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0:01:53

석정 전투

<colbgcolor=#c0c0ff,#00003f> 석정 전투
石亭之戰
시기 228년 5월 ~ 228년 9월
장소 손오(孫吳) 양주의 석정과 협석 일대[1]
원인 환성 전투 이후 손오의 설욕전.[2]
교전국 위魏 오吳
군주 위명제 조예 오왕 손권
지휘관 대사마 조휴
청주자사 왕릉
예주자사 가규
전장군 만총
후장군 주령
낭야태수 손례
동관태수 호질
형주목 육손[3]
파양태수 주방
팽성상 주환
구강태수 전종
주소?[4]
병력 약 100,000 명 약 60,000 명+@[5]
피해 사상자 약 10,000(정사 삼국지)
수만 명 생포됨(건강실록)
군수물자 대량 망실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동오의 대승.
영향 조휴, 패전 후유증으로 사망. 사마의의 입지 상승.
1. 개요2. 전개
2.1. 주방의 사항계2.2. 위나라의 남정2.3. 함정2.4. 구사일생2.5. 후일담
3. 사가의 평4. 연의의 묘사5.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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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정(石亭) 또는 협석(夾石)의 전투.

228년 9월에 조휴가 이끄는 위나라의 대군을 오나라 육손, 주환, 전종 등이 대파한 전투이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251년 이전까지 위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2. 전개

2.1. 주방의 사항계

228년 5월, 손권 시의 유소에게 보내 조휴를 유인하게 하는 한편[6], 주방을 시켜 산월의 이름난 우두머리 가운데 북방에서도 소문이 나고 알려진 사람을 찾아서 조휴를 속여 유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주방은 여기에서 사항계의 계책을 제안한다. 손권이 이를 허락하니 주방은 곧장 편지 7장을 써서 동잠과 소남에게 이를 조휴에게 보내 조휴를 유인하는데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편지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조휴를 사랑하는지,
  • 두 번째 편지에서는 자신의 직위와 함께 항복을 받아 줄 것을,
  • 세 번째 편지에서는 손권이 얼마나 인재를 막장으로 대하는지와 오나라의 병력의 움직임과 자신이 어디에서 조휴에게 호응할지를,
  • 네 번째에서는 자신이 편지를 들려보낸 동잠과 소남이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볼모로 남겨두겠다는 의지까지 밝힌다.
  • 다섯 번째 편지는 자세하게 어떤 방식으로 반란을 일으킬지를,
  • 여섯 번째에서는 빨리 행동을 취할 것을,
  • 일곱 번째에서는 반란에 대한 보답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방은 따로 은밀히 표를 만들어 손권에게 올려 일의 진행상황을 알리니, 손권은 주방에게 이 편지를 보내도록 하는 한편, 때맞추어 낭관을 자주 주방에게 보내 여러 가지 일을 가지고 따져 묻게 하니 주방이 그 때문에 군문 아래로 나아가서 머리를 늘어뜨리고 사죄하였다.

그리고 결국 위의 7번의 편지에 조휴가 낚여버리고 손권이 주방한테 한 행위가 알려지자 조휴는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윤허를 얻어 적진 깊숙이 환현까지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2.2. 위나라의 남정

조휴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라며 무려 10만의 병사를 끌고 환현으로 달려온다. 이전 조예는 촉, 오 중에 누구를 치는 게 좋겠냐고 사마의에게 물었는데, 사마의는 "오는 우리가 수전에 약한 것을 알고 유수구에 병력을 배치했는데 적의 심장은 바로 동관과 하구입니다. 우리는 환성을 쳐서 손권을 유인하고 수군으로 하구를 치면 됩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었고 마침 형세가 이와 같았다. 이에 조예는 오를 칠 생각을 하여 사마의에게 강릉을 향하게 하고 가규는 동관( 유수구의 서남쪽)으로 향하게 하여 세 길로 나아가게 하고 추가적으로 만총에게 하구로 가도록 한다.

한편 손권 또한 8월에 환현에 도착하여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고 황월을 빌려주고 친히 채찍을 들고 가서 그를 찾아보았다.[7] 주환 전종을 각각 좌우독으로 삼고 3만 명을 감독하여 조휴를 치게할 때 주환은 위연 하후무를 상대로 한 자오곡 계책 여몽 조인을 상대로 행한 계책을 참고해서 조휴를 잡고 수춘을 공격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작전을 내지만, 손권은 육손과 의논한 뒤에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이를 거부하고 원래의 계책을 택한다.

2.3. 함정

한편, 조휴가 환성에 도착하자 장제 주연이 배후를 칠 것이라며 말리지만 조휴의 군대는 그대로 환성에 도착하고 오나라가 이에 맞서 병사를 안육(安陸)으로 내보낼 때 쯤 장제는 또 상소를 올려 말한다. 그를 구원해야 한다고 말하고 만총 역시 지리가 안 좋다고 한다. 일단 그들은 장제의 말대로 가규를 지원군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만총의 상소가 도착하기도 전에 사건은 터지고 만다.

