당(신민주공화당, 자유민주연합, 자유선진당 등)이 있었을 때에는 이 정당들이 나름대로 위세를 떨쳤던 반면 충북은 비교적 지역정당의 세가 약했다. 충청 지역정당이 사라진 현재에도 약간의 차이는 남아 있는 편.[44]

최근 들어서는 충청권 메가시티 추진, 국가철도망계획 공동 건의 등 힘을 모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랩허브 공모전에서 충북이 대전의 협력 요청을 무시하고 단독 유치전에 나서서 결국 누구도 유치하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거나 충북의 충청생활치료센터 공동 운영 약속 파기 등 여전히 이질감을 표출하고 있다. #

4. 북한

북한에서는 지역의 독자성을 내세우는 태도부터 '지방주의'라며 매우 싫어한다. 북한 교과서는 한민족은 아예 북방계와 남방계로부터 기원했다는 주장은 반동적이고 한반도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이에 매우 예민하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지역감정은 남한이 더 심하다든가, 한국 정치권에서 지역을 강조하는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의 민간이나 속설에서는 지역감정도 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민간의 감정이나 속설들까지 일일히 다 통제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일.

4.1. 평안도 VS 함경도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 함흥을 중심으로 하는 함경도 사이의 지역감정이다.

남북 분단이 지나고 두 지역 사이의 지역감정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다. 대체로 북한의 최대도시 평양과 그 다음으로 큰 도시인 함흥의 라이벌 관계로 보는 시각이 많다.

두 지역 사람들의 성격이나 특징도 꽤나 다른 편이라 이러한 감정의 골이 깊은 부분도 있다. 평안도 황해도는 평야지역이고 환경도 그나마 좋은 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유순하고 나긋나긋하며 느긋한 편이라고 한다.[45] 이것은 평안도 사투리만 봐도 그러하다. 반면 함경도 지역은 동해안을 제외하면 험준하고 가파른 산 지대에, 굉장히 춥고 척박한 지역이다. 실제로 함경도의 대도시들은 모두 함흥시, 청진시과 같이 동해안 지대의 평야에 모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드세고 생활력이 강하다고 한다. 함경도 사투리만 들어봐도 굉장히 억센 스타일을 보여준다. 게다가 서로간에 부르는 명칭도 특화되어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함경도 사람들을 '찔락이', 함경도 사람들은 평안도 사람들을 '북데기'라고 비칭한다고 한다.

어느 탈북자의 주장에 의하면 김일성조차 생전에 함경도 지역을 경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46] 심지어 반란 기도까지 있었다.

특히 평안남도 함경북도 간의 감정골이 특히 심한 편.[47][48] 그런데 북한 지도부에서 의도적으로 동서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내부적으로 하위계층을 의도적으로 동부에 고립시켜 왔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에게 두려운 것은 대부분의 인민이 단결해서 정권을 타도하려 나서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분열시키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함남지방( 량강도를 제외한)이 지정학적으로 북한에선 고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해가 아니면 탈출할 구석이 없기 때문에 적대계층을 격리시키기엔 알맞은 조건인 것이다. 지역드립 문서 중 북한 항목도 참조. 참고1 참고2 (4분 50초부터)

하지만 북한 지도부가 함경도 지역을 마냥 방치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 함경북도 회령시 출신이라서 회령을 선전 도시로서 기능하게 하기 위해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김일성 함흥 옥류관 못지 않게 큰 식당을 건립하도록 지시해서 대형 식당을 지었고 직접 신흥관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평양시 다음으로 큰 도시들은 함경도 동해안 지역에 있다. 물론 함경도 동해안 지역이 발전하기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발전한 면이 있지만.

또한 함경도 지역은 소련(현재의 러시아) 연해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북소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라 김일성도 중요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와 함경도 나머지는 대부분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기 때문에 그나마 함경도 동북방의 경우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기에 긴밀한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 연방이 된 이후에도 러시아-북한 국경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다만 통일 뒤에는 이 두 지역 사이의 지역감정이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 북한 지도부가 일부러 평양 위주로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북한 자체가 워낙 폐쇄적인 나라라서 도시가 더 이상 발전하기 힘들지만 통일이 되고 개방이 되면 대외 무역을 하기 좋은 함경도 동해안 지역이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정치적 계파를 모두 숙청해서 지역감정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왕래도 잦아지면 이질적인 관습이 부딪쳐 더 지역감정이 심해질 것이라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신의주 일대 또한 발전 가능성이 크기에 이쪽을 중심으로 발전하면 지역 불균형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존재한다.

