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7:13:09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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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 昭憲王后
파일:세종영릉.jpg
영릉 능침
출생 1395년 10월 20일( 음력 9월 28일)
조선 경기도 양주목 심온 사저
(現 경기도 양주시)
사망 1446년 4월 28일( 음력 3월 24일)
(향년 50세)
조선 서부 황화방 정동 명례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능묘 영릉(英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18년 7월 20일 ~ 1418년 9월 18일
조선 왕비
1418년 9월 18일 ~ 1446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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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청송 심씨
부모 부친 청천부원군 심온
(靑川府院君 沈溫, 1375 ~ 1418)
모친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
(三韓國大夫人 順興 安氏, ? ~ 1444)
형제자매
5남 6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여동생 - 강석덕(姜碩德)의 처(1397 ~ ?)[1]
여동생 - 노물재(盧物栽)의 처(1399 ~ ?)[2]
여동생 - 류자해(柳子偕)의 처(1401 ~ ?)[3]
남동생 - 심준(沈濬, 1405 ~ 1448)[4]
여동생 - 이숭지(李崇之)의 처(1406 ~ ?)
여동생 - 박거소(朴去疎)의 처(1413 ~ ?)[5]
남동생 - 심회(沈澮, 1418 ~ 1493)
남동생 - 심결(沈決, 1419 ~ 1470)
이복 남동생 - 심장수(沈長壽, 1408 ~ ?)
이복 남동생 - 심장기(沈長己, 1409 ~ ?)
배우자 세종 (1408년 혼인)
자녀
슬하 8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 ~ 1424)
장남 - 문종(文宗, 1414 ~ 1452)
차녀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 ~ 1477)
차남 - 세조(世祖, 1417 ~ 1468)[6]
3남 -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 ~ 1453)
4남 -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 ~ 1469)
5남 -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 ~ 1444)
6남 -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 ~ 1457)
7남 -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 ~ 1445)
8남 -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 ~ 1467)
종교 불교
봉작 경숙옹주(敬淑翁主)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 경빈(敬嬪) → 검비(儉妃)
→ 공비(恭妃) → 왕비(王妃)
전호 휘덕전(輝德殿)
휘호 선인제성(宣仁齊聖)
시호 소헌왕후(昭憲王后)[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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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2.1. 충녕대군과의 혼인2.2. 왕비가 되다2.3.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되다2.4. 그 이후
3. 가계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관련문서

[clearfix]

1. 소개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대왕 왕비. 문종 세조, 안평대군 세종대왕의 8남 2녀의 어머니이자 단종, 예종, 덕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청송 심씨로 개국공신 심덕부의 손녀이며, 청천부원군 심온의 큰딸이다. 태조의 딸 경선공주에게 시조카가 된다.[8]

2. 생애

2.1. 충녕대군과의 혼인

세종보다는 2살 연상으로[9], 1408년(태종 8년), 태종의 3남 충녕대군 혼인하여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의 동생 심종과 혼인한 태종의 여동생 경선공주가 시조카인 소헌왕후를 충녕대군의 배필로 추천했다고 한다.

2.2. 왕비가 되다

이후 1417년(태종 17년), 경숙옹주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당시 세자이던 양녕대군 망나니 비슷한 짓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버지인 태종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내쫓고 충녕대군 왕세자로 삼았다. 덩달아 심씨도 세자빈이 되어서 경빈(敬嬪)으로 봉해졌고 곧 왕비가 되었다.

