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2:26:26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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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시대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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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기의 사건 포함

이인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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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자 <colbgcolor=#fff,#1f2023> 이인좌
조선 정부 국왕 영조 · 오명항 · 박문수 · 조문명 · 이삼 · 조현명 · 이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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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colcolor=#000> 시기 1728년( 영조 4) 3월 15일~ 3월 24일
장소 한반도 중부 일대.
원인 노론에 맞선 소론 세력의 반란. #
교전 세력 이인좌의 반란군 조선 조정
지휘관 반란 주동자
이인좌
정희량
태인현감 박필현
정세윤
신천영
청주목사 권서봉
이기좌
청안현감 목함경
곽장
평안감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
정계윤
박상
포도대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담양부사 심유현[1]
영조
병조판서, 사로 도순무사 오명항
훈련대장, 도순무사 이삼
종사관 박문수
경상감사 황선
충청병사 이봉상
경상우병사 이시번
성주목사 이보혁
선산부사 박필건
청주영장 남연년
진주영장 이석복
안동영장 김정상
상주영장 한속
곤양군수 우하형
안성군수 민제만
초계군수 정양빈
고성현감 유언철
거창좌수 이술원
군관 홍림
이홍무
병력 70,000명 이상. 10,000명 이상.
피해 주모급 체포, 나머지는 와해. 불명.
결과 조정군사들의 반란 진압.
영향 소론 남인의 몰락.

1. 개요2. 배경 및 반란 계획3. 반란 경과
3.1. 이인좌의 충청 방면군3.2. 박필현의 호남 방면군3.3. 정희량의 영남 방면군3.4. 진압
4. 결말
4.1. 사후 처리4.2. 반역향이 된 영남4.3. 소론, 남인의 몰락과 노론 일당체제의 공고화
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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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28년 조선 시대 영조 집권 시기에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다만 이 표현은 고려시대 무신정변(무신의 난)과 혼동할 우려가 있어서인지 비교적 덜 쓰이는 경향이 있고,[2] 역사 교과서나 각종 입시, 공무원 시험 관련 수험서에서는 '이인좌의 난'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인좌-정희량의 난이라는 호칭도 있는데, 총대장인 이인좌는 초기에 진압당한 반면, 정희량이 이끄는 영남군이 오히려 최후까지 저항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방계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대표적인 왕이 선조 영조인데,[3] 선조 대에 정여립의 난이, 영조 대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효종실록에는 "선조 대에 조정에 등용된 이들의 반수가 호남과 영남"이라고 하였고, 현종실록에는 "선조 대에 호남과 영남 인물들이 조정에 늘어섰으니 세상에서 호남과 영남을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부른다"고 할 정도였으나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이,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선조를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조선 후기 국운이 쇠락한 원인들은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 두 지역이 타격을 받은 점을 하나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영조가 옥좌에 오른 지 4년 만에 일어나 영조에게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는 주장이 많으나, 그런 의의에서 나왔던 탕평책은 정작 이인좌의 난의 영향으로 균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평도 나온다. 하여튼 영조 집권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종반정, 인조반정에 뒤이어 제3의 반정이 될 뻔했던 난이다.

2. 배경 및 반란 계획

경종 사후 세제(연잉군)가 영조로 즉위했을 때, 집권한 노론의 서슬에 밀려 소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밀려난 소론 세력들은 경종의 의문사에 강한 의혹을 제기했고,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인식이 차츰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조정을 엎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들어서서 그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다. 소론들은 당황했으나, 완론과 친하지도 않았던 준론은 계속 반란을 추진하니 이 사건이 바로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다. 그들의 계획은 '삼남 지방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 내의 동조세력이 호응한다', '경기군이 한양을 공격하는 동안 호남, 영남군이 북상하여 합류하고 최종적으로 도성을 점령한다'는 것. 왕위에는 소현세자의 자손인 밀풍군 이탄을 앉히기로 했다.

대원수로 추대된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9대손이자 윤휴의 손녀사위로, 남인 명가의 출신이지만 관료사회에 진출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반란군에서 경기 지역의 군사를 맡았다. 사실 이인좌가 순전히 모든 반란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주를 함락시키고 곧장 경기도로 진군하는 등 경기 지역에서 크게 항쟁했기 때문에 반란에는 이인좌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영남의 군대는 사족인 정희량(鄭希亮)[4], 호남의 군대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맡았다. 군사는 돈을 주고 산 용병과 점령지의 관군을 회유하여 구성되었다. 원래 평안도에서 평안도 관찰사 이사성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고 도성에서 총융사 김중기, 포도대장 남태징이 내응하기로 했지만 이광좌가 재빨리 이사성, 남태징을 체포하여 평안도와 도성 일대가 순식간에 안정되었다.

그럴만한 게, 소론 완론들은 반란을 진압하여야 자신들이 역모와 무관하다는 것을 밝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낌새를 눈치채자 소론의 원로였던 전 좌의정 최규서가 급히 상경하여 영조에게 이인좌의 역모를 고변하였고, 이어 이광좌가 한양 내 역당의 무리가 반란군과 호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였다. 소론 완론이었던 오명항 조현명, 박문수 등도 직접 출군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1728년 3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된 이인좌가 직접 밝힌 반란의 계획.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6일 병자 9번째 기사

3. 반란 경과

3.1. 이인좌의 충청 방면군

이인좌는 영조 4년(1728)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했다. 이때 장례행렬로 위장하고 관 안에 무기를 가득 숨겨 성 안에 들어간 다음, 일시에 기습하여 삽시간에 점령해버렸다.