4.2. 평양시 VS 그 밖의 지역들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그 외의 지역들과도 은근히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략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기득권층과 나머지 지역들의 국민들 사이의 지역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대한민국처럼 수도 위주로 개발을 했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 공화국이라면 북한은 사실상 평양 공화국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수준이라고 한다. 다만 서울 공화국이 반 농담조라면, 북한은 정말 평양에다가 모든 것을 때려박았다는게 차이점.

북한 대한민국보다 더 심하다. 우선 타 지역민의 평양으로의 이주 및 여행을 제한한다. 평양시민들이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전체적으로 전력이 부족하지만 평양 중심부만큼은 계속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고 한다.[49] 그리고 북한의 각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들은 평양에 우선적으로 공급된다고 한다.[50]

실제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북한 지도부가 지방 거주민들의 피땀을 계속 평양 꾸미기에만 집중해서 지방 거주민들이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만약 북한에서 2차 한국전이나 내전이 일어난다면 사실상 기득권층이 모인 도시 평양을 상대로 저항하는 나머지 지역들의 국민들의 봉기로 인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평양 사람들도 지방 사람들을 멸시하고 있는지 평양에서 어린이가 실종되자 안전부 측에서 '평양시 돌격대에 배속되어 일하고 있는 국경의 마구잡이 패당들이 어린아이들을 유괴해 국경으로 끌고가 외국에 팔아먹는 행위를 하고 있다'며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있는데, 기존에도 평양 주민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거나 동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조건 지방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사람구실 못하고 다니는 것들은 죄다 지방것들'이라고 막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4.3. 자강도 VS 량강도

