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7:45

장제(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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蔣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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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蔣)
(濟)
자통(子通)
생몰기간 ?년 ~ 249년 4월 19일
고향 양주(揚州) 구강군(九江郡) 평아현(平阿縣)
태위 재임기간 242년 7월 18일 ~ 249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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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는 자통(子通)이며 양주 구강군 평아현 사람.

2. 생애

벼슬길에 나와 군의 계리와 주의 별가가 되었다.

208년 조조 적벽에서 털려 강릉도 뺏기고 손권이 병사들을 인솔하여 합비성을 포위했다. 그때, 역병이 유행했다. 오직 장군 장희만을 파견하여 단신으로 기병 천 명을 인솔하도록 하고, 여남을 지날 때 그곳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포위망을 풀도록 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역병에 전염되었다. 장제는 곧 비밀리에 자사에게 말하여, 정희의 편지를 받은 것처럼 위장하고, 장희가 이끄는 보병과 기병 4만 명이 벌써 우루(雩婁)에 도착하였으니 주부를 보내 정희를 맞도록 하라고 말했다. 세 조(條)의 사자가 편지를 갖고 성안의 수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 중 한 조는 성으로 들어갔지만, 두 조는 적에게 체포되었다. 손권은 그것을 믿고 긴급히 포위했던 진영을 불태우고 달아났으므로 성은 무사했다.

209년에는 조조가 손권의 공격에 대비해 회남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려고 하자 장제는 " 백마 연진 때는 이주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무조건 깨지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위험하게 그런 도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조조가 이주를 시키자 그 백성들은 모두 탈북해서 손권에게 도망쳤으며, [1] 결국 조조는 무안해하면서 장제를 단양태수로 임명한다.

이후 백성들이 장제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는 바람에 장제가 체포됐을 때는, 조조가 우금에게 "자통이 이런 일을 할리가 없습니다!"이라고 하면서 장제를 풀어주고 승상주부서소속으로 임명한다.

219년 조인 관우에게 포위당하면서 방덕이 죽고 우금이 항복해 조조가 천도를 논의하고 있을 때, 사마의[2]와 함께 "우금 등은 홍수에 빠져 죽었는데, 결코 공격하여 싸운 과실이 아니므로 국가의 원대한 계획에 손해될 것은 많지 않습니다. 유비 손권은 겉으로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 관우가 생각한 바를 얻는 것을 손권은 반드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파견하여 그 배후를 습격하도록 권하고, 장강 이남지역을 분할하여 손권을 봉하도록 허락하면 번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라고 하여 손권에게 장강 이남을 주면 아마 유비를 배신할 거라는 조언을 해 손권은 이것을 듣고, 즉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공안과 강릉을 습격하였으며 관우는 결국 붙잡혔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장제는 상국장사(相國長史)로 전임되었다. 제위에 오른 후에는 또 장제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동중낭장(東中郎將)이 되도록 했다. 장제가 수도에 남기를 청했으므로 조서를 내렸다.
고조는 노래를 만들어 ‘어떻게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라고 했다.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현명한 신하들은 변방지역을 지켜야만 된다. 만일 어떤 일도 없다면 패옥을 울리며 돌아와도 늦다고는 할 수 없다.

장제가 만기론(萬機論)을 올리자 문제는 매우 좋아했다. 수도로 들어와 산기상시가 되었다. 당시 조서가 있었는데, 조서는 정남장군(征南將軍) 하후상에게 내려졌다. 장제가 수도에 도착하자 조비는 그에게 물었다. 온 천하의 풍속과 교화는 어떻냐 물었는데 장제가 "신은 어떤 것이 선정(善政)인지 보지 못했고, 단지 망국의 소리만을 들어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응담하니 조비가 화를 내면서 이유를 물었다. 장제는 이어서 말했다.
무릇 ‘위엄을 행하고 은혜를 편다(作威作福)’는 것은 상서에 보이는 교훈적인 말입니다. ‘천자에게는 농담의 말이 없다(天子無戲言)’라는 것은 옛 사람들이 신중히 했던 것입니다. 오직 폐하만이 이것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조비는 노여움을 풀고, 즉시 사람을 보내 이전에 하후상에게 보냈던 조서를 찾아 갖고 오도록 했다.