이 당시 충청병사는 이봉상(李鳳祥)이었는데,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죽었다. 참고로 이봉상의 5대조 할아버지는 다름 아닌 충무공 이순신. 그래서인지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는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민공의 시호를 받고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이인좌가 충무공의 자손이라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3번이나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며 거부한 끝에 죽었다. 충성만은 확실히 한 셈.[5] 함께 붙잡힌 남연년 또한 회유를 받았으나, "너희 같은 개새끼들을 따라 반역할 이유는 없다!"라고 욕하며 당당하게 죽었다고 한다.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너희같은 개새끼(狗子)들을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6]
吾受國厚恩, 年過七十, 豈從汝輩狗子叛耶?
여담으로 이봉상의 숙부 이홍무(李弘茂) 역시 이때 반란군에 잡혔으나, 절개를 지키다 죽어 역시 추증되었다.

파일:안성 전투.jpg [7]
청주를 점령한 이인좌는 한양으로 북상하였다. 24일 경기도 안성에서 오명항의 토벌군과 마주했는데, 토벌군이 직산으로 향했다는 오명항의 유언비어에 속아서 중앙군이 아니라 동네 읍병으로 오인하고 총공격을 명령했다가 각종 화포와 총기에 벌집이 되어 수백 명을 잃고 혼비백산하여 패주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오명항은 이인좌군이 당연히 돌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에게 그냥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모든 화기를 방포하라.'고 지시만 해놓고 들어가서 이불 깔고 누워서 잤다. 다만 이건 의도한 바라는 해석도 있는데, 실제로 오명항이 크게 코를 골며 자는 척하자 이를 본 부하들이 '얼마나 자신있으면 저리 편하게 자겠냐.'면서 사기가 올랐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이인좌군은 조총은 물론이고 청주성에서 노획한 대포까지 보유했지만, 하필이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 반면 토벌군은 우천장비를 충실히 갖추어서 비에 상관없이 화기를 쓸 수 있었다.

이때 토벌군 측에서 화차를 사용했다고 하며, 역사상 기록된 화차의 마지막 실전 투입이다.

이인좌는 산에 올라 농성했다. 그러자 오명항은 부대를 3갈래로 나눠서 습격하고자 깃발도 창검도 내리고 북소리도 내지 말 것을 지시했으나, 휘하 장수들이 말을 듣지 않고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하는 바람에 이인좌 군대는 공략이 어려운 산꼭대기까지 이동했다. 이인좌는 술과 고기를 풀어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서 오명항이 공격을 개시하자 처참히 무너졌고, 이인좌도 갑주와 투구를 벗어 던지고 도주하다가 사로잡혀 권서봉(權瑞鳳),목함경(睦涵敬)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거쳐 참형에 처해졌다.

3.2. 박필현의 호남 방면군

호남의 반란군은 원래 내응을 약속한 전라감사 정사효가 배신해서 제대로 봉기도 해보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박필현은 읍병을 훈련하여 전주부성으로 진군했다. 원래대로 하자면 정사효가 문을 열고 박필현을 맞아들여서 한패가 되어야 했지만, 정사효는 이인좌의 끔살 소식을 듣고 박필현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정사효는 사헌부 지평, 경기도 도사, 경상북도 상주 목사 출신으로, 상주 목사 시절에는 우수 수령으로 뽑히기도 하였고, 경기도 도사 시절에는 백성들이 평안하고 기뻐한다며 그의 선정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경기도 안성시에는 정사효의 선정비가 남아 있다.

박필현은 경상도까지 달아났다가 붙잡혔고, "한양으로 보내 국문을 받게 해달라"고 애걸했으나 참수당했다. 그의 종형인 박필몽도 유배지를 탈출하여 합세하려다,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비록 배신은 했지만 정사효는 내응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조 6년(1730)에 국문받던 도중 물고, 이후 역적으로 간주되었다가 융희 2년(1908)에 복권되었다.

평안도 서울에서의 내응도 미연에 방지되고 말았다.

3.3. 정희량의 영남 방면군

수천에 불과했던 다른 지방 방면군에 비해서, 안음( 경상남도 함양군거창군 안음이 역적의 땅이라 폐현되었다가 복현되며 안의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때 안의군 북쪽은 거창으로 남쪽일대는 함양으로 통합)에서 일어난 영남 방면군은 7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러 주와 군을 손쉽게 점령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경내로 진출하여 연결로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관군의 압박으로 이는 무산되었다.

다른 지방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최후까지 버티던 영남의 군세는 거창과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曺聖佐) 일족[8]의 도움으로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점령했다. 하지만 안동, 상주에서 저지되었으며, 끈질기게 버텼지만 결국 관군에게 토벌당했다. 합천에서 기습당한 조성좌 일족은 처형되었고, 성초령에 진을 치고 무주로 향하려다 거창에서 체포당한 정희량도 처형됐다.

우습게도 '이인좌의 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제일 많은 고을을 점령하고 제일 오래 버틴 건 경상도의 정희량이었다. 하지만 이인좌가 총대장이었고 한양 근처까지 진군했으니, 딱히 틀린 표현이라곤 할 수 없다.