본래 세종대왕이 즉위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검비'(儉妃)라고 호칭을 지어 주었으나, 시아버지 태종은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공비'(恭妃)라고 고쳤고 그래서 세종실록 초반부에는 '공비'라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왕이 왕비에게 비호를 지어주는 관습은 1432년(세종 14년)에 공식적으로 사라졌다.[10]

2.3. 시아버지에 의해 친정이 숙청되다

세종이 왕이 되고,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심온 영의정이 되었다. 그런데 심온이 영의정에 부임한 건 태종 본인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대해선 보통은 태종이 심온을 숙청하기 위한 사전 위장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외척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태종은 강상인의 옥에 심온을 연루시켰다.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주상인 세종에게만 보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에 대해 "상왕(태종)을 모욕했으며 왕명 없이 함부로 군을 움직였다"는 누명을 씌우고 여기에 심온까지 연결시켰다. 사은사로 세종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러 갔던 심온은 국경을 넘어 평안도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결국 사약을 받았다. 이때 심온 숙청에는 심온과 정치적 라이벌인 박은이 실무적인 주도를 하였는데, 심온이 형을 받기 전 " 반남 박씨 집안과 혼인하지 마라!"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때문에서인지 심온의 가문 박은의 가문과 사돈을 맺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11]

또한 이때 비단 심온뿐만 아니라 심온의 형제와 다른 자식들까지 죄다 귀양을 갔고, 그나마 자신의 비인 원경왕후의 남동생들( 처남)만 처형시켰던 것과 달리 심온의 아내와 자식들은 다행히 살아났지만, 대신 변방의 관노로 전락하거나 관로가 막히는 등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났다. 이들은 태종이 1422년(세종 4년)에 사망한 뒤에야 사면되었다.[12] 참고로 심온의 아내, 즉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죽은 해는 세종 26년인 1444년이다.

이때 숙청을 진행한 박은과 유정현 등은 역적의 딸이라 하며 소헌왕후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태종 사후에 소헌왕후가 보복을 행할 것을 두려워한 이유도 있을 것이고, 심온 숙청 직후 태종이 세종에게 이미 아들 셋이 있지만 더 많을 수록 좋다고 하자[13] 박은 등은 태종이 소헌왕후를 폐하고 애 잘 낳는 새 왕비를 들이자는 식으로 돌려서 해석한 것 같기도 하다. 유정현이 즉시 이에 영합하며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嬪)과 잉첩(媵妾)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고 태종도 자신이 직접 세종에게 청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즉시 의금부가 호응하여 소헌왕후를 폐하자고 청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 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심씨는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못한 것 같다."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쳤고, 세종에게도 "죄인의 딸인 까닭으로 외인이 반드시 이를 의심하지마는, 그러나 이것이 어찌 법관(法官)이 마땅히 청할 바이겠느냐."라고 말하며 안심시켰다.

이에 조말생, 원숙, 장윤화가 "만약 형률로써 논하오면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그러나 주상의 처지에서 논한다면, 심온은 곧 부왕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써 중궁에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겠습니까. 은정을 끊어 후세에 법을 남겨두시기를 청합니다."라고 청했으나 씹혔고 박은이 역적의 딸을 중궁으로 들 수 없다고 여론을 조성하고 다녔다. 이에 태종은 유정현, 허조, 허지와 의정부 당상관들을 불러 "《경》(서경 書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閔氏)의 일도 또한 불충(不忠)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내가 전일에 가례색(嘉禮色)을 세우라고 명한 것은 빈(嬪)과 잉첩(媵妾)을 뽑으려고 한 것뿐이다."라고 하며 세종의 후궁을 들이자고 하던 자신의 이전 명령은 소헌왕후를 겨냥한게 아니라고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태종의 심중을 이해한 박은이 "신 등도 또한 금지 옥엽(金枝玉葉)이 이와 같이 번성하오니, 왕비를 폐하고 새로 세우고 하는 일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빈과 잉첩을 갖추게 하고자 함이 심히 마땅합니다."라고 태세 전환을 시전했다. 이후 11월 28일, 태종은 영돈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서 허조, 지신사 하연을 불러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后妃)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刑律)에도 연좌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恭妃)에게 밥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라고 소헌왕후를 보호할 뜻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신하들은 "상교(上敎)가 진실로 마땅합니다."라고 하며 이후 소헌왕후 폐출론은 사그라들게 된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미 심씨 가문의 숙청은 완료되었고, 소헌왕후가 딱히 야심을 내보이거나 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굳이 아들 잘 낳는 며느리까지 쫓아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14][15] 애초에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고 단행한 숙청인데 왕비까지 폐출해버리면 새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러면 새로운 외척이 등장할 가능성이 열리니 인간적 감정을 떠나 정치적으로 봐도 손해다.