깊숙히 환현으로 들어가는 조휴에게 손례는 더 이상 들어가지 말 것을 건의했지만 이미 자신의 생각에 빠진 조휴는 듣지 않고 진격한다. 나중에 육손이 주환 전종을 좌우익으로 끌고 나왔을 때야 조휴는 상황을 눈치채지만 자신이 적의 계책에 속은 것이 부끄러웠고 끌고 있는 병사들의 숫자가 많고 정예인 것에 의지해 적을 공격한다.

그러다가 전투가 불리해지자 석정으로 퇴각하여 한숨 자려고 하는데 이곳에서 일이 터진다. 밤중에 육손은 중부를 맡고 주환과 전종은 좌우 날개를 맡게 하여 세 갈래로 나눠 적을 습격한다. 주방 또한 육손을 따라와 옆에서 조휴의 병력을 끊어놓으니 조휴군은 대패. 그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마치 비단이 찢어지고 기와가 깨지는 것 같은 형세가 되었다.

이때 조휴군에 있던 왕릉이 죽을 힘을 다해 포위망을 뚫어 조휴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만여 명이 죽거나 포획되고, 소, 말, 노새, 나귀가 끄는 수레 1만 대와 조휴 군대의 물자나 기계는 거의 대부분이 뺏긴다.

이렇게 모든 치중을 다 버리면서 협석까지 달려온 조휴였지만 이미 손권군은 무강구로부터 협석으로 군사를 보내 뒤를 끊은 상황이었다.[8] 이때 그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2.4. 구사일생

동관을 공격하러 간 가규는 오장산에 도착했을 때, 조예는 장제의 명을 따라 가규에게 동쪽으로 조휴를 구원하도록 시킨다.

이를 듣고 가규는 조휴가 분명히 패했을 것이라며 장수들을 바다와 육지로 나란히 진군하도록 하였다. 2백 리를 행군하였을 때 오나라 병사를 사로잡았는데, '조휴는 전투에서 패하고, 손권은 병사를 파견하여 협석(夾石)을 끊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장수들이 나갈 곳을 알지 못하고 후속부대를 뒤따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가규는 적이 우리가 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라며 속도를 두 배로 올려서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진군하는데 깃발과 북을 많이 설치하여 의병(疑兵)으로 삼았다. 그리고 적은 멀리서 이것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고 협석을 점령한 가규는 병사와 식량을 조휴에게 제공해 피해를 1만 명 정도로만 한정하는데 성공한다.[9]

예전에 가규에게 부절을 주려고 했을 때 조휴가 그를 비난해서 일이 무산됐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던 그 둘이지만 가규는 조휴를 구해주는 대인배의 행동을 한 것.

이런 그에게 조휴는 잘 대해줄 것 같지만 <가규전> 주석으로 있는 《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오히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버리고 온 무기를 주워오게 했다. 이에 가규는 반박하며 돌아가고 나서 둘은 서로 상주를 하는 막장행태를 보인다. 국가에서는 가규가 옳은 것을 알았지만 조휴가 황족에다가 중책을 맡고 있기에 그냥 둘 다 옳다고 명을 내리고 말았다고 한다.

2.5. 후일담

어쨌든 살아돌아온 조휴는 편지를 올려 사죄하나 황제는 조휴가 종실이라며 불문에 부친다. 국역 자치통감 주석에 따르면 마속의 예처럼, 당시 군사를 패배시킨 사람은 반드시 주살하게 되어 있었다고 하니 조휴는 말 그대로 종친(+ 고명대신)이라서 살아난 셈. 심지어 명제(조예)는 조휴에게 선물까지 안기니, 이는 조휴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조휴는 부끄럽고 등에 종기가 나 죽으니 하구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수군을 물리고 조휴의 퇴각을 도운 만총이 그의 뒤를 잇는다. 이 패배의 충격은 조비 즉위 이후 수차례 손오를 침공했던 위가 20년 넘게 손오 침공을 꾀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252년 12월에야 동흥전투를 통해 다시 오를 침공하지만 이때도 패배해 손오침공은 촉 멸망 이후로 미뤄진다.

손권은 육손이 무창을 지나가자 자신의 우산 덮개로 육손을 가리고 궁궐을 드나들게 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상등의 진상품만을 하사한다. 또한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주방에게는 일이 개선 연회 때, 역사책에 기록해줘야 할 대단한 일이라며 주방에게 비장군을 더해주고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했다. 한편 전종은 이때 산월의 반란이 또 일어나서 이들을 토벌하러 떠난다.

조비의 남정이 오왕 손권의 독자적인 세력을 강화시켜 준 전투였다면 석정 전투는 촉한과의 동맹 재개와 함께 황제국 오나라를 성립하게 만들어 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손권은 다음해인 229년 4월에 마침내 칭제한다.

3. 사가의 평

주방전에 달려있는 서중의 평 중 후반부만이 해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방은 군수가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에 있었음에도, 임금의 명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적을 유인하였으며, 스스로 적을 유인하는 일을 맡아(占)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공명을 탐한 것으로, 비록 일이 끝난 뒤에 작위를 받았지만, 군자가 아름답다 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육손전에는 손권이 주방한테 조휴를 속이라고 했고 주방전의 내용 또한 손권이 주방에게 맞추어 적을 유인하는 내용이니 어째서 이런 결론이 나온지 의심스럽지만 앞 부분의 내용이 번역이 안 되었기에 정확한 의도를 알기 힘들다.