3.4. 진압

영조는 최규서로부터 반역소식을 듣고 오명항을 도순무사[9]로 파견하였다. 반군의 기세에 지방군은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 지방군의 주력을 이루던 속오군이, 외국의 정규군은 물론이고 반군도 진압하지 못할 만큼 훈련도가 낮았고 형편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군사력이 막장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셈.[10]

그러자 오군영 소속 정예병력을 투입해[11] 3개월 만에 반군을 격파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권 보위의 핵심인 훈련도감군은 한성 방위를 이유로 대부분 동원하지 않았다. 훈련도감 마군 3초를 중심으로 한 도성삼군문 기병 500여기와 개성의 별기위 200여기 등 기병 700여 명, 어영청과 금위영 소속 번상군 각 5초, 합 10초 1,270명, 경표하군 392명 등 약 2,300여 명을 동원했다. 이외에도 장단 방어영 소속 군병 2,000여 명과 개성의 별기위 300기가 한강 나루터 등을 파수해 반군의 진입을 저지하였다.

거병을 빠르게 진압한 것은 그 전해(1727) 정미환국을 통해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이 대거 기용된 덕이 크다. 이미 반란은 이전부터 준비 중이었는데 김을 빼놓은 격. 왕이 다시금 자신들을 중용했는데, 뭐가 아쉽다고 반란에 합류하겠는가? 반란을 고변한 사람부터가 소론의 원로대신 최규서였고 진압군의 면면도 오명항, 박문수(종사관), 조현명 등 소론의 인물들이 주류였다. 영조부터 나서서 "소론의 난은 소론이 진압해라."라고 했을 정도였다.[12] 또한 이 '김빼기' 로 봉기를 강요당한 측면도 있다. 반란이 대규모였던 만큼 알음알음 알려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둔다 해도 얻을 거 다 얻었고 점수나 얻으려는 온건파가 고변하면 그대로 자멸이었다.

영조 정미환국으로 완론 정권을 세워주었음에도 반란은 삼남과 평안도, 서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초대규모였으나, 호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과 평안도 지역 반란군은 봉기 전에 수뇌부가 체포당함으로써 제압되었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의 반란군도 각개격파당했다. 영조의 정미환국이 참으로 절묘했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 만약 정미환국이 없었더라면 완론들도 준론과 합세했을 테니, 반란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졌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근대에도 대충 평범한 농민 물량 좀 모아서 "돌격 앞으로!"가 통했던 때는 별로 없었다. 학살 숫자는 과장이 있기는 하나 순수 농민군은 거의 모든 면에서 오합지졸에 불과해서 가끔 운좋은 경우를 빼면 일반적으로 맨날 학살당했다. #

4. 결말

4.1. 사후 처리

이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는 패배하여 산에 있는 로 달아나다가 경기도 죽산(안성시)에 살던 농민 신길만에게 잡혀 관아에 넘겨졌다. 신길만은 그 공으로 은 1,000냥, 귀한 활, 종2품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이인좌는 한양으로 압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참형 후 시신을 오체분시하는 조선식 능지형을 받았다. 다만 반란치고는 정말 이례적이게도, 영조는 이 사건의 주동자급이 아닌 단순 가담한 하급자들은 살려주어 방면했다.

밀풍군은 반군과는 전혀 연결이 없었지만 반란군들이 왕위로 올리려 한 탓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그를 사사하라는 신하들의 상소에 못이긴 영조로부터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자살했다.[13]
  • 이렇게 왕족의 이름이 역모에 올라 죽어나간 일은, 조선 후기에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사도세자에게 아들이 4명이나 있었음에도, 정조 헌종을 끝으로 후사가 끊겼다. 은언군계는 상계군은 일찍 죽고, 풍계군은 은전군 양자로 갔다가 후사 없이 죽고, 이광의 세 아들은 이원경은 민진용의 역모 사건에 이름이 올라 죽었고, 영평군 이경응은 후사없이 죽고 철종도 아들 없이 죽었다. 은신군은 아예 아들이 없었다가 남연군이 대를 이었다. 은전군은 역모에 이름이 올라 죽었고, 은언군도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내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천주교 신자라서 사사된 후 도망치려다가 실패, 사약을 받고 죽었다.
  • 정조계는 후사가 끊겨서, 은언군계는 후사가 끊겨서+역모 사건으로, 은신군계는 후사가 끊겨서, 은전군계는 역모에 휘말려서 직계가 끊겼다. 게다가 은언군, 은신군 모두 역모 비슷한 일로 꼬투리가 잡혀 유배당했다. 은언군과 은신군이 일에 휘말렸다 해도 조선 가계는 은전군계와 이원경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는데다가, 은전군이 죽었을 때야 은언군, 상계군, 풍계군이 살아있었기에 그렇다쳐도, 이원경이 죽었을 때는 헌종 외에 양자를 제외한 영조의 후손은 철종으로 즉위한 이원범 뿐이었다.[14] 그리고 철종도 후사 없이 죽자, 인평대군 쪽 후손인 남연군(은신군 양자)의 아들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들 이명복이 익종(문조)의 양자로 들어가 고종으로 즉위했다.

이후 박문수 경상도 관찰사로 민심을 수습했고, 삼남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남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앙정계에서는 재능과 영조의 신임에 비해 노론의 서슬에 큰 힘을 쓰지 못했다. 반란을 진압한 영웅이었던 오명항도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병 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다.