북한의 신설 행정구역인 자강도 량강도의 대립이 있는데, 자강도는 친 평안도계고 량강도는 친 함경도계라고 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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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의도적으로 이 지방에 '상놈'을 살게 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외세의 침입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된 것이다. [2] 태어난 곳은 북한 땅이지만 한국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아버지는 유명 목사고, 북진하는 유엔군에 협조하려던 인물이라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3] 요구 사항 자체가 '함길도 지방의 관리를 다시 함길도 출신 북방민으로 임명해 달라'라는 것에서 자치라고 하는 것이다.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4] 박지원 등 노론계 실학자들도 사실 넓게 보면 노론 비주류파라고 할 수 있다. [5] 함흥이 조선왕조를 일으킨 곳이라는 것, 세종이 조종께서 지키시던 영토라 조금도 버릴 수 없다고 언급한 정도 외에는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지는 못했다. 그나마 평안도는 영토 편입의 역사가 더 길고 중화의 문명을 잘 받아들인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함경도는 조선의 영토는 맞지만 고려의 영토는 아니라는 인식이 사대부 사이에 있던 점이 문제시 되어[52] 조정에 협조한 사례와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 정도로 강조하는 등 제대로 된 조선인임을 인정받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 [6] 현재와 다르게 차별을 의도한다기 보다는 제주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선 이렇게 하면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 [7] 남북 분단의 장기화로 이 지역과 관련된 전통문화나 관련 이야기를 요즘은 잘 알지 못하는 면도 있다. 가령 가루지기에서는 평안도 출신 옹녀와 전라도 출신 변강쇠가 사랑을 하는 내용이 있지만, 옹녀가 평안도 사람인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장화홍련전도 배경이 평안도다. 황해도는 옹고집전(옹진), 심청전(황주), 봉산탈춤(봉산)의 배경이 된다. 명태의 어원은 함경도의 명천이라는 설도 있다. 북한에 해당하는 지역을 두고 있던 말 중 '살갑기는 평양 나막신'라는 속담과 ' 북청 물장수'라는 표현은 각각 인심 좋은 사람과 근면한 사람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8] 함경도도 북어, 명태 같은 지역 특산물이 개발되어 경제력이 높아지기는 했으나 8도 중 가장 넓은 영역에도 동양의 덴마크로 불릴 정도로 생활수준이나 인구가 크게 나아진 것은 일제강점기다. [9] 조정에서 양현망과 같은 인물을 사헌부의 장령이라는 정4품의 벼슬로 17세기에 등용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10] 대제학처럼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에 해당하는 관직을 의미한다. [11] 평안도·함경도를 말한다. [12] '간밤에 부던바람 만정도화 다지거다'라는 시조로 알려져 있다. 태원 선우씨는 명목 상으로는 그나마 기자의 후손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문명의 상징 정도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 [13] 한 고조의 고향인 에서 따온 표현. [14] 고려대학교 설립자. [15] 경기권의 세력이 커서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조선 초기에는 평안도에서도 소수의 높은 관직을 얻은 경우가 있었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16~17세기의 선우협과 같은 인물은 삼남 출신인 송시열과 친분이 있었다. 게다가 지역 자체가 남쪽 출신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라 자신의 관향 자체가 경기권이나 삼남 지역인 경우가 다수였다. 한국 성씨 자체가 관향이 황해도 이북인 경우 자체가 희귀하다. [16] 경기권은 확실히 포함되지만, 충청과 황해 지역은 포함 여부가 애매하다. 저 시대는 평양 출신 영의정 조준이 있던 시대, 경향분기 이전 시대와도 멀어서 저런 발언이 정말로 있었다면 그 시대의 상황을 모른 채 한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17] 현재 그 후손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18] 해방 후 존경받은 인물로 장기려, 손원일, 공병우, 함석헌, 유일한 등이 있다. [19] 비단 평안도 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이든 지금과 무관한 과거의 사건을 현재적 시각으로 설명하는 시각도 있으나 정치관이라는 것이 체감보다 상당히 빠르게 바뀌어 합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중국만 해도 한한령 이전까지는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마저 있었으나 수 년만에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다. [20] 한국 정부는 이들의 이런 태도를 용인한다. 이들의 한국 사회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이 자신 중국인이라고 여긴다는 인식에 인식이 매우 나빠졌듯, 탈북민이 자신을 외국인으로 여겼다면 북한이 매우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불량하여 인식이 조선족보다도 나빴을 수 있다. 