2.4. 그 이후

이후로는 조용히 내명부를 통솔하다가 세자의 정실(세자빈) 휘빈 김씨의 미신 사건, 순빈 봉씨의 말도 안되는 사건이 연달아 터지자 두 세자빈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실록에는 "자애로우면서도 기강이 엄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8년( 1426) 한양에 큰 불이 났을 때에는 당시 ' 강무(講武)'라고 하는 사냥 겸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지방으로 떠난 세종과 세자를 대신하여 화재를 직접 지휘하여 진압하였는데 1,000가구가 넘는 집을 태울 정도로 규모가 큰 화재였다. 소헌왕후는 당시 금성대군을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현장을 지휘하였는데, 그래서 황희는 통상적인 보고절차를 무시하고 소헌왕후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사실 세종은 강무를 나가는 무렵이면 신하들에게 "내가 없는데 일이 생기면 반드시 중전에게 보고하고 중전의 명령을 필히 따르라"고 지시할 정도로 소헌왕후를 신뢰하였다.

참고로 강무를 단순한 놀이로 보면 안 되는데, 조선 시대 왕의 사냥은 왕이 친히 지켜보는 군사훈련도 겸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사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귀찮다고 투덜거린 적도 있으며, 사냥을 좋아했던 부왕 태종 상왕으로 살아 있을 때는 태종이 반억지로 끌고 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6] 강무는 공식적으로 군사훈련이며, 훈련 중 활을 쏘아 잡은 짐승을 종묘와 같은 제사용 육고기로 사용하거나 많이 잡히면 신하들에게 나누어 줬다. 군사훈련을 하는데 당연히 솜씨도 봐야 했고. 태종은 정말 사냥을 좋아해서 강무 핑계로 여러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서 생긴 오해다.

말년에 소헌왕후는 질병에 시달렸다.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1달 간격으로 잇따라 사망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병세 때문에 자주 피접을 나갔다가, 평원대군이 죽고 1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에 이질 때문에 향년 52세로 차남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눈을 감았다. 수양대군도 어머니 소헌왕후에게 효자로서 갖은 효도를 다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둘째 며느리인 정희왕후도 시어머니 소헌왕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특히 부부인(府夫人)[17] 시절 정희왕후가 장남인 도원군을 출산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소헌왕후가 관례를 깨고 경복궁으로 직접 불러들여 경복궁에서 출산하도록 조치하였다.

3. 가계

  • 친정
    • 아버지 :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
    • 어머니 :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府人 安氏)
      • 1남 :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심준(沈濬)
      • 2남 : 영의정 청송부원군(領議政 靑松府院君) 심회(沈澮)
      • 3남 : 영중추원사 정이공(領中樞院事 靖夷公) 심결(沈決)
  • 배우자 / 자녀
    • 남편 :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裪)
      • 1녀 : 정소공주(貞昭公主)
      • 1남 : 문종대왕(文宗大王) 이향(李珦)
      • 2녀 : 정의공주(貞懿公主)
        • 사위 :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 2남 : 세조대왕(世祖大王) 이유(李瑈)
      • 3남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 며느리 : 부부인 정씨(府夫人 鄭氏)
          • 손자 :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
          • 손자 : 덕양군(德陽君) 이우량(李友諒)
      • 4남 :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
        • 며느리 : 부부인 남씨(府夫人 南氏)
        • 며느리 : 제안부부인 최씨(齊安府夫人 崔氏)
          • 손자 : 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
          • 손자 : 귀성군(龜成君) 이준(李浚)
          • 손자 : 정양군(定陽君) 이순(李淳)
          • 손자 : 환성군(歡城君) 이징(李澄)
          • 손녀 : 중모현주(中牟縣主)[18]
          • 손녀 : 청하현주(淸河縣主)
        • 며느리 : 부부인 안씨(府夫人 安氏)
          • 손자 : 영양군(英陽君) 이함(李涵)
          • 손자 : 단계부정(丹溪副正) 이인(李潾)
          • 손자 : 윤산군(輪山君) 이탁(李濯)
          • 손자 : 옥천군(玉泉君) 이옥(李沃)
      • 5남 :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
        • 며느리 : 영가부부인 신씨(永嘉府夫人 申氏)
          • 손자 :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 6남 :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 며느리 : 완산부부인 최씨(完山府夫人 崔氏)
          • 손자 : 화원군(花原君) 이맹한(李孟漢)
        • 며느리 : 부부인 윤씨(府夫人 尹氏)
          • 손자 : 함원군(咸原君) 이동(李銅)
          • 양손자 : 춘성군(春城君) 이당(李譡)
      • 7남 :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
        • 며느리 : 강녕부부인 홍씨(江寧府夫人 洪氏)
      • 8남 :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
        • 며느리 : 대방부부인 송씨(帶方府夫人 宋氏)
          • 손녀 : 길안현주(吉安縣主)[19]
        • 며느리 : 연성부부인 김씨(延城府夫人 金氏)
          • 손자 : 청풍군(淸風君) 이원(李源)