4.2. 반역향이 된 영남

영남 지방은 반란을 일으킨 삼남 지방 중에서도 가장 진압하기 어려웠던 탓에, 흥선대원군의 복권 이전까지 세도정치 시기 내내 반역향(反逆鄕) 이미지가 붙었다.

봉기 자체는 삼남 지방 모두에서 발생했으며, 이는 삼남 지방 모두가 당시 조정에 대해 달갑지 않은 인식이었다는 점을 나타내지만, 맥없이 깨진 타 지방들에 비해 영남의 항전은 거셌으며, 남인의 거점인 영남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 이미 정여립의 난( 선조) 때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찍히고 그 위쪽은 당시까지는 인구를 채우는 작업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인좌가 기반으로 삼은 충청도 지방도 반역향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충청(호서)지역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살던 곳으로 노론의 본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미꾸라지 몇 마리 때문에 반역향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충청지방은 영호남과 함께 삼남으로 묶이기도 했지만, 충남은 경기지방과 함께 기호지방(경기+호서)으로 묶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즉, 준수도권으로 볼 수 있는 것. 논산(연산)의 광산 김씨, 논산 노성(니산)의 파평 윤씨, 회덕의 은진 송씨를 일컬어 호서 3대족 이라 했다. 특히 광산 김씨 은진 송씨는 우리나라 6대 국반(國班)으로 불리는 최고의 명문들이었다. 왜냐면 광산 김씨는 문묘종사 대현과 종묘배향공신을 동시에 지낸 인물을 배출한 가문으로 김장생, 김집 부자가 있는 유력가문이었고(김집의 제자가 송시열), 회덕의 은진 송씨는 노론 거두 송시열, 송준길, 니산의 파평 윤씨는 송시열 회니시비를 다툰 소론 윤증 등을 배출한 서인 명문가였다. 이처럼 호서지방은 전통적으로 서인 유력가문의 세가 강한 지역이었다.[15] 여담으로 사도세자는 이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한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북인은 경상우도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고, 숙종 대에 장희빈을 밀다가 몰락한 남인은 경상좌도를 기반으로 하였던 탓에, 이인좌의 난 이전에 17세기를 거치면서 경상좌우도가 이미 중앙정치에서 밀려나 소외감을 느끼던 차에 영남 민심에 불을 지핀 게 바로 장희빈의 아들 경종 독살설이고, 이런 민심을 이용한 이가 정희량이다.

호서가 노론의 근거지여서 우대를 받은 것도 상기한 것과 같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남 역시 안향, 정몽주, 정여창, 김굉필, 이언적, 이황 등의 거유를 배출한 곳이다. 유교를 국시로 삼는 조선이 저러한 성현들이 나고 활동했으며 그 후손들이 기거하는 고장을 반역향으로 홀대할 수는 없다. 당장 영조 때만 해도 퇴계 이황의 8대손 이세택이 영조 29년(1753) 문과에 급제한 후, 영조 39년(1763) 대사간에 임명된 사례가 있다. 이를 통해 이인좌의 난 이 후에도 영남 명문가는 여전히 우대 받았으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영남 상도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 후에도 진짜 반란의 수괴는 정희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희량이 조부의 묘 이장을 핑계로 장정들을 모으고, 여러 시장들을 돌며 포목을 모아 반란군의 깃발과 군복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전에 정희량이 이미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봤던 것이다. 이인좌의 난으로 불리며 정작 이인좌는 충청북도 청주 송면 출신으로 실제 그가 난을 처음 일으킨 지역도 청주이지만 이인좌 자신은 남인 강경파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으므로 이래저래 남인 지역인 영남이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영조 4년(1728) 평영남비를 정조의 명으로 감영이 있던 대구에 세웠다.[16]이후 계속 그 자리에 있다가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 철거되었다.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주된 내용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 황선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다. 황선은 당시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실록에서도 '아니 어떻게 이런 인물이 알려지지 않았던가'라는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 직접 관군을 지휘하지 않고 대구 감영에서 마치 장기두듯 각지의 관군을 배치하여 영남군의 길목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지휘했는데 이러한 작전은 대성공을 거둬 중앙군의 지원 없이 경상도 관군 스스로의 힘으로 영남군을 격파하였다. 안타깝게도 난이 평정된 직후 감영에서 밥을 먹다가 독살당했는데, 범인은 끝내 잡지 못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이 반역의 고장으로 인식되어 한동안 과거응시가 막혀버렸단 것은 상술한 사례에서 보듯이 오해이다. 그리고 당대 집권층이 영남을 반역향의 이미지로 보았다는 것도 후술하는 사례를 볼 때 오해에 가깝다.

승정원일기 801권 영조 11년(1735) 5월 26일 기사를 참조하자. 영조가 영남과 호남을 비교하며, "영남은 '문학'으로 교화하고 호남은 '좌도'로써 다스려야 하느냐?"고 김취로에게 물었다. 이에 이유가 말하길, "호남은 정여립 이후, 좌도[17]를 숭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송진명은 "호남은 영남과 달리 산천과 풍토가 모두 이단을 숭상하는 형세"라고 답했다. 결국 이인좌의 난 이후에도 여전히 영남은 추로지향으로서 유교적 교화가 가능한 고장이란 인식을 당대 지배층이 공유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반역향 이미지 운운은 넌센스에 가깝다.

