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3:49:10

인선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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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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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 | 仁宣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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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조 왕대비
효숙왕대비 | 孝肅王大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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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선왕후능침.jpg
영릉 인선왕후 능침
출생 1619년 1월 30일
( 음력 1618년 12월 25일)
조선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응곡리 안골
(現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안골마을)[1]
사망 1674년 3월 20일( 음력 2월 24일)
(향년 56세)
조선 한성부 경덕궁 회상전[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영릉(寧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45년 11월 4일 ~ 1649년 6월 12일
조선 왕비
1649년 6월 12일 ~ 1659년 6월 18일
조선 왕대비
1659년 6월 18일 ~ 1674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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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덕수 장씨[3]
부모 부친 신풍부원군 장유
(新豊府院君 張維, 1587 ~ 1638)
모친 영가부부인 김이순[4][5]
(永嘉府夫人 金二順, 1587 ~ 1564)
형제자매
1남 2녀 중 차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장선징(張善澂)
언니 - 장씨
배우자 효종
자녀
1남 6녀(3남 7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숙신공주(淑愼公主, 1634 ~ 1645)
차녀 - 숙안공주(淑安公主, 1636 ~ 1697)
- 대군(?[6] ~ 1642)
3녀 - 숙명공주(淑明公主, 1640 ~ 1699)
장남 - 현종(顯宗, 1641 ~ 1674)
4녀 -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 ~ 1696)
- 공주(?[7] ~ 1644)
- 대군(1645 ~ 1645)
5녀 - 숙정공주(淑靜公主, 1646 ~ 1668)
6녀 - 숙경공주(淑敬公主, 1648 ~ 1671)
봉작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
→ 왕세자빈(王世子嬪) → 왕비(王妃)
→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
전호 경사전(敬思殿)
존호 효숙정범(孝肅貞範)
휘호 경렬명헌(敬烈明獻)
시호 인선왕후(仁宣王后) }}}}}}}}}
1. 개요2. 생애
2.1. 봉림대군과의 혼인2.2. 왕비가 되다2.3. 현종 즉위 후2.4. 제2차 예송논쟁
3. 가계4. 무덤5. 여담6. 드라마에서의 인선왕후7. 참고 자료
7.1.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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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의 정실 왕비이자 현종의 어머니, 그리고 숙종의 친할머니이다.[8] 인조 인열왕후의 둘째 며느리이다.

1631년(인조 9년), 봉림대군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배우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9년간의 볼모 생활을 했으며 돌아온 후에 남편 봉림대군이 다음 후계자인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인조 27년), 왕위에 '효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조선 왕비들 가운데 유일하게 타국 생활을 해본 왕비이다. 물론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빈이 있었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조 소용에 의한 계략으로 시아버지 인조로부터 역모로 몰려 사사 되었기 때문에 왕비로서 외국을 경험한 왕비는 인선왕후 뿐이다.

2. 생애

2.1. 봉림대군과의 혼인

1618년(광해군 10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응곡리 안골(現 경기도 시흥시 장곡동 안골마을)에서 아버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와 어머니 영가부부인 안동 김씨[9] 사이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10] 어린 시절에는 외할머니 박씨에 의해 길러졌다. 1631년(인조 9년), 14세에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과 가례( 혼인)를 올려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9년 동안이나 심양에서 기거하였을 때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많이 뒷바라지를 하였고 그곳에서 훗날 현종(顯宗)이 되는 이연을 낳았다.

2.2. 왕비가 되다

이후 소현세자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나 9년만에 귀국하였으나 학질로 추정되는 병으로 급사독살로 의심되는 의문사한 후에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1645년(인조 23년) 9월 책봉되었고 장씨는 1646년(인조 24년) 3월 소현세자의 아내 강빈 역모로 사사된 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11] 1649년(인조 27년), 시아버지 인조 승하하고 세자인 봉림대군의 즉위로 왕비에 진봉되었으며 2년 후에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남편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2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반에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

2.3. 현종 즉위 후

1659년(효종 10년)에 효종은 재위 10년만에 의원 신가귀에게 머리에 난 종기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12] 사망했다. 아들 현종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으며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효숙왕대비(孝肅王大妃)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일찍 죽은 두 아들(대군), 현종, 그리고 일찍 죽은 딸 하나와 ' 숙신(淑愼) 숙안(淑安) 숙명(淑明) 숙휘(淑徽) 숙정(淑靜) 숙경(淑敬)'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는 6명의 공주를 두었다. 효종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는 안빈 이씨 소생의 숙녕옹주(淑寧翁主)가 유일한데, 인선왕후는 숙녕옹주에게도 선물을 주는 등 차별없이 잘 대해 주었다.

인선왕후는 딸들과 한글로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숙명공주 숙휘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의 일부가 신한첩에 수록되어 있다.