4. 평가

세종대왕 조선 시대 내내 이상적인 성군의 대표격으로 꼽혔듯이[20], 소헌왕후 역시 조선시대 내내 사상 최고의 왕비로 칭송받았다.

소헌왕후가 이끌던 내명부 조선 시대 통틀어도 가장 안정적이었다. 특히나 세종 때에는 내명부에 후궁이 많은 편이었다. 그 중 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고 전해지는 신빈 김씨는 자녀를 8명이나 낳았는데, 소헌왕후는 김씨와 별다른 잡음 없이 지냈고 오히려 차남 수양대군과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양육까지 김씨에게 맡길 정도였다고 한다. 후궁들을 잘 이끌고 큰 문제없이 내명부를 통솔한 것만 봐도, 소헌왕후가 얼마나 왕비로서 역할에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세자빈들 사건이 있긴 했으나, 이후의 훨씬 다사다난한 조선의 내명부 역사[21]를 생각하면, 세종 때의 내명부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다. 앞서 언급된 세자빈들의 불미스런 사건은 소헌왕후는 물론 세종조차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며느리들이 막장이었을 뿐이므로, 소헌왕후의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

남편과 자녀들(8남 2녀)을 상당히 잘 둔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세종대왕은 능력 있는 남편이고 부부 간에 금슬도 좋기는 했지만, 후궁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속앓이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세종의 자식 20여 명 중 10명이 소헌왕후 소생인 걸 보면, 세종대왕이 어쨌든 소헌왕후를 아꼈음은 사실인 듯하다. 앞서 보았듯이 심온 사건과 그 이후의 일로 나름의 죄책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비례해서 다른 쪽으로 잘해주려고 했을지도.

또한 장남은 문종, 차남은 세조, 3남은 안평대군 등등 화려하다. 두 딸 정소공주 정의공주 역시 총명하였으며, 자세한 가족관계는 세종(조선)/가족 관계를 참조.

세종 또한 왕비의 아버지를 숙청하는 등의 죄책감도 있었기에 소헌왕후를 극진히 대했으며, 소헌왕후는 역대 조선의 왕비 중 왕과의 사이에서 2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왕비[22]이기도 하다. (총 8남 2녀)