222년 이릉전투 조인과 함께 주환을 치러갔을 때 주환이 일부러 보인 약점을 공격하러 한 조인을 만류하나 결국 조인은 패했다. 조인이 죽자 조비는 다시 장제에게 동중낭장자리를 내려 조인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지만 곧 상서로 임명해 다시 수도로 불러들였으며,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장제는 관내후의 작위를 받는다.

228년, 석정에서 주방의 거짓항복계에 조휴의 군사가 속아넘어가자 장제와 만총은 그를 말렸으나 결국 조휴는 패배했으며, 장제는 중호군 호군장군 산기상시가 된다. 당시 조휴의 군대는 이미 패배하여 무기와 군수품을 버리고 퇴각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오나라는 협석(夾石)을 끊으려고 했는데, 마침 위나라 구원병이 왔기 때문에 관병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장제는 승진하여 중호군이 되었다.

<하후현전> 주석 《 위략》에 따르면 장제가 호군으로 있을 때 아문(牙門)에서 자리를 얻고 싶으면 1천 필(匹)을 바쳐야 하며, 백인독이 되고 싶으면 5백 필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사마의는 장제와 가까워서 어느 날 그를 불러서 그 사실을 물어 보았다. 장제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낙양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1전(錢)이라도 부족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으며 사마의도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후현이 장제를 대신하여 호군이 되었지만 이러한 인사를 막지 못했다가 사마사가 호군이 된 후 이런 폐단을 없었다. 즉, 당시 중원에서는 '필(匹)'과 '전(錢)' 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으며, 조예 대 사마지 등의 건의로 화폐를 재건하기 위해 오수전이 발행되었음에도 포백(布帛)의 화폐 기능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 걸 보여준다.

당시 중서감 유방과 중서령 손자가 전권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장제가 상소를 올려 이들 중서를 비판했다. 사마표의 전략에 따르면 232년 조예 병주 자사 전예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게 하고, 유주 자사 왕웅에게는 육로를 이용하여 요동(遼東)을 협공하도록 했다. 장제는 말렸으나 조예는 듣지않고 전예 등이 갔다가 모두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조령을 내려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경초 연간( 237년 ~ 239년), 밖으로는 정벌과 노역이 계속 이어졌고, 안으로는 궁전을 건축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원망하는 남녀가 많았으며 수확이 나빠 곡물도 적었다. 이에 장제가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며, 조방이 즉위하자 영군장군 창릉정후가 된다. 242년 만총이 죽자 태위가 된다. 당초에 시중 고당륭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교사(郊祀)에 관한 일을 논의하면서, 위나라를 순의 후예로 간주하고, 순을 받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자 했다. 장제는 순의 본성이 규이고, 그의 후예는 전씨이므로 조씨의 선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문장을 지어 고당륭에게 힐문했다.

249년 사마의 쿠데타를 일으킨 고평릉 사변에서 조상이 밖에 있어 잡지 못하자 장제는 사마의가 조상을 면직시키려 할 뿐이라면서 안심시키면서 돌아오게 했다. 조상은 이를 믿고 병권을 반납했지만 사마의는 약속과는 달리 조상의 삼족을 멸했고, 장제는 충격을 받아 크게 반발했다. 그 뒤 조상 토벌의 공으로 도향후에 봉해지지만 거절하다가 억지로 받았다. 결국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는지 병에 걸려 얼마못가 사망했으며 태위의 작위는 왕릉이 잇는다.