다만 그렇다고 영남 지역에 아무런 불이익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1737년) 3월 3일 신묘 4번째기사를 보면 경상도 감사 민응수가 도내의 이수연·조세붕·정희운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 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언급했다. 여기서 말한 기북(冀北)은 중국 기주(冀州)의 북방(北方)으로 준마(駿馬)가 많이 나는 곳인데 그처럼 인재가 많은 고장임을 일컫는 뜻으로 썼으며, 추로는 추로지향의 뜻으로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뜻한다. 즉 그만큼 학식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도리어 촉인(蜀人)으로 대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 이후 반역(叛逆)하여 복종하지 않았던 유벽(柳闢)이 통솔했던 촉(蜀)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인좌의 난 이후로 영남 지역을 조정에서 반역을 저질렀던 지역이라고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사실 좀 더 일찍 해결될 수도 있었다. 영조 14년(1738)에 노론은 안동 김상헌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영조 대의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는 척화 주전론을 외친 김상헌을 필두로 이후의 4대손 안에 부자(父子) 영의정, 형제 영의정 김수항, 김창집, 김수흥 등을 배출해낸 이력이 있는 노론 최대의 명문 집안이었다. 김상헌의 출신지과 은퇴지는 안동 소산이라 명분은 충분했고,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兪拓基), 안동부사 어유룡(魚有龍), 안택준(安宅駿), 김창적(金昌迪) 등이 안동의 강씨‧신씨‧안씨 문중 등의 영남의 노론 세력과 손잡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인 영남 남인들은 결사 반대에 나서 안동에 들어설 서원을 습격해 부숴버린다. 안동에 거물급 노론 서원이 들어설 경우, 안동의 향권은 물론이고 남인들의 세력 근거지가 노론의 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익하(鄭益河) 감사는 귀정록(歸正錄)을 만들어 안동 유림이 노론으로 돌아설 것을 종용하고, 이어서 조영복(趙榮福) 감사도 갖은 방법으로 설득에 나섰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앙의 노론당에 보낸 편지는 묘하다. "그물을 낙동강에 던졌더니 종일 소득이 미꾸라지 몇 마리 뿐이요. 천김(川金)은 쟁쟁[18]하고 하류(河柳)는 청청[19]하다." 여기서 천김은 천전(내앞) 김씨를 이름이요 하류는 하회 유씨를 가리키는데 노론은 미꾸라지에 비유하며 한탄한 것이다.[20]

영남 유림들이 백기를 들고 노론으로 투항하였다면 중앙 정계로의 길은 열렸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미 18세기 부터 양반지배층이 경화사족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조선은 학풍과 가문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변절적 선택은 쉽지 않았다.[21] 물론 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희망사항이고,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 13년(1737), 병조판서 민응수가 좌의정 김재로에게 "영남의 풍속이 벌써 한층 변하였습니다. 옛날에는 모두 남인이었는데, 지금은 그중 갈리어 나간 자들이 있습니다"라며 건의하고, 김재로는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도와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며 영남 차별에 문제 제기를 하였으나 워낙 영조 치세에서 영남 지역에 대한 불신이 깊었는데다 영조의 재위 기간이 무려 52년이나 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후에야 영남 지역 인물들을 재등용하려는 기색이 나타났다. 노론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는 영남 남인의 정신적 지주들인 이언적 이황의 후손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한 재위 16년(1792) 이언적 옥산서원 이황 도산서원에 직접 제문을 지어보내 제사드리게 했으며, 도산서원에서는 도산별과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전란이 아닌 시기에 한양이 아닌 지방에서 치러진 유일한 대과(大科) 시험이었다. 경상도 유생 7,200명이 입장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답안지 3천 장이 제출되어 정조가 채점했는데,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을 1, 2등으로 급제시켰다.

정조는 재위 후반기인 1792년에 1차 영남만인소를 통해 영남사림의 절대적인 정치적 지지를 확인하고, 정조 22년(1798)에는 왕명을 내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과, 채제공의 양아들인 채홍원에게 영남인물고[22]라는 책을 편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정약용이 지은 책의 서문이 남아 있다.
영남(嶺南)은 옛 신라국(新羅國)이다. 장백산맥(長白山脈)이 오대산(五臺山)을 거쳐서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신라의 진산(鎭山)이 되고, 서쪽으로는 소백산(小白山), 주흘산(主屹山)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되어 그치면서 신라의 병폐(屛蔽)[23]가 되었다. 황수(潢水)가 태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그것이 또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모든 역내(域內)의 물이 바퀴살통처럼 모이고 힘줄처럼 모여서 하나로 합친다.

이 때문에 그 산천(山川)의 풍기(風氣)가 기타 다른 도(道)와는 전혀 다르고 그 인물은 영걸(英傑)하고 특출(特出)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는 튼튼하게 하였고 곱고 화려함은 좋아하지 않았다. 국가에 중대한 의논이 있을 적마다 온 나라가 그들의 의견에 이의가 없이 하나로 귀착되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일이 없다. 회재(晦齋, 이언적), 퇴계(退溪, 이황) 등 여러 선생이 나신 이후로 선비들이 모두 예의(禮義)를 숭상하였으므로 성질이 못된 자가 있기는 하여도 공손하게 예모(禮貌)를 차리는 모습은 모두 학자의 기풍이 있었다.