조선 왕실에서 적자를 가장 많이 낳은 왕이 태조와 세종인데(둘 다 8명), 태조는 2명의 왕비에게서 낳았으나 세종은 오직 소헌왕후 1명에게서만 8명을 낳았다. 다른 왕들은 적자가 많아야 4명(태종, 인조)일 정도인 걸 생각하면 압도적인 수준이다. 특히 인조 후로는 적자가 없거나(숙종[23], 경종, 영조, 정조, 헌종, 철종, 순종) 1명(효종, 현종, 순조, 고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왕비가 아들을 많이 낳은 것이, 내명부가 안정적이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통성 있는 대군이 8명이나 있으니, 한둘 정도 문제가 생기더라도[24] 큰 문제가 없었던 것. 후궁들도 감히 왕위계승에 끼어들 수 없었으므로 자중했을 것이다. 세종이 처음으로 후궁 소생 왕자를 얻은 게 세종 7년(1425)인데, 이 시점에서 소헌왕후 소생 왕자만 5명(문종, 수양대군(이후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이었고 금성대군을 임신 중이었다. 문종이 1414년생으로 서자들 중에선 가장 나이가 많은 1425년생 화의군보다도 11살이 많았으니, 서자들이 커서 뭘 해보려고 해도 그땐 이미 왕세자인 문종의 입지가 단단히 다져지고 난 뒤이다. 애초에 문종은 화의군이 태어나기도 전인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됐고, 적장자 + 세자 + 대리청정의 과정을 모두 밟은 데다 본인의 능력도 뛰어났던지라 권위가 매우 막강했고, 동복 동생들인 세조나 안평대군 등도 문종 생전에는 찍소리도 못했다. 적자 출신에 나이 차이도 그나마 적은 왕자들도 저러니, 나이 차이도 많고 서자 출신인 왕자들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낳다 보니,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애의 중요한 순간을 임산부의 몸으로 맞은 경우가 많았다. 왕비 즉위식 때는 안평대군이 태어나기 1달 전이었고, 친정아버지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는 4남 임영대군 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한성 대화재 진압을 지휘할 당시에는 금성대군이 태어나기 약 1달 전이었다.

소헌왕후는 본인 다음으로 많은 소생을 둔 신빈 김씨와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김씨는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낳은 직후에는 수양대군 유모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빈의 소생들은 수양대군과 친했으며, 뒷날 세조는 신빈과 그 소생의 이복 아우들을 자신의 가족들처럼 정말 극진히 대해 주었다.

5. 기타

  •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소헌왕후가 오래 살아서 손자 단종의 치세 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 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계유정난은 어린 단종 대신 수렴청정할 왕실의 여성 어른들의 부재로 정승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사이 집현전 학사들과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분열된 틈을 노려 일으켜 성공한 정변이다.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명분도 없고 단종 지지 세력이 분열될 일도 없어 세력이 가장 약한 축인 세조는 반란을 통한 찬탈은 커녕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정치적 시각이 아닌 가족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세조는 어머니가 뻔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친동생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끝내 죽이는 등의 패륜을 감히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소헌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 단종을 상대로 칼을 겨누는 건 소헌왕후를 향해 겨눈 것과 같으므로 대번에 명분이 붕괴된다. 조선의 정치적 이념이었던 유교에서 혀가 닳도록 강조하는 오륜 중에서도 가장 앞섰던 것이 충과 효다.