본래 사마의와 함께 승상부 주부 출신인 장제는 훗날 사마의를 도와 고평릉 사변을 성공시키는 인물이고, 때문에 사마의 일파 사람으로 보는게 일반적이지만... 조상 등이 바보가 아닌 이상 사마의 일파를 태위 직에 앉혔다는 것도 이상하고, 더군다나 쿠데타까지 7년 동안이나 숨죽이고 있었다는 것도 미묘하다. 때문에 장제가 사마의와의 친분과는 별개로 그쪽 파벌이라고 단정지을 만큼의 정치적 연대는 없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사실 조상의 실정이 누가 봐도 자명할 정도로 심각했음과 이후의 그가 보여준 태도를 감안하면, 장제의 쿠데타 가담은 그저 조상 일파가 나라 망치는 꼴을 볼 수 없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조상의 최측근인 환범과 사이가 나쁜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Jiang_Ji_2_(1MROTK).png
100만인의 삼국지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85.jpg
삼국지 12, 13
파일:장제(자통).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전형적인 문관 캐릭터다. 참모로 활동하며 매번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조언을 올리는 초반부 참모들에 못지 않은 지략을 발휘한 인물인데, 조조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이후에 출현하는 만큼 초반부 참모들에 비해 관심이 떨어져서인지 능력치도 행적에 비해 너무 낮게 나온다. 연의부터 이랬으니 대표적인 무관심의 피해자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왜인지 사마의군으로 나온다. 고평릉 사변때 사마의의 편을 들었긴 했지만 이후 장제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사마의가 조상을 죽여버리자 죄책감에 번민하다 병에 걸려 죽은 것을 보면 조상 일파의 막장짓에 반대했을 뿐 조씨황실에 대한 충의는 지켰던 인물이었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8/무력 49/지력 81/정치력 80의 훌륭한 책사. 정란, 조영, 혼란, 덫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0/무력 42/지력 87/정치력 77/매력 55에 군사, 명사 특기를 가진 좋은 문관.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반목, 유인, 반박, 논파, 군사, 명사, 간첩. 총 8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8/무력 43/지력 85/정치력 77/매력 56으로 역시 괜찮은 문관이지만, 특기가 없다. 여담으로 일러스트는 턱수염만 기르고 있다. 사이가 나빴던 환범이 혐오무장으로 설정되어있지 않고, 친애무장으로는 온회가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손권을 편지로 낚아서인지 파괴력약화라는 희망고문의 전법을 가지고 있다. 일러스트는 조조가 천도할 때 막는 장면인데 두 손을 펼친 채 내밀며 가로젓고 있다. 전법과 잘 어울리는 일러스트이긴 하나 이전 시리즈에서도 날카로운 인상의 일러스트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괴리감이 크다. 위관등과 함께 12편부터 오히려 일러스트의 간지가 추락한 대표적인 인물.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4, 농업 4, 교섭 6, 언변 4, 견수 2. 중신특성은 농업중시로 전수특기는 교섭이며 전법은 위보다.

삼국지 14에서는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로 변경되었으며 능력치는 통솔 50, 무력 43, 지력 85, 정치 77, 매력 5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상승했다. 개성은 명경, 문화, 안목, 지낭, 주란, 주의는 예교, 정책은 화계연구 Lv 4, 진형은 안행, 정란, 투석, 전법은 화시, 연노, 진정, 투석, 친애무장은 사마의, 온회, 왕릉, 종회, 호질, 혐오무장은 손자, 유방, 조상, 환범이다.

3.2. 창천항로

적벽전투 때 얼마 전 병사한 유복의 후임자로 온회와 함께 조조에게 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첫 등장하며, 적벽이후 합비를 방문한 조조를 맞이하며 본격적으로 등장, 유복의 뒤를 이은 양주자사인 온회의 부관으로, 유복 생전부터 합비를 지킨 인물. 합비 성벽을 시찰하는 조조일행을 안내하면서, 유복의 업적을 열거하며 눈물짓는 모습을 보인다. 장제의 말을 듣고 조조가 유복의 업적을 찬미하자 조용히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떨며 슬퍼한다.
그 후 장제와 이야기를 나누어본 조조는 장제가 식견이 뛰어난 인물임을 간파하고 온회의 곁에서 군의 일을 배우게 한뒤에는 자신 곁에 두고 대국을 맡길 생각을 한다. 실제로 이후 합비전투에서 손오의 대군을 물리친 후에는 사마의와 함께 전선을 떠나 조조의 곁에서 머무르는 모습이 보인다.
한중 공방전 때는 조조를 따라 종군하는데, 가후로부터 조조군의 일류 책사라면 다들 거쳐간 길이라며 한중에 도착할때까지 보고 들은건 모조리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알지못하는 경지에서 책략을 내라는 명을 받는다. 한중에 도착해서는 유비군이 주둔하고 있는 산을 보고 바들바들 떨면서 '이 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면서 가후에게 유비군을 공격하려는 조조를 말려줄것을 청하는데, 작중 그림에서 보면 그 산은 다른 산과는 다른 불길해보이는 짙은 검은 안개로 뒤덮여있는 것으로 나온다. 가후 등은 이 산을 뒤덮고 있는 것은 도대체 뭐냐며 당황해하는 정도였지만 장제만은 유독 불길한 느낌을 강하게 느끼며 어쩌면 조조가 한중에 들어온 순간부터 적의 계략에 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결국 바들바들 떨며 직접 조조에게 한중에 대한 결단(철수)은 하후연이 이미 내리고 있었던게 아니겠느냐고 간하며 조조에게서 철퇴명령을 이끌어내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의 한중왕 선언으로 이어진다. 장제는 그에 대해서 자신의 책임이라며 자책하지만 조조에게 그 철퇴는 조조보다 더 조조다운 계책이었다며 오히려 칭찬을 받는다.
한중에서 물러난 후엔 사마의와 함께 조조 곁을 지키며, 손권을 이용해서 번성을 공격한 관우를 물리치자는 계책을 진언하는 등 조조의 참모로 활약한다.