주상 즉위 22년(1798)에 명하여 영남(嶺南)의 모든 이름난 사람의 언행(言行)과 사적을 가져다가 뽑아 모아 책을 만들게 하였는데, 채문숙(蔡文肅, 채제공)이 총재(總裁)가 되고 중씨(仲氏,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와 한혜보(韓徯甫, 한치응) 등이 이 일을 관장하였다.

그 이듬해에 내가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돌아오니(곡산부사를 마치고), 중씨가 그 초고(草稿)를 내어놓고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불과 수백 년 동안에 한 지방의 어진 이가 이처럼 많으며, 그 행실이 뛰어나고 덕의(德義)가 높은 사람으로 믿을 만하고 사적이 뚜렷한 자가 이처럼 혁혁하단 말인가. 그대는 그러한 까닭을 아는가. 가르침에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대(三代, 즉 夏殷周) 이후로 학교의 제도가 허물어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백성은 모두 저대로 나서 저대로 자랐다. 지혜로운 자는 혹 스스로 깨달아서 그 혈기(血氣)의 병통을 바로잡기도 하였으나, 어리석은 자는 자포자기하여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마치었으니, 이 점이 특출난 인물이 성긴 까닭이다. 영남은 그렇지 않아서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가숙(家塾)으로 알고 스승과 벗을 친척으로 여겨 떼를 지어 놀고 무리지어 익힘으로써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재질(材質)이 참으로 좋다면 어찌 이와같이 성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가르침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서문(序文)으로 삼는다."

그동안 지역을 겨냥해 인물들의 충의와 절의를 기리는 책들은 왕명으로 간혹 간행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특정지역의 인물사전을 편찬하라고 한 것은 집권층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먼 훗날 당파성이 약해진 고종 7년(1870)에 흥선대원군 고종 남인 등용에 반대하는 노론 인사들이 올린 상소문과 1930년 윤치호의 기록을 살펴봐도 정조의 이런 행보가 당사자들에게 주었을 충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조는 치세말기로 갈수록 영남 지역에 대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정조 23년(1799)에 영남인물고가 완성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함으로써 영남 지역의 중앙정계로의 재진출은 다시 흥선대원군 집권기까지 미루어졌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경북 상주 출신 류후조가 좌의정으로 발탁되니 실로 서애 류성룡 이후 수백년만에 영남 현지에서 정승이 나왔다. 류후조는 류성룡의 8대손이기도 하다. (신) 안동 김씨가 흥선대원군 전까지 60년간 세도정치로 권력을 잡고 있었음에도 영남 지역이 혜택은커녕 불이익만 받다가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신)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서야 드디어 영남 지역이 서광을 보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노론 음모론 신봉자들이 운운하는 "영남 노론(…)이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현대 대한민국까지 권력을 잡고 있다"는 소리가 헛소리라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노론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영조와 정조시대 영의정만 보더라도 심수현(청송 심씨), 정호(연일 정씨), 이광좌(경주 이씨), 김흥경(경주 김씨), 이종성(경주 이씨), 유척기(기계 유씨), 서지수(대구 서씨), 서명선(대구 서씨), 정존겸(동래 정씨)과 같이 경상도에 뿌리를 둔 집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영조와 정조 집권기 영의정의 절반(중복 제외) 가까이 되는데, 아직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 되기도 전이었다. 정조시대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훗날 영의정)도 청송 심씨 가문이었다.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는 대구 서씨였고, 영조가 다음에 들였던 왕비인 정순왕후도 경주 김씨였다. 정조는 아들의 왕비로는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 김씨(신 안동김씨)를 선택하였다. 이처럼 영조와 정조시대 영의정과 왕비가문은 경상도를 뿌리로 모시며, 한양 근방으로 이주한 자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가문의 뿌리와 족보가 중요했으며, 다른 명문가들(전주 이씨, 안동 권씨, 연안 이씨, 광산 김씨)처럼 이들에게도 본향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8세기부터 지방과 한양의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해지고, 양반 집권층이 경화사족화 되기 시작하면서, 한양 근방에 거주하던 경상도계 영남 가문들은 굳이 정반대 학풍(남인)이 휩쓸고 있는 영남지방 사림들을 적극으로 등용하지 않았다.

4.3. 소론, 남인의 몰락과 노론 일당체제의 공고화

이 결과 소론 강경파가 박살나면서 명목상 한패인 소론들의 세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잔당들이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가 그때마다 족족 발각되면서 소론 강경파는 그야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소론 온건파는 소수 남인과 함께 정계에 머물렀지만 노론 온건파의 세력이 훨씬 더 커서 힘을 쓰진 못했다. 덧붙여 영조 탕평책을 썼다고는 해도 소론은 사실상 재기불능으로 치달았으며, 이후 소론 강경파의 지속적인 반역과 영조 모욕시도로 그나마 출사한 소론 온건파들도 힘을 잃으며 노론 온건파의 집권은 한층 굳건해진다.

그래도 난을 진압한 게 소론 온건파이고 오명항, 박문수, 조현명, 조재호, 송인명 등의 소론 대신들이 건재하였으나 이인좌의 난의 잔여 세력인 박세만, 주노미, 권첨, 위에 언급된 배신자 정사효가 남인 세력을 대거 끌어들여서 난을 일으키려다 그들이 회유한 최필웅이란 전직 내시가 붙잡히는 바람에 들통났다. 특히 정사효는 자신의 처가까지 죄다 끌어들인 통에 목이 잘린 사람만 수십 명에 달했다. 영조 24년에는 2차례나 실패하고도 질기게 살아남은 무신년 세력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난을 꾀하다 또 걸려서 박살났고 모조리 처형당했다.