[25] 반역죄가 아닌 이상 자식이 부모를 고발할 수 없었을 정도로[26] 효를 중시했던 조선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신데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동생과 조카를 죽인다면 이것은 자폭밖에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소헌왕후는 조선 최고의 왕비라고 칭송까지 받던 사람이니 만큼 이런 상황에서 난을 일으킨다는 것은 설령 성공한다 치더라도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다는 소리다. 소헌왕후가 자기 아들이 자신의 장손자를 쫓아내겠다는데 정상적인 어머니라면 편을 들 리가 없다. 무엇보다 문종이 동생들부터 시작해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줄초상을 치르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더 살았다고 가정할 때 문종의 수명 연장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소헌왕후의 생존도 생존이지만 문종이 아들 단종이 장성할 때까지만 더 오래 살았어도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사라진다.
昭憲王后之病也, 欲嘗沙糖, 後人有進之者, 上見之流涕, 薦之輝德殿。소헌왕후가 병환이 났을 적에 사탕을 맛보려고 하였는데, 후일에 어떤 사람이 이를 올리는 이가 있으니, 임금이 이를 보시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휘덕전에 바치었다.
  • 생전에 설탕을 좋아해서 와병 중인 상태에서도 설탕을 먹고 싶어했는데, 후에 장남 문종이 설탕을 얻자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의 영전(靈殿)에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종실록 13권, 문종 2년 5월 14일의 문종의 사망을 기록한 내용에 적혀있다. 설탕은 사탕수수와 사탕무에서 얻는데, 사탕수수가 열대작물인지라 조선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고, 사탕무는 전래되지도 않을뿐더러, 아직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방법이 개발되기 이전이기에 설탕은 모두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왕비인 소헌왕후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것. 고대에는 설탕, 계피, 후추, 얼음은 오늘날로 치면 캐비어나 송로버섯에 비유될 정도였기에 왕이 신하에게 넷 중 하나를 하사하면 굉장한 성은이었다.
  • 일생 동안 가족의 비극을 많이 겪었다. 자신이 왕비가 되던 해, 시아버지 태종의 주도로 아버지 심온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했다가 사위에게 복권된 뒤 세상을 떠났다. 또한 자식을 셋이나 떠나보냈다. 조선시대에는 낳자마자 자식이 이름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는 흔했으나, 소헌왕후의 경우 성장한 자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소헌왕후가 30대가 되고 나서 첫째아이인 정소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50대가 되었던 1444년~1445년에는 어머니 안씨, 5남 광평대군, 7남 평원대군이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이 충격에 소헌왕후의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큰며느리 현덕왕후 권씨는 원손을 낳고 하루 만에 요절하였다. 이러한 불행한 가족사에 소헌왕후 본인도 힘들어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불교에 많이 의지했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사후에 태종시대에 벌어졌던 것보다 더한 가족의 비극이 많이 일어났다. 외척만 제거했던 태종에 비해, 소헌왕후의 자식이자 태종의 손자인 세조는 동복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게다가 세조는 서모인 혜빈 양씨도 죽여버렸으며, 형수 현덕왕후와 형 문종에 대해서도 불경을 저지르는 패륜아 중의 패륜아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남편 세종과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는 가족복은 정말 없는 편이긴 했다.