3.3. 삼국전투기

아다치 미츠루의 권투만화 KATSU!의 주인공 사토야마 카츠키로 나온다. 전형적인 츳코미 캐릭터. 하지만 그가 하는 진언은 위 소개대로 거의 들어 먹질 않는다. 아다치 미츠루의 캐릭터라서 아다치 작품의 패러디까지 담당. 그 밖에는 합비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타이틀 컷에서는 듣는 이를 청개구리로 만들어 버리는 청개구리 엄마 같은 인물(...)이라고 소개됐다.

강릉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유복에게 크로스 게임의 대사 160km를 던지라는 유언을 듣는다.[3]

안풍 전투 편에서는 손권의 공세를 어떻게든 막아내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으로 1컷 등장. 위의 160kg 투척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합비 전투 편에서는 제1차 합비 전투에서 정사의 내용대로 장희가 이끈 대군이 좀처럼 올 생각을 안 했음에도 구원군으로 곧 온다는 내용을 거짓으로 유포해 손권을 낚아 철군시켜 깔끔하게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이를 알아버린 손권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진정 여기서 끝이라며 체념하려던 찰나, 첨산에서 막 전투를 마친 장료가 바로 합류하면서 활약하는 연의의 내용이 전개된다.

장료 덕분에 손권의 대군을 한 번 막아낸 후, 태사자가 심어 놓은 과정 등이 합비성 내부에서 불을 놓으며 혼란을 일으키자 즉각 장료에게 보고해서 대응하게 하기도 했다.

번성 전투 편에서는 관우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가 중원에서 대기 중인 병력이 어떻게 되냐고 묻자 수도방위군인 우금군과 여남의 만총군이 있다고 답했다. 조조가 그들을 전부 형주 방면으로 투입하라고 명하자 그들을 모두 보내면 수도의 남쪽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질 거라며 우려하지만 조조는 형주를 빼앗기면 최악의 상황이 온다며 일축했다.

관우가 우금을 잡고 방덕을 참하자 조조가 수도까지 먹히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천도를 하려 하자 아직 번성은 넘어가지 않았고 군사의 사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유비와 손권이 사이가 오래 전에 틀어졌고 관우와 손권의 사이는 그보다 더 심하다며 손권을 이용할 것을 제의했다. 조조가 이에 동의하여 손권에게 보낼 만한 사자를 알아보라 명을 내리자 그 명령을 받들기도 했다. 그리고 손권이 실제로 조조의 제의를 승낙해 관우를 치기로 정하자 이것으로 한결 움직이기 쉬워졌다고 기뻐했다. 이후 아군의 승전보를 듣고 조조와 함께 기뻐하기도 했다.

이릉 전투 편에서는 손권이 보내온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전달했다.