한중관계가 악화되기 전까지는 탈북민이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둘러대던 사례가 있었을 정도로 이들의 이런 태도가 섞인 정보가 알려지지 못해 '무난한 인식의 조선족'보다 인식이 더 나쁜 시절도 있었다. [21] 이에 김정은이 2024년 아예 '대한민국'을 동족으로도 여기지 말라고 했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민족주의 교육, 젊은 사람들은 한류에 심하게 노출된 북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먹혀들지 회의적이라는 시각도 있고, 통치의 정통성마저 부순 자충수와 같은 정책이라는 시각도 있다. [22] 거꾸로 해석하면 영호남 간 갈등은 그냥 입으로 증오를 내뱉는, 어린이들이 상대의 부모욕을 하는것과 같은 1차원적이고 감정 소비적인 면이 강하다. [23] 유럽에서는 수도권 집중이 심각한 수준에 속하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들보다도 수도권 집중도가 높은 일본조차도 한국처럼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정도는 아니다. [24] 부울경은 대구경북을 뭘 하든 보수정당 찍어주는 지역감정이 심한 지역이라고 비하하며, 대구경북은 부울경을 지역색이 흐릿한 지역이라고 비하한다. [25] 사실 스포츠에서의 영호남 지역갈등도 정치권에서 살포한 게 강한 탓에 1990년대부터는 쇠퇴했다. 다만 2000년대 이후로는 동해안 더비, 클래식 시리즈, 낙동강 더비, 호남 더비 등 같은 지역권이나 타지역 연고 팀과의 라이벌 매치를 더 선호하고 인기를 끌게 됐다. [26] 경상도 내부의 스포츠 더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클래식 시리즈 울산 현대 vs 포항 스틸러스 동해안 더비다. 두 더비 모두 부울경 대구경북 연고팀의 맞대결이며 1980년대부터 숱한 명승부가 나왔다. 대표적으로 1984년 한국시리즈,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 1999년 KBO 플레이오프, 2013년 K리그 클래식 최종 라운드, 2019년 K리그 클래식 최종 라운드 등이 있다. [27] 대구광역시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취임 이후 구미시 해평면 일대 취수원 이전을 백지화했으며, 안동시와 취수원 이전을 추진 중이다. # [28]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까지 겹쳐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대구광역시장으로 당선되고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는 무려 4위로 낙선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대구 지역을 신한국당이 아닌 자유민주연합이 석권했다. [29] 구미시에서 9대 구미시장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장세용이 당선되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유일한 예외 사례에 불과하다. [30] 실제로 전주를 필두로 한 전북 북부지역은 전라도 충청 방언 어휘가 약간 섞인 말투를 쓴다. 이쪽 출신 이주자들의 말투가 지금의 수도권 말투에 영향을 줬다는 카더라도 있다. [31] " 전북대 의학계 지역인재전형, 광주·전남 확대될듯," 무등일보, 2021년 10월 19일 수정, 2021년 12월 10일 접속. [32] " 혁신도시 지역인재 채용 전북+광주+전남 권역화 필요," 전북일보, 2021년 6월 2일 수정, 2021년 12월 10일 접속. [33] 사실 이는 전남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창기 박정희 정권의 대선 구도는 기호지방+강원도vs영호남+제주도의 구도에 가까웠었다. 처음에는 전라남북도 또한 공화당 우세지역이었다. 호남이 결정적으로 반 박정희 지역으로 돌아섰던 계기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김대중 후보가 신민당 대선후보로써 호남 대표 정치인으로 급부상하면서부터였고 노태우 이전 중대선거구제 시절에는 전북에서도 종종 보수정당 국회의원들이 당선되고는 했었다. [34] 1992년: 양창식(남원), 황인성(진안-무주-장수)/1996년: 강현욱(군산을) [35] 충청권 탑5 도시 중 청주만 충북권이고 나머지 대전, 천안, 세종, 아산은 전부 충남이 모태이다. 천안, 아산은 현재도 충남에 속해 있고, 세종과 대전은 충남 남동부권 도시들과 생활권을 공유한다. [36] 대표적인 사례가 호남고속선 분기역 문제. 충남은 천안아산역을, 충북은 오송역을, 그리고 대전은 당연히 관내에 있는 대전역을 밀었다. [37] 조치원리 일대가 청주목 영역이었던 적이 있다. [38] 세종시 출범 전에는, 충북 청원군 지역이었다. [39] 장군면은 이전에 충남 공주시 장기면이었고, 금남면은 대전시와 바로 붙어있고 세종시 탄생이전에도 오랫동안 대전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대전(정확히는 유성) 생활권이었다. [40] 여담으로 충남은 전북과도 붙어있기 때문에 남부지역의 경우 전북의 영향력도 비교적 강한 편이다가, 대전이 발전하고 전주가 쇠락하면서는 오히려 전북 북부가 대전/충남권으로 붙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41] 천안, 세종, 청주, 대전 및 그 주변지역. 천안(65만), 청주(84만), 세종(35만), 대전 (150만)의 인구만 합쳐봐도 충청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42] 그럼에도 세종, 청주, 천안 동남구 등의 읍면 지역이나 대전의 최외곽에 위치한 대청동, 기성동 등은 여전히 지역색이 존재한다. [43] 서북구 북부의 4개 읍면은 공업이 매우 발달해 다른 지역에서 온 외지인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아 시내처럼 지역색이 옅다. [44] 제3당인 국민의당의 경우 대전충남과 충북의 조직력 차이가 은근히 있는 편이었는데, 상술한 지역정당의 영향력과도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았고 대전충남에 아무래도 호남 출신 이주민이 더 많았던 요인이 있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선진당계 인사들도 많이 영입했다. 사실 대한민국 내에서 호남 출신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약한 지역이 대전충남이다. 실제로 대전에는 호남 출신 구청장이 나왔다. [45] 특히 황해도는 도민들의 성향이 순박하고 고지식한 성격으로 인해 '땡해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46] '함경도 사람들을 간부로 등용하지 마라'라는 김일성의 교시가 있었다. [47] 탈북 여배우 김혜영 또한 함북 출신으로 이와 비슷한 발언을 대한민국 매체에서 한 적이 있다. [48]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전라남도 경상북도간 감정골이 특히 심한 편이다. [49] 그런데 북한/사회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 이조차 옛말이 되어가는 중이다. [50] 김정일이 남겼다는 말 중에는 "평양 시민들에게 남새(채소)와 과일도 신선한 것을 늘 떨구지 말고 공급하여야 합니다."도 있다. [51] 과거 자강도는 평북, 량강도는 함북, 함남의 일부였으며, 황해도(특히 북부)도 친평안계에 속한다고 한다. 평안도 대 함경도 지역감정의 연장선이라 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