인선왕후는 살이 매우 많이 찌고 볼살이 많고 귀여운 체형이었다고 전해지며 남편 효종의 북벌 계획의 수행을 못 보고 1674년(현종 15년)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시호는 인선(仁宣), 인경(仁敬)[13], 선헌(宣獻)의 삼망 중에서 현종이 '인선'으로 낙점하여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되었다.

인선왕후는 죽기 2년 전부터 병으로 투병하였는데, 이 병의 원인은 시아버지 인조, 남편 효종 승하했을 때 너무 심하게 '곡(哭)'을 하는 바람에 얻은 병이라고 전해진다. 만년에는 온양온천에서 온천욕을 하며 병의 차도를 보았으나 그 뿐이었다. 거기에다가 뇌졸중이 겹쳐서 왼손을 아예 사용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년에는 안 그래도 살이 상당하던 왕대비가 오랜 투병 생활을 거치며 몸이 심하게 붓기까지 하자 관을 그에 맞춰서 넉넉한 크기로 만들었는데, 정작 죽고 나자 시신의 붓기가 크게 가라앉으며 크게 만든 관이 맞지 않게 되었고, 남은 공간을 비단과 솜으로 마저 채워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2.4. 제2차 예송논쟁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는 인조 계비로서 자신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었던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여전히 생존해 있던 상황이라 남편인 효종의 사망 이후 문제되었던 예론이 또다시 불거졌고, 결국 인선왕후의 승하는 제2차 예송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14]

3. 가계

  • 친정(덕수 장씨)
  • 배우자 / 자녀
    • 남편 : 효종(孝宗) 이호(李淏)
      • 장녀 : 숙신공주(淑愼公主)
      • 차녀 : 숙안공주(淑安公主)
        • 사위 :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 외손자 : 홍치상(洪致祥)
          • 외손자 : 홍태유(洪泰猷)
      • - : 대군 - 요절
      • 3녀 : 숙명공주(淑明公主)
        • 사위 :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 외손자 : 한성부 우윤(漢城府 右尹) 심정보(沈貞普)
          • 외손자 : 상의원 첨정(尙衣院 僉正) 심정협(沈貞協)
      • 장남 : 현종(顯宗) 이연(李棩)
      • 4녀 : 숙휘공주(淑徽公主)
        • 사위 :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
          • 외손자 : 정인상(鄭獜祥)
          • 외손자 : 정태일(鄭台一)
          • 외손녀 : 정씨
      • - : 공주 - 요절
      • - : 대군 - 요절
      • 5녀 : 숙정공주(淑靜公主)
        • 사위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
          • 외손자 : 정효선(鄭孝先)
          • 외손녀 : 부인 정씨(夫人 鄭氏)
      • 6녀 : 숙경공주(淑敬公主)
        • 사위 :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
          • 외손녀 : 원숙희(元淑喜) - 조졸
          • 양외손자 : 원명귀(元命龜)

4. 무덤

무덤은 남편 효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영릉(寧陵)에 동원상하릉의 형태로 안장되어 있다. 의릉을 포함하여 2개밖에 없는 특이한 형태의 왕릉이다.

5. 여담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효종 후궁 안빈 이씨가 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지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 의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무계(無階 : 품계가 없음)의 상태고 후궁보다 품계가 높아서[16] 생모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반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을 두고 효종 안빈 이씨에게 큰 벌을 내리려 하자, 인선왕후가 한사코 말려서 겨우 넘어간 일이 있었다.

효종과 인선왕후 내외가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는 자리가 있었는데 효종중전의 눈치를 보아 적자녀들에게만 선물을 주고, 서녀 숙녕옹주는 그냥 넘어갔는데 인선왕후가 따로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적서 차별없이 후궁 소생의 숙녕옹주도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 해 주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인선왕후 역시도 권세가의 딸이자, 성깔있는 며느리 명성왕후의 눈치를 봐서인지 아들인 현종이 후궁을 들이게 하는데는 도움을 거의 주지 못했다. 다만 중전 시절의 명성왕후 역시 시어머니 인선왕후의 눈치 역시 봐서 정사에 함부로 개입하지 못했고, 때문에 내명부 문제에서만 강경하게 나와서 후궁을 못 들이도록 한 것으로 해석된다.[17]

그리고 남편 효종과는 성종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외12촌의 인척 관계이다.[18]

6. 드라마에서의 인선왕후

인조 대를 배경으로 한 JTBC 사극 꽃들의 전쟁<2013>에서는 극중 배경이 삼전도의 치욕 ~ 효종 즉위 직후까지이기 때문에 비중이 매우 작은 봉림대군 부부인, 세자빈으로 나온다. 특별한 역할이나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세자빈이 되었을 때 조 귀인과 대립하지 않고 유순히 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며 극 막판에 모두가 조 귀인을 죽이자고 할 때 " 숭선군의 생모인데 죽이자는 것은 불쌍하다"는 대사를 했다. 동정심이 많은 캐릭터로 설정한 듯 하다. 배우는 이문정.