6. 대중매체에서

정희왕후, 인수대비, 문정왕후처럼 커리어우먼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조용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전통적인 여인상에 가까운 왕비라서인지 대중매체에서는 남편 세종이 조명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편이다. 남편이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에 시아버지에 의해 친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부군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등 현모양처에 가까운 모습으로 나온다.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 - 임서연[28]
    역사적 이미지 그대로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인상을 잘 표현해냈으며 배우 본인부터 대단히 유약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후반부 상왕 태종의 외척 제거 정책에 의해 친정이 작살나[29] 그 정신적 충격에 몸져눕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로 어울렸던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본격적으로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자 내조의 여왕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집현전 학사들이 여름에 고생하자 얼음 식혜를 보내주기도 하고 어찌보면 자신의 원수와도 같은 태종에게도 그래도 시아버지라고 잘 모시는 착한 심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친정을 풍비박산낸 박은에게 세종이 자비를 베풀자[30] 본능적으로 반대하기는 하지만 세종의 뜻을 따라주며 대인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31]
  • 2008년 KBS 드라마 < 대왕 세종> - 이윤지 (아역 : 남지현)
    남편의 왕자 시절 단순 내조를 넘어 따끔하게 지적을 하거나 남편의 일을 함께 돕는 등 깨우침을 주는 반려자로 그려진다. 충녕대군이 대군 시절 왕재로서 부각될 때는 시어머니 원경왕후, 손윗동서인 양녕대군 부인(세자빈)의 압박과 경고를 뒤에서 견디는 모습이 자주 비춰진다. 충녕대군의 즉위와 심씨 가문 숙청부터 남편 세종과 갈등하는 장면도 나오고 친정이나 자식을 잃었을 때의 슬픔도 표현되는 등 인간적으로 조명되기도 했다.[32] 이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상당한 애처가로 그려지며 외척의 발호를 매우 경계한 부친 태종으로부터 아내의 폐비를 막기 위해 세종이 여러 명의 후궁을 들이는 것으로 나온다.[33] 초궁장을 데리러 온 강상인에게 직접 맞서기도 하고 천문 연구 기록을 찾는 명나라 사신에게 단호하게 경고하기도 하는 등 강인하고 지혜로운 모습도 보여준다. 후반부에는 조용히 세종을 내조하며 훈민정음 창제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 마지막회에서는 수양대군을 데리고 명나라까지 가서 정통제에게 의복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왔다. 이후 세종보다 일찍 죽었는지 정통제로부터 "소헌왕후를 기리기 위해 한글창제를 허락하겠다."는 사신이 온다.
  • 2011년 SBS 드라마 < 뿌리깊은 나무> - 장지은
    초반부에 심온 집안 옥사와 관련해서 등장했으며 소이를 데려다 거둔 것도 소헌왕후로 묘사된다.
  • 2022년 KBS 드라마 < 태종 이방원> - 김비주
    작중 주인공은 태종인지라 비중 자체가 크진 않지만 세종과 단란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의외로 세종이 형인 양녕에 대한 불신으로 용상에 대한 욕심을 내는 것은 달갑지 않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 유오디아 작가의 소설 <조선후궁실록>의 외전 정난기연에서는 여주인공 이화진과 친구 사이였다고 나온다. 남편 세종과 사이는 좋지만 친정이 멸문되었을 때 남편이 곁에 없었던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한다. 소녀 시절에 이화진과 우정의 증표로 목걸이를 나눠가졌는데 이 목걸이는 각자 영응대군과 이화진의 친구 김지현에게 전해지면서 중단편 소설 <대군의 연인>의 발단이 된다.