조비가 황제가 된 이후 연 유비가 오를 칠까 말까에 대한 토론에는 참석했지만 딱히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삼로 전투 편에서는 조인 등과 함께 유수 방면에 배치되었다. 자기한테 하듯 조인에게도 160킬로 돌직구를 마구 던지라고 조비가 말하자 역시 지난번 상소를 마음에 두고 있었냐며 당황하기도 했다. 조인이 수로를 통해 바로 적의 중심부로 쳐들어간다는 작전을 제시하자 중심부의 방비가 느슨할 리 없다며 반대했지만 조인은 장제의 반대를 무시하고 그대로 작전을 강행한다. 왕쌍군이 전멸하고 조인이 돌연사한 이후 지휘권한을 이어받은 장제는 유수오에서의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퇴각한 것으로 묘사됐다.

성산 전투 편에서는 전예에게 요동 토벌에 대한 구체적인 골자를 전달했다. 청주로 간 뒤 청주에서 배를 타고 요동을 치라는 것이 그 내용. 전예가 급조된 수군으로는 힘들 것 같다고 말하며 그냥 요동을 치는 척만 하겠다고 하자 그런 기만 행위가 상부에 통하겠냐고 어이없어했고, 이에 전예가 물론 전공은 만들어 오겠다고 하자 치는 척만 한다면서 어떻게 전공을 만들겠다는 거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전예는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진다며 믿어만 준다면 싸움은 않고 전공만 올려 오겠다고 했고, 장제의 반응은 생략됐지만 정황 상 믿고 보내 준 것으로 보인다.

손권이 공손연에게 낚여서 크게 분노해 홧김에 합비를 치려 했을 때는 만총이 복병을 심는 것을 보고 그런 평범한 함정에 누가 걸리겠냐고 태클을 걸려 했지만 딱 그 찰나에 손권이 함정에 걸린 걸 봤다(...)

오장원 전투 편에서는 만총이 합비신성 건설을 제안하며 합비의 병력을 신성으로 옮기면 외침 발생 시 합비성과 공조하여 안팎에서 상대를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고 하자 신성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에 합비성이 먼저 넘어가 버리면 어쩌냐고 물었고, 이에 만총은 적이 바보가 아닌 이상 협공을 당할 수 있는 합비성을 합비신성보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는 답을 들었다. 이후 오군이 본격적으로 합비신성 공략에 착수하자 만총의 요청에 따라 합비의 지원 요청을 중앙에 전달했으며, 조예의 개입으로 인해 합비에서의 사태가 종결된 후에는 조예의 빠른 결단력을 고평가하기도 했다.

요동 전투 편에서는 관구검의 패퇴 이후 공손연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르자 조예에게 요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하기도 했으며, 오가 요동에 가세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때는 손권은 자기 아들이 그 상황에 빠졌어도 움직일 인물이 아니라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투외편 2편에서는 238년 기준 산기상시로 위의 파워 랭킹 5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전투외편 4편에서는 고평릉 사변 당시 조상에게 관직만 반납하면 된다고 말하며 조상을 항복하게끔 했지만, 사마의가 이후 한 달이 안 돼서 조상 일당 전체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해버리자 관직만 포기하면 된다고 했는데 자기가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 버렸다며 죄책감을 느꼈고, 그것이 병으로 이어져 얼마 안 가 사망했다고 묘사된다.

3.4. 기타

이문열/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관우가 우금을 투항시키고 방덕을 참수했을 때 조조가 수도를 옮길 걱정을 하자 사마의와 함께 비가 관우를 도와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라며 간언을 하는데, 이때 나오는 장제가 장수의 삼촌 장제로 나오는 오류가 있었다.


[1] 이게 자그마치 10만 호에 달했다. 인구로 치면 최소 50만, 최대 80~90만까지 추산이 가능하다. 위나라니까 무안해하고 만 거지, 촉나라나 오나라였으면 국가 위기 상황이었다. [2] 《위서》 <장제전>에선 사마의와 같이 진언했다고 써 있는데 《 진서》 <선제기>는 장제의 존재를 지우고 사마의 혼자 진언한 것으로 나온다. 당연히 진서의 곡필이다. [3] 유언을 들었을 당시에는 막판에 치매끼가 온 걸로 치부하고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넘겼지만 나중에 공성전에서 바위 160kg를 던지며 유언을 실행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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