영조 31년에는 무신년의 가담자인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전라남도 나주로 유배를 갔다가 괘서[24]를 돌린 나주 괘서 사건이 터졌고 이 때문에 소론과 남인 수십명이 처형된다. 이 시점에서 소론 강경파나 온건파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현명, 송인명 등도 다 죽고 없는 터라 중량감 있는 대신도 없는 소론 온건파는 자신들을 방어하기도 어려웠고 이 틈을 타서 탕평책에 같이 참여했던 노론 온건파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영조도 이에 부응하여 이광좌의 직첩을 거두고 유봉휘, 조태구 등을 역률로 추죄했으며[25] 김일경과 목호룡의 일가, 무신년 주모자들의 살아남은 일가들까지 죄다 끌고 와서 처형하는 등 소론을 국가 공인 반역집단으로 낙인찍어버렸다. 그런데 나주 괘서 사건이 정리된 지 2달도 채 되지 않아서 심정연 등 살아남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영조가 직접 참관한 과거 시험에서 금상은 독살범에 왕위 찬탈자다! 라고 답안지에 적어 내는 사건이 있었다.[26]

"영조는 그걸 보고 엉엉 울다가 폭발하여 날뛰는 등 거의 반쯤 실성한 것 같았다"고 실록에 적혀 있었다.[27] 결국 살아남은 마지막 소론 강경파까지 죄다 처형해서 몰락시켰다. 이때 심정연과 한 패인 신치운은 영조 보고 "난 갑진년(영조 즉위해인 1724년)부터 게장을 안 먹었다!" 라고 주장했다.

영조 31년에 죽은 소론 강경파와 남인만 200명이 넘었으니 소론 강경파와 숙종 시기의 환국에서 살아남은 남인이 완벽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 정계는 소론 온건파는 살아남으나 크게 쇠퇴하여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소론이 완론 계열로 채워진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한편 노론 온건파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부터 지지하고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소론의 강경한 처벌과 탕평책에 반대했던 노론 강경파까지 밀어내며, 정권을 장악했다. 노론 온건파는 소론 온건파들과 같이 탕평당을 조직하면서 조정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며 절대적으로 되었다.

이미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 이괄의 난을 거치고 이이첨, 류희분, 박승종, 유몽인, 기자헌, 박홍구를 비롯한 대신들이 살육되거나 유배를 가며, 소론 강경파와 같은 방법으로 몰락해서 말할 것도 없다. 남인 또한 마찬가지로 1680년 경신환국과 1694년 갑술환국으로 허적, 윤휴, 민암,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이 죽거나 유배와 향리로 전전해서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이인좌의 난과 나주 벽서 사건이 겹치면서 완전히 몰락해서 남인은 이전과 같은 정치당파로써의 모습을 완전히 발휘하지 않았다.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그 동안에는 북인, 남인, 소론, 노론이라는 당이 있었는데, 북인, 남인, 소론이 각각 광해군, 희빈 장씨, 경종 독살설이라는 것으로 자폭을 하니 결과적으로 노론이 자동적으로 집권할 수밖에 없으며, 그 중에서 노론 온건파의 세력이 제일 셌다. 영조 때의 탕평책이 무게 중심이 노론 온건파 쪽으로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는 건전한 붕당의 붕괴를 초래했고, 결국 척신정치로 이어졌으며 곧 세도정치가 되었으니 조선 후기의 비극이 여기에서 잉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대중매체에서

  • 2015년 영화 사도에서는 작중 시점에서 한참 전 사건이지만 역모 모의로 잡힌 죄수 중 하나가 친국장에서 "내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헛소리다"라는 영조의 말에 죄수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인좌가 왜 당신을 못 믿어서 반란을 일으켰겠느냐"라고 대꾸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결국 저 발언을 한 죄수는 영조에게 입이 찢겨지는 형벌을 받고 끌려나간다.
  • 2017년 11월 23일 개봉한 영화 역모 - 반란의 시대는 이인좌의 난 직후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반란에 실패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힌 이인좌가 궁궐내 반란세력(어영청 5인방)과 합세해 다시 영조의 목숨을 노리고 전 내금위 소속이었던 포졸 김호가 이를 막으려 한다는 가상의 내용을 다루었다. 현재 청주에는 이들에게 죽은 절도사 이봉상, 군관 홍임, 비장 남연년을 기리는 사당과 이들의 시신을 수습한 기생의 무덤 등이 있다. 이들의 후손들은 후에 녹용(錄用)[28]되었다.