7. 관련문서


[1] 강희안(姜希顔) , 강희맹(姜希孟)의 어머니. [2] 영의정 노사신의 어머니. [3] 영의정 류순정의 조모. [4] 민무휼의 사위. [5] 아들이 박중선(朴仲善)으로, 영의정 박원종의 조모이자 윤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외증조모. [6] 작호는 수양대군(首陽大君). [7] 시호(諡號)로 올라온 삼망(三望, 후보 3가지)는 소헌(昭憲), 효순(孝順), 효선(孝宣)이었으며, 세종이 소헌(昭憲)에 낙점하여 소헌왕후가 되었다. [8] 조선 동성동본 간의 혼인도 터부시될 정도로 부계 근친에 민감했지만, 인척 관계는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9] 시부모인 태종 원경왕후 부부 또한 왕후가 2살 연상이다. [10] 후궁 항목을 참고. [11] 심온의 후손들은 안효공 심온을 파조로 삼아 청송 심씨 안효공파를 이루고 있다. 당연히 파조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심온의 옥사를 빠트릴 수가 없으니, 은연 중에 반남 박씨에 대한 반감이 생길 것이다. [12] 다만, 심온만은 세종 다음의 문종 대에야 복권될 수 있었다. [13] 소헌왕후가 자리를 지킨 것은 아들을 많이 낳은 덕분도 있을 것이다. 소헌왕후가 폐비되면 그녀가 낳은 대군들의 입지 역시 위태로워질 뿐더러, 훗날 계비가 왕자라도 낳는다면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아도 광해군 영창대군 급의 피바람이 부는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14] 물론 심온 역시 딱히 야심을 내보이는 행위를 보인 적이 없기에 억울한 죽음이긴 하다. 심지어 외척이라 숙청당했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양녕이 세자일 시절 장인이었던 김한로는 숙청당하지 않았는데 태종과 과거합격 동기로 친한 사이여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은 외척으로써 세도를 부릴만한 권력이나 재력이 부족한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15] 문제는 심온 입장에서나 억울하지, 청송 심씨 가문은 심온 문서에서 보듯 태종 이방원뿐 아니라 태조 이성계도 견제해야 했을 정도의 위세를 갖춘 가문이었고 심온의 동생들의 처사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16] 너무 운동을 안 해서 건강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실제로도 사냥이나 격구를 좋아하던 정종, 태종과는 달리 세종은 사냥도 격구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나마 젊을 적에나 격구를 좀 했다. 그것도 말을 타고 하는 것이 아닌 걸어다니면서 하는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17] 대군의 정실에게 내려지는 종2품 외명부 작위 [18] 딸이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이고 손녀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이다. [19] 아들이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와 결혼한다. [20] 조선 시대 신하들이 왕들에게 했던 얘기가 " 세종대왕 성종대왕 좀 본받으십시오!" 였다. 심지어 함께 성군으로 꼽히던 성종조차 세종대왕을 본받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21] 특히 성종 때나 숙종 때를 보자 [22] 역대 조선의 왕비 중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비는 아이러니하게도 남편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던 태종의 왕비이자 소헌왕후의 시어머니 원경왕후이다. 원경왕후가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양녕대군에 앞서 세 아들을 더 낳았고 성녕대군 이후 늦은 나이에 아들 하나를 더 낳았었다. 다만 넷 모두 요절해서 별로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8남 4녀를 낳았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상왕으로 물러 앉은 태종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남긴 말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 2월 3일 기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23]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는 잠시 왕비가 되긴 했으나, 경종을 낳을 때는 후궁이었고 죽을 때는 후궁 신분이었다. 어차피 숙종의 적자가 없어서 별 의미는 없지만. [24] 실제로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은 소헌왕후보다도 먼저 죽었다. [25] 둘 중에서 더 앞에 내세운건 충이 아니라 효다. 헌데 이 구분도 딱히 필요는 없는게 소헌왕후와 세조의 관계는 사적으로는 모자관계지만 공적으로 보면 군신관계이기도 한 만큼 세조가 소헌왕후의 목에 칼을 들이민다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불충한 반역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26] 자식이 반역죄가 아닌 이유로 부모를 고발하면 설령 부모가 진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은 강상죄로 사형을 받는다. 조선에서 강상죄는 역모죄 다음으로 무거운 죄다. [27] 당시 왕인 세종과 왕세자인 문종 강무(왕이 친람하는 사냥 겸 군사훈련) 참석차 서울을 떠나 있어서 본인이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 [28] 본명은 '도지원'이었으나 현재 이름으로 개명했다. 다만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작품 자체가 연기력이 엄청난 배우들이 득시글하다보니 비교가 되는 모양. [29] 태종이 나오자 애절하게 울며 심온을 살려 달라고 비는데, 태종은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중전에게 돌아가라 말한 후 발길을 옮기는데 이 때 통곡을 하며 태종에게 비는 것이 안타깝게 보인다. 그러나, 태종 자신도 외척 말살로 피를 계속 보는 것이 질렸기 때문에 중전을 절대 폐할 수 없다는 의견을 여러 번 내비쳤다. 중전은 자리보전하고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30] 몸져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의를 보내고 직접 병문안을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31] 병석에 있던 박은은 이 소식을 듣고 "왕과 왕비께서 정말 (그릇이) 크신 분들"이라며 탄복했다. 그리고 세종과 중전이 한이 클 것이라고 하고 자신이 심온 대감을 죽게 하였다며 죄책감을 드러냈고 망극하옵니다. 라는 말을 여러 번 남긴다. [32] 부친 심온을 구하려 명나라에 사람을 보낸다는 창작 설정이 덧붙여졌는데 이 부친 도피 시도가 들켜 대신들이 폐비 주청을 올린다는 전개. 딸 정소공주의 요절을 계기로 세종과 화해하는데 이 때 "자신이 시아버지를 너무 원망해 벌을 받았다"며 노비가 된 모친 앞에서 "힘든 남편 원망하고 병들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시아버지 뒤에서 욕해서 하늘이 벌을 내려 내 딸이 죽었으니 내가 죽인 것이다"라고 미친듯이 울며 자책하는 모습이 나온다. [33] 후궁을 여럿 들이는 이유를 세종이 설명했을 때 소헌왕후는 "이해할 수 없다. 차라리 폐비를 시켜달라"는 대답을 한다. [34] 배우 전미선 최후의 유작이다.