현종 대를 배경으로 한 MBC 사극 마의에서는 김혜선이 연기하며 현종의 어머니인 왕대비로 나오며, 중신들의 무서움을 알기에 전반적으로 중신들을 터치 안 하고 그들의 뜻을 따르자는 입장이라 아들과 충돌이 잦다. 그리고 사사건건 백광현에게 딴죽을 걸고 그저 천하다는 이유로 왕의 말도 다 씹어대며 왕실 사람들을 구한 건 무시하고 무조건 탓하기만 해서 시청자들에게 어그로를 끌었다. 나중에는 자신의 병을 고친 백광현에게 호의를 베푼다.

드물게 병자호란 ~ 효종 대를 배경으로 한 KBS 대하드라마 대명(1981)[19]에서는 세자빈 시절부터 그려지는데 원미경 씨가 열연하였다. 세자빈 시절부터 병자호란 강화도 피난, 심양의 볼모 시절, 귀국 후 왕비 시절 모두를 연기하였다.

7. 참고 자료

7.1. 참고 문서


[1] 장곡동 804번지에 생가터가 있는데, 매꼴마을동양덱스빌이 위치해 있다. # [2] 훗날 경희궁으로 바뀐다. [3] 덕수 장씨는 개성 개풍군 덕수리를 기반으로 하는 성씨이며, 그 시조는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들어온 위구르인 계열의 장순룡이다. [4] 김상용의 딸. [5] 정종의 14남 정석군의 후손.
정석군 → 이겸 → 원계채의 처 이씨 → 정유길의 처 원대은개 → 정말정 → 김상용 → 영가부부인
[6] 1637년 혹은 1638년 출생 [7] 1643년 혹은 1644년 출생 [8] 숙종이 한창 명랑하고 기억할거 다 하는 14살까지 살았음에도 숙종의 친할머니라는 인식은 거의 없는 편이다. 숙종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되려 그 숙종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그의 친할머니라고 보기 어려운 탓도 있지만... [9] 병자호란 당시 순절(殉切)한 김상용의 딸. [10] 장곡동은 도시 개발 직전까지는 장씨들이 많이 살았다. [11] 이 당시 얼마나 준비되지 않은 책봉이었는지 당시 임신 중이던 장씨가 미처 입궁하지 못하고 산실청도 없이 사가에서 왕손을 낳았는데 돌보아줄 의관도 제대로 배차되지 않아 난산으로 아이를 잃었다. [12] 효종의 얼굴에서 왼쪽 눈썹 위 이마쪽에 종기가 났는데 의원 신가귀가 수전증처럼 손을 떠느라, 침을 잘못 꽂아 종기 안에 있는 혈맥을 잘못 건드려 피가 솟구치듯 출혈하게 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은 결국 숨을 거뒀다고 한다. [13] 훗날 손자며느리가 이 시호를 가져간다. [14]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집권을 유지하지만 2차 예송논쟁에서는 1년상을 주장했던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집권은 즉위 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 왕권이 안정되었던 현종 서인 송시열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남인의 세력을 키워 조정을 균형 상태로 맞추기 위한 의도였다고 보는 해석이 많다. 기록을 보면 남인보다 현종 자체가 서인의 주장과 대립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예송 논쟁 항목 참고. [15] 《조선왕조실록》 현종 15년 6월 4일 정유 1번째기사 中 - "왕후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얼굴에 종기가 나 고생하고 있었다." [16] 대군이나 군, 공주나 옹주는 당시 권력있는 신하나 후궁보다 더 높은 0품(무계)의 존재기 때문에, 그들을 지칭할 때 ' 자가'라는 존칭을 붙여 높여주어야하는 것이 의무이자 관례였다. [17] 훗날 1674년 즈음에 비공식적으로 현종이 한 승은나인을 얻었고, 그녀를 후궁으로 책봉하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다만 그 직후 인선왕후가 승하하는 바람에 후궁 책봉이 미뤄졌고, 현종 역시 6개월여 후 승하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만다. 그 후 해당 나인은 어찌어찌 보호를 받다가 훗날 명성왕후가 일으킨 삼복의 옥에 얽혀 죽었다고 한다. [18] 효종은 성종의 적2남 중종의 6대손, 인선왕후는 성종의 서7남 경명군의 외6대손이다. 인선왕후의 외5대조인 김생해가 경명군의 사위였다. [19] 1981년 사극치고는 야외 촬영이 많았고, 전투 장면이 많았던 사극이었다. 효종으로 김흥기 씨가 열연하였다. 소현세자 백윤식, 민회빈 강씨 역에 김영철 씨의 부인인 이문희, 인조 역에 김동훈, 임경업 역에 백일섭, 김자점 역에 김순철 씨가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