또 이것에 힘입어 손권이 다시 한 번 손포로 왕릉을 유인하는 사건에서는 호삼성이 주를 달아 손권의 마음가짐에 대해 평한다. 자세한 내용은 손포 항목 참고.

4. 연의의 묘사

주연이 사라졌기에 조중정벌이 모두 날아간 오나라에서 등장하는 몇 안되는 승리의 전투. 물론 주연이 죽었기에 장제의 말은 사라지고 제갈근이 육손의 명으로 강릉을 지키려 떠난다.

처음에 주방의 항복에 대해서는 가규와 사마의가 싸우는 형식이고 주방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또 실제로는 참가 안 하는 서성이 참가하고 장보라는 가공인물이 조휴군 측에 등장하여 서성에게 패하고 주환한테 죽으며 설규라는 인물도 위나라측에 등장한다.

그리고는 조휴가 가규를 만난 다음에 미안하다고 눈물을 펑펑 흘린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왠지 모르게 들어있다.

연의에서나 특히 이문열 이휘재 삼국지 만화에서는 오나라 군사가 80만(!)이라고 표기했다. 당시 오나라 인구가 200만 남짓이었으니 당연히 불가능한 일.

5. 기타 창작물

진삼국무쌍에서는 꽤나 개근하는 시나리오. 하지만 양쪽의 총대장인 조휴와 주방이 클론 무장이라는 것이 흠이다. 진삼국무쌍 3에서는 조휴의 주방 찬양을 꼭 들어주자. 그런데 7편 맹장전에서 주연이 나오고, 8편에서 조휴가 추가됐지만 조휴 자신의 스토리 모드는 조비의 오나로 공격까지만 나오기에 조휴로 직접 석정 전투를 해보는 것은 프리 모드에서만 가능하다. 조휴가 함정에 빠지자 사마의와 만총 등이 구해준다는 내용인데 연의의 내용을 따라서인지라 사마의가 "조휴는 너무 순진해서 함정에 빠졌어"라고 딱하게 여기는 발언이 나온다. 구출에 성공하면 조휴가 고마워한다.

최훈 삼국전투기에서는 조휴가 강동에서 살았다는 점과 가규, 조휴의 오랜 갈등이 부각된다. 그리고 조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대한 해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사마의가 가규의 역할을 일부 가져간걸로 각색됐다.[10] 조휴가 주방과 육손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지만 사마의의 구원으로 구사일생 한다. 하지만 조휴는 패배의 책임을 사마의에게 돌리고, 없는 죄를 씌우기 위해 혈서까지 써서 상소를 올려 사마의를 정직시키게끔 한다.

[1] 석정의 현재 위치는 안휘성의 동북쪽 [2] 226년 조휴는 손오의 환성을 공격, 심덕을 참하였고, 같은 해 12월 한종이 조위에 투항하였다. 특히 한종의 투항은 손오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한종 문서 참조. [3] 명제기를 비롯한 몇몇 곳에서는 육의로 되어있는데 육손의 본명이 육의이다. [4] <주태전>에 조휴를 격파했다고 되어있으나 이때의 일인지 222년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인 격파 이후 조휴가 나오는데 조비의 1차 남정에서 유수 쪽과 동구 쪽 모두 참여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석정 전투 때일 가능성이 높다. [5] <주환전> 주환과 전종이 각각 3만씩. 하지만 육손도 군사를 이끌고 중앙에서 진격했고 주방도 따로 군사를 모아 육손을 지원하였다. [6] 하지만 딱히 다른 곳에 언급 안 된다. [7] 손권이 이번 전투에 대하여 상당한 희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 상고 시대에는 군왕이 군령권자를 임명한 뒤에 종종 무릎을 꿇고 내려와서 수레를 밀어주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군왕은 군령권자에 대한 믿음을 표시하는 동시에 전선에서 군령권자의 권위를 확고히 하여 지휘체계를 다잡는 효과를 노렸다. [8] <주환전>에서는 협석과 괘거에서 주환이 조휴를 막자고 하지만 기각되었는데 실제 조휴군이 퇴각한 곳은 협석이고 가규전을 보면 이미 오군은 협석으로 나아가 조휴의 뒤를 끊었다고 나온다. 아마도 육손과 손권은 협석만 막아도 되리라 보고 주환의 의견을 기각한듯 하다. 조휴의 군이 전멸한다면 주환의 말대로 오나라가 회남을 비롯해 예주, 허창으로 진공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나, 가규의 협석 구원으로 조휴군을 전멸시키는데 실패했다. [9] <만총전>에 따르면 가규만이 아니라 주령도 조휴를 구원했으며 <장제전>에도 조휴의 군대가 구원을 받았다고 나온다. [10] 가규는 조휴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옆에서 계속 충고하지만, 조휴는 듣지 않다가 기어이 매복에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