6. 관련 문서



[1] 경종 단의왕후의 남동생으로 경종이 승하할 때 직접 궁궐에 들어가 임종을 지켜보았고, 경종이 이복동생 왕세제 영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유언비어를 터뜨려 이인좌의 난의 배경이 되었다. [2] 물론 한자가 전혀 다르다. 이인좌의 난을 가리키는 '무신란'의 무신은 간지를 의미하는 거고, 무신정변의 무신은 '武臣'이며, 무신정변을 간지로 표현하면 ‘경인난’이다. [3] 선조는 왕실 최초로 서자 출신으로서 왕위에 오른 왕이며, 영조는 왕실 최초로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왕이다. 즉 영조는 혈연적으로는 숙종의 아들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약점이 있었다. 태종(이방원)의 경우는 혈연적으로는 정종의 동생이지만 정종의 왕세자로써 왕위에 올랐다. 게다가 정종은 바지사장이었고, 이방원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4] 초계 정씨로, 남한산성 항전 당시 청음 김상헌과 더불어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할복한 이조참판 정온(鄭蘊)의 현손(玄孫)이다. [5] 그런데 민진원의 단암만록에는, 자신은 알몸으로 자다가 반란군의 공격에 비장을 자신으로 변장시키고 자신은 숨어 있다가 걸려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이봉상은 소론에 연줄이 좀 있었고, 무인이라 민진원이 일부러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다. 민진원은 안그래도 소론에게 추앙받는 경종을 광증이 있다고 묘사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여하튼 이봉상은 생전에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탄핵까지 논의됐을 정도의 고문관이었지만, 충무공 가문의 후손답게 당당히 이인좌를 꾸짖고 죽은 점을 참작해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6] 참고로 이때 개새끼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욕설이다. 그 몇 안 되는 또다른 욕설의 주인공이 바로 인조로 자기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한 말이다. [7] 출처: 금수 블로그 # [8] 창녕 조씨 태복경공파 / 조덕좌(曺德佐), 조정좌(曺鼎佐) 등 [9] 반란이 일어날 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기관인 순무영의 총책임자. [10] 사실 이건 조선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평화 탓이 큰데, 비슷하게 청나라의 정예군이었던 팔기군도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하였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만몽의 팔기군에 대해 " 만주족 몽골인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라고 악평할 정도였다. [11] 오군영 소속 부대를 차출해서 만든 순무영을 말한다. [12] 물론 이는 반란 후를 생각한 수이기도 하다. 반란이 진압된다면 결국 소론 세력이 사실상 전멸당할게 뻔하기 때문에 일부러 반란 진압을 소론에게 맡겨 반란 진압 후에도 진압에 공이 있거나 반란과 거리를 두었던 온건파 소론들을 정계에 남아두게 할 수 있었다. [13] 말이 좋아서 자살이지 실제로는 자살을 위장한 처형이었다. 사실 원래 이게 조선 왕족들의 삶이다. 부귀는 누리되 영화는 누릴 수 없었다. 특히 왕족들은 영화는 고사하고 과거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 그리고 왕족 지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역모와 관련해 이름이 한번만 올라와도 무사하지 못하고 가차없이 사약감이었다. 극히 드물게 왕이 적극적으로 커버해서 살아남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죽었다. [14] 직계는 물론, 위에서 말했던 방계인 은언군계 등도 전부 끊어져서, 영조에서 대를 거슬러올라 숙종, 현종, 효종을 거쳐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으로 가서야 남은 후손이 있었다. [15] 그 이전에는 훈구파 가문의 세도 강했다. 청주 한씨 가문이 대표적이며, 계유정난을 일으킨 한명회도 출신지는 한성부이지만, 본적은 충청도다. [16] 이 평영남비는 1919년 3월 30일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이라는 책에 수록되었는데, 원문과 해석을 보려면 다음 링크 참조 링크 [17] 신앙, 주술(呪術) 그런 의미 [18] 시끄럽고 기가 세며 지역민심이 두텁다는 의미. 즉 '임금에게 쓴소리 잘한다.' 의성 김씨 집안에 내려오는 선조의 가르침 중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잡으러 오지 않으면 사대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임금에게 쓴소리, 즉 직언을 서슴치 말고 하라는 의미이다. [19] 고고하며, 과묵하게 자신이 할일을 묵묵히 해나간다는 의미로, 벼슬 자리 따위에 연연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20] 천전 김씨는 학봉 김성일, 하회 유씨는 서애 류성룡을 뜻하는데, 이 두 사람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그들의 후손들은 영남 남인의 핵심 명문 중 하나이다. [21] 사실 그렇게 했다 쳐도 얼마나 영광을 얻었을지는 의문인게, 이미 숙종 때부터 수도권 출신이 중앙정계를 장악했기에 그런 선택을 해봐야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조상 이름값도 못 한다.'는 비난에 시달릴 수도 있었다. [22] 총 17권. 조선 초기부터 경상도의 각 고읍 별 541명의 언행과 사적을 담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대출해가는 바람에 소실될 뻔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2011년에야 겨우 반환되었다. [23] 병풍처럼 감싸서 막음. [24] 掛書. 대자보. 익명으로 유언비어나 흉한 말을 적어 내건 글. '괴서'가 아니다! [25] 셋 다 완론계의 인물들임을 생각하면 소론 강경파나 온건파의 근간을 뽑은 셈이다. [2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론 강경파가 자포자기로 자살행위를 한 것처럼 썼다. [27] 영조실록의 다른 대목에서 경종 독살설이 언급될 때는 영조가 특별히 "싣지 말라"고 명령하기 때문에 주로 '흉참한 말' 정도로 필터링해서 적히곤 하는데, 이 대목에서는 검열되지 않고 그냥 실렸다. 이때는 영조가 멘탈이 완전히 나가버린 나머지 필터링하란 명령을 내리는 것조차 깜빡한 것이다. [28] 충신, 청백리, 효자의 자손을 특별히 임용하는 제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